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고요를 좋아한다. 숲의 나무들이 바람에 서걱이는 소리를 들을 때는 이러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선 쥐들이 떠드는 소리 때문에 괴롭다.

-1796년 펜실베니아 주지사에게 인디언 추장이 한 말

 

 

대학을 다니며 삶에서 잊어선 안 될, 언제나 가슴 속에 간직해야 할 것이 생겼다. 그건 사랑도 아니요 우정도 아니요 진리를 향한 지적 욕구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원금 상환일과 통장의 잔고였다. 대학 재학 시절, 나는 더 이상 부모님을 착취할 수 없게 되자 정부 보증 학자금 대출에 ‘손을 댔다’. 그땐 대출이자만 냈기에 생활은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하지만 졸업 후 원금도 상환하는 지금, ‘그 날’이 오면 탈수기를 강으로 놓고 돌리기라도 한 듯 통장에선 돈이 탈탈 빠져나간다. 그렇게 다달이 나는 가슴 한 구석이 텅 비는 경험을 해야 한다. 채무자의 삶은 언제나 비굴한 법, 빚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증발되었으면, 새하얗게 잊혀졌으면 싶다. 저 학자금 대출액 말이다.

 
 

1. 가난을 부르는 빚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불편한 것이라 했던가? 그러나 지난날을 돌아보면 수중에 돈이 없다는 건 언제나 부끄러운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빚지는 건 떳떳하지 못한 일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요즘 빚 없이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싶다. 오히려 빚이 많을수록 은행에선 우량 고객으로 대접하는 시대 아닌가? 어쩌다 홈쇼핑에 낚여 넋을 놓고 화면을 바라보면 12개월 할부로 얻지 못할 건 세상에 없을 것만 같다. 빚 권하는 사회. 특히 대학진학률이 80퍼센트가 넘는 대한민국에서 등록금을 감당해야하는 학생과 그 부모들은 모두 이 빚쟁이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하지만 누구나 안다. 이 빚은 누구도 대신 갚아줄 수 없다는 것을. 어떤 생산수단도 갖지 않은 이가 시장에 내놓을 것이라고는 노동력밖에 없을 터. 그러니 우리 빚쟁이는 언제나 누군가로부터 착취 받아야만 범죄자가 되지 않고 살 수 있다. 빚, 그 중에서도 화폐로만 상환 가능한 빚은 오직 삶의 목적을 화폐에 두게 한다.
 

‘빚’이란 결국 아직 생겨나지 않은 노동자들의 착취를 위한 수속이다. 많은 학생은 졸업 시 졸업증서와 맞바꾸게 될 장학금[학자대출금] 반환 계약서를 쓰면서 연대보증인인 부모와 형제들의 이름을 확인한다. 임노동의 치욕을 받아들일 각오를 하는 것이다. (나카타 노리히토-블랙리스트 zine 1호 중)


백번 맞는 말이다. 그리고 졸업 후 당장 갚을 길이 트이는 것도 아니다. 2010년 20대 취업자 수는 1981년 4분기 이후 최저였다. 외환위기 이후 실업이 급증해 2010년 5월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대 대졸 실업자가 20만 4000명을 기록했다. (<한국의 워킹푸어>, 책보세, 142쪽) 그렇게 우리는 일상적으로 빚을 떠안고 살아가야 한다. 하루빨리 청산하지 않으면 불어나는 이자 때문에 우린 평생 빚에 전전긍긍하며 살아야 한다. 맑스는 <자본>에서 자본주의의 폭력적인 기원, 이른바 본원적 축적의 역사를 밝힌다. 목가주의적 경제학자는 자본주의의 형성 모델을 개미와 베짱이의 예로 설명하겠지만, 맑스가 보기에 자본주의적 시장은 국가와 자본의 물리적, 금융적 폭력이 있기에 가능했다. 개미가 그러모은 것은 판돈이었고, 그것은 늘 누군가로부터 강탈해온 것이라고 봐야 옳다. 강고한 소유권을 중심으로 국가 권력은 저임금의 임노동자와 수많은 부랑인ㆍ아사자를 양산했다. 국가 관료들에 의해 날치기로 임금인하법, 단결금지법, 빈민법, 공유지 인클로저 법이 통과되었고, 보호무역과 국채 전가, 중과세 등은 국민들에게 수많은 빚을 안겼다. 국가 폭력과 함께 인민들은 빚쟁이가 되었고, 이 빚을 갚기 위해 노동자가 안되고는 생존이 불가했다. 이 구조는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다. 오히려 상시적 약탈의 조건 속에서 자본주의 역시 유지된다고 해야 할 판이다. 국가가 나서서 정규직의 고용을 ‘유연화’해 ‘비-정규직’의 비중을 높이고, ‘간접 고용’을 양산해 노동자들을 일상적인 반고용 반실업 상태에 빠뜨린다. 뿐만 아니라 국가는 국민에게 일상적인 빚과 불안을 전가한다. 고용노동부에서 발표한 간접고용 법안의 확대 적용 실시, 국민연금의 주식 투자 운용 시도 등은 공적 재산인 세금의 증권화를 부른다. 오늘날 본원적 축적은 더 크고 일반적으로 가동되고 있는 것 같다.
 

이제 삶은 끝났고, ‘살아남는 일’만이 시작되었다. 이 넓은 대지와 하늘은 삶을 살 때는 더없이 풍요로웠지만, ‘살아남는 일’에는 더없이 막막한 곳일 따름이다.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시애틀추장의 연설 중)

 

 

2. 풍요를 부르는 빚

 

 

빚이라고 해서 꼭 화폐로만 갚을 수 있는 빚, 사람을 가난하게 만드는 빚만 있는 건 아니다. 나에게는 ‘갚고 싶은 빚’이란 게 있으며, 그것은 살면서 더 많이 찾아내고 평생 내 방식대로 갚아나가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이 빚은 삶을 건강하고, 풍요롭게 만들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고양시킨다. 빚에도 좋은 빚과 나쁜 빚이 있는 것이다. 최근 인디언의 삶과 사상에 대한 공부를 통해 들게 된 생각이다. 인디언들에 대한 수많은 인류학적 보고서가 있지만 나에게 책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는 인디언 추장과 샤먼의 직접적인 육성이 담긴 선언문집이라는 점에서 뜻 깊다. 인디언들은 만물이 이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들에게 서구의 이방인, ‘얼굴 흰 자들’은 너무도 낯선 자들일 수밖에 없었다. 땅이나 물건을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이나, 친구인 동물을 인간만을 위한 가축으로 사육하고 함부로 죽이는 일 모두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자신들을 있게 한 어머니 자연에 대한 얼굴 흰 자들의 파괴행위는 마지막까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인디언들은 자연에 대해 언제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머니 대지는 생명을 사랑하고, 우리에게 자신이 가진 선물을 나눠 준다. 그것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는 이 대지 위에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을 잘 보살펴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내 앞에 아름다움, 내 뒤에 아름다움> 델라웨어 족 상처입은 가슴의 선언)

 

당신이 대지로부터 무엇을 취할 때마다, 그것이 음식이든 공기든 옷이든, 당신은 그 답례로 무엇이든 대지에게 주게 된다. 명상은 바로 그런 것이다. 당신의 작고 낡은 자아를 위해 개인적인 어떤 것을 얻는 것이 명상이 아니다. 명상은 일종의 눈뜸이고, 되돌려주는 것이다.( <겨울 눈으로부터 여름 꽃에게로> 체로키 족 구르는 천둥의 선언)

 

이들의 철학에 따르면 나를 존재하게 만든 가장 가까운 원인은 생물학적 부모만이 아니다. 입을 것, 먹을 것, 숨 쉬는 공기도 동등하게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그래서 인디언은 하나하나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자연에게 진 빚을 갚는 삶을 살았다/살아야 했다. 또한 인디언의 삶은 유약하지도, 고립적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더 나은 정치체에 대한 상을 언제나 고민했고 억압적인 권력의 출현을 언제나 예민하게 감지했다.


나는 스스로 행동하는 것을 좋아한다. 정부와 법, 그리고 소위 체제라는 것도 사람들이 스스로 만든 것이어야 한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만의 모습을 갖고 있으며, 이 세상에 온 그만의 목적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만의 모습, 그만의 목적을 발견하는 데 필요한 자신만의 방식과 길을 갖고 있다. 따라서 누구도 그 길을 방해해선 안 된다. (위와 같은 선언)

 

그들의 부채감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 부채감은 만물이 이어져 있다는 일상의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인디언에게 ‘나’란 대지 위의 모카신과 다를 게 없는, 무엇과 견주어도 우월하지 않은 존재였다. 이들의 철학은 단순하고 시적이기에 많은 이들을 매혹시킨다. 또한 이들의 구체적 삶의 면면을 보며 우린 다른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난 무엇보다 가난을 부르는 빚을 단호히 거부하고, 풍요를 부르는 빚을 섬세하게 찾아낼 시야를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들의 삶은 자본주의 외부를 사유하는 든든한 무기로도 손색이 없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리고 현재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길이 놓여있다. 하나는 배고픔과 죽음으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저 얼굴 흰 사람들의 삶으로 사는 길이다. 하지만 그 너머에는 저들이 도저히 갈 수 없는 ‘행복한 사냥터’가 있다. (오글라라 라코타 족 여러 마리 말의 선언)




글 / 유심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이 글은 위클리 수유너머 85호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 먼저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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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마디스트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의 "불온한 인문학"은
“현대 자본주의 비판과 불온한 사유를 위하여” 라는
야심찬 포부를 밝히며 시작된 대중의 공동 학습의 장이다.

