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仲正昌樹カール・シュミット入門講義作品社, 2013.














2강. 『정치적 낭만주의』 (2) : 정치의 본질은 무엇인가? ( 번째 부분에 이어서)



<계속>



스피노자주의 : 낭만주의적 ‘나’ 


이후 말브랑슈도 피히테도 낭만주의도, 스피노자주의로 통하는 대목이 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낭만주의자가 자기 자신을 초월적인 자아로 간주하는 한, 참된 원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그를 불안하게 할 필요는 없으며, 그 자신이 곧 모든 사건의 발기자이다. 피히테는 그의 지식학의 기초에 있어서, 그의 학설의 체계적 부분은 스피노자주의이며, ‘그저 각자의 자아 자체가 최고의 실체’, 즉 스피노자 체계의 신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세계는 버클리Berkeley의 경우처럼 존재-피지각(Esse-Percepi)으로서가 아니라, 자아의 창조적 행위로서, 자아로부터 설명된다. 여기서 낭만주의자의 지위는, 세계 창조자와의 동일성을 최후까지 견지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자기에게 유보한다는 점에 놓여 있다. 피히테도 결국에는 ‘참된’ 자아와 심리적인 그것을 구별하고, 그것에 의해 이 경우 모든 요점인 심리적 현상이라는 것을, 다시 오래 전부터의 애매함에 맡기고 있다. 민족 또는 역사와의 동일화에는 낭만주의자는 도달하지 못했으며, 헤겔적인 좋은 양심은 그들에게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이리하여 다시 실재의, 이 경우에는 참된 원인의, 음모Intrigenspiel가 시작된다. 

[* 낭만주의자가 자기 자신을 초월론적 자아(ego)로 간주하는 한, 그는 참된 원인이라는 물음에 의해 걱정하게 될 필요가 없다. 그 자신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의 창조주인 것이다. 피히테는 자신의 지식학(Wissenschaftslehre)의 ‘근본(Grundlage)’에 있어서, 자기 이론의 체계적 부분이 스피노자주의라는 점을 인정했다. “모든 하나의 자아는 그 자체로 최고의 실체이라고 한 점을 빼면”, 스피노자의 체계의 신인 것이다. 이제 세계는 자아의 토대 위에서 설명됐다. ― 버클리에서처럼 존재-지각(esse-percepi)이 아니라, 오히려 자아의 창조적 행위로서 말이다. 낭만주의자의 상황은 그가 세계의 창조자와의 동일시를 자기 자신에게 항상 비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런 지위를 보존하지 못한다는 고려에 달려 있다. 이는 개별적인 경험적 주체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 분명히 실행 불가능(fantastical impossibility)하기 때문이다. 최종분석에서 피히테는 ‘참된’ 자아와 경험적 자아를 또 다시 구별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심리적 실재성을 위해 오래된 불확실성을 또 다시 일깨웠다(이 맥락에서는 모든 것이 이 심리적 실재성에 의존한다). 낭만주의자들은 인민 또는 역사와의 동일시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헤겔주의의 좋은 양심은 이것들에 맞지 않은 채로 있다. 그 결과, 낭만주의자들은 하나의 실재에서 다른 실재로, 자아에서 인민, ‘관념’, 국가, 역사, 〈교회〉로 떠돌아다녔다. 그들이 낭만주의자인 채로 있는 한, 하나의 실재를 다른 실재와 맞붙게 하지만, 실재와 더불어 작동되는 이런 음모의 게임에 결코 참여하지 않는다. 낭만주의자들이 말하는 현실은 항상 다른 현실과 대립되어 있다(pp.91-92).]



