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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_웹진강의

[정화스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 4강 첫번째

[정화스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강 첫 번째 강의





녹취 및 정리: 황호연 / 수유너머N 세미나 회원 





*정화스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강의는 총 5회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한 강 한 강이 한 편의 글이 되기에는 매우 긴 편이라, 독자분들이 보기 편하시도록 세분하여 업로드할 예정입니다. 이번 글은 정화스님 강좌 4강의 첫 번째 부분임을 알려드립니다. 그 전의 강의는 이 웹진의 지난 글을 확인해주세요.










*정화 스님께서 강의 교재로 사용하신 책은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백석현 옮김, 야그 출판사, 2007년)입니다. 현재 절판되었고, 이 책을 개정해 다른 출판사에서 펴낸 책이 있습니다.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박성현 옮김, 심볼리쿠스 출판사, 2012년)입니다.

*강의를 직접 들으신 분들은 Ⅰ.『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와 Ⅱ.『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정동호 옮김, 니체편집위원회 감수, 책세상 출판사, 2000년), 그리고 그 외 번역본들 중 편한 것을 참고하셨습니다.

*녹취록에서는 강의 중에 언급된 위 책 두 권(Ⅰ,Ⅱ)의 해당 부분을 스님이 말씀 하신 것을 참조하여 재구성해서 옮깁니다. 페이지 표시는 가독성을 위해 옮긴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부분만 하였습니다.

* 페이지 표시의 예: Ⅰ번 책의 36쪽, Ⅱ번 책의 38쪽은 아래와 같이 표기합니다. -> (Ⅰ:36, Ⅱ:38)






[4강의 책 범위| Ⅰ번 책:87~104쪽, Ⅱ번 책:89~107쪽]



(4강 시작)


 (Ⅰ:87, Ⅱ:89)13장입니다. 첫 번째 줄, ‘나는 숲을 좋아하지. 도시에서 사는 것은 별로 안 좋아. 음란한 사람들이 너무 많잖아.'라고 합니다. 숲을 좋아하고 도시를 안 좋아합니다. 여기에서 음란이란 ’욕망'입니다. 도시는 아마 사람의 주거 등등이 꼬아져서 우리들의 욕망을 가장 극대화 시켜놓은 공간입니다. 숲은 우리에게 다가올 때에는 그런 공간이 아니긴 합니다만, 거기도 사실상 살벌한 공간이지요 허허.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건 아닙니다. 그런데 숲을 그냥 크게 보면 생태학에서 상생과 상극이 균형을 맞춘 공간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상생은 무언가가 발현되어 활발발하게 활동하는 것이라면 상극은 그것이 정도를 넘어서서 곤란하지 않을 정도로 억제하는 습관입니다. 그런데 도시에서 살더라도 상생과 상극을 가장 잘 하고 있는 것이 우리 몸입니다. 몸은 우리가 말하는 오행으로 상생상극을 하고 있는데, 이렇게 생긴 그림을 아마 보셨을 겁니다.



