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봉사노동에 타자의 눈은 있는가?






가게모토 츠요시





 이케다 히로시 <자원봉사와 파시즘 – 자발성과 사회공헌의 근현대사>, 인문서원, 2019, 400쪽, 4500엔+세금. 원서정보 池田浩士, 『ボランティアとファシズム - 自発性と社会貢献の近現代史』, 人文書院, 2019. http://www.jimbunshoin.co.jp/book/b451495.html







1. 남의 도움이 되고 싶다


  자원봉사란 무엇인가.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 그것을 필요로 하면서 가지지 못한 이웃사람의 도움이 될 때 나에게 기쁜 일이며 내가 산다는 의미를 실감할 수 있는 충족한 체험(9쪽)이라고 일단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원봉사를 무상노동이라고 비판하기는 쉽지만 시실 우리가 여러 사람과 관계된 생활 속에서 살기 위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와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주체적인 행동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단지 자원봉사를 좋은 것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이 맹목적인 행동으로 빠져 들어갈 때 아래로부터의 자발성이 국가를 비롯한 위에서부터의 속박과 일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1923년의 관동대지진 이후에 생긴 세틀멘트 운동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자연재해로 피해를 입은 이웃들을 돕고 싶다고 자원봉사를 시작한 학생들의 운동이다. 그것을 시작한 것은 최고 엘리트인 동경제국대학 학생들이었다. 우에노 공원에 모인 피난민들의 생활위생을 위해 그들은 변소를 만들고 오물을 청소했다. 이름을 팔려는 종교단체들이 하려고 하지 않았던 방역작업, 위문품의 분배, 행방불명의 사람들의 명부작성, 피해실태조사 등, 없으면 안 될 일을 무상으로 자발적으로 실천한 것이다. 지진은 인간에게 우연적일 수밖에 없는 자연재해이다. 



“우연으로 인간의 주체성이 발휘된다. 우연적 사건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그것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그 우연과의 만남은 한편으로는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지게 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상의 결정적 대전환점으로 살게 될 것이다.”(39쪽)


 


대일본제국의 위정자들이 관동대지진을 “국가 입장에서 제거하고 싶었던 민본주의(民本主義)적 사회조류를 막아 근절할 호기로 이용했다. / 그러나 민중 자신 안에서도 우연을 역사의 전환기로 삼으려는 실천이 만들어진 것이다.”(39쪽) 후자가 바로 학생들의 자원봉사였다. 사회와 대면하며 육박하는 경험을 통해 그들은 그 이전부터 접속해온 이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를 “비로소 현실로 자기자신의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이다.”(49쪽) 지진의 피해는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도쿄 동부가 압도적이었다. 자연재해의 대소는 계급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목격한 것이다. 이후 그들은 도쿄 동부에 ‘세틀멘트’를 개설하기 시작한다. 


  세틀멘트는 완전히 새롭게 시작했다기보다는 지진 이전부터 기독교나 사회주의에서 알려진 것이었다. 단지 사회개량에 멈추지 않고 사회개혁으로까지 나아가는 운동자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동경제대의 학생들은 가난한 지역, 2019년 현재로 말하면 도쿄 스카이트리가 있는 곳 주변에 세틀멘트를 만들었다.

 


“그들의 활동의 대상이자 그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상주자에게는 물론 비상부자에게도 이미 학생구호단 시절에 접하던 잘 모르는 일시적인 이웃사람이 아니라 지역에서 함께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 대해 그 사람들과 함께 그들이 하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재해에 맞서 피해를 최소한으로 막아 거기에서의 재생을 목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날의 생활자체를 재해 피난민처럼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에 대해, 그 사람들과 함께 더욱 다른 삶이 가능해지도록 사회를 모색하는 활동이었던 것이다.”(60)


  


세틀멘트는 성인교육부, 조사부, 아동부, 의료부, 법률상담부, 시민도서관의 여섯 부서로 시작했다(57쪽). 조사부는 지역의 사람들이 시골에서 농사를 버리고 상경한 사람이 많다거나 바라크 사이의 빈 땅의 대부분은 물이 꼬인다 등 지역의 생활상을 조사했다(64쪽). 아동학교는 사실상 소학교를 대체하는 것이었으며 공원의 룸펜에 대해서 가르치거나(65쪽) 했다. 탁아소도 병설되었다. 엘리트 학생들은 노동자(그 가운데에 조선인도 있었다, 81쪽)를 가르치면서 성장해 나갔다. 또한 소비조합을 만들며 생산과 소비를 관통하는 공동성을 시도했다(69쪽).  


