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인문학 집중세미나란?

 

인문학의 불온성은 몇 마디 구호가 아니라 꾸준한 탐구와 현실 모색 속에 있습니다. 집중세미나는 그런 탐구와 모색을 실천하는 작은 통로가 되고자 합니다. 집중 세미나 시간에는 강의와 연구 관련된 주제의 책들을 선정해서, 20주 동안 함께 부대끼며 읽고 질문하고 토론할 것입니다. 혼자라면 외롭고 힘든 공부겠지만, 친구들과 함께 한다면 어려움도 기쁨과 보람이 되리라 믿습니다.

 

  

트랙 I. 스피노자를 읽자!

튜터 박은선, 유영선

 

회차/ 일자

주제

교재 및 범위

1

9.10

양태의 존재론

『에티카』 1부. 정리1 ~ 정리14.

2

9.17

자유의지와 목적론

『에티카』 1부. 정리15~정리36. 부록.

3

9.24

평행론

『에티카』 2부. 정리1 ~ 정리13.

4

10.1

적합한 관념과 공통개념

『에티카』 2부. 정리13 ~ 정리49.

5

10.8

변용능력과 정서

『에티카』 3부

6

10.15

노예와 자유인

『에티카』 4부

7

10.22

영원성과 지복

『에티카』 5부

8

10.29

종교와 정치

『신학정치론』 (서문, 16~20장)

9

11.5

홉스 vs. 스피노자

『정치론』

10

11.12

불온한 인문학 워크샵

 신학정치론.jpg        에티카.jpg         정치론.jpg

 

 

 

트랙 II. 푸코와 신자유주의 통치체제!

튜터 김은영, 권은혜

 

회차/ 일자

주제

교재 및 범위

1

12.3

권력의 계보학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17-84

2

12.10

역사와 근원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85-168

3

12.17

민족 그리고 전쟁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169-220

4

12.24

육체의 인간에서 종의 인간으로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221-305

5

1.7

자유주의의 차이와 반복 : 통치론

『통치성과 자유』 68-127

6

1.14

삶과 포개진 죽음 : 권력론

『통치성과 자유』 130-184

7

1.28

적대의 전위 : 법·규범론

『통치성과 자유』 186-233

8

2.4

‘시큐리티’의 강화 : 현대도시격리론

『통치성과 자유』 238-281

9

2.11

공포와 비밀의 정치학

『통치성과 자유』 284-324

10

2. 18

에세이 발표

 

사회를보호해야한다.jpg       통치성과 자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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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적 대중지성 ‘불온한 인문학’ 2기를 모집합니다!

 

* 주요 프로그램

 

I. 스피노자 - 폭탄을 장전한 사유의 철학자 스피노자와 만나기

 

강의 주제

강의 내용

교재

1

9. 22

회차/일자강의 소개 및 오리엔테이션

2

9. 29

신에 대하여

양태의 존재론

『에티카』1부

3

10.6

자유의지와 목적론

4

10.13

정신과 신체

평행론

『에티카』2부

5

10.20

적합한 관념과 공통개념

6

10.27

정서와 예속

변용능력과 정서

『에티카』3부

7

11. 3

노예와 자유인

『에티카』4부

8

11. 10

인간의 자유

영원성과 지복

『에티카』5부

9

11. 17

정치에 대하여

종교와 정치

『신학정치론』

10

11. 24

홉스 vs. 스피노자

『정치론』

 

 

II. 푸코 - 신자유주의 통치체제의 불온한 탐험가 되기

 

 II-1 푸코 읽기

회차/일자

강의 주제

강의 내용

비고

1

12.1

담론과 권력

타자의 사유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2

12.8

지식의 고고학에서 권력의 계보학으로

3

12.15

권력의 미시정치학

지식-권력-신체

『감시와 처벌』

4

12.22

권력의 미시물리학과 훈육권력

5

12.29

생명권력

『성의역사1』

 

 II-2 신자유주의 통치체제의 경제와 정치

회차/일자

강의제목

내용

기본참고자료

6

1. 5

1강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자본주의의 역사적 형태 변동의 맥락에서 신자유주의 출현과 그 기본 축적메커니즘을 살펴본다

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

제라르 뒤메닐 외,

『자본의 반격』

7

1. 12

2강 통치성으로서 신자유주의(1)

푸코의 『안전, 영토, 인구』를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성립과정과 그 사회적 효과들 주체화의 맥락에서 규명한다.

