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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_웹진강의

[칼 슈미트 입문 강의] 3강 네 번째 부분

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仲正昌樹カール・シュミット入門講義作品社, 2013.







3강. 『정치신학』 (1) ― 주권자, 법-질서와 예외상태 (세 번째 부분에 이어서)



* 일러두기 

1) 일본어판에는 오역도 있고, 용어 사용에서 미흡한 점이 있으나, 아무튼 일본어 번역본에 기초하여 강의가 이뤄지고 있기에 일본어판을 먼저 인용한 후, [ ] 안에는 “칼 슈미트, 『정치신학 : 주권론에 관한 네 개의 장』, 김항 옮김, 그린비, 2010”의 번역본을 표기해 둡니다. 

2) 일본어판 쪽수는 “頁”로, 한국어판은 “쪽”으로 표기합니다. 





아감벤 ― 호모 사케르와 예외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 Home sacer』(1995)의 1장 「주권의 역설」의 서두에서, 이 대목을 인용해서, 그것을 ‘예외’와 ‘규범’을 둘러싼 그의 독자적인 논의의 기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예외’를 의미하는 영어의 〈exception〉, 이탈리아어의 〈eccezione〉 등의 어원인, ‘배제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동사 〈excapere〉는 단어 만들기에서 보면, 〈ex-capere(바깥에서(으로) 붙잡다)〉가 원뜻입니다. 즉, ‘예외’는 ‘보통=규범 norma’의 범주로부터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지만, ‘보통=규범=내부’와 무관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 쪽에 있으면서 ‘내부’와 관계지어지는 형태로 파악되며, 그 구성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아감벤은 ‘주권자’와, 그 대극에 있는 듯 보이는, ‘호모 사케르(=성스러운 인간)’, 즉 그의 ‘삶bios’가 법적 지배(혹은 보호)의 범위 바깥에 놓인 어중간한[이도저도 아닌] 존재는, 함께 ‘예외’적인 존재이며, 그런 ‘예외’가 있기 때문에, ‘법’이 성립된다는 취지의 논의를 전개했습니다. ‘주권자’는 (‘법의 바깥’이라는 의미에서의) ‘예외상태’에서, ‘호모 사케르’에 대한 터무니없는[법 외적인] 지배를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에 의해 ‘법’이 기능하는 셈입니다. 그것이 이 저작의 기본선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이치는 아닙니다. ‘바깥’이 없으면 ‘안’을 규정할 수 없고, ‘비정상’이 없으면 ‘정상’을 규정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외’가 없으면 ‘보통’은 규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외’와의 대비에서 ‘보통’의 상태에서의 법=권리의 본질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슈미트더러 말하게 하면, ‘헌법’을 일괄정지=중지(toto suspendiert) 상태로 하는 결정권을 가진 ‘주권자’가 있기에, 법질서는 유지되고 있는 것이지만, 현대의 ‘법치국가’는 그 《사실》을 기를 쓰고 부정하려 든다. 인정해버리면, 언제 주권자의 ‘결정’에 의해 현행의 법규범이 정지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만연하며, 주권자가 제대로 된 판단을 해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슈미트는 그런 주권자를 둘러싼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주권 개념의 발전의 역사적 서술은 몇 가지 있지만, 그것들은 교과서 식이자 색인 식으로 주권의 정의를 담고 있는 궁극적이고 추상적인 공식 집약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어느 한 명이자, 최고권력이라는, 끝없이 되풀이하는 전혀 내용 없는 상투어를 주권 개념의 저명한 논자들에 이어, 더 정확하게 연구하는 노력을 기울인 것처럼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이 개념이 위기에 처한, 즉 예외사례에 입각한 것임은, 이미 보댕에게서 명백하다. 자주 인용되는 보댕의 정의(주권이란 국가의 절대적이고 영구적인 권력을 이른다)보다 오히려, ‘주권의 진의’(국가론, 제1부, 10장)에 관한 그의 논설이야말로, 그를 근대국가론의 시조답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그의 개념을 많은 실제 예에 입각해 논하고, 그때 반복해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즉, 주권자는 어느 정도까지 법률에 구속되며, 신분들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의무를 지는가라고. 이 궁극적인, 특히 중대한 물음에, 보댕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즉, 약속이라는 것은 구속력을 지닌다. 그것은 약속의 구속력이 자연법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급박사태에서는, 이 구속은, 일반적·자연적 법칙을 따라 해소되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신분들 아니 영주민에 대해 왕후가 의무를 지는 것은, 그의 약속의 이행이, 영주민의 이익에 그러는 한에 있어서만이며, 긴급의 경우에는 그는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권 개념의 발전에 대해서는 몇몇의 역사적 서술들이 있다. 하지만 이 서술들은 궁극적으로 추상적인 형식 구성으로 만족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교과서적이고 시론적인 주권 정의가 포함되어 있다. 주권 개념을 다룬 저명한 저자들이 끝없이 되풀이했지만 철저히 공허할 따름인 [주권이란] 지고의 힘이라는 상투적 규정을 정확히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그 누구도 해오지 않았다. 이 개념이 위기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 즉 예외사례에 기원을 둔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 장 보댕이 밝힌 바 있다. 그는 자주 인용되는 그의 정의, 즉 “주권은 공화국의 절대적이고 영구적인 권력이다”(La souveraineté est la puissance absolute et perpétuelle d’une République)라는 정의보다는 “주권의 진정한 표식”(Vraies remarques de souveraineté)라는 학설로 근대 국가론의 시조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개념을 수많은 실제적 사례를 통해 상세히 논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 계속해서 되돌아온다. 즉 주권자는 어느 정도까지는 법률에 구속되어 있으며, 여러 신분계층에 대해 어떤 의무를 가지는지의 물음으로. 이 궁극적이고 각별히 중요한 질문에 보댕은 이렇게 답한다. 곧 어떤 약속을 지킬 의무는 자연법에 기초하므로 약속은 구속력을 갖지만, 긴급상황에서 이 구속력은 일반적인 자연법 원리에 따라 효력상실된다고 말이다. 따라서 군주의 약속이 인민의 이익에 부합하는 한에서 이행되는 만큼 군주는 여러 신분계층이나 인민에 대해 의무를 가지지만, 긴급사태의 경우 그는 결코 구속되지 않는다고 보댕은 일반화하여 말한다(19-20쪽).]




