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수유너머N이 시작됩니다!





웹진 수유너머N 기획팀





1. [웹진 수유너머N]의 포부


수유너머N이 [웹진 수유너머N]을 시작합니다. 이미 훌륭한 인문학 웹진들이 많이 있는데 굳이 또 하나의 웹진을 보태려 하는 것은, ‘지식과 삶을 잇는 웹진’, ‘여러 지식을 나누는 웹진’을 만들고자 하는 욕심 때문입니다. 


첫 번째로 [웹진 수유너머N]은 ‘지식과 삶을 잇는 웹진’을 지향합니다. 여러 지식이 우리 삶에 어떤 가르침을 주는지 고민하는 웹진이 되겠습니다. 인문학의 부흥이라 해도 좋을 만큼 여러 글과 강의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덕분에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사상가들의 생각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상이 삶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지에 대한 설명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듯합니다. 인문학만이 아닙니다. 연일 새로운 발견을 전하는 교양 과학서가 쏟아지지만, 그 발견이 우리 사유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설명하는 책은 드문 편입니다. 지식의 습득이 지적 치장이나 허세에 그치지 않으려면, 지식과 삶을 이으려는 시도가 필요합니다. [웹진 수유너머N]은 명료하고 쉬운 언어로, 여러 지식이 삶에 던지는 소중한 가치를 발굴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인문학 서적을 읽는 이유, 웹진 수유너머N이 설명해보겠습니다!^^


두 번째로 [웹진 수유너머N]은 ‘여러 지식을 나누는 웹진’이 되고자 합니다. 잘난 척 포부를 밝혔지만, 이미 여러 곳에 다양한 분들이 ‘지식과 삶을 잇는’ 훌륭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여러 웹진에서, 논문집에서, 공개 강연에서 보석 같은 산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이런 훌륭한 말과 글을 만들어내는, 함께 책을 읽으며 토론하고 고민하는 공부 모임도 많이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이런 훌륭한 글과 강연 그리고 모임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어 여간해서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웹진 수유너머N]은 이처럼 소중한 여러 지적 산물을 수집하여 독자 여러분께 추천하고, 여러 공부 모임을 발견하여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귀한 말과 글이 더 널리 알려지고, 여러 공부 모임이 더 활성화되는데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2. [웹진 수유너머N]의 코너


이를 위해 우선 다섯 개의 코너를 마련해보려 합니다. 


[수유너머N이 추천하는 말과 글]

앞서 말씀드렸듯, 세상에는 훌륭한 말과 글이 아주 많습니다. 풍성하게 운영되는 여러 다른 웹진과 블로그의 글들에서부터, 아카데믹한 격식이 오히려 그 가치를 가리고 있는 학술논문에까지, 수없이 많은 좋은 글들이 있습니다. 글만이 아닙니다. 인터넷에서 부쩍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된 강연과 발표에서도 보석 같은 메시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수유너머N이 추천하는 말과 글]에서는 도처에 흩어져 있는 훌륭한 말과 글을 모아, 추천의 변과 함께 독자 여러분께 권하려고 합니다. 



                                         보석 같은 말과 글을 원기옥 마냥 모아 모아 드립니다. 

                                             모여라! 좋은 작품! 발굴하자! 세미나! 



[우리 세미나를 소개합니다]

직접 책을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일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 낸 지적 산물을 접하는 일만큼이나 즐겁습니다. 게다가 공부의 목적이 자신의 삶의 지침과 방향을 얻는 것이라면, 이런 적극적인 형태의 공부는 필수적입니다. 누구도 내 삶의 문제에 대해서 나보다 더 잘 알지는 못할 테니까요. 이미 주위에는 무수히 많은 공부 모임들이 있습니다. 수유너머N의 세미나도 그 중 하나입니다. [우리 세미나를 소개합니다]에서는 수유너머N의 세미나들을 시작으로, 여러 훌륭한 공부 모임을 소개합니다. 


[빌린 책]

다양한 영역의 책들을 간략하고 발랄하게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독서는 익숙한 만큼이나 무료해진 일상에서 탈출하는, 아마도 가장 손쉬운 방법입니다. 애서가로 유명한 친구의 책장이나 도서관에서 낯선 책을 빌릴 때,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낯선 시선까지 빌립니다. 가끔은 그 빌린 책이 우리의 인생의 방향을 돌려놓기도 합니다. 평소 같으면 돌아보지 않았을 책인데 우연히 뽑아들어 읽고는 혼자 찌릿했던 감동을 나누기 위해, 세상에 수없이 존재하는 N개의 시선과 N개의 문제를 탐험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의 ‘빌린 책’을 독자 여러분께 전하겠습니다. 



                                               간혹, 빌린 책에서 귀한 선물을 발견합니다^^

                 빌린 책에서 나온 돈은 돌려주셔야 하겠지만, 감동은 돌려주지 않으셔도 되니까요. 



[기획 서평]

기획 서평에서는 한 권의 책을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여러 권의 책이나 작품을 특정한 주제와 관점을 가지고 다룹니다. 이를 통해 해당 주제에 존재하는 논쟁점과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삶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살펴봅니다. 우선 [기획 서평]은 세 가지 주제로 출발하려 합니다. 첫 번째는 [봄날엔 맑스]입니다. 봄의 에너지를 받아^^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을 시대 순으로 꼼꼼히 검토하면서,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알아봅니다. 두 번째는 [이 한 장의 사진]입니다. 한 장의 사진에 담긴 사유와 가치를 세심한 시선으로 검토합니다. 세 번째는 [진화와 생명]입니다. 생명이 지금의 모습을 얻은 과정인 진화를 여러 권의 주요한 책을 통해 검토하면서,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던지는지 탐구하고자 합니다. 


[화요토론회 스케치]

화요토론회는 수유너머N이 매월 두 차례, 연구실 회원이나 외부의 연구자 혹은 활동가를 초청하여 새로운 사유의 흐름과 접속하는 시간입니다. [화요토론회 스케치]에서는 화요토론회에서 발표된 글의 논지를 간략히 요약하는 한편, 발표자와 토론자의 사유가 겹치고 분기하며 만들어낸 이야기들을 실어 나르겠습니다.



3. [웹진 수유너머N]의 업데이트


[웹진 수유너머N]이 가진 다섯 개의 코너는 기본적으로 1주에 1번 업데이트됩니다. 다만, [화요토론회 스케치]의 경우 화요토론회가 격주로 이루어지기에, 2주에 1번 업데이트될 예정입니다. 불가피한 일이 없다면, 일주일에 4~5개의 글로 독자 여러분을 꾸준히 찾아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삶에서 지식을 찾고 지식으로 삶을 연마하는 웹진, 수많은 지식과 만나 소통하는 웹진이 되겠습니다. 응원해주십시오.





신고
Posted by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은 올해부터 우리 시대 인문학을 비판적으로 되씹고 새로운 출발을 내딛기 위해 강의, 심포지움, 총서를 통해 <불온한 인문학>을 기획하고 있습니다.('불온한 인문학' 카테고리 바로가기) 그 일환으로 지난 3월 12일에 심포지움을 통해 발표한 글들이 책으로 묶여 출판되었습니다. '불온한 인문학' 총서의 첫번째 책입니다.

휴머니스트 홈페이지에 실린 <불온한 인문학 - 인문학과 싸우는 인문학> 책소개를 여기에 옮깁니다.
(원글 바로가기)
 







1. 우리 시대 인문학은 어떻게 소비되는가 (기획의도)
 
지난 10년 동안 인문학의 가장 큰 화두는 ‘대중과의 소통’이었다. 무한 경쟁이라는 신자유주의적 환경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인문학은 학교 바깥에서 재기를 위한 실험을 시작했다. 대중과 직접 만나서 교감하는 공부를 하고, 일방적으로 주입되는 지식을 넘어 자유로운 토론과 대화를 통해 확장되는 앎의 지평을 지향했다. 인문학은 이렇게 사회로 걸어 나왔으며, 지금 진행되는 ‘인문학의 부흥 시대’는 그 발걸음이 만들어낸 성과다.
인문학의 대중화, 그 실험의 한복판에 연구공동체 ‘수유너머’도 있었다. 2000년 활동을 시작한 ‘수유너머’는 제도 밖 연구공동체 실험과 대중강연 등으로 인문학 부흥에 거름 역할을 했다. 그들의 시도는 신선했고, 앎이 삶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대중에게 알렸다.
고전을 통해 얻는 지식과 교양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도서관과 문화센터, 기업, 각종 기관에서 여는 대중강좌들을 중심으로 인문학을 찾는 사람이 늘었다. 재소자를 위한 인문학에서부터 최고경영자(CEO)를 위한 인문학까지, 그 대상과 성격도 다양했다. 그리하여 ‘쓸모없는 학문’ 취급을 받았던 인문학은 이제 ‘유용한 학문’으로 각광받고 있다.
 
멜로드라마에 책 읽는 남성 주인공이 이전에도 등장하긴 했지만 그때 그 주인공은 사회에 대한 상처를 가진 이었거나, 아니면 지식인이라는 배경이 있는 인물이었다. 가령 ‘인욱’이라는 인물이 그랬다.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소지섭이 연기한 인물. 그 드라마에서 인욱은 자신이 읽었던 그람시의 《옥중수고》를 하지원이 연기한 수정이란 인물에게 선물했다.……그는 과거 학생운동을 경험한 지식인이었다. 재벌 후계자 캐릭터는 조인성이 연기한 ‘재민’이었다. 그는 이른바 ‘무개념’ 캐릭터였지 않았던가. 2000년대 초?중반만 해도 재벌과 인문학은 그리 잘 어울리지 않았던 조합이었다. 하지만 6~7년이 흐른 지금, 인문학은 재벌 후계자와도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비싼 외제차나 고가의 명품 슈트 못지않게 젊은 재벌 남성을 돋보이게 만드는 액세서리로 인문학이 선택되고 있는 건 아닐까?……나는 〈시크릿 가든〉의 인문학 책 읽는 주인공 ‘김주원’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이 어떤 의미로 통용되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인문학은 삶을 더 여유롭고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스타일이자, 세련된 감수성과 지적인 안목을 심화하게 해주는 교양의 원천이 된 것이다.
― 본문 94~95쪽, 〈3장 불온한 인문학은 사유의 정치다〉에서
 
 
2.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의 새 프로젝트 ‘불온한 인문학’ (이 책의 개요)
 
인문학 붐을 일으켰던 ‘수유너머(노마디스트 수유너머N)’는 ‘지금의 인문학’이 인문학 본연의 비판적 힘을 무장 해제시키는 독이 될 수 있음을 직시하고, ‘인문학 부흥’ 현상을 인문학이 빠져든 위기와 몰락의 징후로 보았다. 국가와 자본의 넘치는 관심과 후원은 인문학 재생의 밑거름이 아니라 나락일 수 있다. 즉, 인문학이 권력과 돈에 눈멀고 귀 막고 입을 봉한 산송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인문학의 부흥은 이윤 창출을 위한 자본 축적 전략과 지배의 효율화를 위한 국가 통치 전략의 소프트 버전이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은 우리 시대의 인문학과 정면으로 대결해야 한다고 외친다. 이를 위해 인문학에 ‘비판성과 전복성’을 되찾아주는 ‘불온한 인문학’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이들은 “국가와 자본, 권력에 길들여진 인문학은 ‘지금-여기’의 현실을 스스로 사유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며 “지금은 인문학이 가진 위협적이고 전복적인 성격, 곧 불온함을 벼리는 것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지금의 인문학은 사회의 지배적인 통념에 정면으로 맞서는 불온성이 거세된 채 구체적인 삶과의 접점도 잃고 ‘문화적 교양주의’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인문학이라는 형식으로 대중과 만나고 소통하는 것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의 소시민적 일상에 길들여진 대중이 어렵고 낯선 주제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함께 고민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재적인 정치?사회적 주제들은 그들을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들기에 곧잘 반려되곤 했다. 강의는 되도록 먼 나라, 멀리 있는 사람들, 오래된 과거에 대한 정보들, 두루두루 유익하기만 한 ‘교양’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채워지는 게 권장되었다. 품격 있는 ‘고전’을 다루면서도 《논어》, 《맹자》 같은 동양의 고전은 지루하다는 이유로 제외되는 일이 허다했다. 물론, 서구의 고전도 예외는 아니었다. 플라톤이나 헤겔 등 사상사의 거인들은 너무 어려워서 빠지고, 마르크스나 레닌 등은 어딘지 위험스러워 보여서 누락되었다.……그렇게 대중과의 만남과 소통이 ‘건전해질수록’ 딜레마는 깊어진다. 사회로 발길을 돌렸을 때 인문학이 욕망하던 것은 무엇이었나? 세상과 담쌓은 ‘온실 속 지식’이 아니라, 안온한 일상에 균열을 내고, 무사안일한 상식을 질타하며 낯선 가치, 새로운 의미를 제기하자는 소신은 ‘강의를 위한 강의’에 밀려 종적 없이 사라졌다. 수준의 높낮이 문제가 아니다. 현실의 요구들에 몸을 맞추다보면, 날카롭던 칼날도 무디어지고 날쌔던 신체도 둔중해진다. 본문 6~7쪽 〈지은이의 말〉에서
 
 
3. 지은이 소개 및 차례
 
최진석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www.nomadist.org) 연구원.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러시아에서 문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말과 사유, 문화의 정치적 동력학이 최근의 연구 주제다. 함께 지은 책으로 《문화정치학의 영토들》, 《코뮨주의 선언》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레닌과 미래의 혁명》(공역), 《해체와 파괴》 등이 있다.
 
문 화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연구실에 접속하기 전까지만 해도 ‘방송 일’밖에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요즘은 방송 일도 잠시 접고 연구실 활동에 푹 빠졌다. 최근에는 공동체와 문학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
 
정정훈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 이후 사회적 배제와 문화정치학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함께 쓴 책으로 《코뮨주의 선언》, 《소수성의 정치학》, 《모더니티의 지층들》, 《문화정치학의 영토들》,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2권, 정치사회 편) 등이 있다.
 
이진경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하여, 《철학과 굴뚝청소부》, 《수학의 몽상》,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등을 썼다. 그 과정에서 함께 사유했던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해 《철학의 외부》, 《노마디즘》, 《자본을 넘어선 자본》, 《미-래의 맑스주의》, 《외부, 사유의 정치학》, 《역사의 공간》 등의 책을 썼다.
 
손기태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대학에서 신학과 종교학을 공부했다. ‘스피노자’ 공부를 시작한 이후 신학과 철학, 종교는 언제나 그의 관심사 한가운데를 차지해왔다. 최근에는 바울의 정치신학을 새롭게 조명하는 시도들에 주목하고 있다.
 
박정수 수유너머R 연구원. 대학에서 현대소설을 공부했다. 프로이트, 라캉, 지젝, 푸코, 들뢰즈, 카프카, 루신에 관심이 많으며, 자칭 ‘욕망의 정치경제학’을 개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현대소설과 환상》, 《청소년을 위한 꿈의 해석》이 있고, 옮긴 책으로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등이 있다.
 