미쉘 푸코,

『안전, 영토, 인구』

8

1. 19

3강 통치성으로서 신자유주의(2)

9

2. 2

4강 배제사회와 공안체제

신자유주의의 결과로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들을 검토하고 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의 정치적 특성을 분석한다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경향신문특별취재팀,

『한국의 워킹푸어』

10

2. 9

5강 반신자유주의의 정치학의

몇 가지 길들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사회운동과 정치적 활동을 사유하기 위한 이론적 자원들을 살펴본다

에티엔 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

자끄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이진경, 『코뮨주의』

 

 

 

III. ‘불온한 인문학’ 집중 세미나

 

트랙 I. 스피노자를 읽자!

회차/ 일자

주제

교재 및 범위

1

9.10

양태의 존재론

『에티카』 1부. 정리1 ~ 정리14.

2

9.17

자유의지와 목적론

『에티카』 1부. 정리15~정리36. 부록.

3

9.24

평행론

『에티카』 2부. 정리1 ~ 정리13.

4

10.1

적합한 관념과 공통개념

『에티카』 2부. 정리13 ~ 정리49.

5

10.8

변용능력과 정서

『에티카』 3부

6

10.15

노예와 자유인

『에티카』 4부

7

10.22

영원성과 지복

『에티카』 5부

8

10.29

종교와 정치

『신학정치론』 (서문, 16~20장)

9

11.5

홉스 vs. 스피노자

『정치론』

10

11.12

불온한 인문학 워크샵

 

트랙 II. 푸코와 신자유주의 통치체제!

회차/ 일자

주제

교재 및 범위

1

12.3

권력의 계보학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17-84

2

12.10

역사와 근원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85-168

3

12.17

민족 그리고 전쟁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169-220

4

12.24

육체의 인간에서 종의 인간으로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221-305

5

1.7

자유주의의 차이와 반복 : 통치론

『통치성과 자유』 68-127

6

1.14

삶과 포개진 죽음 : 권력론

『통치성과 자유』 130-184

7

1.28

적대의 전위 : 법·규범론

『통치성과 자유』 186-233

8

2.4

‘시큐리티’의 강화 : 현대도시격리론

『통치성과 자유』 238-281

9

2.11

공포와 비밀의 정치학

『통치성과 자유』 284-324

10

2. 18

에세이 발표

 

o 강 사 : 손기태, 정정훈, 정행복

o 세미나 튜터 : 박은선, 유영선, 김은영, 권은혜

 

1. “불온한 인문학”은 2011.9. 22.목 개강, 총 20주 40여 회(매주 강의1회 세미나 1회, 총5개월) 과정으로 구성됩니다.

 

2. 매주 목요일 오후 7시~10시에는 강의가, 토요일 오후 2시~5시에는 집중 세미나가 열립니다. 이 두과정은 꼭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부분 수강 불가)

 

3. “불온한 인문학”은 두 개의 트랙으로 진행됩니다. 10주 간 진행되는 트랙01에는 폭탄을 장전한 사유의 철학자 스피노자의 저서를 중심으로 한 강의와 세미나가, 다음 10주간의 트랙02에는 푸코와 신자유주의 통치체제의 경제-정치학을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진행됩니다.

 

4. “불온한 인문학”은 단지 강사의 강의만을 수동적으로 “듣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불온한 인문학”에 참여하는 이들은 스스로 텍스트를 읽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표현하는 쉽지만은 않은 과정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성 지식의 ‘온순한’ 소비자로부터 동료들과의 소통 속에서 자기 사유의 힘을 벼려가는 ‘불온한’ 생산자가 되길 바랍니다.