함께 하는 친구들도 다양하다. 20대 부터 시작해서~ 30대, 40대... 끝은 어디일지 정확하게 몰라요 무한대~^^
매일 매일 출근 도장 찍는 성실한(물론 겉으로만 속으론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르는!) 직장인도 있고
과감하게 학교도 직장도 싫다~ 수상한 일을 작당 모의하는 이도 있고
새내기 직장생활 하랴 공부하랴 매번 강의 시간 빠듯하게 뛰어오는 이도 있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가슴 깊은 곳에 "불온성" 이 만큼은 가지고 있다는 것!

목요일 개강 이래로 매주 목요일은 "자본" 강의를 듣고 토요일에는 관련 책을 함께 읽으며
집중 세미나를 하고 있는 불온한 인문학 수강생들...
20주간의 과정 중 맑스의 "자본"을 읽는 첫 번째 트랙이 끝나는 즈음...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화창한 5월의 토요일...
가족, 직장, 친구... 여기 저기 부르는 곳도 많고..
설령 아무도 안 불러도
봄바람 부는데로 방황하고도 싶었지만...

그들에겐... 맑스의 "자본"을 공부하는 것이.. 혹은... 지금 내 삶에 대한 "고민"을 풀어갈 "방법"을 찾는 것이 더 우선이라는데...

불온한 인문학을 함께 하는 친구들은 도대체...! 뭐가 그렇게도 고민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더냐.. 한번 들어나 보자^^

 

인터뷰어 : 튜터 해피, 화

인터뷰이 : 석관, 승원, 봄, 근배, 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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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관님은 어때요? 원래 작년 가을에 했던 맑스 콜레기움으로 연구실에는 처음 접속했는데요?
그때 보다 훨씬 밝아지신 듯??

 

 

석관 : 그땐 정말 연구실이 낯설고 어색했어요~ 다들 아는 사이 같은데, 나만 모르는 사이 같고.. 그래서 사실 많이 노력했고요~ 그래도 불온한 인문학 친구들은 거의 다가 연구실에 처음 온 분들이라 덜 어색하더라고요. 아예 처음 부터 시작이니까.
처음엔 공지 뜨자 마자 너무 반가워서 얼른 신청할려고 했어요. 그런데 자기 소개 같은 거 쓰라 그래서..
이거 어쩌나.. 못쓰겠는데.. 하고 며칠 고민하다가 짧게 올렸답니다. 하하.

 

근배 : 저도 공지 뜨고 나서 바로 올리려고 했는데... 자기 소개 때문에 안 올렸어요. 그런데 석관님이 엄청 짧게 신청글 쓴 거 보고 그냥 올렸어요. '아 이렇게 해도 되나?' 하고 말이예요..

 

화: 정말 나쁜 본보기를 보이셨군요. ㅜ 괜찮아요. 그래도 신청했으니 뭐 용서~ ㅎ ㅎ

 

 

석관님은 콜레기움 끝날 때도 에세이도 쓰셨고...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맑스를 읽으면서 어때요? 벌써 한 육개월 읽으신거 같은데요?


 

석관 : 원래 제가 고민하는 것은... 존재와 의식, 혁명과 정치..! 이런 거예요.
그런데 이게 워낙 폭이 넓고 깊기 때문에...쉽게 이야기 하기가 어렵고요..
맑스를 읽으면서 자본이 가지고 있는 모순.. 나 역시도 자연을 착취하고 있구나... 이런 생각도 하게 되고..

 

미숙: 저는 백수로 지냈던 시간이 좀 길기도 길었고.. 저희 아부지는 평소에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마라" 이런 말씀 자주 하셨거든요..
저도 사실 이 말이 싫긴 했지만 '돈을 버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몽사 쌤이 강의 중에
"왜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아야 하느냐"고 이야기를 들었을때...'아 그렇구나. 나는 왜 그 생각 못했지.' 하고 생각했어요.
자본을 배우다 보니 이전에는 내가 왜 힘든 줄 몰랐는데..
아 이래서 힘들었구나.. 뭐 이런 걸 알게 됐어요. 내 고민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안거죠.


그런데.. 문제는 자본주의 안에 있는 모순들을 알게 되면서 일을 하는게 더 힘들어졌어요.
그래서 요즘 가장 큰 고민은.. '일을 하면서 자본론을 배우고 동시에 한다는게 힘든 것같다.'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힘든 와중에도... 하고 싶은 게 있긴 해요.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지만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무슨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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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숙 : 아직 구체적인 건 모르겠고.. 그냥 순수 미술이요.. 사실 직장 생활 하면서 생긴 꿈인데요. 아무래도 직장생활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지 않으니까 뭔가 다른 일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림에 대한 꿈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석관 : 저는 이런 게 자본주의 안에서 생기는 분열 같아요. 미숙님도 그렇고..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분열증을 안겪을 수가 없어요..  '내가 하는일이 이런 일이었어?' 하는 배신감있잖아요. 내 행복이 아니라 착취를 당하고 있는 사실...
사실 저요. 예전엔 아침마다 회사에서 하는 체조를 당연히 했는데요. 요즘은 마음이 달라졌어요. 자꾸 하기 싫고 대충하게 되요. (좌중 웃음^^)
이 분열을 극복하거나, 정리하거나.. 종합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러고 싶은데 그게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여건이 닿는 한 계속 가봐야겠지요?

 

정답을 다 알고 계시네요?!



해피 : 사실 이런 고민이 직장을 그만 둔다고 바로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요.. 임금 노동자, 비임금 노동자 모두 자본주의 안에서 고민을 안고 사는 거지요..

 

화 : 모든 사람들이 분열을 가지고 산다고 생각해야하지 않을까요?


봄 : 각자의 삶에서 만나는 맑스를 다 안고 사는것 아닐까요?

 

 

승원님은 어때요?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와 연구실에서 공부할 때의 느낌이 많이 다를 것 같은데요?



승원 :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다른다 이런 것 보다는.. 연구실에 오면 다른 공간에 비해 획일적이지 않은데서 오는 생기가 느껴져서 좋아요. 
대학원은 사실 사람도 적고.. 토론을 해도 몇 몇만 하고 뭘 해도 참여한단 느낌이 안들거든요. 그에 비하면 연구실은 모두들 참여한다는 느낌이 든달까요?
그런데 사실 지난 학기엔 계획했던 것 보다 자본 공부를 많이 못했어요~ 다음 학기엔 열심히 할래요~ ㅎ


미숙: 저는 이제껏.. 내가 왜 힘든지 모른채 살아 왔는데... 대부분 그게 사는거라고 생각하지 내가 왜 힘들까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으니까...
수업을 들으면 힘든 이유가 정리가 되요..
요즘 저는 과도기를 겪는 기분~~~ 공부를 더 하면 아마도 힘이 생기겠지요?

 

근배님은 어때요? 근배님의 고민은 다른 분들 보다 철학적인 부분이 있는 것 같던데요?



근배 : 저는 다른 분들하고 좀 다른데요.. 사실...불온한 인문학에서 만난 친구들은 모든 문제를 자본주의 때문이라고 하는게 꼭 그것만은 아니란 생각도 들어요.
항상 이야기하지만 뭐가 맞는건지 모르겠어요.. 뭐랄까.. 저는 좀 더 확실한 데이터를 가지고 근거를 찾아가는 작업에 더 끌리는데요.
자본에선 그걸 찾지 못해서...

 

 

불온한 인문학 처음 신청할 때 근배님이 풀고 싶은 질문은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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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배 : 왜 사는가? 왜 살아야되나...현재 내가 어떤 형태로 어떤 곳에서 존재하고 있는가...여러가지의 질문들을 풀고 싶었어요. 다른 곳에선 이런 고민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접해볼 수 없었고 그래서 오게 된 거죠..
지금 우리 삶의 강제들이 사라질 수 있을까. 강제하는 외부의 힘은 살아가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완벽하게 강제하는 힘이 없는 게 가능할까.
이런 저런 의문들이 생기고 배우면 배울 수록 의문만 많아져요.


해피: 자본이 모든것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세미나를 통해서 풀어내고자 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강제하는 힘이 있다면 무엇일까..'하는 건데요.. 강제하는 힘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고민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화 : 맑스가 정확하게 어떤 상을 보여준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할 일은 강제하는 힘을 넘어서는 새로운 삶을 창조를 하라고 이야기 하는것 같아요. 전 그래서 매력적인데요.


석관:  자본론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자본론을 선물하고 싶었어요. 사실 저는 읽으면서 제가 가졌던 맑스에 대한 오해도 많이 풀었어요. 지금까지 맑스가 읽히는 것은 자본의 본질을 밝혔기 때문이 아니예요? 그래서 유용한 것 같은데. 그런데 가끔 근본주의자들은 저 보고 뭐 자본을 아직도 읽냐?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실망했죠. (격한 말씀은 %^&^**$##$# 삐리리 처리 하였습니다^^)

  

봄님은 평소에 들뢰즈와 맑스라는.. 인생의 숙제를 이 커리큘럼에서 발견하고 기뻤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어때요?



봄: 사실 전요.. 제가 쓴 석사 논문을 다시 쓰고 싶었고.. 거기에 딱 맞는 커리큘럼이기도 했고.. 제 인생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클리어하게 확 풀고 싶었어요! (이기적인 생각이지요?^^) 하지만 사실이 그래요. 좀 더 단순화 시키려고 시작했던게 불인강이었는데..점점 지나면서 생각이 많이 복잡해지고 있어요. 저는 구조에 대한 문제가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했었어요. 자본이라는 거대한 구조가 모든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자꾸 그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데 또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이 과연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하고 질문을 해보면...또 자본이라는 구조안에서 사고되기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은건가 싶기도 하고, 여튼 좀 많이 복잡해진게 사실이예요.

