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벤사이드(Daniel Bensaid, 1946-2010)

 

 

몇 해 전 모스크바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늦은 밤, 모스크바에서 가장 화려한 대로 중 하나인 트베르스카야 거리에 수많은 인파(주로 노인들)가 몰려드는 것을 보았다. 느린 걸음으로 행진하던 그들은 붉은 깃발을 들고 있었고, 그 가운데는 책이나 영화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레닌의 사진도 걸려있었다. 한 피켓에는 “레닌의 당, 인민의 힘”(구 소련 국가의 가사)이란 문구도 적혀 있었다. 러시아 공산당의 기념 행진이었다. 나는 그제야 그 날이 10월 혁명 기념일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잠시 흥분과 감흥에 사로잡혔던 내게, 그 광경을 함께 지켜보던 어느 러시아 젊은이의 한 마디는 우리 시대의 아이러니를 증명해 주는 것 같았다. “때가 어느 땐데 아직도 레닌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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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조국’ 러시아에서도 레닌의 복귀는 아주 느린 속도로, 때론 구식 공산주의자들의 생경한 구호 속에, 때론 당과 무관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충실한 이론가들 사이에서만 대단히 조심스럽게 이뤄지고 있다. 사정은 트로츠키도 마찬가지다. 소비에트 연방이 공식적으로 소멸되면서 트로츠키의 저작들이 속속들이 복간되고 관련 서적들이 출판됐지만, ‘체제화된 혁명’이 남긴 피로는 혁명에 관해서라면 그 어떤 기억도 상기시키는 걸 주저하게 만들었다.

 

레닌도 트로츠키도 기억하기 ‘난감한’ 지난 역사일 뿐이다. 그런 러시아가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혁명의 추억’을 되살려낸 것은 바로 얼마 전부터이며, 지젝을 위시한 서구의 새로운 좌파들이 러시아에 소개된 이후의 일이다. 올해 사망한 다니엘 벤사이드의 이름도 그 곁에서 자그마한 반향을 자아내고 있다. 이들과 더불어 레닌과 트로츠키, 그리고 혁명의 오랜 추억들이 혁명의 조국에서 ‘낯선 기억’의 딱지를 붙인 채 재조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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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이라는 사건

 


