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8월 동안 발터 벤야민의 독일 비애극의 원천을 읽는 단기세미나를 진행합니다.

 

작년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벤야민프로젝트>세미나를 통해 발터 벤야민 선집 1~5, 수잔 벅 모스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등을 읽었습니다.

이 책들을 읽는 동안 벤야민의 여러 개념들 사적 유물론, 꿈과 깨어남의 변증법, 구제비평, 성좌 –에 익숙해지면서 예술과 철학을 넘나드는 벤야민의 매력에 푹 빠졌던것 같습니다.

 

하지만 벤야민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초기작이자, 교수자격 논문이었던 (이해 불가능한 논문으로 평가되어 교수자격은 신청 거부 당하지요^^;)

독일 비애극의 원천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에서 벤야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과 독일 바로크 비극을 구분하며 알레고리' 개념을 제시합니다. 이는 벤야민의 이후 저작들에도 계속해서 등장하고, 발전되는 개념이지요.

 

독문과에서도 매니악한 취향을 갖지 않으면 읽지 않을 것 같은 바로크 드라마가 소재이고, 이해 불가능한 논문으로 평가되었다는 점이 아주 사알짝(?) 걸리긴 합니다만^^; 힘들더라도 읽어 놓으면 다른 많은 벤야민의 저작들을 읽고 감동하고 활용하는 데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세미나 장소와 일정>

언제 : 714~ 825, 7주간 매주 30~40 페이지씩

몇시 : 매주 목요일 3~ 5

어디서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에서 진행됩니다.

문의 : 꾸냥 010 4515 2725

: 독일 비애극의 원천최성만, 김유동 옮김 한길그레이트북스

 

 

함께하실 분들은 아래에 댓글 달아주시고, 7143시에 인식비판적 서론 (p.35 ~ p.80) 부분을 읽고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으로 오시면 됩니다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세미나 게시판 원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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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패드2가 출시된 11일, 뉴욕 피프스 애비뉴 애플스토어는 밤 늦은 시간까지 인산인해를 이뤘다. 두 시간 넘게 줄을 서야 매장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인파는 계속 몰려들었다. 애플에 따르면 일부 매장에서는 아이패드2를 사기 위해 늘어선 줄이 지난해 아이패드 출시 때보다 두 배 이상 길었다고 한다. 이날 아이패드2를 가장 먼저 구입한 사람은 러시아에서 온 정보기술(IT) 전문가였는데, 그의 행운이 단지 우연은 아니었던 것이, 사실 그는 전날 낮부터 비를 맞아가며 28시간 동안 줄을 선 결과였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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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을 선두로 하는 디지털 아이템들에 사람들이 미친 듯이 열광하고 있다. 그 작고 앙증맞은 기기들은 가볍고 편리한데다가 또 어찌나 섹시한지! 콤팩트한 디자인, 쉽게 흠집이 나지 않는 강철 유리 커버에, 매끄럽고 광택이 흐르는 피부의 감촉은 부드럽게 손안에 감겨오기에 충분하다. 아! 만지고 싶어, 소유하고 싶어! 널 내 품에 넣고야 말겠어! 한 달 치 월급을 쏟아부어 마침내 손에 쥔 그 소중한 것을 지하철 무릎 위에 살포시 올려놓고, 마치 보들레르의 ‘여행으로의 초대’에 응답하듯, 온통 보랏빛과 금빛의 세상, 사치와 고요, 관능뿐인 세계로, 그 환상적인 판타스마고리아로 넋을 잃은 채 빨려들어간다.

