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仲正昌樹カール・シュミット入門講義作品社, 2013.



<두 번째 부분에 이어 계속>



낭만파 

약간의 예비지식으로 문학운동으로서의 낭만파에 관해 얘기하겠습니다. 초기 낭만파는 바이마르 근처의 예나에 모여든, 문학가의 동아리였습니다. 주요 멤버는 프리드리히 슐레겔과 노발리스(Novalis, 1772-1801), 프리드리히의 형으로 셰익스피어(1564-1616) 등의 번역에 착수했던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1767-1845) 등입니다. 이 두 사람을 슐레겔 형제라고 칭합니다. 프리드리히는 작품의 ‘비평Kritik’이란 저자 자신도 깨닫지 못한 깊은 의미의 층을 발견하고 독해하는 철학적인 행위라고 규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평’을 독립된 문학 장르로 확립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우구스트 빌헬름은 번역을 통해 독일어 문체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노발리스도 철학적 문예비평가로, 프리드리히 슐레겔과 마찬가지로 많은 철학적 ‘단편Fragment’을 남겼습니다. 노발리스는 괴테(1749-1832)의 교양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Wilhelm Meisters Lehrjahre』(1796)를 의식하고, 안티 마이스터라고도 해야 할 환상소설인 『푸른 꽃』을 썼습니다. 노발리스가 요절한 탓에 미완으로 끝났습니다만. 이와나미 문고에 들어 있습니다. 이를테면, 원제는 ‘푸른 꽃’이 아니라 〈Heinrich von Ofterdingen〉입니다. 이것은 실재했는지 여부가 분명치 않은 시인의 이름으로, 이 하인리히가 환상적인 자기 찾기 여행을 한다는 설정입니다. 이밖에도 신화와 예술에 대한 철학을 전개한 철학자 프리드리히 셸링(Friedrich Wilhelm Joseph von Schelling, 1775-1854)도 이 동아리의 중요 구성원이었습니다. 민화나 전승을 풍자적으로 각색한 작품으로 알려진 루트비히 티크(Ludwig Tieck, 1773-1853)도 한때 이 그룹에 속했습니다. 

예나의 낭만파는 노발리스가 일찍 죽자마자, 프리드리히 슐레겔, 셸링 등 다른 구성원이 다른 토양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사실상 해산했습니다만, 방금 말한 브렌타노, 시인 루트비히 아힘 폰 아르님(Ludwig Achim von Arnim, 1781-1831) 등이 참가한 하이델베르크 낭만파, 『그림자 없는 사나이(페터 슈밀레르의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1813)로 유명한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Adelbert von Chamisso, 1781-1838)나 작곡가로서도 알려지고 자동인형이나 도펠강거(도플갱어, Doppelgänger) 등의 섬뜩한 모티프의 소설을 쓴 에른스트 T. A. 호프만(Ernst T. A. Hoffmann, 1778-1822) 등이 참가한 베를린 낭만파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빈으로 옮겨간 프리드리히 슐레겔을 중심으로 빈 낭만파가 형성되고, 그 안에 정치적·보수주의적 경향을 지닌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슐레겔 등의 초기 낭만파들은 당초, 프랑스혁명에 열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30쪽을 보십시오. 

