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돌아왔다!” 1980년대 한국 비평계와 지성계에 민중 문화 담론을 촉발시키고서 홀연 사라졌던(?!) 바흐찐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러시아어 완역본’이라는 휘장을 감고서. 물론, ‘문화의 시대’를 선언하던 1990년대와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군주가 지배하던 2000년대에 그가 온전히 종적을 감췄던 것은 아니다. 그의 최대 주저(主著) 중 하나인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 문화>(아카넷, 2001)가 번역되었고, 몇 권의 전문 연구서들이 간간히 번역·출간되기도 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 문예 미학의 ‘태두’였던 루카치와 나란히 거론되고, 한때 구미권에서 ‘바흐찐 산업’이라는 표현이 떠돌 정도로 명성과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에 비한다면, 지난 20년간 바흐찐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초라해졌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던 그가 ‘돌연’, 혹은 ‘마침내’ 귀환했다! 국내 초역인 <예술과 책임>과 오래 전 절판되었던 <프로이트주의>가 그 시작이란다. 그저 빛바랜 신화의 추억일까, 아니면 미처 소진되지 않은 사유의 잠재력일까?

<예술과 책임>은 학문적 이력을 갓 시작하는 청년 바흐찐의 문제의식이 고스란히 담긴 두 편의 논문들을 담고 있다(정확히 말한다면, 표제 논문인 "예술과 책임"은 몇해 전 <말의 미학>(길,
2006)에서 소개된 적이 있었고, "행위 철학"만이 유일한 초역이다). 1919년 작성된 "예술과 책임"은 불과 세 페이지에 불과하지만, 바흐찐의 사유 전체를 추동하는 본원적 모티브를 담고 있다. 알다시피, 칸트의 3대 비판서를 통해 과학과 윤리, 예술이 상호 독립적으로 분과학문의 길을 간 이래, 근대인의 삶은 성찰의 거울을 상실한 채 유전(流轉)을 거듭해 왔다. 달리 말해, 윤리적 반성 없이 과학과 예술이 가능하고, 윤리는 그저 선택과 맹목의 대상으로 유폐되거나, 예술 지상주의의의 미명 아래 미(美)의 자족적 실존이 가능해진 것이다. 근대의 발전은 과학과 예술, 윤리가 각자 ‘제 갈 길을 떠나버림으로써’ 성취한 역설적인 성과였고, 그 파국적 결과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기 말·세기 초’의 혼돈과 착종이었다(백년 전의 이야기지만, 불과 십년 전에도 다르지 않았다). 20세기를 전후한 유럽의 시대 정황은 고스란히 바흐찐에게도 이어져, <예술과 책임>의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구성했다. 문화와 삶의 분열을 어떻게 다시 통일할 수 있을 것인가?

