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다름 아닌 시체와 고기가 등가가 되는 세계

- 영화 <곡성>(2016)접촉에 관한 생각들





박 상 빈 / 수유너머N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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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최근 개봉한 나홍진의 영화 <곡성>에 관한 이런저런 단상들을 풀어놓았다. 이런 저런 단상들을 여과 없이 다루려 하기 때문에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 

 


1. <곡성>의 레퍼런스들

 

<황해>이후 조금은 길게 느껴졌던 나홍진의 휴지기 동안, 그가 <곡성>의 시나리오를 구상하면서 가장 많이 참조한 것은 두 개의 고전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인류사의 고전이라 할 만한 성경, 현대 스릴러 영화의 고전이자 정전이라 할 히치콕이 그것이라 생각한다(그리고 구로사와 기요시에 관한 혐의도 충분하다). 집요하리만치 인물과 사건에 관한 의심과 불신, 그리고 서스펜스를 조성하는 <곡성>의 내러티브는 히치콕의 그것과 빼다 박은 듯이 닮아 있다. 게다가 새에 관한 것, 즉 영화 속 곡성을 위협하는 존재로 등장하는 외지인(쿠니무라 준)의 거처에 급습한 종구(곽도원)가 수색 중에 보게 되는 조류도감집이라던가, 외지인의 주술적 기표인 까마귀, 종구의 얼굴에 난 새 발 같은 것으로 할퀸 것 같은 상처 등은 히치콕 영화가 보여줬던 새에 관한 공포에 대한 오마쥬라 할 만하다.


성경에 관해서는 두 말 할 것도 없다. <곡성>이 부활한 예수가 자신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의 의심에 관하여 한 말을 누가복음의 한 구절에서 인용하면서 영화의 문을 열어젖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강조는 인용자) 누가복음 2437~39

 

제자들은 죽어서 매장된 지 3일이 지난 뒤 자신들의 눈 앞에 서 있는 예수를 보고 당황을 금치 못한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는 보기만 하지 말고 만지라말한다. 보는 것, 즉 시각의 불완전성은 만지는 것, 촉각적 경험에 의해 보완되고 확언된다. 시각은 언제나 결여를 동반하고 있고 촉각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근대적 시각체계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이론들에 의해 촉각적 시각등의 개념어로 변주되며 종종 유토피아적으로 상찬되는 내용이다. 그러나 나홍진은 <곡성>에서 이 접촉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경험을 시각화한다. 이에 관하여는 조금 있다가 다루도록 하겠다.

 

뿐만 아니라 나홍진이 <곡성>에서 성경을 참조한 부분은 내러티브에서도 드러난다. 곡성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살인사건들에 대응하는 종구의 태도가 세 번의 부인’(베드로의 그것처럼)을 통해 극의 전체 내러티브를 구성되고, 이 내러티브에 의해 나홍진이 바라보는 궁극적인 세계가 드러나게 된다.

 

종구는 자신의 믿음을 세 번 저버린다. 우선 그가 저버리는 첫 번째 믿음은 근대적 의미의 과학에 대한 믿음, 근대국가가 담보하고 있는 상징계적 질서에 대한 믿음이다. 이 믿음은 왜놈이라는 민족적 적대의 항(쿠니무라 준)과 귀신에 관한 민간신앙이라는 민족 형성물을 포함하지 않는 상징계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부인된다. 그 다음, 종구가 부인하는 것은 민간신앙에 대한 믿음, 전통에 대한 믿음, 문화적 무의식 차원에서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민족적인 것에 관한 믿음이다. 종구는 직접적으로 고통받는 이의 얼굴과 마주하게 되면서, 즉 일광(황정민)의 살풀이 굿 때문에 온 몸을 뒤틀며 고통받는 딸을 마주하게 되면서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부정해 버린다.