프랑스혁명, 피히테의 지식학 및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는 세기의 최대 사건이다. 만약 프랑스혁명이 국가들의 역사 속에서 최대이자 가장 주목해야 할 현상으로 봐도 좋다는 슐레겔의 유명한 말은, 그 정치적 의미에 있어서는 독일 부르주아지의 무수히 많은 다른 공감의 표명과 균등하게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경찰국가의 확고한 안식 속에 있으며 이 사건의 영향을 받아넘기며, 프랑스에서 행해진 추상적 이념의 거친 실현을 다시 [단순히] 관념적인 것의 범위로 되돌렸던 것이다. 그것은 강 건너 불구경이었다. 슐레겔도 곧장 그 열광을 극복했다. 곧장 그에게는 프랑스혁명도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 그러나 낭만주의자 자신의 혁명은, 새로운 종교, 새로운 복음, 새로운 독창성, 새로운 보편예술의 예고였다. 그들의 선언의 대부분은 무엇 하나든, 일상적 현실에서 공개의 장소에 속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행동은 정기간행물이었다. 
[* 슐레겔이 프랑스혁명, 피히테의 지식학,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가 세기의 가장 위대한 경향이라고 주장할 때, 혹은 프랑스혁명이 민족국가들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값어치 있는 현상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주장했을 때, 이 말의 정치적 유의미성은 독일 부르주아지의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공감의 표명과 똑같은 방식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독일 부르주아지는 경찰국가의 평온한 안전 속에서 [프랑스혁명이라는] 사건이 자신들을 침해하도록 허용했으며, 프랑스에서 발생한 추상적 관념의 조잡한 실현을 이상적인 것의 영역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것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하는 것이었다. 슐레겔도 자신의 열광을 재빨리 극복했다. 머지않아 그에게 프랑스혁명은 더 이상 충분히 거창한 것이 아니게 됐다. … 그러나 낭만주의자들 자신의 혁명은 새로운 종교, 새로운 복음, 새로운 창조성, 새로운 보편예술을 약속하는 데 있었다. 평범한 현실에서 이들의 선언과 관련되어, 공적 광장에 속하는 것은 거의 없었다. 낭만주의자들의 행동은 정기간행물이었다(p.36).]

『마이스터』란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를 가리킵니다. 슐레겔 등과 같은 세대의 독일 지식인들은 정치적으로는 프랑스혁명, 철학적으로는 피히테의 지식학(Wissenschftslehre), 문학적으로는 괴테의 교양소설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세 가지가 인간 이성의 승리를 증명하는 듯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프랑스혁명에 대한 열광은 곧바로 식고, 그들은 더욱더 ≪다른 혁명≫을 모색하게 됐습니다. 그것은 ≪내면≫에서의 혁명입니다. 

여기서 쓰고 있는 모양새에서 알 수 있듯이, 슈미트는 그런 낭만주의자들의 열광을 표면적인 것으로 보고, 그다지 평가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경멸하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원래 표면적으로 이웃나라의 혁명에 열광했을 뿐인 사람들이 이미 식어버리고, 이번에는 뭔가 정신적 혁명 같은 것에 관해 쓰기 시작했다는 식으로밖에는 보지 않은 것 같아요. 이런 느낌의 ≪사상사≫는 현대일본에도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비꼬는 슈미트의 말투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느낌이에요. 보수 혹은 좌파의 연배가 있는 논객이 “최신의 현대사상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 경박한 무리는 입으로는 ‘OO혁명’이라고 말하지만, 실천이 뒤따르지 않고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 하려는 의욕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도 비슷하네요. 이 문장을 쓴 당시의 그는 30세 전후의 젊은이이지만, 발상이 어쩐지 늙은이 같네요. 일부러 늙은이처럼 말하며 눈에 띠고자 하는 젊은이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있으며, 드문 일이 아닌지 모릅니다.  

이에 덧붙여, 뮐러, 슐레겔은 슈미트보다 100년 이상 전의 사상가이기에, 왜 그렇게 열성적으로 말했는지,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도 있습니다만, 정말은 낭만파보다도 동시대의 얄팍한 보수주의자들을 풍자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정치성으로부터 곧 멀어지고, 활자뿐인 세계에 자폐한 낭만주의자를 멍청이라고 놀리는 슈미트입니다만, 그는 결코 문학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자신도 문예비평을 했으며, 그의 문체는 법학자치고는 너무도 문학적이기로 유명합니다. 원래 문학을 싫어하는 사람이, 낭만주의자를 비판하기 위한 책을 일부러 내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싫어하는 문학을 구태여 조사해서 글을 써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읽다보면 점점 알게 되는데, 슈미트는 낭만파의 비평이론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알고 있기에 호되게 비판하는 것입니다. 문학의 이론과 정치나 법의 이론은 [거리가*] 멀다고 하는 전제에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은 문학적 통찰력이나 비평이론 등을, 정치에 곧바로 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슈미트는 그런 발상과는 선을 긋는 듯합니다. 그 자신이 문학 체질이라, 더욱 더 시각이 엄격해진 것인지도 모릅니다. 