차례
지은이의 말. 불온한 인문학은 왜 인문학이 아닌가

프롤로그. 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선언
1장 우리 시대 인문학은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가인문학 담론의 유행과 소비 양상 ― 문 화
2장 인문학에 저항하는 불온한 사유를 시작하다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시론 ― 최진석
3장 불온한 인문학은 사유의 정치다야만성의 인문학을 위하여 ― 정정훈
4장 횡단의 정치, 혹은 불온한 정치학불온성의 ‘트랜스내셔널’을 위하여 ― 이진경
5장 인문학의 현장은 어디인가 실수-방황의 인문학 현장 ― 박정수
6장 인문학은 위험한 존재를 만들 수 있는가‘희망의 인문학’이 가르쳐준 희망? ― 손기태
 
 
4.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온성과 전복성의 날이 예리하게 서 있는 인문학이다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은 문제적이다. 대학생이 졸업과 동시에 신용 불량자가 되고, 청소 노동자가 화장실에서 밥을 먹어야 하며, 개발 이익에 눈먼 국가와 자본의 폭력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공권력’이라는 테러를 자행한다. 소시민의 일상은 ‘글로벌 리더십’과 ‘글로벌 스탠다드’를 이룩하고자 희생을 강요당한다. 이렇게 파괴된 삶의 터전에서 ‘인간’과 '문화'를 말하는 인문학은 어떤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은 새로운 앎과 감수성, 사유와 활동이 의미를 갖기 위해 국가와 자본, 휴머니즘이라는 기치를 내건 인문학과 대결한다. 지배적 가치와 통념에 익숙한 현재의 인문학을 이탈해 새로운 삶을 향한 길을 만들고자 한다. 《불온한 인문학》은 ‘인문학'이란 이름으로 길든 영토를 떠나는 첫 걸음이다. 그 첫 걸음은 현행의 ‘인문학 배치’에 이의를 제기하고 균열을 내는 데서 시작한다. 국가와 자본의 통제를 받고 휴머니즘을 명목으로 영유되던 죽은 지식을 지금-여기에 해방적 실천을 위한 앎으로 다시 가져오는 것이다.
국가와 너는 같지 않다고 지적하는 것, 민족의 영광과 네 개인의 행복은 별개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 안온하고 평화로운 일상 뒤에 ‘우리’로부터 배제된 이웃이 있음을 폭로하는 것, 인문학은 순수하게 존재한 적이 없음을 설명하는 것. 이처럼 정체성과 동일성의 서사를 거절하는 인문학은 불온하다. 통념적인 삶의 관성에 낯설고 불쾌한 소음을 일으키며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온한 인문학, 혹은 인문학의 불온성이야말로 우리 삶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줄 것이다.
 
인간과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바꾼다는 미명 뒤로 펼쳐진 삶의 적나라한 모순과 질곡을 질타할 줄 모르는 인문학은 인간을 위한 것도 아니고, 삶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런 환상 따위로 세상과 자신을 중독 시키는 인문학은 차라리 해체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 새로운 인문학을 위한 제언은 국가와 사회를 부강하게 만들거나 보편적 휴머니즘을 구현하는 것도 아니요, 인문학의 잃어버린 가치를 회복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지금-여기의 현실을 작파하고 ‘다른’ 현실을, 우리의 감각과 지식, 상식의 기반을 뒤흔들어 우리를 ‘낯선’ 변경으로 던져 넣는 것이어야 한다.……불온성, 그것은 현재 알고 있는 삶의 형태를 공고하게 다지고 정상화시키는 게 아니라, 익숙하고 안온한 삶에 낯설고 날선 감각, 우리 자신을 베이고 다치게 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삶의 형태와 강제로 맞부딪히게 만드는 과정에 붙이는 이름이다. 잠정적으로나마 우리의 탐구에 ‘불온한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본다면, 그것은 '진정한' 인문학을 가르친다거나, 인문학의 또 다른 '재생'이나 '반복'을 위함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우리 여정의 출발점이 어디이며 그 과정이 어디로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지도 위에 그려보기 위해 선택한 푯말일 뿐이다.
― 본문 17~18쪽〈프롤로그, 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선언〉에서
 
 
5. 사유의 불온성, 사상의 전복성, 비판의 급진성! 이것이 인문학이다
 
불온성과 전복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온성이란 어떤 뜻밖의 만남에서 느끼는 ‘저들’의 기분이다. 위대함과 탁월함의 찬양자들, 자신의 고상함과 고매함을 자랑삼는 자들,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고 있는 자들, 바로 그런 자들이 느끼는 기분이다. 또한 불온성은 ‘저들’은 아니지만 ‘저들’을 믿는 자들, 자신들이 저들과 같다는 감각을 갖고 있는 ‘그들’의 감정이기도 하다. 자신은 저들이 찬양하는 위대함이나 탁월함을 갖고 있지 못하면서,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을 만한 그런 지위도 갖지 못하면서, 그런 자랑과 믿음을 공유하고 있는 자들이다. 불온성은 ‘저들’을 불편하고 불쾌하게 하는 당혹스런 침범 앞에서, ‘그들’을 향한 이해할 수 없는 당당함 앞에서, ‘저들’과 ‘그들’이 느끼게 되는 기분이고 감정이다.
불온함(전복성)이라 할 때 우린 통상 반정부적인 것을 떠올리지만 그것이 꼭 불온한 것은 아니다. 가령 어떤 제도를 요구하는 투쟁은 많은 경우 요구하는 내용과 이유, 사고방식, 투쟁방식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불온하다고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불온함이란, 통념이나 분명한 구별들이 깨질 때 발생하는 불안감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확실하다고 믿던 것들을 와해시키고 그 경계를 횡단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불온한 인문학’이란 이름을 내걸고 시내 한복판에서 공개 심포지엄을 열었을 때, 입구에서 인문학이 무엇인지도 알고 책도 많이 읽었다고 자처하는 한 사람이 “이게 무얼 하려는 것인지” 물을 때에 못마땅함과 불편함, 불쾌함에 당혹스러움까지 뒤섞인 그 얼굴에서, ‘저들’, 혹은 ‘그들’이 느끼는 불온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온한 인문학》은 지식과 교양 그리고 효율과 순치의 흐름으로 구성되고 있는 인문학의 흐름에 반한다. 그리하여 인문학의 고유한 전복성과 불온성을 찾아 인문학을 재정의하고 현대자본주의 비판을 위한 담론의 장을 여는 책이다.
 
세상 모든 것에 ‘내 것’이라는 말뚝을 박아놓고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고 싸우는 모습처럼 말에게 낯선 장면들이 또 있을까? 사유 재산 제도란 오직 인간의 눈으로 볼 때만, 익숙하고 당연했던 게 아닐까? 인문학이 소중하고 또 소중하다고 부르짖었던 것들, 즉 인간, 문화, 예술, 민족, 국가…… 사실 이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제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낯설게 하기가 필요한 때다!
과연 우리 자신을 낯설고 거북하게 만드는 것도 인문학의 소명이 될 수 있을까? 기존의 익숙하던 배치를 뒤엎고 다른 방식으로 뒤바꿨을 때 새로움보다는 이질성이나 거부감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나쁜[反]’ 인문학일까? 역으로 언제나 편안하고 즐거움만 선사하는 인문학, 그래서 기존의 배치를 변함없이 유지하도록 정당화 담론을 제공하는 인문학이 ‘좋은’ 인문학일까? 수월하게 소비되지 않은 인문학, 목구멍에 걸려 잘 삼켜지지 않는 인문학, 위장 장애를 일으켜 이미 소화시켰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게워내 직시하게 만드는 인문학―이제 ‘행복’과 ‘희망’의 인문학, ‘화해’와 ‘위로’의 인문학을 넘어서 ‘불편’하고 ‘낯선’ 반(反)인문학을 말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반인문학, 또는 인문학에 저항하는 인문학. 지금 필요한 것은 그 불편함과 낯섦을 창출하는 힘이며, 그 힘을 우리는 ‘불온하다’고 부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생산해야 할 인문학의 존재 양태, ‘어떤’ 인문학이 필요한가에 대한 응답은 바로 순응하지 않는 인문학, 즉 ‘불온한 인문학’에서 찾아져야 한다.
― 본문 83쪽, 〈2장?인문학에 저항하는 불온한 사유를 시작하다〉에서



알라딘 책소개 페이지 바로가기
교보문고 바로가기
YES24 바로가기
반디앤루니스 바로가기
영풍문고 바로가기





 
신고
Posted by 노마디스트

여름강좌(7/6-8/10) "근대의 외부들 : 다른 세계를 발명하는 인류학적 상상력" 강사 인터뷰!

 

 

 

"상상력 없이 우린 변화할 수 없어요!"  

-홍서연 강사와의 인터뷰-

 

 


 

홍서연 소개 - 수유너머N 연구원.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역사인류학을 공부했음.  

 

 

 

질문 : 안녕하세요^^ 저는 인류학에 대한 관심은 많은데, 왜 이 공부에 끌리는지 잘 설명을 할 수가 없어요.

인류학은 확실히 인문학 독자들에게도 조금 낯설기도 하구요.

인류학에 대한 전반적 소개부터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왜 인류학을 공부해야하는지도 알려주세요!

 

 

   malinowski_wideweb__430x250.jpg    클라스트르_과야키 인디언.jpg

 

 

 

홍서연 : 확실히 인류학은 우리나라에서 철학이나 다른 분야보다 훨씬 안 읽히죠! 인문학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레비-스트로스나 모스의 이름이 낯설지 않겠지만 그들의 책을 꼼꼼히 읽어본 독자는 그다지 많지 않은 듯 하고요. 외국 인류학자들이 낸 이론서와 수많은 민족지 작업들은 별로 번역되어 있지 않고, 과거에 번역된 것들도 절판되어 잊힌 상태예요. 국내 인류학자들의 작업은 소수의 전공자들만 읽고요.                        

 

인류학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실증적인 학문이라는 점이에요. 인류학자들은 '현지조사'라는 방법으로, 직접적인 관찰을 통해 기록하고 연구합니다. 그 대상이 되는 것은 사람들의 행위와 말, 의례, 생산기술 또는 생활기술, 문물, 친족관계,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드러나는 한 사회의 지식, 정치, 상징적인 것들, 사회관계와 사회조직, 제도, 그리고 또… 한 사회의 특이성, 사람들이 한 마디로 '문화'라고 지칭하는 것이죠.

다양한 것들의 세세한 면모를 읽는 데서 아무런 재미를 못 느낄 수도 있겠죠. 취향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인류학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미미한 건 인문학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질문 : 인류학에 대한 관심이 저조한 것이 인문학 자체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부족 때문이라... 

좀 더 설명 부탁드립니다. 

 

홍서연 : 스스로 사유하기 위해 인문학을 공부하기보다, 보증된 이론 또는 이론가에게 기대기 위해 공부하는 태도와도 관련이 있어요. 그런데 학문은 보증을 해 주는 안전장치가 아니거든요. 특히 인문학은요. 가령 철학은 언제나, 익숙한 방식으로 굳어져버린 믿음들을 전복하여 이미 있었던 개념들을 새롭게 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어요. 우리가 푸코, 들뢰즈, 랑시에르에게 열광한다면 그것 또한 그들에게 안주하기 위해서는 아니거든요. 그들의 권위에 의존하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이율배반적이고요.

다시 인류학으로 돌아와서, 인류학은 현장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현실의 무한한 개별성으로부터 시작하는 셈이죠.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 언어로써 다루기 힘든 부분, 개념과 언어의 틀 밖으로 세어나가 버리는 부분, 거기 뿌리박고서 하는 작업입니다. 흔히 감각을 통한 사유는 편견에 지배되기가 쉬운데, 인류학의 사유는 오히려 자문화중심주의적인 편견을 깨뜨리는 사유입니다. 거기에 긴장이 있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개별성 속에서 어떻게 편견에 치우치지 않을 것이며, 개념화 작업 속에 어떻게 특수성을 담을 것인가? 뿐만 아니라 현지인들과 접촉해서 낯설고 불편한 생활양식 속으로 들어가서, 종종 자신에게 적대적인 사람들과 함께 얽히면서 강도 높은 감정적 투입 속에 자기 몸을 던져 넣어야 하지요. 인류학자들의 민족지 작업들은 그걸 견뎌낸 다음에만 탄생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현실은 그 익숙함 때문에 다 알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착각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다면 인문학을 공부할 필요가 없죠. 우리가 경험과 교육을 통해 알고 있는 것은 현실의 아주 작은 조각들일 뿐이에요. 인류학은 우리가 '모른다'는 걸 알게 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알 때에만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가 있어요.

 

 

mauss.jpg malinowski.jpg        Clastres1.jpg

                모스                           말리노프스키                             클라스트르        

 

질문 : 강좌 제목은 그런 인류학의 성격과 어떤 관련이 있나요?

왜 "근대의 외부들"이고 왜 "다른 세계를 발명하는 인류학적 상상력"인가요?

 

 

 

홍서연 : 필연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물질적 조건 속에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려 한다면 거기서 필요한 건 상상력이에요. 상상력은 우리가 지각하는 하나의 사물, 하나의 사건, 하나의 현상을 통해 무한한 확장을 이루는 능력이에요. 경계들을 넘어서 체감하는 능력이고, 한계들을 넘어서 인식하는 능력이죠.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언제나 변화를 가져옵니다. 다시 말해 상상력 없이는 변화를 가져올 수 없어요. 강좌 기간 동안 우리는 함께 책을 읽고 얘기를 하고 사유를 할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언가 변화된 상태로 나아갈 거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떤 새로운 세계를 발명할 겁니다.

이번에 다룰 여섯 권의 책은 모두 '원시사회'라고 불리는, 근대사회와는 판이하게 다른 세계에 대해 얘기하고 있어요. 물론 인류학이 언제나 그런 사회를 연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건 우리에게 가장 이질적인 문화를 통해 우리 자신을 사유하려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책들에서 우리는 이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몹시 친숙한 것들도 만나게 될 겁니다. 그러고 나면, 근대 이후의 사회는 '근대적인 것'으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편견에 가득한 착각인지도 알 수 있을 거예요. 결국은 나 자신에게서 나의 외부라고 생각했던 것, 다시 말해 타자를 발견할 거예요. 우리 사회 안에서 우리 사회의 바깥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될 거고요. 좀 전에도 '솔직함'을 말했지만,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한 사람은 기만에 맞설 수가 없어요.

 

 

 

질문 : 강의 주제로 되어 있는 책들의 저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Leroi-Gourhan.jpg   .레비스트로스.jpg

             르루아-구랑                              레비-스트로스

 

 

 

홍서연 : 말리노프스키(Bronisław Malinowski, 1884-1942)는 영국 사회인류학의 창시자이고 현지조사 방법론을 정립한 사람이에요.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증여론>의 모스(Marcel Mauss, 1872-1950)는 증여관계뿐만 아니라 주술, 의례, 기술(테크닉)에 대해 중요한 작업들을 남겼죠.

르루아-구랑(André Leroi-Gourhan, 1911-1986)은 선사시대 도구와 종교를 연구한 프랑스의 고고학자이자 인류학자에요. <인간과 물질>, <환경과 기술> 등의 책을 통해서 인지와 생태학에 대한 이후의 사유들에 대해 큰 영향을 끼쳤는데, 국내에는 거의 소개가 되어 있지 않아요.

프랑스의 정치인류학자인 클라스트르(Pierre Clastres, 1934–1977)는 남아메리카 부족사회들에 대한 현지조사를 바탕으로 해서 상당히 이론적인 논의를 전개하는데,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와 <폭력의 고고학> 두 논문집이 번역되어 있어요. (과야키족에 대한 민족지가 번역되지 않은 건 좀 아쉬워요.)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프랑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1908-2009)의 책은 여러 권이 번역되어 있는데, 강의 주제인 <야생의 사고>는 그 중에서도 가장 구조주의적인 냄새가 옅은 책이지요.

 

 

 

질문 : 강의 프로그램으로 선택한 책들의 선정 이유를 알려주세요^^

 

 

 

홍서연 : 사유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책들을 선택했습니다. 첫 강의에서는 말리노프스키와 함께 영국 사회인류학을 소개하면서 인류학이 흘러온 역사를 짚어볼 겁니다. 사회인류학은 인류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형성했거든요.

 

또한 경계를 넘나들기에 좋은 저자들을 선택했습니다. 인류학적 사유 자체가 경계를 넘어 체감하는 사유이지만, 선택한 책들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말리노프스키의 <미개사회의 성과 억압>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가지고 실험을 합니다. 모스의 <증여론>은 데리다, 부르디외 등에게 무한한 영감을 제공했고요. (길게 말하면 잔소리일 터!) 르루아-구랑의 <몸짓과 언어>는 아마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소개되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 고고학과 인류학의 연결점을 보여주기도 하고, 책의 주제 자체가 경계를 넘어 흘러요. 최근에 프랑스에서는 미학에서도 참조되고 있고요. 클라스트르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는 국가, 권력, 사회에 대한 철학적 문제제기들의 연장선상 안에서 읽힐 수 있죠. 들뢰즈, 가따리의 <천 개의 고원> 12장은 클라스트르의 '전쟁기계'에 대한 주석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모스의 "주술의 일반적 이론에 대한 초고"는 번역이 되어 있지 않은 논문인데, 주술(magic)에 대한 민족지 자료들을 가지고 이론적 작업을 합니다. 로알드 달의 <마녀를 잡아라 The Witches>를 읽어보셨어요? 마녀는 눈동자 색이 수시로 바뀌고, 발가락이 없고, 침이 파란색이고… ^^ 이 논문에서도 이와 유사한 열거가 등장해요. (어쩜 로알드 달은 이 논문을 읽고 영감을 얻었는지도?) 하지만 로알드 달이 아이들로 하여금 마녀에게 잡히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게 하기 위해 마녀의 특징들을 열거한다면(^^), 모스는 인간이 사유하는 방식을 탐구하기 위해 주술사의 특징들을 정리하죠.

