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는 진리가 없다




조정현(수유너머104 세미나 회원)


컴퓨터가 덧셈을 하는 방법

컴퓨터가 덧셈을 하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고 실험을 생각해 보자. John Rogers Searl 중국인 실험과 비슷한 실험이다. 그림 1. 처럼 A,B 2개의 방이 있다. 방에는 입력을 받아 들이는 창과 출력을 내놓는 창이 있고, 입력창으로 덧셈 문제를 넣을 있다. 입력창으로 덧셈 문제를 넣으면, 안에서는 덧셈을 계산하여 결과를 출력창으로 보낸다. 그림은 3+5 입력창으로 넣었을 , 출력창으로 결과를 내놓은 결과이다.  





그림 1에서 A방과 B방은 동일한 문제 ‘3+5=’ 에 대해서, 동일한 출력물인 ‘3+5=8이라는 결과를 내놓았다. 입력과 출력만을 비교하면, A방과 B방은 동일한 동작을 한다고 보아도 된다. 각 방의 입력과 출력만을 비교하고, 방의 내부에서 수행되는 구체적인 계산 방법을 고려하지 않을 때, 우리는 A방과 B방을 black box로 간주하는 것이다.  A방과 B 방을 Black box로 보지 않고, 내부 구조가 보이는 투명한 White box로 보면,  A방과 B방은 동일한 동작을 하지 않는다고 볼 수 도 있다.  A방과 B방을 white box로 생각했을 때, 다른 동작을 하는 경우를 제시해 본다.


A방은 ‘3+5=’ 라는 문제가 입력창으로 들어오면, 이를 3+5 = (1+1+1)+(1+1+1+1+1) = (1+1+1+1+1+1+1+1) 로 바꾸어 계산하였다고 가정해 보자. A방의 방식대로 계산하면 (1+1+1+1+1+1+1+1) = 8 이므로, ‘3+5 = 8’이라는 결과가 나오며, A방은 이 결과를 출력창으로 내보낸 것이다. . A방이 수행하는 방식은 것은 덧셈을 세기(counting)로 고려하는 방식이다. A방은 덧셈문제가 입력창으로 들어오면, 이를 세기(counting)문제로 전환하고, 개수를 헤아려 덧셈의 답을 찾고, 찾은 답을 출력창으로 내보낸다.

이에 비해 B방은 덧셈표를 이용하여 덧셈을 계산한다고 가정해 보자. 1은 덧셈표를 보여준다. 덧셈표를 이용하여 덧셈을 수행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x+y’라는 수식이 있을 때, 수식에 있는 x는 덧셈표의 첫번째 행에서 찾고, 수식에 있는 y는 덧셈표의 첫번째 열에서 찾는다. 수식 ‘x+y’ 를 계산하는 방법은 덧셈표의 첫번째 행에서 찾은 x, 첫번째 열에서 찾은 y가 가리키는 좌표의 숫자를 찾는 과정이다. 1에서는 ‘3+5’를 계산하는 과정을 간단히 표시하였다. 진한 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3+5’ 덧셈문제를 찾는 과정이다. B방의 덧셈방법 즉, 덧셈표를 이용하는 방식에는 헤아리거나 세는 과정이 들어 있지 않다. 이 방법은 덧셈 문제를 표에서 값을 찾는 문제로 전환시켜 해결하는 방식이다. A방이 덧셈을 세기(counting) 과정을 통해 해결하였다면, B방은 덧셈을 찾기(searching)과정을 통해 해결하였다. A방과 B방은 덧셈의 풀이 과정은 다르지만, 덧셈이 결과는 동일하다. 참고로 표1. 덧셈표에서 c는 자리올림수 즉 carry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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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덧셈표를 이용한 덧셈과정



컴퓨터는 덧셈을 인간이 수행하는 덧셈방식을 이용해 수행하지 않는다. 컴퓨터가 수행하는 덧셈은 B방처럼 덧셈표를 이용하는 방법과 유사하다. B방처럼 수행하는 덧셈 방식은 인간이 머리속에서 헤아리는 방식이 아니라, 상징기호를 조작하는 방법이다. 이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는 쉽게 말해 상징기호를 조작하는 기계이다.


컴퓨터는 덧셈을 할 때, 인간처럼 헤아리는 과정이 없으므로, 진정한 덧셈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야 할까?, 아니면 덧셈의 결과가 인간의 덧셈방법에서 나온 결과와 정확히 일치하므로 덧셈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할까? 컴퓨터가 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질문은 덧셈을 너머 더 넓은 범위로 확장할 수 있다. 컴퓨터는 바둑의 수를 구할 때, 인간과 다른 과정을 통해 찾아낸다. 이 때, 컴퓨터는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지 바둑 수를 찾아내므로 바둑을 둔다고 볼 수 있는가? 아니면, 인간과 다른 방식으로 동작하여 바둑 수를 찾아내므로, 진정으로 바둑을 둘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컴퓨터는 인간의 언어를 번역한다. 그러나, 인간이 언어를 번역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번역을 수행한다. 이 경우, 컴퓨터는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봐야 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한 번역과 컴퓨터가 한 번역은 번역결과가 정확히 일치하므로, 내부 과정은 무시하고 결과의 정확성만을 고려하여 컴퓨터는 인간의 언어를 이해한다고 보아야 하는가.


이런 부류의 질문은 과학으로 확장할 수 있다. 양자역학은 복소수를 이용하여 계산한다. 그리고 복소수를 이용한 계산결과는 현실과 잘 들어맞는다. 양자역학에서 복소수로 계산한 결과가 실세계와 잘 들어맞는다는 이유로 우리는 이 세계가 복소수로 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는 계산 결과가 세상과 잘 맞는다는 이유로, 세상은 계산 과정대로 이루어 졌다고 봐도 되는가? 우리는 덧셈표로 계산한 덧셈 결과가 잘 맞는다는 이유로, 인간의 머리에는 덧셈표와 같은 기호뭉치가 있고, 인간이 수행하는 덧셈은 이 기호뭉치를 조작하는 과정이라고 봐도 되는가? 일반상대성 이론이 실세계과 잘 맞는다고 해서, 일반상대성 이론을 계산하는 과정대로 세상이 구성되어 있다고 봐도 될까? 세상의 내부구조는 일반 상대성 이론을 표현하는 수식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는 결과가 잘맞는다는 이유로 이론이 가진 수학의 계산과정처럼 세상이 동작한다고 착각할 가능성은 없는가?


지금까지 앞에서 제시한 물음은, 세상은 인간이 수행하는 추상적 사고의 방법대로 동작하는 가를 묻는 것이다. 사람이 자랑하는 인간의 위대한 능력 중에 하나가 추상적 사고 능력이다. 많은 경우, 세상은 인간이 수행하는 추상적 사고와 동일한 방식으로 동작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회는 추상적 사고능력을 중요시 한다.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유지하려면 추상적 사고능력이 좋아야 한다. 추상적 사고능력이 좋은 사람들이 결국은 사회가 좋은 직장이라고 인정하는 곳에 취직하여 안정된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추상적 사고 능력은 결국, 상징기호를 머리 속에서, 잘 조작하여 이해하고 표현하는 능력이다. 상징기호 조작능력을 인간이 가진 위대한 능력으로 생각되었지만, 어느 순간 돌덩어리를 얇게 만들어 자극을 주었더니, 이 돌덩어리가 인간보다 상징기호를 훨씬 더 잘다루게 되었다. 우리가 자극을 준 얇게 만든 돌덩러리가 컴퓨터라는 기계다.




상징기호조작은 기계가 더 잘한다.


컴퓨터가 덧셈을 하는 방법은 인간처럼 수를 헤아리는 방식이 아니라, 상징기호를 조작하여 또 따른 상징기호를 찾는 과정이다. 컴퓨터란 결국 기호를 조작하는 기계일 뿐이며, 기호의 의미를 추구하는 기계가 아니다. 여기서 인간이 하는 활동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상징기호를 조작하는 기계처럼 살고 있지는 않는가? 상징기호조작에 머물러 있는 인간은 결국 돌덩어리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하기 쉽다.


산업사회가 되면서, 대부분의 인간이 하는 일은 상징기호를 조작하는 일이다. 수학, 물리학, 철학,경제학등 교육을 통해 전수되는 것들을 생각해 보자. 대부분 추상적인 개념을 다루고 이 개념을 표현하는 상징기호를 다룬다. 우리 일상생활을 관찰해 보자. 하루 대다수를 차지하는 작업들, 예를 들어, Internet을 하고, TV를 보고, 영화를 보고, 책을 보고, 휴대폰을 이용해 사람들과 접축하는 일들 중 많은 부분이 실제 세계와 접촉하기 보다 상징기호와 접촉하여 상징기호를 경험하는 일이다.


상징기호조작을 신속하고 능숙하게 진행하는 사람을 총명하다고 부른다. 아이큐 검사를 생각해 보자. 아이큐검사의 문제들은 보면 상징기호를 남보다 신속히, 정확히 조작할 수 있는 지 검사하는 것들이 주를 이룬다. 회사에 입사하기 위한 시험들, 자격증을 얻기 위한 시험들을  봐도, 상징기호를 이해하고, 상징기호로 상상하고, 상징기호로 표현하는 능력에 대해 평가하는 문제가 대다수이다.


알파고가 세계 최강의 바둑기사 이세돌을 이겼을 때, 우리들은 깨달았다. 이제 상징기호조작에 기반을 둔 추상적사고능력은 기계가 인간보다 더 낫다는 것을. 이런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하나? 추상적 사고능력을 가지고 기계와 경쟁하여야 하는가? 아니면 또 다른 삶의 방법은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한다.



4.022 명제는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사정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보는 책들 중, 특정 부류, 예를 들어 철학이나, 수학, 과학책들은 모두 명제의 나열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에서 주장한다. 명제는 참,거짓을 내재하지 않는다고. 명제는 단지 그것이 참일 경우에 사정이 어떠한지를 보여줄 뿐이라고. 그럼 참,거짓은 어디에 있는가?


2.223 그림이 참인지 거짓인지 인식하려면 우리는 그것을 현실과 비교해야 한다.
2.224
오로지 그림만으로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인식할 수 없다.


논리철학논고는 주장한다. 참과 거짓은 현실과 비교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지, 그림(명제)만으로는 알 수 없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철학책에는 길이 없다. 철학책에는 진리가 없다. 진리를 알고 싶은가? 현실과 맞닥드리고, 현실에 젖어들고, 현실을 느껴라. 직접 밥을 하고, 직접 생활용품을 만들고, 직접 옷을 만들고, 직접 먹을거리를 길러라. 책은 옆에 놔두고 가끔 보기만 해라. 추상적 사고능력으로만 살려고 하지 마라. 그러는 순간, 세상은 당신을 컴퓨터라는 기계의 대용품으로 취급할 것이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이 우리를 위해 해준 말이다.


 

 

 

 


Posted by 수유너머104

린 마굴리스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리뷰



 로라(수유너머104 회원, 생명과학과 철학 세미나 반장)




들어가며

린 마굴리스의 저서 생명이란 무엇인가?” 3번에 나누어 읽었기 때문에 지난 주 세미나는 린을 읽는 마지막 세미나가 되었다. 이 책 이외에도 그녀의 책은 공생자 행성”, “마이크로 코스모스”, “섹스란 무엇인가 등이 있고 그녀가 타계한 이후 아들 도리언 세이건이 여러 과학자들의 추모 글을 엮은 린 마굴리스도 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는 생명에 관하여 전반적인 것을 다루고 있고, 특히 보이지 않는 미생물의 세계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명으로 여기지 않았던 지구 물질의 생명적 현상에 관한 놀라운 내용이 담겨져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 학계에서도 논란이 되는 학설들이 꽤 있어서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그녀의 다른 책도 함께 읽었으면 했으나 앞으로 읽어가야 할 저자들의 책이 많아 이것으로 린 마굴리스를 지나쳐 가야했다. 많이 아쉬웠다.

 


브루노와 버틀러를 닮은 그녀, 린 마굴리스

린 마굴리스가 진화사의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이룩해내었다든지, “진화사를 다시 쓰게 했다라고 하는 동료 과학자들이 평가보다도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읽는 동안 내가 읽어 낸 것은 진실을 향한 그녀의 열정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처음으로 공생설을 접하는 순간 그것이 사실일 것이라는 직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 후 많은 실험을 통해 공생을 증명해 내었다. 생물학계의 주류라는 거대한 벽 앞, 미생물의 영역과 진화생물학의 영역을 둘 다 헤집고 다녀야하는 거센 파도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거침없이 돌진하는 무쇠와 같은 열정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완강하게 동료들과 논쟁하고 설득했던 그녀도 무척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많은 논쟁의 장에서 그녀는 전투에 임하는 전사처럼 거칠게, 때로는 상당히 방어적인 자세로 다른 학자들을 대했다는 그녀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을 동료들의 증언에서 느꼈기 때문이다. 여유로운 사람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이 책에서 이단으로 몰리고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으며, 결국에는 종교재판에서 화형당한 조르다노 브루노 (1548~1600)를 과학 역사 비극의 사례로 들었고, 뉴턴의 과학과 다윈의 기계론적 진화라는 거대한 주류에 반기를 들었던 사뮤엘 버틀러(1835~1902)에 대하여도 자세히 기술하였다. 버틀러는 다윈이 진화과정을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묘사한 점에 질려하면서 다윈이 생물학에서 생명을 도려냈다고 빈정대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생명을 에 의해 움직이는 물체로 보는 다윈의 신뉴턴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각 있는 생명이 자신의 진화에 부분적인 책임을 지는 존재로 묘사했다. 그것은 마치 신다윈주의자들의 교리적 진화적 종합에 대한 그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듯 했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지구를 숨 쉬고 기억하고 여러 습관을 지니는 괴물로 여겼다. 지구가 살아있다고 믿은 케플러의 생각이 오늘날 우스꽝스러워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우리에게 과학이 점근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말해 궁극적인 지식이라는 최종 목적지에 결코 도달하는 법 없이 단지 근접해갈 뿐임을 일깨워 준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P17)

 

그녀의 공생 가설이 이렇게도 힘들게 주류에 편입[각주:1]되었지만, 다시 새로운 발견이 나타나면 그녀의 이론도 신화 속으로 사라질 수 있음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신 다윈주의자들과의 논()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 이후 인류는 혁명적인 진화론을 무기로 신의 질서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그 후 여러 분야의 연구를 통해 20세기 중반 (1930~1940년대) 진화적 종합[각주:2]이라는 다소 고전적인 진화론의 틀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로써 진화론은 또 하나의 교리적 학문의 성격을 띠게 된다.


모든 과학 중에서 특히 생물학의 개념은 환원주의적일 수가 없고 비가역적이며 창발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과학 개념은 가설이지 교리가 아니기에 의문과 반증에 열려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과학 각 분야는 꽤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편이다. 신다윈주의자들이 형성한 이론에 따르면, 자연선택은 개체군 내의 유전자 돌연변이와 재조합을 통한 점진적인 변형이 진화를 이끈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끊임없는 생존 경쟁이 주가 되고 안정된 유전적 공생은 아주 드물게 출현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린이 주장했던 진화적 변혁의 핵심이 공생이라는 주장, 특히 감염을 통한 유전이나 수평적 유전적 공생은 배재하였다. 린이 넘어야 했던 또 하나의 산은 미생물학과 진화학의 두 분야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있으며 서로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생물을 연구하는 분자 생물학자들은 진화를, 진화를 연구하는 진화 생물학자들은 미생물에 대해 무지할 뿐 만 아니라 서로 알려고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SET( Serial Endosymbolis Theory) ‘연속 세포 내 공생 이론 

SET는 린 마굴리스의 핵심이론으로서 역사와 능력이 각기 다른 세포들이 융합한다는 이론, 하나 됨의 이론이다”. SET 이전에는 난자와 정자의 수정 같은 세포 융합성(cell-fusion sex)을 다룬 이론이 없었다. SET는 융합성을 가능하게 하는 이론이다. 그녀는 진화적 새로움이 대부분 공생의 직접적인 산물이었으며 생전에 그렇게 믿고 살았다.

연속 세포내 공생이론에서 연속이라는 말은 융합이 순서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가리킨다. 공생자들이 완전히 융합되어 새로운 존재를 만든다면 그 새 개체’, , 융합의 결과물들은 정의상 공생 발생을 통해 진화한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사실, 공생 발생이라는 개념은 한 세기 전에 등장했었지만 그 이론을 검증할 수 있는 도구들이 나온 것은 최근이라 최근에야 공생이론이 증명될 수 있었다.

 

세균에 대한 그녀의 사랑과 변명

공생이론도 수많은 오해와 논쟁을 통하여 이제는 교과서에 당당히 실리지만 진핵 생물을 탄생시킨 원핵생물계의 주인공을 차지하는 세균에 대한 편견은 또한 어떠한가? 세균에 대한 개념은 질병의 세균론으로 시작되어서 일반적으로 세균이 숙주에 해악을 끼치기만 하는 나쁜 존재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병의 치료와 의료기구에 쓰이는 무균, 멸균의 개념이 건강한 조직의 특성이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편향적인 세균 개념은 일반인 뿐 아니라 과학계에서도 이렇게 받아들여졌었기에 우리 인류의 기원이자 선조이면서 지금도 우리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균에 대한 오해를 아직도 많이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세균은 반쯤 생기다 만 생명이 아니라 완전한 생명이며 35억 년 이상 계속 번성해온 진화한 존재다. 세균은 지구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화학 물질 발명자이지 단순한 병원균이 아니다, 자신을 복제하는 생명은 물질적 특성이 보존되어있으므로 세균 세포는 먼 과거에 존재했던 지표면의 화학적 성질에 대한 열쇠를 간직하고 있다...멸종한 적이 없는 세균은 우리를 먹이고 입히고 집까지 제공하는 식물이 잡초가 아니듯이 병원균이 아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P84~85)

 

그녀는 생명권의 지배자는 세균이며 생명은 세균이다라고 일축함으로써 우리의 무지를 단번에 깨버린다.

 

가이아

학계의 여러 영역을 넘나 들어야하는 린 마굴리스의 주장은 재야 학자 제임스 러브록과 함께 발전시킨 가이아 이론과도 연결된다. 그녀는 어떠한 기관의 도움도 연구비 지원도 전혀 받지 않은 채 생명이 지구의 대기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탐구하던 재야의 기상학자 제임스 러브록의 연구를 적극 지지하고 그와 많은 교류를 하였다. 그리고 저서 공생자 행성에서 자신의 중요 개념인 SET와 가이아 이론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밝히는 것을 주제로 삼았다.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가이아 이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해가 지구는 하나의 생물이라는 것인데 가이아 이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러브록은 생명이 어떤 행성에 있던지 간에 그 행성의 유체들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기온과 대기 조절이 지구 규모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 이런 중요한 환경 조건들은 적극적으로 조절되어야하며 생명이 자신의 환경을 조절하다고 주장하였다. 살아있는 지구인 가이아는 하나의 생물이나 한 생물 집단을 훨씬 초월한다고 그녀는 설명한다. 어떠한 생물도 자신의 배설물을 먹지 아니하므로 한 생물의 폐기물은 다른 생물의 먹이가 되지만 가이아 계는 자신이 먹이와 남의 폐기물을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지구 규모의 물질들을 재순환시킨다고 한다. 그 결과가 바로 가이아이다. 많은 진화론자들은 가이아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린은 가이아 이론을 적극 지지하는 진화론자였다.