 

5. 이를 위해서 “불온한 인문학” 참여자는 강의를 들은 후 2회 이상 강의 후기를 제출해야 하며, 강의와 관련된 텍스트를 읽고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과 소통하는 세미나에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세미나 진행에는 2회 이상의 텍스트 발제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공부한 과정을 총괄하는 글쓰기 과제(에세이)를 제출해야 합니다.

 

6. 수강신청

정원 : 선착순 25명

신청기간 : 2011. 8. 8. 월요일부터

수강료 : 60만원, 입금 신한은행 434-04-354206 (예금주 : 김은영)

(*분납, 환불 불가합니다.)

*수강신청은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불온한 인문학' 게시판(http://nomadist.org/xe/bulin)에 신청글과 함께 연락처를 함께 남겨주세요.

 

7. 문의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http://www.nomadist.org)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실 대표 번호 (070)8263-0910

김은영 010-8334-4389, 권은혜 010-4515-2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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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회원인 오하나가 번역한 사카이 다카시의 <통치성과 자유>가 지난 달에 출판되었습니다.
그린비 블로그에서 퍼온 소개글 올립니다. (
원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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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통치성 개념을 중심으로 본, 우리 시대 권력과 배제의 지형도!


오늘날 지배적인 여러 이데올로기는 어떤 논증도 없이 자신이 승리한 것처럼 ‘유세’한다. …… 자본의 명령이 노골적으로 사람들의 생활을 좌우하여, 바닥이 드러난 사회보장예산을 가차 없이 삭감하고 저임금의 불안정 고용을 일상화시켜 노골적으로 ‘배제’의 폭력을 행사하는 지금,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작용을 해명하기 위한 이론과 이념은 하나같이 그 유효성을 상실했거나 ‘세련성의 결여’로 누차 거부되고 있다. 가령 맑스주의가 그렇다. 그리고 일찌감치 이러한 상황이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유세’를 더욱더 가능케 하고 있다. 이러한 잠식이 거듭될수록 우리의 무기력 혹은 무력감은 필시 심화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무력감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고 싶었다.(‘들어가며’ 중에서, 본문 15~16쪽)

『통치성과 ‘자유’』는 푸코 후기 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통치성’ 개념을 중심으로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를 분석하고 있다.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지금 어떤 힘이 우리의 신체를 관통하고 있는가?”, “우리의 신체는 어떤 방식으로 변용되고 있는가?”. 책의 모두(冒頭)에서 스스로 던지고 있는 이 질문들에 답하기 위해, 저자 사카이 다카시(酒井隆史)는 다양한 역사적․정치적 사례들을 들어, 오늘날 개개인의 신체를 관통하고 있는 불안과 공포의 정서의 근원이 신자유주의의 지배에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1970년대 이탈리아에서의 ‘오페라이스모’(노동자주의) 운동을 시작으로 빈부격차의 확대, 비물질적 노동의 확산, 경찰 만행, 시큐리티의 강화, 이민 배제, 게토화 등 현대의 다양한 문제들로 저자의 논의는 확산된다. 또한 이를 분석하기 위한 참조점으로 네그리와 하트, 들뢰즈와 가타리, 라캉, 기 드보르, 마이크 데이비스 등 다양한 현재적 논의들을 끌고와 신자유주의 권력의 작동 원리를 파헤치고자 한다.