"행위 철학"은 이와 같은 물음에 대한 바흐찐 나름의 응답으로 작성된 글이다(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 요약은 그만두겠다). 그런데 이 텍스트를 둘러싼 사연이 대단히 흥미롭다. 바흐찐이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은 첫 저서는 1929년의 <도스토예프스키 창작의 문제들>이었다. 그런데 이 책이 나오자마자 불확실한 혐의로 체포되어 카자흐스탄 유형길을 떠나게 되었고, 5년 후 간신히 돌아와 외국어 교사나 문학 강사 등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야 했다. 하지만 결국 잔혹했던 스탈린 시대를 살아남은 그를 기다렸던 것은 화려한 복권이었다. 50년대 이후 그가 학계에 되돌아오자마자 그의 저술들은 우후죽순처럼 재출간되는 호기를 맞는다. 1963년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문제들>이 증보·출판되었으며, 40년대에 작성된 박사학위논문 <리얼리즘 역사에서의 라블레>는 1965년에 현재의 제목으로 발간되었다. 그와 동시에 줄리아 크리스테바나 츠베탕 토도로프 등을 통해 바흐찐은 삽시간에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고, 마침내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과 함께 전세계적 ‘유행’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로도 꾸준히 발간된 바흐찐의 저술들은 ‘문학 이론의 시대’였던 20세기 후반기를 장식하며 널리 연구되었다. 1980년대에 우리에게 선보였던 바흐찐의 모습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 놓여 있었다.
 즉, 러시아에서 나온 바흐찐의 저술들은 먼저 서구에 소개·번역되고, 그것이 다시 한국에 수입되면서, ‘민중 문화 및 문학 연구가’ 바흐찐의 이미지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1980년대에 접어들어, 바흐찐의 초기 원고들을 뒤적거리던 연구자들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1920년대의 청년 시절에 바흐찐이 썼던 원고들이 불완전하게나마 아직 남아있었으
며, 이때의 원고들은 문예학에 정진하던 후반기 원고들과는 상당히 다른 주제 의식이나 성찰적 태도들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철학적 미학’이라고 이름 붙여진 청년기 저술들 가운데 최대의 논쟁거리는 바로 1986년 공간(公刊)된 "행위 철학"으로서, 바흐찐이 학문적 기원이 (그간 알려졌던 바대로 문학이 아니라) 철학에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로 간주되었다. 토도로프는 바흐찐의 문예학 연구는 그의 철학을 문학이라는 풍요로운 사례들로부터 입증하는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적이 있는데, "행위 철학"의 발견은 마치 토도로프의 이 말을 입증이나 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이때부터 러시아에서는 바흐찐을 ‘철학자’나 ‘사상가’로 다루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며, 한국을 포함해 서구의 바흐찐 연구가 시들해졌던 지난 20년간 이 부문에서 상당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예컨대 현재 러시아에서 간행 중인 <바흐찐 저작집>의 제1권이 바로 이 시기를 다루고 있는데, 총 950여 페이지 중 600페이지에 달하는 주(註)가 청년 바흐찐의 철학적 문제의식을 규명하고 입증하는 데 바쳐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행위 철학"의 내용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거의 백년 전에 수기(手記)로 작성된 문서인데다, 출판을 목적으로 하지 않은, 청년기의 자유로운 사유와 실험이 녹아있는 텍스트이며, 많은 부분들이 훼손되거나 간략한 메모의 형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미적 활동에서의 작가와 주인공"(<말의 미학>에 수록)과 연관되지만, 온전히 행위와 윤리라는 문제를 철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텍스트로서 사유의 치밀함보다는 자유로운 도약과 상상력이 더욱 돋보이는 이 글은 ‘번역 불가능하다’라는 딱지를 떼지못할 운명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출간된 한국어 번역은 사실 그 자체로 어느 정도 ‘실험적’이며 피치못하게 ‘문제적’인 운명을 밟아갈 듯하다. 가령, 제목부터 그러한데, 그간 국내 러시아 학계에서 통용되던 이 텍스트의 제목은 ‘행동 철학’이었던 것이다. 또한 학문과 사유, 활동 사이의 규정된 범주나 경계를 넘나듦을 지칭하는 (‘위반transgression’과 관련된) ‘transgredientnyi’는, 그간 ‘경계 이월적(移越的)’이라는 번역어가 사용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외재적(外在的)’이라는 단어로 옮겨졌다. 번역어의 선택에는 언제나 번역자가 짊어진 사유의 노고가 뒤따른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 경우 말 그대로 ‘외재적’으로 옮겨져 왔던 ‘vnenakhdimost'(exteriority, outsideness)'와는 앞으로 어떻게 구별해 갈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잠재적인 논란들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바흐찐의 저술들이 다시금 빛을 보게 되었다는 사실은 더 없이 소중하다. 바흐찐이 일단의 지적 유행에 밀려 적절히 소비되고 말 ‘박제된 이론’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더구나 "행위 철학"은 그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논란의 근원이며 바흐찐 신화의 기원에 해당하는 텍스트지만, 실제로는 거의 읽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번 한국어 번역본의 출간이 그 ‘신화’의 진상을 밝혀주는 계기가 되리라 기대한다. 이로써 바흐찐은 누군가에게 사유의 새로운 심화나 전화(轉化)를 촉발하겠지만,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실망과 환멸을 주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신화가 그저 신화로 남겨지지 않았다는 데 있는 게 아닐까? 직접 만나고 읽을 수 있는 신화!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는데, 사유의 ‘전화’든 ‘실망’이든 일단 맞부딪혀보고 판단할 일이다.

글 / 최진석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이 글은 계간 <자음과 모음> 2011년 여름호(제12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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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와 바흐찐, 첫 번째 만남

우리나라에 바흐찐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80년대였다. 루카치로 대표되던 맑스주의 문예이론의 엘리트주의를 넘어서는 한편으로, 문학과 예술의 민중적 토대에 대한 모색이 활발히 진행되는 가운데 집중적으로 소개되었던 것이다. 바흐찐은 문화를 루카치처럼 ‘해방’과 ‘진보’의 위대한 이념이 전개되는 과정이 아니라, ‘대화’와 ‘웃음’을 통해 인간의 상상력이 종합되고 역사 속에 풀려나오는 과정으로 묘사했다. 그가 보기에 문화는 평범한 민중들의 삶 자체가 일으키는 사건에 다름 아니었고, 이는 ‘민중문화’를 노래하던 80년대의 분위기와도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더구나 혁명의 고향인 러시아 출신의 이론가라는 사실은 바흐찐을 ‘신화적’ 위광 속에서 조명하기에 충분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90년대에 접어들며 한국사회가 본격적인 ‘문화의 시대’에 진입하면서, 오히려 그의 이름은 홀연 사라져 버렸다. 그의 책들은 절판도서의 목록에 올라갔고, 세간의 관심도 시들해졌다. 효용이 다한 걸까? 그리고 2011년, 돌연 그가 되돌아왔다! 이번에는 ‘러시아어 완역본’이란 꼬리표를 달고서. 그저 철지난 이론의 반복일까? 혹은 아직 소진되지 않은 신화의 귀환일까? 그의 이름이 낯선 독자들을 위해 간략한 소개부터 해보자.




