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仲正昌樹カール・シュミット入門講義作品社, 2013.












2강. 『정치적 낭만주의』 (2) : 정치의 본질은 무엇인가? ( 번째 부분에 이어서)



<계속>


‘우인론Occasionalismus’ 또는 기회원인론 

1강에서 읽은 곳에서도 나왔는데, 19세기에는 각자가 ‘역사’와 ‘사회’라는 두 개의 ‘데미우르고스’에 의해 조종된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습니다. 버크, 드 메스트르, 보날 등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들 보수주의자들은 이것들[‘역사’와 ‘사회’]을 객관적인 것으로 보고 있지만, 낭만주의자들은 이것들을 “주관주의적 세계구성”에 결부시켰습니다. 즉, 자신들의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함으로써 ‘역사’나 ‘사회’와 같은 ‘고차적 유기체’의 구성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102쪽에서 (낭만주의적으로 버추얼virtual화된) ‘사회’나 ‘역사’를 우리 행위의 ‘참된 원인 die wahre Ursache’으로 보는 낭만주의의 발상은, 철학적으로 ‘우인론 Occasionalismus’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고 서술되어 있군요. 


참된 원인이라는 문제는 우인론의 문제이다. 이것은 신 안에서 모든 참된 원인을 보고, 모두 신의 바깥에 있는 근거는 그저 우발적인 계기를 이루는 것에 불과하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다시 낭만주의 정신의 구조의 논의가 데카르트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시인된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논증, 존재에 관한 사유의 결론으로부터,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혼과 육체, 사유하는 것 res congitans과 연장되는 것 res extensa 사이의 차별을 끌어냈다. 이로부터 어떻게 양자를 함께 작용시키는가, 혼과 육체의 상호작용을 어떻게 설명하는가라는 논리적·형이상학적인 곤란이 생겨난다. 
[* 참된 원인이라는 문제는 애초부터 기회원인론의 문제이다. 이것은 신 안에서 모든 참된 원인을 발견하고 이 세계의 모든 사건들을 단순한 기회(occasion)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시 낭만적 정신의 구조에 관한 논의가 데카르트와 더불어 시작됐다는 견해가 정당화됨을 본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논증으로부터, 즉 사유에서 존재를 추론하는 것으로부터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정신과 신체, 사유하는 것(res cogitans)과 연장되는 것(res extensa) 사이의 구별로 나아갔다. 이는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서로 상호작용하게 하는가, 그리고 정신과 신체의 상호작용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라는 논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난점들로 귀결됐다(pp.85-86).]


조금 어려운 이치입니다만, 요점은 데카르트가 발견한 ‘코기토’가 ‘정신’으로 상정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정신세계의 존재를 ‘코기토’의 연장에서 논증하려 했습니다만, 물질세계는 그것과는 다른 존재양태를 하고 있습니다. ‘물(物)’은 ‘연장’, 즉 정해진 양을 갖고 있는 것으로, 공간 속에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코기토’의 주체인 ‘나’ 자신은 ‘정신’입니다. ‘나’인 자신의 ‘정신’은, 어떻게든 통제할 수 있는 (듯한) 생각이 들지만, ‘물질’인 ‘신체’는 반드시 생각하는 대로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원래 ‘나’는 자신의 ‘신체’를 움직이는 것으로 되어 있을 뿐이고, ‘신체’는 자연계의 법칙을 따라 식욕, 수면욕, 성욕 등을 품고 있고,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일 뿐인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현대의 철학에서도 끊임없이 논의되고 있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정신’과 ‘물질’은 이질적이라는 전제에 서면, 아무래도 양자 사이에는 어떻게 상호작용이 일어나는가라는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생깁니다. 데카르트는 송하선(松下腺)이라는 곳에서 ‘정신’과 ‘신체’가 이어져 있다고 주장했습니다만, 설령 그게 정말이라고 해도, 그래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문제는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에 서 있는 한, 반드시 생깁니다만, 데카르트가 ‘코기토’의 실재를, 모든 지식의 원점으로 삼으려 했던 탓에, 부각된(close-up) 셈이죠. ‘정신’ 따위란 없다고 생각하면 얘기는 간단합니다. 홉스(1588-1679)는 유물론의 입장에 서서, 외부세계로부터 뇌 안으로 들어오는 인상의 연쇄로서 정신의 작용이 생긴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연히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나’ 자신은 실재하지 않으며, 뇌가 만들어내는 현상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정신’으로서의 ‘나’가 실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아무래도 정신이 의지한 것이 어떻게 물질의 운동의 원인이 되는가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거기서 ‘우인론’이라는 사고방식이 나옵니다. 


