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대지의 우화, 들뢰즈와 해러웨이
박준영(nomadia)/수유너머104 회원
앞선 권호에서 설명을 덜한 부분부터 시작해 보지요. ‘사변적 우화’라는 말뜻이 그것입니다. 이 말이 본래는 ‘공상과학 소설’(SF: Science Fiction)이란 말의 패러디라는 것은 단번에 아실 것 같습니다. 의미는 좀 다릅니다. 이에 대한 위암의 아주 짧은 글이 있는데, 제가 번역했으니 링크를 걸어 놓겠습니다.(알린 위암, 「사변적 우화: 망자를 돌보는 중간자의 목소리」)
'사변적 우화'?
Endosymbiosis: Homage to Lynn Margulis, 4 x 6 ft, Shoshanah Dubiner, 2012
'사변적 우화'가 대체 뭐람?
그런데 해러웨이의 영화(<도나 해러웨이: 지구 생존 가이드>(Donna Haraway: Story Telling for Earthly Survival)를 찍은 영화감독 페브리지오 테라노바(Fabrizio Terranova)가 이 개념에 대한 보다 단순한 정의를 내린 적이 있네요. 그걸 한 번 들어 보도록 합시다.
사변적 우화란 우리가 가능한 것(가능할 수 있었고, 그랬을 수도 있는)에 대한 욕구를 촉발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들을 개봉할 수 있게 하는 서사의 한 종류이다. 이것은 어떤 완전히 새로운 창조를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다. 이것의 눈에 띄는 차이는 이미 상황 안에 존재하는 오늘날의 가능성들을 전진시키는 민감하고 매혹적인 것들을 정립한다는 점이다. 스팩트럼을 넓혀 보면, 사변적 우화는 역사, 이야기, 재작동시키기 위해 재개봉하는 감각적인 방식을 발명하기와의 관계들이며, 또한 우리가 열외시켰던 것, 사태를 변형하기 위해 오늘날 여전히 작동하는 가능성의 계열들을 보기 위한 것들이다. 또 확장시키면, 사변적 우화에는 공상과학 소설 (...) 연구의 다양한 유형들과 가능한 서사 양식도 포함된다. 또한 인물, 신화를 창조하는 것, 이 세계를 증강시키기 위해 새로운 상황들을 발명하는 것도 마찬가지다.(출처: https://fabbula.com/speculative-fabulation-word/)
만약 해러웨이가 그토록 막대한 중요성을 사변적 우화에 부여하였다면, 그 우화가 이미 세계의 본질적인 일부이기 때문이지요. 『불편함과 함께 머물기』에서 해러웨이가 스토리텔링과 더불어 스토링(storying: 있음직한 이야기)을 동시에 제안하는 것은, 그것들이 살아 있는 존재들의 진행성(ongoingness)의 필수적인 구성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살고 죽는 것이 일인 반려종(companioin species)은 스토링, 다시말해 세계(상)화를 끝내지 않을 것이다.”(앞의 책, 40)라고 해러웨이는 말합니다. 여기서 ‘스토링’과 ‘세계(상)화’는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스토링은 불안정한 세상이 존속하도록 한다는 것이지요[533].
들뢰즈가 이미 말했답니다.
위암은 사변적 우화와 연관된 해러웨이의 언급들이 직접적으로 들뢰즈를 포함하지는 않지만, 매우 강력한 유사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를테면 생존의 충동(urge for survival), 삶의 억압에 대한 저항, 그리고 하나의 우화를 발전시키기 위해 인간적이지만은 않은 다른 존재자들과 연결될 필요성 등에 있어서 그러한 것이지요. 나아가 우화란 ‘사변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해러웨이는 숨겨지거나 무시된 잠재적인 것들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는 들뢰즈가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 발명하기 위한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주장한 것과 연관되지요. 물론 들뢰즈는 우리 시대의 드러난 삶의 조건도 불안정하기는 한가지며, 그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도 주장합니다.[Ibid.]
