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불온한 인문학“ 두 번째 트랙은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다. 연구실에 자주 접속한 친구들이라면 들뢰즈·가타리 이름은 번쯤 들어봤을터인데... 그의 다른 저작 중에서도 『안티 오이디푸스』를 선택한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지난 트랙 1에서 맑스의 『자본』을 읽고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는데는 뭔가!? 깊은 뜻이 있지 않을까? 맑스의 『자본』을 읽고 풀리지 않는 질문들이 들뢰즈·가타리를 만나면 조금은 해소가 되지 않을까? 혹은 어떻게 증폭이 될까? 여기저기서 트랙 2 강의에 대한 질문들이 들린다.

 

그동안 좀처럼 본색을 드러내지 않고 학자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열심히 강의 준비(?)와 집필 활동(?)에 여념이 없었다는 최진석 선생님을 만나 궁금하지만 차마 묻지 못했던 것들, 이들테면 “왜 하필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입니까? 절판되서 책 찾기도 힘든데용?” 같은 기초적인 질문부터 던졌다.

 

왜 지금 우리는 들뢰즈·가타리의『안티 오이디푸스』를 읽어야 할까?

 

 

인터뷰어 / 화 (불온한 인문학 튜터)

인터뷰이 / 최진석 (불온한 인문학 강사)

 

 

 

: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는 선택한 이유는 뭔가? 들뢰즈의 다른 책들도 많은데~ 그 중에서 『안티 오이디푸스』를 고른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진석 : 들뢰즈·가타리가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란 제목으로 책을 두 권을 냈다. 첫 번째가 『안티 오이디푸스』 (L'Anti-oedipe : capitalisme et schizophr nie)고 두 번째가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 nie 2)이다. 들뢰즈는 워낙 전방위적인 철학자이기 때문에 책 마다 특별한 제목이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란 시리즈로 나온 것은 사회철학에 해당하는 책이다.

내가 지금도 기억나는 게 있다. 『안티 오이디푸스』가 들뢰즈의 사회철학책이라고 해서 읽었는데.. 내가 기대하던 사회철학과 이미지가 다르더라.

 

 

화 : 그 때가 대략 몇 년 전?

 

진석 : 90대 중반에 처음 읽으니까... (자세한 건 묻지 말라... ㅠ)

어쨌든 그 당시 사회철학 하면 마르크스나 헤겔을 생각하거나 좀 세련된 사람이라면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이론 들을 이야기 했다. 그런 책들의 특징은 굉장히 논리정연하고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고 피아를 분명히 구분한다. 그런데 『안티 오이디푸스』는 사회철학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상당히 깨더라.

 

 

 <그것>은 도대체 뭐란 말이오???

 

 

 

: 뭐가 그렇게 깼나...?

  

진석 : 무엇보다도 전혀 이해할 수 없더라. (웃음) 재밌는 것은 『안티 오이디푸스』 첫 문단에서 ' <그것>은 어디서나 작동하고 있다. 때로는 멈춤 없이, 때로는 중단되면서. <그것>은 숨쉬고, <그것>은 뜨거워지고, <그것>은 먹는다. <그것>은 똥을 누고 성교를 한다. 그것이라고 불러버린 것은 얼마나 큰 잘못인가. 어디서나 그것들은 기계들인데, 결코 은유적으로가 아니다.' 라고 한다. 여기서 <그것>은 어떤 대명사가 아니라 사실은 이제 사회전체 혹은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을 감싸고 존재하도록 만들면서 움직이도록 만들어주는 힘 즉 생성력에 대한 이야기 이다.

 

 

: 그래도 『안티 오이디푸스』읽으려고 시도 했다가~ 문단 보고 뭔말이야? 하고 덮었단 친구들도 많더라. 도대체 그 <그것>이 뭔지 도통 감이 안온다~

 

진석 : 프로이트로 따지면 리비도(Libido) 같은 것이다. 사실은 그런 힘이 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힘의 장 힘의 무대를 어떤 방식으로 구축하는 가가 바로 사회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티 오이디푸스』는 사회철학적이고 역사철학적인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사실 이런 걸 안 건 굉장히 나중의 일이다^^)

 

 

: 들뢰즈·가타리가 사회를 바라보는 독특한 방식이 있을 것 같다.  다른 사회철학과는 어떻게 다르던가?

