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봄, 콜레기움 들뢰즈의 『시네마』드디어~!

4월9일 토요일에 시작 됩니다.


콜레기움 반장 꾸냥과 주몽이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의 들뢰즈~ 변성찬 선생님을 모시고 인터뷰를 해 보았습니다.



사진. 인터뷰 / 꾸냥, 주몽 

                                                                                           

 

꾸냥, 주몽(이하 꾸,주) : 콜레기움이 어떤 형식으로 진행되는 지 궁금합니다! 강사가 강의를 주도하나요? 아니면? 연구실에서 하는 세미나처럼 진행되나요?

변성찬 선생님(이하 변쌤) : 콜레기움의 기본형식이 세미나에 가까운 거지만 이번 시네마는 강의가 중심이라고 일단 생각하면 된다. 짧은 시간에 분량도 좀 많고, 압축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강의를 중심으로 할 생각이다. 강의가 한 발 앞서 나가고, 가령 2회차 때 읽고 발제할 부분을 1회 차 때 미리 강의를 하고, 텍스트 읽고 강의를 하는 것이 일종의 안내의 개념이 되고, 그걸 바탕으로 해서 텍스트를 발제하는 게 복습이 되는 그런 방식으로 진행할 생각이다.


 

꾸,주 :『시네마』읽을 때 베르그송과 퍼스를 같이 읽는 게 특이한 것 같아요. 어떻게 연결시켜서 읽는 건가요?

변쌤 : 개인적 경험으로 보면 그게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시네마』는 영화와 베르그송의 지속 또는 이미지의 철학, 퍼스의 기호론, 이 세 가지가 종합되어 있는 책이다. 『시네마』를 펼쳐보면 알지만, 1, 2권 각각 두 번에 걸쳐서 챕터 제목이 아예 베르그송에 대한 주석으로 되어 있다. 그 주석달기의 방식이 친절한 설명이라기보다는 들뢰즈에게는 일종의 재창조를 의미하기 때문에 차라리 주석을 달고 있는 특히, 베르그송 같은 경우는 개념이나 문제의식을 차라리 소화를 하고 나서 들어가는 게 부담은 되지만, 오히려 더 지름길이다. 안내문에 나간 것처럼 꼭 필요한 부분들을 선택해서 먼저 읽고 들어가려고 한다. 한마디로, 그거 안보고 어떻게 해볼까 하고 하면 더 고생한다.


 

꾸,주 : 들뢰즈의 저작들, 특히 『시네마』, 어렵고 난해하기로 유명한데요, 선생님이 들뢰즈의 저작들을 공부하게 된 계기와 들뢰즈 공부를 계속해나가는 이유는 뭔가요?

변쌤 : 나한테는 『시네마』를 읽어야 될 필요성과 들뢰즈를 읽어야 할 필요성이 동시적인 것이었는데, 우연적인 거고, 더 솔직히 말하면 반강제적이었던 거고, 심지어는 매체에다가 글로 쓰기도 했지만, 출판사에서 리라이팅이라는 기획이 나왔고 필자를 구하던 중 연구실에서 영화와 관련된 책 중 “뭐하나 해라!”는 이진경`고미숙의 요구가 있었고, 그 당시만 해도 시간-이미지가 번역이 안 되어 있는 상태였었는데, 그래서 하기 힘들다 그랬더니, 옆에서 '영어 강사'니까 원서 보고 쓰라고 부추겼다. 그런데, 그렇게『시네마』를 보면서 오히려 내 공부의 중심이 바뀌어 버렸다. 공부를 하다 보니 영화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들뢰즈에 더 매력을 느끼고 가까워지는, 그래서 그게 무려 8년 세월인데... 아, 이런 건 쓰지마!!! (일동 웃음 ㅋㅋ)


 

