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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_웹진강의

[이진경의 파격의 고전] 1장 심청전과 '반인륜적' 독서, 두 번째 부분

**본 코너는 근간 예정인 이진경 선생님의 [파격의 고전] 원고 중 일부를 출간 전에 미리 보내드리는 코너입니다.



<이진경의 "파격의 고전">






1장 심청전과 ‘반인륜적’ 독서





이진경




첫 번째 부분에 이어 계속 (첫 번째 부분 보기)



2. 심청, 마조히스트?: <심청전>의 역설적 전략



이미 오래전에 조동일은 심청의 이런 행동이 갖는 이율배반적 성격을 지적함으로써 ‘반인륜적’ 독해의 가능성을 주목한 바 있습니다. “심청은 효를 하기 위해서 앞 못 보는 부친을 속이고, 부친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서 안맹이라는 부친의 상처를 자극하고, 부친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부친을 말할 수 없이 큰 불행에 빠뜨려야 했다. 효를 절대적인 것으로 긍정하기 위해서는 효마저 부정해야 할 정도로, 심청의 희생이 이율배반적인 성격을 지녀야만 했다. 또한 눈먼 부친을 버리고 가야만 하기에 심청의 결단은 잔인하기조차 했다.” 심청이 커다란 고심 끝에 선택한 행동은 더 이상 효이기를 중지한 효인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이런 해석가능성을 더 밀고가지 않고, 역으로 이를 돌려 심청의 효성이 갖는 비장미를 강조해 그런 행위의 숭고함을 설명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심청이 이렇게 하는 이유에 대해 그는 “어떠한 희생을 각오하고서라도 삶의 현실을 부정하고 [효라는] 이상을 긍정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심청이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조동일, 1999: 289) 심청은 목숨마저 바칠 각오가 된 숭고한 이상주의자가 됩니다. 희생을 각오한 효의 이상을 위해 심청은 장승상댁 부인의 ‘합리적 반대’마저 물리치며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라는 겁니다. 부친이 눈을 뜬다는 보장조차도 없는데 목숨을 걸고 효를 위해 나아가는 이런 행동의 비합리성이 심청전의 비장미를 형성한다는 것입니다(같은 글, 293, 295). 


조동일은 심청의 행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석을 구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고 하며 효를 위해선 일부러라도 죽어야 한다는 결론을 끄집어내는데(같은 글, 288), 확실히 드런 면이 있습니다. 장승상댁 부인의 제안이 있었기에, 공양미 삼백석을 구하기 위해서 꼭 죽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 건 아니니까요. 이처럼 다른 방법이 있는데도 효라는 이상을 위해 죽는 것이라면, 이 죽음은 사실 효라는 이상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됩니다. 즉 조동일의 설명처럼 이상의 구현을 위해 일부러 죽음을 선택한 것이라면, 심청의 행위는 『삼강행실도』의 과시적 스펙터클(구경거리, 쇼)와 다를 게 없어지는 겁니다.  


아버지를 위해 피치 못해 죽는 것과, 효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모범을 보이려고) 일부러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것은 아주 다른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후자는 과시적인 성격으로 인해 역으로 이상의 숭고함마저 잠식해 버립니다. 그게 아니어도, <심청전>을 어떻게 읽어도 심청의 마음이나 감정은 도덕적 이상을 위해서 일부러 희생을 선택한 자의 그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회한도 많고 슬픔도 많고 동요하고 두려워합니다. 텍스트는 그런 번민과 두려움 섞인 슬픔의 감정을 아주 길게 묘사합니다. 희생을 결단한 자의 비장한 ‘고요함’ 같은 것은 없습니다. 심청은 효라는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은 아니라, 부친의 어이없는 실수로 벌어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목숨이라도 팔아야 하는 난감한 처지에 몰려서 몸을 파는 것일 뿐입니다. 하여, 죽기 직전까지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 합니다. 요컨대 도덕적 이상 실현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죽으려 했고, 그래서 장승상댁 부인의 제안을 거절했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조동일은 효라는 도덕에 매몰된 독해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교적 윤리에 반하는 다른 요소를 주목합니다. 그는 심청의 선택이 갖는 이런 비장미가 <심청전>의 표면적 주제라면 심청이 죽은 후 뺑덕어미가 등장하면서 심봉사가 탈도덕화되며 망가져 가는 것을 통해 골계적인 방식으로 유교적 도덕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런 식으로 유교적 도덕에 대해 어떤 선택을 하는 게 좋을까 의문을 던지는 작품이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조동일, 1999: 303~305). 이런 식으로 <심청전>을 ‘인륜에 반하는’ 방식으로 읽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긴 하지만, 이 경우에도 심청의 행위는 여전히 ‘효’의 이상주의에 갇혀 있는 것이 되며, ‘부분적 독립성’을 갖는 부차적 요소들(뺑덕어미와 심봉사의 행위는 심청의 선택이나 그 행위의 의미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만이 윤리의 족새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심청의 선택이 갖는 이율배반적인 측면, 즉 ‘효이기를 중단한 효’라는 측면을 더 밀고나갔어야 하지 않을까요?


