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드적 대중지성 ‘불온한 인문학’ 2기를 모집합니다!

 

* 주요 프로그램

 

I. 스피노자 - 폭탄을 장전한 사유의 철학자 스피노자와 만나기

 

강의 주제

강의 내용

교재

1

9. 22

회차/일자강의 소개 및 오리엔테이션

2

9. 29

신에 대하여

양태의 존재론

『에티카』1부

3

10.6

자유의지와 목적론

4

10.13

정신과 신체

평행론

『에티카』2부

5

10.20

적합한 관념과 공통개념

6

10.27

정서와 예속

변용능력과 정서

『에티카』3부

7

11. 3

노예와 자유인

『에티카』4부

8

11. 10

인간의 자유

영원성과 지복

『에티카』5부

9

11. 17

정치에 대하여

종교와 정치

『신학정치론』

10

11. 24

홉스 vs. 스피노자

『정치론』

 

 

II. 푸코 - 신자유주의 통치체제의 불온한 탐험가 되기

 

 II-1 푸코 읽기

회차/일자

강의 주제

강의 내용

비고

1

12.1

담론과 권력

타자의 사유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2

12.8

지식의 고고학에서 권력의 계보학으로

3

12.15

권력의 미시정치학

지식-권력-신체

『감시와 처벌』

4

12.22

권력의 미시물리학과 훈육권력

5

12.29

생명권력

『성의역사1』

 

 II-2 신자유주의 통치체제의 경제와 정치

회차/일자

강의제목

내용

기본참고자료

6

1. 5

1강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자본주의의 역사적 형태 변동의 맥락에서 신자유주의 출현과 그 기본 축적메커니즘을 살펴본다

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

제라르 뒤메닐 외,

『자본의 반격』

7

1. 12

2강 통치성으로서 신자유주의(1)

푸코의 『안전, 영토, 인구』를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성립과정과 그 사회적 효과들 주체화의 맥락에서 규명한다.

미쉘 푸코,

『안전, 영토, 인구』

8

1. 19

3강 통치성으로서 신자유주의(2)

9

2. 2

4강 배제사회와 공안체제

신자유주의의 결과로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들을 검토하고 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의 정치적 특성을 분석한다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경향신문특별취재팀,

『한국의 워킹푸어』

10

2. 9

5강 반신자유주의의 정치학의

몇 가지 길들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사회운동과 정치적 활동을 사유하기 위한 이론적 자원들을 살펴본다

에티엔 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

자끄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이진경, 『코뮨주의』

 

 

 

III. ‘불온한 인문학’ 집중 세미나

 

트랙 I. 스피노자를 읽자!

회차/ 일자

주제

교재 및 범위

1

9.10

양태의 존재론

『에티카』 1부. 정리1 ~ 정리14.

2

9.17

자유의지와 목적론

『에티카』 1부. 정리15~정리36. 부록.

3

9.24

평행론

『에티카』 2부. 정리1 ~ 정리13.

4

10.1

적합한 관념과 공통개념

『에티카』 2부. 정리13 ~ 정리49.

5

10.8

변용능력과 정서

『에티카』 3부

6

10.15

노예와 자유인

『에티카』 4부

7

10.22

영원성과 지복

『에티카』 5부

8

10.29

종교와 정치

『신학정치론』 (서문, 16~20장)

9

11.5

홉스 vs. 스피노자

『정치론』

10

11.12

불온한 인문학 워크샵

 

트랙 II. 푸코와 신자유주의 통치체제!

회차/ 일자

주제

교재 및 범위

1

12.3

권력의 계보학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17-84

2

12.10

역사와 근원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85-168

3

12.17

민족 그리고 전쟁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169-220

4

12.24

육체의 인간에서 종의 인간으로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221-305

5

1.7

자유주의의 차이와 반복 : 통치론

『통치성과 자유』 68-127

6

1.14

삶과 포개진 죽음 : 권력론

『통치성과 자유』 130-184

7

1.28

적대의 전위 : 법·규범론

『통치성과 자유』 186-233

8

2.4

‘시큐리티’의 강화 : 현대도시격리론

『통치성과 자유』 238-281

9

2.11

공포와 비밀의 정치학

『통치성과 자유』 284-324

10

2. 18

에세이 발표

 

o 강 사 : 손기태, 정정훈, 정행복

o 세미나 튜터 : 박은선, 유영선, 김은영, 권은혜

 

1. “불온한 인문학”은 2011.9. 22.목 개강, 총 20주 40여 회(매주 강의1회 세미나 1회, 총5개월) 과정으로 구성됩니다.

