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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_웹진강의

[정화스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 4강 여섯번째

[정화스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강 여섯 번째 강의





녹취 및 정리: 황호연 / 수유너머N 세미나 회원 





*정화스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강의는 총 5회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한 강 한 강이 한 편의 글이 되기에는 매우 긴 편이라, 독자분들이 보기 편하시도록 세분하여 업로드할 예정입니다. 이번 글은 정화스님 강좌 4강의 여섯 번째 부분임을 알려드립니다. 그 전의 강의는 이 웹진의 지난 글을 확인해주세요.


















*정화 스님께서 강의 교재로 사용하신 책은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백석현 옮김, 야그 출판사, 2007년)입니다. 현재 절판되었고, 이 책을 개정해 다른 출판사에서 펴낸 책이 있습니다.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박성현 옮김, 심볼리쿠스 출판사, 2012년)입니다.

*강의를 직접 들으신 분들은 Ⅰ.『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와 Ⅱ.『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정동호 옮김, 니체편집위원회 감수, 책세상 출판사, 2000년), 그리고 그 외 번역본들 중 편한 것을 참고하셨습니다.

*녹취록에서는 강의 중에 언급된 위 책 두 권(Ⅰ,Ⅱ)의 해당 부분을 스님이 말씀 하신 것을 참조하여 재구성해서 옮깁니다. 페이지 표시는 가독성을 위해 옮긴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부분만 하였습니다.

* 페이지 표시의 예: Ⅰ번 책의 36쪽, Ⅱ번 책의 38쪽은 아래와 같이 표기합니다. -> (Ⅰ:36, Ⅱ:38)






[4강의 책 범위| Ⅰ번 책:87~104쪽, Ⅱ번 책:89~107쪽]




, 자기 자신을 제대로 사랑할 줄 모르면 고독이 감옥이 돼버린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니체는 고독자가 되라고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고독자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방안에 혼자 앉아서 쓸쓸함을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여럿이 함께 있으면서도 마치 아무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자신을 온전히 사랑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상태에서 결코 견뎌내지 못한 자기 삶이 감옥이 돼서 자기 삶을 살지 못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럴 때 사람이 찾는 피난처가 있습니다. 그것이 대단한 것에 대한 사랑과 소외와 우상숭배를 겸하고 있는 종교적 활동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점점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고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우상으로 만드는 행위가 내부적으로 끊임없이 일어나서, 앞으로도 종교는 계속 망할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허허.


그래서 니체는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자네에게 자네 자신 속에 존재하는 자네의 친구에 대해 가르쳐주고 싶어.’ 자네 자신의 친구. 삶은 항상 안쪽으로 무언가가 없는 것처럼 있다가 나와 나의 것이라는 것이 함께 동시에 뿅 하고 일어납니다. 잠깐만 눈을 뜨면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함께 일어납니다. 보는 자도 사랑할 줄 알고 보이는 것도 온전히 볼 수 있는 눈을 아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온전한 친구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친구와 친하게 있는 사람은 고독할 틈이 없고,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온전한 고독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람과 함께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 속에 존재하는 자신의 친구, 이 사람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세상에서 좋은 것을 많이 갖고 있는 창조적 인간의 삶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온전히 자신과 친구 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창조자로서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미래의 사람과, 먼 곳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원칙이 되도록 하는 즉, 자기 내부에 지금까지 외부의 눈에 의해 비춰진 자기로 자신을 보지 않고, 오직 가까이 있는 그 자신만이 자신의 친구가 되도록 하는 사람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잘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항상 그와 같은 삶을 살면서도 자신에게 존재하는 삶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에 대한, 아까 말한 우상숭배까지 이끌어낸 사람에 대한 환상을 완벽히 집어내서 자기 언어를 발설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합니다. 그와 같은 힘을 창조자의 길이라고 17(:100, :103)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17장의 이야기를 하면서 임제스님이라는 분의 이야기를 잠깐 꺼내겠습니다. 아주 유명한 이야기라서 여기 있는 분들도 들어보셨거나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임제스님이 일생동안 가장 듣기 싫어한 말이 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처'라는 소리입니다. 부처라는 말입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듣기 싫은 소리가 있어. 부처라는 말이지.'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더 과격한 이야기를 합니다. 부처를 만나거든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라고 말입니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잘 살아내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자신이 오직 홀로 서있는 부처 같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부처의 길을 열심히 따라가고 있는 저 같은 사람은 전혀 부처의 길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모양만 그럴듯하지도 않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임제는 말합니다. 그래서 임제는 부처를 드러내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무언가 질문만 하면 소리를 백날같이 지르는 겁니다. 무슨 소리인지도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는 겁니다. 물으면 악 하고 지르는데, 지금도 한국의 선방에 가면 가끔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임제는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미리 예상했는지, 돌아가실 즈음해서 자기 제자들을 모아놓고 '너희들이 내 밑으로 공부를 했으니까 뭔가 하나 아는 거 있으면 내봐.'라고 하니까, 그 중에 어떤 사람이 속없이 ''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허허. 임제가 그 소리를 듣고 한탄하기를, ‘내 법이 당대에 죽었구나.'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처럼 임제의 이야기를 따라서 하고 있으면 전혀 창조자의 길을 살 수 없는데, 생명체 자체는 항상 부모로부터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다른 길을 가도록 돼있습니다.


