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수유너머104] 제7호가 발행됐습니다.

 




*리뷰


과학기술리뷰  책에는 진리가 없다/ 조정현              



  

*연재


니체와 탭댄스를  [즐거운 학문],'정신의 농민혁명'에 대한 고찰 /이규상

                      가구만드는 남자의 두번째 여행기/ 엇결과 순결 

그림이 있는 글  거동수상자의 걸음-마르셀 뒤샹과 이상/ 금은돌

                   



*수유너머 104 늬우스

감응의 정치학 심포지움 후기/ 탁선경



*세미나현장  

[문학세미나] 악마와 리듬의 양상-말도로르의 노래 / 조원효

                   가상현실보다 환상적인 포 읽기 / 이봉순

[기형도 30주기 추모 기획세미나] 기형도 시집 새로 읽기/ 나무




웹진 수유너머104는 잠시 휴간합니다. 재정비 시간을 가진 후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웹진 수유너머 104 : 김충한, 금은돌, 송승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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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진 수유너머104] 제6호가 발행됐습니다.

 



*리뷰

시 읽는 목요일 김혜순, 『나의 우파니샤드서울』 / 이혜진

과학기술리뷰  C Programming Language 소개/ 조정현

                린 마굴리스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리뷰 / 로라

인문학 리뷰   금은돌의그는 왜 여편네를 우산대로 때려눕혔을까』를 읽고 / 도경

                 『코뮨이 돌아온다-우리 친구들에게』 서평/ 김기영


 

*번역

아무도 번역 안해줄 거잖아 

                 이주노동자와 용병들 - ‘매수된 룸펜’ 취급을 받던 민족들의 1848 혁명/ 가게모토 츠요시

노마씨의 저널산책 21세기 정치철학 교본 / 박준영

 


*연재

장자로 보는 삶 덕의 향기로서의 사랑/ 담연

니체와 탭댄스를 니체의 물리학 - [즐거운 학문]/ 연두

                    [즐거운 학문], 탈주자를 위한 하드 트레이닝 /모로



*수유너머 104 늬우스

< 2019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비평 당선작> 

사이버네틱스와 창문 열린 모나드- 백남준의 예술 세계 / 김서로



*세미나현장  

[문학세미나]동시대의 유동하는 시점과 페르난두 페소아/ 김민경

[문학세미나]나를 발견하게 하는 거울-페르난두 페소아/ 이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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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시 읽는 목요일 김혜순, 『우리들의 음화陰畫』 / 이혜진

바깥의 문학  재현의 정치성에서 상상의 정치성으로― 김시종과 김혜순의 시/ 송승환

인문학 리뷰 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 / 송재림


 

*번역

아무도 번역 안해줄 거잖아 생활사(史)와 역사의 균열/ 가게모토 츠요시

대화의 반려들 : 해러웨이와 울프 반려종 위치부여 / 최유미

 


*연재

장자로 보는 삶 통로로 존재하는 몸/ 담연

그림이 있는 글 기형도와 M.C.에셔 _ 스무살, 미발표작을 중심으로(2) / 금은돌

PhilSoulFood  마르크스와 한 잔 더!/ 박준영

니체와 탭댄스를 한국 힙합음악과 비극적 영웅의 테마/ 류재숙



*수유너머 104 늬우스

그때그때 미얀마 여행 후기 / 이준형

세미나현장   요가:"나에게 힘을 주는 요가"/ 이봉순

                나를 발견하는 거울 -페르난두 페소아/ 이재현




이번 제5호부터는 매달 25일 발행합니다. 인기글, 우수글에 도서상품권을 선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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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인문학 리뷰  『아픔이 길이 되려면』, 『우리는 왜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위험한 정치인』 / 송재림

과학기술 리뷰  과학잡지 『에피』 6권 리뷰 _ ‘필드 사이언스’와 ‘수능 리뷰’를 중심으로 / 고승환 

 

*번역

노마씨의 저널 산책  대지의 우화, 들뢰즈와 해러웨이[Part 2] / 박준영

대화의 반려들 : 해러웨이와 울프 해러웨이와 울프와의 대담-사이보그의 시작(2) / 최유미

 

*연재

장자로 보는 삶 인간 세상, 고통의 근원은 무엇인가? / 담연

그림이 있는 글 기형도와 M.C.에셔 _ 스무살, 미발표작을 중심으로(1) / 금은돌

 

*수유너머 104 늬우스

바깥의 문학 6강 진은영 '문학의 바깥, 삶의 바깥' 후기 / 남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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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바깥의 문학 <최진석>

시 읽는 목요일 <이혜진>  


번역

아무도 번역 안 해줄 거잖아 <카게모토 츠요시>

노마씨의 저널산책<박준영>


연재

니체와 탭댄스를 <김연희>



수유너머104 늬우스

겨울강좌 [어펙트 입문] 후기 <로라>


세미나 현장 

장자세미나 <조정현>

레비나스<영진>


지난 1월달(1,2호) 우수글 시상

-성아라 <바깥의 문학 후기>

-이혜진 <시 읽는 목요일>

-담연 <장자로 보는 삶>

-카게모토 츠요시 <아무도 번역 안 해줄 거잖아>

-조정현 <장자세미나 후기>


입니다. 문화상품권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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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음"의 존재론

이진경, 불교를 철학하다』, 휴, 2016

 

 

최유미/수유너머 N 회원

 

 

 

 

 

 

 

 

 

 

내가 불교와 처음 만난 건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이었다. 60세에 말기 암 선고를 받은 아버지는 붓을 들어 반야심경을 쓰면서 마음을 다스리셨고, 우리들에게는 성철스님의 유명한 공안 진공묘유(眞空妙有)”를 한 장씩 써 주셨다. 그 덕에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읽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헛되고도 헛되도다로 읽었기에 산 자를 위한 철학은 아니지 싶었다. 그렇지만 느닷없이 닥쳐온 죽음 앞에서도 아버지가 비교적 담담하셨던 건 순전히 불교 덕분이라 생각했기에 나는 불교에 어느 정도는 고마움과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공부해 보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윤회니 해탈이니 하는 개념들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전생에 지은 업에 따라 현생이 결정되고, 현생의 업에 따라 미래가 결정되다니.. 틀림없이 뭔가 야로가 있을 거란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이진경의 새 책, “불교를 철학하다는 나처럼 창밖에서 힐끗 안을 들여다보고 막연하게 불교에 대한 상을 그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기, 무상, 인과, 보시, 윤회 등의 25개의 불교 개념을 제대로 생각하게 해 주는 책이다. 무엇보다 불교를 허무주의로 읽은 나의 오독을 바로 잡아 주었다. 덕분에 아버지가 써주신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이 책의 미덕은 자칫 고원(高遠)해지기 쉬운 불교 개념들이 이진경과 만난 덕분에 과학, 현대철학, 문학, 예술이 침윤한 싱싱한 모습으로 다가오는데 있다. 책 표지 역시 ‘21세기 불교를 위한 하나의 초상이라는 부제답게 로봇신체를 한 부처가 연꽃 비행선을 타고 있는 그림이 실려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은 단지 21세기의 기술문명을 표상하는 것만은 아닌 듯싶다.

 

책 표지를 보고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의 성 라퓨타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언젠가 이진경이 이 영화에 꽂혀서 게시판에 장문의 글을 올렸던 기억이 있어서인 것 같다. 라퓨타는 대지를 벗어나 천공에 건설된 파라다이스다. 700년간이나 대지를 탈주해 있던 천공의 파라다이스 라퓨타는 다시 대지를 장악하려는 인간의 욕망에 사로잡히고, 주인공들은 자신들도 죽게 됨에도 불구하고 라퓨타에 멸망의 주문을 건다. 영화의 마지막은 그 라퓨타가 대지를 향해서 무너져 내리는 장면인데, 이때 인간의 욕망과 무관한 라퓨타의 동물, 식물, 로봇들은 천공을 향해 부상한다. 이미 라퓨타는 대지를 벗어나 있었지만, 그 탈영토화는 철저하지 않았다. 이들은 대지를 완전히 벗어나는 탈영토화를 감행하는 것이다. 책표지의 부처는 인간의 신체를 탈영토화하고, 대지로부터 자신의 뿌리를 뽑아버린 연꽃 비행선을 타고 다시 탈주를 감행한다.

 

이 책이 보여주는 불교의 초상은 이런 탈영토화를 존재론으로 밀어붙인 모습이다. 이진경이 불교를 통해 펼치는 존재론은 존재자를 탈영토화 한다. 존재자를 탈영토화한 존재. 이 책에서 존재, 있음 그 자체의 존재론이 중도(中道), (), (), 그리고 십이연기(十二緣起)의 개념들을 빌어서 펼쳐진다. 이진경은 전작인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에서 보다 있음그 자체에 더욱 밀착되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진경이 자신의 존재론을 선보이게 될 날이 머지않았음을 이 책으로부터 예감하게 된다.

 

그나저나 유물론자가 분명한 이진경이 윤회나 해탈 같은 개념을 어떻게 독해했을까? 아버지 49제를 주관하신 스님은 아버지가 중음신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부디 인간의 몸으로 환생하도록 기도한다고 했다. 나는 그때 속으로 인간으로 환생한들 그가 이전의 내 아버지와 어떤 같은 점이 있을까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불교는 무아(無我)”말하면서, 또 아()를 그대로 유지한 다음 생을 말하는 셈이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않은 것 아닌가? 윤회의 시간을 관통하는 그를 누구로 불러야 할까? 이진경은 보르헤스의 죽지 않는 사람들을 들어 윤회의 시간을 관통하는 것은 수많은 삶, 그 '모든 사람'이 될 수 있는 아무도 아닌 자만이 있을 뿐이다"(217)라고 .. 윤회는 “‘무아생명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적절한 어떤 힘의 영원한 흐름이다”(218)라는 파격적인 해석을 내어 놓는다. 윤회하는 것은 존재이지 존재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하나 이 책을 읽는 재미는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선승들의 선문답을 조금이나마 따라 갈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를 준다는 점이다. 나는 벽암록은 아예 펼쳐들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선불교의 기초적인 공안집이라는 무문관에서 한차례 좌절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화두를 끝까지 밀어붙이고는 말해보라! 말해보라!”고 윽박지르는 선승들의 다그침 통에 나도 덩달아 숨이 막힐 것 같아서 책을 덮고 말았었다. 이진경의 이 책은 그것을 다시 펼쳐보게 꼬드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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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인과 어떻게 만나야 할까?

- 인권기록활동네트워크 ‘소리’ 지음, 그래, 엄마야, (오월의 봄)

 




박 임 당 / 수유너머N 회원 

 



 

“저 언니야. 너랑 같이 수업 할 학생 중 한명, 가서 인사해.”

 

2015년 4월 20일, 국가가 붙이는 이름은 ‘장애인의 날’, 장애 운동계에서 붙인 이름은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인 바로 그날이었다. 야학에 발달장애인과 함께 하는 낮 수업 교사로 처음 결합하는 날이 바로 이날이었기에 나는 거리 집회에서 학생을 처음 만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실 만났다고 할 수 없었다. 본래 친분이 있던 K 언니가 멀리 있던 학생 한분을 가리키며 알려주었지만 나는 다가가 인사한마디 건네지 못했었다. 멀리서 마주친 눈길에 불현 듯 두려움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저들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휘감았고, 만나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기에 다가갈 수 없었던 것이다.


 

발달장애인이라는 낯선 존재들

 


발달장애인에 관해 ‘알 수 없다’는 생각은 나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리고 2015년의 그날로부터 2년 가까운 시간을 지나온 나로서도 사실 여전히 발달장애인에 관한 무지의 벽에 종종 부딪히고 만다. 우리는 무지에 대해서 다양한 방법을 취할 수 있다. 알아보려고 노력하거나, 모르는 채로 살거나, 없는 셈 치거나. 이 방법들에 있어서도 또 다시 무수한 갈래의 방법과 그 방법을 택한 이유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녀가 발달장애인인 가족 안에서도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2016년에 출간된 <그래, 엄마야>는 발달장애인 자녀를 둔 엄마들을 인터뷰하고 기록한 책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혹은 서른 살 언저리인 내 또래의 이들에게 익숙한) 발달장애인 엄마는 배우 김미숙이 연기한 ‘초원’의 어머니일 것이다. 개봉 당시 500만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말아톤>은 자폐성 장애가 있는 주인공 ‘초원’이 마라톤을 완주하는 이야기이다. 조승우가 연기한 ‘초원’의 옆에서 그를 돌보고 다그치는 가족 내의 유일한 사람은 엄마였다. 결국 ‘백만불 짜리 다리’의 초원과 독한 엄마의 성장 스토리는 초원의 마라톤 완주로 인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다. 이 영화가 모든 발달장애인 가족의 삶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진실을 담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 책에도 그러한 성장은 있지만, 실패와 후퇴, 도돌이표가 공존하는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의 삶의 현실적인 이야기와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발달장애는 지적 장애와 자폐성 장애를 포함한 장애 범주다. 신체나 운동기능 측면에서 장애가 있는 지체장애의 경우 우리는 그들의 움직임을 통해 대체로 구별해낼 수 있는 반면 발당장애는 다르다. 발달장애는 그들과 소통을 하는 과정에서 난점이 발생한다.

 

“우리 아이들의 ‘이상한 점’이란 다름 아닌, 다른 문법을 갖고 태어났다는 점이거든요. 인간으로서, 생명으로서는 차별 없는 똑같은 존재이지만, 인간이 만들어가고 있는 사회의 문법은 무척 익히기 어려운 존재가 바로 발달장애인들입니다.”(18)

 

의사소통에 있어서 개별성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 발달장애인이라고 했을 때, 이들의 의사소통과 의사 결정뿐만 아니라 교육환경과 노동 등에 있어서도 개별적인 지원이나 서비스가 필요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발달장애인 가족의 고립에 관하여

 

한국에 등록된 발달장애인 숫자만 해도 약 20만 명에 이른다. 이들 중 시설에 거주하고 있는 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양육 및 돌봄 책임이 어머니에게로 집중된다. 2014년 발달장애인법이 제정되었지만, 아직 발달장애인을 위한 교육이나 직업훈련 센터가 미비할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일상을 영위하기 위한 활동보조서비스조차 제대로 제공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발달장애인의 삶을 둘러싼 힘겨움은 고스란히 가족, 그 중에서도 어머니의 몫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몇 년 동안 혼자 갇혀 살았을 때가 있었어요. 멀쩡한 아이를…… 나한테는 ‘멀쩡한’아이잖아요. 물론 소통할 때 약간의 어려움이 있기는 해도 그런 일은 비장애 아이들한테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 아이들도 자기가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할 거잖아요. 그런데 내 아이가 남들에게는 그냥 ‘아이’가 아니에요. 아이면서 아이 노릇을 못하는 거죠.”(186)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고립만이 전부는 아니다. 가족 내에서의 고립 또한 존재한다. 남편이 아이의 장애 정도나 상태에 무심한 경우도 있고, 시댁에서 아이의 장애를 감추도록 입단속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녀의 발달장애를 가장 ‘잘 아는’ 엄마의 역할은 풍선처럼 부풀려진다. 필요한 프로그램을 알아보고, 프로그램 참여를 위해 아이를 이동 지원하고,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을 알아보고, 그를 신청하는 서류작업을 하고, 자녀의 가까이에서 이런저런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모두 그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부풀려진 역할에도 엄마들의 노력은 폄하되고, 죄책감까지 뒤집어쓰게 된다.