 

2. 매주 목요일 오후 7시~10시에는 강의가, 토요일 오후 2시~5시에는 집중 세미나가 열립니다. 이 두과정은 꼭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부분 수강 불가)

 

3. “불온한 인문학”은 두 개의 트랙으로 진행됩니다. 10주 간 진행되는 트랙01에는 폭탄을 장전한 사유의 철학자 스피노자의 저서를 중심으로 한 강의와 세미나가, 다음 10주간의 트랙02에는 푸코와 신자유주의 통치체제의 경제-정치학을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진행됩니다.

 

4. “불온한 인문학”은 단지 강사의 강의만을 수동적으로 “듣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불온한 인문학”에 참여하는 이들은 스스로 텍스트를 읽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표현하는 쉽지만은 않은 과정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성 지식의 ‘온순한’ 소비자로부터 동료들과의 소통 속에서 자기 사유의 힘을 벼려가는 ‘불온한’ 생산자가 되길 바랍니다.

 

5. 이를 위해서 “불온한 인문학” 참여자는 강의를 들은 후 2회 이상 강의 후기를 제출해야 하며, 강의와 관련된 텍스트를 읽고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과 소통하는 세미나에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세미나 진행에는 2회 이상의 텍스트 발제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공부한 과정을 총괄하는 글쓰기 과제(에세이)를 제출해야 합니다.

 

6. 수강신청

정원 : 선착순 25명

신청기간 : 2011. 8. 8. 월요일부터

수강료 : 60만원, 입금 신한은행 434-04-354206 (예금주 : 김은영)

(*분납, 환불 불가합니다.)

*수강신청은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불온한 인문학' 게시판(http://nomadist.org/xe/bulin)에 신청글과 함께 연락처를 함께 남겨주세요.

 

7. 문의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http://www.nomadist.org)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실 대표 번호 (070)8263-0910

김은영 010-8334-4389, 권은혜 010-4515-2725


신고
Posted by 노마디스트


다케우치 요시미의 “루쉰"을 읽고


작년 중순부터 노들 현장인문학에 합류했다. 내가 합류하기 전에 맑스의 자본을 읽었다고 했고, 내가 결합할 즈음에는 푸코의 저작을 열심히 읽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고 나서 작년 말경부터 '루쉰'의 소설과 잡감을 비롯해서 그의 전기를 읽고 있다. 물론 노들의 활동가분들과, 노들 야학학생들, 그리고 수유너머가 함께 세미나를 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긴 하지만, 사실 루쉰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이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소개 받은 책이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사람의 평론집이었다. 그런데 이 분이 말하는 '루쉰'이라는 사람이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작년에 연구실에서 하는 “국제워크숍”에서 다니가와 간이라는 노동운동가이자 시인을 공부했었는데, 다케우치 요시미가 말하는 “루쉰”은 내게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던 다니가와간이라는 인물을 쏘옥~ 빼닮아 있기도 했다. 그는 루쉰을 그저 설명하지 않고, 루쉰을 찾아내거나 만들어 낸다. 그렇다고 아주 없는 루쉰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충분히 루쉰이지만 루쉰 자신조차도 발견하지 못한 것들을 찾아주는 사람. 갑자기 “문학평론가”라는 직업마저도 달리 보이는 책이었기에 다른 사람들과 조금 나누고 싶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일단 루쉰 스스로가 치열하게 고민해서 질문하고 대답했던 문제에서 시작해서 루쉰을 찾아낸다. 그런 질문과 고민이 잘 드러난 루쉰의 텍스트로 선택한 것은「나는 어떻게 소설을 쓰게 되었는가?」(1933)라는 글이다.