  그런데 1930년 전후 시기, 세틀멘트 운동을 경험한 이들에게 기다리던 것은 탄압과 전향이었다. 저자는 전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착오도 함께 포함하면서 민중에게 다가가려는 것’이라 정리한다. 중요한 부분이기에 길게 인용하겠다. 



“많은 전향자들이 국가권력에 아부하며 권력의 사은품을 얻으려했다는 역사관은 현실에 입각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다른 길을 통해 민중과 함께 살려고 했다. 탄압에 의해 투옥된 지식인이나 학생들이 옥중에서 젊은 간수, 같은 방을 쓰는 정치범이 아닌 이들과 접하게 되면서 비소로 ‘민중’을 알며 자신의 활동이 얼마나 민중과 유리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는 것이, 적지 않는 전향자들이 수기나 고백을 통해 전하는 일화이다. 그 진위를 떠나 전향한 그들은 전향함으로써 국가의 지배자나 사회의 상류계급의 일원이 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전향자는 그때까지의 자신의 활동이 민중의 생각과는 유리된 것일 수밖에 없었음을 탄압을 계기로 깨달은 것이다. (중략) 민중과 함께 살려고 한 그들의 깨달음, 그들의 민중 재발견은 그렇다고 해서 객관적 사실에 반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침략전쟁을 근저에서 지탱한 자들은 그것으로 인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특권계급이나 상류계급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층이나 그에 가까운 곳에서 사는 서민들이, 자신의 생명과 생활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믿고 (중략) 스스로 목숨을 걸고 전쟁에 헌신하고 천황에 귀일한 것이다. 좌익에서의 전향자의 대부분은 이 민중들과 — 정확히 말하면 민중들의 착오와 — 생사를 함께 하려던 것이다.”(90-1쪽)




2. 실업과 노동봉사


  중일전쟁 후 세틀멘트 운동의 자율성은 부정되었다. 세틀멘트는 ‘자발적’으로 폐쇄할 수밖에 없었고 천황과 관련된 단체에 이양되었다. 이는 자원봉사의 새로운 단계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그것은 ‘근로봉사’이다. 전쟁에서 남성 노동력이 전지에 가거나 전사를 하거나 해서 감소하며, 농촌에서는 말(馬)이 징발이 되어 노동력이 부족했다. 국가 또한 강제로 동원하면서도 담론적으로는 ‘이웃을 돕자’고 자발성과 주체성을 요구하던 것이다(134쪽). 국가는 “국민의 자발성을 전쟁을 위해 총동원했다.”(135쪽) 전쟁은 자연재해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자원봉사 활동을 만들었다. 


  민중들의 자원봉사의 사례로 저자는 ‘만주(중국동북지역)’에 농업개척이민으로 지원한 농민들을 거론한다(108쪽 이하). 쌀과 양잠이 일본 농업의 기간이었는데 29년의 세계공황 이후 농민들은 그것으로는 살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만주지역으로 자원봉사로 이민을 간 것이다.