 

“여성이 육아를 담당하는 게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아이에게 장애가 있을 경우 사람들은 대개 그 책임을 엄마에게 돌린다. 지적장애와 자폐성장애를 아우르는 발달장애의 경우에는 양육자인 엄마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특히 강하다. …(중략)… 지적장애의 경우에도 엄마가 현명하게 육아를 하고 조기에 발견했다면 장애를 막지는 못해도 조금은 나아질 수 있다는 신화가 존재하기 때문에 어머니들은 더욱 자기 비난에서 헤어 나오기 어렵다. 그렇게 여성에게 전가된 양육의 책임 앞에서 죄책감은 엄마들의 서사가 되었다.”(51-52)

 

발달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방관과 가족의 무관심 그리고 그를 유지하기 위해 이용되는 엄마의 죄책감이 맞물려, 고립의 벽은 견고해진다.

 

 

“발달장애인을 둔 엄마들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그렇다고 해서 고립된 이들의 삶을 응원하고, 치유하기 위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알 수 없음’의 세계에 뚝 떨어져, 자녀와 서로 이해하고 소통했던 이들의 경험을 우리 모두가 읽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모들조차 대부분 발달장애가 있는 자녀를 낳고서야 이 ‘알 수 없음’의 세계에 뚝 떨어진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야 그들은 발달 장애가 무엇인지, 자폐는 무엇인지 배워간다. 그리고 자녀와 소통하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일상의 막막함을 헤쳐 나간다. 부모연대 활동도 하고, 학교도 찾아가고, 울부짖으며 머리를 밀기도 한다.


발달장애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들의 생생한 경험을 함께 읽어야 한다. 그래야만 발달장애인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극복하고 이들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수 있다. 거기에서부터 발달장애에 필요한 지원은 무엇인지 그 사회적 조건에 대해 함께 머리를 맞대어 볼 수 있다.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을 더 이상 고립되지 않게 할 수 있다.




또한 현재 장애인 시설의 거주인 중 70% 이상이 발달장애인이다. 먹고 자고 티비 보는 것으로 이루어진, 모든 욕망이 거세당하는 시설의 삶 속으로 발달장애인이 밀어 넣어진 것은 우리 사회가 발달장애인과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 맺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는 방증이 된다. 발달장애인의 자립과 탈시설에 관한 지원과 제도의 미비함 또한 이와 맞물린다. 발달장애인에 관한 문제는 사회적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조건은 발달장애인을 그저 나와는 관계없는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하거나 발달장애 자녀를 둔 엄마의 책임으로 이들을 욱여넣음으로써만 지속될 수 있다. 그에 동조하지 않는다면, 혹은 ‘그들’에 대해 ‘알 수 없다’는 태도가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책을 시작점으로 삼아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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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과 사건 (6)

- '홀림'-목적론과 결정론 -

 






박준영/수유너머N 회원




Manet, 《Olympia》, 1863Manet, 《Olympia》, 1863



II. 해석과 사건의 공시적 적용 -올랭피아

1. 현상학적 접근

나는 유명한 하나의 그림을 분석함으로써 시작하고자 한다. 이 그림은 텍스트로 취급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그림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당대의 센세이션의 한 가운데 있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이것이 어떤 허구적인 것인지, 아니면 실물의 모사였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우선 그림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붙잡히는지’, 즉 개념(Begriff)으로 다가오는지에 관심을 가지고자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우리는 작품을 미적으로 감상하기보다 철학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전유(appropriation)하고자 할 뿐이기 때문이다.


우선 그림이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매우 평범한 오브제들의 고전적인 배치가 아니다. 한 사람의 여인(아마도 마네의 취미가 이 여인을 선택했을 것이고, 이것은 충분히 주관적이다)과 하녀로 보이는 흑인, 그리고 맨 왼쪽 귀퉁이에 검은 고양이. 이 각각의 오브제들은 따로 떨어진 거리에서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맨 처음 드러난다. 하녀가 여인의 하녀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게다가 고양이는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런데 이러한 무관한 대상들이 하나의 캔버스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은 어떤 효과를 생산한다. 그것은 필연성이라는 효과다. 무관함이란 그런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마네의 이 작품이 하나의 텍스트로서 여기 놓여 있으며, 다른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곧 이 그림 자체가 우리에게 증언’(attestation)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증언 속에 놓여진 이 무관한 대상들은 그것이 그러그러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우리에게 증언한다. 이렇게 우리의 시야에 애초에 붙잡힌 이 그림의 우연적인 성질은 어느 순간 필연적인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연성은 대상들의 배치 자체다. 여기에 화가의 의도가 깊이 개입하는데, 우리는 그것이 자의성과 연관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서 마네가 당대의 부르주아들에게 어떤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려고 했다는 에피소드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한 에피소드는 화가의 자의성이 작품을 생산하는 중에 대상들을 배치하면서 발생시키는 우연성에 비해 사후적이고 퇴행적인 전망에 불과하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철저한 계산 하에 대상들을 배치하는 화가라 하더라도 최초의 결정과 작품 생산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의식적인 결심들이 작품을 순간순간 형성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오브제들의 배치와 결정(결심들)의 과정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이 작품을 보면서 직관적으로 파악하게 되는 작품의 존재적인 틀 안에서, 한 편의 작품이라는 텍스춰(texture), 즉 직물을 짜 나가는 두 가지 실이다. 이것은 사실상 어떤 심원한 잠재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적인 분석을 통해 그저 드러나는 것이며, 우리의 직관이 우리 자신에게 말하는 바를 그저 받아쓰기만 하면 되는 사항이기도 하다. 즉 이 작품은 텍스트며 우리는 그것을 읽어 나간 것이다.

 

2. 홀림(séduction, bewitchment)[각주:1]

위에서 우리가 붙잡은 사실은 이 작품이 어떤 우연한 배치와 결정들에 의해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던져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즉 우리가 분석하지 않은) 존재적 틀 내에서 어떤 신체들의 덩어리로 형상화(figuration)된다. 하지만 이러한 형상화 과정이 대번에 여기 나와 있는 대상들의 본래 이름(하녀, 올랭피아, 고양이)로 불릴 수는 없다. 형상화는 우선 시각적인 최초의 인상’(impression)이며 어떤 경우 거기서 그치고 만다. 만약 우리가 어떤 강제에 의해 이 그림을 파악하려고 하지 않고 스쳐 지나간다면 모든 것은 잠재적인 것들의 층 안에 묻혀 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을 최초로 잡아 끈 저 대상들은 이제 어떤 신체적인 형상을 띠게 되고, 점점 명석판명’(clara et distincta)해진다. 하지만 그러한 명석판명함이란 결국에는 최종적인 형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보다는 이러한 상의 잡힘이란 A...A...B...C...A... C... 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것은 어떤 것이 잡히는 과정이란 선형적인 것이 아니라 비선형적이라는 것, 그것이 하나의 대상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발생적인 애매모호함이 우선한다는 분명한 사실을 드러낸다. 여기에 대상들이 차례로 자신의 신체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어떤 현상의 음각과 양각이 존재한다. 현전(présence)은 비현전 또는 은폐와 늘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애매모호성은 따라서 명석판명함 만큼의 인식적인 가치를 지닌다. 아니 오히려 저 상의 개념화가 진행되는 비선형적인 과정 자체에서 이 두 가지 양식화된 인식요소는 번갈아가며 무한하게 뒤섞인다. 따라서 오히려 명석-애매, 판명-모호가 더 근원적으로 다가온다. 즉 벗은 여인, 흑인 하녀, 고양이는 애초에 식별불가능성의 지대로부터 솟아오른 것이다. 백색의 흑인 하녀, 고양이 머리를 한 여인, 꼬리를 곤두세우는 마네 ...


하지만 우리는 어째서 저 세 가지 대상을 추적하는 것인가? 어째서 왼쪽 상단에 삐죽이 드러난 커튼 조각이나 불연속적으로 접힌 침대보의 디테일이나 심지어 고양이의 출처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가? 우리는 혹시 사로잡힌 채로 무언가를 잡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대상을 추적하는 어떤 지향(intention)이 존재한다는 전제가 없다면 이 질문은 제대로 물어지지 않는다. 나는 지향이라는 것보다 사로잡힘또는 홀림이라는 말이 이 사태를 정리하는데 더 적절하다고 느낀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그 지향을 거두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따라가고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떤 필연적인 방향성, 저기 놓여 있는 대상들이 그렇게 우리에게 현전하거나 은폐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사태다. 이것은 지향과는 다르며, 오직 어떤 정동’(affect)에 기반한 신체적인 움직임을 수반하는 것이다. 그것은 홀림이며, 특히 형상화 과정에서는 시선’(regard)의 움직임이 그것을 증언한다. 시선의 움직임은 형상화 과정과 더불어 덩어리들(bloc, mass)을 이제 하나의 신체(corp)로 주조해 낸다. 그리고 여기서 신체들은 당장에 개별화된 어떤 것, 즉 여인, 하녀, 고양이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모든 잔여적인 것들(residuum)은 시선의 폭력 아래에 배제되며, 그림의 테마를 붙잡고자 하는 열정(의미화의 열정)에 의해 단죄된다. 홀린 자로서의 우리 인식하는 감상자는 자신의 정동이 어떤 방식으로 틀잡혀 있는지 반성하기도 전에 대상이 대상으로서 정립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왼쪽에, 저것은 오른쪽에 그리고 나머지는 저 뒤편에 ... 이런 식으로. 이렇게 해서 앞서 말한 존재의 틀이 제 모습을 갖춘다.


그것은 공간’(espace)이다. 틀 잡히고 안정화된 정동은 이 그림의 외곽을 뚜렷하게 구분짓고 있는 내외부의 경계를 처음에는 느끼지 못한다. 다만 신체들이 제자리를 찾아 가면서, 그것이 하나의 화폭 안에 정돈되며, 그것이 이쪽저쪽으로 배치되는 것과 더불어 그러한 내외부의 공간성이 일구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의 발생은 애초에 붙잡는 과정과 더불어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느닷없는 이 공간의 출현은 신체들을 뭉개버리고 앞과 뒤, 오른쪽과 왼쪽을 섞어 버릴 것이며, 정동과 시선의 틀을 갑작스럽게 부수어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과정은 또한 시간’(temp)을 선형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참으로 올바르게진행된 이 과정은 어째서 다만 중심으로서의 세 신체와 주변적인 것들로서의 잔여들을 앞뒤로 그리고 전면과 배경으로 가르면서 공간을 발생시키고, 시간성을 확증하는 것일까? 어째서 일이 이렇게 밖에 진행되지 못하는 것인가? 사실상 최초의 점, 즉 시선이 탄생하던 그 점에서 모든 것이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마네의 그림을 시선 아래 잡아둠으로써 벌써운명(fatum)이 정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 운명은 감상자로서의 나의 시선의 편에도 그림의 편에도 있지 않다. 운명의 선이 그림을 따라 형성된다거나 수많은 감상자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한 나의 시선에 따라 형성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어떤 떠도는 단자(monad) 또는 운명을 결정하는 리듬이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나의 정동과 그림의 존재적 틀을 이렇게 정해 놓은 것이다. 운명에 의해 정해진 궤적, 그것은 자유도’(degré de liberté)의 분포를 헤집어 나가는 끌개(attracter). 이 끌개는 시공간의 화살이지만 끝점이 없으며, 미지의 운동량으로만 존재한다.


우리는 이 자유도의 궤적을 따라 신체로부터 시선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문턱을 발견한다. 사실상 마네의 이 그림, 올랭피아라고 이름 붙여진 바, 그 개별성은 바로 이 시선의 발견에서 열어 밝혀진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이름 붙여진 그것, 그것과 나의 시선이 형성하는 그 무한히 분할되는 깊이(공간, spatium) 안에서 직감했고’, 직감할 것이었. 도대체 이 깊이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본다. 무엇을 사유하는가? 아무것도 사유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사유한다. 개별성으로서의 이 그림과, 액자 안에 배치된 신체들. 하지만 그 시야(전망, vue)와 배치는 어떤 발생적이고 동역학적인 상태공간(espace d'état) 안에 먼저 자리 잡는다는 것을 느낀다. 이 공간은 사실상 식별불가능한 지점에서 솟아오르는 것들이며 시간과 분간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이 분간된다면 이미 식별가능한 지점으로 진입하여 개별화된 것이다. 즉 문턱을 넘은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우리는 어떤 문턱을 지나온 것일까? 여기서 아주 중요한 하나의 질문이 등장한다. 나의 정동은 언제 어디에서 지성(intelligence)이 되는가? 이것은 일종의 정동의 지성-되기가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어떤 주체성(subjectivit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이것은 어떤 무의미한 것에서 의미가 있는 것으로, 즉 무분별한 amypilon 또는 nopilamy 이라고 하든, erehwon이라고 하든 그 어떤 것에서부터 올랭피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동은 완연한 주체로서의 어떤 것으로 애초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그에 따라 지성되기조차 지성적인 주체를 보증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되기라는 것은 어떤 문턱을 통과하면서 이쪽도 저쪽도 아닌 전혀 다른 것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하나의 사건, 즉 그 어느 것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사건이 존재한다. 그래서 사건의 다른 이름은 다른 것-되기. 하지만 표명되다시피 이미 다른 것은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개별성으로 응고된 사실일 뿐이다. 올랭피아의 경우는 어떠한가? 실재로 우리가 이 그림을 이것’(thisness)라고 느끼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개별화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곧장 우리와는 다른 것대상이라고 설명된다. 하지만 이것이라고 느낀다는 것, 이 봉인된 사건은 대상과는 다르다. 그래서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설명되고, 설명되고 ... 설명되는 것이다. 무한한 해석이 발생한다. 좀 전에 우리는 시선에 대해 말했다. 해석은 사실 이 시선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시선이 그림 안의 여인의 시선, 하녀의 시선, 고양이의 시선에 고정될 때, 이 신체들은 마침내 살(chair)이 되고, 유기적인 배치가 거기서 이루어진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치면서 만들어내는 사건의 영역은 이상한 표지들의 떠돎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표지들은 어떤 배치’(agencement)를 구성한다. 그런데 이 배치의 과정은 형상화 이전의 배치와는 다르다. 형상화와 식별가능성의 영역에서 배치는 유기적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면 끌개는 개별화를 완성하고, 시간과 공간은 더 이상 미분화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선은 신체를 살로 공고화하고,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제대로 자리 잡는 것을 도우며, 그렇게 해서 반성적 의식 아래에 완연한 해석 대상으로 출현하는 것이다.