지난번에 말씀 드렸듯이 생물학적으로 유전된다는 것은 부모의 유전 정보가 그대로 전해지는 것처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실상 항상 뒤섞여서 약간의 다른 양상이 아들딸들에게 물려집니다. 그 말은 너는 나와 달리 살아. 너는 새로운 창조자가 돼서 너의 세계를 만들면서 삶을 살아.'라고 유전정보를 섞어서 전해주는 겁니다. 당신의 부모의 유전자들을 섞어서 물려주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후천적으로 작용해야 할 후성유전체는 잘 오픈시켜줍니다. ‘너는 그것으로부터 어떤 스위치를 켜고 끌 것인가를 결정해서 온전히 너의 삶을 살도록 하렴.'해놓습니다. 하지만 태어나자마자 내가 말해준 대로 살아.'하면서 교육을 시킵니다. 물려준 내용은 '내가 말하는 대로 살지 마라.'는 것인데 말을 할 때는 내가 말하는 대로 살라고 하니까, 독립할 때까지는 계속해서 부모자식간에 부딪힙니다. 더군다나 사춘기가 되면 우리 안에 있는 뉴런세포가 어른이 될 때보다 거의 한배 반에서 두 배 정도 많습니다. 그래서 어른의 신경세포가 약 1천억 개인데, 청소년기에는 15백억 개에서 2천억 개 정도 있습니다. 이것이 살면서 부모의 가르침과 사회의 가르침 등등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살 수 없는 방법으로 연결을 딱 하고 그칩니다. 그때 천억 개로 줄어듭니다. 그런데 내부적으로는 그렇게 살면 너는 망해.'라고 하는 것이 본질이고, 그렇게 살도록 만들어진 길은 아닌 것 같고 그래서, 청소년기가 지나도 계속해서 '나는 왜 이렇게 사는가?'라고 말을 하면서 그렇게 생각하다가 세상을 뜨지요. 이처럼 창조자로 살아야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다고 하는데 내부로 시선을 돌리지 않는, 고독자가 되지 않는 사람들은 모난 돌에 정 맞지 않기 위해서 계속해서 다른 사람이 봤을 때 그놈이 그놈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임제는 그런 사람들을 일러 '사람이 아닌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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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홀로 있는 것에 대해서는 뭔가 견딜 수 없는 외부적 압력이 있는데, 옆에 가보니 나만 그렇게 사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삽니다. 뭔가 아니긴 하는데 옆에 사는 사람도 그렇게 사니까, 틀린 답을 써놓고 서로 답을 맞춰보면서 위안을 얻는 학생들처럼 떼의 양심으로 자기의 삶을 살아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 그러지 말게. 자네 마음 아프지 않는가? 그 길을 갈 생각을 내려놓게. 자네 자신에 이르는 길로 갈 생각을 하게.'라고 이야기하면서 너는 그런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 힘을 보여줘.'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힘은 이런 힘입니다. 자네는 활력 넘치는 싱싱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요. 