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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2.21 [불온통신 4호] '불온한' 인문학을 위하여


대학의 제도 ‘안’에서가 아니라, 대학의 ‘바깥’에서 일반 대중과 시민을 대상으로 한 인문학 강의가 성업 중이다. 불과 십여 년 전 ‘대안 대학’을 내세우며 수유너머를 포함한 소수의 방외 단체들에서 ‘실험’되었던 인문학 강좌들이, 지금은 매 분기별로 국공립 도서관과 문화 센터, 동사무소, 호텔과 백화점 등에서 기획되고 있다. 사회적 붐을 넘어, 어느덧 일상의 풍경으로 정착된 느낌마저 든다. 빈궁과 소외가 인문학의 본래 운명처럼 생각되던 시절과 비교해 볼 때, 인문학의 외연 확대와 대중화는 여러 모로 긍정적이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애초에 대학 교육의 부실함과 형식주의를 비판하며 시도되었던 인문학 강좌를 이젠 대학이 나서서 주관하는 시점까지 오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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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 강좌 매니저의 업무도 덩달아 바빠지고 넓어졌다. 지역과 대학 도서관, 사회 단체나 각종 문화 센터 등에서 들어오는 강의 청탁들을 접수하고, 적절한 강좌를 기획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일반 대중들이 접하기 어려운 ‘인문학적’ 사유를 소개하고 관심을 이끌며, 여전히 ‘가벼운’ 연구자들의 지갑 사정을 보조해 준다는 점에서 불필요한 노동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의 내 경험들은 이런 인문학 강좌의 문제 설정에 어떤 근본적인 오류나 오판이 있던 게 아닌가 하는 당혹감이 들게 만든다.

 

 '일반 대중'이라는 막연한 수신자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꾸리려면, 연구실서 공유되고 있는 흥미로운(만큼 '어려운') 논제들을 포기해야 할 때가 많다. 나름대로 쉽게 풀고 소개한다고 해도, 일단 대중에게 '듣도보도 못한(?)' 철학자나 사상을 거론하며 이야기를 하려면 여러 모로 공을 들이지 않을 수 없고 자주 생략해 버리곤 한다. 더구나 지금 현재적인 정치적·사회적 사안들이 도마 위에 오를라치면 주최측에서 먼저 변경을 요구하는 일이 다반사다. 강의는 되도록 먼 나라, 멀리 있는 사람들에 관한, 대중적 상식('교양')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채워달라는 게다. 또한, 삶과 사유의 수준있는 '고전'에 대한 강의를 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동양의 고전'들은 빼주는 '센스'가 필요하다. 동양 고전이라면 어쩐지 지루할 것 같으니까. 맑스나 헤겔과 같은 '서구의 고전'들도 예외는 아니다. 읽어본 적은 없어도 어딘지 '어려울' 것 같고, 그래도 이름만은 자주 들어봐서 벌써 '식상할'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텍스트 위주의 강의안을 내밀면 난감한 미소를 띠며 되돌려준다. 요즘 세상에 PPT 같은 시청각 자료도 없이 강의를 다니는 게 말이 되냐는 거다... 이래저래 주최측의 요구 사항들을 맞추며 조율하다보면 강의할 사람도, 강의할 내용도 마땅찮기가 여러 번이다. 애초에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소통 지향적 강의'가 인문학 강좌의 지향점 아니냐고 반문할 법도 하다. 소통이 상대의 눈과 귀를 '거슬리지 않게' 하고, 사유의 노동 없이 쑥쑥 위장에 흡수되기만 할 '건전한' 만남이라면 아마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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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강의가 건전하게 짜여질수록, 도서관과 학교, 문화 센터의 기획 요구에 부합할수록 딜레마는 깊어진다. 낯설고 새로운 것, 안온한 상식의 틀을 비껴가는 사유를 실험해 보자는 소신과 ‘강의를 위한 강의’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 간다. 단지 수준의 높낮이가 문제가 아니다. 이런저런 요구들에 몸을 맞추다보면, 날카롭던 칼날도 무디어지고 날쌔던 신체도 둔중해진다. 파닥거릴 힘도 없다. 개인의 주머니 사정에 의해서든 집단에 대한 기여든 결국엔 ‘앵벌이’에 다르지 않다. 까놓고 말해 대중을 ‘계몽’하고 ‘소통’하는 인문학이 되기 이전에, 그렇게 비판하던 제도권의 ‘보따리상’들과 별반 차이를 못 느낄 지경이다. 인문학 강의가 일상의 질서에 대한 투항을 이론적으로 치장하거나, 자위적인 교양에 목말라하는 대중 영합적 상술로 변질되고 있다는 세간의 비판도 그런 맥락일 것이다. 지난 봄 모 대학에서 주최한 인문학 강좌에서 전직 대기업 CEO란 사람이 인문학은 우리 삶을 ‘아름답게’ 꾸며주고 ‘건강한’ 취향을 조성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불온하나고 낯선 것, 날카로워서 쉽게 베일 것만 같은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문학 강의를 들으러 오는 이들은 (다는 아니겠지만) 재미나고 새로운 것을 원하지, 피를 뛰게 하는 낯선 것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럼 무엇을 할 것인가? 역시 강제로라도 불온한 기호의 폭력을 휘둘러야 할까, 아니면 그냥 속 편하게 함께 웃으며 나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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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가족의 역사에 대한 주제를 다룬 최근의 한 강의에서, 쉬는 시간에 동성애와 매춘에 대한 이야기를 자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어린’ 대학생들에게 성(性)과 사회적 터부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양 말하는 게 좋지않다는 이유였다. 또 어떤 선배는 현 정부의 종교 편향과 파시즘에 관한 강의안을 제안했다가 주제 변경 요구를 받기도 했다. 강좌 주최가 공공 기관인데다, 청중 모두가 동의할 것도 아닌데 ‘편향적’ 입장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충고를 받아들였다. 가져간 자료 중에 관련 부분은 적절히 얼버무리거나 아예 건너뛰고는, 몹시 태연하게, 별 탈 없이 강의를 마쳤다. 질문을 던지는 청중들에게 적당히 호응해 주고 웃으면서 다음을 기약했다. 강사료도 제때 받았다. 오는 길에 인문학 강의는 참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하나도 불온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참 모범 시민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속으로 꿈틀대는 불온한 욕망이 아예 사라졌다고는 말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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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진석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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