바흐찐, 신화와 삶의 이력

1895년에 태어난 바흐찐이 대학을 졸업할 즈음은 혁명의 격랑이 러시아 전역을 휩쓸던 때였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빈궁하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서클을 조직해 강의와 연구, 세미나를 하며 그 시간을 버텨냈다. <문예학의 형식적 방법>(1928), <프로이트주의>(1927), <마르크스주의와 언어철학>(1929) 등은 이 무렵 바흐찐이 서클 친구들의 명의로 출판한 책들인데, 진짜 저자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논란중이지만 적어도 바흐찐의 영향아래 쓰여졌을 것이란 사실은 분명하다. 정식으로 그의 이름으로 출판된 저작은 1929년에 나온 <도스토예프스키 창작의 문제들>이었고, ‘대화주의’라는 개념을 낳은 이 책은 후일 그에게 불멸의 명성을 안겨다 준다.

우연하게도, 첫 저작이 나온 직후 바흐찐은 소비에트 당국에 체포되어 카자흐스탄 유형길을 떠나게 된다. 이유는 분명치 않은데, 아마도 스탈린의 대숙청 와중에 ‘미심쩍은’ 지식인들에 대한 숙청작업의 일환이었던 듯하다. 다행히 죽음은 면했지만 중앙아시아 황무지로의 유배는 거의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새옹지마랄까, 유형의 댓가로 바흐찐은 잔혹한 시대에서 살아남게 된다. 이 시기 그의 청년시절의 벗들은 대부분 총살되거나 실종되었던 것이다. 유형이 끝난 후엔 지방에서 교사생활을 하며 연구를 이어나갔다. 30년대의 괴테론(크로노토프론)이나 40년대의 민중문화론이 이 시절의 성과들이다. 특히 <프랑수아 라블레와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 문화>(40년대 집필, 65년 출간)는 시간이 갈수록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대작으로 현대철학과 문화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스탈린 사후, 정식으로 복권된 바흐친은 6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바람과 함께 서구사회에서 대단한 환영을 받게 된다. 그의 저술들이 속속 발굴·번역되었고, 1980년대에는 ‘바흐찐 산업’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현대 인문사회과학에서 중요한 흐름을 형성한 것이다. 한국에 그의 이름이 소개되었던 것도 이런 맥락을 통해서였다.


바흐찐과 한국사회의 두 번째 만남. ‘귀환’의 의미

짐작했겠지만 80년대에 영미권을 통해 소개된 바흐찐은 어느 정도 이론적 기성품의 형태에 가까웠다. 바흐찐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서구에서 생겨난 문제의식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고, 그의 저작들 역시 중역본들이 유일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시절 한국사회와 바흐찐의 만남이 ‘신화’와 뒤이은 ‘망각’으로 기록된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열광이든 망각이든 우리 자신의 체화된 문제의식으로부터 나온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에 출간된 바흐찐 선집 두 권, <예술과 책임>과 <프로이트주의>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바흐찐 신화가 이미 한물간 지금 그의 저작들이 원어로부터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객관적인 관점에서 그의 사유를 우리 내적 문제들과 부딪히게 하고 새로운 문제의식을 생산하게 만들 기회일지 모른다. 유행하는 이론이 아니라, 빛바랜 신화일지언정 고전으로서 바흐찐을 읽게 된다면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사유의 새로운 단초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이번에 나온 선집은 이른바 바흐찐 사유의 ‘기원’에 해당하는 글들이다. 1920년대 초엽에 집필된 ‘예술과 책임’, ‘행위철학’은 번역의 난해함과 어려움 때문에 지금껏 제대로 읽히지 못했다. 이런 텍스트가 한국어로 초역됨으로써 전공자뿐만 아니라 여타 인문사회과학의 연구자들 또한 바흐찐의 초기 사상에 접근할 통로가 생겨난 것이다. 아직 두 권에 불과하지만 한국어판 선집 간행의 가장 큰 의미는 여기 있다고 생각된다.

이로써 바흐찐과 우리의 두 번째 만남은 더 이상 ‘신화’라는 후광 속에 있진 않을 듯하다. 신화는 제대로 알지 못할 때나 피어나는 이미지니까. 하지만 신화의 휘장을 걷어냈을 때 비로소 현실을 생산하는 사유의 가능성이 나타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의 만남을 문화라 한다면, 바흐찐도 언급했듯, 역사 속의 문화는 신화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나날의 실천 속에서 형성되는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에 다소간의 매혹을 느꼈다면, 서둘러 도서관으로가 바흐찐의 글들을 넘겨보길 바란다. 그것이 사유와 실천으로서 문화의 시작인 것이다.



글 / 최진석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 이 글은 2011년 3월 27일 서울대학교 대학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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