 

차가운 금속성이 뿜어내는, 공장의 조립라인에서 막 건져올린듯한 기계 생산물의 아름다움에 이토록 매혹당한건 우리가 처음은 아니었다. ‘신즉물주의’라고 불리었던 1920년대 독일의 사진가들은 이 기계의 외관에서 새로운 시대의 미학을 발견했다. 이들이 활동했던 시기는 1차 대전이 끝난 1919년부터 히틀러에게 권력을 내주게 된 1933년까지의 시기, 즉 ‘바이마르’ 시기의 독일이었다. 독일의 산업화는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나 프랑스와 같은 다른 서유럽의 국가들과 비교하여 상당히 늦은 시기에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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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지가 충만했던 온건 좌익의 사회민주당은, 여러 새롭고 긍정적인 정치제도들을 도입해 신생국 독일의 좌표를 정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정치제도의 개선이 아니라, 시급한 경제문제의 해결이었다. 1,320억 마르크의 천문학적인 배상금은 패전국 독일이 아니라 승전국이었어도 갚지 못할 금액이다. 공화국 정부는 어쩔 수 없이 ‘돈을 찍어’ 해결하는 최악의 방식을 선택했고, 그에 따라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인플레에의 늪에서 허덕이는 공화국을 건져주었던 구세주는 미국이었다. 미국이 독일에게 돈을 빌려줌으로써 경제가 살아나도록 도와주면, 독일은 그 돈으로 공장을 돌리고 산업을 일으켜서 영국과 프랑스에 배상금을 갚아나갈 수 있도록 하자는 것. 미국은 유럽 경제를 살려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했고, 유럽 경제가 살려면 독일이 살아나야 했으니, 모두들 만족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으리라. 1923년 미국의 경제적 원조로 독일은 ‘통화 안정기’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는 동시에 여러 분야에서 미국의 강한 입김이 독일에 영향을 주었다. 이런 경향은 구체적으로는 ‘과학기술 낙관주의(Technikoptimisumus)’로 발전했다.

 

특히 미국에 대한 긍정적 시각은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의 자서전을 통해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열광적 반응을 유도하기도 했다. 전쟁을 겪은 독일인들은 처음에는 기술, 과학, 산업 등에 적개심을 지니고 있었으나, 포드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도입된 ‘과학낙관주의’로 지난날 지녔던 과학부정론이 눈 녹듯 사라졌을 뿐 아니라, 본격적인 과학숭배로 발전했다. 사진기는 이러한 ‘테크놀로지의 환상 속에서 도시주의와 기술적 유토피아니즘’을 탄생시키는 주요 매체였다. 이 사진들에는 그 때까지 기술을 대하는 적대적인 태도, 공포의 그림자가 이젠 거의 행복감에 가까워진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신즉물주의를 대표하는 사진가 랭거 파치(Albert Renger-Patzsch, 1897-1966)는 이 작품들을 담은 사진집 『세상은 아름다워 (Die Welt ist schön)』(1928)를 출간했다. 그의 사진들은 기술적 풍경을 대상으로 하여, 그 일부분을 극단적으로 자르거나, 날카로운 초점으로 형태를 묘사하고, 혹은 다양한 부감법을 사용하거나, 명암을 극대화시킨 드라마틱한 구성 등을 지닌 독특한 기법을 통해 산업화되어가는 근대 세계를 ‘객관적으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파치는 각 소재의 독창적 형태에 관심을 쏟으면서, 자연은 물론 산업에서도 그런 미학을 추구하라고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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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기계의 낭만적 풍경화’라고 불린 이 사진들은, 공장과 나란히 배치되어 자연스러운 풍경화처럼 생명성을 부여받았다. 공장에서 생산된 기계의 외관이 또 하나의 자연처럼 아름다움을 발산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 매끄러운 감촉에 이끌렸다. 당시 지배 이데올로기인 산업 발전과 테크놀로지는 이 사진들에서 다시 재현되면서 아름다운 테크놀로지의 풍경화로 자리매김 되었다.


유기적 자연의 옛 정물화, 풍경화의 자리에 이제 테크놀로지에 의해 매일 얼굴을 바꾸는 두 번째 자연, 새로운 자연의 풍경화와 정물화가 자리잡았다. 산업과 테크놀로지가 이루는 새로운 자연 풍경이 생산수단의 차원에서 실제적인 진보를 보여주며 위용을 자랑하고, 대중들은 여기에 도취되고 매혹당했다. ‘진보’라는 믿음이 대중들 사이에 확산되는 현상이 이 신즉물주의 사진들이 보여주는 이미지의 날개를 타고 파급되었던 것도 충분히 상상할만하다.