 

그리고 마지막 부인이자 가장 중요한 부인.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육체적 감각에 대한 믿음, 모든 상징 질서가 무너져버린 세계 속에 던져져 육신의 감각에만 의존해 투쟁해 나가는 자기자신에 대한 믿음마저도 저버리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름 없는 여자 무명의 귀신(천우희)는 새벽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최후의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종구의 집으로 돌아가선 안된다고 만류한다. 그녀는 그의 손을 잡는다. 그 접촉이 일어나는 순간 종구는 어떤 확신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 확신은 치명적인 오인이었음이 드러난다. 즉 종구는 타자와 촉각적으로 직접 대면하는 것에 의해 갖게 된 바로 그 확신에 의해서 자신의 세 번째(육체적인, 그러므로 최후의) 믿음이 전적으로 부정되어 버린다. 그것은 자유의지에 따른 부인부정이 아니라 타율적이고 필연적인 힘에 의해 수동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다. 이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더 서술하도록 하겠다. 아무튼 그렇게 육체적 감각에 대한 믿음마저도 무너져 내려버린 그는 살아 있으나 살아있음이 무의미한 상태가 된다. 그저 살, 고기덩이일 뿐이게 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마태복음 2634

 


2. 물성의 수준에서는 동일한 시체와 고기의 세계

 

<곡성>은 이러한 종구의 세 번의 부인에 의해 이야기가 추동된다. 그렇게 전개된 이야기가 시각화 하고 있는 세계, 즉 나홍진이 바라보고 있는 세계는 지독하리만치 건조한 지옥의 일상적 풍경이다. 나홍진은 이 일상풍경을 저채도로 황량하게 담아내고 있다. 예고 없이 미쳐가는 사람들과 죽어가는 사람들, 나홍진의 세계 속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자연발생한다. 낚시를 할 때 미끼를 무는 물고기가 어떤 물고기일지 상관하지 않듯, 여기저기서 일상을 영위하고 있던 평범한 사람들이 순식간에 미쳐가고 살인을 저지른다. 물 속의 물고기들에게 낚시꾼의 존재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너머에 있는 존재이듯, <곡성>의 일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광기를 끌어올리는 낚시꾼인 그 자체는 인간의 이해 범위를 초과한다. 나홍진의 관점에서 우리들은 바로 그런 세계 안에 있다.

 

조금 벗어난 이야기일진 모르겠는데, 나는 종종 일상에서 그런 느낌이 든다(주로 술 먹고 다음날이긴 하다). 정말 물리적으로, 온 몸에 힘을 꽉 주고 버티고 서 있지 않으면, 살들이 중력에 못이겨 흘러내려 철푸덕하고 바닥에 떨어져 버릴 것만 같은 느낌. 아예 해체되어서 흘러내려버릴 것 같은 기분. 그런 기분이 들 때면 이렇게 내 살과 뼈가 서로를 잘 동여매고 있다는 느낌이 어떤 기적 같다거나, 혹은 아주 예외적인 일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런 느낌은 어떤 예고 없이 벌어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참사들을 미디어를 통해 전해들을 때에도 느껴지곤 했다. <곡성>을 볼 때 역시 나의 그 감각이 강하게 공명하고 있음이 느껴졌다(혹은 나홍진의 전작들, 가령 <추격자>에서의 살인행위와 일상행위를 구분 못하는 연쇄살인마라던가, <황해>에서 (불법)이민자에 대한 폭력들과 합목적적 행위로서 면사장(김윤석)의 숱한 살육행위들에서도 역시 그랬다).

 

영화의 초반부 종구는 살인사건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넥타이를 고쳐 매며 출동하려다가, 장모님의 만류에 못 이겨 장모님이 차려 준 아침밥을 꾸역꾸역 먹는다. 그의 딸 효진은 눈을 부비며 밥상머리에 앉아 명랑한 목소리로 누가 죽었대야?”라 묻는다. 마치 명랑만화의 한 장면 같다. 누군가의 죽음과 아침식사는 아마 동등한 가치를 지니는 행위인 것일까. 하나의 촌극처럼 느껴진다. “서두른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라는 장모의 말은 일견 진리처럼 들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홍진이 그려오고 있는, 혹은 우리들도 이해할 수 있는 바로 그) 세계와 그들과의 거리감(혹은 안전감각)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은 비가 내리지 않는 안전한 지붕 아래 앉아 있다. 아직까지는. 이후 종구가 본격적으로 나홍진이 바라보는 세계에 발은 내딛는 순간에도 종구는 우비를 고쳐 입는다. 