Cynthia Camlin _ Divided Earth, 7
인류세를 살아가는 민중들
하지만 인류세에 대한 해러웨이의 관심은 사변적 우화에 연루된 ‘민중들’에 대한 묘사에 더 집중합니다. 그녀의 접근이 다종적인 접근이며, 인간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매우 분명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민중들’(peoples)이라고 말할 때, 그 민중은 문자그대로 ‘대지적으로’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다시 말해 해러웨이의 민중은 ‘대지-민중’(earth-people)인 것입니다. 해러웨이는 어떻게 하면 우화가 호모사피엔스의 신화를 전복하면서 역사를 새롭게 생산할 수 있을 것인지에 관심을 가집니다. 이와 관련해서 ‘테라폴리스’ 이야기가 대표적인 우화가 되겠지요. 위암은 이러한 해러웨이의 주장이 우화에 대한 급진적인 주장에 이른다고 봅니다. 즉 우화는 어떤 민중 그리고 대지를 위한 스토리텔링만이 아니라, 그러한 대지-민중들이 포함된 우화가 대지적인 것 자체라고 선언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우화가 가지는 진리효과 또는 그것의 실천적 함축을 급진적으로 밀어부친 언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에 대한 인간적 조건이 문제가 아니라, 그 조건 안에 우화가 포함되고, 또한 조건 자체를 창출하고 기술하는 지사학(地史學, geohistory)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Ibid.]
이 논문의 3장은 ‘지리철학과 현재의 저항’입니다. 우선 위암은 해러웨이가 말하는 우화에 대한 접근, 다시 말해 우화가 도래할 민중(the peoples-to-come)과 대지 간의 강한 유대를 요구한다는 주장이 이미 들뢰즈-가타리의 저작에 등장한다는 점을 발견합니다. 『천의 고원』에는 잃어버린 민중(missing people)에 관해 이야기하는 한 장이 있는데, 그 장에서 들뢰즈-가타리는 대지와 영토에 관한 문제를 제기합니다. 여기서 대지와 영토는 민중과 상호직조(interweaving)됩니다. 이러한 상호직조라는 과정은 또한 철학, 예술과 관련되지요(1987: 342-7/422-8). 이것은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도 재언급됩니다. 여기서 철학과 예술은 대지와 민중의 발명을 위한 창발적 투쟁이라는 공통된 임무를 수행한다고 논해지지요.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534]
우리는 창의성이 부족하다. 우리는 현재에 대한 저항도 부족하다. 개념의 발명이란 그 자체로 하나의 미래 형식, 즉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대지와 민중을 요청한다. ... 예술과 철학은 이 지점으로 수렴한다. 이 지점은 창조력의 엮임을 통해 부재하는 대지와 민중을 구축하는 장소이다(Deleuze and Guattari 1994: 108/104).
이 인용문에는 두 가지 주목할 만한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로 철학과 예술이 모두 창조적이면서 저항적인 활동으로 정의된다는 점입니다. 이 활동은 우리가 ‘알려지지 않은 것의 발명’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두 번째로 부재하는 민중과 대지의 엮음이 그러한 발명의 기반이라는 것이지요. 들뢰즈-가타리는 이러한 창조적, 저항적 활동의 과정에 암묵적으로 우화를 가져다 놓습니다. 즉 우화는 그러한 발명의 기능을 한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때 우화와 동연적인 것이 바로 ‘지리철학’이 됩니다. 지리철학은 우화와 마찬가지로 인간주체가 아니라 대지에 대해 사유하기 때문입니다. 들뢰즈-가타리의 말을 빌리자면 사유는 더 이상 주체와 객체 사이에 난 선을 따라가지 않으며, 이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돌아가는 과정도 설정하지 않으며, 그보다 지층과 대지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이게 됩니다.(Deleuze and Guattari 1994: 85/82) [534-535]. 다시 말해 '주체'가 아니라 '대지-민중'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지리철학, 대지를 창발하라!