이제 선형적인 방식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그림 안에서 다른 시선을 생각할 여지 따위는 없을 것이다. 또한 여인의 눈에서 시작하든, 하녀의 눈에서 시작하든 상관없다. 시선을 가지고 이리저리 변증론을 펼치는 것은 이제 지성의 영역이 되므로,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이제 해석들 간의 갈등이며, 거기서 어떤 패러다임을 선택하는가가 된다. 그러나 다시 그림을 보자. 어떤 것이 이 그림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충실한 것인가? 충실성(fidelity)은 이 그림의 어디에서 현전하는가? 우리가 어떤 사실을 해석할 때 인정해야 하는 것은 전통이다. 어떤 해석이든 전통에 대한 선이해 없이는 불충분하다. 그래서 해석이 반전통에 기대고 있다고 주장될 때조차 그것은 전통에 반하는 것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이 그림이 어떤 센세이션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를 사태라고 해도 상관 없다)이다. 하지만 그 사실이 발생한 것은 이 그림 안에 사건의 흔적이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전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지금도 우리는 어떤 홀림의 방향 아래에서 이 그림의 신체들이 살이 되는 과정 중 하나의 고정점이 되는 저들의 시선을 좇아가는데 익숙하다. 그러면서 경악하며, 그 경악을 해석해 낸다. 당대의 부르주아들이 이 신체를 매춘부라고 명명하고, 지금의 우리가 이 여자를 천사라고 명명할 수도 있다는 것은 그 시선을 해석해 내는 어떤 상대주의적이고 역사적 운동이 우리와 저들 부르주아 그리고 우리와 그림, 부르주아와 그림이 형성하는 깊이 안에서 길항하기 때문이다.[각주:2] 그래서 이 깊이 안에서 저 고정점은 늘 유동한다. 어떤 경우에는 시선은 누운 여인 쪽에서 적분되고, 어떤 때에는 하녀, 어떤 때에는 고양이 쪽에서 그렇게 된다. 이 모든 해석은 그러나 무한하게 분할되어서 미분화된 지점에까지 이를 수는 있지만, 즉 그것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언제까지, 어디까지나 그것이 적분되어 나가리라는 상상을 할 수는 없다. 그러한 인식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즉 해석에는 언제나 지평이 존재한다. 그 지평은 인간의 유한성, 죽음에 이르러 마침내 폐쇄될 것이다. ‘죽음은 완전히 이질적인 것으로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 순간순간이 죽음의 과정이라는 말은 그러한 죽음의 전능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전능함은 그림 안에서 시선으로 응고되기 전의 모든 생성하는 운동들에 편재한다. 사실상 개별성으로서의 이 그림, 그리고 그림 안의 대상들은 이 죽음의 전능성을 거슬러 스스로를 완성하며, 우리의 시선조차 앞으로 힘겹게 나갈 때 그러한 죽음을 항상 곁에 둔다. 바로 이 맥락에서 이 텍스트, 올랭피아는 비로소 예술이며, 하나의 유일한 작품이 된다.


반면 우리의 시선(혹은 그것이 해석이라고 하자)이 멈추고 눈동자가 풀어지면 곧 죽음이 도래한다. 이 이완된 상태는 바로 사실로 응고되기 전, 그리고 응고되고 나서, 배제되는 저 화폭의 나머지들(residuum)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더 이상 감응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을 감응하기 위해서는 다시 수동적인 상태로 돌아가야 하며, 그것은 애써 넘어온 문턱을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선을 그렇게 가져가지 않으며, 나아가 삶을 그런 식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 그것은 몰락과 파멸을 의미한다. 순전한 데카탕티즘조차 표면적인 몰락과 파멸 안에 견고한 시선의 패턴들을 포함한다. 그래서 우리는 시선을 고정시키고, 잔여를 배제하며, 늘 이해하고 해석하고 반복한다. 이 과정은 어디에나 있다.

 

3. 기계론, 결정론, 목적론의 문제

이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과연 이와 같은 패턴은 정당한가’? 나는 이 패턴에 대해 현상이라는 명명을 했고, 또한 그것에 홀림이라는 개념을 부여했다. 과연 이것은 어떻게 정당화될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패턴은 해석과 사건 안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


어떤 현상에 대한 파악(apprehension)이란, 우선 주객이분 이전의 감응(촉발, 정동)을 통해 시작되지만, 그것이 어떤 근원으로부터 발생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촉발을 통해 생겨나는 전체 구도 안에는 잡다한 현상들이 무분별하게 흩어져 있는데, 그것이 경로를 정하게 되면, 어떤 신체와 감각으로 뭉쳐지고, 어느 순간 지성의 영역에 진입함으로써 비로소, 대상화되어 우리 앞에 명석판명하게 지각되는 것이다. 이 파악의 과정은 사실상 직관의 순간을 펼쳐낸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과정이 지성이 이해할 수 있는 인과적 과정으로 자리매겨질 때조차 그것이 인과성의 외부에 존재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지성이란 대상에 대한이해며, 그래서 직관이 최초에 포착해 낸 감응의 질서를 주체화 한다. 즉 주체의 시선 아래로(sub) 던져 놓는다(ject).


그래서 이 주체의 시선은 이전의 직관의 질서에서 드러난 인상들에 중심점을 설정하고, 그로써 인상들을 재정돈하며, 좌표화한다. 직관에 존재하지 않는 인과적 질서를 인상들에 강요함으로써 하나의 체계가 등장하는데, 그것이 고전역학의 결정론(détermisnisme)이다. 17세기에 결정론은 라플라스(P. Laplace)와 뉴턴(I. Newton) 천체역학 그리고 베르나르(C. Bernard)의 생리학에서 절정에 이른다.[각주:3]


바슐라르(G. Bachelard)에 따르면 이런 모든 것은 철학적 결정론에 속한다.[각주:4] 이 관점은 전체성이라는 관념 안에 세계를 재단하는 것으로 일련의 검증되지 않은 일반 원리에 구속되어 있다.[각주:5] 이런 일반원리들은 모두 철학이 상정하는 존재 영역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슐라르가 보기에 공간관념에 사로잡힌 것이다. 즉 모든 존재자를 공간으로 환원함으로써 그 범주 외에 있는 존재자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간적 묘사에 제한된 보편적 결정론은 비록 단순한 관념론적 가정은 아닐지라도 현상들의 실제적인 연관성을 충분히 그려내지 못한다. 이것은 사실 라플라스의 결정론을 초기저작에서만큼은 공유했던 칸트에 대해서는 전면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칸트(I. Kant)의 경우에 인과성은 특히 시간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는 것인데, 선험적인 인식능력의 도식작용을 의미한다.[각주:6] 즉 이것은 단순히 범주라고 하기보다는 경험적 직관의 형식인 시간을 포함하는 것이다. 칸트는 시간 안에서의 선후관계와 인과성을 구분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시간이 단순한 지각의 순서라면, 인과는 현상 일반의 운동(변화)의 순서에 해당되는 것이다.[각주:7] 따라서 바슐라르가 라플라스 류의 철학적 결정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히려, 당대의 미숙한 과학의 결정론이라고 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미숙한과학적 결정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바슐라르 자신의 이후 언급들에서도 드러난다. 여기서 그는 철학적 결정론이 아니라, ‘기하학적 결정론에 대해서 말하는 바, 그것은 곧 데카르트의 기계적 결정론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것은 동력학적 결정론에 의해 가능하다고 한다. 이때 동력학적 결정론은 바로 바슐라르가 비판의 근거로 삼는 양자역학의 체계라 할 수 있다.[각주:8] 하지만 이 양자역학의 동력학계는 반드시 데카르트의 기계적 결정론, 즉 고전역학의 결정론을 포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반과학 원리로서의 대응원리를 충족시킬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이제부터 문제는 라플라스류의 기하학적, 기계적 결정론이 설명할 수 있는 거시수준과, 양자역학이 다루는 미시수준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가 될 것이다. 사실상 고전역학의 체계에서 결정론은 기계론 자체에 내재하는 모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기계론이 원인에 대한 결정론적인 해석을 끝내 성취하기 못한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 고전적인 결정론은 무한퇴행의 인과사슬에 꼼짝없이 붙들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칸트가 초월적 변증론에서 말한 이율배반의 한 항목을 형성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므로 새로운 결정론은 이 무한퇴행을 해결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앞서 바슐라르가 언급한 그러한 것이다. 즉 결정론에서 무한’(apeiron)의 형상을 제거하는 길이 있는 것이다. 무한은 퇴행을 자초하는 사유구도다. 원인의 사슬은 그런 형이상학적 상상력으로부터 실험과 증거로 돌아와야한다.[각주:9] 그리고 무한은 이제 불확정성이라는 엄밀한 수학적, 실험적 불가능성으로 대체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고전역학의 결정론을 하나의 제한된 결정론으로 상정할 수 있게 되며, 양자역학적인 위상적 결정론과 더불어 관찰하거나, 수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이렇게 해서 동력학계는 하나의 선형적(lineary)인 특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선형성의 유지는 고전역학의 결정론과 위상적 결정론을 기술적으로 확정하는 어떤 실험적 작업에 의해 가능해진다. 실제로 이를 담당하는 기술자나 실험가에게는 관측 가능한 요소들을 통해 불확정성을 체계화하는 것이 문제일 뿐, ‘모든 것은 무한하다따위의 형이상학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의 전문 기술의 목표인 잘 정의된 결정론의 구조를 에워싸고 있는 무제한적인 결정론의 안개를 거두어내면서 점점더 잘 그의 작업을 실현시켜야 한다. 만일 그가 모든 것은 모든 것 속에 있다’, ‘모든 것은 모든 것에 대하여 작용한다라는 말을 믿는다면 도구의식을 포기하는 것이며 그의 기술적 확신의 토대 자체를 잃는 것이다”(Bachelard 1998, 294-95)


이렇게 되었을 때, 우리는 바슐라르의 결정론을 우회하여 다시 칸트로 돌아오게 된다. 왜냐하면 바슐라르에 따르면 이제 결정론에 서명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기 때문이다. 즉 실험가, 또는 그 실험가의 신체의 일부인 실험도구가 결정론적 현상들에 마지막 서명을 하게 된다. 그것은 의지의 자유이며, 인간적 요인이라는 측면에서 칸트가 자유에 의한 인과성이라고 지칭한 그것, 즉 행위와 책임의 원인(규범적 인과성)이라고 말한 그것으로 수렴하기 때문이다.[각주:10] 그러나 이 주체는 일종의 소박한 차원에서 선험적이다. 즉 이 주체는 어떤 고정된 주체을 향유하기보다 실험과 조작의 과정에서 배우는주체라고 할 수 있다. 과정 속에 있는 주체는, 그래서 지식을 소유한 절대적 힘을 소유하기 보다, “지식을 넘어 이해하는 힘을 가진다(Bachelard 1998, 296). 그리고 현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원인으로 작용하는 나의 자아, 내가 아는 현상의 인과 관계를 이해하고자 하지 않는 모든 다른 주체와 토론하는 나의 자아, 그런 자아의 일종의 가능성에 현상을 종속시키는 것이다”(Ibid.) 이렇게 원인의 계기 중 하나를 형성하는 국지화된 자아는 이해의 과정에서 전능한 힘을 발휘한다기보다, 이 이해의 과정에서 능동적으로 작용하면서, 실험의 결과에 어떤 불확정성을 분배하고, 그 가운데에서 미숙한 과학적 결정론을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체는 개별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임의적이다(Ibid., 298). 그렇다 하더라도 이 주체는 자신의 보편성의 확실함을 분명하게 아는 합리적 주체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주체는 과학자 사회의 주체로 판명난다(Ibid.). 인과관계에 선형적 인과관계를 가져다주는 주체는 이렇게 합리성을 견지하면서도, 자신의 국지성을 자각하고, 그 인과계열에 내재적으로 자신을 위치지우는 과학자라는 집단적 주체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바슐라르에게서 결정론은 이해된 결정론이이며, 딱 거기까지의 결정론, 즉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유한한 이해능력 안에서, 불확정성을 증언하는 그런 결정론인 것이다. 라플라스의 근대적 결정론, 전체적 결정론은 이 지점에서 인간적 결정론에 의해 수정되고 이 안에 포괄된다.


과학자 집단의 구성원으로 이 주체의 개입은 고전적 방식의 인과율이 미시적 수준에서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A에서 B로의 인과계열의 연속성은 A의 초기조건이 알려졌을 때, 완전히 예견될 수 있지만, 미시수준에서 a에서 b로의 인과계열은 Δt의 간격 안에서 불연속적인 것이다. 이 불연속성은 사실 인간의 운명과 같다. 그것은 일종의 플라톤적인 설득되지 않는 chora로 보인다.


다시 문제로 돌아오자. 우리가 저 작품을 통해 발견한 일정한 지각의 패턴들은 바슐라르의 결정론 비판에 따르면, 임의성이라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어떤 지각 기호들(또는 표식이라고 하자)은 잡다한 현상으로 우리에게 임재하지만, 그것을 질서지우는 작용은 다만 주체또는 집단적 주체의 결정사항에 많은 부분 달려 있게 된다. 그렇다면 주체의 객관성을 어떻게 담보되는가? 아니면 이러한 주관과 객관의 이분 이전에 존재하는 어떤 무한성을 우리는 포기해야만 하는가? 바슐라르는 그러한 무한성을 불확정성으로 대체하고, 그것을 실험과 경험의 준칙 안에 포섭해야 함을 강조한다. 하지만 여기에 어떤 정당하지 못한 전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바슐라르의 입론은 바로 물리적인 실재에 국한된 사안이 아닌가? 제한된 결정론의 범역은 생물들, 인간이라는 유기체들에게도 곧장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사실 이 방면에서 화이트헤드(N. Whitehead)의 결정론 비판은 새로운 방향을 열어 보인다.[각주:11]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는 결정론을 유물론과 극단적 기계론이라는 견지에서 파악하면서 목적론적인 구도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에게 극단적 기계론이란 분자의 상태들, 운동들을 사물과 인간, 유기체 전체에 적용하는 관점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완화된 기계론조차 일종의 타협일 뿐이다. 이러한 기계론은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간격이 지나치게 모호하고 미심쩍은 것이며, 어딘가 본질적인 이원론을 내포하고 있는 듯하다(Whitehead 1989, 125). 이러한 모든 학설들은 화이트헤드의 관점에서 유물론이며, 이것은 오직 지극히 추상적인 존재들, 즉 논리적인 식별을 통해 얻어지는 것들에만 적용될 수 있다”(Ibid.) 그에게 구체적인 것은 유기체이며, 이들은 전체 계획에 의해 종속된다.


나는 화이트헤드의 이러한 사유구도와 바슐라르의 그것이 단순히 물리주의와 유기체주의의 대립이라는 식으로 논평하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 이 둘의 대조되는 지점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우선 화이트헤드의 경우, 그가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기계론에서 분자단위의 메카니즘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분자적 단위의 역학적 층위는 그대로 유기체적인 전체 계획에 종속되는 것이다. 또한 바슐라르의 결정론에서 불확정성은 거기에 어떤 주체적인 의도가 개입한다는 측면에서 동역학적 체계의 공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의 사유구도는 어디에선가 분명히 조우할 것이다. 그러한 조우를 가늠할 수 있는 하이트헤드의 언급은 다음과 같다.