 

맺으면서

생명에 대해 따뜻하면서도 열정적으로, 때로는 냉정하게 써내려간 린 마굴리스의 서술 중에서 어떤 표현들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문학에 가까웠다. 아마도 과학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각주:3] 생명을 생물학으로 되돌리려한 노력의 전략과 전술[각주:4]때문에 다소 혼란스러움이 느껴졌을 수도 있다. 그녀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서 생명은 생존이라는 목적성과 방향을 가진 존재라고 일관되게 답한다. 한편, 린은 진화 이론이 인간 사회과 관련된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데 필수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린 과학자였다. 그녀는 인간이 이룬 이 엄청난 기술 문명과 부의 근원이 태양 에너지로부터 기원하고 축적된 라고 잘라 말한다! 인간들은 독립적으로 영양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동물류이다. 식물들이 태양의 에너지를 광합성을 통해 축적한 것을 초식동물들이 먹고 식물과 초식동물들을 먹는 인간이 그 에너지로 뇌를 사용하고 도구를 이용하여 창출해 낸 이므로. 태양과 다른 생물들과 환경에 빚을 지고 사는 인간들이 오만함을 반성하고 겸손해져야하는 이유를 그녀로부터 과학적으로 명확히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열정적인 생명이야기 중에서, 생명의 특징은 팽창이며 인간이 기술적 공생을 기반으로 우주로 팽창하려는 욕구로 인해 우주 식민지 건설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펼치는 부분에서 불편한 마음이 일어났다.

 

지구의 계속적인 변신은 그곳에 사는 각양각색의 생물이 가져온 누적된 결과다. 인류는 생명 교향곡의 지휘자가 아니다. 우리가 있든 없든 생명은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혼란스러운 소동의 배경에서는 중세의 음유 시인이 먼 언덕을 오르면서 연주하는 것과 같은 새로운 목가가 흐르고 있다. 그 선율은 제2의 자연으로서 기술과 생명이 하나가 되어 지구의 다양한 종을 포함하는 번식체를 다른 행성이나 태양계 너머 항성으로 퍼뜨릴 것을 약속한다. 녹색 생태학의 관점에서 보면 첨단 기술과 지구 환경 변화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완벽하게 이치에 맞는 행동이다. 지금은 인류의 절정기이다. 바야흐로 지구는 씨앗을 뿌리려고 한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P327)

 

식민 지배를 했던 유럽의 국가들이나 미국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 같은 것은 하지 않는 것일까? 위 인용문에서처럼 퍼트리는 것이 꼭 인간의 종만이 아닐지라도 피식민지 국가를 경험한 국가의 국민으로써 나는 팽창하려는 욕구와 타국()의 공간에 대한 침략에 거부감이 있다. 그것이 과학적 호기심과 개척 정신이라고 지칭하면서 긍정적으로 본다고 해도 말이다. 우주 식민지 건설 후보지를 위한 화성 탐사도 그 연장선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처럼 먼저 달려가 깃발을 꽂으면 그 사람의 소유가 되었던 것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백인들이 인디안 원주민을 내쫒으며 만든 역사이다. 미지에 대한 호기심과 개척 정신이 제국으로 연결되었던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화성에 발을 딛고 깃발을 꽂아 영역을 확인하려드는 인간의 행동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화성에 생명체가 살고 있다면 그 것은 제국적 침약의 역사를 되풀이 하는 것이다. 진행되고 있는 화성 탐사는 지구적 규모의 생명권을 우주적 규모의 생명권으로 확장하게 해줄 것이지만 린 마굴리스가 강조했듯이 이 모든 부를 소유할 수 있는 진정한 소유자는 태양뿐 이라는 것이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그녀가 생존해 있다면 이 부분은 토론해보고 싶다. 지구의 생명체가 지구 밖의 행성까지 팽창해도 진정 괜찮은 것인지..

단 한권으로 린 마굴리스를 다 이해 할 수 없기에 이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쉬웠지만 다른 진화 생물학자들을 읽어가면서 그 녀가 던진 메시지의 의미를 더 깊게 이해 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다음 읽을 진화란 무엇인가의 저자 Erenst Myer가 진화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잘 설명해줄 것을 기대하면서..

 

 

  1. 진핵생물의 기원에 대한 이러한 추측은 진핵생물이 부분적으로 진정세균과 고세균의 유전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다 (Margulis etal, 2000). (P 109, 진화란 무엇인가, 에른스트 마이어) [본문으로]
  2. “진화적 종합”이란 다윈이 진화론을 내놓은 이후 생물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지속적인 변화에 실질적으로 관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80여년의 논쟁 끝에 도달한 합의이다. 그 합의는 “진화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어나는 개체군의 특성 변화이다.”라는 것인데 개체군이 진화의 단위라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3. 이 책은 저명한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가 물리학적으로 생명에 대해 질문한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물학적 답으로 저작한 책이다. [본문으로]
  4. 열역학 제 2법칙-진화와 엔트로피 법칙(열역학 제2법칙)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닫힌계에서만 유효한데 생물의 진화는 열린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생물은 끊임없이 필요한 에너지를 태양으로부터 얻고 환경의 희생을 대가로 엔트로피를 감소시킬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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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정상참작 될 수 없는 고백 앞에서

금은돌, 그는 왜 여편네를 우산대로 때려눕혔을까를 읽고

 

 

 

 

 

 

도경(수유너머104 회원)

 

 

 

 

한국문학사 수업이 한창인, 대학의 한 강의실이 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남학생이 김수영을 주제로 리포트를 발표한 뒤의 일이다. 여학생들은 김수영 시의 여성혐오적인 측면에 분노했다. 교수는 되도록 중립적인 태도로 김수영 시를 분석하고 그와 그의 시가 놓인 문학사적 위치를 설명했으나 그녀들은 설득되지 않았다. 이 수업 기말 리포트 제목 중 하나는 찌질이 김수영이었다.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그보다 먼저 웃는민중의 저력을 노래하고()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정권의 부정에 더욱 정면으로, 온몸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자신을 통렬히 반성한(어느날 고궁을 나서면서) 참여시인 김수영은 어쩌다 찌질이가 되었는가.

 

 

만약에 나라는 사람을 유심히 들여다본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내가 시와는 반역(反逆)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김수영,「구름의 파수병」에서

 

 

  

 

사실 김수영은 끊임없이 고백했다. 나는 보잘것없고 변변하지 못하다고. 나는 찌질하다고. 시와, 문학과 반역된 생활을 하고 있다고. 그의 생활, 그 반역이란 나의 자식과 나의 아내와 그 주에 놓인 잡스러운 물건들이었다. 가정과 돈, 안일한 일상과 천박한 자본주의. ‘여편네와 아들놈을 데리고 낙오자처럼 걸어가면서그는 조용히 미쳐갔다. 김수영의 그 고절과 비애(생활)의 핵심에는 어김없이 여편네가 있었다. ‘단돈 10원에 벌벌 떠는 여편네(이 거룩한 속물들). ‘여편네의 계산’ ‘너의 독기가 예에 없이 걸레쪽같이 보이고(만용에게) 봉건의 노예이던 여자는 지금 금전으로 그 상전이 탈을 바꾸어 있을 뿐(내실에 감금된 애욕의 탄식)이지만 그런 여편네의 방에 와서 기거를 같이해도’ ‘나는 점점 어린애(여편네의 방에 와서 신귀거래1-). 이 무력한 남성 시인은 비속한 여편네여성을 혐오한다. 그리고 그 혐오를 경유해 자기를 비하한다. 찌질이 김수영, 맞다. 여학생들의 분노에 공감한다.

 

 

김수영은 고백했다. ‘시에서 욕을 하는 것이 정말 욕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간 문학의 악의 언턱거리로 여편네를 이용한다는 것은 좀 졸렬한 것 같은 감이 없지 않다(시작 노트 4). 김수영의 여러 시가 여성을 혐오와 폭력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는 독자는 없을 것이다. 혐오의 비윤리성을 스스로 고발하고 윤리적 문제에 자기를 투신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김수영은 문학과 생활을 구분하지 않았다. ()은 시의 재료였고 그래서 너무 솔직해서, 문제가 되었다. 김수영 연구자, 이영준 교수의 말대로 김수영의 시가 갖고 있는 문제적인 측면은 그 시대가 그랬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드러낸 것으로 용서받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용서,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줌.’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 어린놈이 울었고
비 오는 거리에는 / 40명가량의 취객들이 /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 아까운 것이 /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김수영,「죄와 벌

 

 

그러나 용서는 불가하다.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힌 죄와, 죄를 꺼리지 않은 시대와, 그 시대에 대한 자백 역시 더 이상 정상참작 될 수 없다. 사회에 만연한 여성-타자 혐오를 예민하게 기소하는 시대. 우리는 문학은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을 읽고 써야 한다. 꾸짖고, 벌하고 드러내야 한다. ‘밤새 고인 가슴의 가래마음껏 뱉어()낼 때다. 나를 부수는 장소에서, 철저하게 실패를 공부하는 일. 그 장소가 문학이기 때문에. 김수영은 스스로 탑을 쌓지 않았으며 자기 신화화를 반대했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오늘 아침에 서약한 게 있다니까 / 남편은 어제의 남편이 아니라니까 / 정말 어제의 네 남편이 아니라니까(거미잡이) 이것은 시인 김수영이 서약한 기꺼운 벌일 것이다.

 

 

   

김수영은 “여편네”를 이용하면서, 얼마나 폭력적인 남성인지, 얼마나 여성을 무시해왔는지, 폭로해 왔다. 심지어 황홀과 연민의 순간에도 자기 분석을 놓지 않았다. 시인 자신은 철저한 텍스트였다. ― 금은돌,「그는 왜 여편네를 우산대로 때려눕혔을까」(68)

 

 

금은돌 작가는그는 왜 여편네를 우산대로 때려눕혔을까에서 문학적 프로파일링을 시도한다. 라는 부사로 여편네사건을 둘러싼 상황을 삽으로 파내려 한다. 접사 카메라가 되어 밀착하여 바라보는 일. 다시 멀어지는 일” “부사 의 작동방식에 따라서. 작가는 김수영의 출신에 밀착해본다. 연극배우였던 김수영의 시가 드라마적 감정구조로 배치되어 있다는 점을 토대로 시를 분석한다.죄와 벌화자(배우)의 자기 인식(폭력을 휘둘렀지만 위대한 인물은 아닌)과 성격(반성하는 기미 없이 투덜) 그리고 가치관(타인의 고통보다 남자의 체면이 중요)을 간파하고 화자의 방백에서 철저하게 아웃포커스대사는커냥, 눈빛 한 번조차 나타내지 않(56)는 여성의 희생을 읽어낸다.

 

 

만용에게식모분석에서도 드라마 흐름과 주도권을 쥔 남성은 혼자서 모든 상황을 종료(58)하는 현장을 짚어낸다. 여편네, 어디 마음대로 화를 부려보려무나!라는 직접화법으로 아내의 간접화법을 덮어그녀의 목소리를 은폐시키는 형식을 치밀하게 밝혀낸다. 화자는 타자(아내)에 대한 책임보다 의 자유를 중요(59)하게 여기고 있다고 판단, 그런 배역을 지시한 시인(연출가)남성적 지배 욕망을 실연(acting-out)하는 이데올로기 공연(57)을 비판한다. 그가 자신의 위치를 낮춘 것은 포즈에 불과하사건의 본질을 은폐하기 위한 전략이자 뒤집기 수법(61)이 아닌지 의심한다. 자유와 정의와 양심과 사랑의 표어를 내걸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폭력(63)이라고.

 

 

접사 카메라의 수사 다음 “‘가 놓여야 할 위치는 “over view”였다. 작가는 거리를 두고 사건들을 살핀다. 화자가 흠칫, 놀라(이혼 취소(離婚 取消))거나 섬찍함을 느끼는(()에서) 지점에 주목한다. 아내의 눈동자에서 그대가 흘리는 피를 본 순간. 화자는 놀람을 느끼며 내면에 스며든 눈동자 타자를 직감하는 기호(65)로 받아들인다. 아내는 화해 가능한 마주봄을 압도하기도 했다. 아내와의 성관계 중 화자는 아내에게 적나라하게 개관당하는 지점에 이른다. 느닷없이 거울로 비춰진 섬찍한 낯섦을 느낀 그는 아내의 응시에 더 이상 내가 나를 속일 수 없는 지점(67)에 이른다. 시선이 역전당하면서 자리바꿈이 이루어(68)진다. 여성-타자가 높은 곳에 자리하고 시인은 저만치 아래로 미끄러지는(46) 남성-주체가 무력화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자본주의에 적응하지 못하는 속물근성을 여성에게 전가하고, 위로받으려고 했던 포즈들. 여성을 비하하며 요설조로 몰아붙이고, 폭력성을 드러냈던 장면들, 자신이 얼마나 형편없는 남성이었는지 보여주었던 자학적인 면모들. 이 과정에서 드러난 것은 사랑의 온전함이 아니었다. 우산대로 여편네를 내리치는 폭력성까지 고백하면서 증명하고 싶어 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사랑의 결핍이었다. (70)

 

 

몇 년전, 한국문학사 수업이 한창인 대학의 한 강의실에 금은돌 작가가 있었다. 여학생들은 김수영 시의 여성혐오에 분노했다. 찌질이 김수영. 작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김수영은 찌질했는가?” “김수영은 왜 자신의 찌질함을 기록했는가?” “그는 왜 여편네를 우산대로 때려눕혔을까.김수영은 남편과 아내의 일상을 적나라하게, 문학으로 끌어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는 모순과 폭력성을 까발리려했다. 사랑의 결핍을 역설하고 진정한 사랑의 이행을 실현”(70)하기 위해서. 찌질한 자신을 폭로하고 철저하게 자신을 분석하면서. 그러나 김수영의 (자유와 정의와 양심과) 사랑론이 여성-타자 혐오를 경유했음에도 위대함으로 승인되어 온 것은 남성 중심적인 관점에서 김수영 신화를 만들어 나간 것(71)이며 이 신화는 유죄 판결을 피할 수 없다고, 작가는 결론 내린다.

 

 

그리고 금은돌 작가에게 이것은 단지 여성혐오와 페미니즘에 관한 비판으로 끝나지 않았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시를 왜 쓰는가?” 질문의 미궁 속으로 던져진 채, 작가는 오랫동안, 방황했다고 한다.그는 왜 여편네를 우산대로 때려눕혔을까를 쓴 이후 그녀는 아리아드네의 실마리를 잡았을까. 미궁에서 빠져나왔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문학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은 라는 부사를 가슴에 새기고 사는 이들이기 때문에, 금은돌 작가는 “‘문학하다는 문장에 끌려다니는 사람이기 때문에, 정상참작될 수 없는 또 다른 사건에 부사 를 꼽을 것이고 새로운 질문의 미궁들 속으로 괴롭게 그러나 기꺼이 들어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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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Programming Language 소개

 

 

 

조정현(수유너머104 세미나 회원)

 

 

 

 

개인용 컴퓨터를 켜보자. 노트북을 켜봐도 된다. 화면이 밝아지면서, 컴퓨터는 로그인 정보를 입력하라고 요구한다. 키보드를 통해 자판을 두드려, 로그인 정보를 입력하면 모니터에는 바탕화면이 뜬다. 바탕화면은 상징기호의 모임이다. 바탕화면에는 휴지통 아이콘이 있다. 이 아이콘은 우리가 업무를 볼 때 옆에 있는 휴지통을 상징화 한 것이다. 바탕화면에는 문서(document) 아이콘이 있다. 우리가 일하면서 작성하는 서류를 대표한다. 바탕화면에는 폴더 아이콘이 있다. 서류나, 문서를 넣는 폴더를 나타내는 기호이다. 컴퓨터 바탕화면이 보여주는 상징은 확실하다. 우리 책상 위(Desk Top)에 나오는 사물을 아이콘으로, 즉 상징기호로 화면에 보여 주는 것이다. 개인용 컴퓨터는 우리에게 책상 위에서 하는 작업을, 아이콘이라는 상징기호를 조작하여 처리하도록 도와주는 도구이다.

 

영화에는 나오지만, 실제 세상에는 보기 힘든 컴퓨터를 상상을 해 보자.
개인용 컴퓨터를 켠다. 화면은 밝아진다. 다음과 같은 문자가 화면에 뜬다.
안녕! 세상아!!”

 

 

 


컴퓨터가 안녕! 세상아!!” 라고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자신이 존립하고 있음을 선언하는 컴퓨터를 만난 것이다. 당신은 이 컴퓨터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새로운 종()인 독립된 개체를 만났다는 느낌을 받지 않겠는가?. 누구인가 컴퓨터를 이렇게 만들었다면, 그는 컴퓨터에게 생명을 부여하려 한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 컴퓨터는 인간에게 봉사하는 존재가 아니라 독립된 개체이다.

 

우리가 개인용 컴퓨터을 이용할 때 보이는 바탕화면 역시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인간이 수행하는 작업을 보조하는 도구로써, 상품으로 만들어진 대상이다. 이에 반해, 우리가 위에서 상상해 봤던, “안녕!! 세상아라 이야기하며, 세상에 자신이 있음을 선언한 프로그램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프로그램이다. 누구를 위하여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그래서 상품으로 이용되기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램과는 결이 다르다.

 

‘C Programming Language’는 데니스 리치와 브라이언 커닝햄이 쓴 프로그래밍 기술서적이다.이 책에 나오는 첫 번쨰 예제 프로그램이 화면에 “hello, world!”를 표시하는 프로그램이다. 세상에 안녕!! 세상아!!” 라고 외치는 바로 그 프로그램이다. 데니스 리치는 켄 톰슨이란 사람과 함께 C라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만든 사람이다.  

 

 

 

C언어를 만든 사람이 자신이 만든 프로그래밍 언어를 설명한 책이 ‘C Programming Language’ 란 책이다. 쉽게 말해 저자 직강이다. 나온지 50년 가까이 된 책이라, 이 책을 보면서 C프로그램밍을 공부하는 사람은 최근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첫 번째 예제는 프로그래머에게 가장 유명한 프로그램으로, 이 예제로 인해 이 책은 지금까지 이야기 되고 있다.