지리철학은 비인간인 가이아(gaia)의 권역에서 '잃어버린 민중과 대지'라는 문제의식과 씨름합니다. 우화도 인간 간의 억압 뿐 아니라 비인간과 그 힘에 대한 억압을 이야기합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의 ‘지각, 촉발(정동, Affect) 그리고 개념’ 장에서, 우화는 예술적 활동으로 취급되는데, 여기서 예술적 활동이란 들뢰즈-가타리에 따르면 인간적인 심리기제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립하는 어떤 것으로 정의됩니다. 따라서 지각과 촉발의 덩어리가 바로 예술작품인데, 그것은 비인간적인 것에 의해 정의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촉발이란 들뢰즈-가타리의 논의를 따르자면, ‘인간의 비인간 되기’(nonhuman becomings of human)이기 때문이지요.(Deleuze and Guattari 1994: 169/160). 다시 말해 우화하기(fabulating)을 포함하여 예술활동은 이러한 비인간-되기, 또는 대지와 소수자-민중 되기를 통해 예술 자체가 되는 것입니다.[535]
다른 한편 예술이 어떤 기념비라면, 그것은 ‘공통기억’(commemorative)이라는 의미가 될텐데, 들뢰즈-가타리는 예술이 기억이나 과거와 연관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하지요. 예술은 이렇게 공통기억으로서이 기념비가 아니라 바로 우화입니다(앞의 책, 168/157). 사실상 창의적인 우화는 기억과는 연관이 없고, 환영(fantasy)과 연관되지요. 우화를 만드는 예술가들은 언제나 삶 너머, 삶 보다 더 큰 어떤 것을 만들어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화는 비인간 되기를 통해 그러한 것을 실행합니다[535-36]. 지각과 촉발은 인간성과 자연과 관련해 비인간되기를 실행함으로써 알려지지 않은 우화를 창조해 냅니다. 한 손에는 어떤 민중, 다른 손에는 대지를 쥐고 말이지요. 그것은 한 덩어리의 '환영'이지만 의미를 축조하고, 현실을 바꾸어나갑니다.
Ben Will, Masses
대지와 민중의 창발-우화하기
이런 측면에서 우화는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포획될 수 없는 생명의 역능 위에서 유지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는 우화에 관한 단락들이 ‘지리철학’에 관한 장과 공명합니다. 예컨대 국가에 관한 오늘날의 철학의 재영토화에 대한 들뢰즈-가타리의 언급이 바로 그러하지요. 즉 철학은 국가 위에서 재영토화될 필요성, 즉 새로운 대지를 창발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자연(Nature)으로의 그것의 소속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정복한 그 자연, 하지만 우리가 잃어버린 그 ‘자연’ 즉 ‘대지’는 예술과 우화의 분야라고 할 수 있지요. 그리고 그것은 지리철학의 분야이기도 합니다. 지리철학은 비인간적인(nonhuman) 자연의 전망으로서의 지각을 전개하고, 촉발을 이끌어냄으로써 비인간 되기가 이루어지게 합니다. 비인간적(inhuman)인 가이아의 양태로 사유하기 위해 새로운 대지를 설립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이와 같은 사유의 양태는 바로 삶(생명)의 역능을 해방하기 위한 현재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들뢰즈-가타리의 말을 따르면 철학책과 예술작품이란 공통적으로 저항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죽음에 저항하고, 예속에 저항하며, 참기 힘든 것에 저항하고, 수치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이 모두는 바로 참기 힘든 ‘현재’에 저항하는 것이기도 합니다.(Deleuze and Guattari 1994: 110/105) [536]
위암은 이 논문의 결론(‘살기 위한 비-순수와 잘 죽기’)에서 ‘우화’란 어떤 문학 비평의 분석용어가 아니라 예술 자체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우화는 어떤 경로, 알려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계속되는 발명이기 때문이지요. 또한 우화는 정치적 과정이기도 합니다. 우화는 그 주체를 하나의 정체성 안에 가두기를 거부함으로써, 굳어지고 공허하고 응결된 정치적, 국가적 신화에 저항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우화의 정치적 특성은 그것이 예술이라는 사실을 지울 수는 없습니다. 해러웨이가 ‘스토링’과 ‘세계(상)화 하기’라는 개념이 같은 것이라고 재우쳐 말할 때마다, 우리는 우화가 세계가 그러한 바, 그것의 일부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알려지지 않은 것들의 예술적 발명은 산 존재자들의 존속을 요청하면서, 해방된 비인간적 지각들과 정동들(촉발들)과의 연결을 강조하는 것입니다[536-537]