“자발성에 기인하며 사리사욕을 위해서가 아닌 사회공헌에 몸을 바치려는 행위는 이미 그 자발성과 사회공헌의 대상을 스스로의 자유의지로는 선택할 수 없었다. 이미 자원봉사 행위는 국가에 의해 설정된 무대 위에서 국가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임무를 실행하는 일이 되었다.”(115쪽) 


 

 민주 개척농업이민들이 도달한 곳에는 당연히 현지주민들이 있었다. 농업이민들은 현지농민에 의해 개척되었던 농지를 빼앗으면서 정착했다. 특히 수전이 그것인데 원래 만주지역에는 수전이 없었으며 만주지역에 있는 수전을 개척한 것은 조선인들이었다(120쪽). 1936년부터는 일본 농촌의 마을 단위로 만주로 보내는 ‘분촌이민(分村移民)’ 정책이 실시되었다. 현지 농민들은 일본인이 없는 황무지에서 다시 개척을 하거나 일본인농민의 소작인이 되는 것밖에 사는 길이 없었다(122쪽). 37년 이후에는 만주개척소년의용군이 편성되었으며 10만 명을 넘는 청소년이 만주로 이민을 간 것이다.


  자원봉사는 바로 노동력을 무료 혹은 염가로 제공하는 것이다.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노동과 똑같은 일을 하면서 노동 취급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주개척 청소년 의용군 편성에 관한 건백서’를 제출한 여섯 명 중 하나는 독일 노동봉사제도의 연구자이기도 했다(149). 사회문제로서의 실업대책에 노동봉사로 답하려 한 독일의 사례가 오버랩하면서 논의되기 시작한다. ‘만주국’ ‘건국’과 함께 시작한 일본인에 의한 만주개척은 실업대책의 측면을 가지고 있었으며 농업실업자(및 그 예비군)에 대한 실업대책의 측면을 봐야한다(152). 독일에서는 1936년의 베를린 올림픽의 건설노동의 대부분이 노동봉사로 이루어졌다. 히틀러는 실업자를 없앴다는 논의가 있으나 이는 자발적노동봉사를 통해 “노동력을 필요를 하는 사업에 자원종사자가 응모함으로써 사소하게나마 현금수입과 일할 기회를 준”(165)것이다. 이 사업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기업에게도 인건비를 줄일 수 있다는 의미에서 좋았다. “같은 고용이라도 자발적 노동봉사의 실업자를 받아주는 게 인건비를 훨씬 싸게 절약할 수 있던 것이다.”(166) 아우토반(자동자전용고속도로)을 비롯한 공공사업도 자발적노동봉사의 노동력으로 조성되었다. 즉 값싼 노동력은 국가나 기업의 재정부담을 줄인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아우토반은 군사도로로 사용될 것이라는 사실은 건설이 시작하는 당일부터 공표되던 것이었다(271).





3. 봉사의 보람과 노동의 멸시

 

  그런데 히틀러에게는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노동’이라는 말이 가지던 부정적 의미를 부정하려던 것이며, 말하자면 노동자 차별을 철폐하려고 한 것이다. 나치스가 추진한 노동봉사는 “천한 것으로 취급되던 어려운 육체노동을 자발적이자 자유의지로, 그리고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는 정신을 젊은이들에게 체득시키는 기회”(174)였다. 이러한 구상에서는 계급투쟁을 없애려고 하며 ‘국민’사회주의를 표방한 맥락도 있었다(184-5). 그런데 전쟁 때문에 병역 연령의 남성들을 군대로 동원하면 실업자가 줄어들 뿐만 아니라 노동력이 부족해진다. 그때 유입된 노동자는 독일에 침식된 나라들에서 온 외국인노동자들이었다. 2차 세계대전에 들어가는 시기, 독일의 노동은 노동봉사에 참여한 독일인 청년과, 그 청년의 약 반수에 이루는 외국인으로 지탱되었다(280). 독일군이 점령지역을 늘릴수록 새로운 외국인노동자를 흡수했다. 41년에는 79만 명을 넘는 폴란드인 노동자가 독일에서 일했다(282). 그리고 전쟁에서의 포로들도 노동력이 되었다. 또한 노동캠프로서의 강제수용소가 있다. 강제수용소에서는 노동자로 쓸모가 없는 노인, 병인, 유아들은 바로 ‘절멸수용소’에서 살해되었다. 


