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7강(보강). <땅과 바다 : 세계사적 일고찰> ― 공간혁명과 ‘인간존재menschllche Existenz’
낡은 노모스는 물론 사라지며, 그와 동시에 기존의 척도, 규준, 관계의 체계성 전체도 없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윽고 다가올 것이 단순한 척도의 상실상태, 혹은 반-노모스적인 허무인 것은 아니다. 낡은 힘과 새로운 힘의 가혹한 싸움 속에도 또한 올바른 척도가 생겨나며, 뜻 깊은 조화가 형성되는 것이다.
“여기에도 신들이 있고 지배한 또 다른, 신들의 척도는 위대하다.”
<땅과 바다>
슈미트의 세계사관, 신화적 세계관 / 대지의 의미론 / 리바이어던과 비히모스의 싸움 ― 땅과 바다의 근본적 대립 / ‘카테콘 Katechon’ ― 신화적 상상력과 세계사의 관계 / 기술․포경․해적 ― 바다라는 요소를 둘러싼 흥망사 / ‘공간혁명 Raumrevolution’ / ‘질서 Ordnung’로서의 ‘대지의 노모스 Nomos der Erde’ / 토지취득경쟁과 종교전쟁 / ‘땅’에서 ‘바다’로의 ‘기본요소’의 변동 ― 영국의 해군력과 ‘기계 Maschine’ / 공중의 시대 ―‘지구의 노모스 Nomos der Erde’의 근본적 변화 / 공간무기 / 새로운 노모스와 ‘인간존재 menschliche Existenz’ / 질의응답
슈미트의 세계사관, 신화적 세계관
<땅과 바다>는 1942년에 간행되고 54년에 재간된 책입니다. 테마로 보면, 이보다 8년 후에 출판된 <대지의 노모스>와 겹치는 부분이 적지 않죠. <대지의 노모스>에서는 유럽 공법 질서라는, 유럽에서 전쟁을 틀짓기 위한 법적 질서를 논하고 있는데, <땅과 바다>는 그 배경이 되는, 슈미트의 세계사관, 신화적 세계관을 이야기하듯이 그려낸 저작입니다.
슈미트는 젊었을 때 문학가를 지향한 적도 있으며, 문예평론적 작품도 몇 가지 썼습니다. <정치적 낭만주의>도 낭만파의 문학 이론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낭만주의> 이후는 문학적 재능이 전면에 나오는 작품이 별로 없었다가, 이 작품에서 다시 문학적 감각(sense)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번역자 중 한 명인 이키마츠 케이조 씨(生松敬三, 1928-84)도 다분히 문학 취향의 독일 사상사를 전공으로 연구하신 분으로, 적어도 법사상과 정치사상의 전문가는 아닙니다. 공역자인 마에노 미츠시로 씨(前野光弘,1938-)도 경력을 보면 알듯이 독일문학 분야에 속해 있습니다. 이 작품이 문학적 작품이기 때문에 문학계 인물이 번역자가 된 것이죠.
서두부터 매우 인상적입니다.
인간은 땅/육지의 생물이며, 땅/육지를 밟으며 걷는 동물이다. 인간은 직립하며, 그리고 대지 위에서 활동한다. 이것이 인간이 의거하여 서 있는 곳이며, 그 기반이다. 이것에 의해 인간은 자기의 관점을 획득한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이 받는 다양한 인상을 규정하며, 인간이 세계를 보는 시각을 규정한다. 인간은 대지에서 태어나며 또한 대지 위에서 활동하는 생물로서, 자기의 시야[視界]뿐 아니라 그 보행이나 운동의 형식, 자기의 모양새[形姿]도 획득하는 것이다.
* 인간은 땅의 존재, 땅을 밟고 있는 존재Landtreter다. 인간은 견고하게 정초된 대지 위에 서서 걸어가고 움직이지. 그 대지가 그가 서 있는 곳Standpunkt이자 그의 토대Boden다. 그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시점을 얻으며, 이것이 그가 받는 인상들,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규정하지. 가시범위Gesichtskreis뿐만 아니라, 인간이 걷고
움직이는 형태, 그 형상Gestalt도 대지에서 태어나 대지 위에서 움직이는 생명체로서 얻어진거야. (김남시 옮김, 꾸리에, 7쪽).
