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강좌팀에서 알려드립니다!!!

이진경 선생님의 강의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을 신청하신 분들!

강의 듣기 전에 읽으면 좋을 텍스트를 이진경 선생님을 졸라 받았답니다.

예습을 하고 싶다는 분들도 있고~~

혹시...이 강의 뭐야? 도대체 뭘 공부하는 것이여? 하고 궁금한 분들도 많을 것 같아서요~~ 호호..

자.. 소개 나갑니다!!

보기만 해도... 막 배가 부르지 않습니까? 하하하.

물론... 이 책들을 모두 읽어 오라는 건 아니고요.

여건이 되시는 분들만 읽으세요.

우리에겐 앞으로도 새털 같이 많은 날들이 있을 것이며...

강의를 들은 후에.. 이 책을 읽는 것도 하나의 공부 방법이 되오니.. 너무 부담은 갖지 마세요^^

 

 (강좌 관련 문의 및 신청은 요기를 클릭하세요! http://nomadist.org/xe/apply)

 

강의를 듣는데 필요한 텍스트를 미리, 혹은 같이 읽고 싶다면서 소개해 달라는 분들이 있어서,

간단하게 관련 독서자료를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0. 먼저 강의의 바탕이 되는 ‘존재론’에 대해서, 다시 말해 ‘존재’ 개념의 이해방식이나 존재자의 이해방식에 대해서는

 

이진경, <코뮨주의: 공동성과 평등성의 존재론>(그린비), 1장과 2장을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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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온성이란 무엇인가?

 

이 강의에서는 ‘볼온성’에 대해 개념적으로 정의하고자 할 겁니다. 여기서 불온성은 무엇보다 먼저 ‘불온하다’는 감정 내지 기분과 결부된 것임을 안다면, 불온성을 기분 내지 감정의 차원에서, 혹은 그런 기분이나 감정을 야기하는 촉발/변용의 차원에서 정의되어야 함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야기하는 어떤 ‘불안’과 결부된 것이지만, 동시에 그런 불안을 야기하는 불온한 ‘웃음’과 결부된 것입니다. 그것은 안정된 예측이나 판단을 와해시키며 오는 어떤 ‘횡단’이나 변용과 결부된 것이며, 그런 점에서 지성의 작용과 관련된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저로선 무엇보다 흥미로운 주제인데, 불행히도 이에 대해서 정리된 텍스트는 없습니다. 다만 관련된 텍스트를 들자면, 맥락이나 의미는 다르지만, 먼저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까치)의 40절이 유용합니다(그러나 쉽진 않습니다^^;;). 좀 더 거슬러 가 키에르케고르의 <불안의 개념> 2장도, 역시 맥락이나 의미는 다르지만 참고가 될 듯합니다.


 

좀더 의미상 가까운 것은 오히려 정신분석학으로 보이는데, 프로이트의 초기 글 중 ‘불안신경증’에 대한 글과 후기의 불안 개념을 정리한 글 [억압, 증후, 그리고 불안](이상 < 억압, 증후, 그리고 불안>, 열린책들)이 유용합니다(뒤의 글은 좀 장황하고 기니, 필요한 부분을 찾아 읽으세요).

사실 이것만이 아니라 많은 책들이 관련되어 있지만, 모두 나열하는 건 무의미하겠지요. 일단 이 정도만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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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애인: 우주적 선물의 존재론

 

여기서는 “우리는 모두 장애인”이라고 주장할 터인데, 이 경우 장애인이란 우주 전체로 확장가능한 타자들에 기대어 존재한다는 점에서 ‘선물’과 관련된 존재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이 무엇으로 인해 쉽게 잊혀지는지, 그리고 모두가 장애인임에도 특정한 사람들만 장애인으로 간주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등을 말할 겁니다. 관련 텍스트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이진경, <코뮨주의>(그린비)의 1장 3절과 7장 3절

   조지프 샤피로, <동정은 싫다>(한국DPI출판부) 1장

   박경석/고병권, [‘우리는 모두 소수자다], 부커진 <알>, 1호(그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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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박테리아: 우리는 모두 박테리아다!

 

여기서는 공생진화와 공생체로서의 생명에 대한 생명과학이나 생태학의 연구를 시발점으로 하여, 개체화를 통해 구성되는 개체의 개념, 그리고 거기서 개체의 경계, 즉 ‘나’의 내부와 외부를 구획하고 유지하는 면역이란 메커니즘에 대해 다룰 겁니다.


