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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_철학.사회

[이슈_지안의 난독일기] 계산이 불가능한 순간, 청년난민은 어떻게 ‘계산’을 빗나가는가?

지안의 난독일기 


'읽기 어려움이란 뜻의 난독은 굳이 고전이나 어려운 철학책에만 유효한 것은 아니다매일같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벌어지는 사회야말로 우리가 읽어내기 어려운 무엇이다. ‘청년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여러 사회 담론을 난잡하게 독서하려 한다그날 그날의 기분에 따라지는 일기처럼 통일된 논점이 아니라 계속 삐끗거리는 이야기들을 연재하고 싶다.  



 


계산이 불가능한 순간청년난민은 어떻게 계산을 빗나가는가?


 -미스핏츠, 『청년, 난민되다』(코난북스)

 



지안 / 수유너머N 회원





 

청년들에게-나는 저번 주에만 정확히 3번을 들었는데-“어떤 것이든 해보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들어보았을 것이다. 어떤 것이든 다 해보라는 것은 그만큼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일들이 있다는 청년의 속성을 어느 시기에는 청춘이라고 표현 했다. 대표적으로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부터 그 반대급부로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닌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청춘담론들이 있었다. 지금은 책의 제목대로 난민이라는 말이 그것을 대체한 것 같다. 청년이 청춘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논하는 사이 청년들은 스스로를 난민으로 칭하고 있다. 





<청년, 난민되다>의 표지.


청춘은 열정적인 자이다청춘이 가진 특유의 불안정함이란 무언가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에서 비롯된다면난민이 주는 불안함은 막연하고 무차별적으로 행동하는 어떤 이미지에서 기인한다따라서 사람들은 난민을 계획하지 못하고 그래서 대책 없는 무엇으로 규정한다그러나 사실 난민의 삶이란 냉소적이고 동시에 끝없는 계산의 과정이다난민의 일상은 한정된 자원과 그에 따른 치밀한 계산속에서 가능해진다청춘은 계산하지 않는다면난민은 모든 것을 계산한다.

결국 불안정함과 불안함의 차이가 청춘-청년과 난민-청년의 경계를 정확히 지목하는 것이다. 불안정함이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 안정화될 미래의 어떤 상태를 염두에 두는 것이라면 불안함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감정이다. 그렇다면 왜 동아시아 네 국가의 청년들은 일제히 불안 자체의 상황 속에 처해졌을까? 청년은 왜 난민이 되었는가?

 

당장 다음달 삶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이라는 감정이 사물의 형태를 띤다면, 그 모습은 타오팡(타오팡은 부엌은 없고 개인 화장실이 딸려 있는 주거 형태를 말한다)일 것이다.”

 

주거는 사람의 정체성을 반영한다. 따라서 난민-청년의 주거를 탐사하는 미스핏츠misfits의 기획은 결국 불안한 주거생활을 하는 청년들의 정체성 탐색으로 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 난민되다>의 이야기들은 상당히 피곤했는데, 난민-청년의 삶은 청춘으로서의 그것과 다르게 계산을 통해서 무언가를 하나씩 포기해나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청년난민들이 포기해나가고 있는 것은 내가 언젠가 집을 살 수 있을까, 나는 집을 사고 가정을 꾸리는 종류의 삶은 포기해야 하는가?’ 를 결정하는 것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작게는 그것은 오늘 저녁으로 구내식당을 이용할 것인가, 아니면 1+1 삼각 김밥을 먹을 것인가의 문제다. 포기는 가격 차이를 둘러싸고 이루어진다.

 


 

1. 계산하는 청년

 

처음 집에서 나왔던 순간, 그건 상당히 우발적이었는데, 내가 계획해왔던 삶이 증발하는 경험이었다. 두 계절을 친구 집을 전전하며 살다가 겨우 모은 약간의 돈으로 고시원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의 집은 부족했지만 나름의 아늑한 공간들이었다. 언제나 그들은 더 있으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시원을 찾은 건 그 집들이 나에게 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부터 갑자기 보이게 된 건 길거리에 널린 부동산들이었다. 부동산 유리창 앞에는 내가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숫자들이 쓰여 있었다. 손가락으로 공(0)을 세면서, 머릿속으로는 하나의 공을 갖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하는지 계산했다. 그리고 계산의 답은 금방 얻을 수 있었는데,

 

계산이 불가능하다는 답이었다.