 

마지막으로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는, '지식'이라는 주제에 대해 사유할 때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한 것처럼 역사성을 고려하고자 한다면, 다시 말해 시대, 지역, 사회의 특수성과 구체성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진리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분야와 관계 없이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책이에요.

 

저자들은 공부한 여정에서도 경계를 넘어 흘러다녔어요. 레비-스트로스는 법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클라스트르도 인류학을 하기 전에 철학을 했죠. 모스는 사회학자이기도 했고, 르루아-구랑은 고고학자였고, 말리노프스키는 인류학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한 다음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했어요.

  

 

질문 : 강좌를 듣기 전에 미리 준비할 것이 있나요?

 

 

홍서연 : 책을 읽고 오면 가장 좋겠지요(번역본이 있는 경우). 하지만 시간에 쫓긴다면 꼭 읽고 오지 않아도 이해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겁니다. 감각에 곧바로 와 닿는 이야기들을 들려드릴 거예요. 그러니 잘 뚫린 귀를 가지고 오세요. 그리고 들은 것들을 내가 알고 있는 것들과 결합하는 상상력을 자유롭게 풀어놓아 주세요. 강좌가 끝날 때쯤엔 더 접속률이 좋아진 뇌신경과 더 좋아진 시력과 더 예민해진 내 몸의 안테나를 확인하는 것이 이 강좌의 목적이에요.

 

 

 

     감사합니다. 7월 6일 첫 강의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강좌 신청 게시판 바로가기 (클릭~)



신고
Posted by 노마디스트



Q. 최근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홈페이지를 보면 불온함이 주요 화두입니다. 이번 강좌의 제목도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이고, 3월부터 시작된 <불온한 인문학>도 그렇습니다. 단행본 <불온한 인문학> 총서도 기획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수유너머N에서 거듭 언급하고 있는 불온함에 대해 간단히 설명 부탁드립니다.


A. 불온성이 없는 인문학은 하지 않는 게 좋다는 문제의식에서 연구실 회원들이 모여 몇 가지 활동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지난달부터 시작된 <불온한 인문학>은 책 <자본론>과 <안티-오이디푸스>를 통해 가정과 국가, 자본 등 이른바 ‘안정성’의 토대와 대결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6개월간의 세미나와 강의를 통해 스스로 자기 삶에 대해 사유하는 장을 만들고자 모였습니다. <불온한 인문학>이 불온성을 통해 인문학을 재정의하려는 시도라면, 이번 봄강좌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불온성을 사유하고, 이를 통해 불온성을 바탕으로 존재론을 사유하려는 시도입니다. 강좌이다보니 7주간 제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강의하는 형식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수유너머N에서 공동으로 기획한 프로그램들이니 이 둘은 연결되는 점이 있겠지요.


Q. 안녕학세요. 이번 강좌의 반장을 맡게 된 호연입니다. 저는 이제 대학교 2학년이고, 공대생이라 ‘불온성’, ‘존재론’ 등의 용어가 낯설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선생님이 이야기하시는 맥락에서 이 단어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미리 수강을 준비 중인 분들께도 도움이 될 수 있게 한 말씀 부탁드려요.


A. 불온함이라 할 때 우린 통상 반정부적인 것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것이 꼭 불온한 것은 아닙니다. 가령 어떤 제도를 요구하는 투쟁 같은 것은 많은 경우 요구하는 것이나 이유, 사고방식이나 투쟁방식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어서,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불온하다고 할 순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온함이란, 통념이나 분명한 구별들이 깨질 때 발생하는 불안감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확실하다고 믿던 것들을 와해시키고 그 경계를 횡단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지요. 특히 이번 강의는 존재 자체로부터 불온성을 함축한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51v4YAO6uRL._SL500_AA300_.jpgPYH2011020809130001300_P2.jpg



존재론이란, 가령 휴머니즘을 비판했던 후기의 하이데거의 경우를 보아도 존재의 의미에 대해 관심과 이해를 가지는 인간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저는 차라리 인간에 대해서조차 인간 아닌 것들을 통해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인간 아닌 것’을 하나로 묶어 다룬다면, 인간중심적 접근과 대칭적인 것이 되고 말 겁니다. 그게 아니라 나름대로 각각 특이성을 갖는 존재자들을 통해 존재의 문제에 접근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런 특이한 존재자가 우리와 다른 것이 아님을 드러냄으로써 그런 존재의 특이적 요소를 우리를 포함하는 존재 자체의 요소로 사유하려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선택한 특이적 존재자들은 우리가 익숙해있는 것들을 횡단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이는 존재 자체를 익숙한 내부성이 아니라 낯선 외부성을 향해 열어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로써 존재 자체를 불온한 것으로 사유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존재론이란, 저에게 단지 철학적이기만 한 것도, 단지 사변적인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철학적이기 이전에 정치적이고, 사변적이기 이전에 현실적입니다. 가령 장애인을 통해 사유되는 존재란 어떤 식으로든 장애인 운동이나 그와 관련된 정치와 처음부터 결부가 되어있지요. 또한 역으로 이런 존재론을 통해 그런 운동이나 정치의 문제를 존재론적 차원으로까지 소급해서 근본적으로 다뤄볼 수 있을 겁니다.
이를 위해 먼저 1강에서는 불온함이란 무언지, 우린 언제 불온함을 느끼는지, 그런 질문에서 강의를 시작할 것입니다. 이후 불온이라는 개념에 대해 새끼 치며 설명하기보다는, 불온함을 야기하는 존재, 불온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할 겁니다.



Q. 각 주의 제목들이 특이합니다. 저마다 이색적인 주제의 강의가 배치돼 있는데요, 장애인, 프레카리아트, 사이보그, 박테리아, 패티시즘. 모두 얼핏보면 특이하고 수적으로도 흔치 않습니다. 게다가 몇 가지 빼고는 한 번도 연결지어 본 적 없는 주제들입니다. 사회적 소수자라고 묶기에는 인간 아닌 것(박테리아)이 끼어 있고, 정치적 연대를 위해 모이기에는 민망한 특이성(패티시즘)이 끼어있습니다. 사실 그 점 때문에 강의가 매혹적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런 주제들을 선택하고 연결하게 되셨는지요.





A. 이런 것들의 공통점은 일종의 ‘중간적인’ 존재자들이라는 겁니다. 기존 존재자들 사이의 구획에 따라 명료하고 뚜렷하게 구별된 것들이 아니라, 반대로 그런 구별을 깨거나 와해시키거나 중간에 끼어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이에요. 저는 이것이 불온함을 사유하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모두 불온한 자들이지요.


Q. 불온한 자들이 위와 같은 특이성을 가진 이들이라고 하지만, 운동이나 정치에서 누구보다 그들이 주체여야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당사자주의’ 가 떠오르는데요.


A. 전 당사자주의가 잘못된 운동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려는 특이성은 이와 다른 것입니다. 이 특이한 존재자들이 하나같이 나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근본에서 나에 해당되는 것, 바로 나의 문제, 우리 모두의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모든 특이성이 그들만의 특성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특이성, 존재의 특이성을 이룬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할 겁니다. 그래서 그것은 그들에 대한 ‘각론’이 아니라 존재론의 일부로서 다루어질 수 있는 거지요. 이는 제가 ‘존재론적 평면화’라고 명명하는 사고방법을 통해서 밀고 나갈 겁니다. 우리 모두 장애인이고, 우리 모두가 프레카리아트
, 우리 모두가 사이보그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패티시스트가 돼야 한다고도 말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당사자라는 말을 쓴다고 하면, 우리 모두가 당사자라고 말해야 합니다.



S.jpg CAZN992X.jpg  CA0T6NCP.jpg CA0PIFCP.jpg    동정.jpg라캉.jpg imagesㅇ.jpg 3144410.jpg

images5.jpg   imagesr.jpg   187_1_tnr.jpg


강좌를 수강하는 데 도움이 될 책 기사는 요기   !  http://nomadist.org/xe/Nzine/104506

(강좌 관련 문의 및 신청은 요기를 클릭하세요!     http://nomadist.org/xe/apply)


며칠 후 두번째 인터뷰가 이어집니다^^ 

신고
Posted by 노마디스트

글/서세화, 사진/김작가

 

지난 주 12일 토요일에 불온한 인문학 심포지엄이 있었습니다. 관계자 분들께서 맛있는 인절미를 준비해주셔서 심포지엄 중간 중간에 우적우적 먹었습니다. 뒤풀이도 있었는데 전날 목감기 코감기 원 플러스 원을 겪고 몸 상태가 저질이었던지라 아쉽게도 1부 까지 밖에 참가를 못 했습니다. 아니 그런데 어떻게 후기를?? 하시는 분들. . 나눠주신 자료를 참고해서 쓰고 있습니다. 사회는 고봉준 문학평론가 님이 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번 심포지엄에서 처음 뵈었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발표자 분의 발표 내용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시는 능력이 존경스러웠습니다. 너무나 핵심을 콕 콕 집어서 알맹이만 쏙 쏙 시원하게 정리해주셔서 참가자분들이 박수를 많이 쳐 주셨습니다.


 

 

  IMG_8480.jpg

 

첫 번째 발표자 분은 화 님이셨습니다. 수유+너머N에서 가장 재미있는(?) 문학 세미나를 이끌고 계십니다. 화 님의 발표 주제는 <인문학 담론의 유행과 소비양상>으로, 인문학 담론이 어떻게 유행하고 있고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를 발표하셨습니다. 화 님은 책 소개를 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작가를 하고 계셔서 그런지 방송계와 출판계를 넘나들며 방대한 자료들을 예시로 인문학 담론의 유행 양상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인문학 유행 흐름이 어떻게 현재 사회 문화에 미친 영향의 흐름을 한눈에 훑어 볼 수 있었습니다. 화 님의 지적 중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돈을 경멸했던 인문학이 이제는 돈을 벌려면 인문학을 해라!’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돈과 닮으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문학이 하나의 스펙이 되어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쇄신하고, ‘남들보다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 가치를 창출하는 실용 학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고의 방향을 유도하는 체계적인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무서워 소름이 돋았습니다. 포스코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강좌를 노골적으로 지식을 통해 생산성 향상을 이끄는 지식근로자를 양성하는 교육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문학마저 기업의 성장을 위해, ‘경제 발전을 위해 더 나은 국가를 위해 쓰여져야 하는 곳. 모든 것이 실용적이지 않으면 안 되는 나라. 모든 것을 실용의 논리로 가공하기를 강요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배제 또는 제거해버리는 폭력이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이루어지는 현실. 지금 인문학은 껍데기라도 살아남기 위해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기업의 인문학 강좌 등 그 모습을 다르게 변형하면서 소비되는 것으로 생존의 타협을 본 것 같습니다. 반항하지 않는, 얌전한, 무언의 동의로 말입니다.


 

화 님처럼 저 또한 인문학이라는 고고한 이름에 휘둘리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저또한 불온한 인문학과 수유+너머 세미나를 참가하기 위해 적지 않은 것을 투자했습니다. 첫 월급으로 불온한 인문학 수강 신청비를 냈고 강좌를 듣기 위해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일이 더 없기를, 회식이 없기를 조마조마해하며 다행히 제 시간에 연구실에 오면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습니다.

 

IMG_8484.jpg  

 

 

두 번째 발표는 술 취하면 러시아어로 말을 하신다는 전설이 있는 진석스키최진석 님의 발표로 <불온한 인문학, 또는 소비 시대의 반인문학>이라는 주제였습니다. 최진석 님은 인문학 위기 담론의 핵심은 인문학의 과소 소비에 대한 논쟁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인문학이 안 팔리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저 또한 취업 시장에서 안 팔리는학과를 나왔고 직접 안 팔린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겪었던 입장이라 이 말이 너무나 와 닿았습니다. 그리고 최진석 님은 대학 안과 밖에서 인문학이 과잉 소비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합니다. 바야흐로 인문학의 위기입니다. 사실 인문학 위기의 근원은 소비가 아니라 생산, 즉 변화된 시대사적 지형 속에서 다른 생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실패와 무능력에 있음을 지적한 것이죠. 담론 생산의 물질적 조건들이 변화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의 구태의연한 영광만을 재현하려고 애쓰는 인문학 생산자들이 소비자들만을 탓하며 위기를 운위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인문학이 새롭게 달라진 생산 조건을 적시해 주고 있습니다. 인문학의 생산은 다른 생산 즉,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로서의 생산에 대한 물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IMG_8478.jpg

 

 

 

그렇다면 인문학은 어떤 이미지를 통해 생산되고 소비되어 왔을까요? 최진석 님은 이것을 인문학의 휴머니즘문화주의라는 신화를 통해 알려주십니다. ‘휴머니즘의 시대라 일컬어 졌던 르네상스 시대는 사실은 약육강식의 전쟁 시대였으며 보편적 인간애나 인간의 존엄 사상에 이끌리기는커녕 간교한 지략과 냉혹한 열정에 의해 추동된 영웅 시대였습니다. ‘르네상스 휴머니즘이란 어디까지나 근대의 신화요 근대의 휴머니즘이 자신의 기원으로 참칭한 상상적 이미지인 것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휴머니즘이란 근대에 정착된 일단의 이데올로기적 내용과는 전혀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허구적 이미지가 인간의 이름으로 가능한 모든 폭력과 지배, 세계의 소비에 이용되어 인간은 생산과 소비의 주체로서 굳건히 서게 되었습니다. 또한 인문학은 개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동시에 그가 속한 공동체의 발전을 견인하는 동력원으로 인식된다고 합니다.

 

인문학에 어떤 과대한 목적을 투사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근대 인문학이 밟아왔던 오류를 반복할 것입니다. 지금의 인문학은 건전한 시민 육성의 교육적 프로젝트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그러나 인문학에 쏟아지는 수많은 요구들과 비난들, ‘인간을 찾고 시민으로 변화시키며 공적인 삶에 정착시키는 역할에만 머물 것인가? 인문학은 정체성과 동일성의 서사를 거부하고 희망위로의 인문학을 넘어서 통상적인 삶의 관성에 불편하고 낯선소음을 일으키며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반()문학, 불온한 인문학이 되어야 할 것임을 주장하셨습니다.

 

 

IMG_8472.jpg  

 

세 번째로 수유+너머N의 진중권, 정정훈 님이 <야만성의 인문학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발표해 주셨습니다. 정정훈 님은 불온한 인문학이란 인문학을 공부하는 자들로 하여금 무엇보다 사유하게 하는 인문학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유란 이미 암묵적으로 전제된 원리나 규칙, 혹은 공준에 따라 논리를 전개하거나 개념을 구성하는 작업이 아니라 사유에 암묵적으로 전제된 공준들의 정당성을 의심하고 그러한 공준의 체계에서 도출 될 수 없는 앎을 구축하기 위한 지성의 고투라는 것입니다. 불온한 인문학은 특정한 양상으로 코드화된 사유의 경로들로부터 벗어나고 그러한 방식과 코드들에 맞서 다른 사유의 길들을 만들어가는 사유 활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과 더불어 조성된 인문학의 위기 국면은 대학 인문학의 성격을 상당히 변화시켰습니다. 인문학적 사유란 국가기관이 인증한 권위 있는 학술지가 규정하는 규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코드화된 사유가 되었습니다. 인문학은 점점 더 해당 분야의 전공자들만이 관심을 갖는 협소한 전문지식을 생산, 가공, 유통하는 폐쇄적 공간이 되어버렸습니다. 대학 바깥의 인문학도 새로운 실용적 지식을 얻기 위한 영감의 원천이나 각박한 삶을 견디기 위한 치유와 위로의 수단, 혹은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교양의 의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불온한 인문학은 이와 같은 체계 내에서 생산되고 유통되는 앎을 주조하는 원리들을 와해시키는 폭력을 행사하는 사유의 활동입니다. 불온한 인문학의 과제는 사유를 촉발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최진석 님은 들뢰즈의 말을 인용하셨는데요. 들뢰즈는 사유는 폭력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하였습니다.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전제들에 결코 부합하지 않는 어떤 사태에 직면하게 될 때, 기존의 앎의 질서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어떤 사태와 마주칠 때, 우리의 지성은 혼란과 고민에 빠지게 되며 비로소 그것들을 규명하기 위한 사유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유를 촉발하는 낯선 사건과의 조우가 바로 폭력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불온한 인문학이란 바로 기존의 지배적인 인문학적 사유의 이미지(창의력을 함양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한 교양이며 각박한 경쟁사회 속에서 상처입은 마음을 치유하는)에 대한 폭력이라는 것이죠.