네덜란드의 유대계 철학자 스피노자(1632-77)는 신 및 자연세계의 모든 것은 무한실체인 신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정신도 물질도 신의 두 가지 속성의 변용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전제에 서서, ‘신’으로부터 모든 것을 연역적으로 도출하는 것을 시도했다. 스피노자주의라는 것은 보통, 모든 것은 ‘신’의표현[발로, 現われ]이라는 사고방식을 가리킵니다. 대체로, 동시대의 말브랑슈는 스피노자주의를 비판했습니다만, 신 이외의 다른 어떤 존재에도 참된 주체성은 없으며, 신이 참된 원인이라는 그의 철학도, 보기에 따라서는, 스피노자주의입니다. 우리 자신은 참된 원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신앙을 깊게 하는 노력도 무의미해집니다. 우리가 신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도, 신에 따른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108쪽부터 109쪽에 걸쳐, 그런 얘기가 나오네요. 피히테의 경우, 신이 직접적으로 전면에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만, 자아에 의해 모든 존재가 정립되며, 그 자아의 존재 자체는 절대적 자아에 있어서 단적으로 정립된다는 전제에서 논의가 짜여지고 있기에, ‘자아’가 실질적으로 스피노자의 신과 동일한 역할을 맡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것은 18세기에 피히테가 지식학으로 한 세대를 풍비했던 무렵부터 알려져 있었습니다. 


버클리(1685-1753)는 ‘주관적 관념론자’로 알려진 아일랜드의 철학자입니다. 그는 ‘존재하는 것Esse’은, 내가 ‘지각하는 것Percepi’과 같다고 주장했습니다. 어쩐지 스피노자나 피히테와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만, 버클리의 경우 지각되는 관념을 나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획득되는 것입니다. ‘관념’을 수용하는 ‘나’는 수동적입니다. 이런 점에서 버클리는 경험론자입니다. 피히테는 모든 것이 ‘나’에 의해 규정[설립]된다고 생각합니다. ‘규정 setzen’하는 ‘나’는 능동적입니다. 슈미트는 낭만파도 그런 자아중심주의를 피히테로부터 계승한다고 보는 셈입니다. 



버클리



그렇게 되면 당연히 이 ‘나’ 자신은 진정한 세계의 창조자가 아니라는 게 됩니다. ‘나’가 세계의 창조자인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아무리 쫓아가더라도, 최종적으로 붙잡을 수는 없습니다. 심리적 자아란 지금 여기에 실제로 있다고 생각하거나, 지각하기도 하는 ‘나’입니다. 그러한 《나》와, ‘참된 자아’를 구별했다면, 결국 이원론적 틀로 돌아가게 됩니다. 


낭만주의적인 ‘나’는 세계의 참된 창조자가 아니기에, 데미우르고스적인 ‘민족’이나 ‘역사’와 동화할 수 없습니다. 최종적으로, 수수께끼 그대로입니다. 따라서 미지의 ‘참된 원인’의 ‘음모’에 의해 농락당한다는 상상을 계속하게 된다. 헤겔은 이 ‘나’에는 아직 완전히 바라볼 수 없는, ‘절대정신’의 자기 전개의 방향을 논리적으로 탐구하려 한 것으로, 아직 양심이 있다는 것이죠. 낭만파에는 역사의 법칙을 탐구하기 위한 논리가 없다. 


111쪽에, 낭만파는 ‘진정한’ 개념의 필요성을 무턱대고 강조하고, ‘참된 것’, ‘현실의 것’, ‘진정’한 자유, ‘참된’ 혁명, ‘진정한’ 사제, ‘참된’ 종교성, ‘참된’ 책, ‘참된’ 민중성 … 이라는 식으로, ‘참된wahr’이라는 말을 무턱대고 사용할 뿐, 그 내용에 관해 말하지 않기에 공허하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런 다음에 이번에 다시 한 번, 헤겔주의와 낭만주의를 대비합니다. 



헤겔주의와 〈über-listen〉 ‘이성의 간지’



헤겔주의자도 이성의 간계(詭計)라는 것을 말하지만, 그러나 그는 세계사의 무대 뒤에 서 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며, 무엇이 문제인가를 알고 있었던 것이며, 세계사의 앞을 넘어서거나über-listen, 혹은 정당한 명분을 갖고 참된 원인의 쪽에 관여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에 반하여 낭만주의자는 직접 절망적인 상태에 놓였다. 왜냐하면 그의 중심에서는 복수의 실재가 상호 아이러니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 헤겔주의자는 이성의 교활함(cunning)에 관해 말하지만, 그는 세계사의 무대 뒤에 서 있다고 믿고 있다. 그는 무엇이 관건인지 알고 있었으며, 세계사의 교활함보다 한 수 앞서거나, 아니면 참된 이성의 편에 정당성 있게 관여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다른 한편 낭만주의자는 즉각적으로 절망의 상태에 놓여 있었는데, 그의 경우 여러 가지 실재들이 혼동된 방식으로 아이러니하게 작동했기 때문이다(pp.92-93).]