 

알바로 생계를 부양하는 청년이 주거공간을 찾을 때 시간은 언제나 공간과 교환된다. 당시 최저시급은 5210원이었고, 신촌 인근 고시원의 한 달 방세는 35만원이었다. 서툴러 보이는 나에게 방을 보여주며 고시원 총무는 멋쩍게 웃었다. “많이 좁죠? 그래도 시세보다 싼 편이예요. 창문 없는 방도 보여드릴게요.” 창문 있는 방에서 창문 없는 방을 뺐을 때 매달 5만원을 얻을 수 있다면, 잃게 되는 건 무엇일까? 역시 이것도 계산이 불가능한 계산이었다.

 




<청년, 난민되다>의 청년들은 계산기를 두드리는 청년들이다. 통학하는 데 드는 시간적인 비용과 집에서 살면서 드는 심리적인 비용, 그리고 언제쯤 취업이 가능할 것이고 그래서 내가 받을 수 있는 임금은 어느 정도가 될 것이고. 또 그것의 몇 퍼센트를 어느 만큼의 기간 동안 모아야 집다운 집에 살 수 있는 지 계산하는 청년이다. 그리고 버티는삶의 이 기간을 벗어날 것을 상상하며 옷장 대신 행거를 사고, 침대 대신 소파베드를 사는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우리가 이라는 것을 계산할 수 있을까?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도 집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시점에서 청년주거문제와 그것을 둘러싼 집의 사회적인 문제는 너무 당연해 보인다.

 

언제든 박스 몇 개에 나눠 담을 수 있도록 인생을 정리한다는 것. 원치 않지만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 도시에서 안정적으로 공간을 빌릴 자본이 없는 청년은 잠재적 난민이다. 원치 않는 이동을 반복하고, 안전하지 않고 익숙하지 않은 공간을 떠돌면서 소진된다.”

 

그렇지만 미스핏츠의 기획은 집이 무엇이어야 하는 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이다. 집은 일상의 피로를 리셋할 휴식의 공간이며 다음 삶을 준비할 만큼의 여유를 주어야 하는 공간이다. 문제가 막막해지는 건 여기서 부터다. 요지는 이라는 건, 적금 붓기처럼 집요한 계획 하에서 가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계산이 성립되지 않는 삶의 가치라는 것인데 그것은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수식으로 불가능한 계산이기 때문이다.

 


 

2. 계산에서 빗겨나가는 청년


최근 리먼 사태를 다룬 영화 <빅쇼트>가 역주행을 거듭하며 외화 예매율 1위를 달성했다. <빅 쇼트>는 2008년 미국 주택시장의 붕괴가 촉발한 세계경제위기 발생 이전의 몇 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이때 주요 등장인물들인 약간 아류적인 펀드매니저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대출의 파생상품그 파생상품들이 지탱하는 주택시장이 붕괴할 것을 예감하고 그것에 배팅한다. 그들은 월스트리트 거대 은행들이 파생시킨 거대한 숫자 누각을 발견하고 분노하는 한편시간이 흐르고 부동산 버블이 실제로 꺼진 시점에서 수천억에 달하는 막대한 돈을 회수한다영화 속에서 주택시장의 붕괴에 배팅한 이들 펀드매니저는 계속해서 숫자를 이야기한다월스트리트의 숫자가 얼마나 잘못 되었고… 내 숫자는 어떻게 옳은가. 이 시장이 얼마나 근거 없이 서로를 지탱하고 있는 허울인가

 





어쨌든 이 펀드매니저들은 영화 내내 월스트리트의 계산에 반대되는 온갖 숫자들, 계산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대사가 음향 처리 되는 와중에, 카메라가 마치 귀찮다는 듯이 지속적으로 심드렁하게 잡아내는 이미지는 대사를 하는 펀드매니저들이 아니라 수십 개의 초단위로 분할된 장면들, 그냥 길을 돌아다니는 개인들의 일상이다. 수천, 수조 단위의 계산들이 귓속을 복잡하게 울리는 와중에 영화의 개별 이미지들은 숫자가 아닌 개개인들의 삶을 가리킨다.