다니엘 벤사이드는 프랑스 트로츠키 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이미 열여섯 살에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한 후 줄곧 좌파 혁명 운동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런 벤사이드에게 레닌을 되살려낸다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은, 이제껏 그가 몸담아 왔던 혁명 운동의 당연한 대의에 해당하는 일이다. 물론, 혁명의 ‘빛나는 추억’을 되풀이하고 기념하는 것으로서 레닌의 반복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벤사이드가 되풀이하고자 하는 것은 ‘레닌의 추억’이 아니라 ‘레닌이라는 사건’, 레닌을 통해 재점화되고 불러일으켜질 수 있는 혁명이라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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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으로서의 혁명을 사유하기 위해 벤사이드가 참조하는 것은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은 <역사 철학 테제>(1940)에서 근대의 시간을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이라 정의했는데, 이는 현실을 계량 및 예측 가능성을 통해 파악하려는 근대적 사유의 특징을 보여준다. 빈 상자를 쌓듯 시간을 적절히 배분하거나 이어붙일 수 있다는 생각은 현실 과정이 응축점 없이 단순히 산술적으로 조합되는 매개물이란 표상에 기초해 있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모순들이 아무리 결집되더라도 혁명이라는 사건은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무너질 정도로 높게 쌓인 블록들을 해체시켜 바닥에 깔면 위험성이 제거되듯 시간적으로 응집된 모순들도 개별적으로 해소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현실의 과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누적되고 중첩되는 모순들은 쉽사리 해소될 수 없이 뒤얽혀 폭발의 순간을 향해 진전한다. 그것은 미리 계산할 수도, 예고할 수도 없는 순간의 사건이다. 혁명을 통과하는 현실은 이전과는 다른 이질적인 시공(時空)을 열어젖힌다. 그러므로 벤사이드에게 혁명은 ‘정상적인’ 현실 과정을 갑작스럽게 폭력적으로 중단시키고 변형시키는 급변의 순간을 말한다.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1921)나 데리다의 <법의 힘>(1990)을 접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논의를 굳이 벤사이드를 통하지 않고도 이해할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좌파 진영에서 나왔던 비판적 반성의 일부는 1917년 혁명을 제도나 당조직, 국가 형태의 차원이 아니라 사건의 형태로 되돌려야 한다는 데 바쳐졌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을 스탈린의 관료제 국가 장치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취해진 불가피한 판단이기도 했다. ‘실패한’ 혁명을 되살리기 위해 혁명의 기원으로 소급해 들어가 ‘실패한’ 지점들을 캐물었을 때, 늘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제도와 조직, 국가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미처 다루지 못했고 스탈린이 실효적으로 작동시켰던 지점이며, 레닌은 그 사이에 ‘애매하게’ 끼어있었다. 국가를 타도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활동했던 레닌이 국가를 떠맡아 운영해야 하는 위치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지난 90년대에 좌파 진영에서 레닌에 대한 언급이 금지되었던 까닭이 여기 있다. 그러나 벤사이드는 좌파의 좌초 지점 역시 바로 거기, 레닌의 이중적 입장을 분석하고 읽어내기보다는 사유하지 않고 회피해 버렸다는 사실에 있다고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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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알랭 바디우는 역사적 공산주의의 실패를 경직된 일당 전제주의로부터 찾는다. 하지만 군대같은 규율로 무장한 당조직은 내부의 민주적 요소들을 갉아먹고 고사시킴으로써 결국 공산주의마저 파멸시켰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자크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를 국가의 형태로부터 찾지 않는다. 정치의 모든 제도화된 형태는 일종의 자격 부여 체제로서 ‘배제’를 통해 운영되기에 부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바디우나 랑시에르는 혁명과 민주주의를 사건적 계기 속에서 사유한다는 점에서 벤사이드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조직과 형태, 국가 등의 제도적 차원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태도가 혁명을 구체적으로 사유하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소련의 경험을 반성하며 좌파가 모든 책임을 당과 국가에 미루고 한발 물러서는 동안, 우파는 그 ‘오물의 한 가운데’에 들어감으로써 결국 권력을 장악해 버렸다(그 치명적 결과가 신자유주의의 전성시대다). 제도를 비판하며 실패의 교훈을 되새기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비판과 성찰의 '의연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혁명은 어느새 신기루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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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모든 지점에서 정치를 시작하라

 


좌파의 이런 태도는 역사적으로 유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멘셰비키가 취했던 이중 혁명론 역시 이런 논리 속에서 재구성된다.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1단계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고, ‘성숙한’ 자본주의 국가를 이룰 때까지 부르주아지에 조력한 다음 궁극의 2단계 혁명, 공산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멘셰비키의 입장에서 우리는 좌파의 현실 회피주의를 찾아낸다. 1905년 당시, 혁명은 예측 가능한 역사적 수순이므로 부르주아지가 그 밑바탕을 마련해 줄 때까지 기다리라는 입장은 현재의 좌파가 취하는 의연함과 얼마나 멀리 있는가. 적들에게 권력을 순순히 양도하고 ‘혁명의 이론에 따라’ 역사의 컨베이어 벨트가 혁명을 전달해 줄 때까지 우리는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가. 벤사이드는 말한다. “당의 매개를 제거하라. 그러면 당신은 무(無)-당의 일당인 국가를 갖게 되리라!”(<영원한 스캔들>) “당(운동, 조직, 연맹, 당 등 주어진 이름이 무엇이건 간에)이 없는 정치란 대부분의 경우 정치 없는 정치로 귀결한다.”(<도약! 도약!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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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사회주의의 좌절은 분명 경화된 당조직과 부패한 관료제 국가에 기인한다. 하지만 이런 사실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당과 국가를 전혀 배제해 버린다면 그것은 정치의 파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일상의 모든 곳에서 정치가 작동한다고 외치는 좌파들의 목소리가 옳은 것과 마찬가지로 전통적 정치의 장인 제도에서도 정치는 여전히 작동 중이기 때문이다. 레닌이 호출되는 자리가 바로 여기다. 혁명을 향해 달려간다면 그 어떤 곳도 빼놓아서는 안 된다. 정치는 현실의 모든 지점에서 고려돼야 하고, 어떤 순간에서도 터뜨려질 수 있는 가능성을 연구하는 가운데 이뤄진다. 혁명이라는 사건, 도약을 마주치기 위해 우리는 임의적으로 방기하는 어떤 순간과 장소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벤사이드의 이 주장에서 우리는 연속 혁명(트로츠키)의 반향을 듣는다.