독일 낭만파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기에, 공통적 특징을 꼽기는 힘들지만, 다소 무리를 써서 요약하면, 칸트(1724-1804)나 피히테의 ‘자아’ 중심의 합리주의적 철학이나 괴테의 교양소설, 계몽주의적인 프랑스혁명의 세 기둥에 일찍이 매료됐던 것에 대한 반동에서 온다고 생각되는,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것, 자아를 미치게 하는 감성=미적인 것,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관심, 신화나 전승 등에 대한 집착, 정치적 복고주의를 꼽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낭만파의 신봉자나 연구자는 이것을 높이 평가하고, 합리주의적 근대의 한계를 극복할 계기를 발견하려 드는 데, 슈미트는 그런 발상을 하지 않는다, 혹은 하려 들지 않다는 것입니다. 


‘문필가Schriftsteller’

슈미트는 ‘문필가Schriftsteller’가 정치에 대해 영향력을 갖거나 행사하는 것에 관해 상당히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냅니다. 

자기를 존경하게 할 줄 알고 있던 겐츠조차도 메테르니히로부터 자주 하인에 대한 주인의 친애감을 생각나게 하는 주정으로 취급되고 있다. 아담 뮐러가 사람들에게서 고려됐던 것은 그의 친구이자 열렬한 보호자였던 겐츠 덕분일 뿐이었다. 빈 궁정의 각료들이 뮐러 및 슐레겔에 대해 제멋대로 푸대접을 받았던 것에 관해서, 선량한 클린코프스트롬Klinkowström은 정당하게도 분노하고 있다. 
[* 자신에 대한 존경을 얻어내는 방법을 알고 있던 겐츠마저도 메테르니히는 주인과 하인의 친숙함을 암시하는 우정에 때로 종속시켰다. 사람들이 아담 뮐러를 고려하게 됐던 것은 뮐러의 친구이자 열렬한 후견인인 겐츠 덕분일 뿐이었다. 비엔나 궁정의 각료들이 뭘러와 겐츠[일 : 슐레겔]를 ‘푸대접’한 것에 대해 착한 클린코프스트롬Klinkowström은 정당하게도 분노하고 있다(p.37).] 

듣기 거북하라고 하는 말이네요. 문학·사상사 연구자는 후기의 슐레겔이나 뮐러가 메테르니히의 정치에 영향을 미쳤다는 듯이 말하고 싶어 하지만, 슈미트더러 말하라면, 그들의 후견인 같은 역할을 했던 겐츠마저도 메테르니히에게서 하인 취급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클린코프스트롬(Friedrich August von Klinkowström, 1778-1835)은 원래 프로이센의 군인이었지만, 군을 퇴직한 후에 화가가 됐습니다. 1811년에 빈으로 이주하면서 예술교사나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1814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합니다. 빈의 낭만파 동아리의 일원이기도 합니다. ‘문필가’에 속하는 인물이죠. 

33쪽부터 35쪽에 걸쳐, 슐레겔이 메테르니히 아래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애물단지로 취급됐다는 얘기가 주구장창 서술되고 있습니다. “뚱뚱하고 걸신들렸다korpulent und eßlustig”라든가, ‘뚱땡이Korpulenz’ 같은 심한 말을 하고 있죠. 게다가 그와 뮐러의 관계에 관해 적고 있습니다. 