 

동물의 경우, 그 정신상태는 그 유기체 전체의 계획 속에 들어가며, 그리하여 종속적 유기체들의 계획을 변경시켜 가는데, 이러한 변경은 순차적으로 하위의 유기체로 계속 이어지면서 궁극적으로는 전자(電子)와 같은 극미한 유기체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생명체 내부에 들어 있는 전자는 신체가 갖는 계획 때문에 생명체 외부에 있는 전자와 다르다. 전자는 신체의 내외를 가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달린다. 그러나 신체 속에서는 그 속에서 그것이 갖게 되는 특성에 따라 달린다. 즉 신체의 일반적 계획에 따라 달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계획 속에 정신상태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존재 방식 변경의 원리는 자연 전체에 걸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며, 생명체만이 갖는 특성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이 학설은 전통적인 과학적 유물론을 버리고 유기체설을 그 대안으로 내세우는 일[이다.](Ibid., 125-26)


여기서 화이트헤드는 전자적인 단위에서부터 정신상태에 이르기까지 유기체적 계획이 주도하는 우주론적 설계를 가정하고 있다. 이 계획은 우선 요소적 측면에서 물리적인 실체로서의 분자들(전자들)을 수용하지만 그것의 운동과 같은 존재방식은 이들의 메커니즘에 달려 있지 않다고 본다. 거기에는 존재방식 변경의 원리라는 일반적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화이트헤드는 유기체적 메커니즘이라고 부른다(Ibid., 126).

 

나의 이 이론에 따르자면, 분자는 일반 법칙에 따라 맹목적으로 달릴 수 있으나, 각 분자들은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라는 유기체 전체의 계획에 따라 그 내재적 성격을 달리한다(Ibid.).

 

사실상 이 장엄한 계획은 일반법칙을 포괄하는 섭리의 우주론적 설계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종교적 경지를 논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가 결정론을 바라보는 방식이 바슐라르의 그것과 사뭇 다르면서도, 어느 지점에서 만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바슐라르의 경우 제한된 결정론의 범역을 설정하고, 무한성의 지대에 불확실성을 도입함으로써 내재성의 평면에 카오스를 도입하지만, 화이트헤드는 유기체적 질서라는 전일적인 기획을 자연에 부과함으로써 내재성의 평면에 초월적 질서를 도입한다. 그러나 이 둘은 모두 공히 현대과학이 발굴하고, 탐사한 사물의 분자적 층위를 기반으로 논지를 전개한다. 다른 점은 바슐라르가 물리학적 실체로서의 양자를 통해 자연의 내재적 평면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면(bottom-up), 화이트헤드는 생물학적 실체로서의 유기체를 통해 자연의 내재적 평면으로 내려 온다(top-down)는 것이다. 결국 이 둘은 어떤 류의 자연주의에서 만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대과학철학의 관점에서 나의 저 기초적인 해석(올랭피아)은 어떤 유기체적 질서의 계획과 양자적 법칙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결론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의 내적인 구성은 이미 철학사 안에서 물어져 왔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위의 절에서 논의된 올랭피아에 대한 접근은 현상학적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으며, 그것은 철학사적인 의미에서의 현상학외에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요컨대 이 접근 전체는 패턴의 구성잔여의 배제라는 이항(二項)의 길항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전자에 대해서는 어떤 특별한 정당성을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 측면에서 나의 기술(description)은 현상학의 가장 기본적인 가정을 거스르지 않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한 기술의 과정을 넘어서는 전제. , 기계론과 결정론, 목적론이 그것이다. 기술의 과정에서 전제되는 이 항목들은 올랭피아를 잠재적 층위에서 현행적 층위에까지 기술하면서 암묵적으로 가정된 것이다. 나는 이 단적인 현상작품으로 인식하기 위해 동시적인 단계들, 다시 말해 그 단계들이 존재하지만 각각의 단계들이 서로를 침투하고, 앞으로 뒤로 관여하는 상황들을 그려낸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은 이미 사용한 개념들을 통해 드러난다. 나는 어떤 무전제의 분석을 행한 것이 아니다. 개념들이란 일차적으로 전통의 집적체이기 때문이다.


이 전제들에 대한 질문은 우선 그것이 경험적이고 자연주의적이라는 함축으로 인해 난해함을 노정한다. 여기서 경험적이란 우리가 저 현상을 작품으로 인식해 가는 과정이 전혀 초재적이며 선험적인 것에 의해 좌우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것이 초재적이지도 선험적이지도 않다면, 과연 전제라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그것이 자연주의적이라는 성격을 가지는 것은 여기서 일정한 물리학적인 개념을 전용했다는 것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성격은 전체 분석의 진행이 인간주의적 중심점, 즉 주체성의 관점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대상과의 조우를 마치 주체 없는 과정처럼 그려냈다는 데 놓여 있다. 자연주의란 그런 주객 이분법의 상항(上項)으로 기능하는 어떤 이념(Idea)를 의미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나는 이러한 난해함이 경험과 자연이 그 자체로 무한성’(Infinitum)을 향유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러한 무한성 안에서 정신은 자신의 특기추상화를 행하며, 그 가운데 대부분은 유실된 실재를 기반으로 자신의 공고한 로고스를 담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논하자면, 우리의 추론적 정신(dianoia)은 이러한 경험과 자연의 세계를 어떤 결정적 인과성으로 포착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과연 가치 있는지 아닌지를 결정할 능력까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각주:12] 이러한 사실은 과학의 영역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과학은 그러한 가치결정력을 가져야 하는지, 또는 가지는 것이 타당한지 등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은 과학의 내부에 있으면서 외부를 형성하는 과학의 철학만이 해낼 수 있다. 한 가지 더해서 과학의 철학, 과학철학은 과학의 실질적 기반에 대해 반성한다. 무한성에 직면하여 그것을 과학적 법칙과 이론이 마땅히 고려해야할 어떤 것으로 상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서 행한 현상학적 기술과 과학철학에 대한 논의는 그것의 해석적, 사건적 특성의 설명을 이 과학과 그것의 철학에 의뢰해야 할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다.[각주:13]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우선 문제는 저 패턴들이 어떤 기계론적인 함축을 가지는 것이 아니냐는 점이다. 이것은 원인’(cause)이유’(raison)에 대한 논의를 기반으로 한다. 다시 말해 현상학적 기술, 저 순전한 기술적 성격이 어떤 기계론적, 결정론적 이유나 원인을 가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여기서 해묵은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론에 대한 타당성 논쟁으로 돌아가고자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한 인간의 철학적 천재성이 발현된 특이한 경우다. 도대체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 어떤 과학적 전개가 역사 안에 도래한 것이기에 그는 4가지 관건적인 원인(hê aitia)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충분히 대답되어질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이 4원인의 상호간의 관련성과 그것이 그의 형이상학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설명만을 해낼 수 있을 뿐이다.[각주:14]


4원인은 우선 다음의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1. ‘사물은 무엇으로(en quoi) 되어 있는가?’-질료인. 2. ‘이것(사물)은 무엇인가?’-형상인. 3. ‘누가 만들었는가?’-작용인(운동인). 4. ‘무엇 때문에 만들었는가?’-목적인. 하지만 이러한 4 가지 원인들은 따로 분립되어 있지 않다. 특히 이것은 일방에서는 일체성을 노정하는데, 특히 인간의 기술적 행위와는 다른 자연적인 과정에서 이러한 일체성을 볼 수 있다. 형상인과 목적인 운동인이 자연적 과정, 특히 종적인 생식 과정에서는 하나로 일치되는 반면, 기술적 행위에 있어서는 형상인은 인간의 욕구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작용인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신경생리적, 근육의 작용인 경우가 대부분으로서, 외재적인 원인이 된다. 전자의 경우 일체화된 원인은 으로 환원된다고 본다. 그래서 4원인이 구별되는 것은 인간의 제작적, 기술적 설명에서이며, 자연적인 생성에서는 단지 형상인과 질료인만이 남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이자(二者) 구분도 절대적이라고 볼 수 없다. 이러한 구분불가능성도 기술적 과정보다는 자연적 과정에서 더 두드러진다. 왜냐하면 기술적 과정에서 하나의 침대를 만들기 위한 재료는 목재이며, 그것의 형상은 장인의 개념으로서 초기에는 분리되어 간주될 수 있지만, 자연적인 나무는 그 질료인으로서의 목질과 그 목질을 나무이게끔 하는 나무성은 애초부터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애초의 4원인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게 이루어지다가, 그것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일체성을 이루는 단계에서 현실성잠재성이 다시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진정한 원인의 항목은 4개가 아니라 6개라고 선언된다. 형이상학의 해당부분을 재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013b16-1014a18).

 

원인은 네 가지 방식으로 나뉜다. 구성부분 기체 출처 목적이자 좋은 것. 그런데 원인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지만, 동종적인 것들 사이에서도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앞서거나 뒤선다. 또한 부수적 원인과 그런 것들의 유들이 있다. 부수적인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다른 것들보다 더 멀거나 가깝다. 능력이 있는 것(ὡς δυνάμενα)이라는 뜻에서, 어떤 것들은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것(ὡς νεργοντα)이라는 뜻에서 원인이라고 불린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은 수가 여섯이며, 각각 두 가지 방식으로 말해진다. 왜냐하면 (A) 개별자와 유, 부수적인 것과 그것의 유, 연결된 상태로 말해지는 것들과 단순하게 말해지는 것들이 있으며, (B) 이것들은 모두 현실적인 것과 가능적인 것으로 나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둘은 다음과 같은 점에 차이가 있다. , 현실적인 것들과 개별적인 것들은 그것들을 원인들로 삼는 것들과 동시에 있거나 있지 않다.

 

여기서 잠재적인 것(능력이 있는 것)과 현실적인 것이 구분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러저러한 원인들이 개별자든, 부수적인 것이든 간에 끊임없는 변형의 과정 안에 있다는 것에 있다. 이 변형의 과정이란 4원인이 일체화되거나, 분리되면서, 유기적 전체를 이루거나 분해되어 사멸하는 그 변화’(metabole)의 과정이고,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잠재태현실태의 범주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잠재태는 물론 질료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의 본성은 형상 혹은 현실태를 만나서 복합체로서의 개별적 실체로 변형되는 데에 있다. 그래서 원인에 대한 탐구는 단순하게 4원인을 밝히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각각의 개별적 실체들의 잠재태와 현실태를 따져보는 새로운 과제를 던져 준다. 그러나 우리가 앞서 확인한 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과제를 자신의 연구과제로 적극적으로 안고 가지 않는다. 다만 그는 자연학에서 이미 현실화된 사태들을 분류하고, 위계화하는 데 몰두했다.


이러한 사유의 사태는 근대에 이르러 별 변화 없이 이어졌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근대의 기계론적 사유를 예비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각주:15] 그는 자신의 체계 내에 진정한 존재론의 근원을 내장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자신의 본류로 설립하지 않고 방치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중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측면은 그 전승의 간접적 특성이나, 여러 왜곡된 번역에도 불구하고, 다시 소생할 수도 있었다.[각주:16]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이단의 함축을 가진 사상으로 매도되기 일쑤였는데, 아무리 혁신적인 사유를 펼친 수사(修士)라 하더라도 그 시대적 한계를 제대로돌파하기는 힘겨웠던 것이다. 이 무지막지한 비과학적 태도는 이후 스피노자를 죽음의 위협으로 몰고 간 시대 분위기로 이어졌다.


근대는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철학을 이어 받는다. 형상철학이 가지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구도가 그대로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다만 여기에는 수학적 방법론으로의 일원화’(방법론적 일원론)가 그런 구도를 희석시켜 마치 중세의 사변이 일소된 것처럼 여겨졌던 것 뿐이다. 데카르트는 그런 면에서 중세와의 단절을 의식적으로 추구한 인물이 아니다. 데카르트에게서 세계를 설명하는 수학적 방법은 법칙의 지위에까지 승격되었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인이 가진 사유 구도를 물려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제 더 이상 신의 섭리와는 아무런 관련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는데, ‘신앙고백은 그러한 무관함에 어떤 면죄부를 부여했다. 그래서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것은 그의 섭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들의 질서를 이해하는 능력일 뿐인 것이다.[각주:17] 이 질서를 이해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철학과 과학에 남겨진 과제인 반면, 나머지는 신학의 영광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목적인으로 접근하는 것이 제한당하며, 오로지 라는 형상에 따라, 사물들의 작용인(운동)을 파악하는 데 그치게 된다. 기하학은 이렇게 해서 세계라는 기계에 적합한 형상이 되며, 17세기의 자동기계의 발명에 고무 받아 기계를 그리스의 ‘Deus ex machina’ 식의 우발적인 개입자가 아니라 항존하는 세계의 본질로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세계 이해의 지평은 17세기 말에 와서 이미 난점에 봉착하는데, 그것은 힘과 에너지라는 질료적인 형상을 발견하고서 부터다. 이것은 기계가 아니라, 차라리 그것을 움직이는 작용인의 발생과 관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 질료적 형상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이유는 힘과 에너지가 그것의 물리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감각적 실체라기보다는 추론적 실체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실체는 예컨대 데카르트가 가정한 기계로서의 우주보다 더 큰 설명력을 부여한다. 그래서 원격적인 힘으로서의 중력은 데카르트의 개체적인 기계조각들(톱니바퀴들)보다 이론적으로 정합적이며, 단순하다.


이 단순성이 여전히 기계적 인과성으로 이해된다면, 우리는 결정론 자체의 인과성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 게다가 확률적인 비결정성을 반드시 다루어야 하는 미시세계(양자장)에서 이런 결정론은 그 자체의 근거를 찾지 못하고 만다. 하지만 이 근거는 물어질 수밖에 없다. 라이프니츠의 그 충분한 이유는 그래서 그가 언급한 대로 형이상학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각주:18] 만일 우리가 라이프니츠의 그 충족이유율에 따른 신존재증명이라는 노선을 자연주의적인 방향으로 파악한다면, 여기에 어떤 목적론이 반드시 개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자연은 가장 짧은 길을 통해 작용한다라는 원리를 주장한 것은 자연이 자신의 법칙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모든 가능한 해결 방식 중에서 가장 큰 확률을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Gourinat 1969, 104). 이것은 이제 필연성의 원리가 아니라 적합성의 원리라고 불리운다.

 

그런데 우리가 작용인 또는 물질을 고찰함에 있어 우리 시대에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나 자신에 의해 발견된 이 운동 법칙들만을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내가 알기로는 이를 위해서 우리는 오히려 목적인에 도움을 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법칙들은 논리학적 진리, 대수학적 진리 그리고 기하학적 진리들처럼 필연성의 원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적합성의 원리, 즉 지혜를 통한 선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라이프니츠 2010, 240).

 

이 구절 바로 뒤에 라이프니츠는 이것이 (...) 가장 명백한 신 존재 증명들 중의 하나이다라고 마무리한다. 하지만 내 경우에 이 구절은 단지 화이트헤드가 언급한 유기체의 전체적 계획이라고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계획이란 바로 자연이 가진 적합성의 원리, 즉 자연의 지혜이며, 그것은 최소 작용의 원리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양자역학의 간섭실험은 이 최소작용의 원리가 어떻게 작동하며, 어째서 자연에 목적론이 필요해 지는지에 대해 사유할 거리를 던져 준다. 이 실험에서 광자가 장막의 두 구멍 중 어느 쪽으로 어떤 확률에 따라 통과할 것인지는 오직 잠재적으로 결정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일단 광자의 운동이 진행된다면 그것은 최소작용의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고 볼 수 있다. 이 원리를 적용하는 것은 최후의 상태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또 우리가 이 최후의 상태를 똑같이 확정된 최초의 상태에서 출발하여 도달할 수 있게 하는 변화의 법칙을 규정한다”(Gourinat 1969, 105) 이것은 단적으로 목적인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유구도는 물리적인 대상들에 대한 의인적인 파악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위에서 보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렇게 목적인과 형상인이 함께 작용하는 것은 인간이 기술적 체험들에서 더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물리적 자연의 법칙이 어떤 거대한 우발성에 의해 침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매우 불성실한 관점이지 않을까? 여기에는 어떤 사유의 무능력을 포장하는 철학적인 사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이러한 관점을 피하고 자연에 자연다운 목적론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면, 그것은 결코 의인론적이지 않은 결정론 또는 목적론일 것이다.