 

그러나 역사가 전진할 때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산업의 진보가 출발점으로 간주된다면 자연에서의 발전을 역사의 발전으로 오해하는 신화적 오류가 발생한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이 허구적 진보 개념을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어떤 노동자의 모습도 드러내지 않은 채 기술이 일구어낸 낭만적인 도시풍경의 등장! 벤야민이 랭거 파치의 사진들을 분석하면서 ‘비참한 상태를 소비의 대상으로 만드는 유행적 사진술의 방법’에 관한 지적은 잘 알려져 있다. 신즉물주의에 담겨있던 정치적 의미는 많은 경우 혁명적 반영들을 전환시킴으로써, 소비수단으로 전락되었다는 것이 그의 비판이다.

 

산업과 테크놀로지라는 새로운 풍경은 생산수단의 차원에서 실제적인 진보를 보여준다. 그러나 자연과 역사의 혼동은 오류를 낳는다. 산업의 진보가 출발점으로 간주된다면 자연에서의 발전을 역사의 발전으로 오해하는 신화적 오류가 발생한다. 생시몽주의자들이 ‘진보가 가까운 미래의 전망이라는 동화 속에서 모든 사회적 대립이 사라진다’라고 외쳐도 생산관계의 차원에서 계급착취는 변하지 않는다.


벤야민의 후기 논문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의 주장에 따르면, 독일 노동계급은 테크놀로지의 진보와 역사의 진보를 같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잘못된 정치적 목표를 설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는 이 기술적 유토피아 속에서 모두가 행복한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이 땅에서 인류의 행복한 지상낙원이 실현될 수 있을까? 독일 노동계급의 오류는 여기에 있었다. 테크놀로지가 발전하는 방향과 자기 계급이 움직이는 방향이 일치한다고 생각했던 오류와 착각!

 

이런 생각은 공장노동 자체가 정치적 성과라는 환상으로 이어졌다. 공장 노동은 기술적 진보의 한 측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노동자의 것이 아닌 (공장의) 생산물이 노동자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간과되었다. 이들은 자연에 대한 통제력이 진보했음을 인정할 뿐 사회가 퇴행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사회적 퇴행이 2011년 대한민국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 또한 마치 기술의 발전이, 우리 자신의 계급이 움직이는 방향과 일치한다는 과대망상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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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http://blog.naver.com/prologue님의 블로그 ‘강남역’ 모습

 

 

‘대도시가 발하는 근대성의 광채가 진보의 물질적 증거를 눈앞에 들이대고 있었는데, 이런 환등상의 정체를 어떻게 간파할 수 있었을까? 공적 담론에 침투한 진보의 신화적 비유가 대중의식의 신비화임을 어떻게 폭로할 수 있었을까? 반증을 기록한 사료를 뒤지면서 벤야민은 모든 학문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진보의 의미론을 거스르는 저항 이미지(counter-image)를 발견하려 했다.’ (수잔벅모스, <아케이드 프로젝트>) 불행히도 나는 아직 저항 이미지를 발견하지 못했다. 판타스마고리아에 도취되어 달콤하고 매혹적인 꿈의 세계를 허우적 댈 뿐, 아직 그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일까?