보댕의 주권론 


여기서 보댕의 이름이 나오네요. 보댕의 주권론이 근대의 국가론의 효시가 됐다는 것은 자주 듣는 얘기입니다만, 슈미트는 특히 보댕이 “주권자(=국왕)는 어느 정도까지 법률에 구속되며, ‘신분’들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의무를 지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했음을 중시하는 것 같네요. 세계사 책에도 나옵니다만, 절대군주제의 시대에 들어서기 전의 국왕은 절대적 지배자가 아니라 귀족, 기사, 교회, 도시 등의 신분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약정을 맺고 이를 토대로 지배를 행했습니다. 이런 것에 얼마나 얽매이느냐는 얘기입니다. 


보댕은 약속은 ‘자연법 Naturecht’에 기초한 것이므로, 통상은 주권자를 구속하지만, 긴급시에는 (‘자연법’의 근거이기도 한) “일반적·자연법칙 allgemeine natürliche Grundsätze”을 따르며, 그 약속에는 더 이상 얽매이지 않는다는 견해를 제시했던 거예요. 이것은 바로 ‘예외상황’론이네요. 더욱이 ‘예외’에서의 ‘주권’의 원천으로서 “일반적·자연법칙”을 인용합니다. 16頁에서는 『독재』에서의 논의를 원용하는 형태로, 17세기의 자연법론자도, “주권의 문제는 예외사례에 관한 결정의 문제로서 이해됐다고 논했다”고 기술되어 있네요. ‘주권’을 ‘예외’와 연결하는 사고방식은, 슈미트의 전매특허가 아니라 근대 초기의 주권론에서 이미 시사된 것입니다. 


보댕은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 혹은 대학의 정치사상사 수업에서는 ‘왕권신수설’, 즉 신이 각각의 왕을 ― 교회를 통하지 않고 ― 직접 임명했기 때문에 왕의 권력은 불가침이라는 논의의 선구자로서 잠깐 언급되는 경우가 많지만, 슈미트는 그런 종교적 권위부여보다는 ‘주권’과 ‘예외’의 관계를 둘러싼 철학적 고찰의 단서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중시하는 것입니다.


