2011 봄, 콜레기움 들뢰즈의 『시네마』드디어~!

4월9일 토요일에 시작 됩니다.


콜레기움 반장 꾸냥과 주몽이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의 들뢰즈~ 변성찬 선생님을 모시고 인터뷰를 해 보았습니다.



사진. 인터뷰 / 꾸냥, 주몽 

                                                                                           

 

꾸냥, 주몽(이하 꾸,주) : 콜레기움이 어떤 형식으로 진행되는 지 궁금합니다! 강사가 강의를 주도하나요? 아니면? 연구실에서 하는 세미나처럼 진행되나요?

변성찬 선생님(이하 변쌤) : 콜레기움의 기본형식이 세미나에 가까운 거지만 이번 시네마는 강의가 중심이라고 일단 생각하면 된다. 짧은 시간에 분량도 좀 많고, 압축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강의를 중심으로 할 생각이다. 강의가 한 발 앞서 나가고, 가령 2회차 때 읽고 발제할 부분을 1회 차 때 미리 강의를 하고, 텍스트 읽고 강의를 하는 것이 일종의 안내의 개념이 되고, 그걸 바탕으로 해서 텍스트를 발제하는 게 복습이 되는 그런 방식으로 진행할 생각이다.


 

꾸,주 :『시네마』읽을 때 베르그송과 퍼스를 같이 읽는 게 특이한 것 같아요. 어떻게 연결시켜서 읽는 건가요?

변쌤 : 개인적 경험으로 보면 그게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시네마』는 영화와 베르그송의 지속 또는 이미지의 철학, 퍼스의 기호론, 이 세 가지가 종합되어 있는 책이다. 『시네마』를 펼쳐보면 알지만, 1, 2권 각각 두 번에 걸쳐서 챕터 제목이 아예 베르그송에 대한 주석으로 되어 있다. 그 주석달기의 방식이 친절한 설명이라기보다는 들뢰즈에게는 일종의 재창조를 의미하기 때문에 차라리 주석을 달고 있는 특히, 베르그송 같은 경우는 개념이나 문제의식을 차라리 소화를 하고 나서 들어가는 게 부담은 되지만, 오히려 더 지름길이다. 안내문에 나간 것처럼 꼭 필요한 부분들을 선택해서 먼저 읽고 들어가려고 한다. 한마디로, 그거 안보고 어떻게 해볼까 하고 하면 더 고생한다.


 

꾸,주 : 들뢰즈의 저작들, 특히 『시네마』, 어렵고 난해하기로 유명한데요, 선생님이 들뢰즈의 저작들을 공부하게 된 계기와 들뢰즈 공부를 계속해나가는 이유는 뭔가요?

변쌤 : 나한테는 『시네마』를 읽어야 될 필요성과 들뢰즈를 읽어야 할 필요성이 동시적인 것이었는데, 우연적인 거고, 더 솔직히 말하면 반강제적이었던 거고, 심지어는 매체에다가 글로 쓰기도 했지만, 출판사에서 리라이팅이라는 기획이 나왔고 필자를 구하던 중 연구실에서 영화와 관련된 책 중 “뭐하나 해라!”는 이진경`고미숙의 요구가 있었고, 그 당시만 해도 시간-이미지가 번역이 안 되어 있는 상태였었는데, 그래서 하기 힘들다 그랬더니, 옆에서 '영어 강사'니까 원서 보고 쓰라고 부추겼다. 그런데, 그렇게『시네마』를 보면서 오히려 내 공부의 중심이 바뀌어 버렸다. 공부를 하다 보니 영화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들뢰즈에 더 매력을 느끼고 가까워지는, 그래서 그게 무려 8년 세월인데... 아, 이런 건 쓰지마!!! (일동 웃음 ㅋㅋ)


 

변쌤 : 들뢰즈 공부를 왜 계속하냐 그러면, 진짜 알고 싶어서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자연철학적인 예술철학적인 측면, 직접적으로 『시네마』와 관련해서 들뢰즈가 갖고 있던 비평개념자체가 마음에 들고 내 스타일에 맞았다. 뭐냐하면, 어떤 작품을 비평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척도를 가지고 등급을 매긴다거나 이런 게 아니다. (많이들 그렇게 알고 있지만 말이다.) 비평은 창조라는 게 핵심개념인데, 어떤 예술적 작품으로부터 촉발 받은 것을 토대로 자기 사유를 하고, 창조를 하는 것, 뭔가 거기에 그런 의미에서 텍스트 자체를 어떤 의미에서는 변용시키는 과정일 수도 있고, 들뢰즈에게 있어 창작과 비평은 그렇게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지 않다. 철학하는 것 자체도 늘 개념의 창안이라고 하지만, 그런 그 비평개념, 이런 것이 개인적으로 내가 갖고 있는 비평적인 태도와 잘 맞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시네마』와 들뢰즈의 시각을 통해서, 모든 사유나 철학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거지만,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창작의 측면에서는 진정으로 뭔가 새롭게 창작한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새로운 비젼 같은 것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영화를 중심으로 예술작품을 수용하거나 비평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그 작품에서 기존에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시각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중심적인 담론 틀에서는 비가시적인 거였거나 보이지 않았던 의미, 이런 것들을 다시 부여하는 것인데, 들뢰즈를 공부 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일반적으로 철학적 예술비평을 하는 사람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의미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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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주 : 들뢰즈가 한 때 알콜중독자였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사실이라면 왜 그랬을까요? 그리고 들뢰즈를 본받아 우리 콜레기움도 술자리를 많이 가지나요?(^^)