 

프로그래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보통 제일 처음 만드는 것이 “hello, world”를 화면에 출력하는 프로그램이다.  python이던, C++이던, Java 이던, 어떤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우던지, 대부분의 프로그래밍 책에서 첫 예제는 “hello world” 를 화면에 출력하는 프로그램을 든다. 모두 ‘C Programming Language’라는 책의 영향이다.

 

데니스 리치는 아마도 컴퓨터를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로만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컴퓨터는 사고하는 기계였을 것이고, 사고한다는 점에서만 보면 인간과 다른 점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있어 컴퓨터가 “hello, world!!”라고 선언하도록 프로그램을 만들었을 것이다.

 

프로그래머의 작업이 컴퓨터가 특정 동작을 수행하도록 명령어를 입력하는 것이라고 규정하면, 프로그래머는 주인이고, 컴퓨터는 하인이 된다. 그러나, 프로그래머는 컴퓨터를 인간과 같이 사고하는 개체로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고 규정하면, 프로그래머와 컴퓨터는 주인과 하인 관계가 아닌, 동등한 관계가 되고, 프로그래머는 어느새 컴퓨터와 물아일체(物我一體)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프로그래머가 곧 컴퓨터가 되는 과정, 주체인 나는 없어지고, 객체인 컴퓨터와 동일화 되는 과정을 경험한다. 이 단계에 이르면 프로그래머는 인간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컴퓨터의 동작원리로 생각하게 된다. 난 이 단계를 문리(文理)가 트인다라고 표현한다.

 

컴퓨터와 일체화 되는 단계는 형이상학적 주체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이 쉽다고는 할 수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상당히 지루한 과정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단계이다. 형이상학적 주체를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은 컴퓨터와 물아일체하는 프로그래머가 될 수 없다.

 

5.633 세계 속 어디에서 형이상학적 주체가 발견될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에 나오는 말이다. 이 언명을 실생활에서 느끼고 싶다면, 이 책 ‘C Programming Language’을 읽으면서, 프로그래밍의 세계로 들어오길 권한다. 미리 이야기 하지만, 처음에는 무척 지루하다. 그러나, 문리가 트이고 다시 보면, 감동하게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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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이 돌아온다-우리 친구들에게』 서평

 

 

 

 

 

 

 

김기영(수유너머104 회원)

 

 

 

 

『코뮨이 돌아온다-우리 친구들에게』는 ‘평화’, ‘민주주의’,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 허위임을 단언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존재하는가? 애초에 평화도 민주주의도 사회도 없었던 이곳에 존재해 온 것, 우리를 연결해온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의 대답은 분명하고 어긋남이 없다. 그리고 강력하다.

 

저자 ‘보이지 않는 위원회’는 프랑스에 근거한, 코뮨의 세계적 연대를 촉구하는 강도 높은 지식인 집단이다. 이들은 많은 것들을 주장하고 선언한다. 모두가 아무도 하지 않았던 새로운 이야기 들이다.

 

이들은 평화가 허위라고 주장한다. 별일 없이 지나가는 듯 보이는 하루지만 어디선가는 테러로 수백 명이 희생당한다. 헤아려지지 않을 뿐 우리는 파국을 향해 전속력으로 추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에게 평화는 없었고 삶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면역계가 신체를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해 적들을 무찌르듯.

 

이들은 말한다. 평화의 가면을 벗기고 유혈사태를 중단하기 위해서 전쟁을 해야 한다고. 그러나 이들의 “전쟁”은 폭력과 살상이 아니다. 전쟁은 벗어나야 하는 것들과의 전면적인, 진심 어린 대결이자 “이질적인 역량들의 접촉을 주재하는 논리”이다.

 

 

 

이들은 민주주의가 허상이라고 선언한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보이지 않는 소수의 독재자들에게 조정당하고 지배되었다고. “자신을 주인으로 알지만 사실은 노예인 대중은 노예인 척 하지만 사실은 주인인 소수자들에 의해 통치당하고 있다.”(64) 인간이 통치당해야 할 만큼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존재가 아니라면 통치는 부당하고 불필요한 압제임이 분명하다.

 

만일 이들의 말대로 민주주의가 허상이라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던 수많은 “민주화운동”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1968년 프라하의 봄과 1980년 서울의 봄, 2011년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휩쓸었던 아랍의 봄을 기억해보자. 부패와 독재에 저항하던 이 싸움들은 모두 전쟁이나 외세의 개입, 또 다른 독재로 이어졌다. 혁명이 진압되자 기업들은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프로젝트를 위해 몰려들었다.

 

 

모든 것은 반복될 뿐이었다. 분노는 희망으로 바뀌었다가 절망으로 변하고, 부조리는 계속되었다. 썩은 권력이 무너진 빈자리에는 무능한 정권, 꼭두각시 권력, 새로운 독재가 들어선다. 그래서 이들은 전면전을 주장한다. 거리에서 승리하는 것, 권력을 부수는 것만으로는 권력을 해체할 수 없다. “반드시 권력의 근거를 박탈해야”(72)한다.

 

이들은 사회가 없다고 말한다. 대신 여러 세계가, 우리가 경험하는 일련의 유대, 우정, 반감, 실질적인 멀고 가까움이 있을 뿐이다.(170) 사회는 역대 통치방식들에 의해 드리워진 그림자를 지칭할 뿐 아니라 언제나 통치에 봉사해 왔다(153),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처에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들은 ‘코뮨’이라고 답한다.

 

코뮨은 언제나 존재했던 맹세, 약속이었다. 코뮨이 추구해온 것은 조직이나 기관 같은 실체가 아니라 유대의 질과 세계에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코뮨을 선언하는 것은 매번 역사적 시간을 경첩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이고, 코뮨을 선언하는 것은 서로 유대관계를 맺는데 동의하는 것이다(176). 이들은 코뮨의 ‘다시 돌아옴’을 선언한다.

 

이들은 주장한다. 우리가 사회에 포위되어 민주주의라는 허상을 좇으며 독재자들에게 부당하게 통치당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필요한 것은 바로 “봉기”와 “전쟁”이라고. 그리고 통치를 해체하고자 한다면, 봉기를 준비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그렇다. 전면전을 위해 우리는 상황에 대한 이해를 공유해야 한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이해 공유를 위한 텍스트, 자료”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지금까지의 혁명과 유사한 혁명의 반복, 혁명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 도처에 감추어져 있는, 어떤 모습으로 발현될지 짐작하기 어려운 혁명의 잠재성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이들의 말대로 유대와 약속의 역량을 가진 존재라면 시대를 탈구시키며 도처에서 고개를 내미는 코뮨을 반가이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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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서평




송재림(수유너머104 회원)





 

모건 스캇 펙(1936~2005)은 정신과 의사이자 영적 안내자이다. 그는 하버드대학과 베이스 웨스턴 리저브를 졸업한 후 육군 군의관으로 보낸 10여년의 경험을 토대로 개인과 조식에서의 인간 행동에 대한 통찰을 얻었다. 심리학과 영성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책이라는 평을 듣는 아직도 가야 할 길시리즈를 비롯하여 평화 만들기, 거짓의 사람들등을 저술했다.



거짓의 사람들을 치료 가능한 하나의 정신적 질병으로 보고 악 일반에 대해 과학적 지식 체계를 구성하고자 시도한 실험이다. 스캇 펙은 정신과 의사로서 접한 다양한 환자 사례들에서 악의 일반적 요소를 찾고, 악의 실체를 정신의학적으로 접근한다. 그는 개인적인 사례를 다루는 것에서 더 나아가 집단적인 사례를 통해 집단 악의 과정 및 예방법을 제시하였다.



처음 이 책을 읽으면 조금 당혹스럽다. “정신과 의사가 악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다니 이건 너무 종교적이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만큼 저자는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종교적으로 해석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하지만 악한 사람들에 대한 저자의 판단을 따라가다 보면 일상적 차원에서도 공감할 수 있는 의 심리학을 만날 수 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악에 대해 먼저 짚어보자. 스캇 펙이 만난 다양한 환자 중 그가 악하다고 판단한 사람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예의가 반듯한 사람이며 타인에 대한 매너가 몸에 밴 완벽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로 도덕적이고자 하지 않으며 가식과 위선의 수준에서만 도덕적인 사람들이다. 물론 그 어떤 사람도 도덕적으로 완전하지 못하다. 하지만 악한 사람들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의식하면서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문제의 원인을 타인에게 전가하거나 투사함으로써 죄책감을 거부한다. 이들의 나르시시즘은 자기 욕망을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시한다. 이 과정에서 악한 사람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들은 늘 희생양이 된다.



이러한 은 나르시시즘적 성격 장애의 한 종류로 분류될 수 있다. 그렇다면 악의 원인은 무엇일까? 유전적인 기질, 부모의 환경적 요인 등 다양하겠지만 에리히 프롬이 이야기한 악의 기원인 개인이 한 일련의 선택의 집합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양심에 따라 어려운 길을 선택하느냐 자기 욕망에 따른 쉬운 길을 선택하느냐는 온전히 개인의 몫이다. 일련의 오랜, 반복되는 선택들이 악하게 발달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악이라는 질병이 개인의 선택에 기인하기에 예방과 치료법 또한 개인이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책임을 묻는 방향이 된다.



악은 개인의 수준에서만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집단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집단 악에 대한 설명이다.



집단 내 개인들의 역할이 전문화될수록 개인이 도덕적 책임을 집단의 다른 부분에 전가시키는 일은 가능해지며 쉬워진다. 이 과정에서 개인이 자신의 양심을 버리는 것은 물론 집단 전체의 양심도 너무 분해되고 희석되어서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될 수 있다. 이 문제에 있어서 한 가지 틀림없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즉 모든 개개인이 자신을 자기가 속한 집단의 행동에 직접 책임이 있는 자로 인식할 때까지는 어떤 집단이라도 불가피하게 잠재적인 무양심과 악의 상태에 빠져 있을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p.294”



악의 집단이 되지 않기 위해서 집단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집단이 다시 개인이 되는 것, 그럼으로써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에 책임지는 부지런한 개인이 되는 것이 악을 예방하는 방법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가 경험한 거짓의 사람들몇이 떠올랐다. 내게 그들은 앞으로의 행동이 예측불가능한 사람들이었다. 선택의 기준이 무엇인지 늘 궁금했던, 그래서 나를 혼란스럽게 했던 그들의 삶의 기준이 온전히 그 자신만을 위한 욕망이었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어 후련한 기분이었다. 동시에 갈등의 상황에서 너무나도 쉽게 방어 기제를 이용하여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나의 행동들을 반성하게 되었다. 살아가며 만나는 선택의 순간에서 편한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가 필요한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Posted by 수유너머104

처음 읽는 시집

- 김혜순,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문학과지성사, 1994)

 



                                          이혜진 / 수유너머 104 회원 




저녁달

 

 

 


                                                   김혜순

 

 

 

아직 안 보이는 그가 비명을 내지를 때마다

새가 튀어올랐다

 

새들이 하늘과 땅의 경계를 자꾸 찢고 지나갔다

옥양목 찢어지는 소리가

강물 밑까지 울렸다

 

나는 검은 강물 속으로 헤엄쳐 들어가 아직 안 오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커피를 두 잔째 다 마셨다

귀울음 소리가 커지자 머리통이 점점 부풀어올랐다

머릿속 벌통을 새의 부리가 건드렸나?

머리통 속으로 송사리떼가 드나들었다

 

그러다 불현듯 모든 것이 멈추었다

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지는 해 속에서 그가 너울너울 터져나왔다

내 깊은 강물 속에서 박하 냄새가 환하게 퍼졌다





    김혜순의 네 번째 시집,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90 년대 를 마주한 우리들의 초상과도 같다. 서구 냉전 시대의 종식, 처음으로 대통령 직선제로 탄생한 정부, 88년 올림픽 이후 세계화에 취한 서울, 세상은 새롭게 쓰이고 있었다. 하나의 프레임으로 읽을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김혜순의 시도 이전과는 달라진 언술의 형태를 보여준다. 물론 특유의 당돌한 언술 방법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총구를 겨누었던 적은 이미 몸을 숨겼고, 마주한 익명의 욕망은 그의 시적 대상을 와해시키고 새로운 탐색을 요구했다.

 

    시는 시인이 비명을 내지르는 장소가 아니라 비명을 표현하는 하나의 냉엄한 작품 공간이라고 네 번째 시집에서 밝힌 것처럼 그는 해석의 지평을 넓히고 있었다. 이러한 의지는 시집의 제목,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세상을 이해하는 도구로, 경전으로 서울을 선택하고 단지 공간으로서의 서울이 아닌 동시대를 살아가는 자신과 타자가 위치한 풍경에 대한 탐색과 사유를 시작한다. 자신도 타자로 만드는 존재의 경계를 허무는 경쾌한 도발을 시도한 것이다.

 

   소개하는 저녁달 역시, 그의 달라진 시적 태도를 잘 보여준다. 외피로는 투쟁의 대상이 사라진 자리에 연모의 대상을 둔, 자칫하면 서정성이 강한 시로만 읽힐 위험도 있지만 앞서 말한 대로 시인의 쓰고자 하는 강한 의지는 그런 위험을 단숨에 뛰어넘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립 구도의 투쟁에서 화해와 초월의 시적 진술로 태도가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오감을 건드리는 그만의 감각적 시어는 풍경과 물아일체(物我一體) 되는 순간에서 정말 코가 뻥 뚫리는 시원한 박하향을 맡게 했다. 덕분에 나 역시 커피를 두 잔째 마신 우중충한 오후가 환해졌다. 옥양목 찢어지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상상의 한계를 넓혀 저녁달을 다시 읽어 본다.







 







Posted by 수유너머104

*처음 읽는 시집

                                               

  김혜순, 『리들의 음화陰畫』(문학과 지성사, 1990) 




                                              이혜진/ 수유너머 104 회원





기념일




                                김혜순



그는 계단을 올라왔다

급히 자동차를 타고

마악 들국화 뿌리 밑에서 일어나

학교로 들어서던 참이었다 

학생들은 책가방을 풀고

숙제를 꺼냈다

한 학생이

기념일 숙제에 그의

이름을 썼다

선생님은 숙제의 답이 틀렸다고

일일이 지적했다

막대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가 계단을 다

올라와 문 손잡이를 잡은 순간

학생들은 흰 고무지우개로

틀린 답을 지웠다

틀린 답은 쉬 잊혀지게 마련

 

그의 얼굴이 교실문 뒤에서

지우개 가루처럼

흩어졌다






   김혜순의 세 번째 시집, <우리들의 >를 펼치면서 그가 쓴 시가 어디로 갔을지 궁금했다. 두번째 시집을 내면서 그는 과거는 현재 인생의 전단계가 아닌 떠나면서 다시 돌아와 자신을 감싸는 둥근 시간대라고 말했다. 이처럼 이십대의 김혜순은 맴돌다 넘어지고 구멍이 나고 파고들어 몸 속에 주렁주렁 매달린 말로 시를 썼다. 하지만 그로부터 오 년 뒤, 그는 시인을 자신의 아픔을 몸 속에 넣어놓고, 모시고 얼르고 놀아주고 축제를 벌여주며 때맞춰 제사지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랬다. 세 번째 시집에서 시인 김혜순은 사인 불명으로 죽은 귀신들을 위해 떠들석하게 굿판을 벌이고 있었다. 구경꾼들이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게 뒹글고 흔들고 낄낄대다 끓어올라 깨져서 폭발한 통제 바깥의 말로 시를 썼다. 쉴틈없이 몰아치는 그말에 이끌려 마지막 장에 도착할 즈음 탈진한 그가 보였다. 시원한 막걸리라도 한잔 대접하고 싶었다.

 

   반면에, 소개하는 시, 기념일은 앞서 말한 시끌벅적한 축제나 굿판과는 거리가 멀다. 거침없이 돌진하는 그의 시 흐름과도 다른, 마치 구경꾼도 변사도 없이 혼자 돌아가는 무성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어쩌면 시인은 그의 소란이 막대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 것 보다 못할 거란 걸 짐작하지 않았을까, 절망하지 않으려 그렇게 꽝꽝거리고 흘러넘쳐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기념일은 그 안타까움으로 읽고, 또 읽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얼굴이 지우개 가루처럼 흩어지고 있을까







 

 



Posted by 수유너머104

재현의 정치성에서 상상의 정치성으로

김시종과 김혜순의 시

 

 

너는 말도, 추측도 할 수 없다, 너는 다만

부서진 이미지들 더미만 알기 때문에……

이 파편들로 나는 나의 폐허를 지탱해왔다

T.S. 엘리엇, 황무지부분[각주:1]

 

 

 송승환_시인. 문학평론가



1. 기억하기 위해서는 상상해야 한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1958)는 폴란드 모노비츠 마을에 소재한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한 그의 처참한 체험을 기록한 증언 문학이다. 이탈리아 화학자인 프리모 레비는 1943123일 파시스트 민병대에 체포되어 1945127일까지 갇혀있던 수용소의 삶을 기록하였는데, 그는 작가의 말에서 책을 쓴 의도를 이렇게 밝힌다.

