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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_철학.사회

[2015 맑스코뮤날레 리뷰] 감성의 코뮌주의를 위하여 - "감성의 혁명과 일상생활의 정치화"

감성의 코뮌주의를 위하여




문 한 샘 / 수유너머N 회원

 

 


2015년 맑스코뮤날레의 첫 번째 메인섹션은 "감성의 혁명과 일상생활의 정치화"라는 제목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수유너머N의 세 분이 발표를 했고,<대중정치와 정치적 감수성의 몇 가지 체제>(이진경), <새로운 감성교육과 공감의 공동체: 탈근대적 일상의 구성에 관한 시론>(최진석), <공동의 역량을 구성하는 코뮨의 정치>(정정훈)라는 제목의 발표였습니다. '일상의 변혁'이라고 하는 이번 맑스코뮤날레의 부제에 잘 어울리는 흥미로운 발표들이더라구요^^ 여기 간단한 리뷰를 적어봅니다.

 






감수성의 '체제들'


이진경은 정치의 문제를 사고하기 위해 감성/감수성의 문제를 중요하게 사고한다. 이진경은 대중정치가 감수성에 따라 강하게 영향받는다고 본다. 이 감수성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것인데, 특정 감수성에 따라 대중들의 사고와 행동이 집단적으로 규정된다는 점에서 이진경은 그것을 감수성의 체제라고 부른다. 오늘날의 대중정치에서 이러한 감수성의 체제를 고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즉 “특정 시기마다 대중정치에 ‘가담’하거나 ‘개입’하기 위해, 또는 대중에게 어떤 촉발을 가하기 위해 우리 자신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우리의 감수성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 생각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 이진경은 감수성의 체제들에 대한 분석을 제시한다. 숭고의 정치, 재현의 정치, 대의의 정치, 표현의 정치라는 네 가지의 체제가 그것이다.

 

먼저 숭고의 정치는 특정한 투사의 형상을 통해 죽음을 무릅쓰는 투쟁의 선을 가동시키는 정치다. 전태일의 경우가 대표적인데, 투쟁 속에서 죽어갔던 전태일의 형상과 자신을 동일시하고자 하는 욕망이 투쟁의 동력을 이끌어간다. 실제로 이는 7,80년대의 지배적인 감수성이었다. 이와 달리 재현의 정치는 90년대의 김대중으로 대표된다. 재현의 정치는 특정 대상에 따라 대중의 욕망이 재현되고 대변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정치다. 한편 대의의 정치는 그 대중의 욕망이 제도적 차원으로 옮겨온 것을 이야기한다. 재현의 정치에서 강한 정치적 욕망의 대상으로서 특정 대상이 중요한 것이었다면, 대의의 정치에서는 그것이 정당과 같은 제도적 장치로 환원된다. 표현의 정치는 숭고의 정치, 재현의 정치, 대의의 정치와 매우 다른데, 그것은 2000년대의 표현적 대중들이 비장한 감정이나 중심적 대상에 대한 열망, 혹은 제도에 대한 강조로 설명될 수 없는 흐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들은 “주어진 사건이나 사안에서 자신들이 느낀 감응을 나름의 방식으로 창안해 표출하려는 욕망이 두드러진 대중”이었다. 2008년의 촛불 집회나 그 이후 두리반 투쟁 등의 양상은 하나로 수렴하는 투쟁이 아니라 “표현적인 특이성의 창안과 표출, (……) 표현적 차이를 즐기는 유희적 감정, 표현적 취향으로 무리를 짓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각각의 정치적 감수성들 사이에 이행과 결합의 양상이 얼마든지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표현적 대중이 과연 정치적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렇다는 대답을 할 수 있다. 이진경은 오늘날의 대중정치에 있어 표현적 대중의 감수성에 주목하는 것, 그럼으로써 감수성들 간의 간극을 극복하고 서로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2008년 촛불집회 모습 / 출처: 오마이뉴스



 

작은 것들과 공감하기


최진석 역시 감성에 주목한다. 그는 최근의 일베 현상과 세월호 관련 이슈들이 보여주는 문제성에 대해 감성을 통한 공감 부족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문제의 원인으로 “이성과 합리의 기제가 아니라 차라리 감성의 능력으로서의 공감(empathy)이 결여된 것”을 꼽는다. 공감의 부족이야말로 민주주의와 정치의 저변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일베의 폭력성은 단적으로 공감능력의 결여 때문에 생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일베는 특정 방식의 공감은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자기들만의 공동성을 확보하고 일종의 공동체 구성의 쾌감마저 누리고” 있는데, 이 공동성은 기성 세대와 과거 민주화 세력 등에 대한 반감과 증오심에 기인한다는 점에서 감성 또는 공감에 기반을 둔 것이다. 이는 감성 자체의 결여가 아니라 그것이 특정 방향으로만 작동하고 있는 것이 문제임을 뜻한다. 최진석은 이를 ‘큰 것에 대한 동일시’라 칭하며, “일베의 감성적 연대를 구성하는 구심점은 바로 ‘큰 것’에 대한 동일시, 곧 국가에 대한 전적인 애착과 숭배에 있기 때문”이라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태에 대한 해결 역시 그 연장선 상에 있다. 즉 최진석이 공감의 능력을 확장하기 위해 주목하는 것은 바로 ‘작은 것에 대한 동일시’이다. 큰 것과의 동일시는 가장 작은 것들을 감싸 안지 못한다. “자신과 타자라는 ‘가장 작은 것’들 사이의 불가능한 동일시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큰 것’의 척도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전화될 수 있다.” 최진석은 도미야마 이치로가 말하는 겁쟁이들의 연대, 혹은 예시적 정치로서의 문학작품에서 드러나는 고통받는 타인에 대한 공감의 발생에서 그에 대한 단초를 찾고 있다.