더구나 누구도 진지하게 그를 정치가로서 존중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교황제, 교회, 귀족에 관한 그의 이념이, 정치적으로도 또한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 점에 있어서는 그는 결코 아담 뮐러에 비견될 수 없었다. 그는 평소 같으면 아담 뮐러를 자신의 정신적 수행자(随行者)로서 취급할 수 있었던 것이며, 또한 그[뮐러]는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그림자’라는 전반적인 판단이 행해지기도 했던 것이다. 1815년 이후 라이프치히 주재 오스트리아 총영사였던 뮐러는 기민하고 부지런하게 단 하나의 세력을 만들어냈다. 
[* 더욱이 누구도 진지하게 그를 정치가로서 존중하지 않았음을 말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교황제, 교회, 귀족에 관한 그의 이념이, 정치적으로도 또한 진지하게 고려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렇지만 이 점에 있어서 그는 결코 아담 뮐러에 필적할 수 없었다. 그는 평소라면 아담 뮐러를 자신의 정신적 수행자로 취급할 수 있었던 것이며, 또한 그[뮐러]는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그림자’라는 전반적인 판단이 행해지기도 했던 것이다. 1815년 이후 라이프치히 주재 오스트리아 총영사였던 뮐러는 기민하고 열성적으로 단 하나의 세력을 만들어냈다(pp.39-40).] 

사상적으로는 슐레겔이 빛이고 뮐러가 그림자이지만, 정치적 영향력이라는 면에서는 뒤바뀌었다는 거죠. 뮐러는 나름의 지위를 획득했고, 귀족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뮐러라도 해도, 슈미트는 정치적 실천에 있어서는 ‘메테르니히의 무조건적 앞잡이’라고밖에는 평가하지 않습니다. 국가론이나 경제학에 의해 현실정치에 영향을 줬다고는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제1장의 마지막 49쪽까지, 뮐러의 행보에 관해 꽤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죠. 그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Heinrich von Keist, 1777-1811)와 함께 잡지를 간행했다든가, 프로이센의 재상 하르덴베르크(Karl August Fürst von Hardenberg, 1750-1822)에게 아첨하려 했으나 잘 안 됐다든가, 티롤(Tirol) 지방의 ‘오스트리아화Austriacisierung’를 위해 이 지역에 파견된 임시지방장관의 언론고문을 역임했다든가, 흥미로운 내용도 기술하고 있습니다. 

49쪽의 마지막 부분을 보세요. 이것이 뮐러의 생애를 오랫동안 추적한 뒤에 최종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그가 가톨릭이었다는 단순한 사실은, 그를 낭만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리 가톨릭교회가 낭만주의자의 관심거리가 됐다고 해도, 또한 그 예배 속에서 낭만주의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모두 다른 세계적 권력과 마찬가지로, 낭만주의의 주체 및 담지자인 적은 결코 없었던 것이다. 
[* 아무튼 그가 가톨릭이었다는 것을 근거로 그를 낭만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이다. 이 통속적 개념규정은 낭만주의를 낭만화된 대상과 합체시키려는 호사가들의 결과로서만 설명된다. 가톨릭교는 낭만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가톨릭교회가 얼마나 자주 낭만주의자의 관심 대상이었는가와 무관하게, 또 가톨릭교회가 얼마나 주자 낭만주의적 경향을 사용했는가와 무관하게, [대문자] 교회 자체는 낭만주의의 주체와 담지자인 적이 없었다. 이는 다른 모든 세계권력의 경우와 마찬가지일 뿐이었다(pp.49-50).] 