〈über-listen〉은 ‘이성의 간지’라는 말에서 ‘간지’에 해당하는 〈List〉에다가 영어의 〈over-〉에 해당하는 〈über〉라는 전치사를 붙여서 동사로 만든 말입니다. ‘(이성의) 간지’를 상회하다, 선취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슈미트는 하이픈 ― 독일어에서는 〈Bindestich〉라고 합니다 ― 을 넣어서, 플레이어인 우리를 앞지르고 있는 이성의 간지를 다시 앞지르고 앞을 예측한다는 뉘앙스를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헤겔주의자는 절대정신의 자기전개의 법칙을 조사하고, 그로부터 유추함으로써, ‘역사’의 ‘끝=목적Ende’을 예측하고, 거기에 빨리 도달하는 길을 준비하려 한다. 물론, 그 추측이 맞는다는 보증은 없지만, 낭만파처럼 무엇이 진정한 참된 원인인지를 알지도 못한 채, 복수의 가상적인(virtual) 《실재》를 잘 알지 못한 채 서로 작용을 미치는 듯한 혼탁한 이미지보다는 낫다는 것이죠. 


낭만주의와 헤겔주의는 ‘자아’를 초월한 것에 의해 세계 전체의 생성운동이 일어난다는 발상에서 닮은 면도 있습니다만, 헤겔주의는 절대정신의 움직임을 추적하면 최종적인 목적이 보이게 된다는 사고방식 ― 일본의 헤겔 연구자는 “헤겔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라고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본제(本題)는 아니기에, 여기서는 아주 간단하게 요약합니다 ― 인 반면, 낭만주의는 어쨌든 《뭔가》에 의해 움직여진다는 것인데, 그 《뭔가》는 ‘OO다’라고 특정한 시점에서 그것은 이미 가상이 되어버리는, “진짜로 움직이고 있는 참된 것은 무엇인가?”라는 얘기가 다시 나온다. 그것이 끝없이 이어지고, 최종 목표(goal)가 보이지 않는다. 낭만주의적 반성에 의해, ‘참인 것’에 한 발짝 더 다가서는 것인지 아닌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헤겔주의자나 슈미트 입장에서 보면, “논의가 전혀 진척되지 않고 있지 않은가!”라며 짜증을 내고 있습니다. 



버클리 

    ‘존재하는 것 Esse’은 내가 ‘지각하는 것 Percepi’과 똑같다. 지각되는 관념을 나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며, 경험을 통해 획득한다. ‘관념’을 수용하는 ‘나’는 수동적


피히테 

    모든 것이 ‘나’에 의해 규정된다고 생각한다. ‘규정[설립] setzen’하는 ‘나’는 능동적


헤겔

    절대정신의 움직임을 추적하면 최종적인 목적이 발견된다는 사고방식


낭만주의

    특히 《뭔가》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인데, 그 《뭔가》는 OO다라고 특정한 시점에서 그것은 이미 가상이 되어버리며, “진짜로 움직이고 있는 참된 것은 무엇인가?”라는 얘기가 또한 나오게 된다. 최종 목적(goal)이 보이지 않는다. 




낭만주의의 정신구조와 비더마이어적 속물성 


그리고 슈미트는 그런 낭만주의적인 논의의 공회전을 부르주아지의 생활감각과 결부시켜 논합니다. 



이런 상태는 만약 어떤 사람이 그의 생활을 오로지 정신적 관심을 위해 바쳤다고 한다면, 이 사람을 육체적으로도 망칠 것이라고 믿어두자. 그런데 전체로서의 낭만주의는 비더마이어Biedermeier로 끝난 것이며, 그것은 아무런 수치스러운 종말이 아니고, 결코 또한 아무런 비극적인 종말도 아니었다. 혁명적인 착란은 목가시Idylle가 되기에 이르거나, 부르주아는 낭만주의에 심취하고 이것을 그의 예술이상이며 그의 원기회복이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혁명에서 목가에 이르는 대립의 원환은 닫히며, 아이러니한 로맨티카는 나쁜 아이러니의 희생물이 되기에 이르렀다. 