우리는 아주 먼 우회로를 통해서 결정론과 목적론이 하나의 질서 안에 존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기계론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계론이야말로 자연에도 인간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이비 문제의식이기 때문이다. 기계론은 잘못 제기된 질문, 자연은 기계처럼 작동하는가?’라는 질문에, 어리석게도 라고 답하는 것이다.


애초에 우리가 시작했던 분석으로 돌아와 생각하자면, 실제로 우리는 촉발과 지각의 과정이 어떤 목적론적인 과정 하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닌가라고 의문을 품어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결정론을 형성하는 것이고, 사실상 우리의 인식의 방향도 그렇게 지정되어 상식이라는 것을 형성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물을 수도 있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해 지금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보다 복잡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우리가 목적론과 결정론, 기계론에 대한 철학사적인 고찰을 진행해 왔다 하더라도, 그것이 지금 우리의 사유의 처지를 다 설명하고, 해석해낼 수 있는 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그때와는 다른 상황에 놓여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현상에 대한 해석은 그 틀을 넘쳐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선은 잠정적으로 지금까지 해 온 논의들을 종합하고, 다음 단계로 진행해야 한다.

 

결정론과 목적론이 하나의 질서 안에 존재한다는 점은 해석과 사건의 존재론 안에서 어떻게 파악될 수 있는 것인가? 우선적으로 우리가 올랭피아에 대한 공시적, 현상학적 접근을 통해 어떤 흔적이나 표지를 발견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해석의 기반을 획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반은 직접적으로 어떤 음성적 사태를 지정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지각촉발이라는 보다 넓은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다(흔적의 확장). 이 과정의 제일 기반은 물론 우리의 지각과 저 작품이 공통적으로 향유하는 분자적이며 요소적인 사태들(bottom-up)일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여기에 어떤 전체성으로서의 목적론적인 계획(top-down)이 개입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자연이라는 일의적인 로고스 안에서 서출적 추론과 정식의 추론이 양면을 이루면서 저 대상을 작품으로 형성한다. 여기서 표지는 직접적으로 서출적 추론의 강제적이며, 폭력적인 성격에서 시작되지만, 그것이 어떤 완연한 해석의 대상이 되어가면서 정식의 추론이 전면에 나서며, 그리고 나머지는 잔여적인 것으로 후면으로 물러난다. 이런저런 무수한 흔적들은 이때 선별된 표지와 배제된 표지로 나눠지면서, 해석주체를 안정적으로 구성하는 바, 선별된 표지들은 이제 지성이라는 한정성과 규정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해와 설명 그리고 파악이 이루어지며, 재전유가 가능해진다. 그런데 어떤 역방향의 되먹임이 일어난다. 즉 이렇게 파악된 표지들은 배제된 표지들이 다시 흔적으로 떠오르는 것을 완전히 차단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현행화되지 않은 잠재적인 힘들을 소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들이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들이 된다. 해석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이 힘들은 현행화되어 해석의 내용을 이루는 그 선별된(선발된) 이념들보다 더 근원적인 힘을 발휘한다. 말하자면 잠재적인 사태가 현행화되는 사태를 떠받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애초의 선별이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게 된다. 여기에 바로 목적론적인 구도가 다시 개입한다. 선별은 이렇게 배제되는 표지들의 힘들, 잠재적인 힘들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방식, 최단거리를 가기 위해 ‘()장거리의 궤적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진다는 거기에 있는 것이다. 역방향의 되먹임은 그래서 해석주체의 실체적 기반을 늘 불안하게 하고, 잔여적인 것에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이제 다시 흔적이 출현하며 앞서의 과정들이 새롭게 반복되면서 순환이 이루어진다.


앞 절 마지막에서 했던 질문을 반복해보자. 그렇다면 표지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다시 말해 가장 근원적인 표지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바로 잔여적인 흔적들에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앞서 이미 관련되어 있음이라는 존재적인 사태라는 것이 바로 이 흔적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흔적들이란 늘 표지와 관련되어 이해된다. 그러나 그 표지들이란 선별된 표지들일 것이며, 배제된 표지로서의 흔적들은 도대체가 애매모호할 뿐이다. 그것은 단지 힘-운동으로 지칭되거나, 또는 에너지라거나 불확정성이라는 부정적인 이름을 부여받는다. 이제 텍스트가 가지는 특권적 장소성은 흔적들을 선별하는 순간 그것이 특권적인 표지가 된다는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흔적이 출현하는 카오스와 그것을 배제하는 목적론적 질서라는 두 암초 사이를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또 하나의 질문이 구성된다. 현행화된 텍스트를 통해 어떻게 잠재적인 흔적들로 갈 것인가? 또 그 역은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서 전자의 질문은 해석에서 사건으로의 구도며, 후자는 사건에서 해석으로의 구도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제 이 구도들을 사유하기 위해 두 대가의 텍스트들을 들여다 볼 것이다. 그리고 그전에 다음과 같은 문제적(그래서 사건적인) 유명한 구절을 앞에 던져 놓고 시작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후 이 구절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들 안에서 모든 것은 그것이 가능한 한도의 질서와 조화를 가지고 결정적으로 질서 지워져 있고, 최고의 지혜와 선은 완전한 조화를 가지고만 행동할 수 있으며, 현재는 미래를 품고 있으며, 우리는 과거의 사실로부터 미래의 사실을 읽을 수 있고, 보다 멀리 떨어진 것은 보다 가까이 있는 것을 통하여 표현되기 때문이다. 만일, 시간이 경과해야 비로소 감각할 수 있도록 전개되는 그의 주름들을 우리가 모두 펼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영혼 속에서 우주의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 안에 있는 각각의 판명한 지각들은 전 우주를 포괄하는 무한한 수의 모호한 지각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영혼은 그가 지각하는 사물을, 그의 지각들이 판명하고 고양된 한에서만 인식하며 그 영혼의 완전성은 그 지각의 판명성에 비례한다. 모든 영혼은 무한한 것을 인식하고, 모호한 방식으로이긴 하지만, 마치 내가 바닷가를 산책하면서 바다의 굉장한 소음을 들을 때 나는, 물론 서로 구별할 수는 없지만, 전체의 소음을 구성하는 모든 파도의 개별적인 소음들도 듣는 것처럼, 모든 것을 인식한다. 그러나 우리의 모호한 지각들은 바로 전 우주가 우리에게 주는 인상들의 결과이다. 이것은 모든 모나드들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Leibniz 2010, 241-42).   


<계속>

  1. ‘홀림’이라는 우리 말에 해당되는 불어단어로는 ‘séduction’이, 영어 단어로는 ‘bewitchment’가 적당하다고 보인다. 이 말에는 어떤 마술적인 유인과 그에 대한 비의지적 복종이라는 함축이 담겨 있다. [본문으로]
  2. 이 4항 관계는 ‘사건’의 맥락이 아니라, ‘역사’의 맥락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여기서 ‘해석’은 사건과 역사의 지평을 횡단한다. [본문으로]
  3. “우리는 우주의 현재 상태를, 선행하는 상태의 결과와 미래 상태의 원인으로 생각해야 한다. 주어진 순간에 자연에 생기를 주는 모든 힘과 자연을 구성하는 존재자들 각각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지성이 있다면 그리고 모든 자료를 이 지성이 분석하기에 충분히 폭넓고, 우주의 아주 큰 물체의 운동과 아주 가벼운 원자의 운동을 동일한 형식 안에 포함시킨다면, 이 지성은 불확실한 것을 하나도 가지지 않을 것이며,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도 그에게는 분명할 것이다” P. Laplace, Essai philosophique sur les probabilités, Paris Bachelier, 1840, p. 3. [본문으로]
  4. 그런데, 바슐라르는 현대 기상학과 물리학의 ‘카오스 이론’까지 이 결정론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이는 분명 지나친 일반화라 하겠다(Gaston Bachelard, 정계섭 옮김, 『현대물리학의 합리주의적 전통』, 민음사, 1998, p. 285). 사실 현대과학에서 카오스 이론과 양자역학은 아직 그 접점이 탐색중이다. 이를테면 ‘양자 카오스’와 같은 개념이 그러한 접점을 찾는 와중에 생긴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이론 모두 어떤 ‘불확정성’을 전제한다. 초기값의 변화 여부에 따라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모르는 불확정성과, 위치와 운동량을 확률적으로밖에 알지 못하는 ‘불확정성’은 동력학계라는 동일한 계 안에서의 다른 수준(하나는 거시수준, 하나는 미시수준) 간의 이론적 경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하다. 나는 이 경합의 상황이 어떤 철학적 결론으로 이끌어지느냐에 따라 매우 중요한 세계관의 변화가 생겨날 것이라고 본다. [본문으로]
  5. 이 일반원리는 다음과 같은 명제들로 표현된다. “모든 것은 서로 연관성이 있다. 모든 것은 모든 것 안에 있다. 무에서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진공은 실재성이 없다. 존재는 무에 의해 제한될 수 없다. 우주는 연관성이 있는 하나의 전체이다”(Bachelard 1998, 286-87). [본문으로]
  6. 이 도식작용은 순수이성의 수준에서 인과성을 현상에 부여하는 원초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식작용에 대한 문제는 매우 광범위하면서도 관건적인 사항들을 내장하고 있다. 우리는 뒤에서 들뢰즈의 칸트론이 이 도식작용에 대한 비판적 독해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게 될 것이다. 도식작용에 대해 논한 강영안의 저서도 눈 여겨 봐야 한다. 왜냐하면 강영안은 자신의 책에서 도식작용을 순수이성 뿐 아니라 실천이성과 판단력에 이르기까지 확장하면서, 해석학적 도식론이라고 불릴만한 논의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책을 들뢰즈, 리쾨르와 더불어 다시 논할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도식, 특히 ‘초월적 도식’에 대해 정리한다. “1. 초월적 도식은 시간과 관련해서 ‘초월적 시간규정’(A138/B177)이며, 범주들의 네 그룹(수량, 성질, 관계, 존재방식)의 순서에 따라 ‘시간 계열, 시간 내용, 시간 순서, 시간 종합’(A145/B185)이다. 2. 초월적 도식은 범주의 경험적 사용을 실현하고 동시에 제한하는 ‘감성의 형식적 순수 조건’(A140/B179)이다. 3. 초월적 도식은 ‘순수지성개념의 도식’(A140/B179)이다. 4. 초월적 도식은 ‘상상력의 도식’(A141/B180)이며, 직관을 규정하는 ‘상상력의 종합규칙’(A141/B180)이다. 5. 초월적 도식은 그 자체로 늘 ‘상상력의 산물’(A142/B179)이며 경험을 철자화하는 데 쓰이는 ‘상상력의 약자(Monogram)’(A142/B180)이다. 6. 초월적 도식은 경험적인 개념의 그림이나 수학적인 도식과 구별해서 단지 순수종합(A142/B180)에 지나지 않는다. 7. 초월적 도식은 내감 일반의 규정에 관여한다(A145/B179). 8. 초월적 도식은 범주를 대상에 관계시키고 범주가 의미를 갖도록 만드는 조건이다(A145-146/B185). 9. 초월적 도식은 범주의 도식이요 상상력의 도식일 뿐만 아니라 ‘감성의 도식’(A146/B185)이다. 따라서 도식은 현상계에만 적용된다. 10. 초월적 도식은 순수지성개념에게 대상과의 관계, 곧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하고 참된 조건이다(A146/B185). 11. 초월적 도식은 그것을 통해 무엇이 주어질 수 있는 ‘판단력의 조건’이다. 만일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모든 포섭은 실패한다(A247/B304)”(강영안, 『칸트의 형이상학과 표상적 사유』, 서강대학교출판부, 2009, pp. 133-34). [본문으로]
  7. “그러므로 내가 의식한다고 하는 것은, 나의 상상력이 하나를 먼저 놓고, 다른 하나를 후에 놓는다는 것이지, 객체에 있어서 하나가 다른 하나에 선행한다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단순한 지각을 통해, 서로 계기하는 현상들의 객관적 관계가 무규정적인 채로 남겨진다. 이제 이것을 규정된 것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두 상태들 간의 관계가 필연적으로 전후(前後)로 놓여져야만 하는 것으로 규정되어진다는 식으로 생각되어야 하며, 그 역은 아니다. 하지만 이 종합적 통일의 필연성을 담지하는 개념은 지각에 있지 않고, 오직 순수 지성 개념이고, 여기서 그것은 인과관계 개념인 바, 시간 안에서 후자를 결정하는 것은 전자며, 결과적으로 그것이 단지 상상 안에서 선행할 만한 어떤 것(또는 전혀 지각될 수조차 없는 어떤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상들의 계열과 따라서 모든 변화를, 경험이 이에 따라 그 자체로, 특히 현상과 변화의 경험적 인식이 가능한 바, 이 인과율에 종속시키고, 이 법칙에 일치하기만 해야 한다”(B234).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저서 인용은 기본적으로 백종현 판을 따르지만, 번역을 수정해야 할 경우, Guyer-Wood 영역판을 따랐다. Immanuel Kant, trans., Paul Guyer, Allen Wood, Critique of Pure Reason, Cambridge Univesity Press, 1998;2000. [본문으로]
  8. “이처럼 역학을 양자역학이라는 보다 섬세한 수준에 이르게 하자마자 언제나 어떤 차이가 발생하는데, 이로부터 일체를 이루는 전(全)공간을 끌어들이는 절대적 결정론은 폐기될 것이다. 미시물리학에서 만들어진 양자역학은 그래서 무제한의 우주라는 나태한 관점에 대해 수정작용을 할 것이다. 힘을 고려한 필요가 없는 직관 속에서 운동학적 관점에 머물러 있는 한, 세계는 가득 메워진 연관성이 있는 덩어리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세계는 데카르트 물리학에서처럼 물화된 공간에 지나지 않으며 거기에서는 기하학적 결정론만을 탐구할 것이다. 실세계와 이것이 함축하는 동역학적 결정론은 다른 직관, 즉 동역학적 직관을 요구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철학 어휘가 필요할 것이다. (...) 동역학적인 직관은 우리를 직접적인 에너지 실재론으로 끌어넣는다. 이 에너지 실재론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기하학적 세계가 아닌 세계에서 합리주의의 문제를 제기하게 하며, 현대과학에서 배우고자 하는 철학자에게 비데카르트적인 인식론에 도달할 것을 요청한다”(Bachelard 1998, 289-90). [본문으로]
  9. “무제한적 결정론의 형이상학을 증거의 사실주의로 돌아오게 한다”(Ibid., 293) [본문으로]
  10. “사실 객관적으로 인정되었다고 하더라도 원인이라는 개념은 이 개념이 초래하는 확신의 근원에서 사고하고 활동하는 나, 행동의 대용물로서 하나의 생각을 확인하는 나, 원인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요소를 수집하고 그 원인을 조회하는 신처럼 사용하는 나를 함축한다. 이것이 소박한 차원에서 본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 차원에서 하나의 원인의 결정은 배우는 그리고 배우고자 하는 주체, 합리성의 도상에 있는 주체를 요구한다. 그래서 인과 관계의 치밀한 구상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하나의 전문기술을 고려해야 한다. 인과관계가 종합 개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이 원인의 요소들을 수집했을 경우 뿐이다”(Bachelard 1998, 295-96). [본문으로]
  11. 화이트헤드A. N. Whitehead 지음, 오영환 옮김, 『과학과 근대세계』, 서광사, 1989, pp. 124-26 참조. [본문으로]
  12. M. Gourinat, De la Philosophie, Hachette, 1969, chap. 2 참조. [본문으로]
  13. 더욱이 들뢰즈는 이러한 과학철학의 사유를, 또한 과학 자체를 자신의 철학하기의 중요한 계기로 삼았기 때문에 더 그러하다. 그러나 들뢰즈가 전적으로 과학에 자신의 철학의 근거를 발견했다고 하면 타당하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논할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측면에서 이러한 과학철학적 접근은 한계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왜냐하면 로트만(Lautman, A)이 말했듯이 그러한 접근은 결코 존재적인(ontic) 영역의 한계 안으로 침투해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로트만은 하이데거를 인용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논한다. “존재론적 평면에서, 엔터티의 존재 구축이 존재적 평면에서, 과학적 지식의 대상들이 생명과 물질을 받아들이는 어떤 영역의 사실적 현존의 결정항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특정한 개념의 본질에 대한 의미를 아는 것은 우선적으로 이러한 개념들의 실현들(realizations)로 향하는 것이 아니지만, 필연적으로 개념적인 분석이, 개념의 예견(anticipation)으로서, 실현되거나 역사화되는 구체적인 관념들을 투사하면서 진행하는 것이다. 본질과 현존[실존]의 구별, 그리고 특정하게 엔터티와 관련된 관념의 발생에서 본질의 분석의 확장은 때로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숨겨져 있다. 이것은 실존론적 고려의 중요성으로 인한 것인데, 세계-내-존재와 관련되어, 『존재와 시간』에 등장한다. 하지만 『근거의 본질』(1969[1929])에서, 하이데거는 정확하게 존재론적 관점과 존재적 관점을 구분하면서, 인간적인 실재성(reality)과 세계-내-현존[실존, existence]의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에 대해 설명한다. 하이데거에게 세계 개념은 일반적으로 엔터티들의 단순한 총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적(ontic) 관념, 예외적으로 인간적 실재와 연관되어 있고, 세계 안에 있는 인간의 작용(effective) 조건들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적 실재의 본질을 세계-존재(bein-the-World)가 합당하게 포함하고 있다는 것에 따른 주제들을 지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어떤 종류의 존재는 … 사실적으로 현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43, 45[67]). 다른 한편, 세계-내-존재는 인간적 실재에 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Lautman, A. Mathematics, Ideas and the Physical Real, (trans.) Duffy, S., Continuum, 2011, p. 201. [본문으로]
  14. 렇기 때문에 쉽사리 이 네 가지 원인을 폄훼하거나, 부정하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기술적 발전이 고도화된 현대세계에 이르러서도 이 네 가지 원인의 목록은 그대로 설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지금의 논의 내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본문으로]
  15. 이 사태는 단적으로 잠재태와 현실태 쌍 뿐만 아니라 형상인과 목적인이 의도적이고 이론적으로 무시되는 것을 정당화했다. [본문으로]
  16. 대표적으로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제일원리론』II.2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왜냐하면 질료 자체는 형상에 대해 모순적 잠세태(potentia contradictionis)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자체 형상을 통해 현실태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것은 가능태(potentia, 잠재태)를 현실태로 환원시키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해 현실태에 있다. - 그것이 합성체의 작용인인데, 왜냐하면 ‘합성체를 만드는 것(facere compositum)’과 ‘질료가 형상에 의해 현실태에 있게 되는 것(materim esse actu per forman)’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 형상과 질료는 우선 결합되지 않은 것으로 이해되고 그것들을 결합하는 것은 작용인의 성격을 지니므로, 그로부터 형상적 현실화(actuatio formalis)가 뒤따른다”(둔스 스코투스 지음, 『제일원리론』, 박우석 옮김, 누멘, 2010) 이 부분은 결과만이 질료를 구성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첫 번째 부분이다. 여기서 잠재태는 작용인이라는 관점에서 질료인과 형상인을 결합하는 ‘힘’으로 설명된다. 이렇게 ‘잠재태’를 강조하게 되면 피조물들의 구성이 어떤 ‘자율성’을 가지거나, 그러한 내재적인 원인을 신적인 것으로 상정하게 되는데, 이것은 범신론 또는 범재신론의 혐의를 받게 된다. [본문으로]
  17.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섭리에 관여하기를 바랄 정도까지 인간을 생각하지 않는다”(Descartes, Principia philosophiae, ver. Adam-Tannery, Tom VIII, I, 28.) [본문으로]
  18. Leibniz, 윤선구 옮김, 『형이상학 논고』, 아카넷, 2010, p. 23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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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0]



