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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_웹진강의

[칼 슈미트 입문 강의] 1강 다섯 번째 부분

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仲正昌樹カール・シュミット入門講義作品社, 2013.








<네 번째 부분에 이어 계속>



〈Volk〉의 버추얼(virtual)성, 유동성 


슈미트는 뮐러의 ‘민족’관은 그런 슐레겔의 아이러니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봅니다. 83쪽에서, 1819년에 쓴 뮐러의 문장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평합니다. 



‘사계절의 변화와 신의 축복을 매일 받고 있는 단순한 마을사람이나, 공동체 생활의 수수한 일원인 차분한 장인이야말로 우리의 신분과 자유를 간직하며, 유럽을 위대하게 만든 지조를 살리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귀족을 논하고 있는 것이 더 이상 아니다. 정치적 이유로 그는 민중(Volk*)라는 말을 피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10년 전에 그가 『국가술 원리』에서 민중 대신에 국가라 부르고, 이를 모든 가능성의 근원이라고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중의 낭만주의적 기능은 명백하다. [『원리』에서는] 민중의 의지는 그저 법적으로만이 아니라 바로 진리에 있어서 법이며, 진리의 목소리라고 한다. … 그러나 새로운 실재로서의 ‘민족(Volk*)’과 낭만주의적 대상인 ‘민중(Volk*)’을 혼동하고, 낭만주의자를 새로운 민족 혹은 국민감정의 발견자로 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실재를 너무도 빨리 낭만화하려고 했기 때문에, 예의 뮐러의 말에서 민중(Volk*)이라는 단어가 기피되고 있는 것은 특징적이나, 여기에 이미 본질적인 차이가 포함되어 있다. 즉, 낭만주의적 대상[으로서의 민중]으로부터는 혁명적 신경이 끊겨있다. 그것은 그칠 줄 모르는 가능성의 원천이 된다는 사명을 지시하는 낭만주의적 주관을 섬기는 것이라고 간주된다. 그것은 사실상 계몽으로부터 멀리 떨어질 것을 의무부여 한다. 왜냐하면 읽는 것과 쓰는 것, 또한 모든 근대적인 교양의 유혹은, 위대한 무의식이라는 것을 망칠 것이기 때문이다. 

[* ‘사계절[의 변화]과 신의 축복을 매일 받고 있는 단순한 마을사람, 평화로운 장인, 공동체의 미미한 구성원, 바로 이들이 우리의 신분과 자유를 지탱해주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유럽을 위대하게 만든 감정을 보존하고 있다.’ 여기서 귀족은 심지어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그는 인민people이라는 말을 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민의 낭만주의적 기능은 일찍이 10년 전에 그가 『국가술의 기초(Elemente der Staatskunst)』에서 했던 것처럼, 여기서도 명백하다. 이 책에서 그는 불가피하게도 인민 대신 국가라고 칭하고, 국가를 모든 가능성들의 궁극적 기반으로 격상시켰다. 인민의 의지는 단순히 법률적으로가 아니라 사실에 있어서 법이며 진리의 목소리이다. … 그러나 ‘인민’이라는 새로운 실재를 낭만적 대상으로서의 ‘인민’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낭만주의자들은 새로운 인민적 혹은 국민적 감정의 발견자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이 실재를 낭만화하려고 재빨리 시도했기 때문이다. 뮐러의 언급에서 인민이라는 단어가 의미심장하게도 기피되고 있다는 점에 본질적인 차이가 이미 포함되어 있다. 즉, 혁명적 신경은 낭만적 대상으로부터 끊어져 있다. 이 대상은 지칠 줄 모르는 가능성들의 원천이라는 임무를 이 대상에 배정하는 낭만적 주체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것이다. 실천적으로, 이것은 계몽주의와는 거리를 둬야 한다는 의무를 갖는다. 읽기와 쓰기, 그리고 [근대적] 교양의 모든 사기술은 무의식의 방대한 영역을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p.68).]



여기서 ‘국가’로 번역된 것은 〈Staat〉입니다. 1809년의 『국가술 원리 Die Elemente der Staatskunst』에서 본래 〈Volk〉라고 말해야 할 곳에서 〈Staat〉라는 말을 사용하고 그 〈Staat≒Volk〉를 아까의 의미에서의 ‘가능성’의 ‘근원 Urgrund’이라고 다뤘다는 것입니다. 복잡한 것 같네요. 