 

 

 발표를 들으면서 드는 생각은 인문학만큼 다채롭게 논의 또는 비판받는 학문이 있을까, 였습니다. 고고한 학문으로 취급받아 특수 계층만 접할 수 있었던 학문이기도 했다가 돈 못 벌어온다고 까이고 또 시대 상황에 적응한다고 미필적 고의로 상업에 이용당하면 타락했다고 까이고. 인문학에 대해 요구하는 것이 참 많아서 인문학은 참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서 아무 의심 없이 당연하게 생각했던 인문학의 개념이 좀 더 확장된 듯합니다. 생각할 거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IMG_8481.jpg

 

 

 


신고
Posted by 노마디스트


"인문학 신드롬과 불온한 인문학"

 

2.jpg 3.jpg 4.jpg

5.jpg 6.jpg 8.jpg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온성과 전복성의 날이 예리하게 서 있는 인문학이다. "

 

- 시   간 : 2011년 3월 12일(토) 13: 00 ~ 18: 00

- 장   소 : 대학로 흥사단 강당

- 사   회 : 고봉준(문학평론가)

- 참가비 : 무료

 

 

불온한 인문학을 선언한다!

 

● 인문학 담론의 유행과 소비양상 (문화)

 

● 불온한 인문학, 또는 소비시대의 反인문학 (최진석)

 

● 야만성의 인문학을 위하여 (정정훈)

 

● '희망의 인문학'은 어떤 희망을 가르치는가? (손기태)

 

● 인문학, 그 실수-방황의 현장 (박정수)

 

 

공동주최 : 휴머니스트 출판사

 

 

 

오시는 길

약도

* 지하철

   4호선 혜화역 하차 → 1번 출구와 2번 출구 사이에 위치

* 버스

   파랑(간선)버스 : 101, 102, 104, 107, 108, 109, 140, 143, 149, 150, 151, 160, 161, 162, 273, 301, 407

   초록(지선)버스 : 2112

   혜화역 또는 서울대병원 정류장에서 차하


신고
Posted by 노마디스트


최진석(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작년 말 튀니지에서 처음 시민들의 ‘반역’이 시작되었을 때만해도 한국인들의 반응은 그리 진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잊을 만하면 간간이 이어지던 ‘그 동네’의 작은 소요라는 생각이 대부분이었고, 이런 인식의 나이브함은 국내 언론이 ‘반정부 소요’나 ‘무질서 상태’라고 묘사할 때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이 흐름이 점차 아랍권 전역으로 널리 확산되어, 무바라크의 퇴진을 이끌어내고, 카다피를 끝장낼 정도로 진행되고서야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 정도의’ 현실감을 얻게 된 듯하다. 인터넷 뉴스는 트리폴리에서 날아온 속보로 가득차고, 기민한 블로거들은 다양한 경로로 입수한 현지 사정을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다. 진정 ‘아랍의 봄’이 찾아왔는가?

 

 

aegypten_proteste_2_540x304.jpg 

 

 

 

저 멀리,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땅에서 벌어지는 민주화와 혁명의 불길에 어떻게든 말 한마디로라도 거들고자 하는 열혈 블로거들, 누리꾼들의 활약을 보면서, 침묵에 잠긴 대학의 인문학을 고민해 본다. 물론, 대학에서 강의하고 연구하는 인문학자들이라고 왜 역사의 격변에 관심이 없겠느냐마는, 실상 삼삼오오 모여 하루의 진전에 관해 논평하는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귀청을 울리는 ‘한 소리’는 들리지 않는 게 현실이다. 강의와 세미나, 글을 통해 현실 개입적인 말과 사유를 펼치기 전에 먼저 ‘전공’을 따지고 ‘전문성’을 가늠하며 ‘자격’을 검증하는 게 인문학의 관성인 탓일까? “리비아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자네 정치학이 전공인가?” “아닌....데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실제로 현재 대학에서 양성되는 인문학은 혁명에 인색하다. 인문학은 인문학으로서 소임이 있다는 주장이 그렇다. 인문학은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 그 일희일비(一喜一悲)의 순간들로부터 벗어나, ‘더 멀리 더 깊게’ 바라봄으로써 사회의 심층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어진 인문학의 소임은 새롭고 참신한 가치를 창출하고 현실에 유용한 교양이다. 하지만 인문학이 현존 질서를 조금이라도 건드릴라치면 금세 경고장이 발부된다. “학문은 학문답게, 현실로부터 거리를 두라”는 것이다. 인문학이 학문으로서 갖는 위상과 자격은 그것이 현실에 봉사하되 현실 자체로부터는 한 걸음 물러서는 데서 나온다고 한다. 뭔가 이상하고 모순된 소리지 않은가? 현실에 도움을 주는 한에서, 현실에 무관한 한에서만 학문일 수 있다니? 만일 그 ‘현실’이 기성의 질서와 가치관, 지배 체제를 뜻한다면, 이 말은 일관성을 갖는다. 거꾸로 말해, 현재를 지배하는 가치와 통념에 봉사하지 못하는 인문학은 인문학의 자격이 없다. 4대강이 얼마나 국가에 유익한지, 국민 생활을 증진시킬 수 있는지를 논하는 인문학이라면 좋다! 하지만 그게 국토를 망치고 민중을 도탄에 빠지게 만든다는 식으로 말할 테면 퇴출이다! 인문학이 삼가고 두려워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혹자는 당차게 말한다. 인문학의 본령은 원래 현실 개입적이었고, 혁명적이었으며, 따라서 지금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비판의 칼날을 벼려야 한다고. 옳은 말이다. 인문학이 창출할 수 있다는 의미나 가치는 현실의 파도를 건너는 ‘우아한 유람선’이 아니라, 현실을 날카롭게 찌르고, 우리의 안온한 일상을 흠집 내고 피가 날 정도로 벨 정도로 날카로운 무기가 되어야 진정 ‘새롭다’고 할 것이다. 인문학의 혁명성을 말한다면 아마 그런 것일 게다.

 

 

그런데 실제로 인문학의 역사를 보면,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인문학은 그런 ‘불온’하고 ‘위험’한 역할을 맡은 적이 별로 없다. 오늘날 ‘인문학’이라 번역되는 ‘humanities’나 ‘philology’는 기실 혁명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르네상스 전후로 사용되었던 전자는 중세기의 ‘자유 학문’을 대체하는 것들이었고, 후자는 19세기말의 고전학 연구 경향을 일컫던 것들이다. 오히려 현대의 인문학은 국가가 사회를 일률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지적 강제의 도구로서 발달되었다. 부랑자와 거지, 도둑, 반사회적 일탈자, 비정상인 등을 ‘정상인’으로 만들어 ‘정상적인 삶’을 부과하고 나아가 ‘국가의 정상화’를 위해 스스로 헌신하게끔 개조하려는 목적으로 고안된 장치였던 것이다. 치안을 위해 작동하는 훈육·통제 장치, 그것이 현대 인문학의 기원이며 영토인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인문학에서 혁명을 기대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오늘날의 인문학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렇게 다져진 영토를 떠나는 것, 책장을 벗어나 거리로 나가려는 충동이 아닐까?

 

 

나는 인문학을 공부함으로써 견고하게 나를 결박하고 있는 현실로부터 당장 탈출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문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그 매력에 빠져들면서 동시에 커지는 위험은 현실을 방기한 채 텍스트의 쾌락에 젖어버리는 일이다. 혁명을 종이 위의 글자로 만들고, 날마다 부대끼며 살아가는 친구와 가족, 타인들을 인간(人間)이라는 추상 속에 가둬두는 일이다. 인문학의 효용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는 그만큼 온순해지고 순응적인 존재가 되어간다. 인문학에 절망이 있다면, 그것은 인문학이 인문학으로 고이 남겨진다는 사실일 것이다.

 

 

IE001274984_STD.jpg

 

 

 

카이로의 군중들, 트리폴리의 시민들을 일어서게 한 것은 그들에게 인문학이 모자라거나 과도해서가 아니었다(수천 년 누적된 아랍의 방대한 문헌학적 전통을 고려할 때 그들이 무지몽매하다고 비웃는 자들은 자는 본인의 무교양부터 부끄러워할 일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거리로 이끈 것이 순수하게 생계에 대한 절망만은 아닐 것이다(그런 나이브한 인식 따위로 아랍 민중을 모욕하고, 혁명을 폄하하지 말도록 하자!). 인문학은 인문학이다. 종이 위의 전통, 텍스트의 쾌락. 맞다! 그들에게, 나아가 우리에게 인문학이 의미와 가치를 갖는 것은, 인문학이 그것의 영토를 떠날 때, 묵독(黙讀)의 자아도취를 벗어날 때, 거리에서 울리는 목청이 될 때다. 아니, 적어도 거리를 바라보고, 거리를 욕망할 수 있을 때다. 그래서 학문이 아닌 인문학, 인문학이 아닌 인문학이 될 때다. 과거에 인문학이 가장 두려워하던 것은 인문학이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인문학이 더욱 두려워해야 할 것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인문학이 인문학으로 남는 것이다. 묘비의 인문학. 돌 위에 새겨진 글자는 죽은 자의 이름을 가두는 감옥일 테지만, ‘짱돌’이 되어 던져지는 문자는 혁명의 초석이 될 것이다.

 

 


신고
Posted by 노마디스트

notebook_img.jpg


 
2011년 2월 1일(화)

 
설 연휴를 앞둔 2월 첫날, 고향 나들이만큼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작년에 출판사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인 연희동으로 이사를 와서 기뻤던 수유너머N이 그 이상으로 반갑고 고마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고 한다. 아니 그들의 새로운 시도를 흔해 빠진 ‘프로젝트’라는 말로 대신할 수는 없다. 최소한 ‘운동’이라 해야 맞다. 이 운동의 이름은 ‘불온한 인문학’이다. 거두절미하고 수유너머N이 최근 발표한 ‘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선언’으로 설 인사를 대신한다. 부디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우리 삶의 현장에서 새롭게 만나 인문학의 부흥이 아닌, 인간적 삶의 부흥의 씨앗들이 싹트길 기대한다.

  이 선언을 읽고 나처럼 반가운 마음으로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은 수유너머N 홈페이지(http://www.nomadist.org)를 방문하면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2011년 노마드적 대중지성 ‘불온한 인문학’ 1기생도 모집한다. 맑스의 <자본> 입문,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세미나와 ‘불온한 인문학’ 집중 세미나도 열린다. 20011년 다시, 아니 새롭게, 불온한 학습과 토론 그리고 실천들을 시작해보자.
 

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선언
 
바야흐로 ‘인문학의 부흥 시대’가 왔다! 고고한 상아탑에 파묻혔던 대학이 대중 계몽의 현장을 자처하는 한편으로 인문학 최고위 과정을 신설해 CEO들을 입학시키려 혈안이 되어 있다. 또한 은행과 백화점, 문화 센터와 각종 공공 기관이 앞다투어 고전 강좌를 개설하면서 지식과 교양에 목마른 대중에게 유혹의 손짓을 보낸다. 국가는 ‘인문 한국’이라는 거창한 부흥 프로젝트를 내세우며 연간 400억 원에 달하는 재정을 투입함으로써 위기를 외쳐대던 이들에게 자본의 ‘생명수’를 부어주고 있다. 박사 실업자를 면치 못하던 수많은 시간 강사들, 대학원생들은 열심히 연구 계획서와 보고서를 작성하고 실적을 증명해줄 논문들을 마구 찍어낸다. 여기 인문학이 부활했다! 고독하게 고사(枯死)하는 꼬장꼬장한 학자가 아니라 프로젝트의 수주에 목숨을 건 유능한 매니저가 오늘날 인문학 연구자의 이상이 되었다! 마이더스의 손을 가진 국가라는 막강한 파트너도 얻었다! 인문학이 새로운 국학, 21세기 국풍(國風)의 기치 아래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한때 인문학의 위기가 운위되고 그 사멸의 징조가 우려스럽게 진단되던 시절이 있었다. 취업 전문 학원으로 전락한 대학에서 인문학이 힘겹게 투병하며 죽어가던 때가 있었다. 아카데미의 수장들이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국가와 기업, 사회의 도움을 애타게 호소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언제 그랬느냐 싶게 인문학은 화려한 재탄생을 노래하고, 도처에서 부활의 종소리를 울려댄다. 상품 광고의 아이디어 속에서 인문학은 ‘돈이 된다’는 찬사를 얻고, 텔레비전에 출연한 신(新)지식인들은 인문학이 이제 지식 시장에서 유통되는 최신의 상품임을 자랑한다.

  하지만 바로 이때, 우리는 ‘인문학의 부흥’이라는 시대 현상이야말로 역으로 인문학이 빠져든 위기와 몰락의 징후임을 냉정히 직시한다. 국가와 자본의 넘치는 관심과 후원은 인문학 재생의 밑거름이 아니라, 인문학의 좀비화를 부추기는 바닥없는 진창에 다름 아니다. 국가와 자본의 월급쟁이가 되자마자 인문학은 권력과 돈에 눈멀고 귀막고 입을 봉한 산송장이 되어 버렸다. 오늘날 인문학의 부흥이란 무엇인가? 이윤 창출을 위한 자본 축적 전략과 지배의 효율화를 위한 국가 통치 전략의 소프트 버전, 바로 그것이 아닌가?

  인문학을 논하기 전에 먼저 지금-여기의 삶을 돌아보라. 대학생들이 졸업과 동시에 신용 불량자가 되고, 청소 노동자들이 화장실에서 밥을 먹어야 하며, 개발 이익에 눈먼 국가와 자본의 폭력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공권력'이라는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소시민의 일상은 '글로벌 리더십'과 '글로벌 스탠다드'를 이룩하기 위해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다. 이렇게 파괴된 삶의 터전에서 태연하게 ‘인간’과 '문화'를 떠드는 인문학이 도대체 어떤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상황은 명확히 문제적이다. 작금의 지배 질서와 가치 체계에 대한 비판과 문제 제기를 그만 둔 인문학은 기껏해야 교양 있는 시민의 육성을 필생의 소명인 듯 껴안고 있다. 정보 산업 사회의 유능한 인재들을 키우기 위해 인문학적 창의성이 투입되고, 각박한 경쟁 사회에서 인간적 여유를 찾아주기 위해 인문학적 교양을 제공하며, 부랑인과 노숙자 같은 사회 부적응자들을 정상적인 시민으로 되돌리기 위해 인문학적 지식이 동원되고 있다. 사회적 유용성과 적응성의 배양, 혹은 순응하는 시민의 양성이야말로 진정 인문학의 사명인가? 인문학이 감옥이나 병원에서 수인과 환자들을 '정상인'으로 교육하기 위해 고안되었다는 어느 철학자의 통찰이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오히려 인문학은 그 탄생의 목적과 소명을 지금 충실히 이행하는 중이라고 말해야 옳을 성싶다.