니체가 봤을 때 생명의 새로운 힘들은 새로운 인연을 만나서 활발발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활발발이라는 말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활발발이라는 말은 물이 튀어서 팔팔하게 살아있는 모습을 말합니다. 거친 인연을 만났을 때 거기에 변해서 자기를 온전히 드러내며 살아가는 힘, 이것이 활력 넘치는 싱싱한 힘입니다. 그런데 그런 길 가운데서 활발발하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기르지 않으면 죽거나 다른 사람의 손을 기대할 수밖에 없지요. 그것은 고독자의 삶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네는 새로운 권리를 가지고 있어.' 부모가 자식에게 줄 때 너는 온전히 나와 다른 삶을 아니지만 그래도 너의 독특한 삶을 살 수 있는 권리를 내가 물려줬으니까 그렇게 살아라고 생물학적으로는 이야기하고 있는데, 문화적 배경으로는 그렇게 못 살도록 하면 뭔가 안 됩니다. 훨씬 더 오랜 역사를 가진 생명의 역사는 새로운 권력을 가지고 항상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이야 말로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어서 자네는 스스로 움직이는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남자가 마마보이가 되면 여자 분들은 연애할 때는 너무너무나 좋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엄마의 눈치를 잘 살피는 기술이 발달돼가지고 자기 여자친구의 눈치를 너무너무나 잘 알아서 입 속의 혀처럼 움직여주면 줄수록 마마보이의 강도가 강합니다. 결혼을 딱 하면, 그이는 어떻게 합니까? 오늘 저녁에 아내와 침대에서 같이 자야합니까 말아야 하는지 조차도 엄마에게 전화를 합니다. 이런 것이 문제가 되기 시작해서 삶을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엄마는 자식을 위해서 어마어마하게 노력을 들여서 그런 일을 해주는데, 생명은 스스로 움직이는 자라는 근본 원리에 비춰보면 엄마가 그렇게 하면 할수록 생명들의 생존의 힘은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자, 스스로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창조자의 길인데 그것을 너무 의존적으로 하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자네는 홀로 굴러가는 바퀴인가?'라고 의문문을 달았지만,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홀로 가는 것입니다. 불교의 초기 경전에 나오지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요. 공지영인가 하는 소설가의 책 제목도 그렇게 나와있더군요. 인생은 매 순간 이웃과 더불어 관계를 구성하고 함께 살아가긴 하지만 독특한 자기 내용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독특한 자기 내용을 만들어내지 못한 자는 자기의, 스스로 서 있는 자에 어긋나서 나는 왜 이렇게 살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나중에 하면서 손자나 손녀에게 너는 그렇게 살지 마.'라는 말을 할지 모릅니다.