낭만주의가 가톨릭교회의 예배 양식 등에서 신성한 것을 찾아내고 관심을 갖는 경우는 있었으나, 그것은 가톨릭 자체에 낭만주의적인 체질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가톨릭교회 자체는 과거의 아름다운 세계에 관한 낭만주의적 몽상에 젖어들지 않는다. 슈미트는 낭만주의자가 가톨릭을 제멋대로 짝사랑하고, 교회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 뿐, 낭만주의는 가톨릭의 본질에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현대 일본에 무리하게 적용시켜 생각하면, 일본의 전통이라든가 잘 알지도 못하는 보수주의자가 황실이나 신도(神道) 등을 애니메이션의 세계관과 동일한 리듬으로 추켜세우고 있는ノリで持ち上げている 듯한 느낌이랄까요. 그런 것이 나오면, 진정한 보수주의자가 화를 내는 것은 쉽게 상상이 되는군요. 슈미트는 가톨릭으로, 드 메스트르나 보날처럼 가톨릭적 전통을 중시하고 있기에, 아무튼 신비적인 느낌을 받는다고 함으로써, 가톨릭교회를 그 본래적 전통과는 관계없이, 적당히 추켜세우는 낭만파를 참을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앞으로 슈미트의 텍스트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의 이론이 반드시 가톨릭에 고유한 교의, 예를 들어 아무런 원죄도 없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앙이라든가 성인 숭배, 교황의 무오류성, 일곱가지 성사의 의미부여 등에 의거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가톨릭교회가 안정된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고, 이를 모델로 삼아 근대국가의 법질서를 구상하려고 한 것에 특징이 있습니다. 교리보다 조직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영국국교도이자 영국국교회와 국가의 결탁에 의한 영국의 국가체제=헌법(constitution)의 전통의 안정성을 강조한 버크를 평가하는 이유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가톨릭교회의 ‘질서’ 형성·유지력에 법학자로서 주목하는 슈미트로서는, 경박하게 가톨릭에 관심을 가진 낭만파와 도매급으로 취급되길 원치 않았던 거죠.

[* 옮긴이 : 일곱가지 성사. 1) 한 생명이 모태 속에 있다가 자신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낸다(세례성사). 2) 몸과 마음이 튼튼해지고 성장한다(견진성사). 3) 성장하기 위해서는 영양 섭취가 필수적이다(성체성사). 4) 때가 되면 남녀가 한몸을 이루거나(혼인성사) 5) 특별한 불리움을 받기도 한다(신품성사). 6) 부족한 인간이기 때문에 많은 잘못과 죄를 범하고 치유를 받는다(고해성사). 7) 어느덧 나이가 들어 몸이 쇠약해지며 병고에서 해방되기를 간절히 원한다(병자성사). http://www.kcincy.org/index.php?mid=Ecclesiae]


‘실재’ 개념 ― ‘리얼리티의 구축La recherche de la Realitié’

2장 「낭만주의 정신의 구조」에서는 슐레겔, 노발리스와 보날이나 드 메스트르의 이론 등을 소개하면서 양자의 차이에 관해 매우 자세하게 말합니다. 1절 제목은 “리얼리티의 추구 La recherche de la Realité”로군요. ‘실재’ 개념이 문제 되는 셈입니다. 

우선 세계의 창조자로서의 초월적 신을 추방하고, ‘자아’ 중심의 세계관을 수립한 근대철학이 자신의 보루로서 새로운 초개인적인 실재를 추구하게 됐다고 지적합니다. ‘자아’가 인식하고, 실천할 수 있는 범위는 좁게 한정되기 때문에, 세계 전체를 파악하려 들면, 아무래도 그 실마리로서 ‘자아’를 넘어선 무엇인가를 실재하는 것으로서 상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 ≪무엇인가≫와 자신(나)을 동일시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민족과 국민, 인류 같은 ‘공동사회(공동체) Gemeinschaft’ ― 2판에서는 ‘인간사회 die menschliche Gesellschaft’라는 표현으로 바뀝니다 ― 가 실체시됩니다. 