독일계의 사상사에서는 인간의 본질을 생물학적 특징을 포함시켜 규정하는 ‘인간학 Anthropologie’적 논의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이것도 그런 유형의 말투네요. 게다가 이미지를 꽤 시각적으로 그려내고 있네요. 슈미트의 동시대의 철학적 인간학의 논의로는 현상학을 가치철학에 응용한 막스셀러(1874-1928)라든가, 나치에 가담한 것으로 악명 높은 아놀트 겔렌(1904-76) 등이 있습니다.
‘걷는다’, 즉 직립보행할 수 있게 되면서, 인간의 시야가 확대됐다는 것은 생물학적 상식이라고 일반적으로 자주 말해집니다만, 슈미트는 그것을 물리적으로 시계(視界)가 확대됐다는 것뿐 아니라, “사물의 시각이 확대된다”는 은유적 의미로 확장하는 것입니다. ‘신체성’과 그것을 에워싼 ‘환경’, 이 경우에는 ‘대지’의 관계에 의해 사물의 시각, 나아가 세계관이 규정된다는 철학적, 형이상학적 차원으로까지 범위(scale)를 확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지의 의미론
이어서 인간이 서 있고 위치하는 ‘대지’의 의미론이 전개됩니다.
지구는 거의 4분의 3이 물이며, 육지는 4분의 1밖에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아무리 큰 육지라고 하더라도, 마치 섬처럼 물에 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이 혹성을 ‘지구(Erde)’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의 이 지구가 공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 이후, 우리는 아주 당연하게도 ‘대지의 공(*에르데발)’, ‘대지의 구(*에르데쿠겔)’라고 말한다. 만일 네가 지구를 ‘바다의 볼(*제발)’ 혹은 ‘바다의 구(*메레스쿠겔)’라고 마음속에 떠올려야 한다면, 너는 기묘한 느낌이 들 것이다.
* 그렇기에 지구 표면의 4분의 3이 물로 덮여있고, 땅은 4분의 1뿐이라 사실상 가장 큰 대지도 섬처럼 물 위에 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별을 ‘대지-지구Erde’라고 부르고 있다. 대지Erde가 구(球) 형태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된 후 우리는 더 큰 확신을 가지고 이 별을 ‘대지 공Erdball’ 또는 ‘대지구슬Erdkugel’이라 부른단다. 이런 방식으로 ‘대양 공Seeball’이나 ‘바다 구슬Meereskugel’ 같은 것을 떠올리는 건 어딘가 어색하지?
(김남시, 7쪽).
독일어 단어의 의미 분석입니다만, 요점은 알겠네요. ‘지구’를 의미하는 지구<Erde>는 원래 ‘대지’나 ‘흙’을 의미했다는 것입니다. 일본어에서도 ‘땅[土]’이라는 글자를 사용해 ‘지구(地球)’라고 표현하며, 영어의 <Earth>도 원래는 ‘대지’, ‘땅’이라는 의미입니다. <Erde>와 어원이 같습니다. 일본어에서는 혹성[행성]을 가리킬 때 ‘지구’라는 표현을 하며, 독일어에서도 ‘지구’라는 것을 강조할 때는 <Erdball>이라고 합니다. ― [위 번역본에서] 괄호 안에 * 표시 이후에 표기된 것은 ‘에르데발’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Erde>의 마지막 <e>의 글자가 없어졌으니까 ‘에르트발’이라고 해야겠네요. 우리는 지구라는 ‘혹성[행성]’을 대지의 구체(球體)로 표상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 증거로 ‘바다의 볼 Seeball’ 혹은 ‘바다의 구 Meereskugel’이라고 말을 하면 기묘한 느낌을 받는다는 거네요. 즉, 우리가 ‘지구’를 볼 때, 반드시 ‘대지’를 중심으로 보는 습관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우리가 ‘지구’를 마음속에 떠올리려고 하면, 아무래도 푸른 표면에 남북 아메리카 대륙이라든가 아시아 대륙,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이 부각되는 것을 떠올리네요. 그 푸른 곳이 바다인 것인데, 바다는 배경이 되고 있고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느낌이 듭니다.

대지는 인간의 모태이며, 그래서 인간은 대지의 자식이다. 인간은 자신의 동포를 대지의 형제, 대지의 시민으로 간주한다. 예로부터있는 네 가지 ― 대지, 물, 불 그리고 공기 ― 중 대지는 인간을 위해 정해지고 인간을 가장 강하게 규정하는 엘레멘트이다.