  

진석 : 사회철학이나 역사철학이란 관점에서 이 책을 볼 때 들뢰즈와 가타리가 전제하는 것이 있는데 삶이나 사회의 역사에서는 항상 중심화하는 힘이 있고 그 중심에서 벗어나려는 힘이 같이 있다는 거다. 전자를 구심력 후자를 원심력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두 가지 힘의 상호관계가 특정한 사회형태를 결정짓기도 하고 사회가 다른 사회로 변화하게 하는데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특이한 것은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확장적인 측면을 가지면서 모든 것을 중심적으로 끌어들이는 강력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다. 이때 이 자본주의를 중심화하는 힘, 사회의 모든 방면으로 확장하는 힘이라는 것이 자본의 힘이다.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봉건사회다. 봉건사회에서는 신분이라는 규칙이 절대적이었다. 가령 양반과 상민은 결코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았고 분리돼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 중에도 있다. 돈 많은 상민이 양반 신분을 산다. 그리고 그는 양반 행세를 한다고 큰 갓도 써 보고 기와집도 올린다. 그렇게 해 봤는데 양반들이 인정을 안하고... ‘저 놈은 원래 상민 출신이다.’ 결국 별로 재미를 못 봤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바로 신분이라는 규칙(코드)다. 이 신분이라는 규칙(코드)은 봉건사회에선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었지 않느냐. 과거로 가면 갈수록 신분을 규정하는 벽이라는 것은 더 두텁고 강했다. 한 사회가 통일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에 와서는 완전히 변한다. 잘 알다시피 ‘돈’이면 안되는 게 없지 않느냐. 내가 물건을 파는데 ‘양반한테만 팔고, 상민한텐 안판다?’ 아니지 않느냐. 돈은 이전의 신분 관계를 해체 시키는 힘이다. 또한 과거에 있었던 유기적인 공동체 역시 다 파괴한다. 씨족 공동체, 지역 공동체가 화폐가 도입되면서 무의미하게 됐다.

 

화폐라는 것이 교환형태가 되면서 돈에 의해 모든 것이 평등하게 환원되어 버리는 이런 상황이 자본주의 체제의 보편성이다. 돈이라는 규칙. 신분이 아니라 돈이라는 규칙이 자본주의 사회를 재패했다. 이것을 들뢰즈·가타리는 초코드화 라고 했다. 자본주의는 굉장히 모순적인 양면성을 갖는다. 자본은 모든 것을 평등하고 공평하게 만들어주지만. 자본이 없다면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화폐 없이는 그 무엇도 존재를 규정할 수 없다.

 

겉보기에는 자본주의는 평등하고 이상사회로 보인다. 그러나 자본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어길 수 없는 돈이라는 규칙.. 그 누구도 화폐를 통하지 않고선 세상에 나갈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돈을 벌지 않을 수 없고.. 돈을 벌어야 하는 규칙에 종속되지 않고선 살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화폐에 대한 중심화이다. (이 내용에 대해선 “불온한 인문학” 트랙 1『자본』 강의에서 열심히 배웠지요? ^^)

 

 

 

 

 

목요일엔 『안티 오이디푸스』를 토요일엔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 “불온한 인문학”은 목요일 강의와 함께, 토요일엔 함께 책을 읽는 집중 세미나를 하고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는 목요일 강의를 통해서 만난다면 토요일 세미나에서는 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읽는다. 권의 책이 어떻게 연결되는 지도 궁금하다.

 

진석 : 빌헬름 라이히는 20세기 초에 독특한 정신분석 학자였다. 그는 대단히 이상한 현상을 목격하게 되는데 당시에 사회 하층부를 형성하고 있었던 노동자 계급이 분명히 계급의 해방을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 지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 한국 정치에서도 자주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왜 계급에 반하는 투표를 하는가?