 

 


나홍진이 <곡성>에서 그려 놓은 세계는 참으로 어수선하고 이상한 등가관계를 상정한다. <곡성>에서는 사람들이 죽어나간 씬 다음 쇼트에서는 어김없이 죽은 동물들의 시체, 고기들이 전시된다. 이 몽타주를 등가관계가 아닌 다른 방식의 몽타주라고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 쇼트들의 연결은 물성의 수준에서는 사람의 시체나 동물의 고기나 동일하다는 것, 바로 그러한 나홍진의 세계관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몽타주인 것이다. 예고 없는 살인과 잔혹, 폭력들이 일상이 된 세계, 언제 살이 뼈로부터 분리되어 흘러내려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그런 세계. 나홍진은 아주 건조하고 또 어수선한 방식으로, 시체들과 고기의 등가관계를 영화 속 여기저기에다 흩뿌려 놓는다. 

 


3. 시체의 무게를 상기시키는 감각

 

영화에서 가장 섬뜩한 장면이라 부를 만한 것은 시체의 전시나 미쳐버린 살인마가 등장하는 장면이나, 혹은 변해버린 딸의 받아들일 수 없는 행동들을 보여주는 그런 장면들이 아니었다. 영화의 후반부, 종구(곽도원)일행이 외지인(쿠니무라 준)의 집을 급습한 뒤 그를 살해하는 데 실패하고 돌아가는 길, 종구들은 엄청나게 비가 쏟아져 내리는 그 길에서 우연찮게 무명의 귀신(천우희)을 쫓아가다가 도로로 굴러 떨어지게 된 외지인을 차로 받아버리게 된다. 종구 일행은 잠깐의 머뭇거림 이후에 모두 힘을 합쳐 그 외지인의 시체(육체)를 가드레일 저편으로 내던져 버린다.

 

이 장면은 영화에서 유일하게 오컬트적 정신의 힘이 아닌 육체의 물리적인 힘으로, 비의지적 광기에 의해서가 아닌 의식적인 확신으로 행한 살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섬뜩하다. 동시에 <곡성>에서 가장 이질적인 부분처럼 느껴진다. 죽음이란 상태가 일상적인 것이고 살과 뼈와 온전한 정신을 동여매는 일이 아주 예외적인 감각으로 변하게 된 세계에서, 주체는 외지인의 시체를 가드레일 너머로 떠밀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시체의 무게감은 퍼붓는 비만큼의 피로감과 함께 온전히 종구를 짓누른다. 필연적인 살인, 혹은 의지적인 타자 배척. 이 행위는 우리에게 (신학적인 의미에서건 정신분석학적 의미에서건) 원죄에 관한 관념을 활성화시킨다.

 


 

4. 이름 없는 유령 혹은 역사의 지위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영화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설명되지 않는 존재인 천우희는 과연 살의 무게를 지닌 존재일까? 대개 그녀를 의 자리에 있는 자, 마을의 수호령 등으로 이해하는 분위기이지만, 나는 영화를 보고 난 직후 그녀를 이름 없는 유령으로 알레고리화 된, 매번의 죽음이라는 실재했던 사건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데리다의 유령론을 다시 읽어봐야 할까?

 

일상적으로 죽음이 일어나는 세계라는 설정 속에서 이 무명의 귀신은 사건이 벌어졌던 장소에 다시 돌아온다. 그녀는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유일한 목격자이다. 그녀는 전통적인 한국의 여자 귀신들과 같은 하얀 소복(역전 앞과 같은 동어반복이지만, 이 단어가 강박적으로 반복하는 하얀이라는 의미에서 독특한 어감을 읽어낼 수 있기 때문에 이 단어를 사용하기로 한다.)을 입고 있지만, 영화는 그녀의 기원 자체에 의문 부호를 붙인다. 그녀는 어디에 사는지 어떤 이인지 설명하지(되지) 않는 존재이다.