최근의 연구 가운데 최기숙 또한 효라는 도덕적 목적을 위해 ‘죽음’이나 ‘인신매매’라는 비도덕적 방법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이효상효(以孝傷孝, 효로써 효를 상하게 함)의 딜레마가 발생함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그는 텍스트 내부에서 심청의 효행에 감동하는 주변인물들의 언행이나 서술자의 언술, 그리고 텍스트 밖에서 독자들의 동조 등을 통해 이 딜레마는 소실되고 극한적 효의 완성으로 귀착된다고 분석합니다(최기숙, 2013). 결국 여기서도 <심청전>은 효를 설파한 도덕적 텍스트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도덕적 딜레마’라고 명명된 것이 그렇게 쉽게 소멸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딜레마나 이율배반은 매우 근본적인 것이어서, 엔간한 방법으론 잘 해결되거나 해소되지 않습니다. 단지 은폐될 수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은폐가 해소가 아닌 것은, 은폐해도 어떤 식으로 지속하며 드러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심청 주변 인물이나 서술자의 말들로 가려지지만, 그래도 가려지지 않은 채 드러나는 지점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 그걸 은폐하는 말들에 ‘속지 않으며’ 읽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등장인물이나 서술자가 반복하여 덧대는 효행에 대한 감탄사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심청의 행동이 갖는 이 이해할 수 없는 면모는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걸 면하려면 반대로 <심청전>의 줄기를 이루는 이 중심적인 모티프가 이해할 수 없는 면을 갖고 있음을 좀더 주목하고 강조해야 합니다. 그것을 앞서 말한 것처럼 다른 ‘헝겊’으로 문질러 대전시켜야 하고, 그것을 통해 그것에 달라붙는 다른 말조각들을 찾아야 합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잠시 우회로를 경유할 필요가 있습니다.

 

피하려면 충분히 피할 수도 있었을 죽음을 울면서도 기어코 밀고나가려는 심청의 이 행적을 보면서 무엇보다 먼저 생각났던 것은 상인 게오르크와 그 아버지의 대화로 이루어진 카프카의 소설 「선고」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러시아인 친구 등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넌 순진한 아이였지.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넌 악마 같은 인간이었어. 그러니까 알아둬. 나는 지금 너에게 빠져 죽을 것을 선고한다.” 그 얘기를 듣고 게오르크는 방에서 나와 강으로 뛰어가 난간을 잡고 뛰어내립니다. “그는 간간이 기둥 사이로 자기가 물에 떨어지는 소리를 쉽사리 들리지 않게 해줄 버스를 보면서 ‘부모님, 전 항상 부모님을 사랑했습니다.’라고 나지막이 외치면서 떨어졌다.”(『단편전집』, 64-65)



카프카, <선고>



물에 가서 빠져 죽으라는 아버지의 선고를 받고, 그 말대로 강에서 빠져죽으며 “전 항상 부모님을 사랑했습니다”라고 외치며 죽는 것, 이는 표면적으로는 사랑하는 아버지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는 순종적 행위로 보입니다. 절대적 명령, 도덕적 정언명령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심청 같은 ‘효행’이지요. 그러나 일말의 주저도 없고 이유도 묻지 않는 이 절대적 복종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그 명령의 지고함이 아니라 황당함입니다. 아들을 야단치다 ‘나가 죽어!’라고 했을 때, 그 놈이 정말 나가 죽어버린다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나가 죽으란다고 나가서 죽겠다고 강에서 뛰어내리는 이에게서 조선식의 효의 윤리나 칸트적인 ‘절대적 복종’을 진지하게 읽어내는 것처럼 웃기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 경우 ‘절대적 복종’은 항의입니다. 죽음을 불사하는 극단의 항의입니다. 명령에 순종함으로써 그 명령의 부당성을 드러내는 그런 항의입니다.


현실적인 요인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이런 절대적 순종은 종종 웃음을 야기하는 유머의 기술로 사용됩니다. 가령 김사량의 소설 「풀속 깊숙이(草深し)」에서 주인공의 숙부인 군수는 일본어를 쓰라는 본국의 명령을 충실히 따라 일본어를 알지 못하는 자신의 첩에게도 일본어로 말하고, 흰 옷 대신 색의(色衣)를 입으라는 명령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 색의 아닌 옷에 먹을 들고 따라다니며 먹칠을 하다, 급기야 자기 아내가 아끼는 흰 치마에까지 먹칠을 해 집에서 쫓겨납니다. 여기서 김사량은 과잉추종이 야기하는 어이없는 결과를 통해, 그가 추종하는 명령 자체를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김사량, 2001). 