 

진석 : 그렇다. 빌헬름 라이히도 아는 것과 실천이 확연히 분리되는 현상 목격한 것이다. 더군다나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세상에서 노동자들도 돈의 규칙을 따르는 한에서 그들이 품고 있었던 계급 해방의 욕망이라는 것은 사실 자본가들의 욕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식에 있어서는 자본가들에게 반대했지만 그들의 욕망에 있어서는 자본가들에게 타협하거나 종속돼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라이히가 던진 질문이 “왜 대중은 혁명적이지 않는 가” 다.

 

들뢰즈·가타리는 질문을 이어받아서 이렇게 대답한다. “문제는 대중이 혁명적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욕망이 혁명적인가 아닌가” 다. 혁명의 열쇠 혹은 해방에 대한 잠재력은 어느 누구에게 어떤 계급에게 본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초월적인 법칙이라도 받아들이지 않고 빠져나가지 않는 힘 종속되지 않겠다는 욕망 자체에 있는 것이다.

 

말은 굉장히 간단하지만 사실 우리의 욕망을 사회적으로 건전하다든지 바람직하다는 기준과 분리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좋은 학교 가고 좋은 회사 입사하고 잘 먹고 잘 살라.’ 는 사회의 요구는 우리들로 하여금 그것을 따르지 않을 때 죄의식을 갖게 한다든가 혹은 잘못된 삶을 살지 않나. 하는 불안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이 욕망은 어디서 온 것이란 말인가?

 

 

: 그 불안에 대해 자유로운 사람이 거의 없어 보이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욕망이 혁명적일 수 있을까?’ 를 궁금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남들처럼 사는 걸 욕망하는 게 그렇게 나빠요?’ 하고 물어보는 친구들도 있더라. 어떻게 해야 할까? 단순히 욕망을 줄여라. 이런 문제는 아닌 거 같은데?

 

진석 : 보통 우리가 욕망하는 것들을 보자. 이것들은 사실 대부분이 타자의 욕망이고.. 사회가 나에게 명령하는 것일 수 있다. 물론 ‘타자의 욕망이 다 나쁘냐’ 그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우리의 활동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어느 누구의 활동도 동일한 것이 아니다. 각자가 놓여 있는 맥락 상황은 서로 다르다. 거기에서 욕망의 선이 나에게 주어질 선을 따를 때와 아닐 , 각각의 경우가 다르다. 원칙에 따라 다른 것이다.

 

문제는 동일하게 ‘이것은 좋은 것이다.’ 하고 다른 욕망의 가능성을 꺾어버릴 때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타성적인 존재니까 ‘정말 그래’ 하고 쉽게 길들여지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번 강의를 듣다보면 타성적인 우리의 존재에서 ‘야성“을 끌어 낼 수도 있을까?

 

진석 : 하하~기대하시랏~

 

 

 

: 안티 오이디푸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혁명, 욕망~ 그리고 야성? 이런 단어가 나오니 흥미가 돋긴하는데~ 문제는 너무 어려워보인다! 『안티 오이디푸스』와 친해질 있는 좋은 방법 없나?

 

진석 : 『안티 오이디푸스』는 읽어 보는 것이 좋은데 쉽지 않다. 현재 나와 있는 판본은 절판인데다가 최선의 번역본도 아닐 뿐 더러 원래 내용 자체도 쉬운 내용이 아니다. 일단 빌헬름 라이히의『파시즘의 대중심리』를 토요일 집중세미나에서 읽으면서 강의 예습을 하시고, 목요일 강의를 듣고,『안티 오이디푸스』를 직접 읽으면서 복습을 하면 어떨까. 중간 중간 읽어야할 프로이트 논문도 몇 편 있다. 그것도 조만간 공지할 예정이다. 이렇게 읽는다면 아마도~! 그 어렵다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출구를 찾기가 한결 쉬울 것이다.

 

 

 

: 혹시 출구만 있고 나가는 문은 없는 거 아닌가?