〈Volk〉를 ‘가능성의 근원’이라고 강조한다는 것은 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만, 간단하게 말하면, 〈Volk〉의 실제적 존재방식과 관계없이, 낭만주의적 이상을 내포한 집합체로 보는 것입니다. 〈Volk〉를 매체로 삼아 ≪커다란 연관≫이 무한하게 변용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출현합니다. 맨 처음의 인용 부분은 제법, 근대문명에 오염되지 않고, 농촌 공동체에서 평온하게 살고 있는, 순수하고 소박한 〈Volk〉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느낌이네요. 그런 소박한 〈Volk〉가 내는 목소리 속에는 근대에 감염된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 Wahrheit’가 있다는 것입니다. 슐레겔도 이런 소박하고, 진리를 체감적으로 알고 있는 〈Volk〉를, 낭만주의적인 예술의 진정한 담지자라고 묘사합니다. 이런 식의 얘기는 현대일본의 문화보수적인 논의에서도 자주 나오죠. 


당연히 “그런 소박한 민중이 어디에 있어? 실제의 민중은 교활하고 자기중심적이고 매일의 생활에 급급하잖아!”라고 제동을 거는 사람이 나올 만하지만,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니, 여기서 말하고 있는 ‘민중’은 어떤 특정한 시대, 지역에 속하는 특정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무한하게 생성하는 ‘민중’이라는 이념이야”라고 슐레겔 식으로 응수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슈미트는, 뮐러의 〈Volk〉가 그런 버추얼(virtual)성, 유동성을 함의하고 있다고 보는 셈입니다. 


“새로운 실재로서의 ‘민족 Volk’”과 “낭만주의적인 대상인 ‘민중 Volk’”의 구별이라는 것도 좀 이해하기 힘들지만, 전자의 〈Volk〉는 보날이나 드 메스트르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민족’, 종교에 의해 뒷받침되어 몇 세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실재하고 일정한 국민성과 공공도덕을 갖춘 ‘민족’이고, 후자의 〈Volk〉는 앞서 말했던, 낭만주의적이고 버추얼화된 ‘민중’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네요. 낭만주의적인 ‘민중’은 문학적 상상력의 원천일지도 모르지만, 진정한 정치적 혁명으로 이어지는 짜릿짜릿한 긴장감은 갖춰져 있지 않습니다. 슈미트는 당연히 전자를 지지하고 후자를 부정적으로 봅니다. 낭만주의적, 예술적인 동경의 대상으로서 〈Volk〉와 대비시킴으로써 (슈미트의) 진정한 보수주의 계열의 “실재하는 것으로서의 〈Volk〉”관이 특징지어지는 셈이죠. 



국가 〈Staat ≒ Volk〉

‘가능성의 근원’으로서 본다

실재의 존재방식이 아니라, 낭만주의적인 이상을 내포한 집합체


“새로운 실재로서의 ‘민족 Volk’”

 보날이나 드 메스트르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민족’, 종교에 의해 뒷받침되어 몇 세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실재하고 일정한 민족성이나 공공도덕을 갖춘 ‘민족’


“낭만주의적 대상인 ‘민중 Volk’”

  낭만주의적으로 버추얼화된 ‘민중’, 문학적인 상상력의 원천일지도 모르지만, 진정한 정치적 혁명으로 이어지는 짜릿한 긴장감은 갖춰져 있지 않다. 



“계몽에서 멀어지는 것을 의무로 부과한다[계몽주의와는 거리를 둬야 한다는 의무를 갖는다]”라는 것도 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만, 이는 곧바로 뒤에 나오는, ‘독해’ 등의 ‘교양 Bildung’을 익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쓸모없는 지식을 익히지 않고, 계몽되지 않았기 때문에, 직관에 의해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셈이기 때문에, 슐레겔이나 뮐러 등의 관점에서 보면, 그 순수함을 그대로 계속 유지하는 존재라고 상정하려 합니다. 다분히 제멋대로 만들어낸 이미지네요. 서양인이 ‘동양인’을 ≪순진무구한 미개인≫으로 표상하고 싶어 하는 것을, 현대의 포스트콜로니얼계열의 논의에서는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하는데, 낭만파도 ‘민중’에 대해 그런 이미지를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낭만주의는 ‘민중’과 마찬가지로 ‘아이’나 ‘미개 민족들 primitive Völker’도 버추얼화하여 표상합니다. 