이 책에서 참조하고 있는 여러 학자들의 논의 중에서 저자가 책 전체를 관통하며 중요한 참조점으로 삼고 있는 것은 푸코의 ‘통치성’ 논의이다. 1970년대 후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에서 제기된 ‘통치성’ 개념은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될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선취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최근 푸코 연구의 중심적 개념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 책은 이 ‘통치성’ 개념이 신자유주의 분석에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 주는 것과 동시에, 푸코의 후기 사상(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들, 『성의 역사』 2권과 3권)이 주요 저작(『말과 사물』, 『광기의 역사』,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1권 - 앎의 의지』 등)의 사유와 어떤 연관성과 차이점들을 지니고 있는지를 분석하면서, 푸코 사유의 운동성을 밝혀 주고 있다. 따라서 이 책 『통치성과 ‘자유’』는 풍부한 사례를 통해 신자유주의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제시하는 책일 뿐만 아니라, 후기 푸코 사상의 단절과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푸코 입문서’로서의 역할 또한 충분히 할 수 있는 책이라는 점에서도, 오늘날 한국의 신자유주의 연구와 대안 제시에 하나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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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놉티콘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를 뜻하는 'opticon'을 합성한 것으로 벤담이 소수의 감시자가 모든 수용자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감시할 수 있는 형태의 감옥을 제안하면서 이 말을 창안했다고 한다.

신자유주의에서의 ‘자유’와 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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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통치성과 ‘자유’』의 일본어 원제는 ‘자유론’(自由論)이었다. ‘통치성’이라는 개념이 차지하는 비중을 감안하여 국역본의 제목을 『통치성과 ‘자유’』로 바꾸면서 ‘자유’에도 따옴표를 쳤는데, 이는 이 책에서 ‘자유’라는 단어가 통상의 용법과는 다른 자유주의적 뉘앙스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에서 자유란 유토피아적 몽상이나 이념적 가치가 아니라 합리적 통치의 기술적 조건을 말한다. 즉, 애덤 스미스 식의 ‘자연적 자유’ 형태로든, 하이에크 식의 ‘비자연적 자유’로든 ‘자유롭게’ 스스로를 관리하라는, 혹은 ‘자유로운’ 소비자로서 자본에 복무하라는 명령을 의미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따옴표 친 ‘자유’가 어떻게 통치당하는 자들에게 내면화될 수 있었는지를, 신자유주의 권력의 ‘계보’를 파헤치면서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의 ‘1장’에서 저자는 중세의 ‘사목권력’(司牧權力, pouvoir pastoral)이 치안에 기반한 ‘국가이성’으로, 다시 사회에 기반하고 ‘인구’에 대한 통제를 목적으로 하는 ‘자유주의’로 전개되는 과정을 면밀히 추적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초기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일별하면서 신자유주의 통치성의 종별적 특징을 분명히 한다. 초기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 모두 ‘시장’이라는 관념을 토대로 통치를 합리화하려 하지만, 그 구체적인 양상은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시장을 준자연적인 것으로 보는 초기 자유주의와는 달리, “하이에크와 오르도학파의 통치적 구성주의”로 대표되는 특징, 즉 개입하여 구성해야 하는 존재로 시장을 본다는 점이 신자유주의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시장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시각은 통치 일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신자유주의는 통치의 합리성을 주어진 인간의 본성이 아닌, 의식적으로 고안된 행위 유형으로서의 ‘자기-지도’와 결부시키는데, 이것이 ‘불안과 공포’의 수동적 감정과 결합하여, 개개인과 집단의 능력 증진이 자본에 흡수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포획의 다른 한 편에서는 동시에 적나라한 배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빈자, 즉 ‘언더클래스’(Underclass)로 분류된 자나 범죄적 성향을 가진 것으로 프로파일링 된 자들은 위법행위가 발생하기 전이라도 사회적 리스크를 낮추기 위해 배제되어야 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또한 이 위험한 자들로부터 ‘사회’를 지키기 위해 ‘시큐리티’(security)의 관념과 미시적․거시적 감시 장치도 함께 발달하게 된다. 이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드러나는 ‘시큐리티’에 대한 과민,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 혹은 부유층 거주지역이 분명히 구분되고 사적 경찰에 의해 통제되는 오늘날의 도시 구획 등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작동 원리 ― 감시, 조작, 제로 톨러런스의 사회