제로 드 코르드무아Géraud de Cordemoy, 괴린크스 Geulincx, 말브랑슈 Malebranche의 체계에 있어서 행해진 기회우연론에 의한 해결은, 신을 모든 개개의 심리적·물리적 과정의 참된 원인으로 간주함으로써, 이 곤란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신은 혼과 육체의 현상의 설명하기 힘든 일치를 생기게 한다. 의식과정, 의지충동, 근육활동은 모조리 단순히 신의 활동의 계기이다. 진정으로 행위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신의 관여는 모든 개개의 경우에 본래의 활동이며, 고유한 효과 efficacité propre이다. 
[* 제로 드 코르드무아, 괼링크스, 말브랑슈의 체계에서 착수된 기회원인론적 해법은 신을 모든 하나의 심적·물리적 사건의 참된 원인으로 간주함으로써 난점들을 제거했다. 신이 정신적·육체적 현상들의 설명하기 힘든 일치를 산출한다. 의식적 과정, 의지적 충동, 근육 운동은 함께 일어나는데, 이 모든 것은 신의 활동을 위한 단순한 기회(occasion)이다. 사실상 행위하는 것은 인잔 존재가 아니라 신이다. 코르드무아는 이렇게 주장한다. nihil facimus nisi auxilio potentiae quae nostra non est(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닌 힘의 도움에 의하지 않고서는 행위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말로 그는 은총의 효과가 아니라 자연적 사건을 뜻했다. 모든 개별 사례에서, 신의 개입은 실제적 효력, 고유한 효력efficacité propre이다(p.86).]


이런 과정을 나타내는 데서, 기회우연론자들은 종종 자구까지도 낭만주의적인 어조를 띤 해석과 비교를 사용했다. 내가 집을 건축할 때, 내 설계를 마련하게 하고, 내 손을 이끌고, 모든 돌을 움직이는 것은 더 높은 힘이며, 그리고 마침내 집을 완성한다. ‘이 장면에서는 나는 관객이며, 배우가 아니다 Spectator sum in hac scena, non actor’(괼링크스). 낡은 기회우연론의 체계에서는 앞서 티크의 『로벨』에서 인용했던 바로 그 대목에서처럼, 뭔가를 쓰는 펜이라는 것이 언제나 예로 들먹여진다. 
[* 기회원인론자들은 이 과정에 대해, 종종 낭만주의적 기질을 떠올리게 하는 좀 더 쉬운 표현과 비교를 발견했다. 내가 집을 지을 때, 내 계획에 형태를 부여하고 내 손을 인도하고, 모든 돌을 움직이는 것은 더 고차적인 힘이며, 그리하여 마침내 집이 완성된다. Spectator sum in hac scena, non actor(나는 이 장면에서 관객이지 배우[행위자]가 아니다)(괼링크스). 우리는 여기서 또한 빈번하게 인용된 글쓰기 펜을 언급할 수 있다. 이 펜은 방금 언급했던 티크의 『로벨』에 나오는 구절에서 다시 등장한다. 내가 쓸 때, 신이 펜을 움직인다(p.86).]