  다른 한편에는 인문학의 ‘실용주의적 유행’에 반대하며 인문학적 본질이 현실을 넘어선 것, 지고한 정신적 가치에 있노라고 강조하는 인문주의자들도 있다. 그들은 인문학이 실용적 효용이나 실리적 이득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세계의 원리를 궁구하여 인격을 완성하는 지고한 삶의 안내자라고 주장한다. 오래된 안내자로서 ‘고전’이 강조된 이유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오랜 지혜가 담긴 책, 고전을 지키고 재생산하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의 존재 이유라는 게 이상주의적 인문주의자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모든 견고했던 것들도 대기 중에 녹아 없어지는 이 세계에서 어떤 고전이 감히 영원을 구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의고주의적 인문학이 보여주는 몰역사성과 탈사회성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격조있는 생활의 품격을 누리기 위해 고전을 읽는다는 CEO들의 진심도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다. 그들이 사원들에게 고전을 ‘읽으라’고 내미는 순간, 고전은 그것이 등장했던 역사와 사회의 맥락을 벗어나 지금-여기서 강제와 폭력, 순응과 체념의 도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전 공부를 순수한 인성의 도야란 차원에서 기대하지 않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고전에 대한 맹목적 숭앙은 국가와 자본에 대한 물신주의적 숭배와 멀리 있지 않다. 고전을 불멸의 정전으로 만들고 현재적 삶의 척도로 삼을 때, 지식과 권력, 자본의 삼자연대가 승리하는 날을 보게 될 것이다.

  자본과 국가의 이해에 편승한 덕분에 호의호식하는 순응주의자의 인문학. 대중적 삶의 지평에서 유리되어 고전에만 칩거하는 나르시시스트의 인문학. 양자는 하나같이 현실 직시를 거부하고 자기만의 환상에 몰두한 채 인문학이라는 영토에 자기 깃발을 꽂는 데 열중하는 불모의 인문학에 다름 아니다. 인간과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바꾼다는 미명 뒤로 펼쳐진 삶의 적나라한 모순과 질곡을 질타할 줄 모르는 인문학은 인간을 위한 것도 아니고, 삶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런 명분으로 세상을 속이고 자신을 기만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만드는 인문학은 차라리 해체시키는 게 낫다. 새로운 인문학을 위한 제언은 국가와 사회를 부강하게 만들거나 보편적 휴머니즘을 구현하는데 있지 않으며, 인문학의 잃어버린 가치를 회복시키는 데서 성립하지도 않는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다시 갈라놓는 것도 물론 아니다. 차라리 지금-여기의 현실을 작파하고 다른 현실을, 우리의 감각과 지식, 상식의 기반을 뒤흔들어 우리를 낯선 변경으로 던져넣는 것만이 우리들의 탐구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탐구의 여정에 붙일 만한 적절한 이름을 아직 모른다. 우리는 인문학에서 출발했지만 그 도착지는 인문학이 아닐 것이다. 불온성, 그것은 현재 알고 있는 삶의 형태를 공고하게 다지고 정상화시키는 데 있지 않고, 익숙하고 안온한 삶에 낯설고 날선 감각, 우리 자신을 베이고 다치게 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삶의 형태와 강제로 맞부딪히게 만드는 과정에 붙이는 이름이다. 잠정적으로나마 우리의 탐구에 ‘불온한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본다면, 그것은 '진정한' 인문학을 가르친다거나, 인문학의 또다른 '재생'이나 '반복'을 위함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우리 여정의 출발점이 어디이며 그 과정이 어디로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낯선 지도 위에 그려보기 위해 선택한 푯말일 뿐이다. 불온한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니다! 그것은 인문학과는 다른 새로운 종(種)이며, 어디선가 항상-이미 시작된 낯선 출발점을 가리키는 지표이다.

  ‘부흥 시대’의 인문학은 세상을 바꾸는 전복의 힘도, 익숙한 것도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불온성도 거세당한 박제에 불과하다. 시대의 지배적 통념을 논쟁의 대상으로 점화시키는 급진적 비판, 안일하게 수용하고 반복하면 그만인 습속의 도덕에 등 돌리고 당당히 떠날 수 있는 사유의 용기, 배제되고 학대받는 자들을 괄호쳐버린 교양의 기름진 바다에 불쏘시개를 던져넣는 과감한 행동력, 이것이야말로 ‘이미 와버린’ 인문학이 아니라 ‘도-래할’ 인문학, 혹은 아직은 이름붙일 수 없는 새로운 사유와 활동의 단초가 된다.

  지금-여기서 우리에게 새로운 앎과 감수성, 사유와 활동이 의미를 갖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인문학 부흥의 깃발을 높이 쳐드는 게 아니다. 지금은 차라리 그 깃발을 꺾어버리고, 현행의 인문학에 대한 반대를 선언해야 할 때다. 국가와 자본, 휴머니즘이라는 기치를 내건 인문학에 대결을 선포할 때다. '위기'를 떠들며 자금과 보호를 구걸할 게 아니라, 오히려 위기를 더 멀리 밀고나가 마침내 폭파시켜버리는 것. 그때야 비로소 인문학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던 지식은 지배적 가치와 통념에서 이탈해 새로운 삶을 향한 길을 만들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인문학'이란 이름으로 길들여진 영토를 떠나려 한다. 그 첫걸음은 현행의 ‘인문학의 배치’에 이의를 제기하고 균열을 내는 데서 시작한다. 이로써 우리는 국가와 자본의 통제를 받고, 휴머니즘을 명목으로 영유되던 죽은 지식을 지금-여기의 해방적 실천을 위한 앎으로 재전유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삶과 앎의 방식을 창안하는 활동은 문제의식을 공명하는 또다른 고민들과의 만남 속에서 더욱 첨예해지고 증식되리라 믿는다. 우리는 이 만남을 기다린다. 이 만남을 통해서 우리의 문제의식이, 우리의 사유가, 우리의 활동이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고 또다시 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에 우리는 혼돈과 불안을 낳고 마침내 전복의 위험한 함성을 불러올 ‘불온한 사유’를 기다린다. ‘불온한 인문학’이란 정녕 그 날을 위한 찰나의 섬광에 불과하리라.




글 / 휴머니스트 대표 김학원



신고
Posted by 노마디스트

%EC%88%98%EC%9C%A0%EB%84%88%EB%A8%B8_%EB%B6%88%EC%98%A8%ED%95%9C%EC%9D%B8%EB%AC%B8%ED%95%99.jpg  

 

“현대 자본주의 비판과 불온한 사유를 위하여”

 

 d0055241_4c7e62ee3085c.jpg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이 대중의 공동 학습의 장, “불온한 인문학”을 시작합니다.


한때 운위되던 인문학 위기담론이 무색하게 오늘날 인문학은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국가는 인문학 지원을 위하여 대학에 연간 수백억의 예산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또한 도서관을 비롯한 공공기관, 문화센터, 그리고 심지어는 기업이 개최하는 다양한 인문학 강좌에 수많은 수강생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인문학의 부흥을 넘어서 인문학의 유행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인문학 유행 현상은 인문학이 처한 심각한 위기의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CEO 인문학’과 ‘백화점 인문학’이 보여주는 바는 이제 인문학이 자본의 이윤창출 수단이 되었다는 사실이며, 연간 394억원의 국가예산이 지급되는 ‘인문한국’ 정책은 국가정책에 인문학이 더욱 깊이 종속되고 있다는 현실을 알려줍니다. 지식정보 자본주의 시대의 가치증식을 위한 새로운 수단이자 국가경쟁력 강화의 도구로서 인문학은 화려하게 부활하였고, 이 부활은 인문학의 시대를 도래시켰습니다. 아주 세련되고 교양 있지만 자본과 국가의 권력에 의해 극도로 순치된 안온한 인문학의 시대를 우리는 지금 목도 하고 있습니다.


시대의 지배적 통념을 논쟁의 대상으로 만드는 비판의 급진성, 사회의 지배적 가치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사상의 전복성, 세상의 지배적 삶의 방식을 뒤엎는 사유의 불온성을 거세당한 채 인문학은 기름진 교양주의의 지적 장식물로 퇴락하거나, 협애한 전문가주의의 실적물로 전락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문학의 시대는 인문학의 몰락과 함께 도래하고 있습니다.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앎이 여전히 유의미한 것이려면, 이런 시대에 정작 필요한 것은 인문학의 깃발을 드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인문학에 반대하고 그것과 대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정상화'하는 지식으로서의 인문학과 대결하는 것. '위기'란 이름으로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위기를 차라리 더 멀리 밀고 가 폭발하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때 비로소 '인문학'이라 불리는 지식은 지배적 가치와 통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의 길을 촉발하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본의 이윤창출을 위한 도구나 국가 발전전략의 수단으로서 인문학, 삶의 현장과 유리된 맹목적 전문지식으로서 인문학, 자기만족적 교양주의 인문학을 거부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불온성과 전복성의 날이 예리하게 서있는 인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불온한 인문학’ 1기를 시작합니다. ‘불온한 인문학’ 1기를 통하여 우리 시대의 지배적 가치와 통념에 맞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기획하며, 지성의 공동성, 공동의 지성을 함께 만들어 갈 동료들을 만나고자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욕망이요 힘이며, 불온성으로부터 인문학을 다시 사유하려는 의지입니다. 이 과정을 함께할 친구들을 기다립니다.

 

 

 

 b0007531_486d99340b136.jpg

 


* 주요 프로그램

 

I. 맑스의『자본』 입문 ― 다시, 반(反) 자본주의의 깃발을 들자!

 

 

II.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 가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

 

 

III. ‘불온한 인문학’ 집중 세미나

 

 

o 강          사 : 정정훈 · 최진석

o 세미나 튜터 : 정행복 · 문화


 

맑스의~1.JPG Capitalism.gif

 

 

1. “불온한 인문학”은 2011.3.3.목 개강, 총 20주 40여 회(매주 강의1회 세미나 1회, 총5개월) 과정으로 구성됩니다.


2. 매주 목요일 오후 7시~10시에는 강의가, 토요일 오후 2시~5시에는 집중 세미나가 열립니다.

이 두과정은 꼭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부분 수강 불가)


3. “불온한 인문학”은 두 개의 트랙으로 진행됩니다. 10주 간 진행되는 트랙01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다음 10주간의 트랙02에는 욕망 이론과 대중 정치를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진행됩니다.


4. “불온한 인문학”은 단지 강사의 강의만을 수동적으로 “듣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불온한 인문학”에 참여하는 이들은 스스로 텍스트를 읽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표현하는 쉽지만은 않은 과정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성 지식의 ‘온순한’ 소비자로부터 동료들과의 소통 속에서 자기 사유의 힘을 벼려가는 ‘불온한’ 생산자가 되길 바랍니다.


5. 이를 위해서 “불온한 인문학” 참여자는 강의를 들은 후 2회 이상 강의 후기를 제출해야 하며, 강의와 관련된 텍스트를 읽고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과 소통하는 세미나에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세미나 진행에는 2회 이상의 텍스트 발제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공부한 과정을 총괄하는 글쓰기 과제(에세이)를 제출해야 합니다.


6. 수강신청

정원 : 선착순 25명

신청기간 : 2011.1.20.목요일부터

수강료 : 60만원, 입금 우리은행 1002-043-230955 (예금주 : 문화)

(*분납, 환불 불가합니다.)

*수강신청은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불온한 인문학' 게시판(http://nomadist.org/xe/bulin)에

신청글과 함께 연락처를 함께 남겨주세요.


7. 문의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http://www.nomadist.org)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실 대표 번호 (070)8263-0910

정행복 010-9404-8403, 문화 010-6210-3021

 

 

신고
Posted by 노마디스트


대학의 제도 ‘안’에서가 아니라, 대학의 ‘바깥’에서 일반 대중과 시민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의가 성업 중이다. 불과 십여 년 전 ‘대안 대학’을 내세우며 수유너머를 포함한 소수의 방외 단체들에서 ‘실험’되었던 인문학 강좌들이, 지금은 매 분기별로 국공립 도서관과 문화 센터, 동사무소, 호텔과 백화점 등에서 기획되고 있다. 사회적 붐을 넘어, 어느덧 일상의 풍경으로 정착된 느낌마저 든다. 빈궁과 소외가 인문학의 본래 운명처럼 생각되던 시절과 비교해 볼 때, 인문학의 외연 확대와 대중화는 여러 모로 긍정적이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애초에 대학 교육의 부실함과 형식주의를 비판하며 시도되었던 인문학 강좌를 이젠 대학이 나서서 주관하는 시점까지 오지 않았나?


                                             28691532_1.jpg

 


연구실 강좌 매니저의 업무도 덩달아 바빠지고 넓어졌다. 지역과 대학 도서관, 사회 단체나 각종 문화 센터 등에서 들어오는 강의 청탁들을 접수하고, 적절한 강좌를 기획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반 대중들이 접하기 어려운 ‘인문학적’ 사유를 소개하고 관심을 이끌며, 여전히 ‘가벼운’ 연구자들의 지갑 사정을 보조해 준다는 점에서 불필요한 노동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의 내 경험들은 이런 인문학 강좌의 문제 설정에 어떤 근본적인 오류나 오판이 있던 게 아닌가 하는 당혹감이 들게 만든다.

 

 '일반 대중'이라는 막연한 수신자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꾸리려면, 연구실서 공유되고 있는 흥미로운(만큼 '어려운') 논제들을 포기해야 할 때가 많다. 나름대로 쉽게 풀고 소개한다고 해도, 일단 대중에게 '듣도보도 못한(?)' 철학자나 사상을 거론하며 이야기를 하려면 여러 모로 공을 들이지 않을 수 없고 자주 생략해 버리곤 한다. 더구나 지금 현재적인 정치적·사회적 사안들이 도마 위에 오를라치면 주최측에서 먼저 변경을 요구하는 일이 다반사다. 강의는 되도록 먼 나라, 멀리 있는 사람들에 관한, 대중적 상식('교양')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채워달라는 게다. 또한, 삶과 사유의 수준있는 '고전'에 대한 강의를 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동양의 고전'들은 빼주는 '센스'가 필요하다. 동양 고전이라면 어쩐지 지루할 것 같으니까. 맑스나 헤겔과 같은 '서구의 고전'들도 예외는 아니다. 읽어본 적은 없어도 어딘지 '어려울' 것 같고, 그래도 이름만은 자주 들어봐서 벌써 '식상할'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텍스트 위주의 강의안을 내밀면 난감한 미소를 띠며 되돌려준다. 요즘 세상에 PPT 같은 시청각 자료도 없이 강의를 다니는 게 말이 되냐는 거다... 이래저래 주최측의 요구 사항들을 맞추며 조율하다보면 강의할 사람도, 강의할 내용도 마땅찮기가 여러 번이다. 애초에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소통 지향적 강의'가 인문학 강좌의 지향점 아니냐고 반문할 법도 하다. 소통이 상대의 눈과 귀를 '거슬리지 않게' 하고, 사유의 노동 없이 쑥쑥 위장에 흡수되기만 할 '건전한' 만남이라면 아마 그럴 것이다.


                                                                           그림자.jpg

 

 

하지만 강의가 건전하게 짜여질수록, 도서관과 학교, 문화 센터의 기획 요구에 부합할수록 딜레마는 깊어진다. 낯설고 새로운 것, 안온한 상식의 틀을 비껴가는 사유를 실험해 보자는 소신과 ‘강의를 위한 강의’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 간다. 단지 수준의 높낮이가 문제가 아니다. 이런저런 요구들에 몸을 맞추다보면, 날카롭던 칼날도 무디어지고 날쌔던 신체도 둔중해진다. 파닥거릴 힘도 없다. 개인의 주머니 사정에 의해서든 집단에 대한 기여든 결국엔 ‘앵벌이’에 다르지 않다. 까놓고 말해 대중을 ‘계몽’하고 ‘소통’하는 인문학이 되기 이전에, 그렇게 비판하던 제도권의 ‘보따리상’들과 별반 차이를 못 느낄 지경이다. 인문학 강의가 일상의 질서에 대한 투항을 이론적으로 치장하거나, 자위적인 교양에 목말라하는 대중 영합적 상술로 변질되고 있다는 세간의 비판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지난 봄 모 대학에서 주최한 인문학 강좌에서 전직 대기업 CEO란 사람이 인문학은 우리 삶을 ‘아름답게’ 꾸며주고 ‘건강한’ 취향을 조성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불온하나고 낯선 것, 날카로워서 쉽게 베일 것만 같은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문학 강의를 들으러 오는 이들은 (다는 아니겠지만) 재미나고 새로운 것을 원하지, 피를 뛰게 하는 낯선 것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럼 무엇을 할 것인가? 역시 강제로라도 불온한 기호의 폭력을 휘둘러야 할까, 아니면 그냥 속 편하게 함께 웃으며 나와야 할까?