변쌤 : 들뢰즈 공부를 왜 계속하냐 그러면, 진짜 알고 싶어서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자연철학적인 예술철학적인 측면, 직접적으로 『시네마』와 관련해서 들뢰즈가 갖고 있던 비평개념자체가 마음에 들고 내 스타일에 맞았다. 뭐냐하면, 어떤 작품을 비평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척도를 가지고 등급을 매긴다거나 이런 게 아니다. (많이들 그렇게 알고 있지만 말이다.) 비평은 창조라는 게 핵심개념인데, 어떤 예술적 작품으로부터 촉발 받은 것을 토대로 자기 사유를 하고, 창조를 하는 것, 뭔가 거기에 그런 의미에서 텍스트 자체를 어떤 의미에서는 변용시키는 과정일 수도 있고, 들뢰즈에게 있어 창작과 비평은 그렇게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지 않다. 철학하는 것 자체도 늘 개념의 창안이라고 하지만, 그런 그 비평개념, 이런 것이 개인적으로 내가 갖고 있는 비평적인 태도와 잘 맞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시네마』와 들뢰즈의 시각을 통해서, 모든 사유나 철학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거지만,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창작의 측면에서는 진정으로 뭔가 새롭게 창작한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새로운 비젼 같은 것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영화를 중심으로 예술작품을 수용하거나 비평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그 작품에서 기존에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시각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중심적인 담론 틀에서는 비가시적인 거였거나 보이지 않았던 의미, 이런 것들을 다시 부여하는 것인데, 들뢰즈를 공부 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일반적으로 철학적 예술비평을 하는 사람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의미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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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주 : 들뢰즈가 한 때 알콜중독자였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사실이라면 왜 그랬을까요? 그리고 들뢰즈를 본받아 우리 콜레기움도 술자리를 많이 가지나요?(^^)

변쌤 : 글을 쓸 때 음주상태로 썼다는 것은 정설화 되어 있다. 들뢰즈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삶’이다. 술 마셨을 때 진정한 삶이 해방된다는 식. 예를 들면 실제로 68즈음해서 앙리 미쇼 같은 경우 스스로 마약실험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니체가 광기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니체로부터 새로운 스타일의 철학이 시작됐다라고 할 때는, 그 이전에는 명석 판명한 사유 지성의 작동을 위협하거나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던 층위, 그런데 진정한 사유를 강제하는 힘은 거기에 있는 거고 그것의 힘을 죽이면 새로운 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게 기본 출발점이다. 들뢰즈가 강한 니체주의라고 할 때는 그런 맥락을 받아들이는 거고, 말 그대로 실험을 하는 건데, 미쇼 같은 경우 마약하고 그 상태에서 글을 쓰고 그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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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뢰즈 vs 변성찬

(*이번 봄! 이 두 분과 함께 하지 않으시렵니까. 호호호)

 

들뢰즈의 문학 예술적 취향을 보면, 그런 것들 좋아했던 것 같다. 어떤 사유의 가능성이나 모델이나 돌파구나 이런 걸 찾아야 하는 게 새로운 철학의 임무라고, 바깥의 사유라고 하는 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삶은 나의 삶이 아니라, 통상적 의미의 ‘나’라고 하는 인격성 외부에 있는 것들을 가리키는 거고, 그러니까 내안에 있는 외부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거라고 생각을 하고, 그것이 ‘나’라고 하는 데카르트 칸트적인 어떤 ‘코기토’의 입장에서 볼 때는 외부인 그리고 그것의 폭력을 통해서만 새롭게 사유를 한다라는 것, 짐작컨대, 음주하고 술을 먹은 상태에서 글을 쓴다고 하는 것은 그런 것과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예를 들어『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가 그런 말을 한다. 데카르트의 명석판명을 꼬집어서 오히려 삶의 층위에서는 애매판명하고 애매할수록 판명하다. 그리고 그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어떻게 조합되고 배치 되는냐에 따라서 새로운 것이 된다는 것, 새로운 것이 된다는 것은 내가 의지해서 된다 보다는 삶의 층위에서 일어나는 재배치의 결과이다. 언제나 결과인 것이고, 근데 그 오히려 코기토라는 층위도 의식과 무의식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는데, 의식의 층위에서는 그것들이 행하는 새로운 것의 출현을 반동적으로 억압하는 기제로, 그것이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이 명확히 들뢰즈에게는 도덕인 것이다. 삶을 억압하는 도덕이라고 할 때, 니체식으로 말하면 반동적으로 새로운 것의 출현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하는 거다.