 

봄님이 꿈꾸는 세상은? 가끔 농담처럼 하는 노후 계획도 재밌는데요?



봄: (아~ 그건 나중에^^ 오늘은 좀 진지하게 이야기 해보면요...) 어떤 사회를 꿈꾸는가 하면 제가 꿈꾸는 사회는 막연하게 비국가사회예요. 비국가라는 것이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모습이 아니라 ‘국가’가  지금 우리에게 느껴지는 부정적인 권력의 모습으로 느껴지지 않은 어떤 구심체로서의 비국가의 모습이지요. 그런데요 토요일마다 집중세미나를 하면서 그 상이 구체화되기보다는 좀 더 복잡해지고, 쉽게 내뱉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되요.

그리고 처음에 열심히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시작했는데...커리큘럼을 다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는걸 느껴요. 다른 분들은 되게 열심히 하는데..나만 덜 열심히 하는 것 같아서 자극도 많이 받게 되요..
저요~ 들뢰즈는 열심히 할래요..^^ 앙띠 오이디푸스는 좀 더 열심히 읽고 생각을 넓혀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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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터 해피, 화 도 트랙 2에선 더 열심히 공부할랍니다^^ 아우 벌써 부터 기대 만빵!
이날 함께 하지 못한 다른 친구들...의 목소리도 남은 10주 안에 꼭 들으러 갈테니.. 기다리세요^^
불온한 친구들의 목소리를 담은 인터뷰, 후기는.. 앞으로도 쭉 이어질 예정입니다. 기대하세요.

 

 


트랙 2에선 들뢰즈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이 들립니다!
불온한 인문학 트랙 2 개강 커밍쑨~~ 공지는 요기! 클릭!!!   http://nomadist.org/xe/121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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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강좌팀에서 알려드립니다!!!

이진경 선생님의 강의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을 신청하신 분들!

강의 듣기 전에 읽으면 좋을 텍스트를 이진경 선생님을 졸라 받았답니다.

예습을 하고 싶다는 분들도 있고~~

혹시...이 강의 뭐야? 도대체 뭘 공부하는 것이여? 하고 궁금한 분들도 많을 것 같아서요~~ 호호..

자.. 소개 나갑니다!!

보기만 해도... 막 배가 부르지 않습니까? 하하하.

물론... 이 책들을 모두 읽어 오라는 건 아니고요.

여건이 되시는 분들만 읽으세요.

우리에겐 앞으로도 새털 같이 많은 날들이 있을 것이며...

강의를 들은 후에.. 이 책을 읽는 것도 하나의 공부 방법이 되오니.. 너무 부담은 갖지 마세요^^

 

 (강좌 관련 문의 및 신청은 요기를 클릭하세요! http://nomadist.org/xe/apply)

 

강의를 듣는데 필요한 텍스트를 미리, 혹은 같이 읽고 싶다면서 소개해 달라는 분들이 있어서,

간단하게 관련 독서자료를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0. 먼저 강의의 바탕이 되는 ‘존재론’에 대해서, 다시 말해 ‘존재’ 개념의 이해방식이나 존재자의 이해방식에 대해서는

 

이진경, <코뮨주의: 공동성과 평등성의 존재론>(그린비), 1장과 2장을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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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온성이란 무엇인가?

 

이 강의에서는 ‘볼온성’에 대해 개념적으로 정의하고자 할 겁니다. 여기서 불온성은 무엇보다 먼저 ‘불온하다’는 감정 내지 기분과 결부된 것임을 안다면, 불온성을 기분 내지 감정의 차원에서, 혹은 그런 기분이나 감정을 야기하는 촉발/변용의 차원에서 정의되어야 함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야기하는 어떤 ‘불안’과 결부된 것이지만, 동시에 그런 불안을 야기하는 불온한 ‘웃음’과 결부된 것입니다. 그것은 안정된 예측이나 판단을 와해시키며 오는 어떤 ‘횡단’이나 변용과 결부된 것이며, 그런 점에서 지성의 작용과 관련된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저로선 무엇보다 흥미로운 주제인데, 불행히도 이에 대해서 정리된 텍스트는 없습니다. 다만 관련된 텍스트를 들자면, 맥락이나 의미는 다르지만, 먼저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까치)의 40절이 유용합니다(그러나 쉽진 않습니다^^;;). 좀 더 거슬러 가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 2장도, 역시 맥락이나 의미는 다르지만 참고가 될 듯합니다.


 

좀더 의미상 가까운 것은 오히려 정신분석학으로 보이는데, 프로이트의 초기 글 중 ‘불안신경증’에 대한 글과 후기의 불안 개념을 정리한 글 [억압, 증후, 그리고 불안](이상 < 억압, 증후, 그리고 불안>, 열린책들)이 유용합니다(뒤의 글은 좀 장황하고 기니, 필요한 부분을 찾아 읽으세요).

사실 이것만이 아니라 많은 책들이 관련되어 있지만, 모두 나열하는 건 무의미하겠지요. 일단 이 정도만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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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애인: 우주적 선물의 존재론

 

여기서는 “우리는 모두 장애인”이라고 주장할 터인데, 이 경우 장애인이란 우주 전체로 확장가능한 타자들에 기대어 존재한다는 점에서 ‘선물’과 관련된 존재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이 무엇으로 인해 쉽게 잊혀지는지, 그리고 모두가 장애인임에도 특정한 사람들만 장애인으로 간주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등을 말할 겁니다. 관련 텍스트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이진경, <코뮨주의>(그린비)의 1장 3절과 7장 3절

   조지프 샤피로, <동정은 싫다>(한국DPI출판부) 1장

   박경석/고병권, [‘우리는 모두 소수자다], 부커진 <알>, 1호(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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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박테리아: 우리는 모두 박테리아다!

 

여기서는 공생진화와 공생체로서의 생명에 대한 생명과학이나 생태학의 연구를 시발점으로 하여, 개체화를 통해 구성되는 개체의 개념, 그리고 거기서 개체의 경계, 즉 ‘나’의 내부와 외부를 구획하고 유지하는 면역이란 메커니즘에 대해 다룰 겁니다.


 

 관련 텍스트는 마굴리스/ 세이건, <생명이란 무엇인가>(지호)의 4장, 5장 웨이크퍼드, 

 공생, 그 아름다운 공존>(해나무)

 타다 토미오, <면역의 의미론>(한울), 2장, 5장, 6장(안타깝지만, 읽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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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프레카리아트: 불안정한 자에서 불온한 자로

 

여기서는 노동자계급의 일부인 동시에 ‘정상적인’ 노동자계급이 아닌 계급, 하나의 계급인 동시에 하나의 계급이기를 중단한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해 존재론적 질문을 던질 겁니다. 노동자계급이 하나의 ‘계급’으로 ‘완성’되는 것을, 하나의 전체로 ‘완성’되는 것을 저지하는 성분. 이는 계급에 대한 존재론적 분석이 새로이 개시되어야 하는 지점일 겁니다.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논문들은 많지만, 이런 관점에서 참고할 텍스트는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단 다음의 텍스트를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조원광, [유연화체제의 프롤레타리아트, 비정규직], 부커진 <알>, 3호(그린비)

   프레카리아트는 단지 비정규직만을 지칭하지 않는데, 특히 이주노동자 또한 고려되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조원광, [이주 노동자와 이동], 부커진 <알> 1호

 

 

 

5. 사이보그: 태초에 사이보그가 있었느니라!

 

사이보그는 기계와 유기체의 합체를 통해 정의되는 새로운 구성적 존재자입니다. SF적 형상을 통해 가시화되었지만, 사실 근본적으로 생각해보면 기계와 유기체가 합체된 사건은 인간이 도구를 들고 행동하기 시작했을 때 시작되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점에서 사이보그는 어쩌면 엥겔스 식으로 말해 원숭이가 인간으로 전화되는 지점에서 출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 아닌 것에 의해 그 본질을 획득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그것은 인간을 뜻하는 현존재(Dasein)을 통해 존재의 문제에 접근하는 것과 반대로 인간 아닌 것을 통해 인간의 존재에 접근해야 함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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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대해서 유용한 텍스트는

  해러웨이, [사이보그 선언],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동문선)

 그렇지만 근본에서 거슬러 올라가 사고하기 위해선 오히려 다음의 텍스트가 중요합니다.

  엥겔스, [원숭이의 인간화에서 노동이 한 역할],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 5권(박종철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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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온코마우스: 시뮬라크르의 윤리학

 

온코마우스는 유전공학적 변형에 의해 탄생한 존재자입니다. 하나의 생산물로서, 상품으로서 존재하게 되었고, 태어날 때부터 하나의 시뮬라크르였던 존재자지요. 암에 ‘걸리기 위해’ 존재하게 된 존재자. 처음부터 하나의 수단으로서 존재하게 된 이 존재자는 목적과 수단 이후에 시작된 존재를 통해 그 이전의 존재를 사고하게 합니다. 존재를 사유하기 위해 목적/수단의 관념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포스트모던한 존재자인 온코마우스는, 시뮬라크르가 원본을 초과하고, 원본과 무관하게 존재하게 된 시대에 시뮬라크르의 문제를 다시 사고하게 합니다. 그것이 존재론적 문제로서 제기되자마자 그것은 윤리학적 문제고 정치적인 문제임이 드러날 것입니다.