[* 우리는 어떤 개인의 삶이 오로지 지적인 관심에만 바쳐졌다고 가정한다면, 이런 상태가 개인을 지적으로 파괴할 수도 있을 것이고 심지어 육체적으로도 파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전체적 현상으로서의 낭만주의는 비더마이어(Biedermeier)로 끝났다. 이는 아마도 수치스러운 종언이 아니며 또한 비극적인 종언도 아니었다. 혁명적인 내부 갈등은 목가(idyll)가 됐다. 부르주아지는 낭만주의에 몰입했으며 낭만주의 속에서 자기네의 예술적 이상과 회춘(rejuvenation)을 봤다. 혁명에서 목가로 이르는 안티테제의 순환은 끝났다. 아이러니한 낭만주의자는 나쁜 아이러니의 희생물이 됐다(p.93).]



낭만주의적인 멘탈리티는 ‘실재’에 다다르게 될 가망이 없는 채 여기저기를 서성이며 반성을 계속하기에, 살아가기가 힘들지만, 실제로는 ‘비더마이어’적인 생활양식에 다다르고 안정된다. ‘비더마이어 Biedermeier’란 19세기 전반기의 독일, 특히 나폴레옹의 완전 실각부터 48년 3월 혁명 ― 프랑스에서는 2월 혁명입니다만,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 그 움직임이 파급된 것은 3월입니다 ― 까지의 상대적인 안정기에, 소시민·속물적 방식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조금 냉소적인 말입니다. 독일문학사·문화사에서는 이 시대의 시민들의 생활양식을 ‘비더마이어 양식’이라고 부릅니다. 


이 말의 기원은 독일의 작가·시인인 요제프 빅토르 폰 셰펠(Josef Viktor von Scheffel, 1826-86)이 1848년에 뮌헨의 『플리겐데 블래터Fliegende Blätter』라는 일러스트를 곁들인 주간지에 「비더만[고루한·우직한 사람]의 저녁의 안락함 Biedermanns Abendgemütlichkeit」과 「붐멜마이어의 불평 Bummelmeiers Klage」이라는 두 개의 시를 게재했습니다. 그 후 법률가이자 작가인 루트비히 아이히로트(Ludwig Eichrodt, 1827‐92)와 의사인 아돌프 쿠스마울(Adolf Kussmaul, 1822-1902)이 두 개의 시 각각의 인물의 이름을 합성해 ‘비더마이어Biedermeier’ ― 당초에는 철자 한 개가 틀렸습니다 ― 라는 인물을 만들어내고, 같은 주간지에 1855년 이후, 이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풍자시를 계속 발표했기에, 점차 그 이미지가 유포된 거죠. 


48년 3월 혁명 이후, 독일 통일과 시민적 자유의 획득을 목표로 한 시민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그것을 이용하는 형태로, 오스트리아를 억누르고 통일로 향하는 프로이센의 움직임도 활발해집니다. 48년은 맑스(1818-83)와 엥겔스(1820-95)가 『공산당선언』을 낸 해이기도 하며, 이것 이후, 사회주의·노동자운동도 활발해집니다. 정치의 시대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때까지의 독일은 메테르니히의 지도로 실현된 부흥체제 아래서 부르주아들이 안정되고 평범한 삶의 방식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낭만주의는 프랑스혁명, 피히테, 괴테의 강한 자극 아래서 출발해, 유한한 자아의 제약을 돌파하고 무한한 생성운동 속에서 참된 자기와 조우하려고 했습니다만,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빈 체제 하에서 사회가 안정되기 시작하자, 낭만주의자들도 점차 안정을 바라는 보통 시민이 되며, 무한에 대한 동경을 표현하는 낭만주의 문학은 지루한 소시민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오락의 대상이 됐습니다. 슈미트는 메테르니히를 섬긴 슐레겔과 아담 뮐러의 삶의 방식을 비난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단순한 비방·중상모략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방식 자체가 낭만주의적 정신의 쇠퇴와 진부화를 상징하고 있는 듯 보였기 때문입니다.