일단 중요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파괴인 것이고 파괴를 통해서 들어나는 잠재성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삶의 해방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고, 일단 해방이고, 실험이고, 실험한다는 것은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고, 예를 들면 그런 식의 입장이니까, 들뢰즈의 철학이 일정하게 예술철학적 지향을 갖는 측면도 그런 것에 있다고 생각하고, 반도덕적이면서 윤리적인... 그런 의미에서 술자리도 많이 가질 것이다.(^^)


 

  자세한 커리큘럼은 여기를 클릭하세요! http://nomadist.org/xe/collegium/86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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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근대 기술문명의 산물이지만, 또한 탄생의 순간부터 자신의 자궁이자 환경이라 할 수 있는 ‘모더니티’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결해왔습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간 영화의 ‘새로운 물결들’은 그 질문과 대결의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는 이번 강좌를 통해서, 서구의 정치적 모더니즘에서 동아시아의 뉴웨이브에 이르기까지, 영화와 모더니티 사이의 그 긴장 어린 조우와 대결의 순간들이 지닌 미학적, 정치적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1. 서구 정치적 모더니즘, 사랑과 증오의 연대기 - 신은실

 

1968년 5월 혁명 이후 서구 영화이론과 창작에서의 실천 양상은 확연하게 달라졌습니다. 특히 독립영화, 혹은 제3세계 영화 영역에서 가장 큰 이론적 디딤돌은 이른바 '정치적 모더니즘'이었습니다. 정치적 모더니즘의 장 안에서 당시 백가쟁명하던 서구 이론, 이를테면 모더니즘과 기호학, 언어학, 이데올로기 이론과 구조주의, 브레히트적 형식주의와 해체주의 등은 용광로와 같은 뜨거움을 분출하며 창작과 실천의 기치를 올렸습니다. 누군가에 따르면, '정치적 모더니즘'은 미학적 측면에서 '사랑', 정치적 측면에서 '증오'를 담지하여 표현하고자 했던 사조라 합니다. 이 강의에서는 이와 같은 '정치적 모더니즘'의 이론적 양상과 더불어 이를 실천한 대표적인 감독인 장 뤽 고다르, 다니엘 위예-장 마리 스트로브 등의 영화를 함께 톺아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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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위예-장 마리 스트로브, 로트링겐 )


 

2. 뉴아메리칸 시네마, 구심력에서 원심력으로- 안시환

 

본 강좌는 로버트 알트만과 마틴 스콜세지를 중심으로 뉴아메리칸 시네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미국의 비평가인 로빈 우드는 로버트 알트만의 영화를 연구한다는 것은 곧 그 세대의 감독들, 즉 뉴아메리칸 시네마 감독들의 특징들을 살펴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물론 로빈 우드는 ‘새로운 할리우드 영화’를 지향했던 로버트 알트만의 영화에서 ‘젠 채 하는 속물근성’을 발견하는 것에 비평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근거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부당한 평가임에 분명합니다. 본 강좌는 뉴아메리칸 시네마 감독들(그리고 그들의 작품들)에 내재한 어떤 긴장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할리우드의 고전적인 속성들로부터 벗어난 자신들만의 표현양식(유럽의 모더니즘 영화로부터 영향을 받은)으로 강렬한 효과를 추구할 때, 뉴아메리칸 시네마는 ‘구심력’과 ‘원심력’이 충돌하는 긴장 속에 곧잘 분열된다는 것입니다. 본 강좌는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주인공들이 지향적 목표를 잃고 해매는 과정에서, 극의 중심을 이루는 추진력과 극적 기제가 어떻게 상실되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고전 할리우드 영화에서 추구했던 명확한 동일시와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목표들이 어떻게 부재하게 되는지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들 영화에서 곧잘 발견되는 갑작스럽게 분출되는 폭력의 시퀀스는 이러한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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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무라 쇼헤이, 복수는 나의 것)