 

내 책은 죽음의 수용소라는 당혹스러운 주제로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이미 널리 알려진 잔학상에 관해 덧붙일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 책은 새로운 죄목을 찾아내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정신의 몇몇 측면에 대한 조용한 연구에 자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각주:2]

 

그는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서 체험한 폭력과 굶주림, 강제 노역과 수많은 죽임을 분노와 증오의 언어로 폭로하지 않는다. 아우슈비츠의 잔혹함을 개인적 원한과 분노의 큰 목소리로 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서구 문명의 합리성 속에서 정립된 이성적 인간이 엄밀한 사유를 거쳐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여 만든 수용소에 대해 경악하며 그 수용소의 인간 군상을 관찰하고 담담하게 기록한다. 더 나아가 그는 수용소의 일상을 정밀한 사실 기록과 연대기적 순서로만 기술하지 않는다. 그는 단테의 신곡과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를 책의 근간으로 삼음으로써 이것이 인간인가를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문학적 전통 속에 자리매김한다. 파시스트 민병대에게 체포되어 떠나는 여행으로 시작한 글은 곳곳에서 단테의 지옥 묘사를 인용하며 극적으로 귀환하게 되는 마지막 열흘간의 이야기로 끝난다. 그 서사는 아우슈비츠의 현실이 단테가 묘사한 지옥과 다르지 않음을 제시하며 그 고난과 모험의 여정 끝에 극적으로 귀환한 오뒷세우스처럼 인간에 대한 본질과 새로운 통찰에 도달한 그의 성찰을 드러낸다.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있다. 마지막 남은 것이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 한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당연히 비누가 없어도 얼굴을 씻고 윗도리로 몸을 말려야 한다. 우리가 신발을 검게 칠해야 하는 것은 규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존중과 청결함 때문이다.(54)

 

이 문장들은 이것이 인간인가가 나치스의 쇼아(shoah, ‘절멸이라는 뜻의 히브리어)’를 고발하는 르포르타주(reportage)의 증언록이 아니라 증언 문학으로 성립시키는 근거이다. 독자들에게 답한다에서 나는 증오란 동물적이고 거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밝힌 것처럼 그가 겪은 수용소의 폭력을 단지 증오의 언어로 고발했다면 그 언어는 홀로코스트라는 유대인 대학살에 대한 개인의 증언에 그쳤을 것이다. 폭로와 증오로 가득 찬 언어는 개인적 분노의 표출일 뿐이다. “증오는 개인적인 것이고 한 사람에게, 어떤 이름에게, 어떤 얼굴에게 향해지는 것일 뿐이다. 그는 이성과 토론이 진보를 위한 최선의 도구라고 생각하며 정의를 증오 앞에 놓는다. 더불어 그는 사태의 경험자로서 자신이 겪은 사태를 사실적으로 기록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 사태의 발생과 과정과 결과를 되묻는다. 동물과 다르고 합리적이며 이성적이라고 자인하는 인간이 어떻게 같은 인간을 어떤 감정도 없는 사물처럼 처리하면서 대량으로 학살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 물음을 통해 인간은 동물이 될 수 없으며 동물과 다른 존엄성을 지니고 있기에 일상적으로 대면하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내고 그들의 범죄를 문학의 언어로 기억해내려 한다. 그는 쇼아로부터 살아남은 개인의 증언이 그 자체로 사태의 진실을 밝히는 주요한 역사적 사실이 될 것이지만 홀로코스트라는 사태의 전체가 아님을 인식한다. 증언이 개인의 증언으로만 표출될 때 증언은 역사적 사실의 한 파편일 뿐임을 알고 있다. 그런 이유로 프리모 레비는 자신의 체험을 사태의 전체로 간주하는 오만 대신 최대한 침착하고 절제된 증언의 언어형식을 채택하고 겸손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이것이 인간인가를 역사적 사실의 르포르타주가 아니라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하는 문학으로 성립시킨다. 그리하여 이것이 인간인가는 역사적 사실의 증언으로 정치성을 표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과 성찰을 제기하는 문학적 언어로써 문학의 정치성을 발현한다.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가 증언 문학의 정치성을 성취했다면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최초로 알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풀빛, 1985)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참가자와 목격자 20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하고 사태의 증언을 집적한 역사적 사실로서 그 정치성을 성취한 바 있다. 초판과 개정판의 집필에 모두 참여한 이재의는 초판이 피해자인 광주시민의 증언과 기록만을 토대로 집필된 데 반해, 개정판은 그 이후 밝혀진 계엄군의 군사작전내용과 518재판 결과를 반영하여 역사적법률적 성격을 명확히 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518을 현장에서 목격한 내외신 기자들의 객관적인 증언[각주:3]도 개정판에 수록하였음을 밝힌다.

최근 1980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이 시민들을 향해 51만발이 넘는 각종 실탄을 사용했다는 군 기록문서가 처음 발견[각주:4]되었는가 하면 헬기 기관총 사격(기총소사)’을 유력하게 뒷받침하는 내용[각주:5]도 발굴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증언은 새롭게 채록되고 있으며 사료는 더 많이 발굴되고 있다. 이 증언들과 사료들은 그 자체로 무구한 시민들을 학살한 계엄군의 위법성과 폭력성을 입증하고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정치성을 발휘하지만 시의 언어와는 성격을 달리 한다. 새로운 증거들은 현재까지 수집된 증언과 사료의 파편들을 재배치함으로써 새로운 역사적 진실과 정치성을 품고 있지만 그 파편들로도 완성하지 못한 공백의 어둠이 남아있다. 공백의 어둠 속에는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 자의 행방과 이름 없이 죽은 자의 목소리와 채록되지 않은 목격자의 표현하지 못한 말과 진실이 있다. 서른네 명의 단원고 아이들 목소리를 서른네 명의 시인이 받아쓴 육성 생일시 모음집 엄마. 나야.(난다, 2015)처럼 시인은 기록하고 재현하는 언어가 아니라 저 공백의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파편들로 남아있는 그들의 목소리를 상상하고 그들에게 들린언어의 형식으로 받아쓴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있음을 한꺼번에 없음으로 만들어버린 끔찍한 현실에서 그들이 여전히 여기에 함께 있음우리는 사라진 것이 아니에요/우리는 곁에 있어요[각주:6]그들의 목소리로 들려주면서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현실과 그들에 대한 망각을 비판적으로 암시하는 형식, 그 언어에서 시의 정치성이 발현된다. 한 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자들의, 무덤 없이 죽은 자들의, 이름 없는 것들의 목소리를 상상하고 받아쓰는 언어가 이기 때문이다. 시의 언어로 되살아난 그들의 목소리가 미지의 독자를 향해 나아가는 열린 공간에서 시의 정치성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기억하기 위해 상상[각주:7]하는 언어, 그것이 시의 형식이며 시의 정치성이다.

 

 

2. 거기에는 언제나 내가 없다 김시종 시집 광주시편(1983)

 

 

거기에는 언제나 내가 없다.

있어도 상관없을 만큼

주위는 나를 감싸고 평온하다.

일은 언제나 내가 없을 때 터지고

김시종, 바래지는 시간 속부분

 

재일한국인 김시종(金時種, 1929~ ) 시인의 시집 광주시편光州詩篇(후쿠다케 쇼텐福武書店, 1983)[각주:8]은 총 21편을 수록하고 있는데, 21편의 모든 시가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시편들이다. 김시종은 광주사범학교 재학 중에 맞이한 조국 해방의 공간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기성세대의 행태에 의문을 품으며 사회주의 운동에 관심을 기울였고, 1948년 제주 43항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가 결국 19495월 연로한 부모님을 뒤로하고 일본으로 밀항하였으며 오사카의 조선인 거주지 이카이노에 정착한 후 지금껏 재일(在日)’의 삶을 살면서 일본어로 시를 써 오고[각주:9] 있다.

루마니아 출신 유대인 파울 첼란이 동족을 절멸시킨 독일인의 독일어를 모어(母語)로 삼아 죽음의 푸가를 쓴 것과 유사하게 김시종은 동족을 학살하고 피식민지인으로 만든 일본인의 일본어를 모어로 삼아 시를 쓰는데, 그는 일본어를 향해 복수하는 심정”(옮긴이의 말)으로 시를 써왔다. 그러한 김시종이 1980520, 일본의 언론을 통해 광주 사태소식을 접하고 일본어로 쓴 시가 바래지는 시간 속이다. 이것은 그가 194843 제주 사건에 적극 참여하였다가 일본으로 밀항한 후, 장편시집 니이가타(1970)[각주:10]에서야 43 제주 사건을 언급하는 것에 비하면 매우 빠른 반응의 시쓰기였다. 그 후 광주라는 말이 금기시되던 일본에서 3년간 여러 잡지에 광주시편들을 발표하고 묶었는데, 그 시집이 광주시편(1983)이다.



김시종의 시집 광주시편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시구는 거기에는 언제나 내가 없다이다. 김시종은 43 제주 사건 경험을 제주에서 쓰지 않은 것처럼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에서 쓰지 않았다.[각주:11] 아니다. 그는 사태로부터 도피하거나 부재하였던 탓에 시를 쓰지 못했다. “말은 힘 앞에서도 무력하지만, 압도적인 사실 또한 말을 다시 입 속으로 밀어 넣고 꼼짝 못하게 한다. 말에는 어떤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는 평온한 공간이 있는 듯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도 내 마음은 황폐한 그대로있다고 그는 시집 후기에서 밝힌 바 있다.

 

매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아직도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증언이 생존의 특권을, 그리고 큰 문제 없이 여러 해를 사는 특권을 내게 가져다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나를 괴롭힌다중략반복하지만 진짜 증인들은 우리 생존자가 아니다. 이것은 불편한 개념인데중략우리 생존자들은 근소함을 넘어서 이례적인 소수이고, 권력 남용이나 수완이나 행동 덕분에 바닥을 치지 않은 사람들이다. 바닥을 친 사람들, 고르곤을 본 사람들은 증언하러 돌아오지 못했고, 아니면 벙어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무슬림들”, 가라앉은 자들, 완전한 증인들이고 자신들의 증언이 일반적인 의미를 지녔을 사람들이다. 그들이 원칙이고 우리는 예외이다.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1986) 부분[각주:12]

 

1987년 돌연 자살로 삶을 마감한 프리모 레비의 불편한 개념을 빌린다면, 김시종은 43 제주 사건에서 구조된 자로서 압도적인 사실앞에서 말할 수 없었다. 그가 시를 쓰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는 평온한 공간과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벙어리로서 43 제주 사건 및 518 광주 사태와 일정한 거리를 둔 일본에서 황폐한 그대로마음을 살아낸 다음에서야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은 언제나 내가 없을 때 터지고” “거기에는 언제나 내가 없고 시는, 사태 이후에 온다. 사태 이후에 오는 시는, “가라앉은 자완전한 증인들의 증언이 될 수 없는, 구조된 자의 기억과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 도래한다.[각주:13] 시집 광주시편(1983)은 사태 이후에 김시종에게 도래한 시로서 나는 잊지 않겠다./세상이 잊는다 해도/나는, 나로부터는 결코 잊지 않게 하겠다라는 서시를 서두로 시작하는데, 서시에는 거기에는 언제나 내가 없가 없었던 사태의 현장을 잊지 않겠다는 기억과 상상력의 형식이 내포되어 있다.

기억과 상상력의 형식은 거기에는 언제나 내가 없다라는 시구에 암시되어 있다. 이 시구는 세 가지 의미의 층위를 품고 있는데, 첫째, 사태의 현장에 언제나 부재하는 의 실존을 고백함으로써 살아남은 사람들은/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김준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처럼 구조된 자의 부끄러움을 드러낸다. 둘째, 사태의 현장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자비한 죽임에 대한 저항을 하지 못한 의 현실적 무력감이 스며있다. 셋째, 끔찍한 사태를 사실적으로 재현할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시인, ‘의 말할 수 없음의 언어적 무력감을 함의하고 있다.

 

때로 말은

입을 다물고 색을 낼 때가 있다.

표시가 전달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거절의 요구에는 말이 없는 거다.

― 「입 다문 말박관현[각주:14]에게부분

 

예외적으로 구조된 자이며 시인으로서 김시종은 입을 다물고 색을 낼침묵의 시간을 보냈는데, 그것은 사태를 재현하려는 표시가 전달을 거부했기 때문이며 처참한 사태를 직접 표현할 수 있는 시어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말은 이미 빼앗긴 사상(事象)에서조차 멀어져 있고/의미는 원래의 말에서 완전히 박리(剝離)”(입 다문 말-박관현에게)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김시종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명명되기 이전의 광주 사태를 시집 광주시편(1983)에서 사실적으로 묘사하거나 재현하지 않는다. 3부로 구성된 시집에서 특히, 1부에 수록된 6편의 시편들(바람, 흐트러져 펄럭이는, 먼 천둥, 아직도 있다면, 점화(點火), 벼랑)은 시집 표제 광주시편이 없었다면 단순히 바람천둥’, ‘’, ‘벼랑꽃잎의 자연소재로 쓴 시로만 읽혔을 것이다. 그러나 시집 표제 광주시편으로 인해 자연물들은 사태의 비극성을 암시하는 시의 언어로 전환됨으로써 상상력에 의한 문학적 정치성을 표출한다.

 

말이 이미 말이 아닐 때

그곳이 어디인지 묻는 일도 없을 것이다.

중략

바람은 끝없는 상()의 사제이다.

― 「바람부분

 

날이 갈수록 눈[] 저 안쪽에서

흐트러져 있는 것은 기억의 떨림이다.

― 「흐트러져 펄럭이는부분

 

소리는 언제나 하나의 모양을 새깁니다.

― 「먼 천둥부분

 

아직도 있다면

그것은 피로 물든 돌의 침묵.

― 「아직도 있다면부분

 

그 희뿌연 그림자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 「점화(點火)부분

 

그저 꽃잎만이

무변의 정적을 흩날려 간다.

― 「벼랑부분

 

김시종은 바람천둥’, ‘돌의 침묵희뿌연 그림자’, 그리고 꽃잎을 통해 무참히 살해당하고 행방불명된 광주 시민들을 비유하고 애도하며 계엄군의 폭력을 암시적으로 비판하는 시의 형식을 고안한다. 그것은 서시결코 잊지 않겠다는 시인의 기억 의지를 통해 흐트러져 있는” “기억의 떨림을 다시 붙잡고 시적 상상력의 정치성을 구현하는 형식이다. 2부의 시편들 역시 1부의 시편들처럼 자연물에 의탁한 비유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광주는 진달래로 타오르는 우렁찬 피의 절규”(바래지는 시간 속)이며, “광주는, 왁자지껄한/빛의/암흑이다”()처럼 보다 직접적인 진술의 은유를 드러내는데, 그것은 여전히 사실적 재현을 통한 정치성의 추구가 아니라 죽음은 죽음을 죽음답게 하는 산 증거의 전부였다”(입 다문 말-박관현에게)는 시적 인식을 드러내는 시적 진술의 정치성이다.

3부에 이르러서야 미군 병사공수부대”(그리하여 지금), “자네가 유신의 우두머리가 되었구먼”(돌고 돌아서), “총구에 거스러미 지는 도시”(마음에게) 정도의 사실적 지시어가 등장하지만 그 지시어들도 생경한 구호와 선동을 동반하는 정치적 언어가 아니라 하나의 우의(愚意)를 믿는”(미친 우의(寓意)) 시인의 상상력을 매개로 전개되는 시적 언어의 일부로써 작동한다. 그런 점에서 김시종은 사태를 정밀하게 바라보고 사태에 대한 정치적 올바름을 실천하기 위해 사태의 현장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정치적 언어의 사용자가 아니다. “거기에는 언제나 내가 없어서 생긴 부채감과 무력감 속에서 언제나 저 멀리 바라다보는 마음”(거리)어디로든 불러내 주는, 줄어들지 않는 관심”(거리)을 잊지 않고 광주 사태를 기억하는 시적 언어의 발화자이다. 그는 사태와 일정한 거리(距離)”를 유지하면서 그 간격에서 발원하는 상상력을 통해 광주 사태의 비극성과 정치성을 우의(寓意)’의 시적 언어로 발현시키는 시인이다. 시집 광주시편(1983)은 피식민지인으로서 지닌 일본인 정체성, 43 제주 사건의 참가자, 밀항자, 일본어를 모어(母語)로 삼은 재일(在日)조선인 시인, 그리고 재일(在日)한국인 시인이 되기까지 겪은 김시종의 디아스포라 정체성이 새겨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가로질러 우리 시대에 도착한 파울 첼란의 유리병 편지(Flaschenpost)’에 담긴 시편들이다. 언어와 시공간의 벽을 뚫어낸 시적 언어의 상상력이 시의 정치성을 발현한 시집이다.

 

 

3. 아무래도 여긴 괜히 왔나 봐 김혜순 시집 피어라 돼지(2016)

 

 

훔치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죽이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재판도 없이

매질도 없이

구덩이로 파묻혀 들어가야 한다

김혜순, 피어라 돼지부분

 

사르트르는 1947년 프랑스 작가의 상황에 대해 우리가 써야 했던 것은 그들의 전쟁과 그들의 죽음에 관해서였다. 역사 속으로 무참히 끼여든 우리는 역사성의 문학을 할 수밖에 없는 궁지로 몰린 것[각주:15]이었다고 진술한 바 있는데, 그의 진술은 지난 2011년부터 2016년까지 한국의 시인이 처한 상황을 미리 예고한 것과 다름없다. 프랑스와 한국이라는 역사적 시공간의 특수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역사성의 문학과 재난의 글쓰기를 강요하는 상황이 유사했기 때문이다. 구제역 파동과 세월호 사건, 강남역 살인사건과 예술가 블랙리스트, 촛불집회와 탄핵 사건 등은 동시대 한국 시인들의 무의식에 강한 흔적을 남겼고 언어 실험과 존재의 탐구를 추구하던 시인들조차 시의 언어로 공동체의 윤리와 사회적 책무를 짊어져야 한다는 궁지에 몰렸기 때문이다.

시인 김혜순은 바리데기의 후예임을 자임하며 본래적으로 위반의 언어[각주:16]인 여성의 언어로 시의 규범에 대항하면서 시의 타자성을 부단히 실천해왔는데,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가/아무것도 소리치지 않기가//시의 체면을 세워주기가/너무도 힘든 시절이었다”(시인의 말)고 밝히는 시집 피어라 돼지(문학과지성사, 2016)에서 지난 한국 사회의 상황과 가장 직접적으로 마주선 미학적 응전을 표출한다. 4부로 구성된 시집에서 시집 표제와 동일한 한 편의 장시 피어라 돼지(시집의 1)는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를 전면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문제작이다. 장시 피어라 돼지는 하나의 일관된 서사로 사회 현실을 비판하고 고발하는 정치적 언어를 결코 취하지 않는다. 정치적 언어는 합리성으로 위장한 동일성의 원리가 지배의 논리로 작동하는 남성의 언어이며 허위의 규율과 규범으로 여성과 약자, 소수자와 몫이 없는 자의 목소리를 억압하고 대상화하는 주체의 언어임을 김혜순은 분명히 인지하고 배제한다.

정치적 언어와 경제적 효율성이 작동하는 주체의 합리성은 돼지를 사육하는 방법에도 깃들어있다. 돼지는 비좁고 불결한 공장식 축산환경 속에서 단 한 번도 바깥을 나오지 못한 채 생산된다. 임신과 출산을 반복하는 어미 돼지는 몸을 조금도 돌릴 수 없는 폭 60cm와 길이 210cm의 차가운 금속 틀에 감금되어 있다가 새끼를 콘크리트 바닥에 낳는다. 어미 돼지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 새끼 돼지는 마취도 없이 송곳니와 꼬리를 제거 당한다. 돼지는 3세 아이의 인간 지능을 지니고 있다. 한 식구의 일원이었다면 불렸을 이름도 없이 번호로 불리는 새끼 돼지는 생후 3개월만에 도축당한다. 출산하지 못하는 어미 돼지는 6개월 만에 도축당한다. 도축장행 트럭에 오르는 순간이 돼지의 최초 바깥 여행[각주:17]이다. 그리하여 구제역은 열악한 환경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질병이었다. 2010년과 2011년 구제역 사건 당시에 살아있던 돼지들은 집단으로 구덩이에 파묻혔다.[각주:18] 평소 밟지도 못하던 흙에 파묻힌 돼지들의 울음소리가 밤부터 새벽까지 들렸다는 뉴스기사도 있었다. ‘홀로코스트는 이성적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하는 집단 학살일 뿐만 아니라 이성적 인간이 합리적이며 경제적인 수익을 위해 돼지들을 고기 생산 기계처럼 사육하고 도축하며 비경제적일 때 집단 학살하는 경우에도 해당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앞서 인용한 언론 기사는 미학적 언어와 반성적 사유가 매개되지 않는 도구적 언어로서 사실의 정확성을 바탕으로 직접 정치성을 표출한다.