보댕은 일단 평생 가톨릭입니다만, 교황의 권위가 세속의 정부의 권력을 자주 능가하는 것에 대해서 비판적이고, 주권자인 왕 밑에 모든 권력을 집약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보댕을 평가하는 것으로부터도 슈미트는 반드시 가톨릭의 가르침 자체를 자신의 정치·법철학의 기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톨릭 문화 속에서 길러진, ‘질서’관을 중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드 메스트르나 보날도, 정통적인 가톨릭 신학 자체에 근거한 정치를 지향한 것이 아니라 교회와 국가의 이념적 결속을 강화함으로써 정치 질서를 재건하려 한 것입니다.



‘법-질서 Rechts-Ordnung’ 


19頁부터 20頁에 걸쳐 예외상황과 법질서의 관계에 대해 논의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예외상황이기 때문에 오히려 원칙적으로 무제한의 권한이, 곧 현행 질서 전체의 정지가 필요한 것이다. 이 상태가 출현한 경우, 법은 후퇴하면서도 국가는 여전히 존속한다는 것이 명백하다. 예외상황이라 해도 여전히 무질서 및 혼란과는 다른 것이므로, 법률학적 의미에서는 법질서가 아니라고 해도, 여전히 질서가 존속하는 것이다. 국가의 존립은 여기에서 법규의 효력에 대한 명백한 우월성을 실증하는 것이다. 결정은 어떤 규범적 구속으로부터도 면제될 수 있으며, 본래의 의미에서 절대화된다. 예외사례에서 국가는 이른바 자기보존의 권리에 의해 법을 정지한다.


[예외상태는 원칙적으로 제한 없는 권한, 즉 모든 현행 질서를 효력정지시키는 권한을 포함한다. 이 상태가 되면 법은 후퇴하는 반면 국가는 계속 존립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예외상태란 그럼에도 무정부상태나 혼란상태와 다른 무엇이기 때문에, 법질서가 없어졌다 하더라도 여전히 법학적 의미에서 하나의 질서가 존속한다. 여기서는 법규범의 유효성보다 국가의 실존이 이론의 여지없이 우월하다. 결정은 모든 규범적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고유한 의미에서 절대화된다. 예외사례에서 국가는 이른바 자기보존의 권리에 따라 법을 효력정지시키는 것이다(24쪽).]



여기서의 포인트는 순수한 ‘예외상황’에서는 ‘법질서 Rechtsordnung’은 전면 중지되지만, ‘질서 Ordnung’가 없어지지는 않다는 것이네요. ‘국가’를 존립하게 하는 ‘질서’ 자체는 ‘법’에 선행하는 것입니다. 법학적인 시각에서 보면 법규범을 체계화한 ‘법질서’야말로 국가를 성립하게 만드는 근원적인 질서인 것인데, 슈미트는 그보다 더 깊이, 혹은 본질적 ‘질서’의 층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단언한는 대목은 법학자답지 않습니다. 주권자는 법을 지키기 위해, 법을 넘지 않고, 법보다 중요한 것을 지키기 위해, ‘예외상황’임을 판단하고, 이를 위한, 그리고 그 안에서의 ‘결정 Entscheidung’을 행하는 것입니다.


덧붙이면, ‘질서’를 뜻하는 영어의 〈order〉, 프랑스어의 〈ordre〉 등은 ‘명령’ 혹은 ‘지도’라는 뜻도 지니고 있습니다. 독일어의 〈Ordnung〉에는 명령이라는 의미는 없지만, ‘(생활의) 규율’이나 ‘배열’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동사형 〈ordnen〉은 ‘정리하다’나 ‘배치하다’ 같은 의미가 됩니다. ‘법’ 없는 ‘질서’가 노출되는, ‘예외상황’에서의 주권자의 [결정 → 명령 → 정리·규율화]는 ‘질서’의 존재를 재확인·강화하고 그 일부가 된다고 생각됩니다.



예외상황

법질서 Rechtsordnung’ 질서 Ordnung’

주권자

법을 지키기 위해, 법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법보다 중요한 것을 지키기 위해, ‘예외상황임을 판단하고, 그 때문에, 그리고 그 안에서의 결정 Entscheidung’을 행한다.