변쌤 : 글을 쓸 때 음주상태로 썼다는 것은 정설화 되어 있다. 들뢰즈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삶’이다. 술 마셨을 때 진정한 삶이 해방된다는 식. 예를 들면 실제로 68즈음해서 앙리 미쇼 같은 경우 스스로 마약실험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니체가 광기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니체로부터 새로운 스타일의 철학이 시작됐다라고 할 때는, 그 이전에는 명석 판명한 사유 지성의 작동을 위협하거나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던 층위, 그런데 진정한 사유를 강제하는 힘은 거기에 있는 거고 그것의 힘을 죽이면 새로운 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게 기본 출발점이다. 들뢰즈가 강한 니체주의라고 할 때는 그런 맥락을 받아들이는 거고, 말 그대로 실험을 하는 건데, 미쇼 같은 경우 마약하고 그 상태에서 글을 쓰고 그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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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뢰즈 vs 변성찬

(*이번 봄! 이 두 분과 함께 하지 않으시렵니까. 호호호)

 

들뢰즈의 문학 예술적 취향을 보면, 그런 것들 좋아했던 것 같다. 어떤 사유의 가능성이나 모델이나 돌파구나 이런 걸 찾아야 하는 게 새로운 철학의 임무라고, 바깥의 사유라고 하는 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삶은 나의 삶이 아니라, 통상적 의미의 ‘나’라고 하는 인격성 외부에 있는 것들을 가리키는 거고, 그러니까 내안에 있는 외부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거라고 생각을 하고, 그것이 ‘나’라고 하는 데카르트 칸트적인 어떤 ‘코기토’의 입장에서 볼 때는 외부인 그리고 그것의 폭력을 통해서만 새롭게 사유를 한다라는 것, 짐작컨대, 음주하고 술을 먹은 상태에서 글을 쓴다고 하는 것은 그런 것과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예를 들어『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가 그런 말을 한다. 데카르트의 명석판명을 꼬집어서 오히려 삶의 층위에서는 애매판명하고 애매할수록 판명하다. 그리고 그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어떻게 조합되고 배치 되는냐에 따라서 새로운 것이 된다는 것, 새로운 것이 된다는 것은 내가 의지해서 된다 보다는 삶의 층위에서 일어나는 재배치의 결과이다. 언제나 결과인 것이고, 근데 그 오히려 코기토라는 층위도 의식과 무의식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는데, 의식의 층위에서는 그것들이 행하는 새로운 것의 출현을 반동적으로 억압하는 기제로, 그것이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이 명확히 들뢰즈에게는 도덕인 것이다. 삶을 억압하는 도덕이라고 할 때, 니체식으로 말하면 반동적으로 새로운 것의 출현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하는 거다.


일단 중요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파괴인 것이고 파괴를 통해서 들어나는 잠재성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삶의 해방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고, 일단 해방이고, 실험이고, 실험한다는 것은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고, 예를 들면 그런 식의 입장이니까, 들뢰즈의 철학이 일정하게 예술철학적 지향을 갖는 측면도 그런 것에 있다고 생각하고, 반도덕적이면서 윤리적인... 그런 의미에서 술자리도 많이 가질 것이다.(^^)


 

  자세한 커리큘럼은 여기를 클릭하세요! http://nomadist.org/xe/collegium/86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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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마디스트

영화는 근대 기술문명의 산물이지만, 또한 탄생의 순간부터 자신의 자궁이자 환경이라 할 수 있는 ‘모더니티’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결해왔습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간 영화의 ‘새로운 물결들’은 그 질문과 대결의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는 이번 강좌를 통해서, 서구의 정치적 모더니즘에서 동아시아의 뉴웨이브에 이르기까지, 영화와 모더니티 사이의 그 긴장 어린 조우와 대결의 순간들이 지닌 미학적, 정치적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1. 서구 정치적 모더니즘, 사랑과 증오의 연대기 - 신은실

 

1968년 5월 혁명 이후 서구 영화이론과 창작에서의 실천 양상은 확연하게 달라졌습니다. 특히 독립영화, 혹은 제3세계 영화 영역에서 가장 큰 이론적 디딤돌은 이른바 '정치적 모더니즘'이었습니다. 정치적 모더니즘의 장 안에서 당시 백가쟁명하던 서구 이론, 이를테면 모더니즘과 기호학, 언어학, 이데올로기 이론과 구조주의, 브레히트적 형식주의와 해체주의 등은 용광로와 같은 뜨거움을 분출하며 창작과 실천의 기치를 올렸습니다. 누군가에 따르면, '정치적 모더니즘'은 미학적 측면에서 '사랑', 정치적 측면에서 '증오'를 담지하여 표현하고자 했던 사조라 합니다. 이 강의에서는 이와 같은 '정치적 모더니즘'의 이론적 양상과 더불어 이를 실천한 대표적인 감독인 장 뤽 고다르, 다니엘 위예-장 마리 스트로브 등의 영화를 함께 톺아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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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위예-장 마리 스트로브, 로트링겐 )