코르드무아(1626-84)는 루이14세의 장남에 대한 가정교사도 역임한 프랑스 철학자·법률가로, 자크 베니뉴 보슈에(Jacques-Benigne Bossuet, 1627~1704)와도 친한 관계였고, 언어의 본질에 관한 연구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괼링크스(1624-69)는 플랑드르 지방(현재의 벨기에 북부)의 철학자로, 정신과 신체의 필연적 연결을 부정한 다음, 둘의 연관은 신의 개입에 의한 기적이라는 논의를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철학자·신학자 니콜라 드 말브랑슈(1638-1715)가 ‘우인론’을 체계화했다고 합니다. 하시카와 씨는 ‘우인론’을 ‘기회원인론’으로 고쳐 번역합니다만, ‘우인론’ 혹은 ‘기회원인론’이 번역어로서 정착되어 있습니다. 저도 ‘기회원인론’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슐레겔은 말브랑슈를 데카르트보다 높이 평가합니다. 슈미트는 말브랑슈를 특히 자세하게 다루네요. 말브랑슈는 보통의 철학사의 교과서에서는 이름이 나올 뿐이고 크게 다뤄지지 않습니다. 키다 나오토 씨(木田直人, 1973-)의 『사물은 왜 보이는가 : 말브랑슈의 자연판단이론(ものはなぜ見えるのか──マルプランシュの自然判断理論)』(中公新書)에 말브랑슈의 인식론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습니다. 

기회원인론은 신이 정신과 신체를 움직이고, 둘을 연동시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나’는 ‘나’ 자신이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신체를 움직이려고 하는 의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신에 의해 그렇게 유도되고 있고 ‘나’ 자신에게 신체를 지배하는 능력이 없더라도, 둘은 예정조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그리스도교에서도 신의 개입이라는 사고방식이 있습니다만, 기회원인론에서는 모든 심신의 연동에 신이 개입하고 신이 참된 원인이라고 보는 셈입니다. 이 세계의 운동의 모든 것은 신에 의해 기동되고 있으며, 개개의 인간이나 물체는 그 운동의 ‘계기’가 우연하게 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가 뭔가를 한 것 같아도 실제로는 신이 나의 손발을 써서 한 것이며, 나는 그저 관객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됩니다. 그런 발상이 반영되는 티크의 『로벨』로부터의 인용을, 98쪽으로 돌아가 읽어둡시다. 안드레아 코지모 워털루가 자신의 복수에 관해 쓰면서 자신을 돌이켜보는 장면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뭐냐? ― 여기서 아주 고지식하게 되어 펜을 잡고 말을 써 내려가는 것에 지루해하지 않은 이 생물은 어떤 자냐? 나도 내가 하는 것을 잘 모르니까. 나는 비밀의 보이지 않는 도적단의 우두머리가 되며, 전 세계에 대해 콧방귀를 뀌는 것이 매우 기뻤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고생하는 꼴을 보니, 내가 나 자신을 가장 큰 바보 취급해버린 것은 아닌가라는 그런 의문이 생긴다. … 나와 내 주위에 서 있는 이 기묘한 나는 누구냐? 
[* “그렇다면 나란 무엇인가? 말을 적어내려 가는 데 피곤해할 줄 모른 채 여기서 펜을 이다지도 열심히 쥐고 있는 존재란 누구란 말인가? 결국, 내가 하고 있는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세계 전체를 웃음거리로 만들면서 나는 도적단의 비밀스럽고 보이지 않는 우두머리라는 것에 매우 기뻤다. 그런데 이렇게 애를 쓰면서 내가 내 자신을 가장 커다란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린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생겨난다. … 이런 식으로 나와 언쟁을 벌이고 있는 기묘한 자아란 누구인가?(p.79).]


일본어에도 ‘붓 가는 대로’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제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나》의 안, 혹은 《나》의 배후에 있는 《뭔가》가 펜을 움직인다는 듯한 말투입니다. 낭만파의 문학작품에는 그런 것 자체를 테마로 하고 있는 것, 즉 ‘나’에게 쓰라고 시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등장인물 자신이 의식하고, 그로부터 새롭게 이야기가 전개한다는 모티프가 자주 눈에 띱니다. 