 

 관련 텍스트는 마굴리스/ 세이건, <생명이란 무엇인가>(지호)의 4장, 5장 웨이크퍼드, 

 공생, 그 아름다운 공존>(해나무)

 타다 토미오, <면역의 의미론>(한울), 2장, 5장, 6장(안타깝지만, 읽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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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프레카리아트: 불안정한 자에서 불온한 자로

 

여기서는 노동자계급의 일부인 동시에 ‘정상적인’ 노동자계급이 아닌 계급, 하나의 계급인 동시에 하나의 계급이기를 중단한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해 존재론적 질문을 던질 겁니다. 노동자계급이 하나의 ‘계급’으로 ‘완성’되는 것을, 하나의 전체로 ‘완성’되는 것을 저지하는 성분. 이는 계급에 대한 존재론적 분석이 새로이 개시되어야 하는 지점일 겁니다.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논문들은 많지만, 이런 관점에서 참고할 텍스트는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일단 다음의 텍스트를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조원광, [유연화체제의 프롤레타리아트, 비정규직], 부커진 <알>, 3호(그린비)

   프레카리아트는 단지 비정규직만을 지칭하지 않는데, 특히 이주노동자 또한 고려되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조원광, [이주 노동자와 이동], 부커진 <알> 1호

 

 

 

5. 사이보그: 태초에 사이보그가 있었느니라!

 

사이보그는 기계와 유기체의 합체를 통해 정의되는 새로운 구성적 존재자입니다. SF적 형상을 통해 가시화되었지만, 사실 근본적으로 생각해보면 기계와 유기체가 합체된 사건은 인간이 도구를 들고 행동하기 시작했을 때 시작되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점에서 사이보그는 어쩌면 엥겔스 식으로 말해 원숭이가 인간으로 전화되는 지점에서 출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인간 아닌 것에 의해 그 본질을 획득하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그것은 인간을 뜻하는 현존재(Dasein)을 통해 존재의 문제에 접근하는 것과 반대로 인간 아닌 것을 통해 인간의 존재에 접근해야 함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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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대해서 유용한 텍스트는

  해러웨이, [사이보그 선언],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동문선)

 그렇지만 근본에서 거슬러 올라가 사고하기 위해선 오히려 다음의 텍스트가 중요합니다.

  엥겔스, [원숭이의 인간화에서 노동이 한 역할], <마르크스 엥겔스 선집>, 5권(박종철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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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온코마우스: 시뮬라크르의 윤리학

 

온코마우스는 유전공학적 변형에 의해 탄생한 존재자입니다. 하나의 생산물로서, 상품으로서 존재하게 되었고, 태어날 때부터 하나의 시뮬라크르였던 존재자지요. 암에 ‘걸리기 위해’ 존재하게 된 존재자. 처음부터 하나의 수단으로서 존재하게 된 이 존재자는 목적과 수단 이후에 시작된 존재를 통해 그 이전의 존재를 사고하게 합니다. 존재를 사유하기 위해 목적/수단의 관념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포스트모던한 존재자인 온코마우스는, 시뮬라크르가 원본을 초과하고, 원본과 무관하게 존재하게 된 시대에 시뮬라크르의 문제를 다시 사고하게 합니다. 그것이 존재론적 문제로서 제기되자마자 그것은 윤리학적 문제고 정치적인 문제임이 드러날 것입니다.


 

온코마우스에 대한 글은

해러웨이, [여성인간 앙코마우스를 만나다], <겸손한 목격자@제2의 천년...>(갈무리)

가 유명하지만, 또한 유용하지만, 온코마우스에 대한 얘기는 그다지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와 함께 온코마우스가 아니라 복제인간을 통해 유사한 문제를 제기한 리들리 스콧의 유명한 영화를 참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리들리 스콧, <블레이트 러너>


7. 페티시스트, 사물들과 만나는 존재론적 평면

 

부제가 이렇긴 하지만, 페티시스트의 문제는 사랑의 문제임을 미리 분명히 해두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미 동성애를 비난하는 것은 촌스러운 일이 된 지금, 이성애주의를 넘어 사랑을 사유하는 것은 하나의 문턱을 넘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왜 사랑을 섹슈얼한 이분법 주변에서만 사유해야 할까요? 아니 굳이 인간 간의 사랑으로 제한해야 할까? 인간과 동물의 간극을 넘어선 사랑, 나아가 인간과 사물의 간극을 넘어선 사랑으로까지 밀고 가야 하지 않을까요? 거기서 출현하는 것은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존재론적 평면상에 있다는 것과 더불어, 사랑이라는 것은 ‘연대의 쾌감’을 제공하는 모든 것임을, 그것이 모든 연대를 만드는 추동력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섹슈얼한 사랑에 대한 비판은

 버틀러의 유명한 책 [젠더 트러블](문학동네)을 참고하시면 좋고

 동물행동학적 관점에서 동성애, 트랜스젠더 등의 사랑들에 대해 다룬 책인

 러프가든, <진화의 무지개>(뿌리와이파리)이 재미있습니다.