장시 피어라 돼지는 구제역 사건을 시발점으로 삼아 생매장당한 돼지들, 위안부, 부엌의 여성과 엄마, 육체에 갇힌 사람들, 폭력적인 현실에 감금된 도시인, 그들의 죽음과 부활의 파편적 서사를 15편의 시편에 담아내면서 오로지 시를 통해 실천할 수 있는 알레고리의 미학적 정치성을 표출한다. 김혜순은 구제역으로 인해 돼지 320만여 마리가 살처분되거나 생매장된 사건으로부터 촉발된 죽음의 상상력으로, 증언할 언어조차 없이 파묻힌 생명들, 절멸되어가는 육체들의 목소리를 받아적고 애도한다.

 

아무래도 돼지가 죽어서 돼지로 부활한다면 어느 돼지가 믿겠어?

아무래도 여긴 괜히 왔나 봐, 나한테 템플스테이는 정말 안 어울려

― 「돼지는 말한다부분

 

이렇게 꽃 흐드러진 대낮에

돼지9 원피스돼지, 돼지9 투피스돼지, 돼지9 넥타이돼지 걸어온다

―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당신부분

 

우리는 미래의 어느 날 다큐멘터리를 찍는다. 영원히 생존할 자아를 위한 장기(臟器) 농장 프로젝트 촬영중이다중략나는 당신의 염통이 되려고 길러진다.

― 「돼지에게 돼지가부분

 

나는 돼지인 줄 모르는 선생이에요

중략

벽을 나가면 벽 바깥에 갇히는 기분이에요

― 「돼지부분

 

우리는 돼지로 돌아온다

먹고 싸는 이 돼지 자석에 철컥 달라붙는다

― 「마를린 먼로부분

 

오 한 여자가 돼지를 나가려고 한다

― 「지뢰에 붙은 입술부분

 

터진 창자가 무덤을 뚫고 봉분 위로 솟구친다

부활이다! 창자는 살아 있다! 뱀처럼 살아 있다!

― 「피어라 돼지부분

 

돼지 한 마리가 산문을 나서는 나를 멀찍이 따라온다

365부 방에서 나왔으니 춥겠지?

― 「산문을 나서며부분

 

장시 피어라 돼지의 시적 주체는 공장식 축산 환경에서 사육되고 장기이식센터에서 실험받고 도축장에서 살육당하며 흙구덩이에 생매장당한 돼지의 입장에서 말한다. “뒈지는돼지의 편에서 “q q q q” 되지도 않는 말을 하는 돼지의 입장에서 말한다. 그런 점에서 피어라 돼지의 시적 주체는 이미 타자적이며 정치적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대상화된 돼지가 아니라 인간의 입장과 대립되는 시인의 돼지-되기의 타자화를 거친 시적 주체인 까닭이다. ‘고기돼지에 불과했다면 전혀 알 수 없었을 돼지의 목소리는 돼지가 된시인의 육성을 통해 전달된다. 그리하여 돼지이며 여성이고 타자인 시인의 파편적 말들로 재구성된 피어라 돼지는 순환적 구조의 재생 신화로 나타난다.

시의 시작은 선방(禪房)의 벽이며 끝은 육체의 방이다. “이 공통적으로 비유하면서 함의하는 바는 생존하고 있는 한 해탈할 수 없는 육체의 한계이다. 선방에서는 해탈하려는 스님도 면벽 수도에 정진하고 있는데, 돼지도 선방에 와서 가부좌하고 명상을 하겠다고 벽을 째려본. 그러나 스님이든 돼지든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그 벽은, 육체의 벽이어서 도축장행 트럭을 타거나 스님의 열반으로만 나갈 수 있는 벽이다. “은 돼지 축사의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과 금속 틀이며 스님이 면벽중인 사면의 벽이다. 돼지 축사처럼 좁은 공간에 갇혀있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방이다. 에 갇힌 육체는 현존하는 삶과 역사적 삶의 슬픔과 불안으로 가득하다.

철근 콘크리트 사벽 황제 폐하!”가 다스리는 세계는 합리적 이성과 경제적 효율과 도구적 언어로 무장한 남성-주체의 폭력과 학살이 자행되는 세계다. 살아있는 한 육체의 굶주림으로부터 해탈할 수 없는 생명의 우울한 세계다. ‘돼지이며 여성이고 타자인 시인에게 아무래도 여긴 괜히 왔나 봐라는 말은 너무나 당연한 실존의 조건이다. 그런데 여기는 단지 돼지들의 축사만이 아니라 경제적 효율을 최고 가치로 삼고 비인간적인 삶과 일상적인 죽임을 일삼는 동시대 한국 사회와 다르지 않다. 피어라 돼지는 산 채로 쇼아의 구덩이로 매일 끌려가고 있는 한국 사회의 알레고리인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돼지였고 무엇보다 제가 돼지인 줄 모르는 우리나라 돼지들에 대한 슬픈 풍자인 것이다.

사벽에 갇힌 것은 돼지와 스님뿐만이 아니다. “부엌에 여자들도, “새끼에 엄마들도 갇혀있다. “돼지9”로 불리는 모두 이름이 같은 돼지도 현대 도시의 익명적 삶에 감금되어 있다. “이곳차마 꿈엔들 잊힐 리없는 곳이다. 인간이 영원한 삶을 위해 돼지의 장기를 이식받는 날이 멀지 않은 곳이다. 돼지가 인간의 장기로 되기 위해 사육되는 곳이다. 인간의 얼굴을 지닌 돼지들의 공장 축사다. “하루만 걸러도 냄새 진동하는돼지인 줄 모르고 사는 시인과 선생의 부엌이다. “먹고 싸는 이 돼지 자석에 철컥 달라붙는우리의 방이다. “훔치지지도 않았는데 죽어야하고 죽이지도 않았는데 죽어야하고 재판도 없이/매질도 없이” “구덩이로 파묻혀 들어가야하는 직장이다. 육체와 한국 사회에 감금된 돼지이며 여성이고 시인이며 선생인 김혜순은, 살아있는 돼지들, 그 생명들을 집단으로 생매장하는 현실에 대하여 머리에 흙을 쓰고 운. 오로지 경제적 이익을 위해 인간이 돼지들을, 인간이 인간들을 산 채로 무참히 학살하는 현실에 대하여 못 견디게 아파하며 부끄러움을 느낀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 여성들과 위안부, 돼지들의 무고한 죽음에 대하여. 입이 있으나 말할 수 없고 절멸하여 증언조차 할 수 없는 완전한 증인들을 향해 소리친다. “피어라 돼지!/날아라 돼지!”. 외침의 기저에는 가해자들을 대신한 대속(代贖)과 용서의 간청이, 구덩이 속으로 가라앉은 자들의 무고한 죽음을 기리는 애도가, 부활의 기도가 있다. 부활은 파묻힌 돼지의 살과 돼지를 멧돼지가 와서 뜯어 먹독수리 떼가 와서 뜯어 먹을 때 이뤄진다. 돼지 육체의 을 벗어날 때 부활한다.

그러나 죽음을 통한 돼지의 부활은 쉽사리 구원이 되지 못한다. 죽음을 통한 부활조차도 구원이 되지 못하는 세계가 한국 사회임을 암시한다. “돼지 한 마리가 산문을 나서는 나를 멀찍이 따라온다. “돼지 버리고 가라는데 돼지 데리고따라온 것은, “글의 집너무 좁은데 피할 줄도 모르는여자, 돼지다. “365부 방”, 육체에서 벗어났으나 쇼아의 지상을 유령처럼 떠돌며 여성들, 타자들의 목소리를 받아쓰는 나는, 시인이다. 죽어서도 떠나지 못한 채 나는, 돼지로 부활한다. “기쁘다 돼지 오셨네/만백성 맞으라!”는 마지막 시구로 탄생한다. 구원자 예수의 탄생이 아니라 돼지로 부활한 나의 탄생은, 경제적 효율의 홀로코스트 구덩이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 그런 점에서 한 편의 장시 피어라 돼지공장형 축산 사회라고 호명해도 부족하지 않은 한국 사회에 대한 신랄한 풍자이다. 더 나아가 구제역 사건으로부터 촉발된 파편적 사실들뿐만 아니라 드러나지 못한 공백의 어둠속에서 증언도 하지 못하고 유령처럼 떠도는 돼지들, 여성들, 위안부들, 성소수자와 난민들, 그 모든 타자들의 죽음과 현존을 상상하고 기억하며 그들의 잔존을, “내가 돼지! 돼지!”, “뒈지는절규를 표출한다. 장시 피어라 돼지는 이성적 주체의 합리성으로 운용되는 자본에 의한 대량 학살을 재현하고 비판하는 언론 기사의 정치성이 아니라 구제역 사태의 파편들이 불러일으킨 상상력을 통해 타자들의 죽음을 기억해내고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알레고리적 미학의 정치성을 적극 개진한 것이다. 시집 피어라 돼지는 장시 피어라 돼지에서 드러낸 주제들을 확장하고 심화함으로써 여성의 시쓰기가 지닌 타자성과 정치성을 첨예하게 제기한 문제적 시집이다.

 

 

4. 파편들로 나는 나의 폐허를 지탱해왔다

 

 

김시종과 김혜순의 시처럼 문학의 정치성은 사태의 증언과 재현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문학의 정치성은 르포르타주처럼 사태의 증언과 재현의 직접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저 사태의 파편적 진실을 품고 있는 증언의 배후와 공백에 대한 물음과 상상력으로부터 발생한다. 문학은, 그리고 시의 정치성은, 폭력적인 세계에 대한 하나의 증언과 고발[각주:19]에서 직접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증언자가 미처 말하지 못한 공백과 증언의 심층에 놓인 상처와 기억, 어둠 속에서 밝혀지지 않고 잊혀진 파편적 사실들을 상상력으로 복원하는 언어에서 발현된다. 그러므로 어떤 사건이 언어적으로는 도저히 재현 불가능한 것에 가까워질수록, 작가는 그것을 언어화할 형식을 고안[각주:20]해야 한다. 만약, 문학이, 그리고 시가 증언에만 멈춘다면, 사태의 ()가능한 사실적 재현에만 멈춰야 한다면, 끔찍한 홀로코스트의 사태를 증언하는 언어만을 절대화한다면, 시의 언어는 사태의 현장에 부재했다는 사실에서 연원하는 부채감과 죄의식 탓에 침묵해야 하거나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무력함, 그 무()의 언어[각주:21]가 되어야 하거나 역사가에 의해 수집된 수많은 사료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재현의 정치성을 옹호하는 이에게 엘리엇의 시를 빌어 말해본다면, “너는 말도, 추측도 할 수 없다, 너는 다만/부서진 이미지들 더미만 알기 때문에”(황무지). 그러나 문학은, 시는, 사태의 재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파편들로 나는 나의 폐허를 지탱해왔”(황무지)기 때문에 증언의 파편성이 지닌 의미를 되묻고 의심하면서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사태의 전체와 그 망각의 파편들을 복원해내는 상상의 언어이다. 아우슈비츠처럼, 518 광주민주화운동처럼, 구제역 사건처럼, 세월호 사건처럼, 말할 수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한 사태에 대하여, ‘사태! 그 자체로!’ 향하는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상상하고 말하는 시의 언어. 시의 정치성은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각주:22] 상상력의 언어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사태의 자리에, 아우슈비츠에, 광주민주화운동에, 구제역 사건에, 세월호 사건에, 그 현장에 시는 없었다. 시는 없는데, 노래와 구호, 사이렌과 총성, 비명과 죽음이 있었다. 시는, 사태의 자리에 부재하다. 시는, 사태 이후에 온다. 시는, 사태 이후에 오기 때문에 사태, 그 자체의 끔찍함을 온전히 재현할 수 없고 경악스러운 고통을 즉각적으로 말할 수 없다. 사태의 현장에 부재했다는 부채감과 무력감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그러나 말을 해야만 하는 시인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의 언어는, 그리하여 매번 다시, 고쳐서 말해야만 하는 언어는, 사태를 기억하기 위해 상상하는 언어는, 언제나 나중에 도래한다. 상상을 통해, 시인의 육성이 아니라 사태의 어둠 속에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름 없는 타자의 목소리로, 사태의 어둠 속 하나의 파편에서 비롯된 상상력으로, 온전히 고통스럽게 사태를 살아낸, 시인의 온몸을 빌어서 돌연, 도래한다.




반년간 『쓺』 2017년 하권

 

 


 


송승환 

 

2003년 문학동네』 신인상 시 부문과 2005년 현대문학』 신인추천 평론 부문 당선시집 드라이아이스』 『클로로포름』 평론집 측위의 감각』 .




 

  1. T.S. 엘리엇, 「황무지」(1922), 『20세기 영시』, 이재호 옮김, 탐구당, 1986, p.224, 266. 수정 번역, [본문으로]
  2.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이현경 옮김, 돌베개, 2007, p.6. 이하 인용 쪽수만 밝히기로 한다. [본문으로]
  3. 이재의, 「개정판을 내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황석영․ 이재의․ 전용호 기록, 광주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엮음, 창비, 2017, p.584. [본문으로]
  4. 강현석, “5·18 계엄군, 실탄 51만발 썼다”, 《경향신문》, 2017.8.28. [본문으로]
  5. 강현석, “헬기 기관총 사격 ‘증거’ 또 나와”, 《경향신문》, 2017.8.28. [본문으로]
  6. 이원, 「따뜻해졌어 지혜」, 『엄마. 나야.』, 난다, 2015, p.26. [본문으로]
  7.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 오윤성 옮김, 레케카, 2017, p.51. [본문으로]
  8. 김시종, 『광주시편』(1983), 김정례 옮김, 푸른역사, 2014. 이하 인용의 쪽수는 생략하기로 한다. [본문으로]
  9. 김정례, 「옮긴이의 글」, 김시종, 『광주시편』(1983), 위의 책, p.94. [본문으로]
  10. 김시종, 『니이가타』(1970), 곽형덕 옮김, 글누림, 2014. [본문으로]
  11. 이진경은 김시종의 『광주시편』에서 의미의 사건으로서 ‘광주’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별로 등장하지 않음을 주목한 바 있다. 이진경, 「사건과 어긋남, 혹은 시는 사건과 어떻게 관계하는가?․1」, 『문학들』 2017.12. p.75. [본문으로]
  12.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1986), 이소영 옮김, 돌베개, 2014, pp.98~99. [본문으로]
  13. 이른바 ‘오월시’라고 불리는 시편들 또한, 5․18 광주 사태의 현장에서 대부분 쓰이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사실적인 재현을 통해 즉각적인 정치적 효과를 의도하는 시편들도 후일담의 시이며 구조된 자들의 기억과 상상력을 통해 재구성된 시편들이다. 『5월문학총서 1-시』, 5월문학총서간행위원회 엮음, 문학들, 2012. 참고. [본문으로]
  14. 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혐의로 징역 5년의 판결을 받고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광주민주화운동의 정당성과 시민 학살에 항의하여 3차에 걸친 40일 동안 단식한 끝에 1982년 10월 12일 새벽, 당시 2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김시종, 앞의 책, p.43 옮긴이 각주 참고. [본문으로]
  15. 장 폴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정명환 옮김, 민음사, 1998, pp.286~287. [본문으로]
  16. 김혜순, 「책머리에」,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 문학동네, 2002, p.8. [본문으로]
  17. 동물사랑실천협회, <생매장 돼지들의 절규>, 《한겨레TV》, 2011.2.25.참고. [본문으로]
  18. 변진경, <구제역 가축들, 생매장만이 능사인가?>, 《시사in》 170호, 2010.12.22.참고. [본문으로]
  19. “참여예술은 마치 보편적인 매개의 세계에서 직접성이 직접 실현될 수 있다는 듯, 예술이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말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그렇게 함으로써 참여예술은 언어와 형상을 단순한 수단, 효과체제의 요소, 심리학적 조작의 요소로 떨구어 버리고 예술작품의 화음과 논리를 텅 비게 만들어 버린다.” 테오도르 W. 아도르노, 「대리인으로서의 예술가」(1953), 『아도르노의 문학이론』, 김주연 옮김, 민음사, 1985, p.39. [본문으로]
  20. 김형중, 「총과 노래2―최근 오월소설에 대한 단상들 2」, 『후르비네크의 혀』, 문학과지성사, 2016, p.54. [본문으로]
  21. 그러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가까스로 생환한 파울 첼란은 아우슈비츠를 사실의 재현이 아니라 윤무(輪舞)의 무도곡 형식으로 시 「죽음의 푸가」(1944)를 썼다. 아도르노는 “고문당하는 자가 비명 지를 권한을 지니듯이, 끊임없는 괴로움(Leiden)은 표현의 권리를 지닌다. 따라서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시를 쓸 수 없으리라고 한 말은 잘못이었을 것이다”라고 자신의 이전 명제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쓰는 것은 야만적이다”를 정정한다. 장 볼락, 『파울 첼란/유대화된 독일인들 사이에서』, 윤정민 옮김, 에디투스, 2017, p.188. 편집자의 파울 첼란 연보 참고.;테오도르 W. 아도르노, 『부정변증법』(1966), 홍승용 옮김, 한길사, 1999. p.469.;테오도르 W. 아도르노, 「문화비평과 사회」(1949), 『프리즘』, 홍성용 옮김, 문학동네, 2004, p.29. [본문으로]
  22.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1940),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外』, 최성만 옮김, 길, 2008, p.334. [본문으로]
Posted by 수유너머104

인문학 리뷰 






송재림(수유너머104 회원)




1.김승섭,아픔이 길이 되려면




 

저자 김승섭은 의사이자 사회역학자이다. 천안교도소의 공중보건의 생활을 계기로 사회적 약자의 건강에 관심을 갖게 되어 인턴/레지던트 근무환경 연구’,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건강 연구’, ‘소방공무원의 인권상황 실태조사’, ‘한국 성인 동성애자/양성애자 건강 연구’, ‘단원고 학생 생존자 및 가족 대상 실태조사 연구를 진행하였다. 저술한 책으로는 아픔이 길이 되려면, 우리 몸이 세계라면이 있다.