* 대지가 인간의 모성적 토대mütterlicher Grund라면 인간은 대지의 아들이고, 사람들은 대지의 형제이자 대지의 시민들Erdebürger인 셈이야. 대지(흙)Erde, 물, 불, 공기라는 전승된 4원소론에서 대지(흙)가 인간에 상응하고 인간을 가장 크게 규정하는 원소인 것도 이 때문이야. (김남시, 8쪽).
‘엘레멘트 Element’란 ‘요소’라든가 ‘원소’라는 뜻이죠. 세계가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얘기는 최근의 마술계의 애니메이션이나 판타지계 영화에서 자주 듣습니다. 이 4원소설은 원래 엠페도클레스(기원전 490-430)가 원조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 스토아학파를 거쳐, 아라비아의 과학이나 중세 후기의 연금술에 수용됩니다. 슈미트는 4원소 중 ‘흙 Erde’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셈이죠. ― ‘대지’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4원소 얘기니까 ‘흙’이라고 번역하는 편이 좋겠죠. ‘흙’이중요한 것은 인간의 발판인 ‘대지 Erde’를 구성하는 원소이기 때문입니다.
‘흙-대지’라는 이 원소에 무슨 ‘힘’이 깃들어 있느냐고 말하면, 연금술 같은 신비주의가 되어 버립니다만, 슈미트는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까처럼 대지를 딛고 서 있는 인간의 ‘시선’에 입각해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너는 어딘가에 있는 해안에 가서 눈을 들어 보기만 해도 좋다. 그리하면 이제 바다의 압도적인 평면이 너의 시계에 들어올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인데, 인간은 해변에 서면 자연스럽게 육지/땅에서 바다를 보게 되는데, 거꾸로 바다에서 육지/땅의 방향으로 눈을 향하게 되지는 않는 것이다. 인간 속에 있는 종종 무의식적인, 심층적인 기억에 있어서는, 물과 바다가 모든 생명의 불가사의한 근원이다. 대부분의 민족은 그들의 신화나 전설 속에 대지에서 태어난 신들이나 인간뿐 아니라, 바다에서 태어난 신들이나 인간도 등장시킨다. 이런 신화들이나 전설들은 모두, 바다의 아들, 바다의 딸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여성의 미를 대표하는 여신 아프로디테는 바다의 파도 거품에서 출현한 것이다.
* 해변에 가서 주위를 둘러보기만 해도 압도적인 넓이의 바다가 너의 시선의 지평을 둘러싸고 있는 걸 보게 될 거야. 해변가에 서 있는 인간이, 당연한 말이지만, 땅에서부터 바다를 바라보지, 바다에서 땅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사실은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지 않니?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무의식적인 인간의 기억 속에서 물과
바다는 모든 생명체의 비밀스러운 원천Urgrund인데 말이야. 대부분 민족들의 신화와 전설에는 대지에서 태어난 신과 인간뿐 아니라, 바다에서 탄생한 신과 인간도 등장하지. 또 바다Meeres와 대양See의 아들, 딸들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도 있단다. 여성적 아름다움의 신 아프로디테는 파도의 거품 속에서 태어났지. (김남시, 9쪽).
당연한 겁니다만, 우리는 보통 대지에서 바다를 향해 시선을 돌립니다. 바다는 종종 우리의 생명의 원천으로 표상되죠. 바다가 모태의 양수를 연상시킨다는 말이 있죠. 그리스 신화의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바다의 거품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죠. 거품은 정자를 연상시킵니다. 다만, 바다가 우리 생명의 원천이라 하더라도, 현재의 우리는 대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바다는 근원으로 향하는 시선이 향하는 곳입니다. 시선이 향하는 끝에 있으며, 표면의 아주 일부만 볼 수 있는 바다는 우리의 기억의심층에 대응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너 Du’를 향해 말하고 있네요. 문학적인 느낌이 듭니다. 헌사를 보면 “우리 딸 아니마에게 말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실제로 슈미트의 딸은 아니마(1931-83)라는 이름입니다만, ‘아니마 anima’는 라틴어로 ‘혼’이라는 의미입니다. 마치 우리 자신의 ‘혼’에 말을 걸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런 효과도 생각해, 딸에게 얘기를 거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슈미트는 신비주의 사상과 신화의 이미지를 동원하면서, 인간의 상상력 속에서의 ‘대지’나 ‘바다’가 차지하는 위치를 분명히 하고, 그것을 세계사의 흐름과 결부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리바이어던과 비히모스[베헤모스]의 싸움 : 육지/땅과 바다의 근원적 대립
12頁에서 현대의 진화론적 과학의 성과로, 우리가 바다 생물의 자손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네요. 그리고 이것과 대응하는 듯이 자기 인식을 갖고 있는 민족이 있다는 인류학적 논의로 이동해 갑니다.
