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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_철학.사회

[2015 맑스코뮤날레 리뷰] 신용루저에게 필요한건 뭐? -「금융화와 일상생활 속의 신용물신주의」

[2015맑스꼬뮤날레 리뷰]


신용루저에게 필요한건 뭐? 

- 서동진,금융화와 일상생활 속의 신용물신주의





전주희/수유너머N 회원





신용루저, 금융사회의 겁쟁이


요즘들어 모르는 여자로봇이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온다. 내 개인정보가 최근 야동사업단에서 금융처로 흘러들어간 모양이다. 아쉬울 거 없어 보이는 국민은행부터 각종 저축은행을 비롯, '명동삼촌'이라는 사채업자까지 다채롭다. 무작정 급하게 돈을 빌려주겠다고도 하고,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 수 있는 행운을 거머쥐었다고 하면서, 빵빠레도 울려준다. 빌리지도 않은 대출금을 저금리로 갈아탈 기회를 '이번만' 준다며 1번을 누르라고 해서 잠결에 1번을 꾸욱 누르다가 화들짝 잠에서 깬다. 

대체 어디서 얼만큼 내 신상이 털리고 있는지 가늠도 할 수 없는 지경인데 뉴스에서는 가계부채가 1100조를 돌파했다고 한다. 이 숫자가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체감하게 되는 것은 하루에도 수 차례 걸려오는 여자로봇의 집요한 구애덕이 크다.   

빚을 내서 집이나 차를 사고 싶은 생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신용카드 한 장 없는 나같은 사람들은 신용사회의 불모지거나 무능력한 신용루저다. 여전히 고루하게 적금을 붓고, 현금사용을 즐기며, 빚을 내면 삼대가 망하는 줄 아는 시대착오적 겁쟁이다. 오늘도 여자로봇음성은 나에게 신용을 계몽하기 위해 전화를 걸고, 문자메세지를 보낸다. 



두툼한 지갑으로 부채광풍을 끌 수 있을까?


금융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오늘날, 부채는 전통적인 의미의 ‘빚’이 아니라 성장을 위한 지렛대로 간주된다. 이른바 부채주도 성장을 주문처럼 외우는 이들은 가계부채가 1100조가 돌파되었어도 아랑곳 하지 않고, “아직은 견딜만한 수준”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견딜만한 수준이라는 최경환 부총리의 말은 아주 틀린말은 아니다. 다들 ‘아직은’ 견디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계속 견디는 이상 우리는 견딜만한 수준’안’에 있는 것이니까. 


반면 이 꾸역꾸역 견디고 있는 상황이 거대한 파국의 징조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목소리도 심상치 않게 들린다. 지난 3월 미국의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Mckinsey)는 우리나라를 '세계 7대 가계부채 위험국'으로 꼽았다. 가계가 1년 동안 번 돈에 비해 빚이 얼마나 많은지를 나타내는 자금순환표상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지난해 이미 163%를 넘어, 미국의 113%는 물론 금융위기 위험국가인 스페인의 130%보다도 훨씬 높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재 가계부채가 불어나는 속도가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빠르다는 점에서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각주:1]



출처: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3/09/05/0200000000AKR20130905166100002.HTML


이러한 상황에서 이른바 ‘두툼한 지갑론’으로 표현되는 소득주도 성장은 매력적이다. 요즘 미국은 최저임금인상 열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월마트를 시작으로 대형 유통업체들의 연쇄적인 최저임금인상이 각 주의 최저임금 인상으로 번지고 있고, 오바마 대통령은 법정 최저임금을 10.10달러로 인상하는 방안을 내놓은 상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문재인을 중심으로 부채주도 성장에 대응하는 새로운 대안으로 소득 주도 성장을 기치로 내걸었다. 이 그럴싸한, 가뭄의 단비같은 정책은 ‘나쁜부채 대 좋은소득’이라는 대립을 전제하고 있다. 서동진이 맑스코뮤날레에서 발표한 ‘착취의 회계학 : 금융화와 일상생활 속의 신용물신주의’는 ‘부채 대 소득’으로 대별되는 성장론의 두 축이 과연 우리가 통상 생각하는 만큼 양 극단에 위치한 방향인지를 되묻고 있다. 