들뢰즈는 규칙에 대한 지나친 준수와 그로 인한 어이없는 결과를 통해 그 규칙 자체를 의문에 부치는 이런 방법을, 규칙에 대한 근본적 반문인 ‘반어(irony)’와 대비하여 ‘유머(humor)’라고 명명합니다. 가령 『악덕의 번영』과 『미덕의 불운』에서 사드는 악덕은 필경 망하고 미덕은 고난 끝에 보상받는다는 도덕적 명제에 대해, 정반대되는 이야기를 통해 ‘과연 그럴까?’ 반문합니다. 악한 언니 줄리엣은 그 악덕 덕분에 성공과 번영을 누리고(『악덕의 번영』)) 착한 동생 쥐스틴은 그 선함으로 인해 끝도 없이 고생하다 파탄납니다(『미덕의 불운』). 이래도 ‘착하게 살자’고 할 거냐는 반문인 겁니다. 이는 도덕적 규칙에 대한 직접적 반박이란 점에서 ‘아이러니’의 방법에 속합니다. 반면 마조흐는 가령 『모피 입은 비너스』에서 규칙이나 계약이 정한 것에 대해 고통마저 감내하며 지나치게 준수하는 것을 통해 그 규칙이나 규칙 준수라는 명령을 웃음거리로 만든다는 것입니다(들뢰즈, 1996). 



질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 유머와 반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질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 유머와 반어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물론 『모피 입은 비너스』에서 실제로 웃음을 야기하는 익살스런 분위기나 내용을 읽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으로 진지한 분위기와 표정으로 규칙을 과잉준수하는 것이, 웃음을 끼워넣는 것보다 규칙준수의 도덕주의를 파괴하는 데는 더욱더 효과적일 수 있지 않을까요? 진지한 준수를 통해 어이없는 결과에 이르는 것이니까요. 카프카의 「선고」도 그렇습니다. 그 작품에서도 조롱이나 풍자의 느낌은 읽기 어렵습니다. 오직 아버지의 명령을 너무 고지식하고 진지하게 따르는 것으로 묘사할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근본적인 차원의 유머는 단지 웃음을 야기하는 풍자적 익살과 달리, 웃음 없이 쓰여질 수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웃음이나 익살, 명시적 비판의 태도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그저 명령이나 규칙을 과잉준수하게 하여, 그 규칙의 부당성을, 황당함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길게 서술한 심청의 행동이 그렇지 않은가요? 죽음으로 인해 부친이 겪어야 할 현실적 고난과 심리적 고통을 명확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게다가 장승상 댁 부인의 제안에 따라 그 죽음을 모면할 방법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고자 제물이 되어 물에 빠져 죽는 것에 대해 ‘일부러’라는 부사를 사용하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그게 효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자기희생적 모범을 보이려는 의도적인 도덕적 행위가 아닌데도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은 차라리 반대로 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요? 효에 대한 요구를 과도하게 준수함으로써, 그런 요구 자체를 어이없는 명령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방법이라고. 그럼으로써 심청은 자신이 맞닥뜨려야 했던 근본적 물음을 소설의 독자들에게, 그리고 자신이 살던 세계에게 되돌려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아버지 눈을 뜨게 하기 위해 바다에 던져질 제물로 몸을 판다면, 그걸 효라고 할 수 있을까?” 덧붙이면, 심청이 상인들과의 계약에 강하게 매여있는 것(“남에게 몸을 허락하여 약속을 정한 뒤에 다시 약속을 어기[는 것은] 못난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니...”)도 마조흐의 작품에서 세브린과 유사합니다.


조선처럼 도덕적 규범이나 통제가 강한 사회에서, 도덕적 규범 자체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기를 들거나 반문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고 위험스런 일입니다. 사실 조선만이 아니라 19세기말 프랑스에서도 사드처럼 도덕적 규칙에 대해 반문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사드는 자신의 소설들 덕분에 오랜 세월 감옥에 갇혀 지내야 했고, 더할 수 없는 모욕과 불명예, 스캔들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소설이란 글쓰기 자체에 대해서조차 사대부들의 반감이 강하던 조선에서, 심지어 엽기적인 양상의 극단적 모범으로 삼강의 윤리를 가르치고 강요하던 시대에, 도덕적 규칙 자체에 대해 정면에서 반문하는 그런 소설을 기대하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입니다. 따라서 사드처럼 반어의 전략을 택하여 도덕을 비판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겁니다.


반면 그런 시대이기에 주어진 도덕적 규칙이나 명령을 지나치게 준수하는 양상의 서사를 비난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삼강행실도>의 엽기적인 사례가 있으니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물론 김사량처럼 규칙의 과잉준수를 통해 규칙을 조롱하고 도덕을 쉽게 웃음거리로 만들었다면, 글 읽는 것으로 훈련된 사대부 양반이나 국가가 그대로 두었을 리 없습니다. <심청전>이 그랬듯이, 이를 모면하기 위해선 윤리적 규칙을 엽기적인 방식으로 준수함으로써 규칙 자체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경우에도, 그런 비난과 처벌을 피하기 위해 등장인물이나 서술자의 입을 빌어 ‘동조’의 언사들을 덧칠해야 했을 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풍자와 웃음이 아니라 비장함의 정서 속에서, 고지식하게 규범을 따라 죽으러 가는 방식으로 서술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기에 그 이율배반이나 딜레마, 혹은 역설을 드러내기 위해선 그 동조적 발언이나 비장한 정서의 덧칠들을 걷어내면서 그 텍스트가 제기하는 물음을 명확히 드러내는 방식으로 읽어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