그림 출처: http://www.simmyung.co.kr/zHome/custmer/custmer_11.html



 목화토금수라고 하는데, 목은 간담, 화는 심,소장. 토는 비위, 금은 폐대장, 수는 신방광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열 가지 장부가 있는데 그 가운데 상생과 상극이 일어납니다. 목에서 화로 가는 것은 상생의 통로고, 목에서 토로 가는 것은 상극에 해당합니다. 토라는 것은 비위장의 기운인데 비위장의 기운만 상대적으로 크게 되면, 토가 극을 하고 있는 신장과 방광이 그 기운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점차적으로 약해져서 젊었을 때나 상당한 중년 같은 때는 그 약해진 부분에 병이 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자기에게 강한 부위들에 병이 오면 더 이상 고쳐볼 길이 없습니다. 병이 온다는 말은 상생과 상극을 통해 몸의 균형이라는 것을 더 이상 맞춰보기 어려운, 그런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몸이 전체적으로 상생과 상극의 균형을 잘 맞추는 것이 여기서 말하는 숲과 같습니다. 도시는 그 가운데 우리가 원하는 어떤 것으로만 힘을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다 보니, 다른 한 곳이 현저히 줄어들어서 균형이 맞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특히 도시공간은 여기서 보면 ‘음란'이라고 했는데, 욕망을 극대화시키는 곳이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욕망이라는 것을 여기서는 조금 비난적인 의미로 말했습니다만, 어떤 의미에서는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근본 동력입니다. 그래서 욕망하는 것 자체로는 문제 삼을 수가 없습니다. 살려고 하는 것이나, 안정을 취하는 것이나 등등, 모두 생물들, 그 밖에 다른 것들이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물질도 마치 안정적으로 존재하기를 원하는 듯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원소의 최외각 전자가 꽉 차있지 않고 뭔가 자리가 비어있다면 다른 전자들을 모아서 안정적으로 자기 궤도를 유지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엔 완전한 물질이지만 그 물질도 자기 나름대로 적당하니 안정적으로 유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기서 말하는 상생과 상극의 조화를 이루려는 것이 바로 '욕망'인 것입니다. 그래서 상생과 상극의 조화를 이루는 욕망은 우리 삶을 참 좋게 만드는데, 그것이 한쪽으로 치우치면 병적인 것이 되지요. 여기서 음란한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은 병적인 욕망의 확장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가 도시를 생각하면 좋은 측면도 많지만 다른 측면으로는 이런 것들이 너무나 잘 보인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지난번에 한번 말했습니다만, 첫 번째 시간에 사람의 정신은 세 번 변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는데, 불교에서도 세계를 세 가지 정신 상태로 나누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욕계인데 감정과 의식의 분별, 이 두 가지가 욕계입니다. 자기의 감정을 따라서 어떤 사건을 규정하려고 하고, 자기가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어떤 일반상(이미지)을 취해 분별하려고 하는 두 가지 속성이 욕계를 이루는 가장 근본입니다. 예를 들어 이것을 우리가 컵이라고 부릅니다. 컵이라고 부를 때 이것은 무슨 과일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즉 과일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분별을 먼저 하고 있고, 이것을 컵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이름을 붙였는데 실제 내용은 ‘나는 이것을 컵이라는 것으로 쓰고 싶다.'고 하는 것이 들어있지요. 분별하는 것은 분별을 통해서 그것이 나에게 어떻게 접근해 오느냐 즉, 내가 내 욕망이 원하는 대로 그 사건이 나에게 접근해주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욕망과 욕계는 감정과 분별에 의해 자기 삶을 그렇게 살아가는데, 이 욕망이라는 것은 나에게만 있으면 온 세상을 내가 욕망하는 대로 살 수 있지만, 욕망들이 계속해서 충돌을 하는 것이죠. 어떤 사람은 욕망을 이렇게 욕망하고 다른 사람은 저렇게 욕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죠. 결혼 안하신 분들은 잘 모르시겠습니다만, 결혼 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통해 들어보면-저도 실질적으로 안 해봐서 몰라가지고 허허-남편이 가지고 있는 아내를 향한 욕망과, 아내가 남편을 향하는 욕망이 부딪히지요. 그 둘의 욕망이 같은 방향성을 가지고 있거나 비슷하면 충돌이 일어나지 않는데, 서로 다르면 그 가운데 충돌이 일어납니다. 이 충돌이 일어날 때 이 감정이라는 것은 지금 형성된 어떤 사건으로 접한 게 아니고 우리 생명체가 살아오면서 근본적으로 욕망했던 내용들이 숨어들어있기 때문에, ‘아, 당신 이러이러한데 이렇게 좀 하지.'라고 말해가지고는 거의 고쳐질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여기 이렇게 충돌이 오면, 빨리 ‘아 저것은 안 고쳐지는 구나.'라고 이해하면서 거기에 다른 접근 방법을 통해서 균형 있는 무엇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상대에게 내가 욕망하는 식으로 움직여지기를 원하는 지점이 있지요. 내가 이 컵을 컵이라고 부르는 말이 그냥 컵을 컵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듯이, 남편이라고 부르면서 남편이 내가 욕망한 것으로 존재하기를 바라는 것이고, 반대로 아내라고 부르면서 아내가 내가 욕망하는 식으로 존재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번 봅시다. 이것은 내가 이름을 붙여서 그렇게 욕망할 뿐, 그 욕망을 제거하고 나면 이 컵은 그 욕망과는 아무 의미가 없는 거지요. 그저 컵일 뿐이지요. 이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욕망의 충돌에 의해 많은 다툼이 형성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번뇌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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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망의 충돌을 번뇌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욕망이 있어서는 번뇌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거의 없지요. 왜냐하면 내가 원하는 그것이 이뤄졌다는 ‘정보’라는 것이 그 상태로 계속 존재한다면, 그것을 성취해서 바꾸고 나면 더 이상 그 욕망이 발현되지 않고 사라질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욕망이라는 속성 자체는 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것이 자기 본성입니다. 때문에 끊임없이 욕망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두 번째로 그 욕망이 부딪혔을 때는 이런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건을 명확히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숲을 좋아한다는 말은 상생과 상극이라는 내용을 통해서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제 내려놓는 겁니다. 다른 데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우리가 사건을 이해한다는 건 그냥 사건을 이해하는 게 아니고, 안쪽에서 천억 개나 되는 뇌의 신경 세포들이 연합을 해서 손을 잘 잡아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아주 익숙한 쪽으로 손을 잡아놓은 게 굉장히 많기 때문에 자기 욕망의 방향이 대충 이렇게 결정이 돼있는 겁니다. 그런데 오랜 연습을 한 이 욕망의 도로는 굉장히 강력하게 놓여 있고 새로운 이야기들은 지금 형성되거나 아직 도로가 형성이 안돼서, 들을 때는 그럴싸하지만 듣고 나면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뇌의 신경세포의 유연성을 말할 때 플라스틱(plastic)이라고 하더군요.