기회원인론은, 정신도 신체도 아니라 ‘신’이 참된 원인이므로, 정신과 신체의 관계에 관해 매달리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이원론은 해결되는 것이 아니며, 비본질적인 문제로 해소[치부]됩니다. 심신의 외견상의 이원론의 대립이, 신과 같은 초월적 심급의 존재에 의해 해소된다는 사고방식이 낭만주의로 계승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은 셸링의 절대적 동일과는 약간 다른 것이다. 사유가 순환운동을 하는 것인 한, 그것은 기회우연론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립이라는 순환을 초탈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낭만주의자의 경우처럼, 그들의 사상이 셸링에서 시작되는 암시에 의해 말살되지 않고 ‘유기적 생명’이 대립으로서 양극화되어갈 뿐 아니라 독자적으로 기능하자마자, ‘더 높은 제3자’ höheres Drittes가 대립을 지양하게 된다. 성의 대립은 ‘전인(全人)’ Gesamtmensch에 있어서 지양되며, 개인 간의 대립은 고차의 유기체, 국가 혹은 민족에 있어서, 국가 간의 분열은 고차의 유기적 조직, 교회에 의해 지양된다. 
[* 이 신은 셸링의 절대적 무차이와는 다소 다르다. 사유가 순환적 방식으로 운동하는 한, 사유는 기회원인론적이지 않다. 그 까닭은 사유가 대립의 궤도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기체’가 낭만주의자들에게서처럼 대립으로 단순히 양극화되지 않는 한, 낭만주의자들의 관념이 셸링에게서 유래된 암시에 의해 말소되지 않았을 때, ‘더 높은 제3의’ 요인은 대립을 중지시키고, 그런 식으로 안티테제적으로 묶인 사물들은 ‘더 높은 제3’ 속으로 사라지고, 대립은 이 ‘더 높은 제3’을 위한 기회가 된다. 성(性)들 사이의 대립은 ‘전인(全人)’에 있어서 중지되며(suspended, 지양되며), 개인들 사이의 대립은 더 높은 유기체인 ‘국가’나 ‘인민(people)’에 있어서 중지[지양]된다. 국가들 사이의 불협화음은 더 높은 조직화인, 교회에 있어서 중지[지양]된다(pp.87-88).]


셸링의 ‘절대적 동일(무차별) absolute Indifferenz’이란 초기 셸링의 철학에서 주체와 객체, 정신과 자연의 ‘동일성’에 관한 논의를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주체=정신은 객체=자연과 마주보는 가운데, 자연 안에서 자기 자신을 찾아낸다. 예를 들어 어떤 꽃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여러 가지 자극을 받는 것을 통해 그런 자신의 본성을 발견한다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연에 대한 태도 속에서 자신의 본질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자연’이 (‘자연’의 일부인) 나의 신체에 작동을 가하며, 나를 통해 자기의 본질을 나타내며, 자기 파악한다고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체=객체이며, 순환관계가 되는 것입니다만, 그런 사고방식은 ‘더 높은 제3자’로 소급되며, 대립을 해소하는 기회원인론의 발상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고차적인 제3자 

낭만파의 발상에서는 주체와 객체의 대립도, 성의 대립도, 개인 간의 대립도, 국가 간의 대립도 ‘보다 높은 제3자’, 모든 것을 포괄하는 “고차적인 유기체 der höhere Organismus”와 같은 것으로 관점을 옮겨감으로써 ‘지양 aufheben’된다. ‘지양’은 헤겔의 용어입니다만, 여기서는 얘기를 알기 쉽게 하기 위해 전용하고 있습니다. ‘신’이라기보다는 그런 ‘유기체’적인 것 속에서 이항대립이 해소된다는 사고방식이 낭만파의 사고의 특징입니다. 