 

온코마우스에 대한 글은

해러웨이, [여성인간 앙코마우스를 만나다], <겸손한 목격자@제2의 천년...>(갈무리)

가 유명하지만, 또한 유용하지만, 온코마우스에 대한 얘기는 그다지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와 함께 온코마우스가 아니라 복제인간을 통해 유사한 문제를 제기한 리들리 스콧의 유명한 영화를 참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리들리 스콧, <블레이트 러너>


7. 페티시스트, 사물들과 만나는 존재론적 평면

 

부제가 이렇긴 하지만, 페티시스트의 문제는 사랑의 문제임을 미리 분명히 해두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미 동성애를 비난하는 것은 촌스러운 일이 된 지금, 이성애주의를 넘어 사랑을 사유하는 것은 하나의 문턱을 넘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왜 사랑을 섹슈얼한 이분법 주변에서만 사유해야 할까요? 아니 굳이 인간 간의 사랑으로 제한해야 할까? 인간과 동물의 간극을 넘어선 사랑, 나아가 인간과 사물의 간극을 넘어선 사랑으로까지 밀고 가야 하지 않을까요? 거기서 출현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존재론적 평면상에 있다는 것과 더불어, 사랑이라는 것은 ‘연대의 쾌감’을 제공하는 모든 것임을, 그것이 모든 연대를 만드는 추동력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섹슈얼한 사랑에 대한 비판은

 버틀러의 유명한 책 [젠더 트러블](문학동네)을 참고하시면 좋고

 동물행동학적 관점에서 동성애, 트랜스젠더 등의 사랑들에 대해 다룬 책인

 러프가든, <진화의 무지개>(뿌리와이파리)이 재미있습니다.

 

 페티시즘에 대해서는

 맑스의 <자본> 1권에서 [페티시즘]에 관한 유명한 장을, 그리고

 

 프로이트의 유명한 글 [페티시즘(절편음란증)], <성욕에 관한 에세이>(열린책들)을,

 그리고 여성의 페티시즘을 다룬 중요한 책

 클레랑보, [여성의 에로틱한 열정과 페티시즘](숲)을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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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1일(화)

 
설 연휴를 앞둔 2월 첫날, 고향 나들이만큼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작년에 출판사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인 연희동으로 이사를 와서 기뻤던 수유너머N이 그 이상으로 반갑고 고마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고 한다. 아니 그들의 새로운 시도를 흔해 빠진 ‘프로젝트’라는 말로 대신할 수는 없다. 최소한 ‘운동’이라 해야 맞다. 이 운동의 이름은 ‘불온한 인문학’이다. 거두절미하고 수유너머N이 최근 발표한 ‘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선언’으로 설 인사를 대신한다. 부디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우리 삶의 현장에서 새롭게 만나 인문학의 부흥이 아닌, 인간적 삶의 부흥의 씨앗들이 싹트길 기대한다.

  이 선언을 읽고 나처럼 반가운 마음으로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은 수유너머N 홈페이지(http://www.nomadist.org)를 방문하면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2011년 노마드적 대중지성 ‘불온한 인문학’ 1기생도 모집한다. 맑스의 <자본> 입문,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세미나와 ‘불온한 인문학’ 집중 세미나도 열린다. 20011년 다시, 아니 새롭게, 불온한 학습과 토론 그리고 실천들을 시작해보자.
 

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선언
 
바야흐로 ‘인문학의 부흥 시대’가 왔다! 고고한 상아탑에 파묻혔던 대학이 대중 계몽의 현장을 자처하는 한편으로 인문학 최고위 과정을 신설해 CEO들을 입학시키려 혈안이 되어 있다. 또한 은행과 백화점, 문화 센터와 각종 공공 기관이 앞다투어 고전 강좌를 개설하면서 지식과 교양에 목마른 대중에게 유혹의 손짓을 보낸다. 국가는 ‘인문 한국’이라는 거창한 부흥 프로젝트를 내세우며 연간 400억 원에 달하는 재정을 투입함으로써 위기를 외쳐대던 이들에게 자본의 ‘생명수’를 부어주고 있다. 박사 실업자를 면치 못하던 수많은 시간 강사들, 대학원생들은 열심히 연구 계획서와 보고서를 작성하고 실적을 증명해줄 논문들을 마구 찍어낸다. 여기 인문학이 부활했다! 고독하게 고사(枯死)하는 꼬장꼬장한 학자가 아니라 프로젝트의 수주에 목숨을 건 유능한 매니저가 오늘날 인문학 연구자의 이상이 되었다! 마이더스의 손을 가진 국가라는 막강한 파트너도 얻었다! 인문학이 새로운 국학, 21세기 국풍(國風)의 기치 아래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한때 인문학의 위기가 운위되고 그 사멸의 징조가 우려스럽게 진단되던 시절이 있었다. 취업 전문 학원으로 전락한 대학에서 인문학이 힘겹게 투병하며 죽어가던 때가 있었다. 아카데미의 수장들이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국가와 기업, 사회의 도움을 애타게 호소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언제 그랬느냐 싶게 인문학은 화려한 재탄생을 노래하고, 도처에서 부활의 종소리를 울려댄다. 상품 광고의 아이디어 속에서 인문학은 ‘돈이 된다’는 찬사를 얻고, 텔레비전에 출연한 신(新)지식인들은 인문학이 이제 지식 시장에서 유통되는 최신의 상품임을 자랑한다.

  하지만 바로 이때, 우리는 ‘인문학의 부흥’이라는 시대 현상이야말로 역으로 인문학이 빠져든 위기와 몰락의 징후임을 냉정히 직시한다. 국가와 자본의 넘치는 관심과 후원은 인문학 재생의 밑거름이 아니라, 인문학의 좀비화를 부추기는 바닥없는 진창에 다름 아니다. 국가와 자본의 월급쟁이가 되자마자 인문학은 권력과 돈에 눈멀고 귀막고 입을 봉한 산송장이 되어 버렸다. 오늘날 인문학의 부흥이란 무엇인가? 이윤 창출을 위한 자본 축적 전략과 지배의 효율화를 위한 국가 통치 전략의 소프트 버전, 바로 그것이 아닌가?

  인문학을 논하기 전에 먼저 지금-여기의 삶을 돌아보라. 대학생들이 졸업과 동시에 신용 불량자가 되고, 청소 노동자들이 화장실에서 밥을 먹어야 하며, 개발 이익에 눈먼 국가와 자본의 폭력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공권력'이라는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소시민의 일상은 '글로벌 리더십'과 '글로벌 스탠다드'를 이룩하기 위해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다. 이렇게 파괴된 삶의 터전에서 태연하게 ‘인간’과 '문화'를 떠드는 인문학이 도대체 어떤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상황은 명확히 문제적이다. 작금의 지배 질서와 가치 체계에 대한 비판과 문제 제기를 그만 둔 인문학은 기껏해야 교양 있는 시민의 육성을 필생의 소명인 듯 껴안고 있다. 정보 산업 사회의 유능한 인재들을 키우기 위해 인문학적 창의성이 투입되고, 각박한 경쟁 사회에서 인간적 여유를 찾아주기 위해 인문학적 교양을 제공하며, 부랑인과 노숙자 같은 사회 부적응자들을 정상적인 시민으로 되돌리기 위해 인문학적 지식이 동원되고 있다. 사회적 유용성과 적응성의 배양, 혹은 순응하는 시민의 양성이야말로 진정 인문학의 사명인가? 인문학이 감옥이나 병원에서 수인과 환자들을 '정상인'으로 교육하기 위해 고안되었다는 어느 철학자의 통찰이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오히려 인문학은 그 탄생의 목적과 소명을 지금 충실히 이행하는 중이라고 말해야 옳을 성싶다.

  다른 한편에는 인문학의 ‘실용주의적 유행’에 반대하며 인문학적 본질이 현실을 넘어선 것, 지고한 정신적 가치에 있노라고 강조하는 인문주의자들도 있다. 그들은 인문학이 실용적 효용이나 실리적 이득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세계의 원리를 궁구하여 인격을 완성하는 지고한 삶의 안내자라고 주장한다. 오래된 안내자로서 ‘고전’이 강조된 이유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오랜 지혜가 담긴 책, 고전을 지키고 재생산하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의 존재 이유라는 게 이상주의적 인문주의자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모든 견고했던 것들도 대기 중에 녹아 없어지는 이 세계에서 어떤 고전이 감히 영원을 구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의고주의적 인문학이 보여주는 몰역사성과 탈사회성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격조있는 생활의 품격을 누리기 위해 고전을 읽는다는 CEO들의 진심도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다. 그들이 사원들에게 고전을 ‘읽으라’고 내미는 순간, 고전은 그것이 등장했던 역사와 사회의 맥락을 벗어나 지금-여기서 강제와 폭력, 순응과 체념의 도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전 공부를 순수한 인성의 도야란 차원에서 기대하지 않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고전에 대한 맹목적 숭앙은 국가와 자본에 대한 물신주의적 숭배와 멀리 있지 않다. 고전을 불멸의 정전으로 만들고 현재적 삶의 척도로 삼을 때, 지식과 권력, 자본의 삼자연대가 승리하는 날을 보게 될 것이다.