 

무명의 귀신에 관하여 유일하게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은 그녀의 표면뿐이었다. 처음 등장할 때 그녀는 하얀 소복 위에 한국전쟁 무렵의 국군 군복을 걸쳐 입고 있다. 외지인이 훈도시를 입고 뛰어다녔었던 산중과 같은 장소에서 그녀는 하얀 소복만을 걸치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그녀가 종구의 앞에 나타났을 때 그녀는 알록달록한 가디건을 하얀 소복 위에 걸쳐 입고 있다. 그 마지막 가디건은 종구가 술집에서 목에 두드러기(<곡성>에서 인물이 악령에게 홀렸다는 징표로 작용한다.)가 난 여자를 발견했을 때, 그 여자가 입고 있던 옷이다. 재밌는 것은 그 여자가 입고 있던 그 알록달록한 가디건이 이만희의 영화 <삼포 가는 길>에서 백화(문숙)가 입고 있던 그 옷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또한 종구가 그 여자를 보게 된 그 술집에서 그 여자의 행동 역시 <삼포 가는 길>의 백화의 발랄함을 함축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러한 표면들은 나홍진이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상관 없이 그 자체로 표면 아래에 있는 것들을 지시한다.

 

이 이름 없는 유령에 대한 파악 불가능성은 관객들이 영화를 보며 믿음과 의심의 상태를 오가게끔 만드는 부분이다. 그것은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문화권의 상징적 질서가 여성을, 그리고 공식적인 역사가 기록할 수 없는 실재를 어떻게 타자화시키고 있는지에 관한 부분과 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녀는 강력한 물성의 세계인 <곡성>의 세계 속에서 언제나 잠재적일 수밖에 없는 것, 언제나 표면 아래에서 밖에 존재할 수 없는 것, 문자와 문자를(혹은 사건과 사건을) 잇는 질서 사이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은 이름 없는 유령, 매 번 되돌아오는 귀신으로서 그녀를 벤야민 식으로 말하자면 휙 지나간과거, “과거의 복원할 수 없는 이미지라 확신하게 한다. 종구의 확신처럼 치명적인 오판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지위를 공식적으로 기록된 역사가 포함하지 못하는 대문자 역사History(프레드릭 제임슨)의 지위라 주장하려 한다. 앞서 언급했던 그 가장 섬뜩한 장면이, 사실은 이 이름 없는 유령의 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 것이라는 쇼트의 연결은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파악은 접촉이라는 키워드와 만났을 때 유의미해진다. <곡성>에서 인물이 그녀와 접촉했을 때, 그녀를 만졌을 때, 그 주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우리의 인식능력 너머에 존재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루될 때 우리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종구는 앞서 언급했다시피 무명의 귀신이 그의 손을 잡았을 때 의심은 사라지고 확신을 가지게 된다. 그녀와의 접촉이 전달하는 섬뜩한 감각이 그에게 판단(혹은 상징화)을 강제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판단, 그가 획득한 믿음은 그의 세계 전체를 무너뜨리는 믿음이었다. 종구는 육체의 감각에 의해 강요당한 믿음으로 인해 그의 세계의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요컨대 그녀와의, 즉 그 매번의 죽음이라는 실재했던 사건의 표면과의 접촉이라는 행위가 경계의 파괴와 괴물성의 침투, 어떤 과잉의 감각을 선사하면서 디스토피아로서의 세계 자체를 온몸으로 느끼게 만든 것이다. 그녀가 손을 잡는 순간의 (아마도 사운드에 의해 조성된) 미묘하게 살떨리는 분위기는 이러한 종구의 내적 상황을 말해준다. 일광도사(황정민)가 입고 있는 훈도시를 보고도외지인과의 연관을 믿지 못했던 종구에게 (반대 방향이지만)확신을 부여해 준 것이 그녀와의 접촉이었다는 점은 이상하게 바보스럽지만 그래서 더 서글픈 자화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5. 그리하여 악과 선이 식별불가능하게 된 장소

 