사회적인 리스크를 관리하고 ‘시큐리티’를 유지하기 위한 격리와 배제는 동시에 감시와 조작에 의해 유지된다. 전자팔찌, 도시의 곳곳에서 통행을 가로막는 각종 게이트와 경찰들(혹은 사적 경찰), 생체 정보 확인을 거쳐야만 출입할 수 있는 건물들, 깊숙한 사적 영역까지 파고들어온 감시 카메라, 주름진 영역을 통제가능한 평면으로 만들어 버리는 인공위성의 감시까지. 저자는 일찍이 파놉티콘의 시선은 구체적․물리적이었고, 인간이라는 대상을 훈육하는 데 있어 잔혹하면서도 온정주의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의 총체적인 파놉티콘은 인간적인 요소를 벗어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전일적인 감시 속에서, 위치탐지용 팔찌를 찬 수형자와 ‘인텔리젠트 딱지를 단, 화장실에 다녀오는 시간마저 급료에서 차감당하는 자유인’ 사이의 차이는 무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전일적 감시의 확산과 더불어 ‘비밀수사’ 수법 또한 197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점도 오늘날 신자유주의 통치에 있어 특기할 만한 점으로 제시되고 있다. FBI의 비밀공작활동 예산은 1977년의 100만 달러에서 1984년 1,200만 달러로 급증했고, 이러한 양적 확대는 비밀공작이 표적으로 삼는 대상의 확대와 다양화라는 질적인 변화를 낳았다는 것이다. 이제 비밀수사는 사회의 거의 모든 자들로 대상을 확대했으며, 그 목표에 있어서도 제한이 없고, 목표에 열린(open-end) 경향을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수사가 범죄라는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범죄를 ‘조작’해 낼 가능성으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더욱이 이런 비밀공작은 “복잡한 기술, 조직적 프론트, 다수의 체포를 비롯해, 고도로 협력적인 활동팀에 의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실제로 있었던 ‘압둘스캠’ 사건의 사례를 통해, 그리고 영화 「스캐너 다클리」(A Scaner Darkly)를 통해 비밀공작이 어떤 규모로 조직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밀고자/정보원’이 되어 비밀조사에 활용되고 있는지를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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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캐너 다클리」의 장면.
"감시하라, 그리고 감시자를 감시하라, 감시자의 감시자를 감시하라…
…. 그러나 왜? 그건 사회가 항상 위협받고 있기 때문에, 보호되어야만 하기 때문에. 그러나 어떻게?" (『통치성과 '자유'』, 292쪽)

이렇게 감시와 조작에 의한 사회적 리스크의 관리는, 공공연한 정책으로 집행되기도 한다. 줄리어스 뉴욕 시장 아래에서 집행된 ‘제로 톨러런스’(Zero Tolerance: 사소한 위법행위에도 강력하게 대응할 때, 전체적인 범죄율을 줄일 수 있다는 ‘불관용’의 정책 기조) 정책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당시 뉴욕시 경찰본부에 취임한 윌리엄 브래튼(William Bratton)은 ‘불량배들’이 점령한 뉴욕을 다시금 ‘탈환’한다는 목표 아래, 노골적인 억압의 양상을 드러내었다. 스퀴지 오퍼레이터(교차로에서 정차중인 차의 유리를 닦고 팁을 받는 이들)와의 전쟁, 판잣집을 소거해 빈민을 도시 밖으로 내쫓는 작전, 수신을 할 수 없도록 8,400여 대의 시내전화를 개조하는 작업 등등, “곤란한 생활 상태에 놓인 사람들에게 전쟁의 분위기를 전하는” 작업이 ‘제로 톨러런스’의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범죄율은 감소했지만, 동시에 경찰 만행(police brutality)에 관한 불만의 목소리도 큰 폭으로 증가했다. 또한 특정 소수민족 사람들이 벌이는 행위나, 특정 지역에서의 대부분의 사소한 행위들이 처벌의 가능성을 띠게 되면서, 이러한 제로 톨러런스 정책은 ‘내부 식민지화’와 ‘신인종주의’라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통치당하는 자의 권리와 새로운 자유의 지평