 

물론 소설을 쓰게 된 이상 내가 주장하고 싶은 바가 없을리는 없었다. 이를테면 '무엇 때문에' 소설을 쓰느가라는 말에 답하자면 나는 역시 십수 년 전의 '계몽주의'를 마음에 품고서 반드시 '인생을 위해서'가 아니면 안 되고, 나아가 인생을 계랑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소설은 '심심풀이 책' 이라고 하는 예로부터의 주장을 싫어했고, '예술을 위한 예술'을 '심심풀이'의 또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나는 되도록 병든 사회의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제재를 찾으려 했다. 병고를 폭로함으로써 치료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글에 대해 다케우치 요시미는 “이 문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루쉰 스스로가 ‘무엇을 위해’라고 물었기 때문에 굳이 ‘인생을 위해’라고 대답한 꼴이 되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요된 대답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비록 내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희망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을 말살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희망이라는 것은 미래를 향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없다고 하는 내 확신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을 꺾을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그에게 글을 쓰겠다고 응답했다. <외침의 서문 중> 

 

다케우치 요시미는 루쉰의 ‘인생을 위해’라는 일종의 강요된 대답은, 위에서 인용한 <외침> 서문의 글에 나타난 ‘내 나름의 확신’과는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고 본다. “병고를 폭로함으로써 치료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조의 말. 그가 자신의 문학을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그가 ‘예술을 위한 예술’을 끝내 무시했던 것도 분명하지만, 따라서 그 때문에 설명을 위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도 이해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뭔가 그 스스로를 밖에서 해석한 듯 한 이런 대답에 의문을 품는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이후에 씌여진 「자선집(自選集)」(1932)에 씌여진 글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나는 당시 솔직히 '문학혁명'에 대하여 어떠한 열정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신해혁명을 보고, 제2혁명을 보고, 위안스카이의 제제와 음모와 장쉰의 복벽을 보고, 그 밖에 여러가지를 보아오다가 아주 회의적으로 되어 실망한 나머지 무기력해진 상태였다. ---- 다만 나는 내가 이렇게 실망하고있는 것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본 인간이나 사건은 지극히 한정된 것이므로, 그 생각이 내게 붓을 들 힘을 주었다. "절망이 허망한 것은 바로 희망이 그러함과 같다." ----- 직접적인 '문학혁명'에 대한 정열이 아니면 무엇때문에 붓을 들었는가? 생각해보면 그것은 열정적인 사람들에 대한 공감 때문이었다. 이러한 전사들은 적막 속에 있지만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함께 큰 소리로 외쳐 도움을 주어도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것 뿐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낡은 사회의 병근을 폭로하여 어떠한 방법이든 치료법을 강구하도록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희망도 섞여있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여기서 많은 중요한 시사점들을 찾아낸다. 일단 루쉰은 이 글에서 자신이 문학혁명에 냉담했다고 그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면서, 대체로 루쉰이 새로운 운동에 대해서 처음부터 찬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으며 그것은 루쉰이 ‘선구자’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본다. 두 번째 주목하는 점은 ‘신해혁명을 보고’에서와 같이 ‘보았다’는 것이 그의 실망 및 무기력과 관계있는 것처럼 기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는 그가 소설을 쓴 데에는 ‘열정적인 자들에 대한 동감’이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으며 ‘구 사회의 병근을 폭로해서 사람들의 주의를 촉구하고자’한 것은 앞의 원인과 ‘뒤섞여’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에 주목한다. 다케우치 요시미가 보기에 루쉰이 말한 ‘인생을 위한’이라는 말은 그것 자체가 무슨 의미를 갖고 있다기 보다는 비(非) ‘예술을 위한’이란 쪽의 의미가 강하다고 본다. 루쉰이 해석한 ‘예술을 위한’이 ‘심심풀이’를 상징하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인생을 위한’은 ‘심심풀이가 아닌’의 의미로 해석되어도 좋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시금 나의 서목들을 검토해 보니, 그것들의 내용이 실로 빈약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창작에서는 나에게 위대한 재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여태것 장편을 한 편도 쓰지 못했다는 것이며....  