 

3. 뉴저팬 시네마, 살부충동의 영화들 - 안시환

 

본 강좌의 제목에서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을 떠올렸다면, 이미 여러분은 본 강좌가 이야기할 내용의 일부를 엿본 셈입니다. 죽어서까지 아버지의 손에 지배되는 것을 거부하는 그 고집스런 몸짓 말입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것은 결코 은유로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복수는 나의 것>에서 드러나는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은 이 작품만의 개별적 특징이 아닙니다. 즉, 이마무라 쇼헤이의 살부충동은 그와 함께 시대의 공기 호흡했던 뉴저팬 시네마 감독들이 공유했던 것이자, 그들 작품을 살아 숨 쉬게 한 궁극적인 동력이었습니다. 뉴저팬 시네마는 다양한 방식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요구하고, 그것을 미학적으로 실천합니다. 전통의 거부, 혹은 전통에 대한 단절의 요구. 그리고 그 완고한 몸짓. 본 강좌는 그것이야말로 뉴저팬 시네마의 주제와 형식에서 드러나는 시대정신이었다고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본 강좌가 함께 할 세 명의 감독은, 이마무라 쇼헤이, 마스무라 야스조, 그리고 오시마 나기사입니다.



 

4. 허우샤오시엔, 역사적 삶의 시공간 - 권은혜

 

<펑꾸이에서 온 소년>(1983)에서 <빨간풍선>(2007)에 이르기까지,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들은 영화가 담고자 하는 현실의 변화에 따라, 카메라 워크의 요소들, 즉 카메라와 인물 사이의 거리, 카메라의 움직임 등에서 많은 변화를 보여 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롱테이크처럼 여전히 고수되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허우샤오시엔 스타일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허우샤오시엔 영화의 카메라와 그에 담긴 시공간들에 대해, 그리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허우샤오시엔의 윤리적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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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샤우시엔, 카페 뤼미에르)


 

5. 홍상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사이 - 변성찬

 

홍상수는 ‘모더니스트’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그가 만든 영화의 매 순간은 매우 ‘리얼’합니다. 홍상수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사이, 즉 이미 확립된 어떤 ‘ism’의 격자망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루어왔습니다. 그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무엇이고, 그 요소들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품고, 홍상수의 영화세계를 다시 여행해보고자 합니다. 또한 그 과정을 통해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는 ‘거친’ 분류법을 보다 섬세하고 새로운 렌즈로 가공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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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6. 그 여자! 그 남자! (여성 영화감독들의 성정치학) - 오현경

 

시선은 순수하지 않다. 그것이 권력이든, 어떤 정서든 항상 누군가에게 특별한 의미로 투사된다. 영화 수사학의 핵심에도 세 가지 시선이 있다. 영화 속 인물의 시선, 카메라의 시선, 관객의 시선. 그런데 여태껏 카메라의 시선, 즉 감독의 시선 중 약 95%가 남성이라면, 그 이미지의 수사학 속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걸까? 이것이 여성으로 바뀐다면? 시각적 쾌락의 정치학을 밝히며 그 횡단 속에 또 하나의 나를 찾는 여정이 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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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린느 브레이야, 섹스 이즈 코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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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에 대한 오해


다큐멘터리는 허구가 아닌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현실의 허구적인 해석 대신 현실 그대로를 전달하는 영화장르다. 그러나 다큐멘터리에 현실을 담기 위해서는 현실을 선택하고 자르고 붙이는 허구적인 해석을 해야만 하고, 이 역할은 감독이 한다. 다큐멘터리는 어쩌면 극영화보다 감독의 자리가 더 중요한 장르다.