 




출처: "일간베스트 저장소 로고" by Buzzbuzzwili - 자작. Licensed under CC BY-SA 4.0 via 위키미디어 공용 -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EC%9D%BC%EA%B0%84%EB%B2%A0%EC%8A%A4%ED%8A%B8_%EC%A0%80%EC%9E%A5%EC%86%8C_%EB%A1%9C%EA%B3%A0.png#/media/File:%EC%9D%BC%EA%B0%84%EB%B2%A0%EC%8A%A4%ED%8A%B8_%EC%A0%80%EC%9E%A5%EC%86%8C_%EB%A1%9C%EA%B3%A0.png




구성적 원리로서의 민주주의


정정훈의 글은 일차적으로 일상생활의 정치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정정훈은 우선 현대정치철학의 맥락에서 정치 개념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논의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이러한 논의에 따르면 정치 혹은 민주주의란 국가의 통치 형태나 법제적 형식으로 간주될 수 없다. 오히려 그 질서에 파열을 내는 것으로서의 사건이 정치와 민주주의를 정의하게 한다. 그런데 여기다 대고 정정훈은 이렇게 묻는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오직 사건으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사람들의 정치적 관계를 능동적으로 만들어가는 구성적 원리일 수는 없는 것일까?” 즉 민주주의를 사건으로 정의할 때 자칫 그것이 민주주의 정치를 우발적인 어떤 것으로 만들어 데모스의 자기통치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정훈은 사건으로서의 민주주의와는 다른 차원의 민주주의를 두 가지 차원에서 생각한다. 우선 사건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사고하면서도 그것을 데모스의 역량이라는 차원에서 사고할 수 있기 위해 스피노자의 철학을 검토한다. 양태의 실존역량을 집합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스피노자의 견해를 통해, 정정훈은 “코뮌을 일상적 관계로 조직하는 것이 지금과 같은 시대에 필요한 일상적 민주주의의 실천 방식”이라는 입장을 밝힌다. 즉 데모스의 정치적 역량이란 “오직 타자와 함께 구성하는 연합체라는 공동의 관계성 속에서만 실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정정훈은 그러한 코뮌의 조직 역시 국가체제라는 엄연한 현실적 조건상에서 구현됨을 강조하며, 권력의 작동방식 자체에 자유의 계기를 새겨넣는 작업 역시 포기될 수 없고 끝없이 계속되어야 함을 역설한다. 정정훈이 생각하는 민주화의 정치란 이러한 두 계기를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감성의 정치, 감성의 코뮌주의


재미있는 것은 이진경, 최진석, 정정훈 세 사람의 문제의식이 다른 만큼 각자의 글에서 ‘정치’의 형상이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진경에게서 어떻게 대중에 ‘개입’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운동가의 형상이 나타난다면, 최진석의 경우 정치는 사회를 매개로 ‘타인들’과의 삶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답해야 하는 과제를 가진다. 그리고 정정훈에게 정치는 대의적 제도나 통치 장치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며 데모스, 즉 민중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통치라는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이진경과 최진석은 공히 감성/감수성에 주목한다. 이진경이 감수성의 체제들을 제시하는 것은 오늘날의 대중정치에 있어 감수성을 고려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고, 최진석이 감성교육을 강조하는 이유는 타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최소한의 공유된 감성이 필수적으로 요청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감성은 정치의 조건이다’. 그런데 이러한 명제는 사실 정정훈의 문제의식과도 맞닿아 있는 것이다. 정정훈이 정치를 데모스의 자기통치로 정의할 때 그러한 자기통치에서 중요한 것은 코뮌 혹은 코뮌의 역량을 만들어내는 것이 된다. 대중에 개입하기 위해 감성이 중요한 만큼, 또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간에 공감하며 살아가기 위해 감성이 중요한 딱 그만큼, 데모스의 역량으로서 코뮌을 조직하기 위해서도 감성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공동 역량으로서의 코뮌 구성을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 요인은 바로 기쁨의 감응(affect)이며, 이 기쁨의 감응이란 다름아닌 감성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데모스의 코뮌적 역량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바로 정치의 핵심적 문제라면 여기서 감성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논의들은 모두 감성을 통해 정치에 새롭게 접근하고자 하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추가적인 질문들은 남는다. 가령 이진경의 글에서 표현적 대중에 대해 긍정한다면 우리는 일베 사태에 대해서도 긍정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면 표현의 정치에 대한 보다 세밀한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최진석의 경우, 작은 것과의 동일시에 대한 강조는 정말 현실적인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국가에 대한 동일시는 우리 모두에게 피할 수 없는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일베 회원인 것은 아니다. 동일시라는 키워드를 통해 정치적 현상을 분석함에 있어 좀 더 구체적인 분석이 필요해 보인다. 한편 정정훈은 민중이 직접 구성해나가는 민주주의를 강조하는데, ‘사건이 기획될 수 있는가’ 라는 거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