 

 


지금 좌파는 대중을 조직화하는 문제에서 물러나 관조적 태도를 취하는 데 익숙하다. 당과 국가라는 골치아픈 문제와 만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좌파가 사건으로서의 혁명을 근본에서 다시 사유해야 한다면, 어째서 당과 국가는 예외로 두어야 할까. 특히 조직화의 첨점으로서 당에 관해, 좌파는 처음부터 다시 사유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지금 여기에 레닌을 불러내, 다시 그와 마주쳐야 하는 절실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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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진석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 2010년 12월 중앙대학교 대학원 신문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제목과 구성을 약간 바꾸어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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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정세와 혁명의 주체 - 전쟁과 혁명 사이, 레닌은 무엇을 사유하였나?

- 에티엔 발리바르의 <전쟁이 규정한 정치에서의 철학의 계기: 1914년-1916년의 레닌>에 대하여

 

 

이제 레닌의 귀환은 부인될 수 없는 사실이 된 것 같다. <레닌에 대해 말하지 않기>(사이먼 클락 외, 2000)가 출간될 당시만 해도 전혀 관심이 되지 못했던 레닌이 어느덧 우리 시대의 지적 스타 지젝의 ‘레닌의 제스처를 반복하자’는 구호와 더불어 대한민국 진보 지식계의 뜨거운 관심사가 되었다. 지젝의 레닌론인 <혁명이 다가온다>(2006) 이후 레닌에 대해 쏟아지는 국내외 저작들, 특히 한국의 연구자들이 중심이 된 연구서의 출간이 활발해졌다. 이제 레닌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반자본주의와 혁명을 논의하는 것은 시대에 뒤쳐진 일처럼 보이는 시절이 도래한 것 같다.

 

그러나 레닌의 귀환을 경축하기에 앞서 우리는 ‘어떤’ 레닌이 돌아왔는지 먼저 물어야 한다. 우리 시대에 ‘무엇을 하기’ 위해 레닌을 다시 읽어야하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발리바르의 <전쟁이 규정한 정치에서의 철학의 계기: 1914년-1916년의 레닌>(<레닌 재장전> 수록)은 흥미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정세의 철학자, 레닌

 

발리바르의 텍스트는 1차 대전을 전후하여 레닌의 사유가 변화되는 과정을 추적하며 그 안에 있는 복수적 경향들 -심지어 상호 대립되는 경향들-을 분석한다. 여기서 발리바르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레닌에 있어서 ‘정치’, ‘철학’, ‘전쟁’이라는 세 가지 단어가 서로 관련을 맺는 양상이다. 레닌에 대한 논의에서 많이 다루어졌던 이 주제는 종종 철학(또는 이론)에 대한 정치(또는 실천)의 우위, 전쟁에 대한 정치의 우위라는 테제로 정리되곤 했다. 그러나 발리바르는 레닌의 사유를 보다 면밀히 이해하기 위해서 이 세 가지 항(정치, 철학, 전쟁)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파악해야한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 그는 그 동안 레닌에 대한 논의에서 관련되지 않았던 두 항, 즉 레닌에게 있어서 철학과 전쟁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묻는다. 그리고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1914-16년 사이의 레닌을 주목해야한다고 말한다.

 

이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1914년)이 발발한 이후 러시아혁명(1917년)이 발생하기 바로 직전까지이다. 이전에는 겪어 보지 못했던 격변의 사건들이 연속되는 이 시기가 어떻게 레닌의 사유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이 시기에 나타난 레닌의 변화는 “모든 혁명은 ‘순수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집약된다. 다시 말해 역사발전 법칙에 따른 순수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1915-16년에 작성된 레닌의 텍스트에는 경제적 진화주의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1916년 말-1917년초 레닌의 저술에서는 이러한 진화주의적 사고가 근본적으로 수정되었다고 말한다.