<곡성>이 훌륭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접촉에 관한 성찰을 남겨 놓고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이러한 에 대한 사유 공간을 열어놓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까지의 단상 속에서 이라는 단어를 단 한 번 사용했다. ‘이 낚시꾼처럼 이 세계의 인간들을 낚아 올린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 그것인데, 그렇다면 나는, 혹은 <곡성>, 어떤 초월적 존재로서 을 상정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아직 판단이 확실히 서지 않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곡성>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심지어 <곡성>초월적 존재라는 키워드로 예수와 악마를 교접시키고 있기까지 하다. 초월적 존재로서의 부활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손과 옆구리에 난 구멍들을 만져보라 하며 자신의 실재함을 주장했었다. <곡성>의 마지막 부분 악마로 부활한 외지인은 손에 커다란 못 같은 것으로 관통당한 것만 같은 구멍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지점에서 왕년에는 강력한 마르크스주의 문학 비평가였지만 근년에는 종종 신학적 성찰로 돌아서고 있는 테리 이글턴이 떠오른다. 그는 최근의 이라는 책에서 의 성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쓴다 : “사탄 속에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듯, 악 자체 안에도 이 두 상태가 합일돼 있다. 악의 고결하고 금욕적인 천사 같은 면은 타락한 육신을 초월해 무한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런 현실 도피는 세상을 공격해 모든 가치를 박탈당한 공허한 상태로 만든다. 현실 도피는 세상을 무의미한 물질로 환원시키며, 그렇게 되면 악의 악마 같은 면은 무의미한 세상에 탐닉할 수 있게 된다. 악은 늘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상정하거나 적은 의미를 상정하거나, 둘 다 동시에 한다.”


테리 이글턴이 설명하는 이러한 은 나홍진의 그것과 높은 주파수로 공명하고 있는 것만 같다. <곡성>에서 외지인과 일광도사의 혼이 빠져나가 버릴 듯한 오컬트적 의식, 또는 도처에 존재하며 어디에도 위치하지 않는 이름 없는 유령의 위치와 같은 것들을 일종의 무한에 대한 추구라고 한다면, 이러한 금욕적인 천사 같은 면이 물성의 차원에서 시체와 고기를 동일한 것으로 전시하게끔 만드는 기제이며, 이로 인해 무의미해 진 세상은 낚시줄이 드리워진 강물 속과 같은 형태로 재구성되게 된 것이다. <곡성>은 그리하여 선과 악이 식별불가능하게 된 그런 지대로 우리들을 초대한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인식의 실패, 일상적 감각의 실패는 영화를 열어젖혔던 누가복음의 만짐이라는 키워드를 통해서 완성된다. 하지만, 세계는 무너져 내렸으나 우리는 여전히 거기에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어떤 성찰을 할 수 있을까. 어떤 윤리, 혹은 어떤 희열jouissance이 가능할까. 누가복음과는 달리 요한복음에서처럼 나를 만지지 마라noli me tangere”라는 말을 던진 그 예수에 관해 사유해 보아야 하는 것일까. 혹은 우리는 동의하지 않았음에도 으로서 상정된 세계 자체의 무미건조함에 거리를 두기 위하여 도리어 이 자체에 대해 깊이 사유해 보아야 하는 걸까.




+ 빼 먹은 부분

 

블로그에 쓰는 글이긴 하지만, 이러저러한 단상들을 접붙이기 하여 일관성 있게 한 편의 완성된 글을 만들어 보려고 시도하다 보니 중요한 지점이지만 누락시킨 부분이 있다. <곡성>을 딸 효진의 시점으로 읽는 방법에 대해서가 그것이다. 그녀가 주인공이었다면 아마 <곡성>은 미쳐가는 경찰관 아버지에게 성추행 당한 딸이 겪는 고통에 관한 영화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달리 말해 <곡성>의 실제 서사는 딸을 성추행한 경찰관 아버지가 사회적 지위건 뭐건 죄다 내던져 버리고 자기 합리화를 위해 귀신이니 악마니 하는 이야기들을 들먹이며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홍진은 <곡성>을 피해자에 대한 영화라고 했지만, 

정작 피해자는 전혀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독해는 충분히 유효하며, 또한 접촉이라는 어찌보면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는 키워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유의미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처럼 이렇게 해석의 관점을 다양하게 열어놓는 좋은 영화에 의해 여기저기서 흥미로운 비평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지금의 현상은 나를 조금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 굳이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꾸역꾸역 언급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더 좋은 독해를 접하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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