촛불시대의 정치선동



전 주 희 / 수유너머N



‘일코’라는 신조어가 있다. 어떤 연예인의 팬이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닌척 하는 ‘일반인 코스프레’의 준말이다. 연예인의 팬 뿐만 아니라 덕후들이 자신의 존재를 사회화시키고 싶지 않을 때 일코를 선택한다. 작년에는 심형탁이 무한도전에 나와 자신 도라에몽 덕후라는 것을 밝히기 전까지 그는 일코였다. 왜? 편하기 때문이다. 나이에 맞춰 직업을 갖고 결혼하고 애낳는 생애주기가 신념처럼 떠받들어지고 있는 사회에서, ‘그게 왜 좋아?’라는 성의없는 질문에 애써서 답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요즘 한창인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는 일코가 득실거린다. 바로 운동권 덕후들이 마치 일반인 마냥 촛불을 들며, 파도타기도 하고 이승환, 전인권의 노래에 촛불물결도 만든다. 물론 좋다. ‘깃발 대오’들은 얼마나 거리에서 대중들을 기다려왔던가. 때문에 깃발을 휘날리며 대중들과는 이물감을 형성하면서까지 오랜만에 조우한 대중들의 반감을 살필요는 없다. 그나마 이번 촛불집회는 ‘민주묘총’ 등의 패러디 깃발들이 함께 하면서 깃발을 드는 것 자체가 문제시되지는 않는 모양새다. 


2008년 한미 FTA 반대 촛불집회때는 깃발을 최대한 자제했다. 늘 갖춰입던 투쟁조끼도 벗고 ‘조용히’ 일반인 행세를 하며 촛불을 들었다. 2002년 미선-효순 사건 촛불집회 때는 ‘깃발’을 들고 나타난 노동자들에게 일반 촛불 시민들이 직접적인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니까 ‘촛불’과 ‘깃발’이 함께 뒤섞이는 데에는 갈등의 마주침들이 있었던 것이다. 


촛불과 깃발이 공존하는 시대에 ‘유인물’과 ‘촛불’은 함께 할 수 없는가? 한 손에는 촛불을, 한 손에는 ‘박근혜는 퇴진하라’는 단 8글자가 들어간 손피켓만으로 100만명이 넘게 참여하는 ‘민심’은 분명하게 전달될 수 있을지언정, 그러한 촛불들이 앞으로 보여주어야 할 “미래의 시대”를 선명하게 드러내주지는 않는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우리는 지금 역사의 영역으로부터 나와 현재의 영역,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미래의 영역을 지나가고 있다.”라고 현재를 규정한다. 

조선일보와 의회세력은 ‘질서 있는 퇴진’으로 결집하고 있고, 촛불정국을 정권 재창출을 위한 도구로 십분 활용하고 있다. 그들은 ‘87년 6월’이라는 역사를 반복하고자 하며, 현재의 힘을 이용해 역사를 소환한다. 대중들의 숫자만큼 요구와 욕망은 다양하기 때문에 최소한 합의되는 수준에서 ‘현실적인’ ‘실현가능한’ 판단을 하자는 것이야말로 파탄난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이와 함께 촛불은 통치질서의 한 부분이 되며, 정치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 ‘이게 나라냐’는 ‘공화국’이라는 정통성의 복구로 변질된다. 



지난 11얼 26일 민중총궐기 사진. 경찰들이 차벽에 플랭카드를 걸었다. "평화로운 집회, 성숙한 시민의식, 여러분이 지켜주세요" 출처. : 페이스북


때문에 ‘최소합의’가 진정 다양한 대중들의 실질적인 요구의 수렴점인지, 그리고 미래를 성급하게 나타내는 우리의 새로운 삶의 형식들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실질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레닌은 그것을 “도시들 간의 진정한 접촉”을 위한 정치신문의 역할이라고 보았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긴급하게 필요한 것은 영역을 넓히고, 정기적, 공동적 작업의 기반 위에서 도시들 간의 진정한 접촉을 확립하는 것이다.”

-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페이스북으로 시시각각 사람들의 의견과 반응이 올라오는 상황에서, 종편이나 인터넷 뉴스 등에서 모든 정보들과 봉기의 이미지들이 종합되는 촛불시대에 ‘유인물’은 너무 낡았다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실시간으로 집회영상을 볼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광장으로 나오지 않았는가? 여전히 깃발이 올려지며, 구호를 외치지 않는가? 


‘퇴진’의 한 목소리는 현재의 다양한 영역들과 부분적으로 당도한 미래의 영역들로 분기해 나가기 위한 교차로일 뿐이다. 의회세력들은 지금 그 교차로를 관통해 자기들의 정치적 계획을-질서있는 퇴진이라는 정치적 계획에 맞추어 선전하고 선동하며 조직하고 있다. 

반면 우리 안에 존재하는 퇴진을 둘러싼 다양한 정치적 입장은 광장에서 아직 제대로 선동되고 있지 못하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쟁점들을 선명하게 드러날 때 촛불은 분열되는 ‘민심’이 아니라 다양한 입장들을 지닌 정치적인 주체로서 피와 살을 갖추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혁명이란 단 하나의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혁명’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질서 있는 퇴진’은 혁명 속에 개입하는 반혁명의 실천이다. 레닌은 혁명을 “다소간 완전한 침묵의 시기와 급속히 교체되는 일련의 강력한 폭동들”이라고 정의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침묵의 시기에도 필요하고 강력한 폭동의 시기에도 필요한 본질적인 정치선동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삶의 모든 측면을 조명해주며, 가능한 한 광범위한 계층의 대중 사이에서 수행되는 정치선동의 작업”이어야 한다. 


벌써 오래된 이야기지만, 메이데이 집회 전에 개최되었던 청년학생 전야제와 노동자 대회 전야제 그리고 당일 대회들은 수십, 수백종의 유인물들이 넘쳐났다. 대회는 늘 무대위에서 문화공연과 투쟁발언들이 이뤄졌지만, 대회장 주변에는 밤새 인쇄기를 돌린 각종 투쟁 현안들, 노동운동 단체들이 내건 정치정세에 대한 입장들이 담긴 유인물들이 ‘거리의 연단’을 만들었다.

촛불집회에서 다양한 현실의 영역들과 미래의 영역들이 실질적인 접촉면을 만드는 것은 촛불의 숫자로만 우리의 ‘요구’가 표현되는 방식을 훨씬 뛰어넘을 것이다. 언제 꺼질지 모르는 촛불앞에 가장 두려운 것은 분열이지만, 곧 다가올 다소 침묵의 시기를 건너게 해주는 것은 무수하게 난립하는 유인물, 그 하찮은 것이 가져오는 정치적인 입장일 것이다. 


페미니즘 시국선언



이는 추상적인 정치적인 구호가 아니다. 그런면에서 이번 촛불집회에서 진행된 ‘페미니즘 시국선언’은 페미니스트들의 시국선언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현실의 다양한, 하지만 분산되어 전개되었던 요구들이 광장에서 실질적인 접촉면들을 형성하면서 새로운 운동으로 분기할 수 있는 조건은 광장의 한 가운데서, 봉기의 와중에 벌어진다. 

그래서 제안한다. 운동 덕후들은 더 이상 일코 하지말고 일코 해제하라! 지금의 정세에 개입하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으로 수많은 거리의 연단들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폭력-비폭력의 프레임이 깨질 수 있는 대중적 토양이 형성될 수 있다. 무엇보다 그토록 거리에서 기다리던 대중들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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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시 한번 마르크스

- 이시카와 야스히로,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나름북스)





전 주 희 / 수유너머N 회원




이렇게까지 귀여워도 되나싶다. 그래도 맑스인데. 심지어 베이비 핑크의 맑스라니. 





책의 뒷면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멎었다. 아... 난생처음 보는 맑스의 뒤태라니! 

(저 엉덩이 어쩔거냐. 김보통 작가는 책임져라.)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은 수없이 쏟아지는 맑스 입문서 중에서도 극강의 귀여움으로 독자들을 몸서리치게 만든다. 평생 저런 맑스를 본 적이 없다. 정말 이렇게까지 유혹해야해? 라고 묻고 싶을 정도다. 그런데 저자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거 같다.  

저자는 ‘부드러운 마르크스 입문서’를 내걸었다. 맑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맑스가 뭐에요?’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마르크스의 생애와 사상을 소개했다. 그렇구나. 세상에는 맑스를 아는 사람과 맑스를 모르는 사람 혹은 맑스를 좋아하는 사람과 맑스에 적대적인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사이 어딘가에 ‘맑스가 뭐냐?’라고 묻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나는 한 번도 그렇게 물은 적이 없다. 난 처음부터 맑스가 싫었다. 지겨우리만치 푸르던 대학교정의 잔디밭이 권태로워 미치기 일보직전일 때, 잔디밭 대신 맑스가 싫었다. 대체 언제부터 싫었을까? 고등학생 때 종로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철거민들하고 학생들을 쫓아 영화관 골목까지 쫓아온 백골단들의 살기보다 학생들과 철거민들의 그 눈빛이 더 싫었을 때부터였나? 아니면 중학생 때 나와 자주 어울려 장구와 꽹과리를 치고 놀았던 선생님들이 죄다 전교조 선생님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였나? 한달, 두달이 넘게 단식을 하고도 교단에서 머리끄댕이를 잡힌채 기어이 쫓겨나 미처 챙기지도 못해 그들의 책장에 그대로 박혀있었던 ‘그 책’ 때문이었을까?

하여간 학교다니는 내내 맑스가 싫었다. 그리고 선배들은 집요하리만치 내게 맑스를 읽게 했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딱히 ‘처음’이랄게 없는 맑스와의 지리한 만남들이 있었던 것이다. 대체 나는 왜 그랬을까?