이 책은 개별적인 신체에 발생하는 질병의 원인을 사회적인 요인에서 찾는 사회역학을 다룬다. 하버드대학교 낸시 크리거 교수는 1994년 출판한 논문(역학과 원인의 그물망: 거미를 본 사람이 있는가?)을 통해 개인이 살고 있는 공동체는 질병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묻는다. 노동자의 노동환경과 금연율의 관계, 공공의료보험과 AIDS의 관계, IMF와 결핵사망률의 관계를 통해 저자는 질병의 원인으로서의 공동체를 보여준다. 원인이 공동체에 있다는 것은 처방과 예방 또한 공동체의 능력에 달려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왜 공동체는 개인의 건강을 위해 고민해야 하는가? 그 답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다.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책임을 지니고 있습니다. 건강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기 위한 기본 요건이기 때문이지요. 건강은 인권을 지켜내기 위한, 정치·경제적인 기회를 보장받기 위한 조건입니다. 건강해야 공부할 수 있고 투표할 수 있고 일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 p.72”



사회역학은 정책 결정에서 어떤 방법을 통해 영향을 미칠까? 정책과정은 문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이것이 이슈가 되면 정책 아젠더를 형성하고 이에 맞는 정책 대안들 중에서 특정한 정책을 결정하고 이를 집행 및 평가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사회적 상황은 맥락적이기에 새로운 상황에 대한 정책을 수립하는데 있어 유의미한 자료를 수집할 시간이 충분히 확보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하지만 과거의 데이터에만 의지한 정책은 더 큰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저자는 새로운 정책을 수립할 때 이익을 얻는 기업이나 집단의 사전적 증명을 요구하는 사전주의 원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감정은 지극히 개인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타인의 고통을 나누고자, 스스로를 극복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다면 함께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2. 아론 벡,우리는 왜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아론 벡은 1921년에 태어나 현존하는 미국의 정신과 의사이다.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에서 벗어나 인지치료라는 새로운 치료법을 창시하였다. 인지치료는 내담자가 가진 행동 문제와 관련된 역기능적 사고를 찾아 이를 수정하여 행동 문제를 해결하는 치료법이다.



우리는 왜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는 아론 벡이 인지치료를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 차원에서도 동일하게 적용가능하다는 착안에서 서술한 책이다. 그는 정신과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공통적으로 발견한 사고현상인 왜곡된 인지부정적 신념으로 인한 심리적인 문제를 명료화하여 개인 및 집단, 국가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설명하고 인지적 요소를 활용하여 개인적,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음을 제시하였다.



책의 제목인 우리는 왜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에 대한 답을 저자는 원초적 사고때문이라고 한다. 원초적 사고란 원시시대에는 도움이 되었던 자기 중심적인 사고이다. 원초적 사고는 상대방의 의도를 왜곡하여 공격적인 행동을 통해 파국을 초래하는 이분법적이며 편집적인 사고이다. 인간이 취약한 부분에서 위협을 받을 때 원초적 사고가 활성화된다.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통해 자신의 취약성에 대한 두려움과 의심이 공격자에게로 초점이 전환되면서 스스로를 피해자로 왜곡하여 인식하는 것이다. 인지적 왜곡은 이후 공격자에 대한 과도한 일반화로 진화되면서 공격자에 대한 분노를 정당화시킨다.



아론 벡은 이를 집단의 차원에도 적용시킨다. 사람들은 쉬운 결정을 하기 위해 그리고 배척당하기 싫어서 집단의 의견을 따른다. 집단적 사고는 한 집단의 개인이 우리라는 범주를 만들고 이를 토대로 사고를 단순화(이분법적 사고)하여 인지적 왜곡을 일으키는 과정을 통해 활성화된다. 예를 들어, 나치는 게르만 민족이 우성학적으로 우수하다고 주장함으로써 게르만 민족과 그 외의 민족으로 범주를 설정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게르만인은 게르만 민족에게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으로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사고하고 게르만 민족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유대인들과 다른 인종을 인간 이하로 왜곡하여 인지하였다.



그렇다면 원초적 사고로 인한 갈등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인지치료는 내담자의 상처받은 감정에 초점을 맞추고 원인을 객관화하면 인지적 왜곡을 예방하고자 한다. 이를 적용하면, 자기중심적 사고로부터 벗어나 객관적으로 상황은 인식하는 것이 갈등해결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적 차원에서 노력할 수 있는 것은 이타주의적 사고 훈련을 통해 자기중심성으로부터 벗어나 공감력이 높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결국, 원초적 사고가 작동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취약성을 공격받지 않는다는 느낌 즉, ‘돌봄을 받는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편견과 선입견, 이분법적 사고에 도전하고 대항하는 사회적인 장치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분노와 혐오가 일상이 되는 사회에서 스스로의 분노를 되돌아 보고자 하는 이, 타인의 분노를 이해하고자 하는 이에게 이 책을 권한다





3.제임스 길리건, 위험한 정치인



 

제임스 길리건은 미국 정신의학자이자 작가이다하버드대 법정신의학연구소 책임자로서 1977년부터 1992년까지 메사추세츠 교도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폭력 예방을 위한 사회심리학적 프로젝트를 실시해 교도소 안의 살인율과 자살률을 획기적으로 떨어뜨리는 성과를 거두었다이를 바탕으로 폭력적 행동의 원인과 동기에 대해 연구한 폭력』 시리즈를 저술했다.



위험한 정치인은 제임스 길리건이 1900년부터 2007년까지 미국의 자살률과 살인율 통계를 분석한 책이다자살과 살인은 개인적인 원인으로 일어난다는 통상적인 생각과 달리 근 100년 간 미국의 자살률과 살인율은 동시에 솟구쳤다가 동시에 급락하였다흥미로운 것은 자살률과 살인율의 변화 주기가 대통령의 권력 교체와 맞물렸다는 점이며더욱 흥미로운 점은 폭력 치사(자살과 살인발생률이 오직 공화당 정부 때만 전염병 수준으로 올라가고 오직 민주당 정 부 때만 전염병 수준 밑으로 내려간다는 것이다이 통계는 어떻게 해석이 가능할까?



저자는 우선 자살과 살인의 원인을 살펴본다저자는 폴 홀링거의 연구를 인용하여 자살률과 살인율은 상호 연관성이 있으며 실업률과도 상호 연관성이 있음을 확인한다그는 칭치 시에와 베러디스 푸의 연구를 인용하여 소득 불평등과 폭력 범죄 또한 긴밀한 연관성이 있음을 확인한다그렇다면 실업과 불평등은 대통령의 정당과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 것일까?



공화당 정부에서 민주당 정부 때보다 실업률이 증가하고불평등이 심화되는 원인은 두 정당의 정책 차이에 있다공화당은 부유층의 소득 증가율을 높이는 정책을 추구하는 반면 민주당은 실업을 줄이고 성장을 끌어올리려는 목적의 정책을 추구한다이에 따라 공화당 정부에서는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치사 범죄율이 상승하는 것이다공화당과 민주당의 정책 차이는 수치심의 윤리와 죄의식의 윤리로도 설명가능하다수치심의 윤리는 불명예와 치욕이 가장 큰 악덕이고 수치의 반대곧 자부심과 명예가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도덕 체계이다죄의식의 윤리는 죄가 가장 큰 악덕이고 죄의 반대곧 순결이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도덕 체계다수치심의 윤리는 우월과 열등의 서열화를 옹호하며 위계화된 사회 체제를 미화한다죄의식의 윤리는 교만을 죄로 규정하여 누구도 우월감을 느끼지 못하도록 평등주의를 옹호한다이에 따라 수치심의 윤리에서는 자부심을 높이고 열등감을 낮추기 위해 사회·경제적으로 우월한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끼려하고죄의식의 윤리에서는 자부심을 낮추고 겸손하기 위해 사회·경제적으로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끼려 한다.(이것은 가난한 사람이 왜 공화당을 지지하는지도 설명해준다.) 수치의 윤리를 정당의 핵심 정서로 삼는 공화당은 사회를 위계적으로 불평등한 수치 문화로 만들어 가며죄의식의 윤리를 정당의 핵심 정서로 삼는 민주당은 지위의 차이를 줄여 수치로부터 사람을 지키는 평등주의적 사회를 만들어 간다.



이 책을 폭력을 줄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이에게 추천한다저자가 마지막으로 인용한 피르호의 발언을 그대로 옮기며 서평을 마무리한다.



의학의 진보는 궁극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연장하겠지만 사회적 여건의 개선은 이러한 결과를 더 신속하게 더 성공적으로 성취할 수 있다의사는 본디 가난한 사람의 변호인이고 사회 문제는 넓게 보면 의사의 영역에 들어간다인간을 다루는 과학으로서 의학은 사회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단을 제시해야 할 책임이 있다의학통계학은 우리의 측정 기준이 될 것이다우리는 생명의 무게를 생명으로 달고 어디에 시신이 더 두텁게 쌓였는지를 볼 것이다의학은 사회과학이고 정치는 규모를 키운 의학일 뿐이다.”



이에 대한 답을 조효제 교수가 쓴 추천사에서 찾을 수 있다. “공화당이 추구하는 정책은 사람들을 강력한 수치심과 모욕감에 노출시키기 쉬운 정책이다열패감과 열등감을 조장하며 타인을 무시하고 경멸하도록 부추기고 불평등을 찬미하는 문화를 숭상한다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상실했을 때특히 해고를 당했을 때극도의 수치심과 모욕감을 경험한다이런 식으로 수치심과 모욕감이 팽배해 있는 사회에서는 폭력 치사(타살자살)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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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잡지 『에피』 6권 리뷰 

 ‘필드 사이언스’와 ‘수능 리뷰’를 중심으로


 



고승환(수유너머104 회원)





1. 들어가며


 에피는 ‘과학기술비평’잡지다. 보통 시중에는 과학기술 그 자체의 설명이나 이슈에 대해 서술한 책들은 많지만 비평하는 책은 거의 없기 때문에 실험적인 잡지라고 할 수 있다. 비평한다는 것은 비판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누군가는 과학을 왜 성찰해야하는가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과학은 <관찰-가설-검증>의 단계를 마치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 또한 인간의 욕망, 정치, 사회, 경제 등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지금의 과학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에피는 지금까지 총 6권의 책을 통해 여러 가지 주제를 다뤘다. 흥미로운 주제가 많지만 가장 최근 6권에 해당하는 내용 중 <키워드|필드 사이언스>와 <2019년 수능 ‘과학’관련 리뷰>에 대한 생각을 써보고자 한다.




2. 키워드|필드 사이언스에 대하여


 학창시절부터 배웠던 과학교육이라고 한다면 늘 체계적으로 잘 정리된 이론과 실험들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정량적인 지식을 전달해야하는 교육시스템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으나, 수많은 이론을 만들고 실험을 했던 과학자들의 연구과정은 생략된 채 완벽히 정리된 결론과 설명만을 배우는 것이 재밌지 않았다. 연구자들의 열정과 고뇌가 담긴 날 것의 연구과정을 알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6권의 키워드인 필드 사이언스는 제목만으로 매우 흥미로운 주제였다. 각 편들에서 기억에 남는 내용을 위주로 정리해보겠다.



 ‘정양승의 시체농장 : 법의인류학자의 실험실’에서는 ‘시체농장’이라는 필자의 독특한 업무환경에 대한 설명과 그 필요성이 잘 전달되었다. 그의 말처럼 시체의 부패과정을 연구하기 위해 다양한 시체를 모아둔 야외실험장이 있다면 데이터를 기반으로 꽤 신뢰할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만, ‘나라면 과연 그 현장에서 일을 할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을 때 자신있게 할 수 있다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더구나 이 곳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돌아다니며 부패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해야한다니……. 이 일을 담담하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싶다. 필자가 한 여름 큰 비가 내린 후 시신 위로 넘어진 적 있다고 했을 때는 글을 읽는 것만으로 소름이 돋았다. 어마어마한 양적 데이터를 통해 시체들의 사망 시기를 추론하는 과정도 놀랍지만 그 곳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의 열정도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최재천의 생물학 연구의 현장’에서는 2가지 부분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하나는 실험실에서 민벌레를 사육하는데 필요한 야생공간을 연구자가 직접 만들어 관찰하고 실험했다는 것이다. 현장성을 살려 야생 그대로를 재현한 모의공간을 만든다고 할 때 어떤 기준으로 어떤 방식을 사용하는지 알고 싶었다. 다른 하나는 학계에서 성과를 판단하는 기준과 연구비에 대한 비판이었다. 현 정부는 각각의 학문의 속성은 고려하지 않은 채 오직 논문의 개수로만 성과를 판단하여 경제적 지원을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대략적으로 생각해도 현장 연구자가 100편을 쓰면 실험실 연구자는 적어도 1,000편은 써야 비교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현재 우리나라의 연구비 투자규모인 20조가 연구자 입장에서는 부족한 현실이며, 그 20조마저도 도전이 두려워 이미 해외에서 기반이 닦인 안정적인 연구만 뒤쫓다보니 지는 게임만 한다는 것이다. 사업비 원금회수를 못하더라도 전체 사업비의 20%정도는 새로운 연구에 지원하자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독자로서 굉장히 공감되는 생각이고 이런 생각이 처음 들어본 것은 아닌데 왜 현실에 적용되지 못하는지 의문이다. 



 ‘이원영의 남극에서 펭귄 연구하기’에서는 연구자와 연구종의 ‘관계’에 대한 필자의 생각이 기존의 통념을 깨주었다. 보통 객관적인 연구를 위해 연구자는 연구대상에게 감정을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제인구달 박사가 침팬지 각 개체에게 이름을 붙이며 교감했을 때 침팬지들이 경계를 풀었고 더 가까이에서 그들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었다는 사례를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생각해보면 연구자가 감정의 동물인 사람인데, 어떻게 전혀 감정의 개입이 없을 수 있을까? 오히려 감정을 적절히 조절하여 이용할 때 보다 객관적이고 상세한 연구를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연구자의 관심에 따라 같은 연구대상이라 할지라도 질문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언급하며, 동물행동학자로서의 질문은 어떠한지 그리고 그 질문을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보여주는 부분을 통해 필자의 관심분야를 이해할 수 있었다. 



 ‘강호정의 Wet, Wet, Wet 습지로 가는 생태학자’에서 필자는 ‘도시’를 하나의 생태계로 분류해야한다고 주장하며 도시에서의 연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숲에서는 식물의 종류에 따라서 흙 속에 서식하는 미생물의 종류가 결정되곤 하지만, 도시에서는 지하철 노선에 따라서 다른 종류의 미생물이 발견되기도 한다. 또 강변에 밤마다 켜 있는 가로등 때문에 물 속의 물고기가 밤낮의 시간을 잊어버리고 시도 때도 없이 알을 낳기도 한다. 여름철 서울 도심의 시끄러운 매미소리도 밝은 불빛들과 연관이 있다.”(p.75) 도시의 체계를 기준으로 관찰되는 생태계라니! 도시의 긍정성과 부정성을 평가하기에 앞서 자세한 연구내용과 방법이 훗날 대중교양서적으로 기록되었으면 한다.



 ‘김웅서의 온 바다는 나의 실험실’에서는 염분, 수온, 수심을 자동으로 측정할 수 있는 CTD와 넓은 해역에서 표층 수온, 해안선 변화, 해수면의 고도 등을 알 수 있는 인공지능 그리고 잠수정 등 실험장비들이 궁금했다. 기술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연구성과들도 놀랍지만 기술자체에 더 관심이 갔다. 평소에는 주로 교양수준에서 뉴턴잡지, 위키백과, 유투브동영상을 활용해 기술의 원리를 익히고 작동모습을 보곤 하는데 해양관련 기술들도 찾아보고 싶었다.



 이 외에도 ‘박지형의 인류세의 산하유기’, ‘이융남의 나는 왜 고비사막으로 가는가?’편이 있었다. 각자 전문가로서 자기 영역의 자부심과 열정이 느껴지고 진지한 문제의식을 알 수 있었다. 많은 지면이 할애된다면 자세한 연구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겠지만, 이 작은 책 한 권으로도 필드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의 생각을 조금은 들여다 볼 수 있었다. 




3. 2019년 수능 ‘과학’리뷰에 대하여


 에피편집부는 수능 ‘과학’에 대한 전문가들의 리뷰에 앞서 ‘수학’리뷰 원고 청탁 실패기를 통해 그들의 문제의식을 전달했다.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다. “인공지능이 수학의 어떤 범위도 대체할 수 있는 상황이니 어려운 문제를 두고 씨름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있는데 과연 그런가?”, “수험생들이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그 교육적 효과는 무엇이며, 그것의 사회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먼저 첫 번째 문제의식에 대해 크게 공감한다. 책에서는 셈을 할 줄 알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과 셈을 못하면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의 차이를 언급했다. 아마도 이 차이는 능력의 차이를 말한 것일 거다. 계산기가 없는 상황에서 셈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수학만 이런 것이 아니다. 기계, 전기를 비롯한 각종 기술에서도 적용된다. 기계공학을 전공하면서 기술에 대한 호기심이 전보다 늘었지만, 그 이상으로 늘어난 것은 기술 앞에서의 무력감이었다. 일상생활에서 빈번히 사용하는 여러 기계장치들은 대부분 자동화되어 있다. 자동화는 여러 차례에 걸쳐 수동적으로 작동시킬 번거로움을 없앤 것이므로 이용하는 관점에서는 편리하고 좋기만 하다. 하지만 기술을 배우는 입장에서는 마냥 좋은 일이 아니다. 기계가 자동화되는 순간 학습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한 번의 클릭으로 기계내부에서는 전기적 신호에 따라 여러 메커니즘이 순차적으로 작동을 하고 순식간에 내가 원하는 결과를 내놓는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처음의 입력과 마지막의 출력뿐이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된다면 그 기계가 고장이 났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은 그저 교체밖에 없다. 교체를 하더라도 엔지니어 진단과 설명에 복종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적어도 각 부품들의 기능을 알고 작동원리를 파악하고 있다면 전문가의 설명에 그대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하게 되고 일명 ‘호갱’이 되지 않는다.



 두 번째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수능 ‘과학’에 대한 전문가들의 리뷰에서 중요한 답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사회에서 수험생들이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문가들은 ‘어려운 문제’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과목의 본질적인 특성을 묻되 다양한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한된 조건 속에서 과목의 본질적인 특성과는 관계없이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두 가지 종류의 문제는 수능에서 모두 출제되지만 보통 전자의 경우는 출제자입장에서 기피의 대상이 되고, 후자의 경우가 과목의 등급을 결정짓는 킬러문제가 되곤 한다. 왜 그럴까? 수능에서 ‘좋은 문제’는 오류가 나지 않으면서도 변별력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물리에서는 전형적인 상황이 아닌 다양한 상황을 전제로 문제를 내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교과과정을 제대로 이수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오류없이 오직 하나의 생각으로 귀결되게끔 만들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채택되는 것은 ‘질점이 마찰이 없는 빗면 위를 미끄러지는 상황’뿐이다.(p.97참고) 지금 교육현실에서 과목의 본질적인 특성을 무시한 채 복잡하기만한 문제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는 수험생들의 점수에 따라 순위를 매기기 위해서이다. 이를 통한 교육적 효과라는 것은 형식적 공정성을 통한 개개인의 위계질서의 정당성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형식적 공정성은 공고히 될지 몰라도 전문가 혹은 비판적인 시민으로 성장하는데 걸림돌이 될 것이다.