 

어떻게 수정되었는가. “이제는 모든 역사적 발전이 ‘불균등한’ 것으로 이해됐을 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정치적 영역의 복잡성을 ‘경향들’의 논리로 환원할 수 없음이 드러났다.” 혁명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극점에 도달해 모든 사회적 갈등이 계급투쟁으로 환원된 결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다기한 정세적 조건 속에서 전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확실히 [레닌의 사유에서] 역사철학의 선험적 전제가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특히 레닌 자신이 고수한 세계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관점에서 이런 전제가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 선험적 전제는 ‘구체적 상황들의 분석’이라는 전략적 ‘경험주의’, 즉 혁명 과정에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투쟁이 (‘평화적’이든 ‘폭력적’이든) 다양한 형태로 결합되기 마련이며, 한 투쟁 형태가 또 다른 투쟁 형태로 이행해 간다고 보는(그래서 혁명적 이행에는 고유한 [정세들의] 지속과 연속되는 모순이 문제가 된다) [레닌의] 경험주의와 공존하며 (양자 간의 극단적인 긴장을 감수한 채로) 서로의 결합을 추구했다. -<레닌 재장전> 중에서

 

위의 인용문은 발리바르가 파악하는 레닌 ‘철학’의 요체다. 이 문장에서 레닌은 혁명을 다양한 모순들과 복수의 계기들이 응축된 정세로부터 사유하는 정세의 이론가로 나타난다. 이는 혁명을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만들어내는 객관적 운동의 결과로 파악하는 경제주의와 대결하는 사유이며,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면 사회적 갈등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계급투쟁으로 환원된다는 단순화된 계급투쟁론과도 맞서는 사유이다. 이것이 바로 발리바르가 레닌을 다시 읽음으로써 오늘날 맑스주의 이론진영으로 소환하고 싶었던 그의 모습이다.

 



 

 

전쟁, 혁명, 대중: 혁명적 상황과 혁명적 주체

 

혁명에 대한 이와 같은 레닌의 사유는 그의 지적 발전을 표시하는 지표인데, 이는 전쟁의 경험을 거치면서 형성된 것이었다. 1914년 이전까지도 레닌은 ‘확고부동한 교리와 철학적 입장을 견지한 인물’이었다고 발리바르는 말한다. 그러나 1914-16년 사이, 즉 전쟁에서 혁명으로 이어지는 독특한 역사적 공간은 레닌의 사유에 새로운 경향을 도입하게 했다. 전쟁의 경험은 레닌에게 혁명의 조건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뿌리부터 다시 하도록 강제했다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전쟁에 의해 촉발된 혁명의 조건에 대한 레닌의 성찰이 어디로 나갔는지를 분석하기 위해, “철학노트”에서 전개된 레닌의 클라우제비츠 독해를 분석한다. 레닌은 클라우제비츠를 헤겔과의 연관 속에서 읽음으로써, 전쟁과 계급정치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벼려냈다. 그 결과 그는 결국 전쟁은 정세 속에서 사유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정세는 대중이라는 집단적 행위자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는 혁명적 주체의 문제를 레닌이 다시 사유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세란 단순히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라는 객관적 조건의 효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다. 정세는 언제나 대중들과 연관되어 있다. 이는 전쟁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국가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대중들의 힘을 이용할 수밖에 없지만, 장기적으로 이 대중의 힘은 국가의 통제를 초과할 수 있는 것이 되기도 한다. 레닌은 이러한 대중적 힘의 가능성으로부터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적 내전으로 전화시키자”라는 주장을 할 수 있게 된다. 전쟁 내에 존재하는 계급투쟁의 계기를 첨예화함으로써 전쟁(제국주의 전쟁)에 맞서는 전쟁(혁명적 내전)을 구성하는 계급정치를 사유한 것이다.

 

 

 

 

대중의 힘이라는 계기를 통해 전쟁을 계급정치의 연장 속에서 파악하게 된 레닌은 전쟁의 생산성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전쟁이 사회주의를 생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리바르는 여기서 어려운 질문을 하나 던진다. “사회주의는 전쟁을 막을 수 없었는데 전쟁은 어떻게 사회주의를 ‘생산’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발리바르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하다. 전쟁이 조성하는 것은 혁명의 성공이 아니라 혁명적 상황일 뿐이라는 것이다. 전쟁 속에서 대중이 일으킬 수도 있는 반란은 언제나 잠재적이라는 것, 역사적으로 다양한 계기들의 중층적 결합 하에서만 그것이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을 뿐이다.