  자본과 국가의 이해에 편승한 덕분에 호의호식하는 순응주의자의 인문학. 대중적 삶의 지평에서 유리되어 고전에만 칩거하는 나르시시스트의 인문학. 양자는 하나같이 현실 직시를 거부하고 자기만의 환상에 몰두한 채 인문학이라는 영토에 자기 깃발을 꽂는 데 열중하는 불모의 인문학에 다름 아니다. 인간과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바꾼다는 미명 뒤로 펼쳐진 삶의 적나라한 모순과 질곡을 질타할 줄 모르는 인문학은 인간을 위한 것도 아니고, 삶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런 명분으로 세상을 속이고 자신을 기만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만드는 인문학은 차라리 해체시키는 게 낫다. 새로운 인문학을 위한 제언은 국가와 사회를 부강하게 만들거나 보편적 휴머니즘을 구현하는데 있지 않으며, 인문학의 잃어버린 가치를 회복시키는 데서 성립하지도 않는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다시 갈라놓는 것도 물론 아니다. 차라리 지금-여기의 현실을 작파하고 다른 현실을, 우리의 감각과 지식, 상식의 기반을 뒤흔들어 우리를 낯선 변경으로 던져넣는 것만이 우리들의 탐구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탐구의 여정에 붙일 만한 적절한 이름을 아직 모른다. 우리는 인문학에서 출발했지만 그 도착지는 인문학이 아닐 것이다. 불온성, 그것은 현재 알고 있는 삶의 형태를 공고하게 다지고 정상화시키는 데 있지 않고, 익숙하고 안온한 삶에 낯설고 날선 감각, 우리 자신을 베이고 다치게 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삶의 형태와 강제로 맞부딪히게 만드는 과정에 붙이는 이름이다. 잠정적으로나마 우리의 탐구에 ‘불온한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본다면, 그것은 '진정한' 인문학을 가르친다거나, 인문학의 또다른 '재생'이나 '반복'을 위함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우리 여정의 출발점이 어디이며 그 과정이 어디로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낯선 지도 위에 그려보기 위해 선택한 푯말일 뿐이다. 불온한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니다! 그것은 인문학과는 다른 새로운 종(種)이며, 어디선가 항상-이미 시작된 낯선 출발점을 가리키는 지표이다.

  ‘부흥 시대’의 인문학은 세상을 바꾸는 전복의 힘도, 익숙한 것도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불온성도 거세당한 박제에 불과하다. 시대의 지배적 통념을 논쟁의 대상으로 점화시키는 급진적 비판, 안일하게 수용하고 반복하면 그만인 습속의 도덕에 등 돌리고 당당히 떠날 수 있는 사유의 용기, 배제되고 학대받는 자들을 괄호쳐버린 교양의 기름진 바다에 불쏘시개를 던져넣는 과감한 행동력, 이것이야말로 ‘이미 와버린’ 인문학이 아니라 ‘도-래할’ 인문학, 혹은 아직은 이름붙일 수 없는 새로운 사유와 활동의 단초가 된다.

  지금-여기서 우리에게 새로운 앎과 감수성, 사유와 활동이 의미를 갖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인문학 부흥의 깃발을 높이 쳐드는 게 아니다. 지금은 차라리 그 깃발을 꺾어버리고, 현행의 인문학에 대한 반대를 선언해야 할 때다. 국가와 자본, 휴머니즘이라는 기치를 내건 인문학에 대결을 선포할 때다. '위기'를 떠들며 자금과 보호를 구걸할 게 아니라, 오히려 위기를 더 멀리 밀고나가 마침내 폭파시켜버리는 것. 그때야 비로소 인문학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던 지식은 지배적 가치와 통념에서 이탈해 새로운 삶을 향한 길을 만들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인문학'이란 이름으로 길들여진 영토를 떠나려 한다. 그 첫걸음은 현행의 ‘인문학의 배치’에 이의를 제기하고 균열을 내는 데서 시작한다. 이로써 우리는 국가와 자본의 통제를 받고, 휴머니즘을 명목으로 영유되던 죽은 지식을 지금-여기의 해방적 실천을 위한 앎으로 재전유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삶과 앎의 방식을 창안하는 활동은 문제의식을 공명하는 또다른 고민들과의 만남 속에서 더욱 첨예해지고 증식되리라 믿는다. 우리는 이 만남을 기다린다. 이 만남을 통해서 우리의 문제의식이, 우리의 사유가, 우리의 활동이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고 또다시 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에 우리는 혼돈과 불안을 낳고 마침내 전복의 위험한 함성을 불러올 ‘불온한 사유’를 기다린다. ‘불온한 인문학’이란 정녕 그 날을 위한 찰나의 섬광에 불과하리라.




글 / 휴머니스트 대표 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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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2. 24-25. 수유너머N 국제워크샵 <대중의 주체화와 문화정치학>은 도미야마 이치로 선생님과 사카이 다케시 선생님을 비롯해서 오사카 대학에서 공부하는 분들과 함께 한 자리였습니다. 특히 25일의 프로그램에서는 수유너머N과 오사카 분들이 서로 다른 공간에서 비슷한 활동을 벌이면서 같은 것에 대해 질문하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흘려버리기엔 너무나 아까운 말들이어서, 그날의 토론을 매우 거칠게나마 옮겨봅니다. 오후와 저녁 내내 통역을 담당한 하지메상과 오하나양에게 감사드립니다. 그 자리에 계셨던 분들 중 제 기록에서 틀린 부분과 빠진 부분들에 대해 더 정확하고 자세한 기억을 가지고 계시는 분의 보충을 기다립니다.

기록 / 홍서연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 indooa at gmail.com / twitter@seedve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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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야마 이치로 선생님의 저서 <전장의 기억>과 <폭력의 예감>에 대한 논평에 앞서

 

도미야마 : 올바르지 못한 설명을 하는 사람들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대해 회의하면서 올바름에 대해 회의하게 되었다. '올바른 설명'이 오키나와에 계속 따라붙었다. 오키나와를 말할 때 올바르게 논의하는 것과는 다른 대상 접근법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휘말려들일 수 있는 힘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다. 올바른 설명이 올바른 연대로 이어진다는 말들을 많이 보았다. 그런데 그 말은 내게, '나는 그런 연대에 휘말려들고 싶지 않다'는 말처럼 보였다. 연대, 지원을 말하면서 휘말려들지 않으려는 것을 보면서, 감히 휘말려들 수 있게 하는 말이 있는 곳에 운동의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은 특히 폭력에 대한 분석에 적용될 수 있다.

어떤 신체성의 증거들이 있다. 나는 휘말림을 축으로 생각하고 싶다. 이러한 휘말림을 확보하고 싶다. 휘말리지 않았으나 꼭 휘말릴 것 같은 사유들이 있다. 이러한 사유는 과거, 현재, 미래가 뒤섞인 사유다. 이것이 바로 "예감"이다.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남의 일이 아닌 것에 대한 것이다.

타자와 내가 포개지는 신체감각으로서의 예감을 사유하고 싶었다.

휘말려들인다는 것은 곁에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 혼재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정치가 있다.

이러한 신체성 속에 가능성이 숨겨져 있고, 현행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초점과 확장주의(expansionism)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야기될 수 있다. 대상과 사람의 관계에서, 사람을 휘말려들게 하는 식으로 관계를 형성하는 것, 정치는 혹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다초점 확장주의'는 독일에서 있었던 사회주의 환자 동맹[사회주의독일학생동맹(SDS)의 ‘하이델베르크 환자 공동체’(SPK). 68이후 나타난 소수자 운동을 말씀하시는 듯]이 가지고 있었던 입장이다. 확장주의란 연구에서 복수의 근거를 확보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의 올바름을 찾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글쓰기는 상황적이고 복수적인 복수성으로 향한다. '분야'와 관계해서 복수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상황에서 단서를 확보하는 행위 속에서 나오는 복수성을 말한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연구를 생각하고 싶다.

그런 행위의 방향성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과연 강령 같은 것과 무관하게 그러한 방향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한가?

자본주의 속에 오키나와를 위치짓는 작업을 하고 있고, 그것을 재구성하려고 생각 중이다. 그것이 현재 나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정행복, 최진석의 토론문을 읽은 후 도미야마 선생님의 토론

 

도미야마 : … "전장의 기억은 정치다!"라고 표현한 정행복의 말은 매우 적절하다.

… 방어태세를 설명하는 것과 연관된다.

폭력의 예감. 무장해제를 안정화시키는 얘기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행복의 요청(일상을 지배하는 무신경한 내셔널리즘에 전율을 일으키는 '발견되어야 할 폭력의 예감'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이야기를 들려달라는)에 대해 응답하겠다. 오키나와에서의 정신의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나는 기존의 논의들과는 다른 논의를 원했다. 전쟁을 둘러싼 트라우마들을, 질병의 이름(병명)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현행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가능성들을 찾는 것, 이것이 내 문제의식이다.

69-70년대에 오키나와에서 활동했던 집단들을 볼 때, 70년대에 오면서 정신의학과 겹치는 부분이 있어 왔다.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아픔, 병, 거기에 있는 권력을 어떻게 비판하는가가 그 집단들의 문제의식이었다. …

오키나와의 경제는 식민지 경제 속에서가 아니라 자유주의 경제 속에서 붕괴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standing policy, 개발, 부흥 등이 오키나와에서는 20년대부터 있었는데, 그러면서 오키나와 사람들이 세계 각지로 유랑하게 되었다.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방식이 있을 수 있는지, 어떤 점으로 오키나와를 연관시켜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큰 문제이다. 외부로 나간 사람들을 포함시켜 생각하는 것이 나의 문제의식이다.

… 제도, 시스템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최진석이 논평의 말미에서 말한 것처럼 프로이트적 정신분석으로 가면 안 되지 않을까? 그것을 비판하고 싶다. 주디스 버틀러의 멜랑콜리를 둘러싼 논의가 있다. [Judith Butler, The Psychic Life of Power: Theories of Subjection. University Press of Stanford, 1997.] 상처를 계속 끌어안고 가는 것, 그 지점에 멜랑콜리가 있다. 정신분석이 갖는 한계가 거기에 있다. 개인이 설정되어 있고, 개인과 개인이 맺어져 연대가 된다고 전제되어 있다. 여기서 다시, 오키나와의 정신의료가 문제된다. 펠릭스 가타리가 제기한, 언표행위의 집단행위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객석 질문과 토론

 

유선 : 올바름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 어떻게 올바르지 못한 것을 물리치고 자신의 올바르지 못한 부분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적어 놓지 않은 탓에 기억에 의존하여 매우 거칠게 재구성했다. 죄송 ;ㅁ;]

 

도미야마 : 내가 말한 것은, 올바르지 못한 행위를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올바른가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라, 휘말려들어가는 것이 문제된다.