이십대 내내 맑스가 싫을수록 까뮈가 부러웠다. 알베르 까뮈는 자신을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 한권의 책에 대하여, 세계적인 작가가 된 후에 서문을 남겼다. 그의 영원한 스승인 장 그르니에의 <섬>에 대해, 까뮈는 강렬하게 체험한 자신의 '처음'에 대해 고백했다. 





한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얻는 위대한 계시란 매우 드문 것이어서 기껏해야 한 두 번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계시는 행운처럼 삶의 모습을 바꾸어 놓는다. 살려는 열정, 알려는 열정에 북받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와 비슷한 계시를 제공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열어본 후 겨우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 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알베르 까뮈, 장 그르니에의 <섬>에 부쳐.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는 까뮈가 부러워 미치겠다. 나는 왜 온 우주에 심사가 뒤틀려 이십대를 보냈던가. 또 회한에 사무쳐 사십대에 이런 글을 쓰고 있나. 

대신에 나는 맑스를 나와 함께 읽었던 사람들의 푸르던 눈빛들을 기억할 따름이다. 어느 철도 노동자는 <자본>을 읽고서 맑스를 ‘고마운 사람’이라고 했다. 훌륭한 사람도 아니고 고마운 사람이라니. 나는 맑스보다도 그 철도노동자를 보기 위해 <자본>을 읽는 자리에 꼬박꼬박 나갔다. 그러니까 살려는 열정, 알려는 열정에 북받쳐 <자본>의 한 귀퉁이를 씹어먹을 듯이 노려보던 그가 좋았고, 부러웠던 것이다. 

베이비 핑크로 무장한 맑스 앞에서 옛날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건 순전히 저자의 한국어 서문 때문이다. 내년에 60세가 되는 노학자는 부드러운 맑스를 소개하기 전에 ‘일본에서의 마르크스 수용 역사’를 이야기한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본을 뒤흔든 시절, 저자는 맑스를 ‘평화운동’과 함께 만났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시작된 이후 40년간 축적된 새로운 맑스를 다시 읽기 위하여 저자는 자신이 청년시절 읽었던 맑스가 아니라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 맑스를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듯 하다. ‘평화롭고 민주적인 일본’을 위해 저자는 심지어 ‘부드러운 맑스’로 유혹하며 함께 동지가 되자고 말 건넨다. 이 책의 미덕은 심오한 통찰이나 깊이있는 분석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맑스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과 맑스를 놓고 말이 오갈 수 있는 여백이 만들어진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을 ‘마르크스는 태어나서 처음’이라는 이십대 제자들과 맑스의 <자본> 1장을 읽고 나눈 대화를 싣는다. 대략 이런 식의 대화다.  



후쿠다(제자1).       ‘환원’은 무슨 의미인가요?


하토오카(제자2).   캐시백 같은 거죠?


아시카와(저자)    그렇죠. 고객 감사 세일 비슷한^^. 사전에는 ‘사물을 이전의 형태나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라고 했어요. 그렇게 보면 여기서의 환원이란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사물의 형태’로 되돌리는 걸 의미하겠죠. 

    • 본문, 194쪽. 




아.. 캐시백이라니.. 한참을 웃고나니, 이제야 알 것 같다. 내가 왜 맑스가 싫었는지. 

맑스를 참으로 많이 알고 있었던 선배가 너무 멋져서 고백한 밤. 

“선배, 좋아해요.”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깊은 상념에 빠지더니, 나에게 그랬다. 

“세상에 사랑은 두 종류가 있지. PT적 사랑과 BG적 사랑. 넌 너의 BG적 사랑을 부끄러워 해야해.”

그놈이 그랬다. 대충 느낌으로 차인 것 같았지만 PT가 ‘프롤레타리아’의 약어고, BG가 부르주아를 뜻하는지 나중에 가서 알고 나서, 맑스가 진절머리가 났다. 이번에도 선배대신 맑스가 미웠다. 

그 시절 그 선배에게 ‘환원’을 캐시백이라고 대답했다면, 난 아마 ‘자본주의의 하수인’정도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인 아시카와 선생은 ‘붉은 맑스’를 젊은 후배들에게 전달해주는 대신, 젊은 세대들이 만나는 맑스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도록 부드러운 여백을 만들어준다. 어쩌면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 ‘여백’이었을 것 같다. 나는 맑스를 읽어야만 하는 99가지의 이유에 질렸던 것이다. 나에게는 맑스가 나에게 말 건네주는 그 처음의 공간. ‘맑스가 머에요?’라고 묻게 만드는 시간. 그 ‘처음’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인가보다. 아직도 지리하게 맑스를 읽는 나는 항상 다른 사람들의 ‘처음’을 흠모하며 질투하며 그들과 함께 읽는다. 

오늘 처음으로 이 <자본>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하며, 다시 한번, 마르크스!








Posted by 수유너머104



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7(보강). <땅과 바다 세계사적 일고찰― 공간혁명과 인간존재menschllche Existenz’

 


낡은 노모스는 물론 사라지며, 그와 동시에 기존의 척도, 규준, 관계의 체계성 전체도 없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윽고 다가올 것이 단순한 척도의 상실상태, 혹은 반-노모스적인 허무인 것은 아니다. 낡은 힘과 새로운 힘의 가혹한 싸움 속에도 또한 올바른 척도가 생겨나며, 뜻 깊은 조화가 형성되는 것이다.

여기에도 신들이 있고 지배한 또 다른, 신들의 척도는 위대하다.”

<땅과 바다>

    

 

슈미트의 세계사관, 신화적 세계관 / 대지의 의미론 / 리바이어던과 비히모스의 싸움 땅과 바다의 근본적 대립 / ‘카테콘 Katechon’ 신화적 상상력과 세계사의 관계 / 기술포경해적 바다라는 요소를 둘러싼 흥망사 / ‘공간혁명 Raumrevolution’ / ‘질서 Ordnung’로서의 대지의 노모스 Nomos der Erde’ / 토지취득경쟁과 종교전쟁 / ‘에서 바다로의 기본요소의 변동 영국의 해군력과 기계 Maschine’ / 공중의 시대 지구의 노모스 Nomos der Erde’의 근본적 변화 / 공간무기 / 새로운 노모스와 인간존재 menschliche Existenz’ / 질의응답

 

 

슈미트의 세계사관, 신화적 세계관

 

<땅과 바다>1942년에 간행되고 54년에 재간된 책입니다. 테마로 보면, 이보다 8년 후에 출판된 <대지의 노모스>와 겹치는 부분이 적지 않죠. <대지의 노모스>에서는 유럽 공법 질서라는, 유럽에서 전쟁을 틀짓기 위한 법적 질서를 논하고 있는데, <땅과 바다>는 그 배경이 되는, 슈미트의 세계사관, 신화적 세계관을 이야기하듯이 그려낸 저작입니다.

슈미트는 젊었을 때 문학가를 지향한 적도 있으며, 문예평론적 작품도 몇 가지 썼습니다. <정치적 낭만주의>도 낭만파의 문학 이론에 대한 그의 깊은 이해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낭만주의> 이후는 문학적 재능이 전면에 나오는 작품이 별로 없었다가, 이 작품에서 다시 문학적 감각(sense)이 발휘되고 있습니다.

번역자 중 한 명인 이키마츠 케이조 씨(生松敬三, 1928-84)도 다분히 문학 취향의 독일 사상사를 전공으로 연구하신 분으로, 적어도 법사상과 정치사상의 전문가는 아닙니다. 공역자인 마에노 미츠시로 씨(前野光弘,1938-)도 경력을 보면 알듯이 독일문학 분야에 속해 있습니다. 이 작품이 문학적 작품이기 때문에 문학계 인물이 번역자가 된 것이죠.

서두부터 매우 인상적입니다.

 

 

인간은 땅/육지의 생물이며, /육지를 밟으며 걷는 동물이다. 인간은 직립하며, 그리고 대지 위에서 활동한다. 이것이 인간이 의거하여 서 있는 곳이며, 그 기반이다. 이것에 의해 인간은 자기의 관점을 획득한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이 받는 다양한 인상을 규정하며, 인간이 세계를 보는 시각을 규정한다. 인간은 대지에서 태어나며 또한 대지 위에서 활동하는 생물로서, 자기의 시야[視界]뿐 아니라 그 보행이나 운동의 형식, 자기의 모양새[形姿]도 획득하는 것이다.

   

* 인간은 땅의 존재, 땅을 밟고 있는 존재Landtreter. 인간은 견고하게 정초된 대지 위에 서서 걸어가고 움직이지. 그 대지가 그가 서 있는 곳Standpunkt이자 그의 토대Boden. 그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시점을 얻으며, 이것이 그가 받는 인상들,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규정하지. 가시범위Gesichtskreis뿐만 아니라, 인간이 걷고

움직이는 형태, 그 형상Gestalt도 대지에서 태어나 대지 위에서 움직이는 생명체로서 얻어진거야. (김남시 옮김, 꾸리에, 7).

 

 

독일계의 사상사에서는 인간의 본질을 생물학적 특징을 포함시켜 규정하는 인간학 Anthropologie’적 논의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이것도 그런 유형의 말투네요. 게다가 이미지를 꽤 시각적으로 그려내고 있네요. 슈미트의 동시대의 철학적 인간학의 논의로는 현상학을 가치철학에 응용한 막스셀러(1874-1928)라든가, 나치에 가담한 것으로 악명 높은 아놀트 겔렌(1904-76) 등이 있습니다.

걷는다’, 즉 직립보행할 수 있게 되면서, 인간의 시야가 확대됐다는 것은 생물학적 상식이라고 일반적으로 자주 말해집니다만, 슈미트는 그것을 물리적으로 시계(視界)가 확대됐다는 것뿐 아니라, “사물의 시각이 확대된다는 은유적 의미로 확장하는 것입니다. ‘신체성과 그것을 에워싼 환경’, 이 경우에는 대지의 관계에 의해 사물의 시각, 나아가 세계관이 규정된다는 철학적, 형이상학적 차원으로까지 범위(scale)를 확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지의 의미론

 

이어서 인간이 서 있고 위치하는 대지의 의미론이 전개됩니다.

 

 

지구는 거의 4분의 3이 물이며, 육지는 4분의 1밖에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아무리 큰 육지라고 하더라도, 마치 섬처럼 물에 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이 혹성을 지구(Erde)’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의 이 지구가 공모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 이후, 우리는 아주 당연하게도 대지의 공(*에르데발)’, ‘대지의 구(*에르데쿠겔)’라고 말한다. 만일 네가 지구를 바다의 볼(*제발)’ 혹은 바다의 구(*메레스쿠겔)’라고 마음속에 떠올려야 한다면, 너는 기묘한 느낌이 들 것이다.

 

* 그렇기에 지구 표면의 4분의 3이 물로 덮여있고, 땅은 4분의 1뿐이라 사실상 가장 큰 대지도 섬처럼 물 위에 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인간은 자신이 살고 있는 별을 대지-지구Erde’라고 부르고 있다. 대지Erde가 구() 형태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된 후 우리는 더 큰 확신을 가지고 이 별을 대지 공Erdball’ 또는 대지구슬Erdkugel’이라 부른단다. 이런 방식으로 대양 공Seeball’이나 바다 구슬Meereskugel’ 같은 것을 떠올리는 건 어딘가 어색하지?

(김남시, 7).

 

 

독일어 단어의 의미 분석입니다만, 요점은 알겠네요. ‘지구를 의미하는 지구<Erde>는 원래 대지을 의미했다는 것입니다. 일본어에서도 []’이라는 글자를 사용해 지구(地球)’라고 표현하며, 영어의 <Earth>도 원래는 대지’, ‘이라는 의미입니다. <Erde>와 어원이 같습니다. 일본어에서는 혹성[행성]을 가리킬 때 지구라는 표현을 하며, 독일어에서도 지구라는 것을 강조할 때는 <Erdball>이라고 합니다.  [위 번역본에서] 괄호 안에 * 표시 이후에 표기된 것은 에르데발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Erde>의 마지막 <e>의 글자가 없어졌으니까 에르트발이라고 해야겠네요. 우리는 지구라는 혹성[행성]’을 대지의 구체(球體)로 표상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 증거로 바다의 볼 Seeball’ 혹은 바다의 구 Meereskugel’라고 말을 하면 기묘한 느낌을 받는다는 거네요. , 우리가 지구를 볼 때, 반드시 대지를 중심으로 보는 습관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우리가 지구를 마음속에 떠올리려고 하면, 아무래도 푸른 표면에 남북 아메리카 대륙이라든가 아시아 대륙,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이 부각되는 것을 떠올리네요. 그 푸른 곳이 바다인 것인데, 바다는 배경이 되고 있고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느낌이 듭니다.

 

 


 

대지는 인간의 모태이며, 그래서 인간은 대지의 자식이다. 인간은 자신의 동포를 대지의 형제, 대지의 시민으로 간주한다. 예로부터있는 네 가지 대지, , 불 그리고 공기 중 대지는 인간을 위해 정해지고 인간을 가장 강하게 규정하는 엘레멘트이다.

* 대지가 인간의 모성적 토대mütterlicher Grund라면 인간은 대지의 아들이고, 사람들은 대지의 형제이자 대지의 시민들Erdebürger인 셈이야. 대지()Erde, , , 공기라는 전승된 4원소론에서 대지()가 인간에 상응하고 인간을 가장 크게 규정하는 원소인 것도 이 때문이야. (김남시, 8).

 

 

엘레멘트 Element’요소라든가 원소라는 뜻이죠. 세계가 네 가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얘기는 최근의 마술계의 애니메이션이나 판타지계 영화에서 자주 듣습니다. 4원소설은 원래 엠페도클레스(기원전 490-430)가 원조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 스토아학파를 거쳐, 아라비아의 과학이나 중세 후기의 연금술에 수용됩니다. 슈미트는 4원소 중 Erde’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셈이죠. 대지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4원소 얘기니까 이라고 번역하는 편이 좋겠죠. ‘이중요한 것은 인간의 발판인 대지 Erde’를 구성하는 원소이기 때문입니다.

-대지라는 이 원소에 무슨 이 깃들어 있느냐고 말하면, 연금술 같은 신비주의가 되어 버립니다만, 슈미트는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까처럼 대지를 딛고 서 있는 인간의 시선에 입각해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너는 어딘가에 있는 해안에 가서 눈을 들어 보기만 해도 좋다. 그리하면 이제 바다의 압도적인 평면이 너의 시계에 들어올 것이다.

주목해야 할 것인데, 인간은 해변에 서면 자연스럽게 육지/땅에서 바다를 보게 되는데, 거꾸로 바다에서 육지/땅의 방향으로 눈을 향하게 되지는 않는 것이다. 인간 속에 있는 종종 무의식적인, 심층적인 기억에 있어서는, 물과 바다가 모든 생명의 불가사의한 근원이다. 대부분의 민족은 그들의 신화나 전설 속에 대지에서 태어난 신들이나 인간뿐 아니라, 바다에서 태어난 신들이나 인간도 등장시킨다. 이런 신화들이나 전설들은 모두, 바다의 아들, 바다의 딸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여성의 미를 대표하는 여신 아프로디테는 바다의 파도 거품에서 출현한 것이다.