 

                                                                       328.jpg  

 

 

사랑과 가족의 역사에 대한 주제를 다룬 최근의 한 강의에서, 쉬는 시간에 동성애와 매춘에 대한 이야기를 자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어린’ 대학생들에게 성(性)과 사회적 터부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양 말하는 게 좋지않다는 이유였다. 또 어떤 선배는 현 정부의 종교 편향과 파시즘에 관한 강의안을 제안했다가 주제 변경 요구를 받기도 했다. 강좌 주최가 공공 기관인데다, 청중 모두가 동의할 것도 아닌데 ‘편향적’ 입장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충고를 받아들였다. 가져간 자료 중에 관련 부분은 적절히 얼버무리거나 아예 건너뛰고는, 몹시 태연하게, 별 탈 없이 강의를 마쳤다. 질문을 던지는 청중들에게 적당히 호응해 주고 웃으면서 다음을 기약했다. 강사료도 제때 받았다. 오는 길에 인문학 강의는 참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하나도 불온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참 모범 시민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속으로 꿈틀대는 불온한 욕망이 아예 사라졌다고는 말 못하겠다.

  

                                                          f0093870_4b0a26aa76542.jpg

 

글 / 최진석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신고
Posted by 노마디스트

인문학 강의 하면 강사는 강의하고 수강생은 그냥 듣는 수동적인 강의를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불온한 인문학은 강의를 듣는데서 끝나지 않고

집중적으로 텍스트를 읽고 자기문제를 고민하고 토론하는 시간

‘집중 세미나’ 라는 과정을 꼭 함께 해야 한단다.

 

집중 세미나는 무엇이며 어떤 텍스트를 읽는지,

그리고 불온한 인문학 강사팀이 이번 과정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

그들이 꿈꾸는 ‘연대의 쾌감’에 대해 들어봤다.

 

 

이기자: 집중 세미나도 한다고? 세미나 제목이 ‘반자본주의와 욕망의 정치학’이다. 세미나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

 

해피 : 먼저 읽을 『자본주의 역사 강의』다. 이 책은 맑스의 틀에서 해석하지 못한 부분들을 설명하는 책이다. 왜 맑스의 자본론을 읽다보면 현재 경제상황과는 너무 다르지 않느냐. 그러다 보면 흥미를 잃거나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본 강의를 들으면서 세미나 시간엔 직접 이 책을 읽는다면 현재의 문제에 대해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훈 : 당대의 맑스가 썼던 책이 자본주의 문제를 완전히 전능하게 풀어 낸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선 자본주의를 폭 넓게 이해하기 위해선 맑스가 풀지 못한 것을 봐야 한다. 『자본주의 역사 강의』는 초기 자본주의 부터 현재의 신자유주의 모습까지 자본주의 500년 역사의 변화 양상을 두루 볼 수 있는 책이다. 세계체계 분석(World System Theory)의 두 대가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오반니 아리기’의 세계체계 분석 뿐 아니라 이들에게 영향을 끼친 ‘페르낭 브로델’ 과 ‘칼 폴라니’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4886_9568_3056.jpg pimg_774818135518484.jpg

 

 

 

 

화 : 지금 해피쌤과 함께 읽고 있는데 정말 재밌다.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 하자면 내 주변엔 세계 경제에 대한 걱정·근심으로 밤잠 못 이루는 분들이 많다. 주변 직장 동료를 봐도 세계 경제에라이히 대해 어쩌면 그렇게 박식하신지. 그분들 이야기를 들으면 참 재밌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젠 중국. 세계 헤게모니가 어쩌고 저쩌고. 식민지 전쟁부터 대공항, 무역전쟁 등등 자본주의 역사를 열심히 설명한다. 그리고 결론이 너무 웃긴다. ‘그래서 중국 펀드를 사야한다’로 귀결되더라. (*물론...한참 중국·인도 펀드 유행일 때 가입했다가 반토막 났을 때 이 놈의 경제가 왜 이러냐고 한탄하느라 눈 밑이 까맣더라.) 우리야 뭐 그런 펀드는 안 사겠지만 어쨌든 세계자본주의에 대한 거시적 관점은 꼭 필요하단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책! 무엇보다 재밌다! 기대하시라^^

 

 

 

 

5149101.jpg 145302.jpg

 

 

 

정훈 : 두 번째로 집중 세미나 시간에 읽을 책은 풀빛에서 나온 『자본의 정치적 해석』이다. 이 책은 자본의 1편 1장을 서술한 것이다. 어떻게 자본론 안에 프롤레타리와 부르주아의 계급적 문제가 관통하는 지 좋은 통찰을 주는 책이다. 사실 이 책은 굉장히 논쟁적인 저작이기도 하다.

 

 

 

독일 시민은 속지 않았다...... 대중은 왜 자기 억압을 욕망하는가?

 

이기자 : 두 번째 학기에 집중 세미나에서 읽을 책은 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 대중심리』, 고병권의 『추방과 탈주』라고?

 

진석 : 들뢰즈가 라이히의 책을 인용하면서 던지는 유명한 질문이 있다. ‘왜 대중은 자기 억압을 욕망하는 가.’ 라이히가 이런 문제의식을 던졌을 때 그 문제의식의 이면엔 ‘도대체 왜 임박해 있다고 믿었던 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는가’ 라는 질문이 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혁명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지도적인 이론가들 혁명주의자들이 주안점을 두고 생각한 것은 대중이 어떻게 혁명을 의식할 것인가이다.

 

루카치는 1923년『역사와 계급의식』이란 책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의 계급적 입장이라는 것을 말하는 순간 혁명은 폭발할 것이라고 기대를 했다. 대신 아직 프롤레타리아트가 문제가 뭔지를 모르기 때문에 (오지 않는 것)이고, 부를 타도하는 게 뭔지를 알면 혁명이 자연히 올 것이라 생각했다.

 

 

 

 

1-1-2-8-2.jpg   images파시즘.jpg

 

 

 

 

라이히는 여기에 문제의식이 있다. (모두들 알다시피 혁명은 오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에 문제의식을 갖는다 해도 혁명이 오지 않는 문제. 아는 것과 욕망의 문제는 다르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대중에 대한 의문들을 생각한 것이다. 가령 2차 세계 대전 끝나고 나치즘 독일에 대해서 비판적인 질문을 던질 때를 보자.

 

그때 ‘어리석게도 독일 시민은 속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많은 역사 문화적인 연구가 보여주는 것을 보면 아니다. 사실 독일 시민은 다 알았다는 거다. (파시즘이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배반하는 욕망의 실체는 무엇일까. 단일화된 영토를 지키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와 연결 해 보면 국가와 민족과 가족의 이름으로 동일화 되는 무의식 욕망의 기재가 몇 개의 단선적인 구조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게 어떤 욕망을 가질 수 있느냐의 문제인데 기성의 안온한 씹고 버무려진 우리에게 소화하기 좋게 쉬운 것을 따라가면 안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걸 욕망한다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타자의 욕망으로 가는 거다. 나의 욕망을 알고 자 함이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라는 거다. 만약 내가 ‘나의 욕망에 대해 말한다’면 어떻게 변할까. 가족이 원해서 국가가 원해서 타자가 말하니까... 하고 과연 순순히 따라갈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읽자고 한 것이다.

 

고병권의『추방과 탈주』는 그런 문제의식을 한국 사회 21세기 보다 쉽고 구체적으로 풀어낸 책이기 때문에 사실 이론적인 뭘 찾기 보다는 체험으로서 되돌아 보자는 거다.

 

 

 

 

images파시즘의대중심리.jpg 8976827198_1.jpg

 

 

 

 

폭력이나 행패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연대하는 힘, ‘연대의 쾌감’을 위하여

 

이기자 : 강의를 준비하면서 기대가 많이 될 것 같다. 어떤 이들이 이번 강의를 찾았으면 좋겠는지...

 

해피 : 우리도 현재의 문제를 돌파할 뾰족한 대안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문제의식을 서로 나누다 보면 서로에게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정훈 : 우리가 불온함을 알려주마. 이런 건 아니다. 사실 처음 시작할 때도 말했지만 우리의 불온하지 않음을 반성하는데서 시작하고 싶다. 대안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이게 아닌데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 문제를 넘을 수 있을 지 열린 마음으로 보자는 거다.

 

진석 :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일테니 서로의 고민이나 문제의식을 나누는 자리도 자주 마련했으면 한다.

 

정훈 : 자본이나 국가가 무서워하는 건 폭력이나 행패가 아니다. 우리가 연대하는 힘이다. 사실 이 연대하는 힘이 가치 있다고 믿는 데 연대를 당위로 하기 보다는 연대가 주는 쾌감을 느꼈으면 한다. 지난 여름 국제 워크샵 할 때 읽었던 다니가와 간의 글에 연대의 쾌감이란 내용이 나온다. 우리도 엠티도 가고 불온함이 즐거움이 될 수 있는 장이 됐으면 좋겠다.

 

이기자: 불온하다고 했을 때 많이 심각해 보였는데 그런건 아닌 듯?

 

화 : 그렇다. 불온함이 인상 쓰자는 게 아니다. 요즘은 트위터 하면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거나, 조금은 다르더라도 현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는 이들이 많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를 테면 ‘내가 반대하는 것들에 대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트위터에서 반대하는데, 이렇게 끊임없이 알티(*RT: 트위터에서 상대의 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때 쓰는 방법)가 되는데, 왜 세상은 안 바뀔까. 왜 이런 목소리는 전달이 안될까.’ 이런 생각 한 번쯤은 해 봤을 것이다. 알티(RT)도 좋지만 서로 구체적인 문제를 공유하고 공부를 하면서 돌파구를 찾아보자.

 

 

 

지금 당신이 가장 심각하게 고민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가족, 연인, 친구, 직장 문제로 머리가 아프진 않는지.

혹은 나날이 바보같은 짓을 해대는 어떤 분 때문에 화를 내고 있진 않는가.

 

이들이 말하는 연대의 쾌감이란 무엇일까. 

언젠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떤 날의 그 짜릿함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한번도 느껴보지 못해 뭔지 도통 감이 오지도 않는가.

 

궁금하다면 액션 나우!

불온한 인문학 1기에 함께 하자. 

 

 

글/이기자

 

 

 

 

<안내>

* 불온한 인문학 1기 주요 프로그램

I. 맑스의『자본』 입문 ― 다시, 반(反) 자본주의의 깃발을 들자!

II.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 가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

III. ‘불온한 인문학’ 집중 세미나

o 강 사 : 정정훈 · 최진석

o 세미나 튜터 : 정행복 · 문화

 

1. “불온한 인문학”은 2011.3.3.목 개강, 총 20주 40여 회(매주 강의1회 세미나 1회, 총5개월) 과정으로 구성됩니다.

 

2. 매주 목요일 오후 7시~10시에는 강의가, 토요일 오후 2시~5시에는 집중 세미나가 열립니다.

이 두과정은 꼭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부분 수강 불가)

 

3. “불온한 인문학”은 두 개의 트랙으로 진행됩니다. 10주 간 진행되는 트랙01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다음 10주간의 트랙02에는 욕망 이론과 대중 정치를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진행됩니다.

 

4. “불온한 인문학”은 단지 강사의 강의만을 수동적으로 “듣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불온한 인문학”에 참여하는 이들은 스스로 텍스트를 읽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표현하는 쉽지만은 않은 과정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성 지식의 ‘온순한’ 소비자로부터 동료들과의 소통 속에서 자기 사유의 힘을 벼려가는 ‘불온한’ 생산자가 되길 바랍니다.

 

5. 이를 위해서 “불온한 인문학” 참여자는 강의를 들은 후 2회 이상 강의 후기를 제출해야 하며, 강의와 관련된 텍스트를 읽고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과 소통하는 세미나에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세미나 진행에는 2회 이상의 텍스트 발제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공부한 과정을 총괄하는 글쓰기 과제(에세이)를 제출해야 합니다.

 

6. 수강신청

정원 : 선착순 25명

신청기간 : 2011.1.20.목요일부터

수강료 : 60만원, 입금 우리은행 1002-043-230955 (예금주 : 문화)

(*분납, 환불 불가합니다.)

*수강신청은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불온한 인문학' 게시판( http://nomadist.org/xe/bulin )에

신청글과 함께 연락처를 함께 남겨주세요.

 

7. 문의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http://www.nomadist.org)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실 대표 번호 (070)8263-0910

정행복 010-9404-8403, 문화 010-6210-3021

 

 

 

%25EC%2588%2598%25EC%259C%25A0%25EB%2584%2588%25EB%25A8%25B8_%25EB%25B6%2588%25EC%2598%25A8%25ED%2595%259C%25EC%259D%25B8%25EB%25AC%25B8%25ED%2595%2599.jpg 


신고
Posted by 노마디스트


8.jpg 

 

 

불어로  인문학 텍스트를 읽고 싶지만 불어에 익숙하지 않아 아쉬움만 쌓여간다고요 읽기는 문법을 완전정복한 다음으로 미루고만 있다고요프랑스 저자들의 글은 어렵다고요말하기듣기는 회화를 통해 익히는 것이, 텍스트 읽기는 그와 전혀 다른 세계라고요?

……  (=,.=)

읽고 싶은 프랑스어 텍스트를 읽을 날이 요원하여 자포자기에 빠지신 분들을 위해 초중급 불어강독 세미나를 시작합니다.

 

말하기듣기 감각 없는 문법은 죽은 지식입니다프랑스 인문학 텍스트의 저자들은 결코 죽은 언어로 글을 쓰지 않습니다그들의 글엔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불어의 특성이 생생한 말하기 감각과 결합되어 있지요.

 

문법을 따로 완전히 익힌 다음에야 비로소 책을 읽을  있다는 생각을 버린다면 훨씬 성큼성큼 나아갈  있어요부족하면 부족한대로, être 동사 변화까지 함께 체크하면서 텍스트를 읽고자 합니다.  

 책을   읽기보다는 흥미롭고 쉬우면서도 중요한다양한 글을 선별해 읽음으로써 프랑스어 인문학 텍스트의 맛을 감식할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문법뿐만 아니라 단어개념표현들의 일상적인문학적 용법 익히기소리내어 읽기를 통한 발음 교정과 불어 텍스트의 리듬 익히기이런 방식으로 불어 인문학 텍스트에 접근해 보고 싶은 분들은 주저없이 오세요! (^.*)   

 

  

대상 : 

불어에 익숙하진 않지만 프랑스어로  인문학 텍스트를 읽고자 절실히 욕망하는 모든 초급 환영!

(Q : 아베쎄도 보르는 생초짜도 가능한가요?

A : 초보라도 발음규칙과 일반적인 어문규칙 정도는 알고 계셔야 합니다. 

     수업, 어학코스, 독학을 통해 한 번이라도 프랑스어를 공부해 본 적이 없다면 

     세미나 시작 전까지 공부해 오시면 됩니다.)


날짜, 시간 : 

2011 3, 4 매주 목요일 저녁 7:00-9:00

 

장소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세미나룸

(서대문구 연희동. 찾아오시는 법)

 

강사 : 

홍서연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 인류학 박사파리 4대학 철학 박사과정 수료)

조성천 (파리 4대학 문학 석사파리 3대학 공연예술학 박사과정 수료, <니체와 악순환역자)

 

참가비 : 

2개월 9 10만원

(입금계좌 : 국민은행 050-21-0499-216 예금주 홍서연분납환불 불가합니다.)

 

신청방법 : 

수유너머N 세미나 게시판에 올린 공지에 댓글 달아주시고 입금해 주시면 됩니다

댓글에 이메일/전번 꼭 남겨 주시고입금시 문자 주세요.