 

진석 : 하하^^ 그건 책임 못지겠다~~

 

 

 

10주동안 강의를 맡아줄 최진석 선생님~ 기대하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마디로 한다면?

 

진석 :『안티 오이디푸스』는 욕망의 해방에 관한 책이다. 욕망의 해방은 결코 범죄도 아니고 살아있는 존재에겐 필연적인 충동이다. '욕망해도 좋다.' 라는 것이 이 책의 중심테마다.

 

 

 

 

 

빽빽한 메모로 가득한 최진석 선생님의 『안티 오이디푸스』. 그가 풀어낼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벌써 부터 기대가 된다.

 

 

[5월 21 개강-10주 과정]

Ⅰ 트랙 2 강의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가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Ⅱ 트랙 2 세미나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대중의 흐름과 욕망의 정치학-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황선길 옮김, 그린비

고병권, 『추방과 탈주』, 그린비

 

트랙 2 강의 안내는 요기!

http://nomadist.org/xe/bulin/121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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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마디스트

이 글은 수유너머N에서 3-4월에 진행한 초중급 불어강독 중 8회에 읽은 텍스트를 강독에 참가한 김민우님이 번역한 것입니다.
들뢰즈의 파리8대학 스피노자 강의를 녹취한 원문 중 처음부터 9번째 문단까지의 번역입니다.
(DELEUZE / SPINOZA Cours Vincennes - 24/01/1978 원문 바로가기)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알기 쉽게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는 명강의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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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속된 변이(variation continue)에 대해 [이제껏] 다루었던 것을 잠시 미루고, 철학사 수업을 위하여 매우 분명한 어떤 사항에 대해 임시로 되돌아가겠습니다. 이는 여러분 가운데 몇 사람의 요청으로 하는, 어떤 중단 같은 겁니다. 매우 분명한 사항이란 이것과 관계있는데요. 즉, 스피노자에게 관념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감정이란 무엇인가? 스피노자에게 있어 관념과 감정(Idée et affect chez Spinoza). 오는 3월에는, 여러분 가운데 몇 사람의 요청으로, 칸트에게 있어 종합의 문제와 시간의 문제에 대해서도 또한 [강의를] 잠시 중단할 겁니다. 철학사로 되돌아온다는 것은 제겐 조금 이상한 일인데요. 저는, 여러분이 철학사의 이 부분을 그저 단순히 하나의 역사로 생각해주기를 바랍니다. 요컨대 철학자란 단지 개념들을 발명하는 사람일뿐만 아니라, 그는 아마 지각하는 방식들 또한 발명하죠. 저는 거의 순번 매기는 방식으로 강의를 진행하려는데요. 우선은 용어법에 관한 고찰로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우리 강의실이 [많은 분들로] 상당히 뒤섞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철학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모든 철학자들 중에서 스피노자는 매우 예외적인 상황 속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가 자신의 책 속에 들어온 것들과 관계하는 방식은 필적할 만한 게 없으니 말이죠. 여러분이 그를 읽었든 읽지 않았든 상관없습니다. 저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하니까요. 일단 용어법에 대한 예비 고찰로 시작해보죠. <윤리학>이라고 불리고 라틴어로 쓰인 스피노자의 주요 저작 속에는, 두 가지 단어가 발견됩니다. 아펙티오(affectio)와 아펙투스(affectus). 몇몇 번역가들은 매우 이상하게도 [이 단어들을] 똑같이 번역합니다. 이건 최악이죠. 그들은 그 두 용어를, 아펙티오와 아펙투스를, “아펙시옹(affection)”으로 번역하고 있죠. 저는 이게 최악이라고 말하는데요. 왜냐하면 철학자가 두 개의 단어를 사용할 때는 원칙적으로 그는 어떤 이유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프랑스어가 우리에게 아펙티오와 아펙투스에 엄밀히 대응하는 두 개의 단어를 손쉽게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펙티오에는 아펙시옹이 있고, 아펙투스에는 아펙트가 있으니까요. 몇몇 번역가들은 아펙티오를 아펙시옹으로 번역하고 아펙투스를 상티망(sentiment)으로 번역하는데, 이는 똑같은 단어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나은 경우입니다. 하지만 프랑스어가 아펙트란 단어를 보유하고 있는데 굳이 상티망이란 단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러므로 제가 아펙트란 단어를 사용할 때는 이것은 스피노자의 아펙투스를 가리키는 것이고, 아펙시옹이란 단어를 말할 때는 이것은 아펙티오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하의 번역문에서 아펙시옹은 ‘변용’으로 옮기고, 아펙트는 ‘감정’으로 옮깁니다.]