미국의 의료보험제도에 대한 뚜렷한 비판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마이클무어감독은 <식코>에서 수익을 위해 환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제도의 폐해를 그 특유의 직설화법과 블랙코미디적 방식으로 낱낱이 파헤친다. 마이클무어감독은 영화 속에 직접 등장하여 본인이 의도한 바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간다. 한편 10만 관객을 동원해냈던 <워낭소리>에서 논란을 빚었던 ‘누렁이 눈물 씬’은 극영화 못지않은 감동의 순간이었다. 이 장면은 정말 극영화와 같은 방식으로 편집된 것이고, 이는 이충렬감독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었기에 가능한 장면이었다.

다큐멘터리를 생각할 때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연출 없는 기록’ 이라는 사실과 다르게 감독과 연출이 다큐멘터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경계도시2> 역시 그러한데, 놀라운 점은 앞서 말한 영화들과 다른, 심지어 본인의 앞선 영화와도 구분되는 <경계도시2>에서 홍형숙감독의 태도와 위치다. <경계도시2>에서 그녀는 충실한 기록자, 관찰자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이끌어 가는 계몽자도 아니다. 송두율교수 입국 후 터져 나오는 일련의 사건들은 그녀를 그 두 자리 중 어딘가에 위치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감독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인간에 대한 이해와 불신 사이를 오가던 그 무렵” 즉, ‘송두율이 김철수냐 아니냐, 거짓말 했냐 안 했냐’는 흑백논리에 말려들고 있던 그녀는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는 동시대 진보진영의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한국 사회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는 표면상으로는 감독의 자리에 있지만 감독이 가지는 확신과 주도권을 내려놓고 자신이 느끼는 흔들림과 균열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경계도시> vs <경계도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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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도시2>에서 홍형숙감독은 카메라를 든 그의 앞에서 펼쳐지는 현실 앞에서 카메라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했다. 이 ‘통제 불가능성’은 6년이라는 후반작업이 있었음에도 고스란히 완성된 영화에 담겨 관객에게 전해진다. 후반작업 동안 감독에게 부여되는 절대적인 편집권을 생각해보면, <경계도시2>는 촬영하는 1년 3개월 동안 감독 본인이 느꼈던 모든 혼란과 모순들을 최대한 솔직하게 담겠다는 홍형숙 감독의 결단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경계도시2>가 만들어지기 7년 전 완성된 <경계도시>는 두 가지 축으로 이뤄진다. 한 축에는 홍형숙 감독이 송두율교수를 만난 2000년 6월 14일부터 33년만의 입국이 무산 결정된 2000년 7월 4일까지의 일련의 사건들과 이에 대한 송두율교수의 입장과 철학이 있다. 다른 한 축에는 간첩 혐의를 받고 있는 송두율교수의 다큐멘터리를 찍는 행위에 대해, 영화를 폐기처분하고 제작진에게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국정원의 압력이 있다. 촬영을 끝내고 독일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뒤 강석필PD는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고, 영화의 마지막에서 홍형숙감독은 ‘대한민국에서는 아직도 (누군가에 대해 말하는)일상적 행위조차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분명하고 확신에 찬 단호한 문장으로 결론을 짓는다.

한편 <경계도시2>가 막 30분을 넘길 즈음 홍형숙감독은 송두율교수가 김일성 사망 당시 김철수라는 이름으로 초청된 사실을 그 스스로 알고 있었다는 언론들의 보도에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충격에 휩싸인 한국사회와 함께 그녀 또한 송교수에 대해 할 말을 잃었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곧이어 2002년 어느 대학에서 <경계도시>상영 이후 ‘송교수가 김철수인가 아닌가가 문제가 아니라, 그가 한국에 들어 왔을 때, 한국이 그를 안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다’라고 말했던 본인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녀는 그녀 안의 레드컴플렉스와 필사적으로 싸우기 시작한다.