대립을 극복하는 힘을 지닌 것은 참된 더 높은 실재이다. 항상 좋아하고 매개와 상호작용을 논한 아담 뮐러에게서도 이것은 해당된다. 셸링과 슐레겔의 요소, 그 밖의 여러 가지 요소가 다채롭게 뒤섞여 들어가는 그의 경우, 대체로 뭔가가 두드러지고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그는 대립의 이론에서부터 출발했으나, 그것이 절대적 동일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부정하고, 궁극원리로서 일종의 ‘대구적 종합 antithetische Synthesis’, 대구 자체를 천명하는 것이었다. 즉, 모든 것은 그 대립물에 지나지 않으며, 자연은 반-예술이며, 예술은 반-자연이며, 꽃은 반-꽃의 대립물이며, 마침내 대립 자체가 반-대립에 의존한다고 간주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대립의 극복이 ‘기계적’인 상호작용에 의해서는 초래되지 않는 것, 그것은 더 높은 것, ‘이념’에 의해 생긴다는 것을 일찍이 논했다. 
[* 더 높고 배타적인 효력을 위한 기회로서 대립을 채용할 수 있는 힘을 지닌 것은 무엇이든, 그것은 참되고 고차적인 실재이다. 이것은 항상 매개와 상호작용에 관해 말하기를 좋아한 아담 뮐러에게도 들어맞는다. 그의 작업에서 어떤 것이 셸링, 슐레겔, 그리고 무수히 많은 다른 원천들로부터 온 요소들이 잡동사니처럼 조합되어 있는 그의 작업에서 어떤 것이 분간될 수 있는 한, 그것은 다음을 따른다. 그는 극성(polarity) 이론에서 출발했는데, 이 이론은 절대적 동일성을 ‘저명한 오인’이라며 명확히 거부했다. 그리고 그는 일종의 ‘안티테제적 종합’을 궁극적 원리라고 천명한다. 즉, 안티테제를 말이다. 각각의 사물은 그 안티테제일 뿐이다. 자연은 반-예술이다. 예술은 반-자연이다. 꽃은 반-꽃의 안티테제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안티테제 자체는 안티-안티테제에 의존한다. 첫째로 버크와 샤프츠베리에게서 그렇게 나타났듯이, 균형이라는 낡은 자유주의적 관념을 여기서도 여전히 쉽게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뮐러는 안티테제가 ‘기계적’ 상호작용에 의해서는 극복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더 높은 요인, ‘관념’에 의해 일어날 것이라고 한다(p.88).]


뭔가 감이 오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이항대립을 고차적인 제3자에 의해 지양한다는 도식이 더욱 더 전도된 형태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즉, 처음에는 두 개의 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듯이 보인 것, 예를 들어 ‘자연’과 ‘예술’ 같은 관계에 있는 것을 보여준 다음, 그 ‘대립’을 해소하려면 더 고차적인 ‘이념’을 시야에 넣을 필요가 있다고 선언하는 형태로, ‘고차의 이념’의 존재를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과 ‘예술’이 대립한다는 것은 조금 알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예술’을 의미하는 〈Kunst〉는 영어의 〈art〉와 마찬가지로, ‘인위’ 일반도 의미합니다. ‘자연’의 세계와 ‘인위’의 세계가 대립하고 있다고 한다면 알겠네요. 우리의 신체는 ‘자연’의 일부이며, 우리들 안에는 신체를 통해 다양한 욕망이 생기며,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은 ‘인위’적이며, 우리는 인위적으로 구성된 관점을 통해서만 ‘자연’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연’과 ‘인위’로 찢겨져 있습니다. ― 심각한 체 하기 위해 “나는 OO와 □□ 사이에서 찢겨져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 이 말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만(웃음), 이런 추상적인 사용법이라면 이런 말투를 사용하는 것이 허용 범위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이란 그런 ‘인위’의 본질로서의 ‘창작 poiesis’이 가장 첨예화된 형태로 나오는 영역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우리는 불가피하게 이 ‘자연’과 ‘인위’의 대립관계(+양자의 표리일체성)에 직면합니다. ‘자연’과 분리된다면, 사물의 자연=본성을 반영하는 ‘예술’은 성립되지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인위’적인 의도가 더해지지 않는다면, 예술적인 창작은 시작되지 않습니다. 