· 법에 선행한다

· 근원적 질서

 

없는 질서가 노출되는, ‘예외상황에서의 주권자의 [결정 명령 정리·규율화]질서의 존재를 재확인·강화



‘법-질서’라는 개념을 구성하는 두 요소가, 여기에서 서로 대립하며, 각각의 개념적 독립성을 표명하는 것이다. 


[‘법-질서’라는 개념의 두 요소는 서로 대립하게 되며, 각각의 개념적 독립성을 표명한다(24쪽).]




여기는 약간 감이 오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말하고 싶은 것은 알겠네요. 독일어의 〈Rechtsordnung〉는 법률용어인데요, 그렇게 제대로 정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의 전문가가 아닌 사람도, 조금 딱딱한 글이나 연설 등에서 비교적 흔히 사용됩니다. 일본어의 ‘법질서’도 그런 느낌입니다. 자주 사용되는 말이기에, 의미에 관해서는 그다지 생각하지 않아요. 법학자나 법률가도 기초 이론에 관심이 없는 한, “법질서란 무엇인가?”라고 생각하지 않겠죠. 하지만 이 말의 의미를 분석적으로 생각해보면 몇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여러 가지 ‘법’규범이 논리적으로 정합성·일관성이 있는 듯 체계화되어 있는 것을 ‘법질서’라고 말한다든가, 아니면 국가 등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조직화된 법의 집합체라든가, 혹은 법에 의해 지켜지고 있는 ‘질서’라든가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마지막 경우 ‘법’을 지킨다와 ‘질서’를 지킨다 사이에 괴리가 생기지 않는가라는 새로운 의문이 나옵니다. 


그런 관계를 한마디로 표현하기 위해 “법-질서 Recht-Ordnung”라고 옆줄[하이픈]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옆줄을 넣음으로써 보통 사용되는 말에 포함된 이질성을 돋보이게 하고, 거기서 독자적인 해석을 전개하는 것은 현대사상에서 흔히 써먹는 수법인데요, 슈미트도 그런 게 특기입니다. 미리 정해진 규범의 집합체로서의 ‘법’과 조직화되고 안정화되어 있음을 의미하고 명령도 함의하는 ‘질서’는 원래 별개의 개념임을 슈미트는 이 옆줄로 시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법’은 사회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제정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일단 제정되면, 규범으로 고정화되고 자립화되므로, 이를 따르는 것이 질서 유지로 이어진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예외상태에서는 질서가 안정되는 것과 법이 통용되고 있는 것이 별개라는 것이 분명해지는 셈입니다.



결정



통상적인 상태에서 결정의 독립적 요소가 최소한으로 억눌러지는 것과 완전히 똑같이, 예외사례에서는 규범이 무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외사례가 법률학적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두 요소, 즉 규범도 결정도 함께, 법률학적인 것의 틀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상사례에서 결정의 독립적 계기가 최대한 억제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외사례에서는 규범이 무화된다. 그럼에도 규범과 결정이라는 두 요소가 법학의 틀 내에 머물러 있기에 예외사례는 여전히 법학적 인식의 테두리 안에 남아 있다(25쪽).]



방금 한 논의를 감안하면, 여기는 알기 쉽네요. “통상적인 상태(사례) Normalfall”에서는 ‘규범 Norm’이 자동적으로 적용되므로, ‘결정’은 눈에 띄지 않지만, ‘예외사례(적 경우case) Ausnahmefall’에서는 ‘규범’이 통용되지 않으므로, ‘결정’이 전면에 나섭니다. 단, 후자가 법학적으로 인식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정치신학』보다 초기 논문인 『법률과 판결(Gesetz und Urteil. Eine Untersuchung zum Problem der Rechtspraxis)』(1912)[카를 슈미트, 『법률과 판결 : 법실무의 문제에 대한 연구』, 홍성방 옮김, 유로서적, 2014]에서 슈미트는 재판에서 재판관이 법을 적용할 때, 불가피하게 어떤 형태로든 ‘결정’을 행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규범은 구체적 사례에 자동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 “이 사례에는 ○○라는 법 규범을 적용한다”는 ‘결정’이 없으면, 판결을 내릴 수 없습니다. ‘예외’에서는 《보통》으로 법규범을 적용할 수 없으므로, ‘결정’이 전면에 나오는 것입니다.