아이들도 낭만주의자가 생각한 대로 다루는 이런 비합리로 넘쳐나는 지주(持主)이다. 그러나 모든 아이, ‘왜곡된, 유약한, 어리광부리는 아이들’이 아니라, 노발리스가 말하듯이 ‘어느 쪽으로도 정해지지 않은 아이들’에 한정된다. … 아이와 같은 인류, 미개의 민족들도 마찬가지로 이런 무한한 가능성의 지주(持主)이다. 합리적인 피한국성(被限局性)과 비합리적인 가능 충일성(可能充溢性) 사이의 모순은 한정된 현실에 대해 다른 동일한 실재적(real)인, 그러나 아직 한정되지 않은 현실을 통해 대응함으로써 낭만주의적으로 제거된다. 즉, 합리적·기계화적 국가에 대해서는 아이와 같은 민중을 통해, 그 직업과 업적에 의해 이미 한계가 부여된 어른에 대해서는 모든 가능성과 시시덕거리는 아이를 통해, 고전적인 것의 명석한 윤곽에 대해서는 무한하게 다의적인 소박함을 통해 응하는 것이다. 한정이 있는 현실은 공허하며, 실현된 가능성은 꿈을 깨거나 환멸을 초래하고, 당첨되어 버린 복권이 지닌 빛바랜 우울을 수반한, ‘지나가버린 해의 달력’ 같은 것이다. 원시의 소박함은 소극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행복한 상태이다 그것은 적극적인 내용에 의한 것이 아니다. 

[* 어린아이들도 낭만주의자가 자신의 마음대로 다루는 비합리로 풍부한 담지자이다. 심지어 모든 아이가 아니다. 노발리스가 말하듯이, ‘응석받이에다가 버르장머리 없고 칭얼대기만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그저 ‘결정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일 뿐이다. … 어린아이와 같은 인류인 원시민족들도 이런 무제한적인 가능성들의 담지자이다. 합리적 한계설정과 비합리적 가능성들의 충만함 사이의 이런 모순은 또 다른 마찬가지로 실재적이나 여전히 무제한적인 실재[현실]가 제한된 실재[한정된 현실, die begrenzte Wirklicheit]와 서로 싸움이 붙게 되기 때문에 낭만주의적으로 제거된다. 즉, 합리주의적, 기계화된 상태에 대해 어린아이 같은 인민이 대립한다. 또 직업과 업적에 의해 이미 제한된 어른에 대해 모든 가능성들을 가지고 노는 아이가 대립한다. 그리고 고전적인 것의 명석한 노선에 대해 그 무한한 의미에 있어서 원시적인 것[무한하게 다의적인 소박성, die unendlich vieldeutige Primitivität]이 대립한다. 제한된 실재[한정된 현실, die begrenzte Wirklicheit]는 공허하며, 실현된 가능성, 결정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환멸을 느끼고 착각에서 깨어난 그것은 당첨된 후의 복권이 지닌 빛바랜 우울melancholy을 지녔다. 그것은 ‘지나가 버린 해의 달력’이다. 원시적 순박함은 가장 행복한 상태이지만, 소극적으로만 그럴 뿐이고, 적극적인 내용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p.69).]



사물을 합리적·기계적으로 파악하는 이성이 아직 작동하지 않은 ‘아이’와 ‘미개 민족들’을 죄를 모르는 존재로 아름답게 묘사하는 사상의 원점은 아마 루소(1712-78)일 거예요. 82쪽에서도, 루소가 ‘자연적인 결합’으로 이루어진 비합리적·감정적인 공동체로서의 〈Volk〉를 표상했다고 언급되어 있네요. 루소는 『인간불평등기원론』(1755)에서 ‘자연상태’에 있는 ‘야생인’을, 『에밀』(1761)에서 ‘아이’를 미적으로 이상화된 모습으로 묘사하며, 그런 이미지가 낭만파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낭만파는 ‘아이’나 ‘민중’을, 자신들의 이상인, ‘무한하게 다의적인 소박성 die unendlich vieldeutige Primitivität’의 보고(寶庫)로 보는 것입니다. 무한하게 다의적이기를 계속하는 것은, 사회의 ‘현실’에 의한 ‘한정’을 겪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정’되지 않기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우리는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다양한 가치관이나 라이프스타일, 공동체로의 귀속에 의한 정체성, 교육, 직업규범 등을 익히고, ‘자기’를 고정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정화된, 혹은 더 부정적인 말투로 하면, 경직된 ‘자기’의 존재방식은 어떤 의미에서 따분합니다. 하지만 어엿한 어른은 그 지루함을 참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낭만파는 ‘한정된 어떤 현실 die begrenzte Wirklicheit’은 공허하다고 단언합니다. 규정되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상황을 지향합니다. 그처럼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듯한 태도를 헤겔은 비판한 것이며, 슈미트도 그런 관점에서의 낭만파 비판을 계승한 것입니다. 