자유는 ‘통치화’에 대항하는 우리의 가능성에 있다. 이는 언제나 ‘예외상태’를 정상상태로 사고하려 했던 것과 관련될 것이다. 일찍이 프롤레타리아와 룸펜프롤레타리아, 노동자와 ‘비행자’의 연대라는 비전은, 늘 주권에 의한 내적 경계선이 새겨진 추상적 인권과 시티즌십을 거절하며, 구체적인 ‘통치당하는 자의 권리’를 발판삼아 새로운 투쟁의 전망으로 나타났다. 봉기라는 자유의 형태. 이른바 아래로부터의 예외상태가 온전히 개방적 장으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자유가 사려 깊게 행사되어야 한다. 즉 반성되어야 한다. 윤리란 ‘자유가 취하는 반성된 형태’이다. 실로 이 윤리, 그리고 그와 관련 맺는 ‘자기’야말로 ‘영구적 반대파’, ‘무제약적인 권리 요구’를 통치 기술과 대치시키며 내재적으로 창조와 연결해 가는 것이다.(본문 370~371쪽)

저자는 감시와 배제로 인한 ‘위기를 체현하는 신체’를 짐 자무시의 영화 「고스트 독」을 통해 보여 준다. 게토에 사는 흑인 살인청부업자 고스트 독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뉴욕 도심지/빈민가에서 살고 있는 ‘배제된’ 이들의 세계를 그려 내고 있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이티 출신 ‘불법’ 이민자, 공원의 흑인 소녀, 거리의 래퍼들, 그리고 고스트 독과 함께 낡은 건물 옥상에 살고 있는 비둘기 떼……. 고스트 독은 이들과 함께 기묘한 공공성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이 공공성은 ‘인간 이하’의 존재들이 우연하게 구성한, 영화의 제목처럼 ‘개’하고나 견줄 수 있는 공공성이다. 허가증을 붙이고, 프로파일링하여 감시하고, 내쫓고, 섬멸하면 그만인 공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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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고스트 독」의 포스터
"'잘 안풀리는' 모든 것이, 결국에는 '잘 풀린다'. 이른바 '무질서가 '질서'를 낳는다'. 사법의 무질서는 어떤 것을 만들어 낸다. 그것은 '사회질서'이다."(같은 책, 340쪽)

이 위태로운 공공성은 결국 고스트 독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배제로 인한 위태로움을 고독한 수련의 장으로 만들어 낸 고스트 독은 결국, 공공성 속에서가 아닌 스스로의 고독한 윤리를 지키다가 죽고 만다. 사카이 다카시는 이 죽음을 “무딘 아름다움을 띠고 있지만, ‘개’죽음임에 틀림”없는 죽음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위태롭게 형성된 ‘통치당하는 자들’의 공공성은 어떻게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자유의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신체를 꿰뚫는 신자유주의 권력에 휘둘리지 않는, 행위의 내재적 힘으로서의 자유. 이 자유를 향한 길은 푸코가 말하는 ‘비판’, 즉 “자발적 불복종이자 성찰을 통한 비순종의 기법”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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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마디스트

이 번역문을 올리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다른 일들에 쫓기다 보니 까마귀즘(^^;;) 때문에 시간이 한참 흘러가 버렸네요.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에서는 3-4월 두 달간 조성천, 홍서연 선생님과 함께 프랑스어 강독 세미나를 했었는데요. 3월 17일에 읽은 3회차 강독 텍스트를 김민우님이 번역해 주셨습니다. 미셸 푸코의 유명한 텍스트입니다.

Michel Foucault, "Qu'est-ce qu'un auteur?", in Dits et écrits, tome I, Paris, Gallimard, 1994[1969], p. 789-821.


이 중 강독/번역된 부분은 텍스트의 내용상 핵심적으로 보이는 부분들입니다.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블로그 운영자





미셸 푸코, "저자란 무엇인가?"