 

* 해변에 가서 주위를 둘러보기만 해도 압도적인 넓이의 바다가 너의 시선의 지평을 둘러싸고 있는 걸 보게 될 거야. 해변가에 서 있는 인간이, 당연한 말이지만, 땅에서부터 바다를 바라보지, 바다에서 땅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사실은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지 않니?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무의식적인 인간의 기억 속에서 물과

바다는 모든 생명체의 비밀스러운 원천Urgrund인데 말이야. 대부분 민족들의 신화와 전설에는 대지에서 태어난 신과 인간뿐 아니라, 바다에서 탄생한 신과 인간도 등장하지. 또 바다Meeres와 대양See의 아들, 딸들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도 있단다. 여성적 아름다움의 신 아프로디테는 파도의 거품 속에서 태어났지. (김남시, 9).

 

당연한 겁니다만, 우리는 보통 대지에서 바다를 향해 시선을 돌립니다. 바다는 종종 우리의 생명의 원천으로 표상되죠. 바다가 모태의 양수를 연상시킨다는 말이 있죠. 그리스 신화의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바다의 거품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죠. 거품은 정자를 연상시킵니다. 다만, 바다가 우리 생명의 원천이라 하더라도, 현재의 우리는 대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바다는 근원으로 향하는 시선이 향하는 곳입니다. 시선이 향하는 끝에 있으며, 표면의 아주 일부만 볼 수 있는 바다는 우리의 기억의심층에 대응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Du’를 향해 말하고 있네요. 문학적인 느낌이 듭니다. 헌사를 보면 우리 딸 아니마에게 말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실제로 슈미트의 딸은 아니마(1931-83)라는 이름입니다만, ‘아니마 anima’는 라틴어로 이라는 의미입니다. 마치 우리 자신의 에 말을 걸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그런 효과도 생각해, 딸에게 얘기를 거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슈미트는 신비주의 사상과 신화의 이미지를 동원하면서, 인간의 상상력 속에서의 대지바다가 차지하는 위치를 분명히 하고, 그것을 세계사의 흐름과 결부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리바이어던과 비히모스[베헤모스]의 싸움 : 육지/땅과 바다의 근원적 대립

 

12에서 현대의 진화론적 과학의 성과로, 우리가 바다 생물의 자손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네요. 그리고 이것과 대응하는 듯이 자기 인식을 갖고 있는 민족이 있다는 인류학적 논의로 이동해 갑니다.

 

남해의 섬들, 카나카족이나 사보이오리족 같은 폴리네시아의 항해자들 중에서는 또한 이런 어족적(魚族的) 인간의 마지막 후예를 인식할 수 있다. 이들의 모든 생활, 이들의 관념 세계 및 언어는 바다에 연관되어 있다. 이들에게는 대지에서 획득된 우리의 공간과 시간에 관한 관념은 무관하며,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거꾸로 우리 땅/육지의 인간에게는 저 순수한 바다의 인간의 세계를 거의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세계인 것과 거의 똑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엘레멘트는 무엇인가, 우리는 대지의 아이인가, 아니면 바다의 아이인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질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양자택일로 대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태고의 신화도, 현대의 자연과학의 가설도, 그리고 또한 원초적인 역사의 연구성과도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 남태평양 섬들과 폴리네시아의 해양민족들, 카낙Kanak과 사우Sawu 섬의 토착민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그런 어류인간Fischmenschen의 종족이라고들 말하지. 그들이 사는 방식, 그들이 떠올리는 세계, 그들의 언어는 전부 바다와 관계되어 있어. 견고한 땅에서 얻어진 공간과 시간에 대한 우리의 표상들이 그들에게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 땅의 인간들Landmenschen에게 저 순수한 대양인간Seemenschen의 세계는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다른 세계에 다름아니지.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생겨나겠지? 우리를 구성하는 원소는 무엇일까? 우리는 땅의 자식들일까, 아니면 대양의 자식들일까? 이 질문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간단히 대답될 수는 없단다. 오래된 신화들, 근대의 자연과학적 가설들, 선사시대에 대한 연구결과들 모두가 그 두 가능성을 다 열어넣고 있기 때문이야. (김남시, 11-12).

 

 

우리는 어족(魚族)의 후손이라는 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고, 바다를 중심으로 한 언어·관념 체계를 갖고 있는 민족도 있다는 것이네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속하는 원소가 =대지인지 =바다인지 모르게 되네요. 대지바다의 경합을 통해 인류사가 전개된다는 것이 이 책의 메인 테마입니다.

17부터 시작되는 3장 이후에서는, 이런 신화적·세계적인 이미지가 구체적인 세계사에 겹쳐집니다. 신화적 상상력이 역사를 움직이고 있는 거네요. 이 부근은 낭만파에 가까운 발상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세계사는 육지의 나라에 대한 바다의 나라의 싸움, 바다의 나라에 대한 육지의 나라의 싸움의 역사이다. 프랑스의 군사전문가였던 카스텍스 제독(1878-?)은 자신이 쓴 전술서에 <땅 대 바다 La MerContre Terre>라는 포괄적인 제목을 붙였다. 그는 이것에 의해 커다란 이야기의 전통 속에 자리잡은 것이다.

육지/땅와 바다의 근원적 대립은 고래로부터 알려진 것인데, 19세기의 끝 무렵에도 여전히, 당시 러시아와 영국 사이에 있었던 긴장상태를 곰과 고래의 싸움으로 묘사하는 것이 인기를 끌었다.

 

* 세계사는 땅의 힘에 대한 대양의 힘의 투쟁, 대양의 힘에 대한 땅의 힘의 투쟁의 역사란다. 프랑스의 군사학 전문가인 카스테스 제독Raoul Castex은 자신의 전술론에 <땅에 대항하는 바다la Mercontre la Terre>라는 제목을 부쳤고, 이 책을 통해 후세에 크게 이름을 떨쳤지.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땅과 바다의 원소적 대립을 알아차리고 있었는데, 19세기 말까지도 당시 러시아와 영국 간의 긴장을 곰과 고래의 투쟁이라고 지칭하곤 했어. (김남시, 17).

 

 

세세한 것을 말해두면, ‘전술서의 원어는 <sein strategisches Buch>이기에 전략서로 번역해야죠. ‘전술은 개별 전투의 전개 방식에 관한 이야기이고, ‘전략은 더 대국적(大局的)인 투쟁방식을 가리킵니다. ‘전술핵/전략핵이라고 말할 때는, 약간 간극이 있어서, 소규모/대규모라는 의미 부여가 되네요. 라울 카스텍스 (Raoul Castex, 1878-1968) 제독은 제1차 대전후 프랑스 해군의 재조직화를 담당한 군사이론가로, 프랑스에서 지정학의 원조로 간주되는 인물입니다. 그는 해전과 육지전을 결합한 전략을 제창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유라시아에서 육지를 따라 세력을 계속 확대하던 러시아와 세계 각지의 해외 식민지를 연결하는형태로 세력을 확대하는 영국의 대립을 육지=곰과 바다=고래의 대립으로보는 것은 흥미로운 관점이네요. 러일전쟁(1904-05)도 그런 커다란 세계사적 대립도식 속에서 생겨난 것으로 볼 수 있겠네요.

 

고래는 여기서 신화에 나오는 거대한 물고기, 바다 짐승인 리바이어던이다. 이에 관해서는 우리는 나중에 조금 더 언급하게 될 것이다.그리고 곰이란 육서동물(陸棲動物)의 수많은 상징적 대표자 중 하나이다. 이른바 카발라 학자[카발라는 유대교 신비주의로 중세 독일, 스페인에서 성행했다]들의 중세적 해석에 따르면, 세계사는 거대한 고래, 리바이어던과, 마찬가지로 강대한 육지/땅의 야수로 수소 또는 코끼리라고 생각된 비히모스 사이의 싸움이다. 리바이어던과 비히모스라는 두 개의 이름은 <욥기>(40, 41)에서 유래한다. 카발라학자들이 말하는 바에서는, 비히모스는 그 뿔이나 이빨로 리바이어던을 찢어버리려 하지만, 이에 대해 리바이어던은 그 지느러미로 상대인 육서동물의 입이나 코를 덮고 먹이를 먹거나 호흡을 할 수 없게 하려 한다. 이것은 해국(海國)이 육지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군량미를 공격하여 육지국을 봉쇄하는 것의 묘사이며, 신화적 이미지로만 가능한 생생한 묘사이다.

 

* 여기에 등장하는 고래는 거대하고 신비스러운 물고기이자, 나중에 자세하게 이야기하게 될 리바이어던이고, 곰은 땅의 동물을 대표하는 상징적 대변자 중 하나지. 중세 시절 카발리스트들의 해석에 리바이어던 vs 비히모스 바다의 나라육지의 나라

따르면, 세계사는 리바이어던이라 불리는 힘센 고래와 그만큼이나 강한 땅의 동물로 코끼리 아니면 황소로 상상되던 베헤모스 사이의 투쟁이라는구나. 리바이어던과 베헤모스는 <욥기>(40장과 41)에 나오는 이름이야. 카발리스트들이 말하기를, 뿔이나 이빨로 리바이어던을 찢어 죽이려는 베헤모스에 맞서 리바이어던은 거대한 꼬리로 베헤모스의 입과 코를 막아서 먹거나 숨 쉬지 못하게 했다는구나. 육지로의 보급로를 차단해 굶게 만드는, 육지의 힘을 봉쇄하는바다의 힘을 신비주의적 이미지답게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지.

(김남시, 17-19)

 

구약성서의 욥기에 나오는 리바이어던과 비히모스의 싸움을 육지/땅의 나라바다의 나라의 싸움으로서 신화적으로 독해하려는 것입니다. 참고로 욥기 자체에는 리바이어던과 비히모스에 관해 그렇게 구체적인 기술이 있는 것이 아니며, 여기서 슈미트가 쓰고 있듯이, 카발라학자들에 의한 해석에서 여러 가지 이미지가 부여되고 있습니다. 성경의 서술로부터 알 수있는 것은, 비히모스는 소처럼 풀을 뜯고, 강의 주변에 있는 동물, 리바이어던 쪽은 그 강 속에서 서식하는 동물이라는 것입니다. 영일사전이나 독일사전을 보면, 리바이어던은 고래 혹은 뱀, , 악어 등 다양하게 해석되어 있으며, 비히모스는 하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홉스는 국가의 생성에 관한 저작 <리바이어던>을 썼습니다.

그에게는 잉글랜드 내전에 관해 논한 <비히모스 Behemoth>(1668)라는 저작도 있습니다. 슈미트 자신도 1938년에 <리바이어던>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것은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대해 독자적인 해석을 한다기보다는 리바이어던=국가라는 이미지가 어떻게 수용되고 그것이 법학, 국가학에 주었던 영향을 논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방법론적으로 슈미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간주되는, 프란츠 노이만(1900-54)이라는 프랑크푸르트학파에 가까운, 좌파 법학자·정치학자가 나치즘의 국가 체제를 분석한 <비히모스>(1942, 44)라는 책을, 망명지인 미국에서 출판했습니다. 노이만은 유대계입니다.

비히모스가 하마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수서동물(水棲動物) 같은 느낌이 듭니다만, 슈미트가 카발라의 견해를 인용해서 비히모스를 육서동물(陸棲動物)로 간주하고, 수서(水棲)의 리바이어던과 대치하고, 그것을 육지/vs 바다의 대립의 상징으로 보고 있는 거네요. 리바이어던에 의한 비히모스 공격을, 해군력을 이용한 적국의 경제 봉쇄의 상징으로 묘사하는 대목이재미있네요.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카발라에 바탕을 두고, 이 도식을 그려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저작이 쓰여진 시기는, 슈미트는 나치의 주류에서 소원해지고, 현실적인(actual) 정치문제로부터 멀어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 제2차 대전 중입니다. 유대적인 것에 관해 말하는 것은 위험했습니다. 그것을 알고서 카발라를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니까, 슈미트는 원래 이쪽 방면에 관심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리바이어던과 비히모스는 홉스의 저작을 통해 국가라는 정체모를 괴물을 상징하는 이미지로서 유포되었습니다만, 생각해보면, 이 두 마리는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서의 욥기에서 유래합니다. 사탄의 시련을 받고 시달리는 욥의 인생은 예수의 그것의 원형으로 간주됩니다. 기독교 자체가 유대교를 모태로 하고 있기에 당연합니다만, 기독교 문화권에서의 국가의이미지는 상당 부분, 유대교의 신화적 세계관에서 유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어서 고대의 해양국가인 크레타와 아테네, 로마, 카르타고 등, 우리도 세계사의 교과서에서 잘 알고 있는 고대의 역사를 땅과 육지의 싸움이라 는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확실히 고대 문명의 흥망성쇠의 상당 부분은 땅과 육지의 싸움으로 볼 수 있죠. 트로이 전쟁이나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의 포에니 전쟁 등은 역사책에서도 이런 관점에서 서술되어 있군요.

 

 

카테콘 Katechon’ 신화적 상상력과 세계사의 관계

 

 

21, 오오다케 코우지 씨(大竹弘二) 등이 슈미트의 중요 개념이라며 강조하고 있는 카테콘 Katechon’이 나옵니다. 동로마황제를 카테콘으로 볼 수 있다는 얘기네요. 역주에 나오고 있듯이, 그리스어로 제지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무엇을 막는가 하면, ‘적그리스도의 출현입니다. 􎛰신약성서􎛱데살로니아인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에서는 적그리스도가 등장하는 것을 진정한 그리스도의 등장 때까지 제지하는 자(카테콘)’가 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대지의 노모스>에서 슈미트는 초기 기독교 신학에서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카테콘의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기대됐다고 논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까지 악의 힘이 세계를 뒤덮지 않도록 수호하고 있다는 것이죠. 여기서 화제가 되는 동로마제국의 황제의 경우는, 이슬람에 의해 기독교 세계가 정복되지 않도록 제지하는 역할을 오랫동안 맡아 왔다는 것이네요.

<정치적 낭만주의><정치신학>에서는 인간의 본성은 나쁜 것이며, 악으로 흘러드니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독재가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습니다만, ‘카테콘론도 그것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카테콘의 역할을 맡았던 동로마제국은 서서히 이슬람에게 밀리며 쇠퇴하고, 1453년에 멸망합니다만, 그 역할을 계승한 자가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의 새로운 신화적인 이름이 커다란 세계사 속에 들어온다. 거의 500년 가까이 베네치아 공화국은 해양지배의 상징, 해상무역을 기초로 구축된 부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또한 고도의 정치적인 빛나는 성과인 동시에, ‘모든 시대의 경제사의 가장 특이한 산물로 간주됐다.

* [십자군 원정을 거쳐 부상해서 기독교-유럽 지역에 하나의 새로운 대양 권력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것이 베네치아란다.]

이와 더불어 새로운 신화적인 이름이 세계 역사의 웅대한 무대에 진출하게 돼. 베네치아 공화국은 거의 500여년 간 바다의 지배를 상징하며 대양 무역에 기초한 재력으로 고도의 정책적 요건을 자춘 모든 시대의 경제사를 통틀어 가장 진귀한 창조물의 독보적인 개가로 여겨졌단다.(김남시, 22-23).

 

현대 일본에 살고 있는 우리는 베네치아=베니스를 물의 도시라고 불리는 관광지로 밖에는 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이 도시는 중세 후기부터 근대 초기까지 유럽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이탈리아 반도의 동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