송두율교수는 뒷날 귀국 후 한 달 만에 구속되고 나서야 비로소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 틈이 생겼다고 말한다. 이는 송두율교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구속 후, 잠잠해진 언론과 한국사회가 망각의 시간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상황이 되어서야 홍형숙감독을 비롯한 진보진영 또한 생각할 수 있는 틈이 생겼을 것이다. 이는 영화가 거의 끝날 무렵인 1시간 24분이 되어서야 등장하는 이야기다.

<경계도시2>에서 홍형숙감독은 분명하고 확신하는 입장을 갖고 마무리 지은 <경계도시>와 다르게 “2003년 송두율은 스파이였고, 2010년 송두율은 스파이가 아니다. 그때 송두율은 무엇이었을까?”라는 성찰적 질문으로 마무리 짓는다.


 

<경계도시2>가 만들어낸 것


<경계도시2>를 통해 홍형숙 감독은 기존의 다큐멘터리들과는 확연히 다른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냈다. 이는 허구적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선전적 다큐멘터리도 아닌, 연출 없는 기록을 표방한 순진한 다큐멘터리도 아닌 어떤 것이다. 이에 변성찬평론가는 ‘철학보다 먼저 움직이는 예술’이라는 말로, 김영진평론가는 ‘주관적 다큐멘터리 영역에서 내적 파열을 겪으며 도달한 경지’라는 말로 표현했다.

11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담은 400여개의 테입과 그 시간이 주는 압박과 함께 그보다 훨씬 컸을 한국 사회와 진보진영 그리고 감독 본인 안에 있는 ‘실재’와의 대면에서 느꼈을 공포와 당혹을 상상해보면 6년이라는 후반작업의 시간은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다큐멘터리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가겠다는, 방향을 제시하고 결론을 내겠다는 감독으로서의 권위는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강한 상황의 소용돌이 속에서 박탈당했고, 그녀 스스로도 벗어던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혼란스럽고 모순적인 현실을 앞에 두고 그 갈등과 분열의 시간들을 고스란히 견뎌낸, 다큐멘터리 ‘감독’이면서 솔직한 ‘동시대인’이고자 했던 그녀의 선택과 결단에 박수를 보낸다.