글 / 유정아(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이 글은 웹진 <Weekly 수유너머>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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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계보

 

우리에게 주권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전개하는 사상가로 알려진 아감벤에게 영향을 미친 사상가는 매우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단연 주목해야할 이름은 발터 벤야민일 것이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아감벤의 사유는 슈미트의 주권론과 대결 속에서 전개되고 있으며, 이 대결의 과정에서 벤야민은 아감벤에게 끊임없이 사유의 영감을 제공하는 원천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감벤은 정치에 대한 사유에서 벤야민의 계보에 서있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8번테제에서 언급하고 있는 ‘진정한 예외상태’라는 문구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진정한 예외상태를 도래시키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는 벤야민의 구절은 사실상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라는 슈미트의 테제를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벤야민은 어디에서도 그 ‘진정한 예외상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세하게 기술한 바가 없다. 그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와도 같은 것이다. 바로 이 수수께끼를 해명하는 과정사에서 아감벤은 사도 바울에 주목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도 바울이야 말로 최초의 ‘진정한 예외상태’의 이론가인 것이다. 그래서 주권과 법에 대항하는 독특한 정치적 사유의 계보가, 그러나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주목한 바 없는 은밀한 계보가 성립하게 된다. 바울-벤야민-아감벤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말이다.

 

 

주권자와 메시아 : 예외상태를 둘러싼 거인들의 전투

아감벤의 정치적 사유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개념은 무엇보다도 예외상태일 것이다.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호모사케르』는 주권에 의해 권리를 박탈당한 채 단지 생물학적 생명의 지대로 던져진 존재들, 즉 벌거벗은 삶의 비극에 주목하는 책이 아니라 이러한 벌거벗은 삶을 언제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주권의 작동방식에 대한 책이며, 그러한 주권의 근본구조가 바로 예외상태임을 밝히는 책이다. 그리고 ‘호모사케르’ 연작의 두 번째 책인 『예외상태』는 예외상태의 구조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아감벤이 그토록 주목하는 예외상태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예외상태란 일상적인 주권적 질서 혹은 법질서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법질서를 중지하고 그 사태를 종식시킬 때까지 기존의 법질서에 구애받지 않는 특수한 권력이 활동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 사태를 지칭하기 위해 ‘예외’라는 말을 쓰는 데서 알 수 있듯, 이는 일반적으로 정상을 벗어난 사태이자 매우 특수하고 특별한 사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아감벤은 그것이 정상으로부터 벗어난 특별한 사례라거나 비정상적 이탈이 아니라 사실상 정상적인 법질서를 떠받치는 은폐된 근간이라고 주장한다. 아감벤에게 예외상태란 오히려 일상의 법질서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 힘이다. 이렇게 은폐된 예외상태가 전면적으로 현실화되는 것은 법이 수호하고자 하는 질서가 심각하게 위협을 받을 때이다. 그리고 이때 입법기관의 권력이 실질적으로 행정기관으로 이양되는 양상이 나타나게 된다.

 