남해의 섬들, 카나카족이나 사보이오리족 같은 폴리네시아의 항해자들 중에서는 또한 이런 어족적(魚族的) 인간의 마지막 후예를 인식할 수 있다. 이들의 모든 생활, 이들의 관념 세계 및 언어는 바다에 연관되어 있다. 이들에게는 대지에서 획득된 우리의 공간과 시간에 관한 관념은 무관하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거꾸로 우리 땅/육지의 인간에게는 저 순수한 바다의 인간의 세계를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세계인 것과 거의 똑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엘레멘트는 무엇인가, 우리는 대지의 아이인가, 아니면 바다의 아이인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질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양자택일로 대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태고의 신화도, 현대의 자연과학의 가설도, 그리고 또한 원초적인 역사의 연구성과도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 남태평양 섬들과 폴리네시아의 해양민족들, 카낙Kanak과 사우Sawu 섬의 토착민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그런 어류인간Fischmenschen의 종족이라고들 말하지. 그들이 사는 방식, 그들이 떠올리는 세계, 그들의 언어는 전부 바다와 관계되어 있어. 견고한 땅에서 얻어진 공간과 시간에 대한 우리의 표상들이 그들에게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땅의 인간들Landmenschen에게 저 순수한 대양인간Seemenschen의 세계는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다른 세계에 다름아니지.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겨나겠지? 우리를 구성하는 원소는 무엇일까? 우리는 땅의 자식들일까, 아니면 대양의 자식들일까? 이 질문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간단히 대답될 수는 없단다. 오래된 신화들, 근대의 자연과학적 가설들, 선사시대에 대한 연구결과들 모두가 그 두 가능성을 다 열어넣고 있기 때문이야. (김남시, 11-12쪽).
우리는 어족(魚族)의 후손이라는 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고, 바다를 중심으로 한 언어·관념 체계를 갖고 있는 민족도 있다는 것이네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속하는 원소가 ‘땅=대지’인지 ‘물=바다’인지 모르게 되네요. 이 ‘대지’와 ‘바다’의 경합을 통해 인류사가 전개된다는 것이 이 책의 메인 테마입니다.
17頁부터 시작되는 3장 이후에서는, 이런 신화적·세계적인 이미지가 구체적인 세계사에 겹쳐집니다. 신화적 상상력이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거네요. 이 부근은 낭만파에 가까운 발상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세계사는 육지의 나라에 대한 바다의 나라의 싸움, 바다의 나라에 대한 육지의 나라의 싸움의 역사이다. 프랑스의 군사전문가였던 카스텍스 제독(1878-?)은 자신이 쓴 전술서에 <땅 대 바다 La MerContre Terre>라는 포괄적인 제목을 붙였다. 그는 이것에 의해 커다란 이야기의 전통 속에 자리잡은 것이다.
육지/땅와 바다의 근원적 대립은 고래로부터 알려진 것인데, 19세기의 끝 무렵에도 여전히, 당시 러시아와 영국 사이에 있었던 긴장상태를 곰과 고래의 싸움으로 묘사하는 것이 인기를 끌었다.
* 세계사는 땅의 힘에 대한 대양의 힘의 투쟁, 대양의 힘에 대한 땅의 힘의 투쟁의 역사란다. 프랑스의 군사학 전문가인 카스테스 제독Raoul Castex은 자신의 전술론에 <땅에 대항하는 바다la Mercontre la Terre>라는 제목을 부쳤고, 이 책을 통해 후세에 크게 이름을 떨쳤지.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땅과 바다의 원소적 대립을 알아차리고 있었는데, 19세기 말까지도 당시 러시아와 영국 간의 긴장을 ‘곰과 고래의 투쟁’이라고 지칭하곤 했어. (김남시, 17쪽).