 

발리바르는 전쟁의 경험이 레닌의 혁명 개념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고 파악한다. 발리바르의 레닌 독해는 혁명의 정치를 위해 오늘날 좌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되묻는 효과를 발휘한다. 혁명적 상황은 객관적 토대가 자동적으로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혁명을 실천할 순수한 프롤레타리아트도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세 속에서 열리는 혁명적 상황을 실제의 혁명으로까지 밀고 가는 혁명적 주체를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그래서 발리바르는 전쟁의 경험이 레닌을 “혁명적 주체는 (의식화, 즉 즉자적 계급이 대자적 계급으로 ‘변형’되어가는 형태까지 포함해) 이미 확보된 사회경제적 전제조건이 아니라, 복잡한 정치적 구성과정의 결과로 등장하게 된다”는 결론으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전쟁에 의해 규정된 정치에서 비롯된 철학적 계기’가 핵심적으로 작동했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발리바르가 돌아오도록 만드는 레닌은 누구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정세의 철학자 레닌이며, 혁명을 중층결정된 정세 속에서 구성되어야 할 혁명적 주체의 실천으로 파악하는 레닌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무수한 얼굴로 돌아오고 있는 레닌에게서 발리바르가 발견하고 싶은 그의 얼굴이다.

 



글 / 정정훈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2010년 중앙대학교 대학원 신문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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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예술 강좌| 20세기 아방가르드 미학과 초현실주의 운동 - 꿈꾸고, 사랑하고, 혁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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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일 : 07월 04일 (월)

 

강좌회비 : 10만원 (6강)

 

 

초현실주의자들은 ‘현실의 외부’를 가르쳐 주었다. 우리가 ‘초현실주의’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을 다시 사유해 보려는 전략이다. 마찬가지로 ‘꿈과 무의식’을 생각해 보는 것은 ‘깨어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이다. 20세기의 가장 매력적인 사상가 발터 벤야민이 꿈꾸었던 혁명의 예술, 초현실주의를 만나본다.

 

 

1. 상징주의, 매혹적인 상상과 허구의 세계 _유정아

보이는 현실의 재현에 몰두했던 인상주의를 넘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구한 상징주의자들. 그들의 신비롭고 매혹적인 사상과 작품세계.

 

 

2. 다다이즘, 째깍거리는 정치적 폭탄 _유정아

무정부주의적이었던 다다이스트들의 등장과 활동, 부르주아 예술을 비판하고, 정치, 철학적 전제들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했던 이들의 재기발랄한 반미학!

 

 

3. 초현실주의 선언,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_유정아

비이성적인 것을 사유할 또 다른 권리, 1924년 ‘인간의 권리에 대한 새로운 선언’을 했던 초현실주의 운동의 태동과 무의식의 탐구!

 

 

4. 초현실주의 그룹과 “섹스 토킹” _박수진

앙드레 브르통을 중심으로 초현실주의자들이 말하는 사랑과 섹스, 욕망과 쾌락과 도덕, 무의식과 충동.그 거칠고 흥미진진한 논쟁!

 

 

5. 벤야민과 초현실주의, 대중문화라는 꿈나라 _유정아

발터벤야민이 초현실주의자들의 눈을 통해 바라본 상품물신의 세계, 현대 소비사회에 대한 열정적인 매혹과 비판

 

 

6. 아우라의 흔적, 초현실주의 귀환과 현대미술 _박수진

초현실주의 전시를 통해 만나는 타자성과 재현의 문제, 20세기 후반의 전시와 비교하며 새롭게 조명하는 초현실주의의 영향과 흔적.