최진석이 말한 영속성에 대한 것과 연결된다. 집단과 집단 간의 싸움을 빼놓고 네트워크 간의 것으로만 얘기하면 얘기가 아주 부족하다.

 

서연 : 선생님께서는 <폭력의 예감>에서, 관찰대상뿐만 아니라 연구자(관찰자) 또한 브리콜뢰르, 공작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연구자도 관찰자와 마찬가지로, 이미 세워진 목적 하에서의 전체적인 조망을 가질 수 없고 언제나 만들고 있는 와중에 있다. 이런 과정 중에 있는 연구자가 관찰대상이 되는 현지인의 언어를 접할 때, 그들의 고유어, 예를 들어 '마나'를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레비스트로스가 했듯이 '제로치'와 같은 말로 번역하거나 '무의식'으로 환언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단지 관찰자에게 외국어인 그들의 언어에 익숙해지는 것이 해결책은 아닐 텐데, 어떻게 새로운 말을 창조할 수 있는가?

 

도미야마 : 새로운 이야기는 번역이 정확하게 되지 않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마나는 달아나고픔, 두려운 감정과 같은 신체감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렇게 내 안에 생겨나는 감각들에서부터 말이 나온다. 그리고 거기서 사회성, 사회적 프로세스가 나오는 것이다.

기술되지 못한 것, 잘 모른 채로 만든 것. … 실제대로 기록하는 것, 여기에서 시작된다. 마나와 말 사이의 관계에서 시작점을 볼 수 있다.

 

사카이 : 마나는 상품, 상품어(상품에 결부된 말들)이기도 하다. 상품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해하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것. 마나는 어디에나 있다.

 

 



 

타카하시 아츠토시의 발표 <수유너머에게: 카페 커먼즈가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해>에 대한 토론

 

[앞부분을 듣지 못했음]

 

타카하시 : (히키코모리에 대해). 부끄러움이라는 신체감각이 있는데, 히키코모리들은 부끄러움이라는 신체감각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집밖으로 나가지 않기 때문에 사회를 접촉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부끄럽다는, 이러한 신체감각 말이다.

 

꾸냥 : 히키코모리와 오타쿠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타카하시 : 히키코모리에게 오타쿠는 멋진 존재다. 자기 언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오타쿠는 이인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키코모리는 혼자다.

(야오이 연구를 하고 있는 아지마상에게 요청).

 

아지마 : 오타쿠는 동료가 있고 사교적이다. 집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하고 싶은 것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밖으로 나가 원하는 것을 사고 동료를 만들어야 한다.

 

 


 

사카이 다케시 선생님의 발표문 <지금 여기로부터의 사회개혁론>에 관련된 토론

 

[앞부분을 적지 못했음].

 

사카이 : 도미야마 선생님이 올바름으로써 운동을 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했는데, 그것은 마이너리티의 입장에 있는 말이다. 마이너리티가 마이너리티인 것은 자기책임을 지겠다는 데에 있다.

공산주의 이념은 상품의 폐지, 화폐의 폐지를 말한다. 상품, 화폐가 무의식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면 권력이나 법으로 금지해 봤자이다. … 그러므로 본능적 공동행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으로써 우회하자는 것이다.

 

이진경 : 선생님은 대화관계, 대면관계에서 사회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설명하셨다. 그것들은 2자관계인데, 3인칭이 되면, 즉 3인 이상의 여럿이 모여 사람 수가 많아지면 2자관계는 무효화되는 것은 아닌가? 집단성은 (2자관계가 아니라), 처음부터 집단성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사카이 : 그것은 내가 생협운동의 맥락에서 말한 것이다. 조합원은 듣는 입장을 취하고, 상대편은 말하게 만든다. 나는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발표에서, 여기에는 국가론이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자본론>의 아날로지를 빌리자면, 간단한(개별적인 또는 우연적인) 가치형태, 전체적(또는 전개된) 가치형태, 일반적 가치형태, 화폐형태가 있다. 처음부터 권력이 거기 개입하고 있다. … 

공동성이란 커뮤니케이션이 아닐까. 이것은 보여지는 쪽, 수동적인 입장에 있는 쪽이 어떤 식의 이니시어티브를 가질 수 있는가의 문제다. 수동적인 입장은 소수자이고, 그들은 다수자의 … (?)를 대부분 가지고 있다. 도미야마 선생의 연구에서도, 오키나와 사람들의 복잡한 구조에 대해 말했다. 수동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 앞에서 그들이 이니시어티브를 갖게끔 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도미야마 : 상품을 팔게 하는 동력이 무의식이라 하셨고 그것을 폐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신 데에 동의한다. … 그런데 그걸 그대로 남겨 두면 그것은 국가를 만들 수도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를 보기 위해 연구하는 것이다. … 무의식을 그대로 남겨 두면 국가를 만들어 버릴 수 있는데, 그것을 미리 방지하는 것이 제도라 할 수 있다. … 우리가 무의식적 흐름에서 벗어나고 바꾸려 할 때 우리가 똑같은 것-국가-이 되어 버리지 않으려 한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물론 가치형태론에서 … 될 수 있다고 하지만… )

 

사카이 : 도미야마 선생이 말한, '강령을 만들지 않고 다름을 인정하면서 어떻게 공통적인 토대를 만드는가'라는 문제와도 연결된다. … 결국, 우회작전을 벌여야 한다는 관점이다.

자본주의를 어떻게 폐기시키는가. 말로는 쉽다. 그러나… 고용되어 노동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영역을 만들어야 한다. 1997년 쯤에 지역통화제의 예. … 이것은 시장을 대체하는 강제라 생각한다. 시장에서는 지불하고 결재하는 기능을 은행이 한다. 지역통화는 각각의 회원이 계좌를 만들어, 마이너스가 되어도 괜찮다는 시스템이다. 그리고 플러스가 되어도 이자가 생기지 않는다. 지금 은행에서 이자가 생기는 형태는 장사를 하는 것이지만, 이것을 그대로 이용해서 이것 없이 장사를 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1997년 단계에서는 사회혁명을 위해서는 한 장의 그림을 들고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람들을 그걸 보고 '안되겠지?'라고 볼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림을 보다가 어쩌다가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애국투쟁, 엘리트가 되어 (사람들을) 지도하면 엎어진다는 의식이 있었는데 그대로 되지 않았다. 소련체제 하에서 관료제가… 아랍권에서 일어나고 있는 운동에서도 볼 수 있다. 하나의 권력이 무너져도 다른 권력이 장애물로 나타난다. 그런 식으로 고정된다.

 

와타나베 : 도미야마 선생님의 질문에 대한 나의 의견을 말하겠다. 사카이 선생님과 도미야마 선생님 사이에서도 당파투쟁이 일어나고 있다. 지역통화 등에 대해서도 둘의 말하기 방식이 다르다. 이렇게 다른데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공통적인 토대를 만들 수 있다는) 증거이다.

 

타카하시 : (그분들이 당파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럼 나는 정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분명 다르겠다. 구체적, 추상적으로… 지역의 차이, … 등의 차이도 있을 것이고.

'친구'에 대해 발표를 하게 되었다. 친구라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관계다. 차이를 언제나 전제하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사카이 : 옛날의 나 같았으면 정치적 의사통일을 주장하며 싸웠을 지도 모른다. 유일성과 공통성을 어떻게 함께 (기능하게) 할 수 있나 생각하고 있다. 유일성을 갖고 있는 개개인이 공동관계를 만든다. 이런 것을 조합운동에서 볼 수 있다. 대화를 통해 사업을 운영한다고 할 때 개개인이 뭘 생각하는가는 한계적인 입장에 놓여 있다. 나의 입장은, 사업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외부에 있는 입장이다. 그것은 코뮨 같은 공동체에서, 외부의 사람들과 같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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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인문학 1기, ‘연대의 쾌감’을 위하여

-불온함을 즐거움으로 바꿀 수 있는 친구를 기다립니다.

 

지난 기사 보기 클릭!

[불온 통신 1] 내 친구, 불온한 인문학 강사팀을 소개합니다.’ http://nomadist.org/xe/79462

 

[불온 통신 2] 불온한 인문학이 선택한 두 권의 뜨거운 책 -맑스의 『자본』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http://nomadist.org/xe/Nzine/82100

 

 인문학 강의 하면 강사는 강의하고 수강생은 그냥 듣는 수동적인 강의를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불온한 인문학은 강의를 듣는데서 끝나지 않고

집중적으로 텍스트를 읽고 자기문제를 고민하고 토론하는 시간

‘집중 세미나’ 라는 과정을 꼭 함께 해야 한단다.

 

집중 세미나는 무엇이며 어떤 텍스트를 읽는지,

그리고 불온한 인문학 강사팀이 이번 과정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

그들이 꿈꾸는 ‘연대의 쾌감’에 대해 들어봤다.

 

 

이기자: 집중 세미나도 한다고? 세미나 제목이 ‘반자본주의와 욕망의 정치학’이다. 세미나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지?

