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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_문학.예술

[풍문으로 들은 시] 몸이라는 예배당-성동혁, 『6』(민음사, 2014)

 

  

 하이데거는 시인을 일컬어 존재의 거처를 지키는 파수꾼이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왜 스스로 아무도 돌보지 않는 존재의 터, 텅 빈 그 자리의 문지기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그들의 시쓰기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수행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시를 들여다보는 일은 나와 더불어 세계의 본질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 됩니다. [풍문으로 들은 시]에서는 2000년 이후의 출판된 한국의 좋은 시집들을 한권씩 소개하려 합니다. 풍문으로만 들었던 시를 읽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코너소개

 

 

 

 

 

몸이라는 예배당

성동혁, 『6』(민음사, 2010)

 

수유너머n 회원/하얀

 

 

 

 

 

아픔의 입구

 

가슴이 열린 채로 묶여 있었다/유약이 쏟아졌다/유약을 뒤집어쓰고 벽을 오른다 생각했다/누워 소변을 보고 누워 부모를 기다리며/누워 섬광을 수확하고/언제나 눈을 뜨면 가슴이 열린 채로/묶여 있었다 누가 인간을 나무처럼 만드는지 알 수 없었지만/나는 다만 일어나/실눈을 뜨고/푸른 간격으로 떨고만 있는 아이들에게/안대라도 씌우고 싶었다

-<측백나무>

 

 

 현대인들이 공감능력을 상실했다는 말을 종종 기사에서 읽는다. 무공감의 시대. 그런데 이상하다. 모두가 서로에게 공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는 공통의 문화를, 이슈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가령 얼마전 열린 무한도전 가요제에서 불린 노래들은 일주일이 넘도록 음악차트의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고, 어떤 이슈들은 포털의 이슈검색어 순위를 점령하곤 한다. 그래서 때론 거꾸로 이런 음악차트나 이슈검색어차트를 통해서 그 당시 대중들의 공통의 관심사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것에 공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것만을 외면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 공감하기 어려운 것은 전염되기 쉬운 것이다. 전염되면 온통 를 흔들어버리므로 두려운 것일 테다. 그렇기에 애초에 외면해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아픔이다. 그리고 이 시대에 가장 외면 받는 것은 바로 죽음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지만, 우리는 그런 시대는 지났다고 상상한다. 그것은 죽음 자체의 아픔, 죽음으로부터 오는 아픔을 외면하고 싶은 자위다. 이런 시대에 성동혁의 시집 6은 불편하다. 이 시집은 통째로 아픔이다. 아이 때부터 아파 여전히 아이인 채로 아픔을 채색하는 그의 시집은 우리에게 아픔의 언어를 전달한다.


 

*영화 렛미인의 한 장면

겨울을 배경으로 서 있는 이 나무들은 성동혁의 측백나무를 닮았다.

영화에서 외로운 이들도, 사라지는 이들도 이 나무와 함께 있었다.

 


몸이라는 예배당

 

발가벗겨도 창피하지 않은 방에서/나의 지루한 등을 상상한다 사내들이 아이의 배를 때리는데 여전히 아이가 죽는다

 

마스크를 오래 보고 있으면 마스크 뒤의 얼굴 그 얼굴 안의 얼굴/보인다/친구가 없는데 친구 목소리가 들리는 방 대답하지 않는데 손뼉 치는 방 낮과 밤이 없는 방/침대 밑에 강이 흐른다 더 무거워지면 익사할 수도 있겠다 풍덩 당신의 본명은 성경이었는데 이름값 못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나를 때렸다 분명/난센스라 했다 너는

 

그녀가 현관 밖에 사 일 동안 서 있고 나는 현관 안에서 죽었다(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왜 만날 나만 잔다 하시니)살았다 어제. 어떠한 신은 아니었다 그래서 우린 서로 믿지 않는다

 

나의 구멍이 도넛 같다면 얼마나 달콤하게 죽을 수 있을까 헤드폰을 껴도 밀려오는 반투명의 소리들을 모른 척하고 달콤한 입체를 찾는다 긴 이름들이 비뚤어진다

 

여섯 번째 일들이 오고 있다

-6

 

 아픔이 새겨진 몸의 언어, 이것이 시집 6이 펼치고 있는 언어이다. 이 언어는 한없이 낯설고 그래서 의문투성이의 것이다. 이 낯선 세계에 들어서면서 이 시집이 신의 자장 안에 쓰인 시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시 곳곳에 천국, 나의 아버지, 핍박, 가시밭, 면류관, 십자가를 끄는 교회, , 신앙과 종말, 기도, 성경, 마가복음와 같은 단어들이 때문이다. 시집 1부에서 이 신의 세계는 너무도 강력하게 화자의 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는 신의 예배당 안에서 위치해 있다. 신은 동산 위를 걸어가는 붉은 포자”(홍조)로 명명하며 내 존재를 위치 지우는 절대자로 나타난다.