 플라스틱이라고 하면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들어보셨지요? 플라스틱 서져리라고. 성형수술이지요. 얼굴의 형상을 원하는 대로 만들어주는 것이지요. 외부의 성형을 통해서 자기의 만족도가 얼마정도 있기는 한데, 20대의 얼굴을 80대까지 가지고 있으려고 한다면 결코 이뤄질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합리화를 하거나 자기 타협을 해야 합니다. 바꿔 말하면 형상에 대한 것을 자기가 어떤 식으로 타협하느냐에 따라 나에게는 번뇌가 되기도 하고, 번뇌가 되지 않기도 합니다.


 이 타협하는 능력을 바꾸는 것, 이것을 수행이라고 부릅니다. 이때 ‘행’이라는 것은 내부의 플라스틱을 다른 식으로 연결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행은 인지활동이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얼굴이 젊어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쭉 가지고 있으면 살면서 항상 하루만큼 늙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젊은 얼굴을 유지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는 순간부터 나는 괴로움을 계속 만들어가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아, 본래 그렇지.'라고 자기 안의 플라스틱을 성형하면 보는 것이 훨씬 수월해집니다.


 바꿔 말하면, 안의 플라스틱을 성형한다는 것은 안에서 일어나는 신경세포들끼리의 연결망들을 새롭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새롭게 만들면 전에 말했듯이 이 대상이 나에게 다가올 때, 그 전에는 ‘내가 그 대상을 어떻게 욕망하느냐' 하고 보았는데, 이제는 안이 바뀐 채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욕망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봅니다. 그래서 상대가 화를 내면 ‘화가 났군', 나를 칭찬하면 '칭찬 하는군' 하게 됩니다. ‘화가 났군'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욕을 하면 내 마음이 동요가 되지 않는 겁니다. 상대가 나를 칭찬하는데 역시 동요되지 않아야 합니다. 즉, 상대에 의해서 내 마음이 동요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이 어떻게 됐습니까? 그 전에는 나를 칭찬하는 그 칭찬에 따라서 기분 좋음으로 막 활동을 하고 나를 비난하면 기분 나쁨으로 막 활동하는데, 그 두 가지에서 내가 조용해지니까 마음이 쉬어있습니다. 그래서 안쪽으로 내부를 성형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마음을 쉬는 것입니다. 마음을 쉬면 여기서 부딪히는 강도가 현저히 줄어들어서, 두 사람의 만남에서 상생과 상극이 잘 이루어져서 숲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