위암 자신은 최근의 우화에 대한 철학의 관심이 단지 우연이 아니며 이제 철학은 대지 위에 구축된 인간적 권역으로부터 사유를 탈영토화하는 지리철학을 요청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해러웨이의 우화하기는 들뢰즈-가타리의 지리철학과 상호직조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가이아를 제거함으로써 사유를 억압하는 이러한 체제에 대한 급진적 변화에 대해 알지 않고서는 다종적 민중과 그 잃어버린 대지를 우화하는(fabulating) 그런 이중적 되기과정을 거머쥘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탈영토화하는 새로운 지구(geo) 체제는 사유하기에서 뿐 아니라, 정동(촉발)과 지각, 우화라는 낯선 인식론적 위상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어떤 순수한 허구나 실증적인 진리도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화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분야에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들을 위한 훌륭한 자산이 되어야 하지요. 전통적인 사유 범주들, 이를테면 참 또는 거짓, 인간 또는 비인간, 추상 또는 정서성과 같은 범주들은 우화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전통적인 범주에 의한 규정불가능성은 ‘살육자 이야기’에 저항하고 다종적인 불안정성과 상호의존성으로 규정되는 존재자들에 대한 ‘보행식’ 접근의 여지를 만드는 ‘삶의 이야기’를 발전시킬 수 있게 한다고 위암을 생각합니다.[537]
들뢰즈와 가타리 잊지 말기.
질 들뢰즈(좌)와 펠릭스 가타리(우) 캐리커처
'우화하기'에 있어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공헌
다시 들뢰즈 가타리로 돌아와 봅시다.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우화는 철학적 지위를 획득한도 이미 말했습니다. 이들에 따르면 철학과 예술은 우화에 지렛대를 제공하지요. 그리고 대지와 민중들 간의 개념적 협력을 추동하게 합니다. 다시 말해 들뢰즈-가타리에게 대지는 무엇보다 철학적인 개념입니다. 즉 우화되어야 할 새로운 대지는 사유의, 사유를 위한 하나의 대지인 것이지요. 위암은 들뢰즈-가타리의 우화 개념이 가진 효과가 해러웨이의 보다 유물론적이고 페미니즘적인 접근에 의해 보존될 뿐 아니라 변형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여기에 해러웨이의 적극적 개입이 요청됩니다. 해러웨이는 대지를 어떤 천상의 실체(ethereal entity, 추상적 존재)처럼 생각하려는 유혹을 끊임없이 방해하면서, 그것을 ‘부식토’나 ‘흙’ 또는 땅 밑에 사는 그늘 생물(shady creature)로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들뢰즈-가타리도 해러웨이가 사용하는 'earth'라는 단어를 프랑스어(terre)로 사용하면서 그것을 지구대지(the Earth), 흙, 당신이 손에 쥘 수 있는 재료덩어리로 지칭하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둘의 친연성은 매우 신기하기조차 합니다.[537]
죄없는 실천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비순수성'입니다. 대지를 다룰 때 누군가의 손이 더러워 진다는 것은, 우화가 어떤 순진한 실천(innocent practice, 죄없는 실천)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지식과 실천의 비-순수성(non-innocence, 죄있음, 오염)은 해러웨이 사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그녀의 책 제목 『불편함과 함께 머물기』는 우리가 만나는 다른 인간들과 비인간들 간의 상호작용이 가지는 껄끄러움을 우리 자신이 없앨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지요. 해러웨이가 쓴 우화인 「카밀 이야기: 퇴비더미의 아이들」은 그와 같은 불편하고, 오염된(non-innocent) 선택을 다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같은 세상에 순수한 것은 어디에도 없지요. 그러나 이것은 절망할 요소는 아닙니다. 다만 수용하고 거기서 어떤 꽃과 같은 것을 피워야 겠지요.[537-538]