85쪽을 보십시오. ‘민중’과 나란히 또 다른 근대의 ‘데미우르고스’로서의 ‘역사’를 낭만주의가 어떻게 다뤘는가가 논해지고 있습니다. 



두 개의 데미우르고스의 또 다른 하나, 역사도, 마찬가지로 낭만적으로 이용된다. 순간순간에 시간은 인간을 한정하고, 가장 강대한 의지도 제약한다. 모든 순간은 이렇게 압도적인, 비합리적인, 유령 같은 현상이 된다. 그것은 죽어갈 무수한 가능성의 끊임없는 부정이다. 그 힘을 피해서 낭만주의자는 역사 속으로 도망친다. 

[* 두 개의 새로운 데미우르고스 중 두 번째인 역사는 마찬가지로 낭만주의적으로 이용될 수 있다. 매 순간마다 시간은 인간존재를 한정하며 가장 강력한 인간 의지도 제약한다. 그 결과 매 순간은 압도적이고, 비합리적이며, 유령과도 같은 사건이 된다. 그것은 그것이 파괴하는 무수한 가능성들의 항상-현재적이고 끊임없는 부정이다. 그 힘의 면전에서 낭만주의자는 역사에 굴복한다(p.69).] 



순간순간에 시간이 인간을 한정한다는 것은 알겠죠. 아무리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도 시간의 작용에는 저항할 수 없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수한 가능성이 조금씩 소멸하고, 나는 한정된 존재가 되어갑니다. “압도적인, 비합리적인, 유령과도 같은”의 “유령과도 같은”의 원어는 〈gespenstig〉입니다. 독일어의 〈Gespenst〉에는 ‘유령’ 또는 ‘요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시가와 씨는 가능성이 부정된다는 것 때문에 ‘유령’이라는 말을 택한 것 같은데요, ‘압도적, 비합리 …’라는 연결을 놓고 보면, 오히려 ‘요괴’가 낫지 않은가 저는 생각합니다. 각 ‘순간’이 괴물처럼 문답무용으로, 저를 압도하고, 점점 제가 원치 않은 쪽으로 저를 몰고 간다는 느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른이라면 그런 시간의 작용을 받아들일 터지만, 낭만주의자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감추고 있는 듯 보이는 ‘역사’로 도피합니다. 



과거는 현재의 부정이다. 현재가 부정된 가능성이라 한다면, 과거에 있어서 이 부정은 다시 부정되고, 제약은 지양된다. 과거의 사실은 현실적인 것의 존재성Seinsqualität des Wirklichen을 띠고, 구체적·실재적이며, 변덕스러운 공상이 아니지만, 그래도 실존하는 개인으로서의 낭만주의자를 모든 순간에 압박하는 현재의 실재의 가열참은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그런 한에서는 동시에 실재이기도 하며 비실재이기도 하며, 해석이나 종합이나 구성을 허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좋아하도록 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손안에서 빼앗을 수 있는 누락된 시간이다. 공간적으로 빨리 분리된 실재 또한, 현재의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서 마찬가지로 이용된다. 

[* 과거는 현재의 부정이다. 현재가 부정된 가능성이었다면, 과거에 있어서 [이런] 부정은 또 다시 부정되고, 한계설정[제약]은 무화[지양]된다. 지나간 사실은 실재[현실]적인 것의 존재성Seinsqualität des Wirklichen을 띠고, 구체적·실재[현실]적이며, 변덕스러운 공상[capricious poetry]이 아니다. 그렇지만 매 순간에 낭만주의자를 실존하는 개인으로서 억누르는 현재적 실재의 주제넘음[가열참, obtrusiveness]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런 한에서 이것은 실재인 동시에 비실재이다. 또한 이것은 해석되고 결합되고 구성[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기막히게 형상화하는 데 착수할 수 있는 응고된 시간이다[It is congealed time with which one can undertake to make marvelous figures]. 공간적으로는 떨어져 있는 실재는 현재의 실재[현실]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길로 사용될 수 있다(pp.69-70).]



앞서 봤듯이, ‘현재 die Gegenwart’는 무한한 ‘가능성’의 ‘부정’인데, ‘과거 Vergangenheit’는 그 ‘현재’를 ‘부정’하고, ‘부정의 부정’이라는 형태로 ‘제약’을 ‘지양 aufheben’합니다. ‘지양’이란 헤겔의 용어로, 대립을 이 대립보다 높은 차원에서 해소한다는 것이죠. ‘과거’가 ‘현재’의 ‘부정’이라는 말은 조금 알기 어려울 수 있지만, 이것은 ‘과거’에는 현재, 이미 부정되고 있는 ‘가능성’이 아직 ≪있었다≫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겁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가능성’이 늘어납니다. ‘아이’나 ‘미개민족’이 갖고 있는 듯한 것을, ≪우리≫도 ‘과거’에는 갖고 있었을 겁니다. 