 

해피 : 먼저 읽을 『자본주의 역사 강의』다. 이 책은 맑스의 틀에서 해석하지 못한 부분들을 설명하는 책이다. 왜 맑스의 자본론을 읽다보면 현재 경제상황과는 너무 다르지 않느냐. 그러다 보면 흥미를 잃거나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본 강의를 들으면서 세미나 시간엔 직접 이 책을 읽는다면 현재의 문제에 대해 좀 더 넓은 범위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훈 : 당대의 맑스가 썼던 책이 자본주의 문제를 완전히 전능하게 풀어 낸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선 자본주의를 폭 넓게 이해하기 위해선 맑스가 풀지 못한 것을 봐야 한다. 『자본주의 역사 강의』는 초기 자본주의 부터 현재의 신자유주의 모습까지 자본주의 500년 역사의 변화 양상을 두루 볼 수 있는 책이다. 세계체계 분석(World System Theory)의 두 대가 ‘이매뉴얼 월러스틴’, ‘지오반니 아리기’의 세계체계 분석 뿐 아니라 이들에게 영향을 끼친 ‘페르낭 브로델’ 과 ‘칼 폴라니’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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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 지금 해피쌤과 함께 읽고 있는데 정말 재밌다.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 하자면 내 주변엔 세계 경제에 대한 걱정·근심으로 밤잠 못 이루는 분들이 많다. 주변 직장 동료를 봐도 세계 경제에 대해 어쩌면 그렇게 박식하신지. 그분들 이야기를 들으면 참 재밌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젠 중국. 세계 헤게모니가 어쩌고 저쩌고. 식민지 전쟁부터 대공항, 무역전쟁 등등 자본주의 역사를 열심히 설명한다. 그리고 결론이 너무 웃긴다. ‘그래서 중국 펀드를 사야한다’로 귀결되더라. (*물론...한참 중국·인도 펀드 유행일 때 가입했다가 반토막 났을 때 이 놈의 경제가 왜 이러냐고 한탄하느라 눈 밑이 까맣더라.) 우리야 뭐 그런 펀드는 안 사겠지만 어쨌든 세계자본주의에 대한 거시적 관점은 꼭 필요하단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책! 무엇보다 재밌다! 기대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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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 : 두 번째로 집중 세미나 시간에 읽을 책은 풀빛에서 나온 『자본의 정치적 해석』이다. 이 책은 자본의 1편 1장을 서술한 것이다. 어떻게 자본론 안에 프롤레타리와 부르주아의 계급적 문제가 관통하는 지 좋은 통찰을 주는 책이다. 사실 이 책은 굉장히 논쟁적인 저작이기도 하다.

 

 

 

독일 시민은 속지 않았다...... 대중은 왜 자기 억압을 욕망하는가?

 

이기자 : 두 번째 학기에 집중 세미나에서 읽을 책은 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 대중심리』, 고병권의 『추방과 탈주』라고?

 

진석 : 들뢰즈가 라이히의 책을 인용하면서 던지는 유명한 질문이 있다. ‘왜 대중은 자기 억압을 욕망하는 가.’ 라이히가 이런 문제의식을 던졌을 때 그 문제의식의 이면엔 ‘도대체 왜 임박해 있다고 믿었던 혁명이 발생하지 않았는가’ 라는 질문이 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혁명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지도적인 이론가들 혁명주의자들이 주안점을 두고 생각한 것은 대중이 어떻게 혁명을 의식할 것인가이다.

 

루카치는 1927년『역사와 계급의식』이란 책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의 계급적 입장이라는 것을 말하는 순간 혁명은 폭발할 것이라고 기대를 했다. 대신 아직 프롤레타리아트가 문제가 뭔지를 모르기 때문에 (오지 않는 것)이고, 부를 타도하는 게 뭔지를 알면 혁명이 자연히 올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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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히는 여기에 문제의식이 있다. (모두들 알다시피 혁명은 오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계급에 문제의식을 갖는다 해도 혁명이 오지 않는 문제. 아는 것과 욕망의 문제는 다르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대중에 대한 의문들을 생각한 것이다. 가령 2차 세계 대전 끝나고 나치즘 독일에 대해서 비판적인 질문을 던질 때를 보자.

 

그때 ‘어리석게도 독일 시민은 속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많은 역사 문화적인 연구가 보여주는 것을 보면 아니다. 사실 독일 시민은 다 알았다는 거다. (파시즘이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배반하는 욕망의 실체는 무엇일까. 단일화된 영토를 지키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이다. ‘안티 오이디푸스’와 연결 해 보면 국가와 민족과 가족의 이름으로 동일화 되는 무의식 욕망의 기재가 몇 개의 단선적인 구조로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게 어떤 욕망을 가질 수 있느냐의 문제인데 기성의 안온한 씹고 버무려진 우리에게 소화하기 좋게 쉬운 것을 따라가면 안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걸 욕망한다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타자의 욕망으로 가는 거다. 나의 욕망을 알고 자 함이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라는 거다. 만약 내가 ‘나의 욕망에 대해 말한다’면 어떻게 변할까. 가족이 원해서 국가가 원해서 타자가 말하니까... 하고 과연 순순히 따라갈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읽자고 한 것이다.

 

고병권의『추방과 탈주』는 그런 문제의식을 한국 사회 21세기 보다 쉽고 구체적으로 풀어낸 책이기 때문에 사실 이론적인 뭘 찾기 보다는 체험으로서 되돌아 보자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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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나 행패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연대하는 힘, ‘연대의 쾌감’을 위하여

 

이기자 : 강의를 준비하면서 기대가 많이 될 것 같다. 어떤 이들이 이번 강의를 찾았으면 좋겠는지...

 

해피 : 우리도 현재의 문제를 돌파할 뾰족한 대안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문제의식을 서로 나누다 보면 서로에게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정훈 : 우리가 불온함을 알려주마. 이런 건 아니다. 사실 처음 시작할 때도 말했지만 우리의 불온하지 않음을 반성하는데서 시작하고 싶다. 대안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이게 아닌데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 문제를 넘을 수 있을 지 열린 마음으로 보자는 거다.

 

진석 :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일테니 서로의 고민이나 문제의식을 나누는 자리도 자주 마련했으면 한다.

 

정훈 : 자본이나 국가가 무서워하는 건 폭력이나 행패가 아니다. 우리가 연대하는 힘이다. 사실 이 연대하는 힘이 가치 있다고 믿는 데 연대를 당위로 하기 보다는 연대가 주는 쾌감을 느꼈으면 한다. 지난 여름 국제 워크샵 할 때 읽었던 다니가와 간의 글에 연대의 쾌감이란 내용이 나온다. 우리도 엠티도 가고 불온함이 즐거움이 될 수 있는 장이 됐으면 좋겠다.

 

이기자: 불온하다고 했을 때 많이 심각해 보였는데 그런건 아닌 듯?

 

화 : 그렇다. 불온함이 인상 쓰자는 게 아니다. 요즘은 트위터 하면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졌거나, 조금은 다르더라도 현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는 이들이 많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를 테면 ‘내가 반대하는 것들에 대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트위터에서 반대하는데, 이렇게 끊임없이 알티(*RT: 트위터에서 상대의 글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때 쓰는 방법)가 되는데, 왜 세상은 안 바뀔까. 왜 이런 목소리는 전달이 안될까.’ 이런 생각 한 번쯤은 해 봤을 것이다. 알티(RT)도 좋지만 서로 구체적인 문제를 공유하고 공부를 하면서 돌파구를 찾아보자.

 

 

 

지금 당신이 가장 심각하게 고민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가족, 연인, 친구, 직장 문제로 머리가 아프진 않는지.

혹은 나날이 바보같은 짓을 해대는 어떤 분 때문에 화를 내고 있진 않는가.

 

이들이 말하는 연대의 쾌감이란 무엇일까. 

언젠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어떤 날의 그 짜릿함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한번도 느껴보지 못해 뭔지 도통 감이 오지도 않는가.

 

궁금하다면 액션 나우!

불온한 인문학 1기에 함께 하자. 

 

 

글/이기자

 

 

 

 

<안내>

* 불온한 인문학 1기 주요 프로그램

I. 맑스의『자본』 입문 ― 다시, 반(反) 자본주의의 깃발을 들자!

II.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 가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

III. ‘불온한 인문학’ 집중 세미나

o 강 사 : 정정훈 · 최진석

o 세미나 튜터 : 정행복 · 문화

 

1. “불온한 인문학”은 2011.3.3.목 개강, 총 20주 40여 회(매주 강의1회 세미나 1회, 총5개월) 과정으로 구성됩니다.

 

2. 매주 목요일 오후 7시~10시에는 강의가, 토요일 오후 2시~5시에는 집중 세미나가 열립니다.

이 두과정은 꼭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부분 수강 불가)

 

3. “불온한 인문학”은 두 개의 트랙으로 진행됩니다. 10주 간 진행되는 트랙01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다음 10주간의 트랙02에는 욕망 이론과 대중 정치를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진행됩니다.

 

4. “불온한 인문학”은 단지 강사의 강의만을 수동적으로 “듣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불온한 인문학”에 참여하는 이들은 스스로 텍스트를 읽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표현하는 쉽지만은 않은 과정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성 지식의 ‘온순한’ 소비자로부터 동료들과의 소통 속에서 자기 사유의 힘을 벼려가는 ‘불온한’ 생산자가 되길 바랍니다.

 

5. 이를 위해서 “불온한 인문학” 참여자는 강의를 들은 후 2회 이상 강의 후기를 제출해야 하며, 강의와 관련된 텍스트를 읽고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과 소통하는 세미나에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세미나 진행에는 2회 이상의 텍스트 발제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공부한 과정을 총괄하는 글쓰기 과제(에세이)를 제출해야 합니다.