‘자연/인위=예술’의 이항대립을 더 차원 높은 관념으로 소급함으로써 ‘지양’한다는 것이라면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다음에 얘기가 고조됨에 따라 ‘꽃’과 ‘반-꽃’과 같은, 의미를 잘 모르는 추상적 대립이 되고 있음을, 슈미트는 비꼬는 것입니다. 이것에만 그치지 않고, ‘대립’과 ‘반-대립’이라는 곳에까지 이르면, 철학적으로 깊이 읽어낸 해석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 예를 들면 사물을 이항대립적으로 파악하는 사고양식과 그런 이항대립을 부정하는 사고양식의 대립이라는 식으로. 하지만 왠지 억지로 이항대립도식을 짜내고, 《그것을 넘어선 새로운 사고》의 필요성을 호소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네요. 뭔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 일부러 하는 논의라는 느낌이 듭니다. 

이것도 현대의 포스트모던비판에서 자주 듣고 있는 얘기입니다. 포스트모던계열의 사상가, 특히 데리다는 서구의 형이상학이 정신/물체, 내부/외부, 본질/가상, 원본/사본 같은 일련의 이항대립 구조에 의거했음을 지적하고, 그 이항대립을 탈구축해 보여줍니다. 그런 방식을 잘 하기에, 그의 불가사의한 문장에 끌려드는 사람도 나오고 있습니다만, 비판적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보통 사람이 전혀 구애받지 않고 《이항대립》을 억지로 짜내고,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는 것을 해체하는, 의미 없는 요술을 보여주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에 반해 데리다 옹호자는, 그것은 당신이 자신의 사고가 의거하고 있는 근거에 관해 진지하게 반성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뿐이며, 결코 의미 없는 요술이 아니라고 반론합니다. 대개 그런 응수가 됩니다. 데리다와 다른 포스트모던계열의 사람들은, 낭만파처럼 고차의 제3자를 인용합니다만, 이항대립도식 해체론에 대해 그 도식 자체에 회의를 드러내는 사람이 나온다는 구도는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현실 속에 차례차례로 새롭게 발견하는 대립은, 그러므로 종종 더 높은 동일성으로부터의  유출인 듯 보인다. 바로 이런 사색과정 속에서, 이 새로운 세계관은 지난 세기의 생명 없는 기제적[메커니즘적]·분석적 합리주의에 대한 우월을 본 것이다. 
[* 그가 현실에서 거듭 발견하는 대립은 낡은 자유주의적 방식으로 자주 단순히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자주 더 고차적인 동일성의 유출처럼 보인다. 바로 이런 사유의 연속 속에서 새로운 세계관은 지난 세기의 생명력 없는 분석적 합리주의와 균형의 ‘기계론적(mechanistic)’ 교리에 대한 자신의 우월성을 봤던 것이다(pp.88-89).]


이 경우의 ‘유출 Emanation’이란 “(완전한) 일자”로부터 세계가 단계적으로 ‘유출’된다는 신플라톤주의 계열의 발상입니다. 이항대립을 해소하려 하는 낭만파의 사색은 불가피하게, ‘유출’을 거슬러 올라가 원천을 찾고자 하는 시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생명 없는 기제적[메커니즘적]·분석적 합리주의’란 물심이원론에 기초하여 (정신에서 분리된) ‘자연’을 운동하는 기계처럼 파악하는 합리주의적 자연관 같은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낭만주의에는 자연과학적 자연관에 대한 반발이라는 측면도 있습니다.