낭만파는 이렇게 해서 ‘상상력’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게 하고, ‘과거’를 미화하는 것입니다. 뭔가 ‘공상’ 같지만, 낭만파도 전혀 근거 없는 ‘공상’을 하는 것이 아니며, 과거에 대한 기록이나 기억에 의지하여 재현합니다. 〈Dichtung〉이라는 독일어는 구어로는 ‘만든 얘기’라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만, 본래의 의미는 ‘시작(詩作)’입니다. ‘과거’의 ‘사실’은, 단순한 ‘허구’만이 아니라, 일정한 ‘현실성’이 갖춰져 있습니다. 그것이 “현실적인 것의 존재성 Seinsqualität des Wirklichen”입니다. 〈Seinsqualität〉은 정확하게 번역하면 ‘존재의 질’입니다. ‘존재’의 방식에 강함 혹은 등급이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어떤 사건 혹은 사물을 역사적인 ‘사실’로서 파악할 때에, “‘현실적인 것’으로서의 존재의 질”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에는 나름대로의 ‘실재성’이 있지만, ‘현재’만큼의 압박감은 없으며, 주체에 의한 일정한 ‘해석 deuen’, ‘종합 kombinieren’, ‘구성 konstruieren’을 허용합니다. 거기에 낭만주의적 상상을 작동시킬, 새로 만들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낭만주의자들은 그렇게 ‘역사’를 이용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이용 verwerten’인 것이지 역사 자체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멀리 떨어져서, 실제로는 어떤지 분명히 확인할 수 없기에, 버추얼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는 셈입니다. 


86쪽의 마지막 단락부터 87쪽에 걸쳐, 그런 낭만주의적인 ≪떨어져 있는 것≫의 미화가 어떤 곳에 이르게 되는가가 상당히 신랄한 느낌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낭만주의자에게 원시적인 착한 인간에 관한 관념, 원-민족(原民族), 빛의 아이들, 진정한 사제직, 시원의 인류 및 고대의 높은 자연적 지혜 등에 관한 관념은 낭만주의자 자신의 것이었다. 또 그것은 현대에 관한 낭만주의적인 비판과 자주 결부되었다. 그러나 잃어버린 낙원에 관한 신비주의적 관념과 낭만주의적 관념은 여전히 달랐다. 플라톤적 및 그노시스파적인 이념도, 전통주의적 논증도, 마찬가지로 낭만주의적인 시각을 위해 이용됐다. 과거는 현재의 보다 나은 기초로서 등장했으며, 현재는 또 다시 과거의 기생물(parasit, 파라지트)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보다 나은 시대의 과실에 의해 여전히 살고 있다’(노발리스), ‘우리는 우리의 조상의 자산을 탕진한다’(뮐러). 이 경우 낭만적이란 단순히 과거를 현실의 부정으로서, 구체적으로 실제로 있는 실재의 감옥으로부터의 탈출로로서 이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적인 느낌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낭만주의자는 허무로 달아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실재를 추구하지만, 그저 실제로 있는 것과는 다른 별개의 실재를 추구하는 것이다.

[* 낭만주의자가 자연적으로 선량한 인간이라는 관념, 원민족, 빛의 자손, 진정한 사제직, 최초의 인류, 고상하고 자연적인 고대적 지혜와 얼마나 친숙한가와는 무관하게, 그리고 이것이 현재에 관한 이들의 낭만적 비판[ihre romantische Kritik der Gegenwart]과 얼마나 종종 연결되는가와 무관하게, 잃어버린 낙원이라는 종교적 혹은 신비적 관념은 낭만적 관념과 여전히 다르다. 종교적이고 신비적 관념들, 그노시스적 관념들, 뿐만 아니라 전통주의적 논점들도 낭만적 태도에 봉사하도록 끌어들여졌다. 과거는 현재의 더 나은 기반처럼 보인다. 심지어 현재는 과거의 기생물이 된다. ‘우리는 여전히 더 나은 시대의 과실로 먹고 산다’(노발리스). ‘우리는 우리 조상들의 자산을 탕진하고 있다’(뮐러). 이런 경우 낭만적인 것은 과거를 현재의 부정으로서 사용할 뿐이며, 구체적이고 현재적인[현존적인] 실재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길로서 사용할 뿐이다. 이것은 불교적 방식으로 체험되지 않는다[This is not experienced in a Buddhist fashion]. 낭만주의자는 무(無)로 달아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는 구체적 실재를 추구하지만, 그 실재는 그를 혼란에 빠뜨리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pp.70-71).]