예외상태는 전쟁이나 내전 등과 같은 비상사태의 발발로 인해 정상적인 법질서가 붕괴될 위기에 처하였을 때 선포된다. 물론 표면적으로 예외상태는 그러한 위기 상황을 다루기 위해 통치 권력이 취하는 형태이다. 하지만 아감벤에 의하면 예외상태가 다루는 보다 심층적인 대상은 전쟁이나 내전과 같은 소요사태가 아니라 그 소요사태가 불러일으키는 공포이다. 그렇다면 그 공포의 성격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통치 권력이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게 되는 무질서에 대한 공포이다. 다시 말해 법이 통제할 수 없는 혼돈, 즉 아노미아(anomia)에 대한 공포인 것이다. 예외상태란 근본적으로 이러한 아노미아를 법의 형식, 혹은 주권적 질서의 외부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 형식과 질서 안으로 포함시키기 위해 권력이 작동하는 형태이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현대 국가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를 통해서 “예외 상태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 중의 하나 - 입법, 행정, 사법 권력의 구분을 일시적으로 폐기하는 일-가 통치의 영속적인 실천으로 전환되는 경향”(『예외상태』)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치 이후 ‘항구적인 비상 상태의 자발적 창출이 현대 국가의 본질적 실천이 되었다’고 아감벤은 말한다. ‘물론 소위 민주주의 국가까지도 포함해서’ 그렇다. 예외상태란 통치질서의 패러다임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벤야민이 말하는 ‘진정한 예외상태’란 바로 주권자가 창출하는 예외상태에 맞서기 위해서 제시된 개념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정한 예외상태는 메시아와 더불어 도래한다. 메시아 역시 현실적인(actual) 법을 중지시키는 자이다. 흥미롭게도 아감벤은 메시아가 도래시키는 ‘진정한 예외상태’ 역시 주권자의 예외상태와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남겨진 시간』에서 아감벤은 예외상태의 일반적 특징을 ‘1)법률의 외부와 내부의 식별불가능성 2)법률의 이행불가능성 3)법률의 정식화불가능성’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특징은 주권적 예외상태나 메시아적 예외상태에서나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양자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바로 이 지점에서 바울의 사유가 중요해진다. 바울에게 메시아의 도래는 언제나 율법(법,nomos)의 중지를 의미한다. 하지만 바울은 율법의 중지가 곧 율법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메시아는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성한다. 중지가 의미하는 것이 폐지가 아니라 완성이란 것은 무슨 의미인가? 아감벤은 바울이 중지를 의미하기 위해 사용한 고대 헬라스어 동사 ‘카타르게인’(katargein)의 의미에 주목한다. 아감벤에 의하면 이 동사의 의미는 ‘작동하지 못하게 하다, 비활성화 시키다, 효력을 멈추게 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아감벤은 ‘카타르게인’이 바울이 자신의 사유를 압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전문용어임을 환기시켜 이 용어가 ‘작동/행위/현실태’의 뜻을 담은 에네르게이아(energeia)의 대착점에 있다는 것을 밝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네르게이아가 현실태를 의미하는 헬라스 철학의 용어이기도 하다는 것이며, 이 용어는 가능태를 의미하는 ‘듀나미스’(dynamis)와 관련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용어분석을 통해 아감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메시아의 도래를 통한 법의 중지(카타르게인)란 현실태(에네르게이아)로 작동하는 법을 다시 그 가능태(듀나미스)로 되돌리는 것이라는 점이다. “메시아적인 것이란 율법의 파괴가 아니라 비활성화이며 수행불가능성이다.”(『남겨진 시간』) 법을 비활성화하고 수행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현실태의 법을 가능태의 법으로 변용하는 것이며 이 변용이 바로 법의 폐지가 아니라 완성이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슈미트의 주권이론, 즉 주권자가 창출하는 예외상태론은 메시아가 도래시킨 법의 중지에 맞서 여전히 법을 현실에서 작동시키기 위한 주권권력의 대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메시아의 도래는 주권권력에게는 법이 위기에 처하는 아노미아를 의미하며 주권권력이 창출하는 예외상태는 바로 이 아노미아를 여전히 법의 형식 속에 붙잡아두기 위한 역설적인 법의 대응-법질서의 중지를 통한 법질서의 유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법과 삶, 그리고 정치

아감벤의 다른 글들이 그렇듯이 『남겨진 시간』역시 그에게 던져지는 최종적인 질문에는 답변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법의 중지, 법을 비활성화하고 수행불가능하게 만드는 법의 가능태화란 우리의 정치적 현실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여전히 모호하다. 다만 주권이라는 괴물에 의해 조건지워진 오늘날 우리의 정치적 삶이 처한 근본적 한계를 아감벤의 논의는 다시금 성찰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현실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더 좋은 법을 만들고, 그러한 법을 만들 수 있는 더 좋은 주권자를 선출하는 것에 온통 정치적 관심이 쏠려있는 오늘날 한국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아감벤은 주권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한 우리는 언제든지 주권적 예외상태에 내던져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주권자가 창출한 예외상태를 일상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주권자의 법을 넘어 법을 삶의 구성을 위한 가능성들의 조합으로 만드는 것이다. 아감벤의 메시아적 정치학은 우리에게 이 문제를 사유하도록 끊임없이 촉구하고 있다.




글 / 정정훈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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