 

 페티시즘에 대해서는

 맑스의 <자본> 1권에서 [페티시즘]에 관한 유명한 장을, 그리고

 

 프로이트의 유명한 글 [페티시즘(절편음란증)], <성욕에 관한 에세이>(열린책들)을,

 그리고 여성의 페티시즘을 다룬 중요한 책

 클레랑보, [여성의 에로틱한 열정과 페티시즘](숲)을 읽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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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마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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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톡 까놓고 이야기해 봅시다. 제가 여기서 라캉에 대해 말해도 될까요? 저 같은 사람도 ‘자격’이 있을까요? 아시다시피 라캉의 주저인 『에크리』는 여전히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난해한 도식과 말로 뒤덮인 그 책은 벌써 꽤 오랫동안 ‘근간’이라는 말에 묶인 상태이지요. 저는 『에크리』를 전혀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외국어에 완전히 까막눈인데다 사전을 뒤집으며 책을 읽을 만큼 바지런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나마 각종 라캉 개론서를 통해 『에크리』의 악명을 곁눈으로 겨우 확인한 정도라고 할까요. 불어의 기초는커녕 영문 독해력도 갖추지 못한 제가 언감생심 라캉을 넘보는 건 우스운 일일 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제 라캉 독해는 ‘문자 그대로의 라캉’에 도달하기는커녕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더듬는 이야기가 되기 십상이겠지요. 솔직히 말해서 저는 아직도 라캉을 잘 모릅니다. 정신분석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심리학에 조예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 방면에 내세울 것도 없네요. 라캉의 유일무이한 번역서인 『세미나11』을 탐독하고 있다지만 정말 딱 거기서 벽에 막히는 정도입니다. 애매한 말로 단언하는 라캉의 발화는 인정사정 보지 않으니까요. 제 『세미나11』을 펼쳐보면 그리 두껍지 않은 책에 노랗고 빨갛게 줄 쳐지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만큼 모르는 것 투성이란 말이겠지요. 저는 (라캉의 녹음된 음성을 들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라캉의 걸걸한 목소리에 의지해서 겨우겨우 라캉의 흔적을 쫓고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의지하기엔 그마저도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지만 말이죠. 억독도 이런 억독이 없을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당신이 말하는 라캉의 권위가 고작 그것에 의거한 것이냐고, 그건 결국 라캉에 대한 맹신이 아니냐고 따져 물을 수 있겠지요. 틀린 말이 아닐 겁니다. 저는 정말 ‘고작 그것’에 의거해서 라캉에 대해 말하려는 참이니까요. 멀리서 부르는 라캉의 선의를 믿지 않고는 저의 무능력한 라캉 논의는 한걸음도 전진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라캉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일반적인 조건으로 따진다면 아무래도 저는 실격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겠네요.