첫 번째 사항: 관념이란 무엇인가? 관념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이걸 알아야] 스피노자의 가장 단순한 명제들이라도 이해할 텐데요. 이 점에 관하여 스피노자는 독창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언제나 이해하던 의미로 관념이란 낱말을 이해하려 하죠. 철학사에서 세상 사람들이 언제나 이해하던 의미에서 우리가 관념이라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를 표상[재현]하는 사유 양태입니다. 표상적인 사유 양태. 예컨대, 삼각형의 관념은 삼각형을 표상하는 사유 양태죠. 용어법의 관점에서, 중세 시대 이래로 관념의 이런 측면이 “객관적 실재”(réalité objective)라 불리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면 매우 유용합니다. 17세기 혹은 그 이전의 텍스트에서 우리가 관념의 객관적 실재와 마주칠 때, 그것은 항상 이것을 의미합니다. 즉, 어떤 것의 표상으로 생각된 관념 말이죠. 관념은, 그것이 무엇인가를 표상하는 한에서, 객관적 실재를 갖고 있다고 말해집니다. 관념과 그것이 표상하는 대상과의 관계인 것이죠.


따라서 아주 단순한 것에서 시작해보죠. 관념이란 자신의 표상적 성격에 의해 정의되는 사유 양태입니다. 이 정의는 이미 관념과 감정(아펙투스)을 구별하기 위한 첫 번째 출발점을 우리에게 제공해주고 있죠. 왜냐하면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는 사유 양태는 감정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누구든지 감정이라 부르는 것을 아무거나 취해봅시다. 가령 기대, 불안, 사랑 같은 것들, 이것들은 표상적이지 않습니다. 사랑받는 것에 대한 관념은 물론 존재하고, 기대되는 어떤 것에 대한 관념도 물론 존재하지만, 기대는 그 자체로서 또는 사랑은 그 자체로서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습니다. 전혀 아무것도.


비표상적인 한에서 사유의 모든 양태는 감정이라 불릴 것입니다. 의지력, 의지는 엄밀히 보면 내가 무엇인가를 의지한다는 사실을 내포합니다. 내가 의지하는 것, 이건 표상의 대상입니다. 내가 의지하는 것은 어떤 관념 속에 주어지죠. 하지만 의지한다는 사실 자체는 관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비표상적인 사유 양태이기에 감정인 거죠. 잘들 따라오고 있죠. 어려운 게 아니에요.