3강에서 읽는 『정치신학』에서 더 분명해집니다만, 슈미트는 단순히 안정된 질서가 있는 것이 좋다는 게 아니며, 그 질서를 뒷받침하는, 뭔가의 궁극적인 ‘실재’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 ‘정치신학’의 유무를 문제 삼습니다. 그는 부르주아지의 가치관이 지배적인 시민사회에는 그런 ‘실재’ 개념, ‘정치신학’이 결여되어 있기에, 진정한 의미의 ‘질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메테르니히의 복고체제도 실제로는 부르주아적인 사이비 질서일 뿐이며, 낭만파도 그런 부르주아적 문화의 일원에 불과하다는 얘기인 거죠.  



낭만주의는 속물에 대한 가열한 항의에서 시작됐다. 낭만주의자는 속물 속에 평범하고 범용한 현실, 그들이 요구하는 진정한 높은 실재의 반대물을 인정했다. 낭만주의자는 속물을 증오했다. 하지만 속물이 낭만주의자를 사랑하여 찬탄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것이었으며,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는 명백히 속물 쪽에 우월성이 있었던 것이다. 

[* 낭만주의는 속물(philistine)들에 대한 풍자(satires)와 더불어 시작됐다. 낭만주의자는 속물 속에서 따분하고 야비한 현실(reality)을, 자신들이 추구했던 참되고 더 높은 현실의 안티테제를 봤다. 낭만주의자는 속물을 증오했다. 하지만 속물이 낭만주의자를 사랑했음이 밝혀졌으며, 그런 관계 속에서 속물이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했음이 분명해졌다(p.93).]



이것은 바로 《아이러니》군요. 낭만주의는 물질적 생활에 얽매어 있고 시야가 좁아진 ‘속물 Philister’을 싫어하고, 그들의 삶의 방식에서 이탈하기 위해 “참된 높은 실재 die wahre höhere Realität”를 요구했습니다만, 그런 그들의 작품이, 부르주아의 속물근성을 채우는 오브제가 된 것이죠.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낭만파뿐 아니라 예술작품 일반에 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술을 감상하는 사람은, 통상 어느 정도 생활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며, 자신에게는 무리한 모험을, 예술가들을 대신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낭만파의 경우, 그들 자신이 속물적인 상식을 싫어하고, 그런 정신과 결별하고 싶다는 태도를 보여줬기 때문에, 그 대조(contrast)가 두드러지는 것입니다. 


그런 맞대결 속에서 결국 속물이 우위에 섰다는 것인데요, 이것은 당연하죠. 낭만파의 문학가·사상가들 자신이 현실에서는 부르주아로서 생활하고 있고, 안정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수요가 있는 듯 보였기 때문에, 순응해 버린다. 오늘날에도 자주 있는 얘기네요. 


118쪽에서 낭만주의의 정신구조와 비더마이어적인 속물성의 상관관계에 관해 정리되어 있습니다. 



… 주관은 여전히 그 체험만이 유일한 결정적인 것이기를 요구한다. 이 요구는 질서 정연한 시민적 질서 속에서만 실현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으면 안심해 버려서 자기 자신의 기분에 잠기기 위한 ‘외부조건’이 결여되기 때문이다. 낭만주의는 심리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부르주아적 안정성의 소산이다. 낭만주의적 정서의 대상도 낭만주의로 셈에 넣을 수 없다. 도적 기사는 낭만적인 인물일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는 전혀 낭만주의자가 아니다. 중세는 견고하게 낭만주의화된 복합 현상이긴 하지만, 낭만주의적이지 않다. [모든 것을] 낭만주의화하는 주관과 그 활동만이 개념 규정에 있어서 의미가 있다. 이 주관은 과연 그 전제조건인 훌륭한 경찰을 낭만화하지는 않았으나, 그에 대한 선호는 결코 잃지 않았다. 독창적인 주관이 신을 그 자리에서 쫓아냈다는 것은 일개의 혁명이긴 했으나, 그러나 낭만주의자는 기회우연론자에 머물렀기 때문에, 그것은 단순히 ‘정신적인’ 것이었다. 