4. 이번 호와 관련하여 앞으로 기대하는 점


 이번 호에서는 ‘필드’를 다뤘다면 언젠가 다음기획은 ‘실험실’에서의 연구도 집중 조명했으면 한다. 실제 연구의 대부분은 필드와 실험실을 병행하며 이루어지고 있고, 각각의 장소마다 장·단점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필드의 경우 실험실에 비해 실험자가 어떤 형태로든 개입하는 상황이 덜하다. 그런데 개입을 덜하기 때문에 그만큼 예상치 못한 변수가 수시로 발생하여 원하는 사실이나 사실들 간의 상관관계를 밝히기가 어렵다. 반면 실험실의 경우 실험자의 조작을 통해 원치 않는 변수를 통제하기가 필드에 비해 쉽다. 그러나 실험자의 조작이 개입될수록 객관성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조작은 엄밀한 기준과 제약이 있어야한다.



 실험하려는 종목이나 방향에 따라 실험실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 실험실에서 사용하는 실험기구는 어떻게 만들어지며, 또 어떤 실험자들이 열정과 호기심을 갖고 어떤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어떤 실험을 설계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실험실에서의 연구가 필드보다 통상적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이미 잘 아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막상 자세히 생각해보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부분도 자세히 알 수 있다면 무척 재밌을 듯하다. 



 또한 이번 수능 리뷰를 통해 문제의 분석을 했다면 다음은 우리나라 교육철학과 방법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가 한번 정리되었으면 한다. 대안을 중심으로 논의가 된다면 의미있는 글이 나올 것이라고 믿는다.



 무엇보다 가장 바라는 것은 에피가 10년이고 100년이고 지속적으로 출간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 나오는 모든 과학서적을 보진 못했지만 꽤 유명한 여러 책들을 보면서 느낀 것은 에피는 다른 잡지들과는 다른 차별성이 있다는 점이다. 자연과학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런 잡지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일상의 큰 즐거움이다. 많은 사람들이 구독하기를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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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없는 편지*

2018년 신인들의 시적 감응에 대하여

 

 

최진석_문학평론가. 수유너머104 회원

 

 



1. 리듬과 감응, 유물론의 시학

 

유물론적 미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게오르기 플레하노프(Georgii Plekhanov)는 예술의 오래된 기원 중 하나로 리듬에 대한 감각을 꼽은 적이 있다. 그의 예술론을 모아놓은 주소 없는 편지(Pis’ma bez adresa, 1899)에 따르면, 원시사회에서 노동이란 파편화된 각자의 힘을 단일한 집합성으로 끌어모으는 과정이고, 그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동인(動因)은 다수의 인간을 하나로 엮어내는 몸의 감각 즉 리듬이라는 것이다. 플레하노프가 유물론적 혁명가이자 정치철학자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주장이 새롭거나 놀라워 보이진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이채롭게 보아야 할 점은 리듬을 정의하는 그의 독특한 안목이다. 아마도 최초의 노래란 자연발생적으로 솟아난 몸짓이나 목소리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것은 무리를 이루어 함께 동작하고 소리내는 와중에 혼합되어 하나의 가락 속에 합쳐진다. 서로는 각자의 구별을 잃으며 점점 단일한 집합체처럼 노동에 참여하게 되고, 거기서 노동요 곧 공동의 리듬이 발견되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 다음부터다. 그러한 무의식적 일치를 언제든 이루어내기 위해 인간은 노래를 짓고 악기를 발명한 게 아닐까? 어쩌면 시란 그러한 일치의 감각을 다시금 뽑아내기 위한 언어적 주문이 아닐런가?



Georgii Plekhanov(1856-1918)



리듬은 비단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만 생겨나는 게 아니다. 함께-있음이라는 관계성이 형성되는 언제, 어디서, 무엇과라도 리듬은 발생하고, 거꾸로 관계의 성격마저 규정짓는다. 열매를 채취하는 사람들과 표적을 뒤쫓는 사냥꾼들의 시선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가만히 매달린 열매와 부지런히 움직이는 동물을 응시할 때 만들어지는 관계의 리듬이 상이한 까닭이다. 타작을 하려고 흙을 밟는 농부들과 강철을 연마하는 노동자들의 발걸음도 같을 리 없다. 흙과 쇠의 질료적 차이가 보폭과 운동의 이질성을 자아낸다. 리듬은 어떤 대상을 만나 무슨 일을 하는가에 따라 매번 상이한 속도와 정도로 표출되는 것이다. 요컨대 리듬이란 사물에 내재한 속성이라기보다 서로 마주한 대상들이 얽혀들 때 파생되는 관계의 표현이다. 리듬은 사이[]에서 만들어져 그 사이를 채우는 모든 것들의 공-동적(-動的) 관계 전체라는 것. 그렇다면 흔히 환경이라 부르는 관계들의 총체야말로 리듬의 비밀이 아닐까? 예술 역시 예외이진 않을 터. 어떤 예술작품이 뿜어내는 맹렬한 감응(affect, 情動)이란 예술가가 그의 환경과 공-동으로 조형하는 관계성에 다름 아니다.

시 또한 그러하다고 나는 믿는다. 전통적 시학이 전제하듯, 시는 시인-주체의 고독한 내적 성찰과 외로운 자의식의 산물이 아니다. 홀로 독야청청 세상천하를 관조하고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자기만의 목소리를 토해내는 신화적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주체의 내면으로부터 어떤 이미지와 언어가 피어나든, 그것은 그가 만난 세계 곧 환경 전체가 그의 몸에 새겨놓은 상호작용의 각인일 뿐이다. 시의 제목이, 소재가, 주제가 어떤 식으로든 특정될 수는 있어도, 거기서 발견되는 낯선 감응의 흐름들, 때로 시인과 독자를 배반하기조차 하는 이질적 의미의 조형은 그 시가 온전히 시인 자신에게만 귀속될 수 없음을 반증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에서 매양 읽는 것은 시인 자신의 목소리를 넘어서 그 이면에 엄존하고 있는 리듬의 진실, 시인과 우리가 동시에 마주한 이 세계의 울림이다. 그것이 유물론의 시학이다.

등단이라는 제도적 문턱을 넘어선 시인들이 바라본 세계는 특별하다. 자고 일어나니 유명해 졌더라는 어떤 작가의 고백처럼, 한낱 표찰에 불과할지라도 시인이라는 꼬리표는 그네들의 삶을 절단시키고, 차이의 감각을 발동시켜 이전과는 상이한 리듬의 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이 젊은 시인들을 보라! 그들의 감수성과 시적 언어를 느껴보라! 하지만 또한 분명하리니, 그들의 시는 그들 자신만의 것은 아니며, 이 시대가 그들에게 남긴 감응의 흔적이기도 할 것이다. 손끝의 감각을 예민하게 다듬어 그 자취들을 더듬어 보자.

 

 

2. 문턱의 시선, 결별의 예감

 

()은 분리와 결합의 기묘한 이중 평면이다. 창이 있음으로 우리는 문턱 너머를 바라볼 수 있지만, 동시에 창으로 인해 거기에 닿을 수는 없다. 해방구인가 감옥인가? 영구히 풀 수 없는 이 삶의 오랜 질문은, 적어도 이제 갓 시의 관문을 통과했다고 느끼는 자들에게는 모종의 깨달음의 표석으로 장식될 만하다. 내내 과거형 어미로 주도되는 그림자 극장의 전반적 분위기는, 아마도 그와 같은 통과의례적 의식을 스스로에게 표지하기 위한 것이었을 터.

 

커다란 창이 있는 방이었다.

 

[...]

 

나는 창을 연 채 그 방에 앉아 벽에 영화를 틀어놓았고

어제 저녁엔 여러 여성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지금 같이 이곳에서 우리와 있다. 에 대한 기록을 보면서

그나마 행복해 했고

 

초저녁이 되면 영화를 튼 채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강지이, 그림자 극장부분

 

낡은 필름이 풀려나가듯 문턱 이전의 시간들은 다양한 이미지들로 변주되며 지나간다. 어제 저녁에 어딘가에 있던 이들이, 오늘은 우리와 함께 있고, 그것조차 영화 속의 한 장면인 양 이미지화되면서 강 건너의 무연한 사태처럼 창밖으로 비치는 정황이다. 이것은 순수한 과거의 시제, 과거의 장면, 과거의 감정 아닐까? 지금 현재의 사건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채, 관조되고 반조(反照)되기만 하는 무연관의 시공간. “그나마 행복해 했노라 말하고는 있으나 문턱 위에서, 더 이상 이전의 세계에 머물 수 없는 경계선 위에서 바짝 날이 선 시적 주체는 마냥 긍정적일 수 없다. 지금 이전의 지나간 시절은 제 아무리 행복한 것처럼 보여도 결국 구속된 아름다움이며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인 탓이다. “그런 아름다움을 보며/평생을 견디고 있다.” 주체로 하여금 한 걸음 앞으로, 현재에서 미래로 걸음을 옮기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쳐 개화하지도 않은 시가 어째서 벌써 시드는가? 논리정연한 산문의 언어로 설명하진 못해도 시쳇말로 느낌적 느낌으로 지각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지금 바짝 발붙인 경계 너머로 나아가야할 때, 거기에 있는 것이 과거를 보상해 주는 빛나는 무엇일지 아닐지 가늠할 수 없는 탓이다. 바람이 휙 불어오듯 찰나의 순간 시적 주체는 경계 위에 올라섰지만, 감히 더 나아갈 욕망도 품지 못한 채 아직 거기 머물러 있다.

 

건조한 곳 저편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강지이, 달의 계곡전문

 

물론, 더 나아가길 바라는 욕망 또한 언제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느릿하되 편안한 산보도, 숨가쁘나 활기찬 뜀박질도 아니다. 강진영 시인에게 이는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 그리워하면서도 결코 돌아갈 수 없다는 자각과 의지, 성찰과 욕망이 뒤얽힌 채 기차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일로 표상된다. 익숙한 환경, 친절한 이웃, 다정한 가족과의 무참한 결별. 기차처럼 달리는 아이들은 엄마 없이 엄마가 주인공인 동화를 쓰면서” “엄마라 부르던 세계를 떠나야 한다. 아무리 사랑스럽고 안온했던 울타리라도 여하한의 의존으로부터는 벗어나야 한다는 것. 돌아보고 후회하는 것조차 자신의 몫으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유쾌한 각오를 짚어내자. 문턱을 넘으려 할 때는 필연적으로 혼자일 수밖에 없으니까. “내 손을 놓아요 터널을 지나요 바다를 건너요 뒤를 돌아보는 건 나예요.” 철없던 아이가 어른으로 커가는 성장서사의 행복한 광경으로 미화해서는 곤란하다. 엄마의 세계는 안전하되 속박되는 굴레였고, 떠나는 아이는 자라지 못한 채 여전히 아이로 남아있으며, 문턱 너머로 열린 낯선 세상은 이물감 가득한 두렵고 분열적인 풍경으로 채워져 있다.

 

나는 기차에 오를 거예요 내릴 거예요 엄마를 찾아 앞으로 나아가요 아무것도 낳지 않을 거예요 

노을에서 엄마의 커피향이 나 엄마의 노을을 훔쳐 마시며 /////////////////////////////////////////////////////////////////////////////mmmmmmmmmm

m                                       m                                        m ,,,,,,,,,,,,,,,,,,,,,,,,,,,,

 

여기는 벽이 모두 창문이잖아 매일의 풍경이 바뀌잖아 엄마가 한 칸 한 칸 분열하잖아

 

강진영, 기차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일 말입니다부분

 

그럼, 거기에는, 문턱 너머 저기에는 무엇이 있는가? ‘무엇이 아니라 사건이 있을 것이다. 이질적인 감각의 경험, 그로 인해 아이가 뒤틀리고 기이하게 변모하여 성장의 미명 하에 부서지고 말 변화들. 해변에 부딪혀 끊임없이 무너져 내리는 파도야말로 그러한 파열적 체험이 극단적으로 형상화된 이미지 아닐까? 속절없이 너울대는 파도처럼 부유하는 시상과 언어는 산산이 흩어지기 직전의 모습만을 애틋하게 기억할 것이다.

 

                                                        사랑해

                                                                  나는 부서지기 직전의 파도를 사랑했지

                                        너는 부서진 파도

 

강진영, 쇼어 브레이크부분

 

 

3. 너머의 세상, 차이 없는 반복

 

여기를 넘어 저기로 나아갈 때마다 기대를 품고 희망의 탑을 쌓아올리는 심정은 인지상정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삶에 대한 전망이나 욕망이 남아있는 탓이다. 하지만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후도, 문턱의 저편도 이편과 다름없이 동일한 상황의 반복으로 점철되리란 의구심은 이상하게도 늘 적중하는 듯하다. 지루하게 되풀이되는 옛날 영화를 보는 것처럼, 저 너머를 바라보면서도 굳이 여기의 삶을 겹쳐 보는 현상은 단지 기분 탓만은 아닐 게다.

 

우리는 자주 시청에서 만났다 여당의 유효기간이 일 년 남아 있었다 밀착해도 시차가 발생하는 여자였다 한 침대에 누워도 상대방의 꿈속에 도래하지 않았다 일인칭의 새벽 교대로 일어나 담배를 피웠다 아직 잠들어 있는 다른 한 쪽의 꿈속으로 급조된 안개가 피어올랐다 지극한 침묵이 함께 있는 새벽의 암구호였다 나는 줄곧 나를 사칭했고 둘이 형성할 수 있는 것들이 다 떨어질 때면 우리는 광장으로 나가 군중에 합류했다 그곳에서 방백마저 무례하게 확성되고 있었다 어는점이 십도쯤 낮은 여자였다 그 속에서 흥분을 익히며 매번 촛농 같은 땀을 흘렸다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를 분실해도 태연하게 행진의 일속을 가장했다 살수 같은 비가 직사로 쏟아지는 밤이면 여자와 나는 시청에서 자주 해산했다 그런 밤이면 나는 줄곧 나에게만 전력으로 가담했다 마지막으로 여자가 입을 떼며 무슨 말인가 했지만 초 단위의 시차로 매번 싱크가 맞지 않았다

 

곽문영, 시청전문

 

무성영화 화면들이 연속적으로 스쳐가듯, 한 문장 한 문장이 내용적 연관 없이 툭툭 끊어지면서 아슬아슬하게 접붙어 있다. 내용과 형식의 불연속적 결절은 상호 소통되지 않고, 일치하지 않는 타인들, 세계들, 감정들의 절단면을 효과적으로 재현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여기서 일관된 것은 매번 싱크가 맞지 않는 전체의 분위기, 그 어긋남의 감응이다. 물론 시제는 과거형이다. 어쩌면 이 시편은 문턱 이전의 순간들을 침울하게 회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효기간이 일 년 남아 있음에도 끝내 도래하지 않, “줄곧 나를 사칭하는 나 자신과의 결렬은 나와 여자사이의 불협화음만큼이나 일관된 불일치의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어떠한 기대도 희망도 욕망도 담지할 수 없는 이 광경은 매번 맞지 않는 싱크처럼 저편에서도 반복될까? 이런 정조에 감싸인다면 문턱 이후, 그 너머의 세계를 가히 밝게 예상할 수는 없는 법. 그렇기에 마을에서 가장 높은 산에서 나는 소리조차 녹음된 새의 소리일 뿐이며, “어제 내려 쌓인 눈 위로/새로운 눈이 내릴 때/나는 소리조차 전혀 새롭게 들리지 않는다. 모든 것이 조로(早老)의 대기에 휩싸여 낡고 지루한 풍광을 연출할 따름이다. “매일 보았던 후뢰시맨은/마지막 회에서 너무 늙어보이고, 마침내 시적 주체는 이렇게 뇌까리기에 이른다.

 

이곳은 좁으니까 이제 우리는

그만 크자

 

[...]

 

길게 이어진

새의 발자국을 따라갔다

새의 발자국 옆에 새겨진 나의 발자국

 

뒤를 돌아보면

새와 다정하게 걷는 사람의 발자국

 

새의 마지막 발자국 곁에서

한 번도 새를 발견하지 못했다

 

곽문영, Black Fire부분

 

새로움과 신선함, 낯선 반가움으로 표징되는 신인들에게, 도대체 문턱 너머의 무망(無望)이라는 정조는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채 장성하기도 전에 설익어 떨어지고, 미쳐 깨닫기도 전에 벌써 체념해 버리는 이토록 급속한 노화의 감각은 온전히 그들만의 것이라기보다, 그들과 교감하며 구축된 이 시대의 감응이라 불러야 옳을 터. 정치와 사회, 문화와 예술, 혹은 삶의 모든 부면에 만연한 권태와 피로의 감수성을 그들은 머리로 알기 전에 이미 몸으로 느껴버리고 말았던 것.

늘상 새의 발자국 곁에 머물면서도 결국 새는 찾아내지 못하는 파랑새 전설마냥, 시적 주체는 오직 자취의 초상화만을 그리는 운 없는 화공이다. 그저 눈물로만 색을 입힌 이 그림의 진실은, 그것이 슬픔이 곧 주소인 우리초상화라는 데 있다. 왜 자신의 기원(주소)이 슬픔인가? 너머의 삶, 저편의 일상을 욕구하기도 전에 이미 폐기해야 하는 역설의 세대인 탓이다. 마땅히 바래도 좋은 것, 마침내 도착할 수 있는 곳, 기어이 원하는 것을 필연코 얻지 못하리란 역설의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제 갓 시인명부에 입적한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단 한 번 흘러내리지 않을계시의 언어가 아니라 일시정지 버튼이 눌린 음악처럼 중단된 살아있는 미라의 삶일지도 모른다. 문턱을 밟아선 시인의 두려움과 낯설음은 필시 이로부터 기인한 불안일 테다.