 


 

 

02 인류학 강좌| 근대의 외부들 - 다른 세계를 발명하는 인류학적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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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일 : 07월 06일 (수)

 

강좌회비 : 10만원 (6강)

 

 

경계를 넘나들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류학적 상상력이다. 자연과 문화, 환경과 인간, 권력과 자유, 개인과 집단이라는 이분항의 긴장을 가로지르자. 그리고 새로운 사유의 방향을 탐색하자! 우리는 인류학의 여섯 가지 모멘트를 통과하며 교환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공리주의, 그 실용주의의 철벽을 내파할 것이다. 우리 안의 낯선 외부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1. 섹슈얼리티 :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 <원시사회의 성과 억압> _홍서연

말리노프스키는 모권제 사회인 트로브리안드 군도의 가족관계를 통해 원시사회의 섹슈얼리티를 기술한다. 문제는 성적 억압의 존재 여부가 아니다! 자, 그렇다면 모권제는 어떻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분열시키는가?

 

 

2. 선물 : 마르셀 모스, <증여론> _오하나

“아주 최근에 인간을 ‘경제동물’로 만든 것은 우리 서양사회이다. 그리고 아직 모두가 그러한 종류의 존재가 된 것은 아니다.” 모스는 합리적 교환 대신 선물을 택한 공동체를 분석한다. 강의를 통해 우리의 삶의 비자본주의적 요소, 인간과 사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한다.

 

 

3. 신체와 언어 : 앙드레 르루아-구랑, <몸짓과 언어> _홍서연

태초에 몸짓이 있었다! 몸짓은 인류학에서 의례와 테크닉의 기본단위이다. 르루아-구랑의 선사시대 고고학을 통해 기술과 언어, 인지능력과 사회성의 상관적 발달 궤적을 추적해 보자.

 

 

4. 국가 : 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_문화

클라스트르는 추장제 사회 속 전사들의 잇단 전쟁과 무모한 행동에 주목한다. 폭력적인 이들의 모습에서 국가 없는 미개 사회가 떠오를 법도 하다. 하지만 전쟁이 중심적인 권력의 출현을 막는 국가 방지 메커니즘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국가의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5. 주술 : 마르셀 모스, "주술의 일반적 이론에 대한 초고" _홍서연

주술(magic) 최초의 사유 형태이며 인간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인간행위를 사법적 행위, 기술적 행위, 종교적 의례로 나누는 모스에게 주술은 관례 이외의 것을 산출하는 창조적 힘을 지닌 것이었다. 주술사는 어떤 사람인가? 주술은 어떤 조건에서 효력을 갖는가

 

6. 야생성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_정정훈

새로운 사유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우리에게 익숙한 사유의 방식과 삶의 방식이란 단지 하나의 삶의 체제에 불과하다. 레비스트로스의 저 유명한 책, <야생의 사고>을 통해 새로운 사유와 삶의 체제를 모색한다.

 

 

 

 

 

03 철학강좌 | 히치하이커의 정치학 - 현대정치철학의 지형과 지표들을 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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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일 : 07월 08일 (금)

 

강좌회비 : 10만원 (6강)

 

 

 

촛불을 거치며 정치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어느 때보다 고취됐다. 하지만 이 관심이 복지국가론으로 축소되어서는 곤란하다! 정치는 국가의 운영방식으로 환원될 수는 없는 법. 이 강좌를 통해 우리는 현대정치철학의 이론적 공간을 탐사하는 히치하이커가 되고자 한자. 국가권력의 지반을 넘어서는 철학자들의 기발한 해방의 사유에 탑승하기.

 

1. 한나 아렌트 : 오이코스와 폴리스 _이진경

폴리스로부터 오이코스를,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빈민을 몰아내려는 정치적 사유에 히치하이킹! 오이코스를 통해, 정치로부터 배제된 자들을 통해 폴리스를 전복하는 정치를 사유한다.

 

 

2. 자크 랑시에르 : 평등의 정치학 _이진경

치안과 정치의 대비 속에서 자격 없는 자의 정치학을 제안하고, 보이지 않는 자들을 보이게 만드는 감성의 정치. 랑시에르의 사유에 히치하이킹하여 존재론적 차원의 평등성의 정치학까지 밀고 가본다.

 

 

3. 미하일 바흐친 — 유혈 낭자한, 도래할 사건으로서의 혁명 _최진석

용산참사를 겪은 우리 눈에 ‘성숙한 민주주의’는 폭력을 독점 행사하는 자들의 미사여구일 뿐이었다. 미하일 바흐친을 통해 혁명과 정치, 폭력의 난맥상을 돌파한다. 혁명은 정치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므로!