예외에는 법률학적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회학’에 속한다는 주장은 사회학과 법률학의 기계적 분리의 조잡한 적용이라 할 수 있다. 예외란 추정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 파악의 틀 바깥에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결정이라는 순수한 법률학적 형태 요소를 절대의 순수성에서 명시하는 것이다.


[만약 예외란 법학적으로는 의미가 없기에 ‘사회학’에 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사회학과 법학 사이의 형식적 구분을 거칠게 적용한 것이리라. 예외는 어떤 상튀 개념에 귀속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 파악으로부터 벗어나 있지만, 동시에 법학에 고유한 형식요소, 즉 결단을 완전히 순수한 형태로 드러내 보인다(25쪽).]



얼핏 보면 방금 전과는 다른 것을 말하는 듯 보입니다만, 이것은 번역의 문제입니다. “예외에는 법률학적 의미는 없다”는 대목에 마침표가 있습니다만, 원문에는 “조잡한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까지가 한 개의 문장입니다. 〈die schematische Disjunktion〉을 ‘기계적 분리’라고 번역하는 것도 조금 부정확하기에, 다음과 같이 재번역해봅시다. “예외에는 법학적 의미는 없다, 따라서 ‘사회학’에 속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회학과 법학을 도식적으로 분리하는 사고방식을 조잡하게 적용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사회학은 경험적 사실을 다루는 학이고, 법학은 규범의 체계를 다루는 학이라는 이미지가 있습니다만, 슈미트는 그렇게 간단하게 나눠버리는 것은 나쁘다고 보는 것입니다. 


내친 김에 다시 한 번 번역 얘기를 해두면, “추정 불가능한 것”은 원어에서는 〈das nicht Subsumierbare〉입니다. 바탕이 된 〈subsumieren〉이라는 동사는 ‘포섭하다’나 ‘종속시키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상위의 범주에 포함시키다는 것입니다. ‘예외’란 《정의》에서부터도, 뭔가의 상위 범주에 ‘포섭’하고, 그 속에서 자리매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예외’ 속에서 노출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정’ 또한 일반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법의 구성요소라는 것이 됩니다. 



‘생명의 관계들에 있어서 정상성=질서’ 



예외사례가 절대적인 모습으로 출현하는 것은 법규가 유효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진 후의 일이다. 그 어떤 일반적 규범도 생활관계의 정상적인 형성을 요구하는 것이며, 일반적 규범은 사실상 그것에 적용되어야 하며, 또한 그것을 규범적 규제에 따르게 하는 것이다. 규범은 동질적 매체를 필요로 한다. 이 사실상의 정상성은 단순히 ‘외적 전제’로서, 법률학자가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오히려 규범의 내재적 유효성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이다. 혼란상태에 적용할 수 있는 규범 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법질서가 의미를 가질 수 있기 위해서는, 질서가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외사례가 절대적 형상으로 출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법조문이 유효한 상황이 창출되어야만 한다. 모든 일반적 규범은 생활환경이 정상적인 형태를 취할 것을 요구하는데, 일반적 규범이 복잡한 현실에 적용되려면 이 형태가 필요하며, 그 규범은 이 형태를 스스로의 규제 아래에 둔다. 규범은 균질적인 미디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확립된 정상성은 법률가들이 무시할 수 있는 단순한 ‘피상적 전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는 규범의 내재적 유효성을 구성한다. 혼란상태에 적용될 수 있는 규범 따위는 없다. 법질서가 유의미할 수 있기 위해서는 질서가 구축되어야만 한다(25쪽).]