세세한 것을 말해두면, ‘전술서’의 원어는 <sein strategisches Buch>이기에 ‘전략서’로 번역해야죠. ‘전술’은 개별 전투의 전개 방식에 관한 이야기이고, ‘전략’은 더 대국적(大局的)인 투쟁방식을 가리킵니다. ‘전술핵/전략핵’이라고 말할 때는, 약간 간극이 있어서, 소규모/대규모라는 의미 부여가 되네요. 라울 카스텍스 (Raoul Castex, 1878-1968) 제독은 제1차 대전후 프랑스 해군의 재조직화를 담당한 군사이론가로, 프랑스에서 지정학의 원조로 간주되는 인물입니다. 그는 해전과 육지전을 결합한 전략을 제창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유라시아에서 육지를 따라 세력을 계속 확대하던 러시아와 세계 각지의 해외 식민지를 연결하는형태로 세력을 확대하는 영국의 대립을 육지=곰과 바다=고래의 대립으로보는 것은 흥미로운 관점이네요. 러일전쟁(1904-05)도 그런 커다란 세계사적 대립도식 속에서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겠네요.
고래는 여기서 신화에 나오는 거대한 물고기, 바다 짐승인 리바이어던이다. 이에 관해서는 우리는 나중에 조금 더 언급하게 될 것이다.그리고 곰이란 육서동물(陸棲動物)의 수많은 상징적 대표자 중 하나이다. 이른바 카발라 학자[카발라는 유대교 신비주의로 중세 독일, 스페인에서 성행했다]들의 중세적 해석에 따르면, 세계사는 거대한 고래, 리바이어던과, 마찬가지로 강대한 육지/땅의 야수로 수소 또는 코끼리라고 생각된 비히모스 사이의 싸움이다. 리바이어던과 비히모스라는 두 개의 이름은 <욥기>(40장, 41장)에서 유래한다. 카발라학자들이 말하는 바에서는, 비히모스는 그 뿔이나 이빨로 리바이어던을 찢어버리려 하지만, 이에 대해 리바이어던은 그 지느러미로 상대인 육서동물의 입이나 코를 덮고 먹이를 먹거나 호흡을 할 수 없게 하려 한다. 이것은 해국(海國)이 육지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군량미를 공격하여 육지국을 봉쇄하는 것의 묘사이며, 신화적 이미지로만 가능한 생생한 묘사이다.
* 여기에 등장하는 고래는 거대하고 신비스러운 물고기이자, 나중에 자세하게 이야기하게 될 리바이어던이고, 곰은 땅의 동물을 대표하는 상징적 대변자 중 하나지. 중세 시절 카발리스트들의 해석에 리바이어던 vs 비히모스 ‘바다의 나라’ ⇔ ‘육지의 나라’
따르면, 세계사는 리바이어던이라 불리는 힘센 고래와 그만큼이나 강한 땅의 동물로 코끼리 아니면 황소로 상상되던 베헤모스 사이의 투쟁이라는구나. 리바이어던과 베헤모스는 <욥기>(40장과 41장)에 나오는 이름이야. 카발리스트들이 말하기를, 뿔이나 이빨로 리바이어던을 찢어 죽이려는 베헤모스에 맞서 리바이어던은 거대한 꼬리로 베헤모스의 입과 코를 막아서 먹거나 숨 쉬지 못하게 했다는구나. 육지로의 보급로를 차단해 굶게 만드는, 육지의 힘을 봉쇄하는바다의 힘을 신비주의적 이미지답게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지.
(김남시, 17-19쪽)
구약성서의 욥기에 나오는 리바이어던과 비히모스의 싸움을 ‘육지/땅의 나라’와 ‘바다의 나라’의 싸움으로서 신화적으로 독해하려는 것입니다. 참고로 욥기 자체에는 리바이어던과 비히모스에 관해 그렇게 구체적인 기술이 있는 것이 아니며, 여기서 슈미트가 쓰고 있듯이, 카발라학자들에 의한 해석에서 여러 가지 이미지가 부여되고 있습니다. 성경의 서술로부터 알 수있는 것은, 비히모스는 소처럼 풀을 뜯고, 강의 주변에 있는 동물, 리바이어던 쪽은 그 강 속에서 서식하는 동물이라는 것입니다. 영일사전이나 독일사전을 보면, 리바이어던은 고래 혹은 뱀, 용, 악어 등 다양하게 해석되어 있으며, 비히모스는 하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홉스는 국가의 생성에 관한 저작 <리바이어던>을 썼습니다.