 

2. 뉴아메리칸 시네마, 구심력에서 원심력으로- 안시환

 

본 강좌는 로버트 알트만과 마틴 스콜세지를 중심으로 뉴아메리칸 시네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미국의 비평가인 로빈 우드는 로버트 알트만의 영화를 연구한다는 것은 곧 그 세대의 감독들, 즉 뉴아메리칸 시네마 감독들의 특징들을 살펴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물론 로빈 우드는 ‘새로운 할리우드 영화’를 지향했던 로버트 알트만의 영화에서 ‘젠 채 하는 속물근성’을 발견하는 것에 비평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근거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부당한 평가임에 분명합니다. 본 강좌는 뉴아메리칸 시네마 감독들(그리고 그들의 작품들)에 내재한 어떤 긴장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할리우드의 고전적인 속성들로부터 벗어난 자신들만의 표현양식(유럽의 모더니즘 영화로부터 영향을 받은)으로 강렬한 효과를 추구할 때, 뉴아메리칸 시네마는 ‘구심력’과 ‘원심력’이 충돌하는 긴장 속에 곧잘 분열된다는 것입니다. 본 강좌는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주인공들이 지향적 목표를 잃고 해매는 과정에서, 극의 중심을 이루는 추진력과 극적 기제가 어떻게 상실되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고전 할리우드 영화에서 추구했던 명확한 동일시와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목표들이 어떻게 부재하게 되는지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들 영화에서 곧잘 발견되는 갑작스럽게 분출되는 폭력의 시퀀스는 이러한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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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무라 쇼헤이, 복수는 나의 것)

 

3. 뉴저팬 시네마, 살부충동의 영화들 - 안시환

 

본 강좌의 제목에서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을 떠올렸다면, 이미 여러분은 본 강좌가 이야기할 내용의 일부를 엿본 셈입니다. 죽어서까지 아버지의 손에 지배되는 것을 거부하는 그 고집스런 몸짓 말입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것은 결코 은유로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복수는 나의 것>에서 드러나는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은 이 작품만의 개별적 특징이 아닙니다. 즉, 이마무라 쇼헤이의 살부충동은 그와 함께 시대의 공기 호흡했던 뉴저팬 시네마 감독들이 공유했던 것이자, 그들 작품을 살아 숨 쉬게 한 궁극적인 동력이었습니다. 뉴저팬 시네마는 다양한 방식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요구하고, 그것을 미학적으로 실천합니다. 전통의 거부, 혹은 전통에 대한 단절의 요구. 그리고 그 완고한 몸짓. 본 강좌는 그것이야말로 뉴저팬 시네마의 주제와 형식에서 드러나는 시대정신이었다고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본 강좌가 함께 할 세 명의 감독은, 이마무라 쇼헤이, 마스무라 야스조, 그리고 오시마 나기사입니다.



 

4. 허우샤오시엔, 역사적 삶의 시공간 - 권은혜

 

<펑꾸이에서 온 소년>(1983)에서 <빨간풍선>(2007)에 이르기까지,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들은 영화가 담고자 하는 현실의 변화에 따라, 카메라 워크의 요소들, 즉 카메라와 인물 사이의 거리, 카메라의 움직임 등에서 많은 변화를 보여 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롱테이크처럼 여전히 고수되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허우샤오시엔 스타일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허우샤오시엔 영화의 카메라와 그에 담긴 시공간들에 대해, 그리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허우샤오시엔의 윤리적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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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샤우시엔, 카페 뤼미에르)


 

5. 홍상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사이 - 변성찬

 

홍상수는 ‘모더니스트’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그가 만든 영화의 매 순간은 매우 ‘리얼’합니다. 홍상수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사이, 즉 이미 확립된 어떤 ‘ism’의 격자망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루어왔습니다. 그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무엇이고, 그 요소들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품고, 홍상수의 영화세계를 다시 여행해보고자 합니다. 또한 그 과정을 통해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는 ‘거친’ 분류법을 보다 섬세하고 새로운 렌즈로 가공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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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6. 그 여자! 그 남자! (여성 영화감독들의 성정치학) - 오현경

 

시선은 순수하지 않다. 그것이 권력이든, 어떤 정서든 항상 누군가에게 특별한 의미로 투사된다. 영화 수사학의 핵심에도 세 가지 시선이 있다. 영화 속 인물의 시선, 카메라의 시선, 관객의 시선. 그런데 여태껏 카메라의 시선, 즉 감독의 시선 중 약 95%가 남성이라면, 그 이미지의 수사학 속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걸까? 이것이 여성으로 바뀐다면? 시각적 쾌락의 정치학을 밝히며 그 횡단 속에 또 하나의 나를 찾는 여정이 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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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린느 브레이야, 섹스 이즈 코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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