71쪽을 보시죠. 프랑스혁명을 지도한 자코뱅파의 국가관에서 그런 형이상학적 전제가 들어 있음을 보날이 간파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보날은 그의 기독교적 국가철학의 입장에서 1793년의 자코뱅주의 자체 속에서 무신론 철학의 발현을 인정했다. 그는 신에 관한 신학적·철학적 견해와 정치적 사회질서 사이의 유비관계를 논구하고 있으나, 그것은 다음과 같은 해답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우선 인격신에 관한 일신론적 관점에는 군주제의 원리가 대응한다. 즉, 그것은 가시적인 섭리로서의 인격적 군주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 외적인 신에 관한 이신론적 가정에는 군주제적 민주주의의 憲制가 적합해야 할 것이다. 국가에 있어서의 국왕이 세계에 있어서의 이신론의 신과 마찬가지로 무력하다고 간주된 1791년의 헌법에 의한 憲制는 그것이다. 이것은 보날에게 있어서는 이신론이 숨겨진 무신론인 것과 마찬가지로, 숨겨진 반왕제주의였다. 그러나 1793년의 ‘데마고기쉬한 아나키’에 이르러서는 공공연한 무신론이며, 신도 없으면 국왕도 없었다. 이것이 그의 해답이다. 
[* 보날은 자신의 기독교적 정치철학의 관점에서 1793년의 자코뱅주의를 무신론적 철학의 발현으로 봤다. 그는 신에 관한 신학적·철학적 관념과 정치적 사회질서 사이의 유비를 해명했다. 이는 군주제적 원리가 인격신이라는 일신론적 관념에 대응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시적인 섭리로서의 인격적 군주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군주제적-민주적 구성constitution은 초월적 신이라는 이신론적 가정에 순응해야 한다. 1791년의 헌법Constitution이 하나의 예이다. 이것에 따르면, 국가에 있어서 왕은 이신론의 신이 세계에서 그러하듯이 무기력하다. 보날에게 이것은 이신론이 비밀스런 무신론crypto-atheism이듯이 비밀스런 반왕실주의cryptoantiroyalism이다. 하지만 1793년의 ‘데마고기적 아나키’는 무신론에 열려 있었다. 즉, 신도 없고 왕도 없는 것이다(p.60).] 

프랑스혁명에 대해서 조금만 보충 설명하겠습니다. 프랑스혁명은 1789년 7월 14일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과 그 뒤에 이어진 국민의회의 「인간 및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시작됐습니다. 1791년의 헌법이란 91년 6월, 국왕이 프랑스 국외로 도망을 꾀했으나 실패한 후 의회가 제정한 입헌군주제의 헌법으로, 왕제(王制)의 존속은 인정하나 왕은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가 제정한 법에 따라 장관의 임명 등의 정해진 일을 하는 행정상의 직책으로 규정됐습니다. 이제 신성한 왕이 없어진 셈입니다. 이 헌법에 근거하여 10월 선거에서 입법의회가 선출되지만, 국내의 소요나 외국의 간섭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계속되는 가운데, 92년 9월에 이 의회와 헌법은 폐지되고, 새로운 선거법에 근거하여 국민공회가 선출됩니다. 이 국민공회가 왕제의 폐지와 공화제의 수립을 선언합니다. 93년 1월에는 국왕과 왕비가 처형되고, 6월에는 자코뱅파가 온건한 지롱드파를 국민공회에서 쫓아내고 공안위원회 등의 특수한 기관을 통한 자코뱅 독재정치가 시작됩니다. 그것을 ‘데마고기쉬(선동정치적) 아나키 demagogische Anarchie’라고 부르는 셈입니다. 

보날은 “신에 관한 철학적·신학적 견해”와 “정치적·사회적 질서” 사이에 대응관계가 있다고 보고, 프랑스혁명을 분석하고 있지요.

일신론의 인격신  - 인적 군주에 의한 통치
     ⇓                    ⇓
   이신론        - 군주제적 민주제의 헌제 (1791년 헌법)
     ⇓                    ⇓
   무신론        - 자코뱅주의의 민주제 

왼쪽의 그림 같은 대응입니다. ‘이신론 Deismus’이란 일단 세계의 창조자로서의 신을 인정하지만, 그것은 기독교적 인격신, 하나님 아버지 같은 것이 아니라 우주를 관통하는 이성적 법칙의 총체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이신론의 신은 일단 우주가 만들어지면 그것에 기적이라는 형태로 개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날은 그와 같은, 자신이 만들어 낸 법칙에 묶여서 무기력해진 신과 실권을 빼앗긴 입헌군주제의 왕이 대응하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는 1791년의 헌법 때 정부가 이신론을 신봉하고 있고, 93년의 정부가 무신론에 의해 지배됐다는 단순한 대응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코뱅파의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Franç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1758-94)는 정권을 장악하면서부터 이성숭배와 같은 의례, “최고 존재의 축제 la féte de l’être supréme”를 실시합니다. 보날이 말하는 것은 전체적 경향으로서, 인격신의 그림자가 옅어져 간다는 것과 급진적인 민주제로 이행하는 것이 평행적 관계에 있다는 거죠.