그에게는 잉글랜드 내전에 관해 논한 <비히모스 Behemoth>(1668)라는 저작도 있습니다. 슈미트 자신도 1938년에 <리바이어던>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것은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대해 독자적인 해석을 한다기보다는 ‘리바이어던=국가’라는 이미지가 어떻게 수용되고 그것이 법학, 국가학에 주었던 영향을 논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방법론적으로 슈미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간주되는, 프란츠 노이만(1900-54)이라는 프랑크푸르트학파에 가까운, 좌파 법학자·정치학자가 나치즘의 국가 체제를 분석한 <비히모스>(1942, 44)라는 책을, 망명지인 미국에서 출판했습니다. 노이만은 유대계입니다.
비히모스가 하마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수서동물(水棲動物) 같은 느낌이 듭니다만, 슈미트가 카발라의 견해를 인용해서 비히모스를 육서동물(陸棲動物)로 간주하고, 수서(水棲)의 리바이어던과 대치하고, 그것을 ‘육지/땅 vs 바다’의 대립의 상징으로 보고 있는 거네요. 리바이어던에 의한 비히모스 공격을, 해군력을 이용한 적국의 경제 봉쇄의 상징으로 묘사하는 대목이재미있네요.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카발라에 바탕을 두고, 이 도식을 그려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저작이 쓰여진 시기는, 슈미트는 나치의 주류에서 소원해지고, 현실적인(actual) 정치문제로부터 멀어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 제2차 대전 중입니다. 유대적인 것에 관해 말하는 것은 위험했습니다. 그것을 알고서 카발라를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니까, 슈미트는 원래 이쪽 방면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리바이어던과 비히모스는 홉스의 저작을 통해 ‘국가’라는 정체모를 괴물을 상징하는 이미지로서 유포되었습니다만, 생각해보면, 이 두 마리는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서의 ‘욥기’에서 유래합니다. 사탄의 시련을 받고 시달리는 욥의 인생은 예수의 그것의 원형으로 간주됩니다. 기독교 자체가 유대교를 모태로 하고 있기에 당연합니다만, 기독교 문화권에서의 ‘국가’의이미지는 상당 부분, 유대교의 신화적 세계관에서 유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어서 고대의 해양국가인 크레타와 아테네, 로마, 카르타고 등, 우리도 세계사의 교과서에서 잘 알고 있는 고대의 역사를 ‘땅과 육지’의 싸움이라 는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확실히 고대 문명의 흥망성쇠의 상당 부분은 ‘땅과 육지’의 싸움으로 볼 수 있죠. 트로이 전쟁이나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의 포에니 전쟁 등은 역사책에서도 이런 관점에서 서술되어 있군요.
‘카테콘 Katechon’ ― 신화적 상상력과 세계사의 관계
21頁에, 오오다케 코우지 씨(大竹弘二) 등이 슈미트의 중요 개념이라며 강조하고 있는 ‘카테콘 Katechon’이 나옵니다. 동로마황제를 ‘카테콘’으로 볼 수 있다는 얘기네요. 역주에 나오고 있듯이, 그리스어로 ‘제지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막는가 하면, ‘적그리스도’의 출현입니다. 신약성서의 「데살로니아인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는 ‘적그리스도’가 등장하는 것을 진정한 그리스도의 등장 때까지 ‘제지하는 자(카테콘)’가 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대지의 노모스>에서 슈미트는 초기 기독교 신학에서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카테콘’의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기대됐다고 논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까지 악의 힘이 세계를 뒤덮지 않도록 수호하고 있다는 것이죠. 여기서 화제가 되는 동로마제국의 황제의 경우는, 이슬람에 의해 기독교 세계가 정복되지 않도록 제지하는 역할을 오랫동안 맡아 왔다는 것이네요.
<정치적 낭만주의>나 <정치신학>에서는 인간의 본성은 나쁜 것이며, 악으로 흘러드니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독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습니다만, ‘카테콘’론도 그것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카테콘’의 역할을 맡았던 동로마제국은 서서히 이슬람에게 밀리며 쇠퇴하고, 1453년에 멸망합니다만, 그 역할을 계승한 자가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의 새로운 신화적인 이름이 커다란 세계사 속에 들어온다. 거의 500년 가까이 베네치아 공화국은 해양지배의 상징, 해상무역을 기초로 구축된 부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또한 고도의 정치적인 빛나는 성과인 동시에, ‘모든 시대의 경제사의 가장 특이한 산물’로 간주됐다.
* [십자군 원정을 거쳐 부상해서 기독교-유럽 지역에 하나의 새로운 대양 권력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것이 베네치아란다.]