이와 관련해서 위암은 학술회의에서 경험한 바를 논문의 말미에 밝혀 놓았습니다(이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글이 앞서 제가 번역한 「사변적 우화: 망자를 돌보는 중간자의 목소리」입니다.). 그것은 2017년 3월 브뤼셀 이야기입니다. 해러웨이는 「카밀 이야기: 퇴비더미의 아이들」에 대한 질문에 답하면서, 자신은 분명 낙태합법화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안전하고 여유있는 낙태를 원하는 여성의 권리를 방어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낙태합법화와 관련해서 그녀의 문제의식은 그러한 이슈를 넘어서 진행됩니다. 해러웨이는 생명을 존엄성이나 순수성과 연관시키는 것은 잘못된 태도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입장은 생명과 삶이 가지는 엄연한 사실들, 즉 잔혹성, 포식자와 희생양, 질병과 죽음과 같은 것을 부정하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순수한’(pure) 삶 또는 생명의 이야기들은 기원 신화가 퍼트리는 정치적으로 위험한 결론들을 은폐하기도 합니다.[538] 그래서 낙태합법화에 대한 스토리텔링은 이러한 순수성에 대한 기원신화를 건드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들뢰즈-가타리도 마찬가지로 우리 지식과 실천의 비순수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삶에서 유전되는 어두운 측면들도 잘 깨닫고 있었지요. 하지만 몇몇 그들의 표현들은 부주의한 독자들이 ‘삶의 역능’이 대지적인 것이 아니라 순수하고 초월적인(ethereal) 것이라는 결론으로 이끌어 갑니다. 해러웨이의 유물론적이며, 페미니즘적인 접근은 이런 경솔한 독해를 보완하며, 삶의 비순수성에 대한 그들의 구절들을 재음미할 수 있도록 합니다.[Ibid.]
인류세의 시대에 우화는 정치적인 비순수성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대지 위에서 '살고 잘 죽기' 위해서 불안정하고 불결하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삶의 이야기를 지속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는 의미입니다.[Ibid.]
<도나 해러웨이: 지구 생존 가이드> 포스터
비순수성으로 살기, 그리고 잘 죽기
<끝>
*논문 참고도서 약호사항
Bergson, Henri (1935): The Two Sources of Morality and Religion, trans. R. Ashley Audra and Cloudesley Brereton assisted by W. Horsfall Carter, London: Macmillan, 1935[Bergson, Henri (1932) 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Deleuze, Gilles (1989) Cinema 2: The Time-Image, trans. Hugh Tomlinson and Robert Galeta, London: Continuum [Deleuze, Gilles (1985) Cinéma 2: L’Imagetemps,
Paris: Minuit].
Deleuze, Gilles (1985) ‘Pensée et cinéma – cours du 05/02/1985 – 3’, La Voix de Gilles Deleuze en ligne, uploaded by University Paris 8, available at <http://www2.univ-paris8.fr/deleuze/article.php3?id_article=304>(accessed 31 July 2018).
Haraway, Donna (2004) The Haraway Reader, New York: Routledge.
Haraway, Donna (2011) SF: Speculative Fabulation and String Figures, Kassel: Hatje Cantz Verlag.
'기획_번역작업'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게모토 츠요시] 생활사(史)와 역사의 균열 (0) | 2019.03.22 |
---|---|
[대화의 반려들] 해러웨이와 울프의 대담 - 반려종 위치부여 (0) | 2019.03.05 |
[대화의 반려들] 해러웨이와 울프의 대담 - 사이보그의 시작2 (0) | 2019.02.08 |
[노마싸의 저널산책] 대지의 우화, 들뢰즈와 해러웨이[Part 1] (0) | 2019.02.07 |
[가게모토 츠요시] 독일혁명의 패배의 깊이로 (1) | 2019.0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