“법규(Rechtssätze)가 유효해질 수 있는 상황”이라는 표현은 조금 알기 어렵습니다만, 이것은 그 뒤에 나오는 “생활관계의 정상적인 형성 eine normale Gestaltung der Lebensverhältnisse” 및 “정상성 Normalität”에 대응합니다. 핵심은 ‘보통’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 ‘보통=정상 normal’인지가 확정됨으로써, ‘법규’가 ‘적용 gelten’되는 셈입니다. ‘예외상황’은 ‘법규’가 통용되지 못하는 상황인 동시에, ‘법규’가 통용되기 위한 새로운 조건이 창출되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그 어떤 일반적 규범도, 생활관계의 정상적인 형성을 요구한다 …”라는 표현은 말장난입니다. 이미 몇 번이나 나왔는데, ‘규범 Norm’과 ‘정상 normal’의 말장난입니다. 이 말장난에 의해, ‘규범’이라는 것은 도덕이나 법에 있어서의 추상적 이념일 뿐 아니라, 사회생활에서의 ‘정상성’도 함의하고 있고, 사람들이 ‘비정상’이 아니라 ‘정상’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 시사되고 있습니다. 


푸코나 젠더연구 혹은 문화연구 계열의 논의에서는, ‘규범’이 각자의 내면에 정착되고, ‘표준=정상’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행동하게 만든다는 것이 강조됩니다. 그것이 푸코가 말하는 “생명권력 bio-pouvoir”입니다. 슈미트는 그런 종류의 문화좌익적인 논의는 하지 않는다는 이미지가 있습니다만, “생활관계의 정상적인 형성 eine normale Gestaltung der Lebensverhältnisse”을 언급하기도 하고, 거기서 생기는 “사실상의 정상성 faktische Normalität”가 ‘규범’의 “내재적 유효성 immanence Geltung”의 일부가 된다고 말하고 있는 대목에서, 의외로 가까운 발상을 하고 있는 듯이 보이네요. 물론 포스트모던 좌파가 ‘규범=정상성’을 해체하고자 하는 반면, 슈미트는 그것을 유지하고 싶은 것이지만. 


“일반적 규범은 사실상 그것에 적용되어야 하며 …”라는 대목의 ‘사실상’은 앞서도 나왔던, 〈tatbestandsmäßig〉인데, ‘요건에 입각해’라고 재번역하는 편이 좋겠죠. ‘일반적 규범’이 자신의 요구에 기초하여 “정상적으로 형성된 생활관계”에 대해, 문제가 되는 요건사실에 입각해 적용되는 것입니다. ‘일반적 규칙’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곳의 원문은 〈normative Regelung〉입니다. 〈Regel〉이라는 단순한 명사 때문에 ‘규칙’이면 좋습니다만, 〈regeln〉이라는 동사가 되면, ‘제어하다[규제하다]’나 ‘조정하다[조절하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영어 등이라면 〈regulate〉에 상당합니다. 일본어라면 ‘규범’과 ‘규칙’의 구별이 되기 힘든 것도 있어서, ‘조정[조절]’이라고 번역하는 편이 좋겠네요. “모든 일반적 규범은 생활관계의 정상적인 형성을 요구한다. 일반적 규범은 사례마다 요건이 되는 사실에 입각해 (자신의 요구에 기초하여 정상화된) 생활관계에 적용되며, 그런 관계들을 규범적으로 제어한다.”


그 다음의 ‘동질적 매체 ein homogenes Medium’라는 표현은, 이것뿐이라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기 어렵지만, 문맥상 바로 뒤에 나오는 ‘사실상의 정상성 die faktische Normalität’을 가리킨다고 생각해야겠죠. 즉, ‘규범’은 ‘정상성’이라 부를 만한 사실의 관계가 있어야 비로소, 적용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뭐엇이 정상인지가 짐작되지 않을 정도로 규칙성이 결여된 카오스에 있어서는, ‘정상성’의 핵이 되어야 할 ‘규범’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정상성’을 만들어내려 합니다. 점점 푸코 같아지네요. 


아까부터 슈미트가 ‘법질서’와 구별하고, ‘질서’ 자체라고 부르는 것은 논란의 흐름에서 “삶의 여러 관계들” 안에서 생겨나며, ‘규범’이 통용되기 위한 매체가 되는 ‘정상성’입니다. 이런 ‘정상성=질서’가 있어야 비로소, ‘법’이 기능하는 거죠. 이것은 법규범 상호의 논리적 관계일 뿐, ‘법질서’가 자기 완결적으로 형성된다고 생각하는 법실증주의와는 상당한 발상이 다르네요. ‘예외상황’에서 ‘(법)규범’이 보통 통용되지 않았을 때, ‘규범’이 통용되기 위해서는 “삶의 여러 관계들의 정상성=질서”가 불가결하다는 것이 부각되고 있는 셈입니다. 