논리에 대한 강의의 보론에서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특별한 공감을 가지고 말브랑슈를 언급하며, 그는 데카르트의 상위에 놓인다. 뒤로 가면, 낭만주의자의 이런 공감의 기초를 이루었던 것은 [양자의] 비상한 동일성임이 분명했다. 그것은 가톨릭으로의 전향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낭만주의의 개념에 있어서는 결정적이다. 가톨릭교도인 슐레겔의 철학 전체는 자연과 인간, 인간(기회우연론자의 표현에서는 정신)이 자연(육체성)을 압도하느냐 자연이 인간을 압도하느냐라는 딜레마에서 출발했다. 피히테의 이상주의[관념론]와 셸링의 자연철학은, 이 딜레마의 적용 사례였다. 구원은 신에게서 직접 생긴다. 슐레겔이 그리스도교의 현실성 Positivität을 가장 장력하게 주장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자신의 이전의 자연철학적 어휘를 부정하려고 바랐다는 것에서 설명된다. 그러나 그것은 더 나아가, 참된 원인으로서 관여하기보다 더 높은 제3자를 궁극적으로 결정적으로, 무조건으로 시인하는 것도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아담 뮐러는 때로 말의 표현에 이르기까지 슐레겔의 철학을 받아들인다.
[*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논리에 관한 강의의 부록에서, 특별한 공감을 갖고 말브랑슈를 언급했으며, 말브랑슈를 데카르트보다 위에 뒀다. 나중에는 낭만주의자들의 이런 공감이 얼마나 많이 동일시에 기초를 두고 있었는가가 분명해졌다. 이는 가톨릭교로의 이동을 설명하기 때문에, 낭만주의 개념에 있어서는 결정적이다. 가톨릭 신자인 슐레겔의 철학 전체는 자연과 인간이라는 딜레마에서 출발한 것이다. 즉, 인간(정신)이 자연(육체성)을 파괴하거나, 아니면 자연이 인간을 파괴한다는 딜레마 말이다. 슐레겔에게 피히테의 관념론(idealism)과 셸링의 자연철학은  이 딜레마의 특별한 심급일 뿐이었다. 구제(deliverance)는 신에게서 직접 나온다. 슐레겔이 그리스도교 종교의 실정적(positive) 진리를 주장했던 것은 무엇보다 그가 자신의 예전의 자연철학의 오류를 부정하고 싶어 했다는 고려에 의해 설명된다. 하지만 여기에 덧붙여, 이 주장은 참된 원인으로서 개입하는 더 높은 제3의 요인을 궁극적으로 결정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승인하는 것을 포함한다. 아담 뮐러는 종종 자구 그대로 슐레겔의 철학을 인계받는다(pp.89-90).]


양자의 동일성이란 이항대립을 넘어선 곳에서 ‘고차적인 제3자’를 찾으려는 발상에 있지요. 슈미트는 이를 슐레겔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것과 결부시켜 이해하는 것입니다." ‘고차적인 제3자’를 “현실에 존재하는[실정적인 것] positiv”으로서 파악하려 하면, 역시 신으로 귀착된다. 그것도 신과의 관계에서, 공동체와 역사를 실제적으로 파악하는 가톨릭적 신관(神觀)에 다가간다는 것이죠. ‘피히테의 이상주의’의 ‘이상주의’의 원어는 〈Idealismus〉로 보통은 ‘관념론’으로 번역됩니다. 〈Idealismus〉는 ‘관념론’인 동시에 ‘이상주의’이기도 합니다만, 여기서는 ‘관념’=‘정신’에 중점을 둠으로써, 이항대립을 해소하려 한 피히테와 ‘자연’에 주목한 초기 셸링을 대비적으로 늘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관념론’이라고 번역하는 편이 좋겠죠. 이항대립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대답을 직접 신에게 요구하게 된 슐레겔의 여정을 뮐러도 따라갔다고 하는 것이네요. 





Posted by 수유너머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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