 

연락처 : 

홍서연 indooa at gmail.com / 트위터 @seedveil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http://www.nomadist.org)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실 대표 번호 (070)8263-0910

 



livres.jpg

 

프로그램

세미나는 완독에 목표를 두지 않고 다양한 텍스트를 맛보는  중점을 두며분량은 세미나 팀의 역량에 따라 조정합니다원문이 프랑스어인 글뿐만 아니라 구약성서아감벤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불어로 번역된 텍스트를 포함하며인터뷰강연문철학사회학문학을 두루 넘나듭니다마음을 끄는 매력적인 글을 발견했다면  나아가는  각자의 하지만 풀리지 않는 문제는 언제나 도움을 요청할  있습니다.

(텍스트는 필요한 부분만 복사해서 이용할 예정입니다.)

 

1 (3 3) :

Giorgio Agamben, Amitié (우정, 2007).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 인용해 우정을 정의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감각지각의식과 관련된 어휘들과 만난다.

 

2 (3 10) :

Marc AugéLes formes de l'oubli (망각의 형태들, 1998). 기억추억망각무관심용서원한… 프랑스 인류학자의 글을 통해현대 철학의 중요한 테마이기도  기억에 대해 반추한다.

 

3 (3 17) :

Michel Foucault, "Qu'est-ce qu'un auteur?" (저자란 무엇인가?, 1969). 세탁물 메모에도 저자를 말할 수 있을까?! 롤랑 바르트의 "La mort de l'auteur"(저자의 죽음, 1968) 함께저자의 지위에 대해 묻는 유명한 하지만 실은 강연문으로서 구어체가 섞인 흥미롭고 알기 쉬우며 유머러스한 .

 

4 (3 24) :

Pierre Bourdieu (dir), La misère du monde (세계의 비참, 1993). 사회학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프랑스 빈민층의 생생한 언어를 접한다.

 

5 (3 31) :

Henri Bergson, Le rire (웃음, 1940). 웃음에 대한 탁월한 분석일  아니라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테마로 들어가는 창문이기도  텍스트.

 

6 (4 7) :

Roland Barthes, Le plaisir du texte (텍스트의 즐거움, 1973). 텍스트의 즐거움을 알기 위해선 '바벨의 언어', 텍스트의 다수성을 예찬하는 <텍스트의 즐거움>!

구약성서 창세기 10-11 + Umberto Eco, "Eloge de la pluralité" (다수성 예찬) (Philosophie magazine, 2009. 8-9, hors-série). 바벨탑의 출전과 그에 대한 독해를 함께 읽는다.

 

7 (4 14) :

Jacques Rancière, Le spectateur émancipé (해방된 관객, 2008). 5 "L'image pensive"(사색적 이미지)  부분을 통해 이미지와 사유의 관계를 사유함과 동시에'사유' 표현들을 접한다.

 

8 (4 21) :

Deleuze Spinoza 강의 (1978. 1. 24.). 들뢰즈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는다분명하고 똑똑한 구어체로 철학을!

 

9 (4 28) :

Maurice Blanchot, La communauté inavouable (밝힐  없는 공동체, 1983). '공동체' 중심으로 개념적 사유를!

 

 

 


liseurs2.jpg 

 

 

 

 


 

le plaisir de vous ecrire.jpg 


신고
Posted by 노마디스트
시대에 순치된 인문학…거세된 ‘불온함’을 부르다
인문학 부흥 기여 연구공동체
교양주의 경향의 현주소 비판

3월부터 20주간 강의와 세미나
이론가들 책 내고 연대활동도
한겨레 bullet03.gif 최원형 기자기자블로그
00383389401_20110210.JPG
» 지난 8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수유너머 엔’에서 ‘불온한 인문학’을 기획하고 있는 수유너머 엔 연구원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부터 최진석, 문화, 정정훈, 정행복 연구원.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수유너머’ 새 프로젝트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우려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벌써 인문학은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다. 주무대는 대학 밖이다. 고전을 통해 얻는 지식과 교양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퍼져가면서, 도서관이나 문화센터, 기업, 각종 기관에서 여는 대중강좌들을 중심으로 인문학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는 것이다. 재소자를 위한 인문학에서부터 최고경영자(CEO)를 위한 인문학까지, 그 대상과 성격도 다양하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지점은, ‘쓸모 없는 학문’ 취급을 받았던 인문학이 이젠 ‘유용한 학문’으로 각광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2000년 활동을 시작한 ‘연구공간 수유+너머’(이하 수유너머)는 그동안 제도 밖 연구공동체 실험과 대중강연 등으로 이런 인문학 부흥에 거름 구실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그런 수유 너머에서 ‘불온한 인문학’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우리 시대의 인문학과 정면으로 대결하겠다고 나섰다. 인문학 붐을 일으켰던 당사자들이, 도대체 왜 지금 인문학에 ‘불온성’을 찾아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지난 8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수유너머 엔(N)’(nomadist.org)에서 오는 3월부터 시작할 ‘불온한 인문학’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는 4명의 수유너머 엔 연구원들을 만났다. 이들은 “자본과 국가의 권력에 의해 순치된 인문학은 ‘지금-여기’의 현실을 스스로 사유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며 “지금은 인문학이 가진 위협적이고 전복적인 성격, 곧 불온함을 벼리는 것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사회의 지배적인 통념에 정면으로 맞서려 드는 불온성이 거세된 인문학이, 구체적인 삶과의 접점을 잃고 ‘문화적 교양주의’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청소 노동자들이 하루 300원의 식대를 받고 화장실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현실을 스스로의 삶 속 문제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지식과 교양의 습득에만 머무르는 인문학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문제의식이다.


연구원들은 현재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인문학의 경향을 ‘학진(학술진흥재단, 현 한국연구재단) 인문학’과 ‘대중 인문학’으로 나눠 비판했다. 국가의 통제 아래 놓여 있는 학진 인문학은 “협애한 전문가주의의 실적물”에, 지식과 교양의 쉬운 전달을 우선으로 삼는 대중 인문학은 “기름진 교양주의의 지적 장식물”에 머무르고 있다는 비판이다.

 

 

최진석 연구원은 그동안 다녔던 외부 대중강연에서 ‘민감한 주제라 곤란하다’는 주최 쪽의 요구로 주제를 바꾸거나 내용을 수정했던 경험을 들며, “이미 인문학이 사회의 지배적 통념을 따라가고만 있기 때문에 이 흐름 자체를 반대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말했다. 정정훈 연구원은 “인문학 유행에 주도적 구실을 했던 수유너머 역시 현재 상황에 대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고 봤다”며 “때문에 교양과 지식의 전달에 그치지 않고 대중과 함께 불온함을 모색할 새로운 장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3월에 시작해 20주 동안 진행되는 불온한 인문학 1기 프로젝트는, 강의와 집중 세미나를 함께 진행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마르크스의 <자본>과 들뢰즈·가타리의 <앙띠 오이디푸스>를 주요 텍스트로 삼은 강의와, 각각의 강의에 대응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욕망이론·대중정치를 다루는 집중 세미나다. 곧 자본주의와 가족주의·국가주의가 불온한 인문학의 두 가지 큰 주제다. 정정훈 연구원은 “이 두 가지는 우리 사회가 너무나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있는 지배적인 삶의 방식”이라며 “어떤 모습이 될지는 미리 예측할 순 없지만, 국가와 자본이 쥐여주는 스스로의 일상과 관습에 균열을 내는 것이 불온한 인문학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오는 3월12일 ‘인문학 신드롬과 불온한 인문학’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연다. 이 자리에서 프로젝트의 취지를 담은 선언문을 발표하고, 인문학의 현주소를 짚는 발표와 토론을 진행할 예정이다. 또 ‘불온한 인문학 총서’를 기획하고 있다. 최진석 연구원 등이 쓰는 <불온한 인문학>을 비롯해 수유너머 엔에서 활동하는 핵심 이론가인 이진경 박사의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등 10여권의 책을 출간할 계획이다.

 

 

불온한 인문학을 제시하고 펼칠 수 있는 수유너머의 강점은, 독립적인 공간과 그곳에 모여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일상생활에 밀착할 수 있는 여지가 더 크다는 데 있다고 한다. 문화 연구원은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과 연대를 통해 내가 수동적으로 따라가던 일상을 이론뿐 아니라 실천의 차원에서 조금씩 변화시켜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정행복 연구원은 “불온한 인문학에는 강의나 세미나뿐 아니라, 대학교 청소 노동자들과의 연대, 강제 철거 위협에 놓인 두리반과의 연대 등 연구실 밖에서 펼칠 활동들도 포함된다”고 덧붙였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수유너머’는 발전적 분화 중

여러 코뮨 네트워크로 확산

이전까지 하나의 연구공간이었던 ‘연구공간 수유+너머’는 지금은 ‘코뮤넷 수유너머’라는 이름으로, 여러 코뮨(코뮌·공동체)들의 네트워크를 표방하고 있다.

 

 

현재 이 네트워크에 속해 활동하고 있는 수유너머 공동체는 서울 용산동에서 자리를 잡아 온 ‘수유너머 남산’, 수유너머 남산과 같은 건물에 있는 ‘수유너머 아르(R)’, 서울 연희동에 있는 ‘수유너머 엔(N)’, 서울 상도동에 있는 ‘수유너머 길’, 강원 춘천시에 있는 ‘수유너머 강원’ 등 다섯 곳이다. 2009년 6월부터 수유너머 남산으로부터 차례대로 분화가 이뤄졌다. 수유너머 쪽은 “세상의 여러 코뮨들과 접속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가 코뮨들의 네트워크가 되기로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분화는 지역적인 확산이기도 하지만, 공동체마다 조금씩 다른 성격의 반영이기도 하다. 수유너머를 대표하는 3명의 학자의 주력 분야와도 연관된다. 고미숙 박사가 있는 수유너머 남산에서는 고전 읽기의 비중이 높은 편이다. 이진경 박사가 있는 수유너머 엔은 사회과학 공부의 비중이 비교적 높은 편이다. 고병권 박사가 있는 수유너머 아르는 강좌·세미나 활동뿐 아니라 <아르(R)>라는 이름의 매체도 발간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눈에 띄는 활동은 지난해 1월 창간해 최근 돌을 맞은 웹진 <위클리 수유너머>(suyunomo.net)의 발행이다. 코뮤넷 수유너머 사람들의 다양한 사회적 활동과 사유, 관심사 등을 일주일에 한번씩 시의적절하게 웹진에 실어 전파하고 있다. 최원형 기자

 

 


신고
Posted by 노마디스트

불온한 인문학 1기, ‘연대의 쾌감’을 위하여

-불온함을 즐거움으로 바꿀 수 있는 친구를 기다립니다.

 

지난 기사 보기 클릭!

[불온 통신 1] 내 친구, 불온한 인문학 강사팀을 소개합니다.’ http://nomadist.org/xe/79462

 

[불온 통신 2] 불온한 인문학이 선택한 두 권의 뜨거운 책 -맑스의 『자본』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http://nomadist.org/xe/Nzine/82100

 

 인문학 강의 하면 강사는 강의하고 수강생은 그냥 듣는 수동적인 강의를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불온한 인문학은 강의를 듣는데서 끝나지 않고

집중적으로 텍스트를 읽고 자기문제를 고민하고 토론하는 시간

‘집중 세미나’ 라는 과정을 꼭 함께 해야 한단다.

 

집중 세미나는 무엇이며 어떤 텍스트를 읽는지,

그리고 불온한 인문학 강사팀이 이번 과정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

그들이 꿈꾸는 ‘연대의 쾌감’에 대해 들어봤다.

 

 

이기자: 집중 세미나도 한다고? 세미나 제목이 ‘반자본주의와 욕망의 정치학’이다. 세미나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

 

해피 : 먼저 읽을 『자본주의 역사 강의』다. 이 책은 맑스의 틀에서 해석하지 못한 부분들을 설명하는 책이다. 왜 맑스의 자본론을 읽다보면 현재 경제상황과는 너무 다르지 않느냐. 그러다 보면 흥미를 잃거나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본 강의를 들으면서 세미나 시간엔 직접 이 책을 읽는다면 현재의 문제에 대해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훈 : 당대의 맑스가 썼던 책이 자본주의 문제를 완전히 전능하게 풀어 낸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선 자본주의를 폭 넓게 이해하기 위해선 맑스가 풀지 못한 것을 봐야 한다. 『자본주의 역사 강의』는 초기 자본주의 부터 현재의 신자유주의 모습까지 자본주의 500년 역사의 변화 양상을 두루 볼 수 있는 책이다. 세계체계 분석(World System Theory)의 두 대가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오반니 아리기’의 세계체계 분석 뿐 아니라 이들에게 영향을 끼친 ‘페르낭 브로델’ 과 ‘칼 폴라니’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4886_9568_3056.jpg pimg_774818135518484.jpg

 

 

 

 

화 : 지금 해피쌤과 함께 읽고 있는데 정말 재밌다.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 하자면 내 주변엔 세계 경제에 대한 걱정·근심으로 밤잠 못 이루는 분들이 많다. 주변 직장 동료를 봐도 세계 경제에 대해 어쩌면 그렇게 박식하신지. 그분들 이야기를 들으면 참 재밌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젠 중국. 세계 헤게모니가 어쩌고 저쩌고. 식민지 전쟁부터 대공항, 무역전쟁 등등 자본주의 역사를 열심히 설명한다. 그리고 결론이 너무 웃긴다. ‘그래서 중국 펀드를 사야한다’로 귀결되더라. (*물론...한참 중국·인도 펀드 유행일 때 가입했다가 반토막 났을 때 이 놈의 경제가 왜 이러냐고 한탄하느라 눈 밑이 까맣더라.) 우리야 뭐 그런 펀드는 안 사겠지만 어쨌든 세계자본주의에 대한 거시적 관점은 꼭 필요하단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책! 무엇보다 재밌다! 기대하시라^^

 

 

 

 

5149101.jpg 145302.jpg

 

 

 

정훈 : 두 번째로 집중 세미나 시간에 읽을 책은 풀빛에서 나온 『자본의 정치적 해석』이다. 이 책은 자본의 1편 1장을 서술한 것이다. 어떻게 자본론 안에 프롤레타리와 부르주아의 계급적 문제가 관통하는 지 좋은 통찰을 주는 책이다. 사실 이 책은 굉장히 논쟁적인 저작이기도 하다.

 

 

 

독일 시민은 속지 않았다...... 대중은 왜 자기 억압을 욕망하는가?

 

이기자 : 두 번째 학기에 집중 세미나에서 읽을 책은 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 대중심리』, 고병권의 『추방과 탈주』라고?

 

진석 : 들뢰즈가 라이히의 책을 인용하면서 던지는 유명한 질문이 있다. ‘왜 대중은 자기 억압을 욕망하는 가.’ 라이히가 이런 문제의식을 던졌을 때 그 문제의식의 이면엔 ‘도대체 왜 임박해 있다고 믿었던 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는가’ 라는 질문이 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혁명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지도적인 이론가들 혁명주의자들이 주안점을 두고 생각한 것은 대중이 어떻게 혁명을 의식할 것인가이다.

 

루카치는 1927년『역사와 계급의식』이란 책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의 계급적 입장이라는 것을 말하는 순간 혁명은 폭발할 것이라고 기대를 했다. 대신 아직 프롤레타리아트가 문제가 뭔지를 모르기 때문에 (오지 않는 것)이고, 부를 타도하는 게 뭔지를 알면 혁명이 자연히 올 것이라 생각했다.

 

 

 

 

1-1-2-8-2.jpg   images파시즘.jpg

 

 

 

 

라이히는 여기에 문제의식이 있다. (모두들 알다시피 혁명은 오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에 문제의식을 갖는다 해도 혁명이 오지 않는 문제. 아는 것과 욕망의 문제는 다르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대중에 대한 의문들을 생각한 것이다. 가령 2차 세계 대전 끝나고 나치즘 독일에 대해서 비판적인 질문을 던질 때를 보자.

 

그때 ‘어리석게도 독일 시민은 속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많은 역사 문화적인 연구가 보여주는 것을 보면 아니다. 사실 독일 시민은 다 알았다는 거다. (파시즘이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배반하는 욕망의 실체는 무엇일까. 단일화된 영토를 지키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와 연결 해 보면 국가와 민족과 가족의 이름으로 동일화 되는 무의식 욕망의 기재가 몇 개의 단선적인 구조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게 어떤 욕망을 가질 수 있느냐의 문제인데 기성의 안온한 씹고 버무려진 우리에게 소화하기 좋게 쉬운 것을 따라가면 안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걸 욕망한다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타자의 욕망으로 가는 거다. 나의 욕망을 알고 자 함이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라는 거다. 만약 내가 ‘나의 욕망에 대해 말한다’면 어떻게 변할까. 가족이 원해서 국가가 원해서 타자가 말하니까... 하고 과연 순순히 따라갈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읽자고 한 것이다.