이와 더불어 새로운 신화적인 이름이 세계 역사의 웅대한 무대에 진출하게 돼. 베네치아 공화국은 거의 500여년 간 바다의 지배를 상징하며 대양 무역에 기초한 재력으로 고도의 정책적 요건을 자춘 모든 시대의 경제사를 통틀어 가장 진귀한 창조물의 독보적인 개가로 여겨졌단다.(김남시, 22-23쪽).
현대 일본에 살고 있는 우리는 베네치아=베니스를 물의 도시라고 불리는 관광지로 밖에는 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이 도시는 중세 후기부터 근대 초기까지 유럽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탈리아 반도의 동쪽, 아드리아해 연안에 위치한 베네치아는 당초 동로마제국의 지배 아래에 있었습니다만, 유럽과 아시아와 북아프리카를 잇는 지중해 무역의 중심지가 되며, 십자군의 거점이 되기도 했습니다.
18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는 영국 숭배자들이 영국에 대해 찬미했던 모든 것은 이미 그것 이전에 베나치아에 대해서 찬미되었더 것이다. 즉 ― 거대한 부, 이 해양국이 육지국 사이의 대립을 교묘히 이용하고 자신들의 전쟁을 다른 나라에서 행하게 하는 요령을 터득했던 탁월한 외교수완, 국내에서의 정치질서의 문제를 해결한 듯 보이는 귀족주의적 헌법, 다양한 종교적·철학적 의견에 대한 관용, 자유로운 이념과 정치망명의 피난처 등. 심지어 현란한 축제와 예술미의 수상한 매력이 이것에 가세한다. 이런 축제들 중 하나는 특히 인간의 판타지를 북돋고, 베네치아의 명성을 널리 세계에 알리는 데 도움이 됐다. 그것은 낡은 전설에 포함된 ‘바다와의 약혼’, 이른바sposalizio del mare[바다의 결혼식]이다.
* 열렬한 영국 찬미자가 18세기에서 20세기까지의 영국에 대해 떠벌리는 모든 찬사들은 이미 베네치아에 대해 행해진 것들이지. 거대한 재력, 대양 권력으로서 땅의 권력들 사이의 대립을 이용해 그들의 싸움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 줄 알았던 외교적 우월성, 내부정치 질서의 문제를 해결해낸 귀족 정치적 법질서, 종교적∙정치적
으로 다른 견해들에 대한 관용, 자유로운 이념과 정치적 망명의 보호처, 거기에다 화려한 축제들과 예술적 아름다움이 주는 매혹적인 매력까지. 이 축제 중 특히 인간의 판타지를 불러내고 전 세계에베네치아의 명성을 떨치는 데 기여한 것이 저 전설적인 ‘바다와의 약혼Verlobung mit dem Meer’이었어. 이탈리아어로는 ‘Lospozalizio del mare’라고 불렸지. (김남시, 23쪽).
베네치아의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탁월한 ‘정치’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판타지, 특히 인류와 바다의 신화적 연계를 상기시키는 축제와 예술이 있었다는 거네요. 바다를 둘러싼 신화적 상상력과 ‘카테콘’을 둘러싼 종말론적 상상력이 서력(西曆) 1000년부터 1500년에 걸친 베네치아의 발전의 배경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 시기에, 19세기, 20세기가 되어도 여전히 수많은 여행자와 유럽속의 몽상가들 ―바이런, 뮈세, 리하르트 바그너, 바레스 같은 시임, 예술가들 ― 을 베네치아로 끌어들인 하나의 전설이 생겨났다.
* 그 전설은 그때부터 19세기 후반과 20세기에도 전 유럽 국가들의 수많은 여행자와 유명한 낭만주의자들 ― 바이런, 뮈세, 바그너, 바레스 ― 을 베네치아로 끌어들였지. (김남시, 25쪽)
베네치아를 둘러싼 문학적 상상력이라고 하면, 곧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이 생각납니다만, 그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는 거네요. 토마스 만(1875-1955)의 <베니스에서 죽다>(1912)도 영화화됐으며 유명하죠. 바이런(George Gordon Byron, 1788-1824)은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으로, 베네치아를 포함해 영국에서 오랫동안 체류했다는 것, 그리스의 독립전쟁에 참여했다는 것 등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베니스에서 In Venice>(1816)이라는 시나, 베네치아의 최고집정관인 마리노 팔리에로(Marino Faliero, 1285-1355)를 주인공으로 한 <마리노 팔리에로>라는 시극을 썼습니다. 뮈세(Alfred de Musset, 1810-57)는 프랑스의 낭만주의 시인으로, 별로 평판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베니스의 밤>(1830)이라는 극이 있습니다.