글 / 권은혜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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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는 1988년 일본에서 발생했던 ‘나시 스가모의 버림받은 4남매 사건’을 실화적 모태로 하는 영화이다. 한 엄마와 각기 다른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4명의 아이들, 출생신고가 되어 있지 않아 공식적으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 그나마 어렵게 마련한 전셋집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큰아이를 제외한 나머지 세 아이는 말 그대로 그곳에 없는 아이들이 되어야 한다. 어느 날 엄마는 새로운 사랑을 위해 그 아이들을 떠나버리고, 아이들은 끝내 비극적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 6개월 동안 아무도 모르는 그들만의 삶을 살아낸다. 그곳에 있지만 그곳에 없었던 아이들의 유령 같은 삶. 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는, 한동안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 떠들썩함 속에는,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연민, 아이를 버린 무책임한 어미에 대한 분노, 결국 그 어미와 함께 아이들을 방치한 공범이 되어버린 사회-어른들 자신의 부채의식, 이 모든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대도시의 익명적 삶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 또는 반성이 있었을 법도 하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 15년 만에 세상에 나온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이 모든 소란에서 한 걸음 비켜서 있다. <아무도 모른다>는 그 아이들의 삶이 생각만큼 온기없는 유령 같은 삶은 아니었음을 보여줄 만큼 충분히 사실적이지만, 또한 아이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그 어미에 대한 섣부른 도덕적 분노와 단죄로 변질되게 하지 않을 만큼은 충분히 허구적이기도 하다.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결코 이 영화가 ‘재현 드라마’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 사건을 모태로 하고는 있지만, 세부적인 디테일은 1년간 배우인 아이들과 함께 발견하고 창조해낸 것임을 힘주어 말한다. 사실, 그 단호함은 현실과 영화에 대한 감독 자신의 조심스럽고 근본적인 윤리적 질문의 다른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대상에 대한 연민은, 특히 그것이 폭발적이고 집단적인 것일 때, 쉽사리 그 대상을 영원히 타자화시킬 위험에 빠진다. 터무니없는 일로 인한 충격과 분노는, 특히 그것이 폭발적이고 집단적인 것일 때, 도덕적 단죄라는 폭력이 되어 자신이 담지하고 있는 윤리적 힘을 소진시켜버린다. 문제는 연민과 분노라는 감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쉽사리 출구를 찾아 스스로를 해소하려고 하는 그 완강한 관성 또는 자동운동 속에 있다. 그것을 막는 또는 그 힘에 저항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끊임없는 삶에 대한 탐색과 윤리적 질문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수행하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외줄타기와도 같이, 고도의 균형감각과 끊임없는 긴장을 요구하는 일이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가 많은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영화와 구별된다면, 그래서 우리에게 새로운 감동을 준다면, 그것은 이 영화가 바로 그 쉽지 않은 일을 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큐와 픽션, 선과 악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잡기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는 시종일관 미묘한 긴장이 흐른다. 그것은 카메라와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팽팽한 공간적인 거리 감각이 낳는 긴장이기도 하고, 촬영과 편집 사이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시간적 리듬의 공존에서 비롯되는 긴장이기도 하다. 카메라는 대상을 향해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지만, 끝내 그 인력에 함몰되지 않는다. 카메라는 무한한 인내심으로 대상의 진실이 드러나기를 기다리지만, 일단 포착된 대상의 진실은 과잉에 이르기 이전에 냉정하게 편집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카메라와 편집 리듬에는, 대상을 향한 자연스러운 인력과 대상으로부터의 의식적인 척력 사이에 존재하는 팽팽한 물리적 긴장이 실려 있다. 그 물리적 긴장은 감독 자신의 윤리적 질문의 필연적인 결과일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는 두 가지 의미에서 다수화된 ‘이분법’에 질문하고 도전하는 영화이고, 그 이분법의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영화이다. 영화는 순수한 아이들과 오염된 어른들이라는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하고, 그것을 위해서 사실과 허구, 다큐와 픽션 사이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고 있다.


아무도 모르는 아이들이 만든 유사 가족 생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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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는 아이들의 그 6개월을 고난과 참상으로 재현하려 하기보다는, 그 6개월을 살아낼 수 있었던 아이들의 삶의 의지와 생의 감각을 포착하고 그것과 하나가 되려고 한다. 아이들을 트렁크에 넣어 옮겨야만 하는 삶의 절박함은, 유키(시미지 모모코)의 천진난만한 질문(“여기는 몇층이야?”)과 시게루(기무라 히헤이)의 천진난만한 미소로 스릴 넘치는 비밀 작전, 즉 유희가 된다. 비밀 작전의 무사한 성공을 자축하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아이들보다 더 아이 같은 철없는 엄마가 제시하는 터무니없는 의무의 법칙은, 아이들의 웃음과 함께 게임의 규칙이 된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엄마가 사라진 뒤에도 막연한 기다림 속에서 삶을 낭비하지 않는다. 엄마보다 더 어른스러운 아이였던 장남 아키라(야기라 유야)는 이미 아빠이고, 이사한 집에서 제일 먼저 세탁기가 놓인 곳을 확인하는 장녀 교코(기타우라 아유)는 이미 엄마이며, 시게루와 유키는 아빠 엄마의 사정을 충분히 헤아려 보채거나 칭얼대지 않는 착한 아이들이다. 이 자발적인 유사 가족은, 위기의 순간을 삶의 영역을 확장하는 계기로 만드는 놀라운 생명력을 보여준다.

