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의 상징화를 넘어서

부루쿠아(José Emillio Burucúa)와 키아트콥스키(Nicolás Kwiatkowski)

이중(二重)의 부재 : 실종자를 표현하는 방식”, <뉴레프트리뷰 6호>

 

 



박임당 / 수유너머N 회원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와 같은 말이 나오는 사태, 혹은 아예 말문이 막혀버리는 사태를 맞닥뜨릴 때가 있다. 이럴 때 우리는 흔히 ‘표현의 한계’에 봉착했다고 말한다. 그럴 때 우리는 곧바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상징과 표현의 범주를 넘쳐흘러 버리는 바로 그 사태를 정체화 하려 들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대규모의 동시다발적인 죽음이 일어났을 때, 이 사태를 학살로 이름 붙일 것인지 단순 사고로 명명할 것 인지에서부터 우리는 난관에 봉착한다고 볼 수 있다.

 

“역사적 학살[각주:1]과 집단 학살은 다른 어떤 종류의 사건보다 더 한껏 사실(fact)과 진실(truth)과 서술(narration)의 관계를 시험한다.”

- 이중의 부재, 332 -


쇼아(shoah)와 같은 사태를 떠올려 보자. 나치의 흉포 아래 천만 명 이상이 죽어나갔던 이 집단 학살의 역사는 이후로 끊임없이 정체화 되고 상징화 되는 과정을 거쳤다. 지금까지도 쇼아는 끊임없이 불려나오며 해석될 필요가 요구된다. 왜 이러한 작업은 멈춤이 없는 것일까? 그것은 사태에 부여되는 정체성이 언제나 그 사태와의 거리감을 만들기 때문이다. 대규모의 학살이 일어났다. 그랬을 때 우리는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게 된 실종자들을 무수히 짐작해 낼 수 있을 것이다. 부재한 사람들.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을 불러내고, 사태의 전모를 낱낱이 밝혀야 할 의무가 있다. 그렇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상징 자원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는 상징화를 통해 사태를 정체화 하고 그를 떨어내기 위함이 아니다. 잔디를 흩뿌려 바람결을 읽어내는 일처럼, 상징화를 통해 사태와의 거리를 확인하고 거기서부터 ‘사유 공간(Denkraum)’을 만들어내기 위함인 것이다.

 



학살의 ‘정형화된 표현 방식’[각주:2]

 

따라서 역사적으로 어떠한 상징화가 있어왔는지 파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사냥, 순교, 지옥으로 대변되는 과거의 ‘정형화된 표현 방식’들이 여전히 작은 그릇에 현재적 사건들을 우겨 넣는 것을 종종 보아 왔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상징화는 때에 따라서는 ‘저들’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가해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용 자원을 확인해 두는 일의 중요성은 따져 볼 필요도 없다. 두 저자는 이 논문에서 학살의 경우를 다루는 과거의 역사적 상징화 방식과 현재의 자원들을 검토하며 ‘사유 공간’을 열어젖히고 있는 셈이다.



프랑수아 뒤부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1573)

 

먼저 고대 그리스에서의 ‘사냥’은 가해자를 용맹스런 사냥꾼으로, 피해자를 사냥감으로 묘사한다. 프랑수아 뒤부아의 그림에서 가해자의 박력 있게 들어 올려 진 칼은 힘 있는 운동감을 느끼게 한다. 피해자들은 활에 쏘인 동물들처럼 널브러지고, 한쪽 귀퉁이에서는 목줄에 묶여 개처럼 끌려간다. 중세에는 ‘집단 순교’라는 방식으로 절망을 묘사한다. 엉망으로 뒤엉킨 사람들의 다급함속에서 죽음의 공포가 다가오는 속도와 그로인한 대혼란이 묘사되고 있다. 16C의 지옥 메타포에서 악마로 분하는 자는 희생자이기도 했지만 가해자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 세 공식은 집단 학살과 세계대전 등을 거치면서 사태들을 다루기에는 미흡한 메타포로 밝혀졌다. 이례 없는 대규모의 폭력과 압도적인 죽음의 양상이 세 메타포들을 넘어 요동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루엣과 도플갱어의 증식

 

때문에 다른 상징화의 가능성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실루엣을 통한 실험들이 그것이다. 아르헨티나에서 독재를 반대하던 수천 명이 실종 되었다. 이에 1983년에 엘실루에타소(El Siluetazo)라는 이름의 운동이 기획되었고, 실종자들은 실루엣으로 불려 나오기에 이른다.