로크의 법치국가의 학설 및 합리주의적 18세기에서는 예외상황이 고량 불능考量不能의 것이었다. 17세기의 자연법에 지배적이었던, 예외사례의 의의에 대한 생생한 자각은 비교적 영속적인 질서가 만들어진 18세기에 이윽고 다시 잃어버린 것이다. 칸트에게 긴급권은 더 이상 원래 법이 아니다. 오늘날의 국가론은 흥미로운 현상을 노정하고 있으며, 긴급사태에 대한 합리주의적 무시와 본질적으로 그것과는 반대 이념으로부터 비롯되는 흥미라는 두 경향이 동시에 서로 대립하고 있다. 켈젠 같은 신칸트학파가, 예외상황에 대해 체계적으로 다루는 법을 전혀 모른 것은 당연하다. 


[예외상태는 로크의 법치국가적 원리와 합리주의적 18세기와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17세기 자연법에서 뚜렷한 의미를 가졌던 예외사례에 대한 생생한 의식은 비교적 안정적인 질서가 지배했던 18세기 들어 또 다시 사라져버렸다. 칸트에게 긴급권은 결코 법이 아니다. 오늘날의 국가론은 긴급상황에 대한 합리주의적 무지와 본질적으로 반법률적인 이념으로부터 비롯된 긴급상황에 대한 관심이라는 두 가지의 경향이 동시에 상호대립하는 흥미로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켈젠과 같은 신칸트학파 법학자들이 예외상태를 체계적으로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다(26쪽).]



조금만 16頁으로 돌아갑시다. ‘예외상태’를 논한 19세기의 자연법론자로서 독일의 사무엘 폰 피펜도르프(Samuel von Pufendorf, 1632-94)가 거론되네요. 피펜도르프는 로크(1632-1704)와 같은 해에 태어났습니다만, 슈미트 입장에서 보면, ‘예외상태’의 취급이라는 점에서 전혀 다른 셈이죠. 피펜도르프는 인민이 국가를 창설하는 사회계약과 동시에 국왕에게 복종하는 복종계약을 맺는다는 이중계약설을 제창한 인물로, 이것을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비판했습니다. 


18세기는 말기가 되자,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전쟁 같은 전란이 계속됐지만, 30년 전쟁이나 청교도혁명이 있던 17세기에 비하면, 18세기의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예외상태’에 관해 별로 생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외상태’는, 그 정의상 합리적인 법이론이 통용되지 않는 상태인데, 철학자나 법학자는 필요가 없기에 ‘예외상태’에 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켈젠의 이름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슈미트가 말하듯이, 켈젠은 신칸트학파의 영향을 받았다고 간주됩니다. 신칸트학파란 19세기 후반부터 대두된, 맑스주의나 헤겔주의에 대항하여 칸트철학을 부흥시키려 한 철학적 운동의 총칭으로, 인과율이 지배하는 ‘존재 Sein’의 영역과 ‘당위 Sollen’의 영역을 또렷이 나누고, 후자의 영역에서의 정신적 법칙을 탐구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칸트의 인식론을 응용해서 수학이나 자연과학을 논리학적으로 정초하는 데 힘을 쓴 마르부르크학파와, 칸트의 가치론에 기초하여 문화과학이나 역사연구의 정초에 힘을 쏟은 서남학파로 나뉩니다. 켈젠은 마르부르크학파에 가깝다고 합니다. 그의 ‘순수법학’이 (개념으로서의) 법규범 상호간의 논리적 관계를 탐구하는 것임을 감안할 때, 그가 마르부르크학파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어쩐지 알 것 같네요. 


왜 여기서 신칸트학파 얘기가 나오는가 하면, 그들의 원조이자 합리주의자인 칸트가 ‘긴급권 Notrecht’을 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신칸트학파의 일원으로서 그 영향을 받은 켈젠도 논리적으로 ‘구성’할 수 없는, ‘예외’를 다루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슈미트더러 말하게 하면, ‘예외상황’에서의 ‘결정’은 ‘법규범’과 그 매체로서의 ‘정상적인 생활관계’의 연결을 밝히는, 중대한 계기이며, 법학은 그것을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