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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_번역작업

[가게모토 츠요시] 본원적 축적에 맞서는 코몬즈하기와 봉기하기


본원적 축적에 맞서는 코몬즈하기와 봉기하기






가게모토 츠요시 








마누엘 양, <묵시의 에튜드 – 역사적 상상력의 재생을 위하여>, 신평론, 2019, 336쪽, 2800엔+세금 (원서:マニュエル・ヤン, 『黙示のエチュード』, 新評論, 2019 http://www.shinhyoron.co.jp/978-4-7948-1113-4.html)





  이 책은 2011년 3월11일 동일본 대지진 이후의 ‘일본’을 세계사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물론 이 때 ‘세계사’란 숭고한 목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류의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남아 온 민중들의 생존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저자 마뉴엘 양은 브라질 상파우로 출생, 대만출생의 아버지와 일본인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일본에서 거주하다가 초등학생 때에 미국으로 건너가 지금은 제1언어는 영어라고 한다. 그는 『자본론을 정치적으로 읽는다』의 저자 하리 크리버와 『히드라』의 피터 라인보우의 제자이기도 하다. 이 책은 311지진을 비롯한 일본에서의 맥락에서 쓰여진 글과 대담을 모은 것이지만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현 단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책이라 하겠다. 이 책은 영어권의 민중사가 자유자재로 횡단하면서 일본어/한국어 독자에게는 감각하기 힘든 영역을 열어준다.


“311 지진이 일어난 지 얼마 후, TV에서 어떤 코멘테이터가 ‘부흥’은 수백 년 단위로 생각해야한다고 말했다. 그런 시간을 소모할 거면 ‘근대혁명’따위 쉽게 일소할 정도의 영구혁명을 담당하는 ‘다두의 히드라’의 양성에 전념하는 게 낳을 것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여간 새로운 계급투쟁의 역사적 전환기에 우리가 들어간 것은 틀림없다.”(59)

 

  저자는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한다. 라인보우가 쓰는 ‘Jubilating’이라는 표현은 성문화된 명사가 아니라 주체의 산 방향을 가리키는 동사라고(20쪽). 여기에서 읽어내야 하는 것은 동사적 살아있는 형태로 주체를 호출한다는 것이다.  



  또한 뉴욕의 월가의 wall란 인클로저의 벽에 기인한다고 하면서 일본근세 도시 에도(지금의 도쿄) 교외에 있던 사형장의 역사를 오버랩한다. 연결이 잘 안될 것 같이 생각되는 이 두 가지 사례는 저자의 주장에서는 일관된다. 즉 아메리카 원주민과 자국의 수인들의 시체를 이용하며 유럽의 근대의학은 발달이 되었는데, 그것은 범죄자가 된 노동자의 시체와 그것을 처리하는 노동을 바탕으로 발전된 일본에서의 의학의 발전과 일관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에서의 본원적 축적을 코몬즈(이 말 역시 원래 함께 실천한다는 동사였다, 89쪽)를 파괴해온 역사와 연결시킨다. 그리고 그 코몬즈의 움직임을 도쿄나 뉴욕의 역사에서 다시 찾아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도는 현행적인 지리만으로 저항의 문제를 한정시키는 사고방식을 재고하게 만든다. 



  그리고 저자에 의하면 봉기 또한 끊임없는 동사이다. 그것을 항상 상기시키는 것으로서 대중지성이 있다는 것이다(102쪽). 동사로서의 봉기를 보는 것을 통해 우리는 자본축적이 바로 죽음의 축적임을 보게 된다(111쪽). 그러면서 라인보우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한다. 



“범죄학 또는 경제학에서도 ‘캐피털capital’이라는 용어정도로까지 강렬한 것은 거의 없다. 전자의 분야에서 그것은 ‘죽음’을 의미하며 후자에서는 ‘부’또는 ‘주식’의 생명을 의미한다. 일견 반대의 의미이다. 가령 이 용어에서 연상되는 것이 이만큼 눈에 띄며 이만큼 모순되며 게다가 정확이 본서의 주제를 표현하지 않았더라면, 이 문제를 어원학자들에게 맡겨도 좋았을 것이다. 즉 죽음으로써 처벌되는 범죄자와 이에 선행하는(또한 죽은)노동의 생산물에 기인하는 부의 축적이라는 의미가 왜 ‘캐피털’이라는 말에 겸비되었는가, 라는 물음이다. 본서는 산 노동의 조직화된 죽음(capital punishment:사형)과 죽은 노동(punishment by capital:자본에 의한 벌)의 관계를 탐구하는 것이다.”(Linebaugh, “The London Hanged”, 2003, xvii: 마누엘 양, 111-2쪽에서 재인용)


  이러한 라인보우의 시각을 이어받아 저자는 방사능 때문에 죽은 자들을 불러낸다. 이 또한 312(311은 지진이고 312는 원전폭발의 날이다) 이후의 일본맥락에서 다시금 요청된 물음이다. 저자는 라듐을 너무 많이 만져 죽은 마리 퀴리를 방사능에 의한 최초의 희생자라고 하는 인식을 부정한다. 그 이전에 방사능 때문에 죽은 우라늄 광산의 광부들이 있었던 것이다. 퀴리가 실험으로 쓰던 라듐은 보헤미아의 여아힘스탈(Joachimsthaler)광산에서 나온 것이다. 그곳에서는 1516년에 은이 발견된 후 400년에 걸쳐 광부들이 사병을 앓으면서 일했다. 거기서 나온 은은 독일의 은화 ‘타렐(thaler)’가 되어 이는 ‘달라’의 어원이 되었다. 그들의 방사능에 노출된 노동이 근대 화폐의 동원이 된 것이다(121). 이는 동시대 일본의 은 광산에서 행하던 본원적 축적과 겹쳐 논의된다. 일본의 이와미(石見)은산은 2007년에 세계유산이 되었다. 그러나 평균수명이 30살이며 조금이라도 의심을 받으면 바로 목을 짤린 광부들의 모습은 세계유산이 되면서 말소되었다. 본원적 축적을 실행한 사령들이 은산을 세계 유산화 함으로써 자연수탈을 다시금 하려고 하는데 그들은 살해된 노동자들을 다시 살해한 것이다(126). 노동자의 신체를 여전히 방사능에 노출시킴으로써 부를 산출하는 본원적 축척 또한 현대진행형의 문제이다. 역사를 관통하는 인클로저의 문제가 거듭 논의되는 까닭이다.



  수많은 죽음을 현재에 호출한다고 해서 결코 비관적인 책은 아니다. 그렇다기보다 현재를 사는 우리 삶을 위해 그러한 살해된 이들을 상기하는 것이다. 역사를 말소하며 그럴듯하게 말하는 자유주의적 저항으로는 투쟁의 언어가 모자란 것이다. 살해를 거듭하는 것을 통해서만 살아남을 수 있었고 지금도 계속되는 자본의 현주소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코몬즈하기, 봉기하기의 계보를 찾아내는 역사적 작업이 필요하다. 이를 2019년의 한국 맥락에 놓여보며 바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징용공’문제일 것이다. 지금도 계속되는 일본기업이 어떻게, 왜 ‘대기업’이 될 수 있었는지, 그것을 단지 현재진행형의 국가 간의 관계만으로 보지 말고 역사적 맥락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도 이 책의 관점을 참조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