“‘노동’에 대한 멸시와 ‘노동자’에 대한 차별을 지독하게 규탄하며, 노동봉사를 통해 청소년들에게 노동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을 체득시키려 했던 히틀러와 나치스는 그 노동을 그들이 가장 경멸하며 증오하는 유태인에게 강요한 것이다. 게다가 그 유태인의 노동으로 독일인이 살기 위한 물건을 생산하려고 한 것이다. 나치즘의 신봉자들에게 노동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은 유태인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 중에 이미 인종적으로 우월한 자가 인종적으로 열등한 자를 노동력으로 사역시키는 것은 당연하다고 썼다. 히틀러가 육체노동자에 대한 모멸을 비난하며 육체노동의 신성을 설파한 것은 노동 자체와 노동자에 대한 경의나 공감에서가 아니라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함에 불과했다. 강제수용소는 그리고 이에 추가되는 절멸수용소는 이것을 여실이 말해준다. 


자원봉사로, 혹은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동봉사에 마음을 바치던 청년남녀들은 이러한 현실을 볼 수 없었다. 자기자신의 인간형성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 노동체험과 완전히 같은 시간에 그 노동이 강제노동이며 노예노동일 수밖에 없던 이들이 유럽 각지에서, 그리고 같은 독일 내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강제수용소가 독일 국민들에게도 주지의 사실이었고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며 외국인노동자도 포로노동자도 비밀의 존재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283-4) 


  그러면 전쟁 중의 일본은 어떤가? 일본에서도 ‘노동’의 의미는 사회주의나 마르크스주의의 용어가 아니라 ‘황국의 노동’이라는 맥락에서 노동봉사는 논의되어갔다(304). 그리고 이는 결코 일 방향적 강요가 아니며 자발성을 유발한 것이었다. 특히 여성들의 운동(이웃 운동, 도나리구미/隣組)에서의 국채구입이나 병정들에게 보내는 주머니 만들기 등에서 잘 나타났다. 세틀멘트 운동에 참여하던 이들이 전쟁 하에서도 어떤 자발성을 유지한 것은 이 맥락에서였다. 그런데 그 자발성은 미리 정해진 주제에 대한 ‘찬동자’나 ‘참여자’로서의 그것에 불과했다.


  전쟁 때문에 장애를 입은 남성들이 돌아온다. 국가는 그들과의 결혼을 여자청년단원에 독려했다. 말하자면 결혼 자원봉사이다. 또한 만주에 건너간 소년들의 ‘아내’로 여성들이 바다를 건너갔다. 1938년도부터 송출이 시작한 ‘만몽 개척 청소년 의용군’은 16-19세 청소년들이었는데, 몇 년 후에는 대량의 ‘아내’가 대륙을 건너가야 했던 것이다(338). 이것이 과연 ‘자발’이라고 할 수 있는지, 형식적으로 자발이라 할 수 있어도 그들의 집에 돈이 있으면 이러한 자발을 했었는지 물어야 한다. 물론 이는 식민지 조선에서의 강제연행 직전 제도인 ‘자유 징모’(자원봉사!) 형식과 겹쳐 논의할 수 있다. 또한 만주에서는 일본인이 아닌 이들에게도 자발성은 요구되었다. 일본군이 중국을 침략해나가면서 철도를 유지하는 게 과제였는데 철도부근에 있는 현지인들을 시켜 철도노선을 자발적으로 지키는 일을 의무화시킨 것이다(352-3). 


  이러한 자발성은 어떤 맥락에서 봐야 하는가. 저자는 한마디로 요약해 보여준다. “국가에 의한 속박뿐만 아니라 참가자들에 의한 결속이 불가결했다.”(347) 스스로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감동적인 마음은 현실을 보이지 못하게 만든다(368). 마치 왜 그러한 사업이 필요한지를 물을 수 없게 되는 것처럼. 그러나 스스로 행동하는 것 외에는 자신과 현실을 관련시킬 수 없으며 현실을 바꿀 수도 없는 것이다. 

Posted by 수유너머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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