 하지만 아픔은 절대적인 신의 자리를 점점 흔들어 놓는다. 이는 이렇게 세상이 지옥인데 대체 신 따위가 어딨어?라는 식의 허무주의적 부정은 아니다. 신의 자리에 대한, 혹은 신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시집에는 몇 개의 시가 1부와 시집의 마지막인 4부에 같은 제목으로 반복된다. 6도 그러한 시 중 하나이다. 1부와 4부의 시 6을 읽어보면 신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16에서는 친구도 없이 발가벗겨진 방에서 사내들에게 배를 맞는 아이를 외면하는 신에 대한 원망이 보인다. 이때 신은 여전히 구원자, 절대자의 위치에 있기에 아이를 아픔으로부터 구원하지 않는 신은 원망의 대상이 될 터이다. 신에 대한 인식의 전환은 정말이지 엉뚱하게 아픈 나의 몸으로부터 온다. 6에서 화자는 어제 죽었다 살았다. 죽었지만 부활한 자, 화자는 부활하였지만 구원자도, 절대자도 아닌 난센스일 뿐이다. 화자는 여섯 번째 자신에게 주어진 목숨을 살고, 여전히 외롭게 죽어가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뿐이다. 그렇다면 신이라는 것은 묵묵하게 고통을 몸으로 맞이하며, 동류의 고통에 귀를 여는 자이리라. 이로써 성동혁은 몸의 아픔을 아로새기는 아픔의 예배당이 된다. 그리고 그곳은 죽음을 앞둔 이들이 벌이는 마지막 전투의 장소로 화한다. 그들은 절대 침묵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외면할 뿐이다. 시집 4부의 6에서 모여드는 아픔들이 내는 전장의 소리들을 들어보시라.

 

(...)

지옥엔 더 아름다운 무지개가 있다고 하였다/그리고 그곳엔 더 아름다운 말들이 달려오고 있다고 하였다/성스럽게 성스럽게/사납게 사납게 /말굽에 묻은 천사들의 머리카락을 털며

 

하지만 지옥엔 나만 있다고 하였다/성스럽고 사나운 말의 등에 탈 사람도/더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질 사람도 없다고 하였다/우린 천국이었지만 둘 중 하나만 사라지면 지옥이었다/내 마지막 청각의 역사

 

나는 귀를 뜯으며 스스로 조용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수많은 솜들로 피를 건져냈지만/강은 푸른 피부를 잃었다/피 흘린 자 많아 붉게 붉게 검붉게 검붉게 검게 흐르던 강/부족의 마지막 전투가 있던 검은 강/비명도 아이들이 버려 놓은 솜도 희게 검게/처절하고 아름다운 말/그녀의 입에서 젖은 얼굴로 뛰어오르는 말/성스럽고 사나운 말

(...)

길몽을 꾸지 못한 것들은 죽어 갔다/아름다운 전투를 위하여

 

서사는 발톱에서 시작되었다/포드득포드득 문 앞의 작은 날갯짓/포드득포드득 문을 열면 무채색의 카나리아/감탄사로 묶이긴 아까운 소리 카나리아

(...)

횡경막에서 뿌리를 뽑으면 걸어 나오는 소리

(...)

처음으로 사진기 앞에 선 우리들의 멸망사/하나 둘/커다란 언덕

-<6>부분

 


아픔이라는 숲의 군락

 

 성동혁의 아픔의 언어는 그만의 고유한 몸의 언어이기에 그 아픔에 다가가본 적 없는 이에게 한없이 낯설다. 그래서인지 시집을 펴들다 접다를 반복하게 된다. 아픔이라는 입구는 쉽게 열 수가 없다아픔에 대한 연민의 시선을 걷어내는 일이 쉽지 않다. 또한 아픔을 오롯이 마주하고 몸이 전하는 그것의 진동을 그대로 느낀다는 것은 더욱 어렵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을 상실한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그렇기에 그 아픔의 진동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 역시 기이하기만 하다. 성동혁은 이 기이한 입구를 우리에게 열어둔다.


 그 문을 열고 당신이 어떤 풍경을 마주할 것인가. 우리가 상실한지 오래인 멸종 위기의 능력, 아픔의 공감이라는 능력을 다시금 생성하기를. 그래서 아픔이 숲의 군락이 되기를. 그제야 아픔은 한 나무의 생을 뒤흔드는 고통의 바람이 아니라, 숲의 물결이, 숲 고유의 무늬, 생동하는 숲의 리듬으로 변환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