 

 

4. 자크 데리다 — (불)가능성의 윤리와 정치 _최진석

정치의 윤리, 혹은 윤리적인 정치의 불가능성! 정치의 잠재성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고, 한계를 돌파하는 데서 비롯된다. 데리다의 <법의 힘>을 통해 불가능에 도달하는 행위, 그 속에서 실현되는 정치를 발견한다.

 

 

5. 에티엔 발리바르 : 이데올로기의 전화와 인권의 정치 _정정훈

스마트폰과 SNS로 표상되는 첨단의 세계 한 복판에서 오히려 배제된 자들이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인종, 종교의 이름으로 무의미한 폭력을 휘두르고... 우리는 정치의 가능성 자체가 심각한 위기에 처한 시대에 살고 있다. 정치의 복원을 고민하는 발리바르의 정치 철학을 따라간다.

 

 

6. 질 들뢰즈 : "소수정치, 또는 정치의 소수화" _변성찬

들뢰즈의 ‘소수성’ 개념을 중심으로 ‘들뢰즈의 정치학’을 재구성해보는 것, 이것이 이번 강의의 목표다. 들뢰즈가 구분한 ‘고전적 정치영화’과 ‘현대적 정치영화’의 차이를 중심으로, 그 함의를 보다 분명하고 풍부하게 밝혀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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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작년 말 튀니지에서 처음 시민들의 ‘반역’이 시작되었을 때만해도 한국인들의 반응은 그리 진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잊을 만하면 간간이 이어지던 ‘그 동네’의 작은 소요라는 생각이 대부분이었고, 이런 인식의 나이브함은 국내 언론이 ‘반정부 소요’나 ‘무질서 상태’라고 묘사할 때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이 흐름이 점차 아랍권 전역으로 널리 확산되어, 무바라크의 퇴진을 이끌어내고, 카다피를 끝장낼 정도로 진행되고서야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 정도의’ 현실감을 얻게 된 듯하다. 인터넷 뉴스는 트리폴리에서 날아온 속보로 가득차고, 기민한 블로거들은 다양한 경로로 입수한 현지 사정을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다. 진정 ‘아랍의 봄’이 찾아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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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땅에서 벌어지는 민주화와 혁명의 불길에 어떻게든 말 한마디로라도 거들고자 하는 열혈 블로거들, 누리꾼들의 활약을 보면서, 침묵에 잠긴 대학의 인문학을 고민해 본다. 물론, 대학에서 강의하고 연구하는 인문학자들이라고 왜 역사의 격변에 관심이 없겠느냐마는, 실상 삼삼오오 모여 하루의 진전에 관해 논평하는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귀청을 울리는 ‘한 소리’는 들리지 않는 게 현실이다. 강의와 세미나, 글을 통해 현실 개입적인 말과 사유를 펼치기 전에 먼저 ‘전공’을 따지고 ‘전문성’을 가늠하며 ‘자격’을 검증하는 게 인문학의 관성인 탓일까? “리비아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자네 정치학이 전공인가?” “아닌....데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실제로 현재 대학에서 양성되는 인문학은 혁명에 인색하다. 인문학은 인문학으로서 소임이 있다는 주장이 그렇다. 인문학은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 그 일희일비(一喜一悲)의 순간들로부터 벗어나, ‘더 멀리 더 깊게’ 바라봄으로써 사회의 심층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어진 인문학의 소임은 새롭고 참신한 가치를 창출하고 현실에 유용한 교양이다. 하지만 인문학이 현존 질서를 조금이라도 건드릴라치면 금세 경고장이 발부된다. “학문은 학문답게, 현실로부터 거리를 두라”는 것이다. 인문학이 학문으로서 갖는 위상과 자격은 그것이 현실에 봉사하되 현실 자체로부터는 한 걸음 물러서는 데서 나온다고 한다. 뭔가 이상하고 모순된 소리지 않은가? 현실에 도움을 주는 한에서, 현실에 무관한 한에서만 학문일 수 있다니? 만일 그 ‘현실’이 기성의 질서와 가치관, 지배 체제를 뜻한다면, 이 말은 일관성을 갖는다. 거꾸로 말해, 현재를 지배하는 가치와 통념에 봉사하지 못하는 인문학은 인문학의 자격이 없다. 4대강이 얼마나 국가에 유익한지, 국민 생활을 증진시킬 수 있는지를 논하는 인문학이라면 좋다! 하지만 그게 국토를 망치고 민중을 도탄에 빠지게 만든다는 식으로 말할 테면 퇴출이다! 인문학이 삼가고 두려워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혹자는 당차게 말한다. 인문학의 본령은 원래 현실 개입적이었고, 혁명적이었으며, 따라서 지금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비판의 칼날을 벼려야 한다고. 옳은 말이다. 인문학이 창출할 수 있다는 의미나 가치는 현실의 파도를 건너는 ‘우아한 유람선’이 아니라, 현실을 날카롭게 찌르고, 우리의 안온한 일상을 흠집 내고 피가 날 정도로 벨 정도로 날카로운 무기가 되어야 진정 ‘새롭다’고 할 것이다. 인문학의 혁명성을 말한다면 아마 그런 것일 게다.