 

자선집과 같은 해에 씌여진 「나의 번역과 저서 목록」(1932)의 글이다. 이 글에서 루쉰은 작품을 쓰지 못한 것을 자신의 무능력으로 귀결시켰다.  다케우치 요시미도 루쉰이 근대 문학의 자기 붕괴의 과정에 처했던 유럽의 현대 작가들처럼 작품의 세계를 근본적으로 의심하지는 않았다고 평가한다. 그런 면에서 루쉰의 이런 자기평가를 사실로 인정한다. 그러나 다케우치 요시미가 보기에 루쉰은 자신이 진실로 쓰지 못했던 것, 동시에 쓸 수 없었던 것에 충실했다. 그의 ‘빈약한’ 작품에서 넘쳐 나오는 충실함. 이것이 다케우치 요시미가 루쉰을 그 차제 ‘루쉰’인 채로 재발견 해 내려고 애쓰는 지점이자 내가 느끼는 매력이 아닐까 싶다.

 

그런 다케우치 요시미에게 “절망이 허망한 것은 바로 희망이 그러함과 같다.”라는 문장은 루쉰 문학을 설명하는 점에서 말 이상의 것이다. 그는 이 문장을 상징적인 말 이라기 보다는 루쉰 문학의 태도, 행위라고 평가한다. 그는 사람이 절망과 희망을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자각을 얻은 사람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불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일종의 태도이기 때문인데, 루쉰이 그 태도를 부여한 것이 <광인일기>라고 지목한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광인일기>가 근대문학의 길을 열었던 것은 그것에 의해 구어가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도, 작품세계가 가능케 되었기 때문도, 하물며 봉건사상이 파괴되었기 때문도 아니며, 이 유치한 작품 때문에 어떤 근본적인 태도가 자리 잡혔다는데 가치가 있다고 평가한다. ‘길은 아득히 멀기도 하나니’ ‘나는 장차 오르내리며 찾아보려 하노라’는 태도의 문학가. 그에게 중국 근대 문학의 최초의 기념비로서의 <광인일기>는 일종의 ‘비극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주장이 오래도록 남는다.

 

물론 루쉰을 '읽어야 했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다케우치 요시미의 평론집은 내게 루쉰 소설을 '읽고 싶게' 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해서, 오늘은 루쉰 소설집의 마지막 소설을 읽는 날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또 한참을 그의 잡감들을 읽어 갈 것이다. 반쯤은 다케우치 요시미의 시선을 한 채로 내가 읽은 루쉰 소설의 매력 중의 하나는, 그의 소설이 그가 안고 있는 시대적 고민과 번뇌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섣불리 ‘대안’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또 소설을 읽는 독자들을 그가 살던 시대로 완전히 끌어들여버리지 않는다. 루쉰 자신은 자신의 시대를 치열하게 고민하서면도, 루쉰을 읽는 이들이 ‘여기, 이곳’에서 ‘여기, 이곳의 문제’로 사유할 수 있는 여유를 빼앗아 가지는 않는다. 아마 나와, 노들의 활동가들, 그리고 야학 학생들이 그의 소설대해 그렇게 생기 넘치게 반응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클 것이다.

 

혹시 “루쉰”에게 관심을 갖고, 그의 글을 읽으려고 하는 분들이 있다면, 다케우치 요시미의 『루쉰』을 읽어보라고, 아주 좋은 길벗이 될 거라고 간단히 권하려던 글이 너무 길어졌다. ^^;;; 부디 참고가 되셨기를....^^


글 / 정행복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신고
Posted by 노마디스트
이전버튼 1 이전버튼

블로그 이미지
노마디스트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516)
이슈&리뷰 (51)
빌린 책 (43)
개봉영화 파헤치기 (15)
풍문으로 들은 시 (13)
장애, 그리고... (4)
4040 (5)
칼 슈미트 입문 강의 (32)
아무도 번역 안 해줄 거잖아 (4)
시몽동X번역기계 (6)
과학 X 철학 토크박스 (2)
해석과 사건 (6)
화요토론회 (24)
기획 서평 (34)
과거글 (272)
Yesterday303
Today50
Total1,718,321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