바그너(1813-83)는 창작활동을 위해 종종 베네치아를 방문했고, 이 땅에서 죽었습니다. 모리스 바레스(Maurice Barrès, 1862-1923)는 프랑스의 반유대주의·민족주의의 소설가로, 베니스의 죽음(1903)이라는 여행기가 있습니다.
기술·포경·해적 : 바다라는 요소를 둘러싼 흥망사
4장부터 5장까지, 바다라는 요소를 지배하는 지위가 베네치아에서 스페인,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으로 넘어가는 경위가 말해지고 있습니다. 베네치아의 해군은 아직 로마와 마찬가지로 갤리선을 써서 함판 위에서의 접근전을 축으로 싸웠습니다. 스페인과 베네치아가 오스만 투르크와 싸운 레판토 해전(1571) 무렵까지는 그런 싸움 방식이 주류였던 것인데요, 이로부터 187년 후, 영국 해군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른 해전 무렵부터 조선 기술의 진보에 따라 해전의 방식이 크게 바뀌었다고 기술되어 있군요. 그런 기술의 진보를 이룩한 공로자로서 네덜란드인이 추앙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덜란드인의 뛰어난 점으로 조선(造船)과 포경이 꼽히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포경이라고 하면 [포경반대단체인] 시셰퍼드(sea shepherd) 정도만 떠올립니다만, 17세기 후반까지 포경은 중요한 산업이었습니다. 페리(1794-1858)가 일본에 내항(來航)한 중요한 목적 중 하나로, 포경선을 위한 보급 기지를 확보하겠다는 것이 있었다는 것은 일본사 수업에서 배우죠. 태고부터 포경을 하는 이들은 리바이어던=고래를 쫓고, 바다라는 요소와 더불어 살아왔다는 것이네요. 포경꾼들은 최대의 어부였던 거네요. 그런 바다의 영웅 이야기로서 멜빌(1819-91)의 <모비딕(백경) Moby Dick>(1851)이 자리잡고 있네요. 이것은 증기선이나 대포 출현에 의해 포경의 방식이 크게 전환하고 있던 시대에 쓰여진 작품입니다. 6장에서는 새로운 바다의 영웅인 네덜란드에 대해 기술되어 있습니다. 신화적 상상력과 세계사의 관계에 ‘기술’이라는 요소가 새로 결부되는 것입니다.
1595년, 북네덜란드, 서프리슬란드의 마을 호른으로부터 새로운 형태의 배가 등장한다. 그것은 가로 돛을 한 보트로, 낡은 범선처럼 그저 순풍을 받아 달린다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바람을 옆에서 받아 항해하고, 기존의 돛과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바람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삭구[索具; 배에서 쓰는 밧줄의 종류]와 항해기술은 이제 그동안은 상상조차 못했던 방식으로 완성된다. ‘중세의 항해술은 끔찍하게 붕괴한다’고 배 모양의 발전사 연구가인 베른하르트 하겐드른은 이 사건에 관해 말한다. 이것은 땅/육지와 바다의 관계의 역사에 있어서의 진정한 전환점이다. 대체로 당시에는 선체와 삭구 장비가 만들어졌던 재료에 관해서는, 그것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극점까지가 달성되었다.
* 1595년경 북네덜란드의 서(西)프리트란트westfriesische 도시 호른Hoorn 외곽에서 횡범(橫軓)Rahsegel을 단 새로운 유형의 선박이 등장해. 횡범은 뒤에서 부는 바람만으로 작동하던 이전의 돛과는 달리 옆에서 부는 바람으로도 항해를 가능하게 한 돛으로,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람을 이용할 수 있게 했어. 그 이후로 삭구(索具)Takelage와 항해기술이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개선되었지. 선박 유형의 발전사를 기술한 역사가 베른하르트 하게도른Bernhard Hagendorn은 이를 “중세 항해 방식이 파국적으로 붕괴한 사건”이라고 말해. 땅과 바다의 관계에서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이 생겨난 것이지. 배와 삭구에 재료Material로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때 전반적으로 완성되었어.(김남시, 44쪽).
단순히 기술적인 변화가 기술되어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만, 요점은 그때까지 단순히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