이를 위해 두 가지 방향에서 이 문제를 탐사하고 있는데, 첫 번째는 맑스가 <자본 1권>에서 언급한 물신주의에 대한 고찰이다. 맑스의 물신주의는 상품 및 화폐 물신주의에서 멈추지 않는다. <자본 3권>의 ‘삼위일체의 정식’에서 맑스는 자본주의에서 나타나는 세가지 형태의 소득에 대해 말한다. 자본가의 소득, 토지소유자의 소득, 노동자의 소득. 이들 소득이 각기 세 개의 서로 다른 독립된 원천이라고 오인되는 것이 '객관적 사실'로 간주되는 지경이야말로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물신주의가 한층 더 발전한 형태라는 것이다.

여기서 노동자의 소득이 마치 노동의 대가인 것 마냥 진한 땀내나는 진정한 소득으로 간주되고, 이자나 이윤은 노동하지 않은 배부른 자본가들이나 지주들의 파렴치한 탈취물이라는 구별이 나온다. 이는 전통적으로 좌파들이 간직하고 있는 노동과 자본에 대한 감수성일진데, 서동진은 이러한 발상이야말로 자본을 인격화 해 마치 독립적인 소득을 생산하는 실체로서 자본가와 노동자를 상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맑스가 비판한 자본물신주의의 극단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한다.  


둘째, 이러한 궁극의 ‘자본물신주의’는 신자유주의 금융화와 만나 불평등과 빈곤, 삶의 불안정성을 토대로 임금과 신용이 결합되는 어벤져스급의 울트라 신용물신주의를 만들어낸다. 



부의 원천으로서의 노동, 그리고 그 노동의 대가로서의 임금이라는 환상은 금융화를 경유하면서 새로운 물신주의적 형태로 뒤바뀐 채 더욱 공고해진다. 새로운 물신주의는 이자 낳는 자본이 만들어내는 극단적인 형태의 환상에 노동자를 연루시켰다. 노동자는 이제 노동자와 가계의 개인적 소득을 수탈하려는 금융자본의 기획에 포획되고 있다. 


-서동진, (2015 맑스코뮤날레 자료집 <다른 삶은 가능한가> 156.)



서동진은 발리바르의 논의를 빌어 물신주의가 주관적인 환상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물신주의는 주관적인 환상인 동시에 이 환상을 통해 작용하는 객관적인 세계의 편에 선 환상이다.”(152) 신자유주의가 신용물신주의를 만들어냈다면, 이는 신자유주의를 통해 사회적 관계를 재구성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요청되는 필수적인 매개이다. 


금융이 일상화되었다는 것은 돈이 돈을 버는 금융적인 매커니즘으로 우리의 삶과 태도, 감수성이 재편된다는 것이다. 부채는 더 이상 언젠가는 갚아야할 ‘빚’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부채가 소득의 원천으로 둔갑하는 세상에 살면서도 이젠 더 이상 이러한 현상이 낯설지 않다. 어느 새 가계부채 1100조원이라는 숫자를 보고서도 무심한 듯 쿨하게 ‘투자’를 위해 당당하게 부채를 운용할 수 있는 능력이 고급진 능력이 된 세상이 성큼 도래했다. 이러한 세상에서 소득이란 부채경제를 활활 타오르게 해줄 밑불에 불과하다. 신용물신주의와 금융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사회적 관계가 지속되는한 소득은 부채의 반대편이 아니라 부채의 편에 있을 수 밖에 없다. 


미국에서 불어오는 최저임금 열풍이나, 문재인을 비롯한 일부 진보적인 경제학자들의 소득주도 성장론은 신자유주의의 두툼한 지갑에 구멍을 낼 수 있는 대안이 아니다. 설령 월가를 상징하고 있는 1%의 지갑을 털어 집집마다 고기와 술을 공평하게 나눈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는다. 서동진이 굳이 맑스의 물신주의를 끌어와 부채 대 소득의 구도를 깨고자 하는 의도는 금융자본주의의 전황과 폭력을 고발하고 저임금 노동자들의 현실을 개탄하는 ‘분노’만으로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물신화된 사회적 관계를 바꾸지 못한다는 차가운 현실인식이 자리한다. 