 

(789쪽)

뱅센느 실험대학 연구소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는 미셸 푸코 씨는, 프랑스 철학회의 회원들 앞에서 다음의 논의들을 펼칠 계획이었다.


“누가 말하든 그게 뭐가 중요한가?” 이러한 무관심 속에서 우리 시대의 글쓰기가 지닌 윤리적 원칙, 아마도 가장 근본적일 원칙이 명확히 드러난다. 저자의 소멸은 비평의 영역에서는 이젠 평범하고 일상적인 주제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저자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일이 아니다. 비어 있는 공간으로서, 무관심한 동시에 강제적이기도 한 공간으로서, 저자의 기능이 실행되고 있는 자리들을 탐지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790쪽)

학술 모임의 보고


이 모임은 콜레쥬 드 프랑스의 6호실에서 오후 4시 45분에 열렸고, 사회는 장 발 씨가 맡았다.


장 발 : 오늘 여러분과 함께 미셸 푸코 선생을 만나게 되다니 정말 기쁩니다. 우리는 선생께서 여기에 와 주시기를 매우 기다려왔었죠. 혹시 늦으실까봐 걱정도 많이 했었고요. 하지만 선생께선 지금 이 자리에 와 계십니다. 따로 그 분을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 “진짜” 미셸 푸코 선생이십니다. <말과 사물>을 저술하고, 광기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바로 그 분입니다. 선생께 바로 마이크를 넘기겠습니다.


(796-7쪽)

푸코 : 하지만 저자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공허한 주장처럼 반복하여 외쳐대는 것으로는 분명 충분하지 않죠. 마찬가지로, 신과 인간이 공통된 죽음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무한정 되풀이하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고요. 필요한 것은 저자가 사라짐으로써 빈자리로 남게 된 공간을 찾아보는 일, 여기 저기 분포되어 있는 결여와 균열들을 눈으로 쫓아가보는 일, 그리고 저자의 사라짐이 출현케 한 자리들을, 자유로운 기능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일입니다.


저는 우선 저자의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나타나는 문제들을 짧게 몇 마디 말로 환기해보고 싶은데요. 저자의 이름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또한 그 이름은 어떻게 기능 작용할까요? 여러분께 해답을 제시해주는 대신, 저는 저자의 이름이 불러들이는 난제들 몇 가지만 지적하고자 합니다.


일단 저자의 이름은 고유 명사입니다. 그것은 고유 명사와 똑같은 문제들을 제기하죠. (여기서 저는 여러 가지 분석들 중에서 존 설의 분석을 참조합니다.) 분명히, 고유 명사를 순전히 지시작용만 하는 것으로 만드는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고유 명사는 (저자의 이름도 그러합니다만) 지시적인 기능 이외의 다른 여러 기능들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고유 명사는 지시, 몸짓, 누군가를 가리키는 손가락의 역할로 축소시킬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는 기술[記述]과 동등한 역할을 한다고도 말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가 “아리스텔레스”를 말할 때, 우리는 어떤 기술과 동등한 역할을 하는, 혹은 일련의 규정된 기술들과 동등한 역할을 하는 하나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그 낱말은 “<분석론>의 저자” 또는 “존재론의 창시자” 등의 기술들과 동등한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게 다는 아닙니다. 여기서 논의를 그칠 수는 없습니다. 고유 명사는 순전히 한 가지 의미만 갖는 건 아니기 때문이죠. 랭보는 <영혼의 사냥>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해서, 이 고유 명사에 혹은 이 저자의 이름에 의미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억지 주장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고유 명사와 저자의 이름은 기술과 지시라는 양극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해 있는 것입니다. 고유 명사와 저자의 이름은 그것들이 지명하는 자와 틀림없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지만, 지시의 방식으로도 기술의 방식으로도 그러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 ―또한 저자의 이름에 특유한 어려움들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선데요― 고유 명사가 지명된 개인과 맺는 관계와 저자의 이름이 그것이 지명하는 자와 맺는 관계는 동형적이지도 않고, 똑같은 방식으로 기능 작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798쪽)