  그런데 다른 누군가는 오히려 논의에 있어 자격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자신이 이해한 바를 이야기해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주변에 충분히 많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와 마주쳤을 때, 사람들은 스스로를 옹호하며 그런 논리를 펼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므로 저의 무지에도 불구하고 저 역시 라캉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옹호하실 분이 계실 겁니다. 어쨌든 저는 라캉과 관련된 몇몇 개론서를 읽었고 정신분석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었다는 이유를 거기에 덧붙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일반적인 인정을 통해 제가 말했던 ‘자격’의 문제가 충족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런 식의 인정은 자격의 문제를 잠시 보류하는 것일 뿐일 겁니다. ‘보류’가 자격에 관한한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운전면허를 갱신하듯 자격 문제에 있어 근본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자격은 언제나 타자에 의해 부여(인정)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임시적이며 항상 타자를 향해 되물어져야 하는 것이지요. 자격은 개인이 무언가를 갖추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 갖추어짐의 위치에서 탄생하는 ‘주체’의 문제인 것입니다. 자격과 관련해서 통용되는 조건들이 무의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격의 주체는 개인이 갖춰야할 조건을 기준으로 결정되기에 앞서 항상 타자의 지점, 즉 타자의 욕망과 관련된 지점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격은 누군가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라는 통속적인 격언은 그런 의미에서 자격이 타자의 욕망과 관련해 ‘스스로를’ 증명하는 것이라 읽어질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결국 라캉을 읽고 라캉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격이란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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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이미 라캉의 선의를 믿으면서 논의를 진전시켜보리라 공언한 바 있습니다. 자칫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는, 실제로 종교적으로 보이는 이 선언은 사실 자격의 문제에 관한한 아주 중요한 지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자격의 문제가 (타자의) 욕망의 문제로 이어지는 이상 라캉에 관한 자격은 라캉의 욕망을 가로지를 필요가 있지요. 분석가의 자격을 결정하는 교육 분석이 그러하듯이, 라캉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라캉의 욕망과 대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라캉은 과연 무엇을 욕망할까요? (이 질문에 도달한 사람은 이미 라캉의 욕망에 직면한 셈이겠지만) 그것은 바로 분석(가)의 욕망이며 정신분석을 계시한 프로이트의 욕망입니다. 라캉은 라캉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만)은 프로이트주의자임을 공언한 바 있지요. 그는 프로이트의 선의를 믿고 정신분석을 계시한 프로이트의 자격을 긍정함으로서 프로이트로의 회귀를 성공적으로 이행해냈습니다. 프로이트의 욕망 앞에서 라캉은 프로이트의 토대가 됨으로써 프로이트를 논할 수 있는 자신의 자격에 대한 검증한 셈입니다. 이는 영구적인 자격이 아닐 겁니다. 욕망 앞에서 무엇을 욕망하는가를 묻는 한에서 생겨나는 임시적인 자격입니다. 그야말로 ‘자격의 주체’가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하지요. 앞서도 언급되었지만 임시적이라는 사실이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격 문제에 있어 본질적인 것이었지요. 정신분석에 관한 박사 학위가 프로이트를 논하는 라캉의 자격은 확증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언뜻 충분해 보이는 자격은 국제정신분석협회가 (라캉의 진술대로라면) 라캉을 ‘파문’함으로써 무효인 것으로 밝혀졌지요. 라캉의 자격은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세미나를 통해) 행위로서 반복하였을 때에만 확인됩니다.


세미나는 정신분석의 실천 자체의 일부를 이루며, 그 실천 내부에 있으면서 그 실천을 이루는 한 요소, 즉 정신분석가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세미나11』, 13쪽


  라캉의 세미나가 라캉이 기존에 하던 것을 재개하는 것일 뿐이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완전히 새로운 단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하나의 실천으로서 자신의 자격을 되물었기 때문입니다. 반복되는 세미나는 프로이트의 욕망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난처한 토대를 드러냅니다. 라캉은 말합니다. 진리는 프로이트가 가진 무언가다. 계시자로서 프로이트는 확실성의 토대가 되는 불가능한 원인에 다름 아닙니다. (프로이트가 분석에서 매번 발견하는 무의식의 원장면이 바로 그 불가능한 원인이지요.) 라캉은 바로 그 지점에 자신의 자격을 놓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합니다.

  

진리란 곧 진리를 뒤쫓는 무엇입니다. 또한 진리는 바로 악타이온을 뒤쫓던 개들처럼 여러분이 제 뒤를 쫓아 달려가는 곳이지요. 아르테미스 여신의 은신처를 찾게 되면 저는 아마도 사슴으로 변할 테고 여러분은 저를 잡아먹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에겐 아직도 시간이 좀 더 남아 있습니다.

위의 책 , 2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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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젠 결론을 지을 시간이네요. 죄송하게도 쓸데없이 길기만한 자격에 관한 논의였습니다. 변명일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그저 라캉의 행위를 반복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저의 자격을 긍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불가능한 길이기 때문이지요. 라캉의 욕망에 제가 주체로서 응답하는 이상, 저는 저의 끝없는 무지에도 불구하고 저는 라캉에 대해 말할 자격을 갖춘 주체로서 발견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제가 아니겠지요. 무의식이 거기에 있으므로 거기에 가야한다는 프로이트의 선언을 따라 누군가는 파편과 같은 저의 자격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라캉의 선의를 믿고 논의를 진전시키기엔 라캉의 목소리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로렐라이의 노랫소리를 닮았습니다.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이지요. 파도와 바위 앞에 자살적으로 맞서는 행위, 그래서 논의의 진전은 아무래도 다음을 기약해야할 것 같습니다. 분석이란 무엇인지, 선의란 무엇인지, 뭐든 만나야 할 것이라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겠지요. 억압된 것이 회귀하듯이 말입니다. 이상 열혈 라캉주의자 박모군이었습니다.



글 / 박모군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라캉 강독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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