 

 

그런데 실제로 인문학의 역사를 보면,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인문학은 그런 ‘불온’하고 ‘위험’한 역할을 맡은 적이 별로 없다. 오늘날 ‘인문학’이라 번역되는 ‘humanities’나 ‘philology’는 기실 혁명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르네상스 전후로 사용되었던 전자는 중세기의 ‘자유 학문’을 대체하는 것들이었고, 후자는 19세기말의 고전학 연구 경향을 일컫던 것들이다. 오히려 현대의 인문학은 국가가 사회를 일률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지적 강제의 도구로서 발달되었다. 부랑자와 거지, 도둑, 반사회적 일탈자, 비정상인 등을 ‘정상인’으로 만들어 ‘정상적인 삶’을 부과하고 나아가 ‘국가의 정상화’를 위해 스스로 헌신하게끔 개조하려는 목적으로 고안된 장치였던 것이다. 치안을 위해 작동하는 훈육·통제 장치, 그것이 현대 인문학의 기원이며 영토인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인문학에서 혁명을 기대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오늘날의 인문학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렇게 다져진 영토를 떠나는 것, 책장을 벗어나 거리로 나가려는 충동이 아닐까?

 

 

나는 인문학을 공부함으로써 견고하게 나를 결박하고 있는 현실로부터 당장 탈출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문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그 매력에 빠져들면서 동시에 커지는 위험은 현실을 방기한 채 텍스트의 쾌락에 젖어버리는 일이다. 혁명을 종이 위의 글자로 만들고, 날마다 부대끼며 살아가는 친구와 가족, 타인들을 인간(人間)이라는 추상 속에 가둬두는 일이다. 인문학의 효용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는 그만큼 온순해지고 순응적인 존재가 되어간다. 인문학에 절망이 있다면, 그것은 인문학이 인문학으로 고이 남겨진다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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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의 군중들, 트리폴리의 시민들을 일어서게 한 것은 그들에게 인문학이 모자라거나 과도해서가 아니었다(수천 년 누적된 아랍의 방대한 문헌학적 전통을 고려할 때 그들이 무지몽매하다고 비웃는 자들은 자는 본인의 무교양부터 부끄러워할 일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거리로 이끈 것이 순수하게 생계에 대한 절망만은 아닐 것이다(그런 나이브한 인식 따위로 아랍 민중을 모욕하고, 혁명을 폄하하지 말도록 하자!). 인문학은 인문학이다. 종이 위의 전통, 텍스트의 쾌락. 맞다! 그들에게, 나아가 우리에게 인문학이 의미와 가치를 갖는 것은, 인문학이 그것의 영토를 떠날 때, 묵독(黙讀)의 자아도취를 벗어날 때, 거리에서 울리는 목청이 될 때다. 아니, 적어도 거리를 바라보고, 거리를 욕망할 수 있을 때다. 그래서 학문이 아닌 인문학, 인문학이 아닌 인문학이 될 때다. 과거에 인문학이 가장 두려워하던 것은 인문학이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인문학이 더욱 두려워해야 할 것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인문학이 인문학으로 남는 것이다. 묘비의 인문학. 돌 위에 새겨진 글자는 죽은 자의 이름을 가두는 감옥일 테지만, ‘짱돌’이 되어 던져지는 문자는 혁명의 초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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