부채와 노동의 이중 페티쉬를 넘으려면


부채도 문제고, 임금을 올리자는 소득주도 성장도 대안이 아니라면 대체 어쩌란 말이냐. 부채사회에서 노동과 부채의 이중 물신주의를 넘어 대안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사실 임금과 소득은 다르다. 소득에는 임금 뿐만 아니라 지대와 이윤이 포함된다. 따라서 소득주도 성장이 반드시 부채주도와의 반대편에서 불평등을 해소하는 방향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부동산 투기를 활성화해서 중산층의 소득을 늘리기 위한 각종 정책들이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우산 아래로 모여들 가능성도 농후하다. 반복하건대 우리는 이미 부채역시 자산의 일부라고 간주되는 세상의 한 가운데에 살고 있다. 

부채와 노동의 이중 페티쉬를 통해 금융화된 일상을 진단하고자 하는 의도는 '화폐는 악하고 노동은 선하다'는 이분법 아래서는 오늘날 금융화된 사회를 벗어나기 힘들다는 현실인식이 자리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사안을 명쾌하게 자르는 '물신주의'라는 검술 보다는 매우 세밀하게 현실을 벗겨낼 수 있는 조각칼의 기술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미래를 향해 시선을 돌려도 전망이 안보이면 현실을 뒤집어 파헤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검토해야할 지점을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자. 우선 ‘노동’의 문제이다. 신자유주의가 악화시키고 있는 불평등은 불안정노동에 따른 임금 감소, 실업의 증가와 관련이 있다. 사회의 영역은 시장화되고 개인들은 개별화되면서 이 시대의 프롤레타리아는 금융배제층이라고 불리는 신용루저의 형상을 띠고 나타난다. 반면 전문직과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연금, 주식, 펀드, 부동산 등의 금융상품으로 소득을 늘려왔고, 늘어난 소득만큼 부채사회에 강력하게 결박되어 있다. 이렇듯 노동은 이제 하나가 아니며, 이중화된 노동의 지형을 고려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사회적인 것’의 재설정에 대한 문제이다. 신자유주의가 집요하게 ‘사회’를 둘러싼 개념이나 실천을 공격한 만큼, 사회적인 것이 담론의 수준이던, 실천의 수준이던 복귀하고 있는 듯 하다. 한국사회만 해도 복지를 둘러싼 논쟁은 보다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문제는 자본주의가 문제고, 시장화가 문제고, 개인화된 것이 문제이니, 무작정 ‘사회’라는 보자기에 싸그리 담아버린다고 한들 심리적 상쾌함만 얻는다는 데 있다. 우리나라는 '아직' 해당사항이 없지만 복지국가에 대한 경험은 사회를 둘러싼 개념과 실천의 재설정을 필요로 한다. 

과거 서구사회를 중심으로 경험한 복지국가는 임금과 국민을 중심으로 설정되었다. 복지국가는 ‘노동하는 시민’의 정상성을 기준으로 균등적인 삶을 위해 위험으로부터 보장받는 대신 시민의 규범에서 벗어나는 사회적 일탈들을 조절해왔다. 노동할 수 없는 사람, 불법체류자, 장애인들을 위한 사회보장 정책이 있다고 하더라도 ‘임금’과 ‘노동’의 중심성은 ‘사회’를 둘러싼 실천을 구성하는 강력한 이념이었다. 그런 면에서 임금과 분리된 사회정책의 그림을 그려볼 필요가 있다. 이는 서동진이 발표문의 말미에 “임금수입에 의존하지 않은 채 생존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 내는 일”의 중요함을 강조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 http://news.kbs.co.kr/news/NewsView.do?SEARCH_NEWS_CODE=3068851&ref=A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