[옮긴이 : 불교 관련 대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영어판의 신뢰도도 떨어지는 편이다.]



여기서도 자세하게 말하면, ‘기생물 Parasit’이라고 적혀 있는 것은 독일어의 발음으로 하면 ‘파라지트’라고 하는 편이 옳을 거예요. 


낭만파는 시원의 상태에서의 ‘원-민족 Urvolk’적인 사람들을 아름답고 이상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자랑한다는 것이네요. ‘참된 사제직 das reine Priestertum’이란 ‘신’과 연결되어 있는 이미지네요. 


“그들의 현대에 관한 낭만주의적 비판”이라는 표현은 알기 어렵습니다만, 이것은 번역이 곤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원어로는 〈ihre romantische Kritik der Gegenwart〉입니다. ‘현대’가 아니라 ‘현재 Gegenwart’이며, ‘그들의’는 ‘비판’에 걸립니다. 이렇게 번역하면, ‘그들의 현대’라는 시대가 상정되는 듯이 들리지만, 그렇지 않으며, ‘현재’를 그들(=낭만주의자들)이 ‘낭만주의적’으로 ‘비판’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에 의한 낭만주의적인 ‘현재’ 비판”이라고 번역하는 편이 좋겠죠. 


‘원민족’이라든가 ‘빛의 아이들’, ‘시원의 인류 die Menschheit’는 성서의 ‘에덴동산’을 떠올리게 하는 표현이네요. 다만, 이것들은 신비주의적인 ‘잃어버린 낙원’의 관념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신비주의가 그런 ‘잃어버린 낙원’을 신비적인 의례를 통해 부활시키려고 한 반면, 낭만파는 단순히 ‘현재’ 비판을 위해 ‘이용’하는 데 불과하다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노시스’란 3세기부터 4세기에 걸쳐 지중해지역에 퍼진, 물질과 영혼의 이원론을 특징으로 하고, 진정한 ‘자기’에 관한 인식(그노시스)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적 사상입니다. 낭만파는 ‘원민족’적인 것에 관한 플라톤, 그노시스, 혹은 전통주의의 논의 등, 다양하고 상이한 계보의 담론을 이용할 수 있는 만큼 이용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표면적으로 이것들과 비슷한 대목은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다르다는 것을 슈미트는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낭만파가 그렇게 생생한 원천으로서 ‘과거’를 표상했던 것은 “구체적으로 실제로 있는 실재 die konkrete gegenwärtige Realität”를 감옥처럼 느꼈기 때문이라는 거죠. 그렇게 ‘현재’를 ‘감옥’처럼 보고 탈출하려 하는 태도는 불교와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것인데요, 이것은 상당히 의문이 드네요. ‘해탈’ 얘기를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아마도 불교를 제대로 공부한 후에 말한 것은 아닐 겁니다. 


88쪽부터 90쪽까지, 슐레겔의 사상의 핵심어인 ‘아이러니’에 대해 조금 자세하게 해설되어 있네요. 슈미트가, 90쪽에 나오는 자기풍자의 문제입니다. 자신의 사유의 대상을 제3자처럼 떨어진 곳에서 보는 것이 ‘아이러니’의 본질이기에, 본래라면 다른 무엇보다도 사유의 주체인 ‘자기’(나) 자신을 아이러니하게 봐야 하지만, 슈미트더러 말하게 하면, 낭만주의자는 실제로는 자기풍자(Selbstironie)를 피하고, 자신을 지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자기풍자 속에 있는 객관화, 주관주의적 환상의 마지막 잔재의 포기라는 것은 낭만적인 입장을 위태롭게 할 것이며, 낭만주의자는 낭만주의자인 한에서 본능적으로 이런 포기는 피한다. 그 아이러니의 공격 목표는 주관에서는 더 이상 없고 주관에 관련되지 않는 객관적 실재였다. 다만 아이러니는 실재를 말살하는 게 아니라, 실재적인 존재의 성질을 보존하면서도 주관에 그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이것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보다 높은 진정한 실재에 대한 요구는 이것에 의해 포기되는 것이 아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런 두 가지 뜻에 걸친 입장에 낭만주의적인 태도는 오랫동안 머물 수 없다. 

