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칼럼_철학.사회

[이슈_장애, 그리고] 발달장애인과 어떻게 만나야 할까? -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 지음, 『그래, 엄마야』, (오월의 봄)


발달장애인과 어떻게 만나야 할까?

-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 지음, 그래, 엄마야, (오월의 봄)

 




박 임 당 / 수유너머N 회원 

 



 

“저 언니야. 너랑 같이 수업 할 학생 중 한명, 가서 인사해.”

 

2015년 4월 20일, 국가가 붙이는 이름은 ‘장애인의 날’, 장애 운동계에서 붙인 이름은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인 바로 그날이었다. 야학에 발달장애인과 함께 하는 낮 수업 교사로 처음 결합하는 날이 바로 이날이었기에 나는 거리 집회에서 학생을 처음 만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실 만났다고 할 수 없었다. 본래 친분이 있던 K 언니가 멀리 있던 학생 한분을 가리키며 알려주었지만 나는 다가가 인사한마디 건네지 못했었다. 멀리서 마주친 눈길에 불현 듯 두려움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저들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휘감았고, 만나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기에 다가갈 수 없었던 것이다.


 

발달장애인이라는 낯선 존재들

 


발달장애인에 관해 ‘알 수 없다’는 생각은 나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리고 2015년의 그날로부터 2년 가까운 시간을 지나온 나로서도 사실 여전히 발달장애인에 관한 무지의 벽에 종종 부딪히고 만다. 우리는 무지에 대해서 다양한 방법을 취할 수 있다. 알아보려고 노력하거나, 모르는 채로 살거나, 없는 셈 치거나. 이 방법들에 있어서도 또 다시 무수한 갈래의 방법과 그 방법을 택한 이유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녀가 발달장애인인 가족 안에서도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2016년에 출간된 <그래, 엄마야>는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엄마들을 인터뷰하고 기록한 책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혹은 서른 살 언저리인 내 또래의 이들에게 익숙한) 발달장애인 엄마는 배우 김미숙이 연기한 ‘초원’의 어머니일 것이다. 개봉 당시 500만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말아톤>은 자폐성 장애가 있는 주인공 ‘초원’이 마라톤을 완주하는 이야기이다. 조승우가 연기한 ‘초원’의 옆에서 그를 돌보고 다그치는 가족 내의 유일한 사람은 엄마였다. 결국 ‘백만불 짜리 다리’의 초원과 독한 엄마의 성장 스토리는 초원의 마라톤 완주로 인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다. 이 영화가 모든 발달장애인 가족의 삶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진실을 담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책에도 그러한 성장은 있지만, 실패와 후퇴, 도돌이표가 공존하는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의 삶의 현실적인 이야기와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발달장애는 지적 장애와 자폐성 장애를 포함한 장애 범주다. 신체나 운동기능 측면에서 장애가 있는 지체장애의 경우 우리는 그들의 움직임을 통해 대체로 구별해낼 수 있는 반면 발당장애는 다르다. 발달장애는 그들과 소통을 하는 과정에서 난점이 발생한다.

 

“우리 아이들의 ‘이상한 점’이란 다름 아닌, 다른 문법을 갖고 태어났다는 점이거든요. 인간으로서, 생명으로서는 차별 없는 똑같은 존재이지만, 인간이 만들어가고 있는 사회의 문법은 무척 익히기 어려운 존재가 바로 발달장애인들입니다.”(18)

 

의사소통에 있어서 개별성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 발달장애인이라고 했을 때, 이들의 의사소통과 의사 결정뿐만 아니라 교육환경과 노동 등에 있어서도 개별적인 지원이나 서비스가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발달장애인 가족의 고립에 관하여

 