 

고병권의『추방과 탈주』는 그런 문제의식을 한국 사회 21세기 보다 쉽고 구체적으로 풀어낸 책이기 때문에 사실 이론적인 뭘 찾기 보다는 체험으로서 되돌아 보자는 거다.

 

 

 

 

images파시즘의대중심리.jpg 8976827198_1.jpg

 

 

 

 

폭력이나 행패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연대하는 힘, ‘연대의 쾌감’을 위하여

 

이기자 : 강의를 준비하면서 기대가 많이 될 것 같다. 어떤 이들이 이번 강의를 찾았으면 좋겠는지...

 

해피 : 우리도 현재의 문제를 돌파할 뾰족한 대안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문제의식을 서로 나누다 보면 서로에게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정훈 : 우리가 불온함을 알려주마. 이런 건 아니다. 사실 처음 시작할 때도 말했지만 우리의 불온하지 않음을 반성하는데서 시작하고 싶다. 대안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이게 아닌데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 문제를 넘을 수 있을 지 열린 마음으로 보자는 거다.

 

진석 :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일테니 서로의 고민이나 문제의식을 나누는 자리도 자주 마련했으면 한다.

 

정훈 : 자본이나 국가가 무서워하는 건 폭력이나 행패가 아니다. 우리가 연대하는 힘이다. 사실 이 연대하는 힘이 가치 있다고 믿는 데 연대를 당위로 하기 보다는 연대가 주는 쾌감을 느꼈으면 한다. 지난 여름 국제 워크샵 할 때 읽었던 다니가와 간의 글에 연대의 쾌감이란 내용이 나온다. 우리도 엠티도 가고 불온함이 즐거움이 될 수 있는 장이 됐으면 좋겠다.

 

이기자: 불온하다고 했을 때 많이 심각해 보였는데 그런건 아닌 듯?

 

화 : 그렇다. 불온함이 인상 쓰자는 게 아니다. 요즘은 트위터 하면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거나, 조금은 다르더라도 현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는 이들이 많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를 테면 ‘내가 반대하는 것들에 대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트위터에서 반대하는데, 이렇게 끊임없이 알티(*RT: 트위터에서 상대의 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때 쓰는 방법)가 되는데, 왜 세상은 안 바뀔까. 왜 이런 목소리는 전달이 안될까.’ 이런 생각 한 번쯤은 해 봤을 것이다. 알티(RT)도 좋지만 서로 구체적인 문제를 공유하고 공부를 하면서 돌파구를 찾아보자.

 

 

 

지금 당신이 가장 심각하게 고민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가족, 연인, 친구, 직장 문제로 머리가 아프진 않는지.

혹은 나날이 바보같은 짓을 해대는 어떤 분 때문에 화를 내고 있진 않는가.

 

이들이 말하는 연대의 쾌감이란 무엇일까. 

언젠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떤 날의 그 짜릿함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한번도 느껴보지 못해 뭔지 도통 감이 오지도 않는가.

 

궁금하다면 액션 나우!

불온한 인문학 1기에 함께 하자. 

 

 

글/이기자

 

 

 

 

<안내>

* 불온한 인문학 1기 주요 프로그램

I. 맑스의『자본』 입문 ― 다시, 반(反) 자본주의의 깃발을 들자!

II.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 가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

III. ‘불온한 인문학’ 집중 세미나

o 강 사 : 정정훈 · 최진석

o 세미나 튜터 : 정행복 · 문화

 

1. “불온한 인문학”은 2011.3.3.목 개강, 총 20주 40여 회(매주 강의1회 세미나 1회, 총5개월) 과정으로 구성됩니다.

 

2. 매주 목요일 오후 7시~10시에는 강의가, 토요일 오후 2시~5시에는 집중 세미나가 열립니다.

이 두과정은 꼭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부분 수강 불가)

 

3. “불온한 인문학”은 두 개의 트랙으로 진행됩니다. 10주 간 진행되는 트랙01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다음 10주간의 트랙02에는 욕망 이론과 대중 정치를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진행됩니다.

 

4. “불온한 인문학”은 단지 강사의 강의만을 수동적으로 “듣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불온한 인문학”에 참여하는 이들은 스스로 텍스트를 읽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표현하는 쉽지만은 않은 과정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성 지식의 ‘온순한’ 소비자로부터 동료들과의 소통 속에서 자기 사유의 힘을 벼려가는 ‘불온한’ 생산자가 되길 바랍니다.

 

5. 이를 위해서 “불온한 인문학” 참여자는 강의를 들은 후 2회 이상 강의 후기를 제출해야 하며, 강의와 관련된 텍스트를 읽고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과 소통하는 세미나에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세미나 진행에는 2회 이상의 텍스트 발제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공부한 과정을 총괄하는 글쓰기 과제(에세이)를 제출해야 합니다.

 

6. 수강신청

정원 : 선착순 25명

신청기간 : 2011.1.20.목요일부터

수강료 : 60만원, 입금 우리은행 1002-043-230955 (예금주 : 문화)

(*분납, 환불 불가합니다.)

*수강신청은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불온한 인문학' 게시판( http://nomadist.org/xe/bulin )에

신청글과 함께 연락처를 함께 남겨주세요.

 

7. 문의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http://www.nomadist.org)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실 대표 번호 (070)8263-0910

정행복 010-9404-8403, 문화 010-6210-3021

 

 

 

%25EC%2588%2598%25EC%259C%25A0%25EB%2584%2588%25EB%25A8%25B8_%25EB%25B6%2588%25EC%2598%25A8%25ED%2595%259C%25EC%259D%25B8%25EB%25AC%25B8%25ED%2595%2599.jpg 


신고
Posted by 노마디스트

불온한 인문학이 선택한 두 권의 뜨거운 책

 

-맑스의 『자본』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

 

예고 해 드린 대로 [불온 통신 1호]

'내 친구, 불온한 인문학 강사팀을 소개합니다.’에 이은

두 번째 인터뷰기사입니다^^

지난 기사는 요기! 클릭! http://nomadist.org/xe/79462

 

 

이번 기사는 불온한 인문학 1기 강의를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불온한 인문학 강의는 1트랙은 맑스의 자본,

2트랙은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 를 중심으로 이뤄집니다. 

 

세미나 소개도 조만간 업뎃할 예정입니다.

 

 

이기자 : 20주 동안 진행 되는 커리에 맑스의 『자본』이 있던데. 자본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면? 솔직히 언뜻 생각하기엔 ‘불온함’과 ‘자본’의 만남 이럴 줄 알았단 생각도 드는데?

 

정훈: 그런 반응 예상했다. 하지만, 지금이야 말로 자본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자본을 그저 좋은 책으로 고전으로 읽는 건 아니다. 이런 말을 굳이 하는 이유가 있다. 최근 자본을 쉽게 풀어 쓴 책을 읽거나 자본을 그저 고전으로 읽는 움직임들이 느껴져서다. 그런 모습은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이런 움직임은 『자본』이 이 사회에 아무런 위해요소가 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 때문에 가능한 것은 아닌지. 이건 문제다.

 

진석 : 러시아에서는 자본론 번역이 처음 됐을 때 검열자가 읽었는데 너무 어려워서 그냥 허가를 내줬다고 한다. 뭐 설마 이렇게 어려운 걸 얼마나 이해하겠나. 이런 생각이었겠지.

 

111127146.jpge0022573_494efb602d1ac.jpg

 

대기업이 떡볶이를 파는 이 시대에 자본을 읽는다는 것.

 

정훈 : 어렵지만 유명하니까 읽고 그게 꼭 나쁘진 않지만 역으로 드는 생각이 자본주의가 계속 지속되고 있는데 요즘은 대기업이 떡볶이 까지 판다는데 이런 시대에 자본을 읽는 것이 하나도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간혹 지금 권력이 작동되는 방식과 동떨어져서 ‘헤겔, 리카르도 등등을 나는 다 안다. 그러니까 나는 이 정도 읽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지나치게 전문가주의적으로 읽는 경우. 혹은 말랑말랑하게 소화가 다 된 상태로 강사가 알려주는 데로 받아들이는 것. 이 두 가지 방식 모두 문제다. 이게 다 맑스의 『자본』을 무기력한 낡은 유산으로 읽어서다. 내가 보기엔 그럼 맑스도 싫어할 것 같다.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전화로 해고를 통지하고, 청소 노동자에게 식비 300원을 주는 이런 세상에서 자본을 읽는 행위에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해피 : 맑스의 자본은 누구랑 어떤 입장에서 읽는 것도 매우 중요하단 생각이 든다. 지난 가을 연구실에서 맑스 콜레기움하면서 느꼈다. 맑스의 자본을 정치·철학과 같이 읽으니까 자본이라는 책이 주는 폭발력이 더 강렬했다.

 

(*콜레기움 : 정정훈 선생과 함께 ‘맑스와 정치, 혹은 혁명과 코뮨의 정치철학에 관하여’ 라는 주제로 2010년 10월 부터 12주 동안 맑스의 저작을 함께 읽었던 프로그램이다. http://nomadist.org/xe/collegium/28937)

 

이기자 : 이번 불온한 인문학 강의에서 읽는 자본 역시 각자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읽는다면 더 재밌어 질 것이라는 말인 것 같은데? (좌중 동의^^) 그런데 설마 자본 5권을 다 읽어야 하나?

 

정훈 : 모든 사람들이 자본을 안 읽어도 된다. 오히려 자본을 읽기 위한 사전 오리엔테이션이라 생각하면 된다. 이 강의를 충분히 듣고 스스로 읽을 때는 그렇게 어렵지 않게 자본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걸 듣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본을 읽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좋겠지. 필요하면 별도의 세미나를 꾸려서 해도 좋고.

앙띠.jpg.jpg

 

이기자 : 두 번째 트랙은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다. 어떤 책인가.

 

진석 : 『안티 오이디푸스』는 현대의 고전이다. 그런데도 자본이랑 비슷한 운명을 밟는 것이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거다. 읽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고. 자본을 어려워하는 사람은 수학 나올까 걱정 돼서 못 읽고. 안티 오이디푸스는 읽어 보려고 해도 아예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말도 있더라.

 

원제목은 ‘안티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L'Anti-oedipe :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이다. 이때 스키조프레니(schizophrénie) 는 정확하게 번역하면 정신 분열증이 아니다. 이건 분열증이라고 번역하는 게 맞다. 보통 사람들은 아 자본주의 때문에 정신 분열증 생긴 갑다.. 이렇게 이해도 하더라. 그런데 아니다. 자본주의와 분열증은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때 지나가던 한 세미나 회원 ‘아~ 나도 자본주의 때문에 정신분열증 생긴단 소린 줄 알았어~헤헤’ (웃을 때가 아니지요. 공부하세요^^)

 

진석 : 스키조프레니(schizophrénie) 는 임상적인 의미의 정신 분열증이 아니라 분열증, 분열자가 되자는 말이다. 들뢰즈의 개념어에 익숙한 사람은 알겠지만 다양체를 지향한다든가 다양체를 만드는 것, 특수한 회로를 벗어나 옳다고 여겨지는 가치관과 태도 지배적인 시선 이런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분열증이다.

 

safe_image.png capitalisme-et-schizophrnie-l-anti-oedipe-22258701.jpg

 

자본주의에 맞선다는 것? 분열증자가 되자.

 

진석 : 흔히 정신병이 있으면 이야기하기 힘들다 생각 하는데, 논리가 서로 대립되고, 합쳐 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이 책을 이해하는 포인트라 생각한다. 내 의식 감정에서는 불편하지만 일상생활은 자본주의가 지시하는 그대로 따라 산다. 그래서 이 사회가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는 것이다. 반대로 자본주의에 맞선다는 것. 가장 강력한 힘은 아예 다른 언어 논리로 맞장을 뜨는 것이다.

사실 실천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양상은 달라지겠지만. 믿고 따르고 의식하던 일상의 규율에 의문을 품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새로운 논리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 상이한 논리 언어가 스쳐 갈 때 지속적으로 잡을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images자본론.jpgl9788937416019.jpg

 

맑스의 자본과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 두 권 모두 만만치 않은 책이다.

꼭 한 번 독파해야겠다는 의무감에 사놓고 길을 잃었던 이라면 이번 기회에 '불온한 인문학'을 접속해보면 어떨까.

 

다행히 이번 '불온한 인문학' 강의에서는 이 두 권의 책을 잘 읽을 수 있도록 강사와 튜터가 도와준다고 한다.

 

설령 이 두 권의 책 모두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더라도 괜찮다. 문제적인 두 권의 책을 좋은 친구들과 함께 첫 만남을 하는 것도 큰 행운 아닐까.

 

 

글/이기자

 

 

 

 

 

<안내>

* 불온한 인문학 1기 주요 프로그램

 

I. 맑스의『자본』 입문 ― 다시, 반(反) 자본주의의 깃발을 들자!

II.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 가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

III. ‘불온한 인문학’ 집중 세미나

 

o 강 사 : 정정훈 · 최진석

o 세미나 튜터 : 정행복 · 문화

 

1. “불온한 인문학”은 2011.3.3.목 개강, 총 20주 40여 회(매주 강의1회 세미나 1회, 총5개월) 과정으로 구성됩니다.

 

2. 매주 목요일 오후 7시~10시에는 강의가, 토요일 오후 2시~5시에는 집중 세미나가 열립니다.

 

이 두과정은 꼭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부분 수강 불가)

 

3. “불온한 인문학”은 두 개의 트랙으로 진행됩니다. 10주 간 진행되는 트랙01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다음 10주간의 트랙02에는 욕망 이론과 대중 정치를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진행됩니다.

 

4. “불온한 인문학”은 단지 강사의 강의만을 수동적으로 “듣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불온한 인문학”에 참여하는 이들은 스스로 텍스트를 읽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표현하는 쉽지만은 않은 과정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성 지식의 ‘온순한’ 소비자로부터 동료들과의 소통 속에서 자기 사유의 힘을 벼려가는 ‘불온한’ 생산자가 되길 바랍니다.

 

5. 이를 위해서 “불온한 인문학” 참여자는 강의를 들은 후 2회 이상 강의 후기를 제출해야 하며, 강의와 관련된 텍스트를 읽고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과 소통하는 세미나에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세미나 진행에는 2회 이상의 텍스트 발제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공부한 과정을 총괄하는 글쓰기 과제(에세이)를 제출해야 합니다.

 

6. 수강신청

정원 : 선착순 25명

신청기간 : 2011.1.20.목요일 부터

수강료 : 60만원, 입금 우리은행 1002-043-230955 (예금주 : 문화)

(*분납, 환불 불가합니다.)

*수강신청은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불온한 인문학' 게시판( http://nomadist.org/xe/bulin )에

신청글과 함께 연락처를 함께 남겨주세요.

 

7. 문의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http://www.nomadist.org)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실 대표 번호 (070)8263-0910

정행복 010-9404-8403, 문화 010-6210-3021

  

%25EC%2588%2598%25EC%259C%25A0%25EB%2584%2588%25EB%25A8%25B8_%25EB%25B6%2588%25EC%2598%25A8%25ED%2595%259C%25EC%259D%25B8%25EB%25AC%25B8%25ED%2595%2599.jpg


신고
Posted by 노마디스트
이전버튼 1 2 이전버튼

블로그 이미지
노마디스트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516)
이슈&리뷰 (51)
빌린 책 (43)
개봉영화 파헤치기 (15)
풍문으로 들은 시 (13)
장애, 그리고... (4)
4040 (5)
칼 슈미트 입문 강의 (32)
아무도 번역 안 해줄 거잖아 (4)
시몽동X번역기계 (6)
과학 X 철학 토크박스 (2)
해석과 사건 (6)
화요토론회 (24)
기획 서평 (34)
과거글 (272)
Yesterday293
Today168
Total1,717,224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