이로부터 즉각 관념이 감정보다 우위에 있다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그리고 이는 17세기의 모든 사람들에겐 상식이었죠. 하지만 우리는 스피노자만의 고유한 것에는 여전히 들어가 보지도 못한 상태입니다. 관념은 감정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것에 대한 관념이, 그 관념이 아무리 혼란스럽고 아무리 미규정적이라도, 있어야만 한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그러하죠. 원하기 위해서는 원하는 것에 대한 관념이, 그 관념이 아무리 혼란스럽고 아무리 미규정적이라도, 있어야만 합니다. “나는 내가 무얼 느끼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할 때, 대상에 대한 어떤 표상이, 그것이 아무리 혼란스럽더라도, 있는 것입니다. 혼란스럽긴 해도 어떤 관념이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감정보다 관념이, 다시 말해서 비표상적인 양태들보다 표상적인 양태들이 시간적으로, 논리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입니다. 만일 독자가 이런 논리적 우위를 환원으로 바꾸어버린다면, 아주 불행한 오해가 생길 겁니다. 감정이 관념을 전제한다는 것, 이는 무엇보다도 감정이 관념으로, 혹은 관념들의 조합으로 환원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출발해야만 합니다. 즉 관념과 감정이란, 본성상 서로 다르고, 상호간에 환원될 수 없으며, 다만 감정이 관념을, 그것이 아무리 혼란스러울지라도, 전제하는 그러한 관계 속에서 받아들여질 뿐인 두 가지 종류의 사유 양태들이라는 점에서 출발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사항입니다. 관념-감정의 관계를 제시하는 보다 덜 표면적인 두 번째 방식. 우리가 관념에 대한 아주 단순한 성격에서 논의를 시작했다는 것을 상기해보세요. 관념은 표상적인 한에서의 사유입니다. 표상적인 한에서의 사유 양태이죠.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사람들은 관념의 객관적 실재를 말할 겁니다. 관념은 단지 객관적 실재만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널리 인정된 용어법에 따르면 그것은 또한 형상적 실재도 갖고 있습니다. 일단 객관적 실재란 관념이 무엇인가를 표상하는 한에서 그 관념의 실재라고 한다면, 관념의 형상적 실재(réalité formelle)란 무엇을 말할까요? 관념의 형상적 실재란, ―문제가 훨씬 더 복잡해지고 있고 그래서 더욱 흥미로워지는데요― 관념이 그 자체로 어떤 것인 한에서 관념의 실재라고 말해질 것입니다. 삼각형 관념의 객관적 실재는 삼각형으로 된 사물을 표상하는 것으로서의 삼각형 관념이지만, 이 관념은 그 자체로 어떤 것입니다. 더욱이, 그것이 어떤 것인 한에서, 나는 그것에 대한 관념을 만들 수 있습니다. 나는 언제나 그 관념에 대한 관념을 만들 수 있죠. 그러므로 저는 모든 관념은 단순히 어떤 것의 관념인 것만은 아니라고 ―모든 관념이 어떤 것의 관념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곧 모든 관념은 객관적 실재를 갖고 있다고, 모든 관념은 무엇인가를 표상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하겠습니다. 저는 또한 관념은 그것이 그 자체 관념으로서 어떤 것이기 때문에 형상적 실재를 갖고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관념의 형상적 실재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이 수준에서는 더 멀리까지 계속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따로 제쳐둘 필요가 있죠. 관념의 이러한 형상적 실재란, 스피노자가 관념이 관념으로서 지닌 실재 혹은 완전함의 어떤 정도라고 매우 자주 이름 붙인 바로 그것이라는 점을 곧바로 덧붙여만 합니다. 개개의 관념은, 관념으로서, 실재 혹은 완전함의 어떤 정도를 갖고 있습니다. 아마 실재 혹은 완전함의 정도는 그것이 표상하는 대상과 관계되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혼동되지 않습니다: 관념의 형상적 실재, 즉 관념이라는 사물 내지 관념이 자기 안에 소유하는 실재 혹은 완전함의 정도란 그것의 내재적 성격입니다. 관념의 객관적 실재, 즉 관념이 그것이 표상하는 대상과 맺는 관계란 그것의 외재적 성격입니다. 관념의 외재적 성격과 내재적 성격은 근본적으로는 서로 연결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신의 관념과 개구리의 관념은 상이한 객관적 실재를 갖고 있습니다. 즉 그 관념들은 동일한 것을 표상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그것들은 동일한 내재적 실재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동일한 형상적 실재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즉 한 관념은 ―여러분은 그것을 잘 느끼고 있을 텐데요― 다른 관념보다 무한하게 큰 실재의 정도를 갖고 있는 것이죠. 신의 관념은 어떤 형상적 실재를 갖고 있습니다. 유한한 사물의 관념인 개구리의 관념보다 무한하게 큰 내재적 실재 혹은 완전함의 정도를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걸 이해했다면 거의 모든 걸 이해한 셈입니다. 그러므로 관념의 형상적 실재가 있습니다. 즉 관념은 그 자체로 어떤 것이고, 이런 형상적 실재는 내재적 성격이며, 관념이 자기 자신 안에 포함하고 있는 실재 혹은 완전함의 정도입니다.