[* 자기-아이러니 속에 놓여 있는 객관화, 주관주의적 환상의 마지막 자취마저 포기하는 것은 낭만적인 상황을 위태롭게 할 것이다. 낭만주의자는 그가 낭만적인 한에서, 이를 본능적으로 피한다. 그의 아이러니의 표적은 분명히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객관적 실재이다. 주체를 보지 못하는 객관적 실재 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는 실재를 파괴하기로 되어 있지 않다. 반대로 실재적 존재의 성질을 간직하면서 아이러니는 방책으로서의 주체에게 이용 가능하도록 실재를 만들기로 되어 있으며, 또한 주체가 그 어떤 명확한 태도(position)도 피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런 식으로 더 높고 진정한 실재에 대한 요구는 포기되지 않는다. 물론, 낭만주의적 주체는 이런 애매한 태도를 오랫동안 견지할 수 없다(p.73).]



“자기의 아이러니 속에 있는 객체화=주관주의적 환상의 마지막 잔재의 포기”라는 것은 조금 어렵겠지만, 이것은 자기 자신을 정말로 아이러니하게 바라본다면, 주관을 뺀 채 자기를 객관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자기를 객관시한다면, 주관주의적인 환상(subjektivistische Illusion)에 몸을 맡길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의 환상이라는 것을 ≪객관시≫한다면, 환상의 효과가 없어집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기 아이러니는 피합니다. 


그래서 ‘주관=자기’가 아니라 ‘주관’에서 멀리 떨어진 객관적 실재, 예를 들어 ‘민족’이라든가 ‘역사’를 아이러니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다만, 아이러니가 너무 효과를 내게 한 나머지 (자신의 상상 속에서 구성된) ‘민족’이라든가 ‘역사’의 실재성마저도 부정해 버린다면, 이번에는 낭만주의적인 상상을 발휘할 대상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이런 핵심들에 있을 터인 ‘실재적 존재의 (성)질 Qualität realen Seins’은 건드리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아이러니’는 상상력을 발휘할 계기가 됩니다만, 아이러니를 효과를 발휘할 수 있으면, 상상력의 원천이 고갈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주관, 객관 둘 다, ≪스스로≫ 발판이 되지 않습니다. 낭만주의적인 아이러니는 그런 모순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주관주의적 유보가 귀결되는 곳은, 낭만주의는 그것이 추구하는 실재를 자기 안에서도, 공동체 안에서도, 세계사의 발전과정에서도, 그리고 또한 낭만주의적인 한에서, 낡은 형이상학의 신 안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재에 대한 동경은 채워질 필요가 있다. 아이러니의 도움을 받아 그는 개별 실재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주관이 자기방어하기 위한 무기에 불과했다. 실재 자체는 주관적으로는 획득할 수 없다. 

[* 주관주의적 유보의 결과는 낭만주의자가 추구하는 실재를 자기 자신 속에서, 공동체 속에서, 세계사의 전개 속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혹은 그가 낭만주의적인 채로 있는 한,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신 속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실재에 대한 갈망은 충족되어야 했다. 아이러니의 도움을 받아, 그는 유일한 실재에 맞서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는 주체[주관]가 스스로를 방어하는 무기에 불과했다. 실재 자체는 주관주의적 방식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p.73).] 



즉, 아이러니는 낭만주의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나’가, 모종의 ≪실재≫에 근접할 수 있고, 환멸하지 않도록 ‘나’를 방어하는 기능을 할 뿐, 모종의 ≪참된 실재≫에 이르는 것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참된 실재≫에 대한 동경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거기에 아이러니의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슈미트에 따르면, ≪참된 실재≫를 요구하면서도, 거기에서 정말로 도달하려 하지 않는 낭만주의는, 세계의 전부를, 비현실적인 ‘구성물 Konstruktion’,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변형할 수 있는 ‘형상 Figur’으로 다룹니다. 이 때문에 모든 ≪사물≫이 자의적으로 결부됩니다. 93쪽부터 94쪽까지의 대목을 보십시오. 



모든 것은 점으로 축소된다. 한계 혹은 한정을 의미한다고 해서, 낭만주의자가 그렇게도 거부하는 정의는, 여기서는 내용 없는 점이 된다. 정신이란 … 종교란 … 도덕이란 … 지식이란 … 감각이란 … 동물이란 … 식물이란 … 機智란 … 우아미란 … 초월적이란 … 소박함이란 … 아이러니란 … 모든 대상을 하나의 점으로 귀착시키려 하는 충동은, ‘~에 다름 아닌にほかならぬ’ nichts anderes als라는 말에 의한 무수한 설명이 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뭔가 특별하게 강조된 개념적 한정을 포함하는 게 아니라, 한 점에 응집되는 필연적 동일 판단 apodiktische Identifikation인 것이다. 이 점에서는 아담 뮐러는 모든 사람을 능가하고 있다. 최고의 미는 … ~에 다름 아니며 … 예술은 … ~에 다름 아니며 …화폐는 …~에 다름 아니며 … 통속이란 … ~에 다름 아니며 …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에 다름 아니며 … 적극과 소극은 …~에 다름 아니며 … 전체 세계는 다름 아니라 그것에 다름 아니다 Die ganze Welt ist nichts anderes als nichts anderes. 