결국 저자의 이름이란 담론의 어떤 존재 양식을 성격지우기 위하여 기능 작용하는 것입니다. 어떤 담론이 저자의 이름을 갖는다는 사실, 우리가 “이것은 이러이러한 사람이 저술하였다”거나 “이러이러한 사람이 저자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점을 의미합니다. 즉, 그 담론은 일상적이고 무관심한 말, 없어지는 말, 나타났다 사라지는 말, 즉각 소비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점을. 하지만 어떤 방식 속에서 수용되어야만 하고 주어진 한 문화 안에서 어떤 지위를 수용해야만 하는 어떤 말이 여기서 문제되고 있다는 점을 또한 말이죠.


우리는 결국 다음과 같은 관념에 이르게 됩니다. 곧 저자의 이름은 고유 명사가 그러하듯이 담론의 내면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생산한 구체적이고 외적인 개인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는 관념에 다다르는 것이지요. 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저자의 이름은 어떤 의미에선 텍스트들의 경계/한계로 달려간다는 관념, 그것은 텍스트들을 절단한다는 관념, 그것은 텍스트들의 멈춤을 따라간다는 관념, 그것은 텍스트들의 존재 양식을 드러내거나 적어도 그 양식을 특징짓는다는 관념에 다다르는 것이죠. 저자의 이름은 담론의 어떤 집합이라는 사건을 드러냅니다. 또한 그것은 어떤 사회와 문화 내부에서 담론이 갖는 위상과 관계합니다. 저자의 이름은 사람들의 주민등록/호적 속에 자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작품의 허구 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도 아니죠. 그것은 담론의 어떤 집합과 자신의 독특한 존재 양식을 처음으로 만들어내는 단절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것과 같은 문명에는 “저자”의 기능을 갖춘 일군의 담론이 존재한다고, 반면에 다른 문명들에는 그런 기능이 부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죠. 사적 편지에는 서명자는 있겠지만 저자는 없습니다. 계약서에는 보증인은 있겠지만 저자는 없습니다. 길거리 벽에 낙서된 익명의 텍스트에는 작성자는 있겠지만 저자는 없습니다. 따라서 저자 기능의 성격이란 한 사회 내부에서 어떤 담론이 갖는 존재 양식, 순환, 기능 작용을 뜻하는 것입니다.


(814절)

루시앙 골드만의 질문 :

저 역시 미셸 푸코 선생께서 강조하신 어려움과 맞부딪쳤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은데요. 작품을 정의 내리는 것의 어려움 말입니다. 개별적 주체와 관련지어 작품을 정의하는 일은 사실상 어렵고 또한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푸코 선생이 말씀하셨듯이, 니체 또는 칸트가, 라신 또는 파스칼이 문제가 될 경우, 작품의 개념은 과연 어디서 끝이 날까요? [어디까지가 그들의 작품이라 규정할 수 있을까요?] 그 개념은 발표된 텍스트에서 끝나야만 할까요? 아니면 그것은 세탁소 영수증까지 포함하여 발표되지 않은 모든 문서들을 포함해야만 할까요?


(817쪽)

미셸 푸코의 대답 :

게다가, 저는 저자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진 않았습니다. 전 그렇게 말하지 않았죠. 제 담론이 그러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는 것을 보고 좀 놀랬습니다. 이 모든 사항을 잠깐 다시 살펴보기로 하죠.


저는 작품들에서나 비평에서 찾아낼 수 있는 어떤 주제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요컨대 담론에 고유한 형식들을 위하여 저자는 삭제되거나 소거되어야만 한다는 주제 말입니다. 이걸 인정한다면, 제가 던졌던 물음은 다음과 같은 물음이었습니다. 작가 혹은 저자가 사라질 때의 규칙은 과연 무엇을 발견하게끔 하는가? 이 규칙은 기능-저자의 유희를 발견하게 해줍니다. 



번역 / 김민우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초중급 불어강독 세미나 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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