생활비(식비)의 고갈을 새로운 연대(먹을 것을 챙겨주는 편의점 직원)의 기회로 삼고, 단수로 인한 고통을 공원으로의 진출 기회로 삼는다. 엄마와 함께 금지의 규칙은 사라졌다. 공원과 거리로 자신들의 삶의 영역을 확장한 아이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친구(사키-간 하나에)를 사귀고, 그곳에서 발견한 새로운 생명의 싹에 감응하며, 그것을 데려다가 소중하게 키운다. 시게루는 자판기와 공중전화에서 동전을 모으는 생활의 지혜를 터득한다. 그리고 그 6개월 동안 아이들은, 자신들이 키우는 화분 속의 식물처럼, 실제로 자라난다. 13살이 된 아키라는 변성기가 시작되고, 5살이 된 유키는 이제 예전의 작은 트렁크에는 들어가지 않을 만큼 그렇게 자랐다. 물론 그 생명력과 성장력은 축복이라기보다는 비극이다.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아키라의 고집(아키라는 이미 성을 바꾸어버린 엄마에게 더이상 도움을 호소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들을 뿔뿔이 흩어놓을 것이 분명한 사회에도 도움을 청할 생각이 없다)은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너무나 빨리 자라버린 유키의 싸늘해진 몸은 한순간 우리의 머리를 텅 비게 만드는 충격이 된다. 유키의 죽음을 확인한 뒤 거리로 나간 아키라의 눈에 세상은 더이상 현실감을 갖지 않는 공허가 되고, 그 초현실적 공허감은 우리의 오감을 얼어붙게 한다. 아키라의 발걸음은 자동반사적으로 그를 경찰서 앞으로 이끌지만, 그는 끝내 돌아선다. 유키에게 모노레일을 타고 가서 비행기를 보여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 순간 아키라는 아이와 어른의 경계를 훌쩍 넘어서 있으며, 그리하여 세상의 상식을 향하여 무기력하지만 끈질긴 질문을 던진다.


아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탐색


어쩌면 이 영화가 그 제목을 통해 말하려 했던 것은, 아이들의 존재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아무도 몰랐던’ 어른-사회의 무책임에 대한 반성의 촉구 같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정작 아무도 몰랐던 것 그리고 지금까지도 아무도 잘 모르고 있는 것은, 그 아이들이 보여준 놀라운 삶에의 의지와 삶의 감각(감독은 그것을 “삶의 리얼리티를 느낄 수 있는 육체적인 기억”이라고 표현한다)일 것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영화는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느꼈었는가를 질문하고 탐색한다. 마치 <말아톤>이 초원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도덕적 다그침이 아니라, 초원이가 바라보는 세상과 삶의 감각이 무엇인가를 포착함으로써 새로워질 수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아무도 모른다>는 새로운 영화가 된다. 그것은 영화가 영화를 넘어서는 놀라운 기적의 순간들이다.

그때 영화는 사실과 허구, 다큐와 픽션의 경계를 넘어선 화법으로, 쉽게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재단해낼 수 없는 삶의 진실에 이야기한다. 도덕적 폭력이 되지 않아야 할, 그저 끊임없는 새로운 윤리적 질문의 출발점이기만 해야 할 연민과 분노만을 낮고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환기시킨다. 고레에다 감독의 전작 <원더풀 라이프>(1999)에는, 또 하나의 아이-소녀가 등장한다. 기억하고 싶은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습관적으로 디즈니랜드를 떠올렸던 소녀는, 그것이 이미 많은 아이들의 것이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것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일 수 없음을 느낀다. 그 소녀가 대신 찾아낸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무릎에 누이고 귀를 파주던 엄마의 살냄새”였다. 상식적이고 자동화된 우리의 반응에 대한 새로운 윤리적 질문은 이렇듯 늘 새로운 삶의 감각과 함께 비로소 작동한다. <아무도 모른다>는 그 새로운 윤리적 질문, 새로운 삶의 감각으로 충만해 있는, 아름답고 새로운 영화이다. 다음과 같은 고레에다 감독의 진심어린 연출의 변은, 그 새로움을 찾는 모든 감독들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다짐일 것이다. “소년의 옆에서 어깨를 다독여주고자 했다. 안아주는 건 안 된다… 나도 카메라도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글 / 변성찬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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