[* 하지만 주체는 항상 자신의 경험이 유일한 관심사이기만을 주장했다. 이 주장은 규칙에 기초한 부르주아적 질서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자신의 기분(mood)에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몰두하기 위한 ‘외적 조건’은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심리학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낭만주의는 부르주아적 안전(security)의 산물이다. 사람들이 기사도와 중세, 다시 말하면 낭만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는 잡다한 주제와 기연(奇緣, occasions)을 낭만주의 자체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한다면, 이에 대해서도 이해를 잘못할 것이다. 강도인 기사는 낭만주의적 인물일 수도 있으나, 그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다. 중세 시대는 강력하게 낭만주의화된 복합체이지만, 낭만주의적이지 않다. 개념의 정의에 중요한 것은 그저 낭만주의화하는 주체와 그 활동뿐이다. 이 주체가 그 전제조건인 부르주아 질서를 낭만주의화하기보다는 아이러니화하기를 선호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 질서가 현실적 현재(the actual present)이기 때문이다. 슐레겔의 이상적 상태(ideal state)와 관련하여, 그 자리(locus)는 중세라기보다는 ‘독일적 ― 그리고 그 당시에, 이것은 작고 현학적인(petty and pedantic)을 뜻하는데 ― 형태’의 경찰 상태(police state)라고 주장됐는데, 이는 전혀 부당하지 않다. 천재적인 주체가 신을 [신의 자리에서] 몰아냈다는 사실은 하나의 혁명이었다. 하지만 낭만주의자는 여전히 기회원인론자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그저 ‘지적인’ ― 즉, 사실상은 미학적인 ― 혁명일 뿐이었다(p.99).]



자기 자신의 기분에 ― 안심하여 ― 젖어 있기 때문에, “질서 정연한 시민적 질서 eine geregelte bürgeliche Ordnung”가 필요하다는 것은, 알기 쉬운 이치군요. 낭만주의자는 기사 이야기에 등장하는 듯한 ‘강도[도적]인 기사 Raubritter’를 이상화하여 묘사하더라도, 낭만주의자 자신이 그런 무법자(outlaw)의 삶의 방식을 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상의 세계 속에서의 일입니다. 그리고 등장인물 자신은 결코 낭만주의적이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렇죠. 공상의 세계 속에서 참된 자아에 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무한’을 요구하는 거친 무법자는 모순되어 있으며, 그런 《영웅》은 재미가 없어요. ― 『신세기 에반게리온』 같은 《영웅》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괴짜는 어느 시대에도 조금은 있을지 모릅니다만. 


슈미트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상상의 세계에서 낭만주의적으로 놀고 있는 것은, “질서 정연한 시민적 질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질서가 없으면, 위험한 공상에 안심하고 빠져들지 않습니다. 질서가 안정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는, 근거 없는 공상이 묘하게 현실에 영향을 주고, 대혼란에 빠져들기도 한다. 오타쿠 경향이 있는 사람만 있는 서클이 만들어지면, 사물을 잘 알고 있는 현실적인 사람이 전혀 없기에 공상에 안심하고 잠길 수 없다는 얘기라고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겠죠. ‘경찰’은 짜증나지만, 필요한 거죠. 그래서 낭만주의적으로 상대화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낭만주의자는 기회우연(기회원인)론자에 머물렀기 때문에, 그것은 단순히 ‘정신적인’ 것이었다”는 것이, 조금 감이 오지 않지만, 이것은 낭만주의자는 “자기 자신은 참된 원인이 아니다”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기에, 비록 “신을 추방하는” 것에 《우연히》 성공했다고 해도, 전연 실감이 나지 않는다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이 ‘신’을 대신한 듯이 보이더라도, 진정한 《주체》가 아닌 낭만주의자는 방관자에 머물며,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신’을 대신하는 것을 내세우려 해도, 그런 힘은 없다. 구체적인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단순히 ‘정신적’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부터 2장의 마지막까지, 정치적 낭만주의자인 슐레겔과 아담 뮐러의 정치적 담론은, 실재성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았고, 기회원인론적으로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계속 상대화하고 있기에, 큰 정치적·사상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는 얘기가 이어집니다. 


147쪽부터 시작되는 3장 「정치적 낭만주의」를 조금 속도를 내서 휘리릭 살펴봅시다. 다만, 이곳은 지금까지의 얘기를 정리하고, ‘정치적 낭만주의’에 대한 평가를 최종적으로 정한다는 느낌입니다. 이리 말한다면, 개요는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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