 




El Siluetazo, (1983)


“로돌포 아게레베리(Rodolfo Aguerreberry), 기예르모 켁셀(Guillermo Kexel), 훌리오 플로레스(Julio Flores), 이 세 미술가는 실종자 어머니들의 단체인 ‘5월 광장 어머니회’와 접촉하여 실종자들을 상징하게 될 실루엣을 위한 모델로 자세를 잡아주도록 행인들을 참여시키는 퍼포먼스를 함께 조직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이 살아있는 몸을 빌려주어 부재하는 사람들의 형태가 종이에 그려져 도시 곳곳에 뿌려질 수 있었다.”(341-342)

 

이처럼 알아볼 수도 없고 묻어줄 시신조차 없지만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을 표현하는 실루엣은 이후 실종자를 상징하는 주요한 표현 양식이 되었다. 그러나 실루엣 뿐만 아니라 섬뜩한 분신들을 가면, 모형, 유령의 형태로 무수히 늘어놓는 ‘도플갱어의 증식’또한 학살의 주요한 상징으로 있어 왔다. 이 두 요소는 현대에서 실종을 어떠한 방식으로 상징화 시키는지 보여주는지 그 전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상징화의 전유? 혹은 사유의 시작?

 

저자들은 그러나 논문 말미에서 이러한 상징화 작업 자체에 머물면 안 된다고 경고하는 듯하다. 학살을 상징화 하는 것, 그렇게 ‘정형화된 표현 방식’을 읽어내고 고찰하는 것 또한 중요한 작업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열어 보이고 있는 사유 공간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 연구의 목적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대단히 충격적인 사실과 그것을 이야기하거나 설명하려는 사람 사이에 거리, 바르부르크의 말로 하자면 사유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분리가 표현의 한계라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무력하게 침묵하며 이들 참혹한 경험에 대해 어떤 종류의 이해도 거부하게 되는 위험을 피할 수 있게 해준다.”(348)

 

이 논문의 제목은 ‘이중(二重)의 부재’다. 부재하는 자로서의 실종자, 그리고 그 실종자를 표현해내는 방식 안에서도 역시 부재하는 실종자라는 뜻에서다. 학살의 피해자에게 집단적 정체성이 부여되는 순간 큰 그림은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폭력적인 일반화의 위험 또한 빗겨가기 어려울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학살을 사냥으로 묘사한 가해자의 방식을 재현하는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그런 왜곡을 피할 수 있을까? 가능한 한 포괄적인 범주의 이용과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람들, 즉 그들의 구체적인 고통과 운명에 대한 천착 사이에 균형을 이루는 것으로써 그럴 수 있을 것이다.”

 (349)


그렇다면 ‘사유 공간’에서는 어떤 작업들이 필요한 것일까? 저자들은 일례로 나치와 아르헨티나 독재의 희생자를 찍은 기록사진들과 희생자의 증언들, 그리고 그 자료들을 통해 전해지는 개별 인간의 독자성에 주목한다. 유대인 학살 추모공원 지하에 마련된 희생자들의 작은 증언들의 더미, 고문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엷은 미소를 띠는 희생자의 얼굴,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기 전 숲에 모여 있는 유대인 가족의 수선스러운 모습들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기록 사진과 증언들 속에서 이들의 이름과 가족 관계등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읽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작업들이 희생자 전체를 상징화를 통해 거칠게 일반화 시켜버릴 위험을 걷어낼 수 있는 일들이 된다. 그런데 이는 학살의 경우에만 유효한 전략은 아닐 것이다. 특정한 사건에 관계된 운동들뿐만 아니라 정체성 운동들 이를테면 장애인 운동, 청소년 운동, 성소수자 운동, 페미니즘 운동 등에서 이들은 사회에서 실종되어버린 자신들을 정체화 하기 위해 나선다. 자신들을 묶어내는 집단적 정체성을 상정함으로써 삭제되거나 왜곡되어 버린 처지를 폭로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운동들은 특정한 이미지 안으로 귀속되거나 ‘저들’이 정의한 바대로 주어지는 권리를 획득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는다. 정체성이라는 포괄적인 범주 하나를 이제 막 획득했을 뿐인 것이다. 그 범주로부터 무수히 많이 절단되어 버리는 독자성들이 더 많이 이야기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유 공간’은 그제서야 열린다.






  1. ‘역사적 학살massacre’은, “보통 무장하지 않아서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제한된 많은 사람들에 대한 대량 살인(mass murder)과 관련이 있다.”(330) [본문으로]
  2. ‘정형화된 표현 방식’은, “역사적으로 형성되고 그와 동시에 비교적 안정적이어서 독자나 관람자가 손쉽게 알아보는 일련의 문화적 장치(말, 이미지, 퍼포먼스)다. 그 목적은 기성 사회가 공동의 삶과 경험의 기본 요소로 여기는 대상, 인물, 사실 그리고 그들 간의 관계를 암시하고 보여주는 것이다.”(333) [본문으로]
Posted by 수유너머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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