이 ‘종교사회와 정치사회라는 두 개의 사회의 원리에 있어서의 동일성’은 셀 수 없이 많은 신학적 개념과 법학적, 특히 국법학적 개념 사이의 방법론적 동일성을 근거로 삼고 있으며 ― 라이프니츠에 의해 설파된 신학·법학 평행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 모든 다른 사항에 관해서도 갖가지 유비관계를 찾아낸다는 의미에서 국가 및 사회에 관해서도 그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신지학적(神智学的) 및 자연철학적인 어린애 장난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이 동일론은 왕제주의(royalismus*)와 귀족정치의 웅호를 행하려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국가(nation*)라는 형태에서의 새로운 실재의 용인을 포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날은 여기서도 그의 사상 전체, 감정 전체에 있어서 역시 프랑스인이며, 국가주의자(nationaliste)였기 때문이다. 
[* 이런 ‘종교사회와 정치사회라는 두 사회의 원리에 있어서의 동일성’은 무수한 신학적 개념과 법학적, 특히 헌법[학]적 개념의 방법론적 동일성 속에서 정당화된다. 이것은 ― 라이프니츠가 수립한 철학과 법률학jurisprudence 사이의 평행관계와 마찬가지로 ― 다른 모든 것에 관해서 다채로운 유비를 찾아내려고 하듯이 국가와 사회에 대해서도 다채로운 유비를 찾아내는 신지학theosophy과 자연철학의 천박함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이런 동일성은 군주제와 귀족제를 정당화하기 위해 의도됐다. 하지만 이것은 민족의 형태에 있어서 새로운 실재의 승인을 포함했다. 1796년 현재, 보날이 데카르트와 말브랑슈에 대해 퍼부은 비난은 다음과 같은 식으로 이뤄진다. 즉, 그들은 본질적인 것, 즉 인간 사회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회와 역사, 이것이 실재인 것이다(p.60).]

[옮긴이 : 영어판에는 마지막 구절인 “왜냐하면 보날은 여기서도 그의 사상 전체, 그의 감정 전체 있어서 여전히 프랑스인이며, 국가주의자였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없음에 유의하라.]

작은따옴표는 프랑스어에서 인용한 것으로, 〈identité dans les principes des deux sociétés, religieuse et politique〉입니다. “신에 관한 철학적·신학적 견해”와 “정치적·사회적 질서”의 대응관계는 학문적으로 말하면, 신학과 국법학[헌법학*]의 방법론적 동일성인 거죠. 이 점은 『정치신학』에서 슈미트 자신이 자세하게 논의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슈미트는 신학과 법학의 대응관계에는 역사적·구조적 필연성이 있다고 보는 셈입니다.

라이프니츠(1646-1716)는 알고 계시겠네요. 모나드(단자)론으로 유명한 철학자로, 미적분을 이론화한 수학자이기도 합니다. 다만, 여기에서는 라이프니츠도 다른 자연철학과 마찬가지로, 신지학神智学과 마찬가지로 낮게 평가되어 있네요. 신지학(Theosophie)이란 우크라이나 태생으로, 영매사靈媒師로 활동했던 헬레나 블라바츠키 부인(Helena Petrovna Blavatsky, 1831-91)이 창설한 신지학협회에서 시작되는, 영적 세계와의 교신을 통해 참된 앎에 이르고자 하는 신비주의 사상운동입니다. 슈미트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만물 사이에 [마이크로코스모스-매크로코스모스]적인 조응관계, 예정조화가 있다고 처음부터 상정하고, 이를 ≪찾아내는 데≫ 만족하는 듯한 유치한 사상과, 보날이나 자신이 말하는 법학과 신학의 대응관계 얘기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법학과 신학의 방법론적 동일성에 대해 슈미트는 학문적인 확신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블라바츠키 부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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