[* 모든 것은 점으로 축소된다. 한계설정과 제한을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면서 낭만주의자들이 그토록 완벽하게 거부했던 정의는 실체 없는 구두점이 된다. 정신은 … 종교는 … 도덕은 … 지식은 … 감각은 … 동물은 … 식물은 … 재치는 … 매력은 … 초월론적인 것은 … 순박한 것은 … 아이러니는 …. 모든 대상을 하나의 점으로 환원시키려는 충동은 ‘~에 다름 아닌’nichts anderes als이라는 말처럼 사물에 대한 셀 수 없는 설명 속에서 강화된다. 그것은 특별하게 강조된 개념적 한정[한계설정]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점으로 결정화하는 필연적 동일판단 apodiktische Identifikation이다. 여기서 아담 뮐러는 다른 모든 이들을 능가한다. 가장 숭고한 미는 … 에 다름 아니다. 예술은 … 에 다름 아니다. 화폐는 …에 다름 아니다. 통속[인기]이란 … 에 다름 아니다. 이상과 현실의 분리[괴리]는 …에 다름 아니다. 적극과 소극은 …에 다름 아니다. 전체 세계는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그것에 다름 아니다 Die ganze Welt ist nichts anderes als nichts anderes(pp.75-76)]



낭만파가 ‘정의’를 ‘제약[한계설정]’으로 보고 싫어한다는 얘기는 이미 나왔어요.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는 사물을 말에 의해 ‘형상’화하고 미적으로 만지작거리려 합니다. 그래서 정의도 비슷한 것을 하게 된다는 얘깁니다.

“정신이란 … 종교란 …”과 “…”을 연결하고 있는 의미를 알기 어렵네요. 원문도 〈Geist ist … Religion ist …〉와 점을 연결하고 있을 뿐, 독일어를 읽어도, 낭만파의 말투를 어느 정도 모르면, 무순 말인지 감이 오지 않을 겁니다. 


이런 “…”은 ‘정의’라고는 말할 수 없는 막연한 형태로 ≪정의≫하는, 그런 사물의 특징이 되고 그런 말을 고를 수 있고 “…이다”라고 잠정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정신’이라면, ‘정신이란 인간의 보다 본질적인 부분이다’라든가, ‘정신이란 진리를 구하는 것이다’라든가, ‘정신은 신에 이르는 길이다’라는 느낌으로, ‘정신’의 ≪본질≫의 기술합니다. 당연히 그런 느낌이라고, 거의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거기서 말을 연결하게 됩니다. ‘정신이란 종교의 원천이다’라고 말한다면, 다음은 ‘종교란 …’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연상 게임처럼 “…”이 명확하지 않게 연결되어 간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정의’하고 체계적으로 전개한다면, 어떤 곳으로 수렴되거나 어느 정도 예측이 되지만, 하나하나의 말이 독자적인 의미를 갖게 되어 점처럼 되어 있고, 점과 점이 닥치는 대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고 수렴되지 않습니다. 〈apodiktisch〉는 처음부터 절대모순이 생기지 않도록 설정되어 있다는 의미의 형용사로, 철학용어로는 ‘필연·당연적[必当然的]’이라고 번역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뮐러는 그런 말투의 ≪명인≫으로, “~는 ~에 다름없다 nichts anderes als”라는 단언적 표현의 수사학적인 효과를 이용했다는 것이죠. 


낭만파는 그렇게 해서 “a는 b이고 … b는 c이고 …”라는 느낌으로 말을 이어나가고, “무한한 생성”을 상징적으로 연출합니다. 그것이 포스트모던계열의 논의에서는 평가받고 있습니다만, 헤겔이나 슈미트는 그것을 척박하다고 보는 셈입니다. 


97쪽부터 2장 2절이 시작됩니다. “낭만주의의 우인론[기회원인론]적 구조”라는 제목이 붙어 있네요. 다음 번에는 여기부터 시작합시다. 낭만주의는 이 세계가 필연성의 법칙에 의해 구조화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의 연쇄로 계속 생성하고 있다는 견해를 취한다는 얘깁니다. 이를 바탕으로 3장에서, 책 제목인 ‘정치적 낭만주의’란 무엇인가를 논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