또한 자네는 별들이 자네의 주위를 돌도록 만들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실제로는 모든 별들은 각기 자신의 길을 가면서 다른 존재들을 우주의 중심으로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내가 별들로 하여금 내 주위를 돌게 하는 게 아니고, 한 존재의 사건이라는 것은 시간축과 공간축이 만나는 곳에서 한 사건으로 발생합니다. 우주는 중심점이 없습니다. 바꿔 말하면 모든 것들이 중심점이 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삶으로 우뚝 선 사람은 우주의 중심점이면서 많은 별들이 자신을 위해서 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때 나만 그런다고 하면 이것은 독재적 사유자이지요? 옆에 있는 다른 사람도 그런 줄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는 순간, ‘아 나는 뭔가 이 멍에로부터 벗어나고 싶어.'라고 해서 멍에를 벗어나지만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해서 다시 멍에 속으로 들어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써낸 책이 에리히 프롬이라는 분의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멍에로부터 벗어난 사람이 새로운 길을 창조적으로 만들지 못해서 스스로 멍에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써놓은 책이 되겠습니다.


, 스스로 존재하기 위해서 즉, 멍에로부터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서는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아니고 무엇을 위해 자유로운 것인가를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쉽지만, 그것이 무엇으로서 존재하는가를 잘 모르면 어떻게 걸어야 할지를 잘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무엇을 위해 자유로워지는 것인가? 라고 하는 자신의 소리를 온전히 듣지 않는다면 곤란합니다. 더구나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주위에는 겹겹이 그런 일이 퍼져 있어서 내가 잘 산 것 같은데 하는 순간, 밖으로 넘어갑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외로움 속에서 그 외로움을 견뎌내지 못하고 가짜인 삶에서 가짜를 벗어나지 못해서 결국 자신의 삶을 온전히 창조하면서 살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외로움을 죽일 수 있고, 가짜를 죽일 수 있는 고독의 능력을 갖춰야 하는데 사기는 아무나 하나.'라고 이야기 합니다 허허. , 이것을 하지 않으면 홀로 설 수 없는데,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라 쉽게 일어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특히 우리가 홀로 서는 고독자가 되는 것을 막고 있는 것은 외부적으로 이런 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홀로 서있는 사람들은 외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기가 갖지 못한 길을 가는 어떤 형태로서 별로 기분 좋지 못하기 때문에 비난이 강해지고, 그런 사람에 비해서는 이런저런 일에 대해 잘못 산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증오를 합니다. 따라서 홀로 사는 사람들이 가장 조심해야할 사람은 선량하고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선량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잘 살피지 못한다면 스스로의 미덕을 만들지 못하고 선량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이 만들어준 미덕 속에 다른 사람을 갇히게 하기 때문에, 본인은 선량하고 정의로운 사람일지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서 생명의 활발발한 것을 전부 다 가리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심해야하는 사람의 첫 번째로 꼽습니다.


두 번째는, 경건하고 단순한 인간들도 조심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가 함께 몰려가서 뭐라고 왁자지껄하게, 한 사람의 고독하고 참된 삶의 길을 못 가게 하는 일들이 많이 있지요. 그중에 특히 조심해야할 것은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한권의 책만을 읽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말입니다. 한권의 책만을 읽는 사람. 세상엔 그런 분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많은 책을 읽는 것처럼 보여도 어떤 하나의 책이 자신의 사고 체계를 완전히 지배하면서 다른 모든 것들을 그것으로 재단하는 일들이 역사를 두고 끊임없이 일어나서, 서양 사람들은 그것이야말로 인류 사회의 너무나도 큰일이라 생각했던지 그런 속담을 지어놓았습니다.


, 경건하고 단순한 인간들, 선량하고 정의로운 사람들을 잘 보지 못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그때 사람은 홀로 우뚝 서지 못하면 갑자기 약해져서 내 손을 잡아줘.'라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면 안 되네. 그때 손을 내밀되 발톱을 강하게 세워서 자신의 손을 내밀라.'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발톱은커녕 손에 아주 부드러운 모피를 가지고 다가가고 있으니 고독한 사람으로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고독한 사람이 자신의 삶으로 살려면 일곱 악마를 극복해야합니다. 일곱 악마는 기독교 계열에서 나오는 어떤 그런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뒤에 그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단자, 마법사, 예언자, 바보, 의심하는 자, 하느님께 버림받은 자, 악당이 되는 자 등등, 이 가운데 악마가 되기도 하고 악마를 넘어서기도 하는 것을 잘 살펴서 스스로 그런 길을 넘어 사는 사람이야말로 온전히 자신의 전 삶을 불꽃으로 태워서 재로 만들고 그 재 속에서 자신의 삶을 새로 태어날 수 있게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악마와 손을 잡고 있던 그 모든 것을 재로 만들고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야말로 부처는 넘어선 부처, 부처도 죽일 수 있는 부처가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 떨어져. 혼자 가도록.'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와 혼자 가라고 합니다. ‘자네에게 바친 내 눈물을 간직한 채 혼자 가도록.' 짜라두짜가 그렇게 살지 못하고 갇혀 사는 사람들의 아픔을 보고 흐린 그 눈물을 잊지 말고, 그 눈물의 힘으로 혼자 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곱 악마들에 의해 둘러싸인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온전히 세상을 창조하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설사 그렇게 가다가 패배할지라도 그 길을 가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초인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패배자조차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인생에 있어서 온전한 창조자로 존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모두들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면서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42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