조금 전에 제가 관념을 그것의 객관적 실재로 혹은 그것의 표상적 성격으로 규정하였을 때, 감정은 정확히 표상적 성격을 갖지 않은 사유 양태라고 말하면서 저는 곧바로 관념을 감정에 대립시켰죠. 이제 저는 관념을 이렇게 규정하고자 합니다. 즉, 모든 관념은 어떤 것이다, 단지 어떤 것의 관념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어떤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에 고유한 실재 혹은 완전함의 정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두 번째 수준에서 저는 관념과 감정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해야만 합니다. 삶에서는 과연 무엇이 구체적으로 일어나고 있을까요? 두 가지가 일어납니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기하학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어서 흥미로운데요. 여러분은 <윤리학>이 명제, 증명 등등의 형식을 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책은 더욱 수학적인 만큼 비범할 정도로 더욱 구체적이기도 하죠. 제가 말한 모든 것은, 그리고 관념과 감정에 대한 모든 주석들은 <윤리학>의 2, 3권에 관련됩니다. 이 2, 3권에서 스피노자는 우리 삶에 대한 일종의 기하학적 묘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은 제게 아주 설득력 있게 보입니다. 이 기하학적 묘사는 우리의 관념들이 끊임없이 서로 이어진다는 점을 대략적으로나마 우리에게 말해주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한 관념은 다른 관념을 내쫓습니다. 한 관념은 다른 관념을 대체합니다, 예컨대 순식간에 말이죠. 지각은 특정한 유형의 관념인데요, 우리는 곧바로 그 이유를 보게 될 겁니다. 좀 전에 나는 저쪽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강의실 구석을 보았죠. 다시 고개를 돌립니다. 또 다른 관념이 있죠; 나는 길거리를 산책합니다. 거기서 사람들을 알아보기도 하죠. 피에르에게 인사합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폴에게 인사합니다. 또는 변화하는 것은 [지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사물들입니다: 나는 태양을 쳐다봅니다. 그러다 태양이 점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이는 따라서 일련의 연속들, 관념들의 일련의 공존들, 관념들의 일련의 연속들입니다. 그러나 이 외에 또 어떤 것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우리의 일상적 삶은 연속되는 관념들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스피노자는 “아우토마톤”(automat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는 우리[인간]이 정신적 자동기계라고 이야기하죠. 다시 말해서 우리가 관념들을 갖고 있다기보다는 관념들이 우리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념들의 연속들을 제외하고, 또 어떤 것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다른 것이 있습니다. 즉, 내 안의 무엇인가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죠. 관념들 그 자체의 연속과 동일하지 않은 변이(variation)의 체재가 있는 것입니다. 변이들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위하여 우리에게 쓸모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스피노자가 [변이라는]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인데요... 이런 변이란 무엇일까요? 제가 든 예를 다시 취해보면. 나는 길에서 내가 매우 싫어하는 피에르와 마주칩니다. 그를 지나치면서 피에르에게 인사합니다. 혹은 그걸 꺼림칙해 하면서 곧이어 내가 매우 좋아하는 폴을 봅니다. 그리고 폴에게 인사하죠. 거기에 내심 안도하고 만족해하고요. 자. 이것은 무엇일까요? 한편으로는 두 개의 관념, 즉 피에르의 관념과 폴의 관념의 연속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것도 있죠. 내 안에서 어떤 변이가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여기서 스피노자의 말은 매우 정확한데, 저는 그걸 인용해보겠습니다. “나의 실존하는 힘의 (변이)”, 또는 동의어로서 그가 사용하는 또 다른 말인 “비스 엑시스텐디”(vis existendi), 즉 실존의 힘, 혹은 “포텐샤 아겐디”(potentia agendi), 즉 행위 능력―그리고 이 변이들은 영원합니다. 



번역 / 김민우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초중급 불어강독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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