 

6. 수강신청

정원 : 선착순 25명

신청기간 : 2011.1.20.목요일부터

수강료 : 60만원, 입금 우리은행 1002-043-230955 (예금주 : 문화)

(*분납, 환불 불가합니다.)

*수강신청은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불온한 인문학' 게시판( http://nomadist.org/xe/bulin )에

신청글과 함께 연락처를 함께 남겨주세요.

 

7. 문의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http://www.nomadist.org)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실 대표 번호 (070)8263-0910

정행복 010-9404-8403, 문화 010-6210-3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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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인문학이 선택한 두 권의 뜨거운 책

 

-맑스의 『자본』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

 

예고 해 드린 대로 [불온 통신 1호]

'내 친구, 불온한 인문학 강사팀을 소개합니다.’에 이은

두 번째 인터뷰기사입니다^^

지난 기사는 요기! 클릭! http://nomadist.org/xe/79462

 

 

이번 기사는 불온한 인문학 1기 강의를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불온한 인문학 강의는 1트랙은 맑스의 자본,

2트랙은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 를 중심으로 이뤄집니다. 

 

세미나 소개도 조만간 업뎃할 예정입니다.

 

 

이기자 : 20주 동안 진행 되는 커리에 맑스의 『자본』이 있던데. 자본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면? 솔직히 언뜻 생각하기엔 ‘불온함’과 ‘자본’의 만남 이럴 줄 알았단 생각도 드는데?

 

정훈: 그런 반응 예상했다. 하지만, 지금이야 말로 자본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자본을 그저 좋은 책으로 고전으로 읽는 건 아니다. 이런 말을 굳이 하는 이유가 있다. 최근 자본을 쉽게 풀어 쓴 책을 읽거나 자본을 그저 고전으로 읽는 움직임들이 느껴져서다. 그런 모습은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이런 움직임은 『자본』이 이 사회에 아무런 위해요소가 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 때문에 가능한 것은 아닌지. 이건 문제다.

 

진석 : 러시아에서는 자본론 번역이 처음 됐을 때 검열자가 읽었는데 너무 어려워서 그냥 허가를 내줬다고 한다. 뭐 설마 이렇게 어려운 걸 얼마나 이해하겠나. 이런 생각이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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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이 떡볶이를 파는 이 시대에 자본을 읽는다는 것.

 

정훈 : 어렵지만 유명하니까 읽고 그게 꼭 나쁘진 않지만 역으로 드는 생각이 자본주의가 계속 지속되고 있는데 요즘은 대기업이 떡볶이 까지 판다는데 이런 시대에 자본을 읽는 것이 하나도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간혹 지금 권력이 작동되는 방식과 동떨어져서 ‘헤겔, 리카르도 등등을 나는 다 안다. 그러니까 나는 이 정도 읽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지나치게 전문가주의적으로 읽는 경우. 혹은 말랑말랑하게 소화가 다 된 상태로 강사가 알려주는 데로 받아들이는 것. 이 두 가지 방식 모두 문제다. 이게 다 맑스의 『자본』을 무기력한 낡은 유산으로 읽어서다. 내가 보기엔 그럼 맑스도 싫어할 것 같다.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전화로 해고를 통지하고, 청소 노동자에게 식비 300원을 주는 이런 세상에서 자본을 읽는 행위에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해피 : 맑스의 자본은 누구랑 어떤 입장에서 읽는 것도 매우 중요하단 생각이 든다. 지난 가을 연구실에서 맑스 콜레기움하면서 느꼈다. 맑스의 자본을 정치·철학과 같이 읽으니까 자본이라는 책이 주는 폭발력이 더 강렬했다.

 

(*콜레기움 : 정정훈 선생과 함께 ‘맑스와 정치, 혹은 혁명과 코뮨의 정치철학에 관하여’ 라는 주제로 2010년 10월 부터 12주 동안 맑스의 저작을 함께 읽었던 프로그램이다. http://nomadist.org/xe/collegium/28937)

 

이기자 : 이번 불온한 인문학 강의에서 읽는 자본 역시 각자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읽는다면 더 재밌어 질 것이라는 말인 것 같은데? (좌중 동의^^) 그런데 설마 자본 5권을 다 읽어야 하나?

 

정훈 : 모든 사람들이 자본을 안 읽어도 된다. 오히려 자본을 읽기 위한 사전 오리엔테이션이라 생각하면 된다. 이 강의를 충분히 듣고 스스로 읽을 때는 그렇게 어렵지 않게 자본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걸 듣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본을 읽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좋겠지. 필요하면 별도의 세미나를 꾸려서 해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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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자 : 두 번째 트랙은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다. 어떤 책인가.

 

진석 : 『안티 오이디푸스』는 현대의 고전이다. 그런데도 자본이랑 비슷한 운명을 밟는 것이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거다. 읽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고. 자본을 어려워하는 사람은 수학 나올까 걱정 돼서 못 읽고. 안티 오이디푸스는 읽어 보려고 해도 아예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말도 있더라.

 

원제목은 ‘안티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L'Anti-oedipe :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이다. 이때 스키조프레니(schizophrénie) 는 정확하게 번역하면 정신 분열증이 아니다. 이건 분열증이라고 번역하는 게 맞다. 보통 사람들은 아 자본주의 때문에 정신 분열증 생긴 갑다.. 이렇게 이해도 하더라. 그런데 아니다. 자본주의와 분열증은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때 지나가던 한 세미나 회원 ‘아~ 나도 자본주의 때문에 정신분열증 생긴단 소린 줄 알았어~헤헤’ (웃을 때가 아니지요. 공부하세요^^)

 

진석 : 스키조프레니(schizophrénie) 는 임상적인 의미의 정신 분열증이 아니라 분열증, 분열자가 되자는 말이다. 들뢰즈의 개념어에 익숙한 사람은 알겠지만 다양체를 지향한다든가 다양체를 만드는 것, 특수한 회로를 벗어나 옳다고 여겨지는 가치관과 태도 지배적인 시선 이런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분열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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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 맞선다는 것? 분열증자가 되자.

 

진석 : 흔히 정신병이 있으면 이야기하기 힘들다 생각 하는데, 논리가 서로 대립되고, 합쳐 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이 책을 이해하는 포인트라 생각한다. 내 의식 감정에서는 불편하지만 일상생활은 자본주의가 지시하는 그대로 따라 산다. 그래서 이 사회가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는 것이다. 반대로 자본주의에 맞선다는 것. 가장 강력한 힘은 아예 다른 언어 논리로 맞장을 뜨는 것이다.

사실 실천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양상은 달라지겠지만. 믿고 따르고 의식하던 일상의 규율에 의문을 품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새로운 논리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 상이한 논리 언어가 스쳐 갈 때 지속적으로 잡을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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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의 자본과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 두 권 모두 만만치 않은 책이다.

꼭 한 번 독파해야겠다는 의무감에 사놓고 길을 잃었던 이라면 이번 기회에 '불온한 인문학'을 접속해보면 어떨까.

 

다행히 이번 '불온한 인문학' 강의에서는 이 두 권의 책을 잘 읽을 수 있도록 강사와 튜터가 도와준다고 한다.

 

설령 이 두 권의 책 모두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더라도 괜찮다. 문제적인 두 권의 책을 좋은 친구들과 함께 첫 만남을 하는 것도 큰 행운 아닐까.

 

 

글/이기자

 

 

 

 

 

<안내>

* 불온한 인문학 1기 주요 프로그램

 

I. 맑스의『자본』 입문 ― 다시, 반(反) 자본주의의 깃발을 들자!

II.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 가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

III. ‘불온한 인문학’ 집중 세미나

 

o 강 사 : 정정훈 · 최진석

o 세미나 튜터 : 정행복 · 문화

 

1. “불온한 인문학”은 2011.3.3.목 개강, 총 20주 40여 회(매주 강의1회 세미나 1회, 총5개월) 과정으로 구성됩니다.

 

2. 매주 목요일 오후 7시~10시에는 강의가, 토요일 오후 2시~5시에는 집중 세미나가 열립니다.

 

이 두과정은 꼭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부분 수강 불가)

 

3. “불온한 인문학”은 두 개의 트랙으로 진행됩니다. 10주 간 진행되는 트랙01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다음 10주간의 트랙02에는 욕망 이론과 대중 정치를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진행됩니다.

 

4. “불온한 인문학”은 단지 강사의 강의만을 수동적으로 “듣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불온한 인문학”에 참여하는 이들은 스스로 텍스트를 읽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표현하는 쉽지만은 않은 과정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성 지식의 ‘온순한’ 소비자로부터 동료들과의 소통 속에서 자기 사유의 힘을 벼려가는 ‘불온한’ 생산자가 되길 바랍니다.

 

5. 이를 위해서 “불온한 인문학” 참여자는 강의를 들은 후 2회 이상 강의 후기를 제출해야 하며, 강의와 관련된 텍스트를 읽고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과 소통하는 세미나에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세미나 진행에는 2회 이상의 텍스트 발제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공부한 과정을 총괄하는 글쓰기 과제(에세이)를 제출해야 합니다.

 

6. 수강신청

정원 : 선착순 25명

신청기간 : 2011.1.20.목요일 부터

수강료 : 60만원, 입금 우리은행 1002-043-230955 (예금주 : 문화)

(*분납, 환불 불가합니다.)

*수강신청은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불온한 인문학' 게시판( http://nomadist.org/xe/bulin )에

신청글과 함께 연락처를 함께 남겨주세요.

 

7. 문의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http://www.nomadist.org)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실 대표 번호 (070)8263-0910

정행복 010-9404-8403, 문화 010-6210-3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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