 

이들이라고 계산하지 않았을까? 주택을 담보로 대출을 하고 그것을 갚아나가는 계산은 그것을 토대로 하는 더 큰 계산에 가볍게 밟혔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임대인들의 계산이란, 임대료를 높여도 나가지 않을 무한정의 임차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월스트리트의 계산이란 일정의 일자리가 존재하고, 일하며 대출금을 갚을 마음이 있는 노동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미스핏츠misfits란 저자들의 이름은 우습게도 우리를 두 번째 차원으로 데려간다. 첫 번째 차원에서 이 부적응자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부여된 이름이다. 취업시장에서도, 주거시장에서도 부적응하고 있는 청년들. 한 세대 전체가 총체적으로 난민화 되었음에도 개개인들에게 집요하게 물어지는 맞지 않는 사람misfit 이라는 판단이다. 이런 판단의 기저에는 더 열심히 계산하라는 엄포가 깔려있다. 하지만 수식 자체가 맞지 않음misfit 을 발견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건 새로운 범위의 삶의 방식이다.

 


 

3. “느슨한 관계”로서 청년들

 

누군가의 재산으로써의 이라는 가치가 살림으로써의 집을 파괴한 시점에서 집은 최소한의 주거를 보장하라는 인권적 차원과도 연결되지만, 동시에 집은 항상 정체성과 동시에 표상된다. 고향집은 찌개가 보글보글 끓어가는 가운데 존재하는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나를 상상하게 하고, 불 꺼진 고시원 방은 삭막한 도시의 공기와 끝없이 불안한 1인 가구로서의 나를 상상하게 한다. 언제나 집은 누구와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와 연관된다


따라서 청년세대가 집을 구매하려는 삶에서 벗어나면서 주어지는 것은 재산으로서의 집의 가치붕괴인 한편 청년 세대가 욕망하는 삶의 방식, 정체성 변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보증금을 마련하기 위한 적금을 드느니, 그 돈으로 건담 하나를 더 사겠다는 일본 긱하우스 거주자의 말이나 종샤우동루의 몇 백억 짜리 집 옆에 누워 항의 운동을 벌인 대만의 민달팽이운동처럼 말이다. 기성 시장이 만들어놓은 핏한 계산들 속에서 난감한 선택을 벌인 빗겨나간 청년들은 먼 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공유주거를 만들어나가는 한국 민달팽이유니온의 사례나 사회주택 건립을 시도하는 서울소셜스탠다드의 경우처럼 말이다. 이렇게 공동주거를 하며 사는 1인가구들은 느슨한 관계로 서로를 정의한다. 각자의 공간은 존재하지만 공유공간을 통해 서로의 일상을 나누고, 필요한 순간 결합하는 관계 말이다.

 

저자들의 해결책은 주거문제의 제도적 기반 마련에 가깝지만, 그보다 가까이 있는 전망은 오히려 직방에서 셰어하우스를 구하는 1인 가구들이 늘어났다는 점 같아 보인다. 주거 대책마련보다 주택을 보는 삶의 관점이 변화한 사람들의 존재 말이다. 집을 내가 소유하고 투자해야할 사유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흩어지고 때로는 공유하면서 느슨하게 흘러가는 삶의 방식의 집합으로써 보는 청년들의 탄생 말이다. 그래서 청년난민인 우리가 고민할 것은 이 지점일 것 같다. 표지가 보여주듯이 박스 하나 캐리어 하나에 담겨버리는, 수식을 버티는 삶이 유지될 것인가? 아니면 가벼운 짐을 무기로 계산을 빗겨나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