한국에 등록된 발달장애인 숫자만 해도 약 20만 명에 이른다. 이들 중 시설에 거주하고 있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양육 및 돌봄 책임이 어머니에게로 집중된다. 2014년 발달장애인법이 제정되었지만, 아직 발달장애인을 위한 교육이나 직업훈련 센터가 미비할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일상을 영위하기 위한 활동보조서비스조차 제대로 제공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발달장애인의 삶을 둘러싼 힘겨움은 고스란히 가족, 그 중에서도 어머니의 몫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몇 년 동안 혼자 갇혀 살았을 때가 있었어요. 멀쩡한 아이를…… 나한테는 ‘멀쩡한’아이잖아요. 물론 소통할 때 약간의 어려움이 있기는 해도 그런 일은 비장애 아이들한테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 아이들도 자기가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할 거잖아요. 그런데 내 아이가 남들에게는 그냥 ‘아이’가 아니에요. 아이면서 아이 노릇을 못하는 거죠.”(186)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고립만이 전부는 아니다. 가족 내에서의 고립 또한 존재한다. 남편이 아이의 장애 정도나 상태에 무심한 경우도 있고, 시댁에서 아이의 장애를 감추도록 입단속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녀의 발달장애를 가장 ‘잘 아는’ 엄마의 역할은 풍선처럼 부풀려진다. 필요한 프로그램을 알아보고, 프로그램 참여를 위해 아이를 이동 지원하고,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을 알아보고, 그를 신청하는 서류작업을 하고, 자녀의 가까이에서 이런저런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모두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부풀려진 역할에도 엄마들의 노력은 폄하되고, 죄책감까지 뒤집어쓰게 된다.

 

“여성이 육아를 담당하는 게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아이에게 장애가 있을 경우 사람들은 대개 그 책임을 엄마에게 돌린다. 지적장애와 자폐성장애를 아우르는 발달장애의 경우에는 양육자인 엄마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특히 강하다. …(중략)… 지적장애의 경우에도 엄마가 현명하게 육아를 하고 조기에 발견했다면 장애를 막지는 못해도 조금은 나아질 수 있다는 신화가 존재하기 때문에 어머니들은 더욱 자기 비난에서 헤어 나오기 어렵다. 그렇게 여성에게 전가된 양육의 책임 앞에서 죄책감은 엄마들의 서사가 되었다.”(51-52)

 

발달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방관과 가족의 무관심 그리고 그를 유지하기 위해 이용되는 엄마의 죄책감이 맞물려, 고립의 벽은 견고해진다.

 

 

“발달장애인을 둔 엄마들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그렇다고 해서 고립된 이들의 삶을 응원하고, 치유하기 위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알 수 없음’의 세계에 뚝 떨어져, 자녀와 서로 이해하고 소통했던 이들의 경험을 우리 모두가 읽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들조차 대부분 발달장애가 있는 자녀를 낳고서야 이 ‘알 수 없음’의 세계에 뚝 떨어진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야 그들은 발달 장애가 무엇인지, 자폐는 무엇인지 배워간다. 그리고 자녀와 소통하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일상의 막막함을 헤쳐 나간다. 부모연대 활동도 하고, 학교도 찾아가고, 울부짖으며 머리를 밀기도 한다.


발달장애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들의 생생한 경험을 함께 읽어야 한다. 그래야만 발달장애인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극복하고 이들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수 있다. 거기에서부터 발달장애에 필요한 지원은 무엇인지 그 사회적 조건에 대해 함께 머리를 맞대어 볼 수 있다.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을 더 이상 고립되지 않게 할 수 있다.




또한 현재 장애인 시설의 거주인 중 70% 이상이 발달장애인이다. 먹고 자고 티비 보는 것으로 이루어진, 모든 욕망이 거세당하는 시설의 삶 속으로 발달장애인이 밀어 넣어진 것은 우리 사회가 발달장애인과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 맺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는 방증이 된다. 발달장애인의 자립과 탈시설에 관한 지원과 제도의 미비함 또한 이와 맞물린다. 발달장애인에 관한 문제는 사회적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조건은 발달장애인을 그저 나와는 관계없는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하거나 발달장애 자녀를 둔 엄마의 책임으로 이들을 욱여넣음으로써만 지속될 수 있다. 그에 동조하지 않는다면, 혹은 ‘그들’에 대해 ‘알 수 없다’는 태도가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책을 시작점으로 삼아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