 

단 한 번 흘러내리지 않을 언어를 기다리고, 언제나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우리 자신을 종속시키려 했지만

 

모든 무렵마다 일시정지 버튼이 눌린 음악

성가의 전주前奏에서 발각되는 도처의 미라

 

김유태, 검은 원부분

 

제목은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적 작품 검은 원(1913)에서 따왔다. 말레비치는 회화의 근원적 구성요소인 색과 형태를 극도로 추상화시켜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동인을 발견하고자 했고, 그것이 흰 바탕 위의 검은 원이었다. “어두울수록 선명해지는이 검은 원은 더 이상 무엇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기원의 색깔이요 모양일지 모르나, 역설적이게도 흰 바탕 없이는 그 자신을 주장할 수조차 없다. 문제는 흰 바탕이라는 것이 무()는 아니되 그 무엇으로도 규정되지 않는 무규정적인 존재 자체라는 것. 검은 원보다도 더욱 근본적이라 해야 할 흰 바탕은 온갖 규정을 넘어서는 순수 존재이자 순수 무에 다름 아니다. 기원에 대한 앎의 추구가 이토록 무참히 깨질 수 있을까? 문턱 너머를 들여다 본 자의 절망이란 그와 같지 않을까? 궁극의 원점에 다가선다 해도, 결국은 그에 도달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깨달을 뿐이라는 카산드라적 예언 아닌가? “검은 멍이 된 이 경험은 불판 위에 구워진 냉동육 껍질에 남은 도장의 흔적처럼 아이러니컬하게 읽히며, 너머의 삶에서 기대하게 마련인 아름다움이란 결국 잔혹한 멍으로만” “몸에 고이는기억임을 자각하게 될 터(김유태, 낙관).

너머에 대한 포기와 체험은 자기 아이러니적 희화화로 귀결되는 듯하다. 시인 각자는 시인 일반으로 추상화되고, 구별 불가능한 어둠에 감싸여 모두 같은 인종이 될 것이다”(류현, 학술보고서). ‘객관과학을 뽐내는 학술보고서이지만, 결국 차이나는 모든 것이 무차별적으로 영원히 반복되리라는 카프카적 냉소가 지속될 뿐이다. 너머의 불가피한 진실을 알게 된 시적 주체는 경계에 머물고자 애쓰겠지만, 그 역시 자기를 인간으로 남겨두려는 비겁한 타협일지 모를 일이다. 다른 모두도 그렇겠지만.

 

경계선은 두려움을 밀어내는 타협, 선에서 시작되는 출구는 인간적이다. 선은 언제든 넘어설 수 있는 출구, 지켜야 할 선 같은 건 없다. 나의 직업을 미리부터 정해 놓은 너희는 말했다. 바나나를 받아먹는 원숭이는 지루하다. 바나나만을 받아먹은 나는 너와 같아졌다. 겉모습을 갖추었다. 구별되지 않는다. 다음 원숭이는 누구인가?

 

류현, 학술보고서부분

 

 





4. 반복과 차이, 사건의 감응

 

세상과 섞이는 것. 낡은 선비정신은 혼탁한 세류에 휩쓸리지 말고 자신의 길을 닦으라 명령해 왔다. 그러나 사람의 사이라는 게 인간의 본뜻이라면 어떻게 이 세계에 몸을 섞지 않고 인간일 수 있으랴? 문턱을 넘어, 시인이 되었다는 것. 그것은 타인과 세계, 그리고 자신과 다시 한번 섞이는 교통의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느끼고 반응하며 감수하는 것. 감응(感應)의 체험을 언어 속에 투여하는 것이야말로 문턱을 넘은 자, 시인 주체의 몫이 아닐까?

하지만 문턱 이후의 삶은 이전과 달라지지 않았다고, 다시금 세인과 어울리고 세상의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속편히 타협하는 게 시적 행위일리는 없다. 세계에 자기를 섞을수록, 범속에 몸을 담그고 혼탁에 자신을 바칠수록 시는 시가 되어야 하며, 시인은 시인이 되어야 한다. 수많은 소리의 분산 가운데 스스로를 표시할 수 있는 홑소리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겹쳐진 다른 소리들을 찢어 분리하고, 여러 가지 발음들을 실험하여 뾰족한 모서리를 남겨 둘 필요가 있다. 떠들썩한 세간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될 수 있는 대로 차갑게, 설익은 내면을 푹 고아 시의 온존한 형태로 표현해 내야 한다.

 

모음을 찢는 소리가 경사지고 있었고

당신의 발음은 더듬을수록 모서리가 됐다

 

체온이 높은 노래를 한 음절씩 물에 빠뜨렸다

철들지 않은 발음은 수면을 밟고 올라설 수 없었다

 

류현, 홑소리부분

 

이는 언어의 리듬을 만드는 작업이다. 세계와 교통하며 지각하는 동시에 세계로부터 건네진 감응에 시적 주체의 울림을 실어 시의 감응을 구축해 내는 것. 세상의 온갖 소음, 이미지, 목소리를 내 몸에 투과시키는 게 소통의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소통이란 자신에게 닥쳐온 세계의 감응을 자신의 것과 조율하여 특이한 리듬을 지닌 시적 감응으로 변형시키는 데서 성립한다. “거침없이 모음을 탕진한 메아리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수천 번 입술을 말아도 완성되지 않는 노래를 불렀다/울음을 조율하며기어코 그 리듬의 형태에 다가서려는 분투, 여기에 시인-되기의 노고가 있다.

그러므로 시인이란 유일무이하고 고고한 단독자가 아니지만, 또한 세상만사에 참견하는 수다스런 호사가도 아니다. 그는 차라리 이 세계의 흐름을, 미세한 리듬을 감지해 내는 지진계가 되어야 한다. 바꿔 말해, 세계의 형상을 읽고 대지의 분위기를 포착하며, 그 감응을 짚어내 언어로 옮기는 번역기계가 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진학자 안드리야 모호로비치치는 지구라는 대지의 감응을 예감하고 과학의 언어로 풀어낸 시인-번역자라 불러야 하겠다.

 

여러분, 우리의 녹는점이 낮아지고 있습니다. 생각은 옅어지고 서로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닮아가고 있습니다. 1인칭의 언어는 사라지고 쓸모를 다한 눈금은 지워지고 있습니다. 속눈썹과 손톱만 남아 보트 위에 표류하게 될 것입니다. 각자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불연속적이어야 하며 술에 취해 어깨동무해서도 안됩니다. 종국에 서로를 나라고 느끼며 견디지 못할 온도에 다다를 것입니다. 책을 펴지 마십시오. 꿈을 꾸지 마세요.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시계의 방향성을 믿지 마십시오. 각자 주어에 밑줄을 긋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때입니다.

 

박길숙, 모호로비치치의 연설문부분

 

모호로비치치의 모호한 연설은 서로가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고, 1인칭이 소실되며, 눈금마저 지워져 하나로 혼융하게 될 지각의 변이를 경고하고 있다. 시적 전통에서 위기이자 파국으로 언명되었던 시적 자아, 데미우르고스적 창조자의 형상은 그 변이를 버틸 수 없다. 모호로비치치의 슈트에 달린 금장 단추처럼 떨어져 녹아내려 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개성의 상실도 아니요, 개인의 소거도 아니다. 차라리 이전, 이편의 자아를 의문에 붙임으로써 문턱 너머에서도 그와 같은 자기성이 여전히 유효할지 탐문하는 시적 성찰의 과정이겠다. “각자 주어에 밑줄을 긋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때가 도래한 것. 그제야 우리는 익숙했던 모든 것들이 돌연 낯설어지는 사태를 몸소 체험하게 될 테니까.

 

양심의 소리는 어느 쪽에서 날까?

내가 귀머거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오른발 왼발 발맞추다 박자가 헷갈리면?

계단은 내 발을 기다려 주지 않는데

나뭇결대로 내 얼굴이 깎여 버리면?

질문에 질문을 더하면 답은 없어

 

박길숙, 지미니 크리켓부분

 

당연하게도, 귀머거리에게 양심의 소리라는 비유는 의미가 없다. 나란히 평행하게 자라난 두 발 사이에도 순서가 있을 리 없고, 계단과 걸음걸이가 늘 조화롭게 일치하란 법도 없다. 순리와 당착, 인식과 오인. 질문의 순서가 바뀌면 논점이 달아나고, 전혀 낯선 명제가 고개를 쳐 든다. 피노키오의 양심을 자처하는 지미니 크리켓은 말하는 귀뚜라미다. 의인화된 가상의 비존재지만 통상의 순리와 인식을 전도시켜 당착과 오인을 유도하고, 그럼으로써 삶의 또 다른 진실을 폭로한다는 점에서 더할 수 없이 강력한 현실성을 갖는다. 그럼 허구적 실존 지미니 크리켓이 있음으로써 너머의 삶은 비로소 실제의 삶이 된다고 해야지 않을까? 이전과 이후, 이편과 저편이 어떻게 연속적이고 또 어떻게 불연속적인지, 그 절단과 흐름의 감응을 탐지해 물음을 던지는 지미니 크리켓은 그 자체로 시적 주체의 형상에 비견할 만하다. 계단도 없이 문턱을 오르고, 이편과 저편을 넘어서기에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아직 태어나지 않았기에 또한 언제든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장전된 미지의 그것.

 

나는 죽지 않는 불멸의 옴므

너는 죽지 않는 불멸의 양심

 

계단도 없이 오르내리는 나는

죽지 않는 아이, 살아 있지도 않은 아이

그래서 태어난 적도 없지

 

마침내 그렇게 너머의 지평에 도달한 시인은, 이미 너무나 정확히 예감하고 있었듯 이전의 생활과 이편의 일상을 반복해 살아가리라.

 

가로등이 반복된다

에스컬레이터의 단면에서는 세계의

상승과 하강이 매순간 교차하고 있다

 

달이 반복되었다

식사가 반복되었다

바다 너머에 바다가 있는 꿈을 자주 꾸었다

 

박정은, 자연발화부분

 

나는/그저 가끔씩 뜨거워질 뿐”, 여기에 비약적인,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을 턱이 없다. 문턱 너머는 선택된 땅도 아니고, 도착할 수 있는 최후의 지평도 아니다. 여기엔 여기대로의 지루한 일상이 시인을 기다리고, 생활에 삼켜진 또 다른 시인들이 졸고 있을 따름이다.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예언자의 목청을 드높이거나 순교자의 비탄을 쏟아내는 것 따위가 아닐 게다. 수선스런 시인의 자의식을 내려둔 채, “칼국수를 먹바다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너머에서는 너머의 삶을 삶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다. 바로 그럴 때, 슬그머니 덮쳐오는 세상의 감응과 낯선 감각들을 마주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처음 만나 연애를 하는 사람들처럼

오랫동안 바다가 끓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수평선과 시선이 직각을 그렸다

 

바다가 끓어오르는 소리를 듣고, 시선과 직각을 그은 수평선을 보는 일은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비합리적인 경험이다. 하지만 이 세계의 온갖 감각적 파장들이 시적 주체에게 지각되는 방식은, 물론 그 역시 합리적이지 않다. 감응이란 사태가 직관되고, 그 과정에서 체감되는 사물의 체험이자 수용의 효과인 까닭이다. 통념으로부터의 불일치, 그 어긋남의 발견이야말로 너머의 삶을 살아가며 찾아낼 수 있는 시의 감응일 터. 이전의 생활, 이쪽의 일상과 하나 다를 바 없던 이후와 저쪽의 삶은 그렇게 다른 것으로, 일종의 인공정원으로 조형되기 시작한다.

 

정원에는 높고 긴 나무들이 가득했다

인공정원이었다

중앙에 커다란 나무 세 그루를 중심으로

정원은 네다섯 개의 숲을 품고 있는 듯 했다

 

박정은, 정원부분

 

인공정원이야말로 너머의 세계를 또 다른 삶의 세계로 형상화하는 가장 강력한 이미지이다. 인공낙원일 수도 있고, 인공지옥일 수도 있는 양가적 경계의 중간지대로서 이 정원은, 물론 삶의 최종적 종착지는 아니다. 이 주소지는 언제든, 어떻게든 파기되고 새로이 옮겨질 수 있다. 여기 또한 이편 우리의 생활을 모방하여 큰 나무를 심고, 거기 올라 세상을 욕망하는 나날에 잠식될 수 있는 탓이다. 그러니 자칫 정원에서도 시인은 앙상한 꼬리표만 나풀거리며 이 세계를 자신의 감응 속에 융화시키지 못할지 모른다. 익숙해지지 않기 위해, 안온에 빠지지 않기 위해, 지각의 촉수를 예리하게 갈아두기 위해 시적 주체는 주변부를 향해 뛰어야 하고, 사람들이 큰 나무에 오르려 줄을 설 때 오히려 정원의 끝을 향해 달려야 한다. 그렇게 변경으로, 구석으로, 끄트머리로 힘껏 내달릴 때, 아마도 인공정원의 너머는 또 다른 정원으로 이어질 것이다. 끝이 아닌 시작, 혹은 새로운 감응의 응결과 전염. 거기서 시인은 말하리라. “정원은 나로 인해 넓어졌다. 그렇게 주소지는 또 다시 이전될 것이다.

주소 없는 편지. 이는 너머의 세계가 쏟아내는 감응을 부지런히 수신하고 그에 응답하여 주체의 감응을 발신됨으로써 새로운 감응, 곧 세계의 리듬을 창안하는 시적 투쟁의 과정이다. 제아무리 낙토의 장관을 연출하더라도, 그것이 건설되면서 또한 붕괴되는 속도를 추월해 새로운 정원의 이미지를 구성하려는 그 시적 여정에 주목하라. 그것은 반복 속에 차이를 발견하고, 사건의 감응을 촉지하며, 그 리듬에 어울리려는 시작(詩作)의 노동에 값하는 일이다. 시의 편지가 부쳐지는 주소를 확정하려는 노력은, 역설적으로 그 주소를 결코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귀속되어 있다. 편지가 도달하기도 전에, 주소는 벌써 바뀌어 있을 테니까.

 

나는 정원과 속도를 겨뤘다

 

* * *

 

올해 등단한 시인들의 최근작을 살펴보며, 시인으로서 그들이 감촉하는 이 세계와 그에 조응하여 그들이 조형해낸 시적 감응을 거칠게나마 짚어보고 싶었다. 감응이 감정이라는 단어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특이한 분위기의 조성을 가리킬진대, 시인 하나하나를 어떤 특정한 상태나 단계, 태도에 결박시킬 의도는 전혀 없다. 이 글에서 각자의 이름과 작품을 호명하며 단평한 것은 또한 그들의 시와 마주친 나의 비평적 감응이라 간주해주면 좋겠다. 비록 시인 개인의 이름으로 쓰여진 작품들 하나하나일지라도, 근본적으로 그것들은 이 시대와 교응하고 결합하여 안출해 낸 공-동의 시적 리듬이라 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나의 비평도 시인과 시 작품 그리고 나 사이의 공-동적 감응의 결과라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다를지라도, 여기에는 서로를 읽고 호응하는 일관된 리듬의 감응이 필연코 존재한다.




* 이 글은 월간 현대시201811월호에 게재된 동명의 원고를 수정한 것입니다.

Posted by 수유너머104

처음 읽는 시집

김혜순,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문학과지성사, 1985) 




이혜진/수유너머 104 회원




2

                                           

                                                                                                                                김혜순



깊은 밤 우리는 서로

없애주기로 언약했었다

그리고 엎드렸었다.

타앙, 네가 한 방 먼저 먹였다.

나는 갈가리

그러나 순간적으로 찢어졌다.

타앙 탕, 이번엔 찢어진 내가

사력을 다해 두 방 먹였다.

너도 나처럼 너덜거렸다.

순간적으로 너덜거렸다.

 

깊은 밤, 우리는 서로

없애주기로 언약했었다.

그리고 엎드렸었다.

그 다음 무서웠다.

우리들 사이에 침묵이 서 있었다.

침묵의 더러운 이마

침묵의 거대한 아가리

침묵의 가랑이

그 가랑이 아래로 소리없는 별들이

우 수 수.

침묵은 우리의 심장을 꺼내갔다.

허파도 하나쯤 가져갔다.

깊은 밤 우리는 서로

없애주기로 언약했었다.

그런데 이 한밤

우린 침묵에게 당했다.

 

빈 들판에

허수.

아비.



김혜순의 두 번째 시집, <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에서 고른 2는 첫 시집의 시와 비교해 보면 보다 명징한 언어를 사용했다. 당시의 언어를 통해 그 시대를 읽을 수 있듯, 시인은 가장 감각적인 언어로 그 시대 상황을 그린다. 특히, 이 시가 쓰인 1980년대 초는 5.18광주 민주 항쟁이란 정치적으로 가장 민감한 사건이 있었던 만큼 그와 무관하게 읽기는 힘들지만 그 배경을 모른다 해도 김혜순의  치열한 언어는 극적인 장면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했다.

 

도청 앞에서 시민 군과 공수부대의 대치, 그 정적을 깬 5 27일 새벽, 무장헬기의 무차별 사격, 당시 시민 군으로 있었던 사람들은 시인의 표현대로  빈 들판에 허수. 아비. 였다. 모두의 일상을 흔들었던 이 구체적인 사건의 공격성은 시인의 날카로운 감수성을 뒤틀어 두 번째 시집 전반에 걸쳐 왜곡된 모순의 세계를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시인은 구두점, 의성어 늘리기와 띄어쓰기 그리고 행 바꿈으로 시의 내용을 보다 긴장감 있게 만드는 기술적 장치도 사용했다. 이는 감상자가 눈으로만 읽었을 때보다 큰소리로 낭독했을 때, 시가 가진 고유의 음악성과 리듬감이 배가 되는 효과를 획득해 보다 적극적으로 이미지를 만들 수 있게 한다.

 

, 시인이 의도한 음악성에 맞춰 다시 한번 2를 읽어보자. 비참하지 않게, 그렇다고 장엄하지도 않게, 복기하듯 천천히 감각을 일깨워서.




 





Posted by 수유너머104

염려하는 주체와 언어의 형식

2010년대 한국시의 경향과 특이점: 김복희와 안태운의 시

 

 


돌들은 땅 위에 깔려 있다,

물 한 방울 짜낼 수 없는 돌들,

목덜미를 연상시키는 보통 돌들,

보통 돌들비문 없는 돌들.[각주:1]

이오시프 브로드스키

 


 

송승환_시인. 문학평론가

 

 



1. 새로운 언어 없이 새로운 세계는 없다

 

지난 20161029일부터 시작된 촛불집회는 201731120차 촛불집회까지 매주 토요일, 서울 광화문 광장을 비롯한 전국의 광장에서 열렸다. 헌법에 기초하지 않은 소수의 권력 남용과 부정부패에 대한 문제제기로서 촉발된 촛불집회는 시민들의 평화적이며 지속적인 참여로 직접민주주의를 실천하였다. 특히, 19차 촛불집회까지 세대와 성별을 가르지 않고 참여한 시민들의 최종 누적 연인원은 1,500여만 명이었는데, 이는 헌법재판소 전원일치로 2017310일 대통령 탄핵 인용 결정이 이뤄지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런 점에서 탄핵 인용 결정이 이뤄진 다음날 개최된 20차 촛불집회는 시민들이 스스로 민주주의의 승리를 자축하는 자리였으며 대한민국과 세계의 역사에 민주주의가 기록되는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대한민국의 촛불 시민들은 독일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이 선정한 2017년 인권상을 수상하였다. 이것은 2008225일부터 2017310일까지 유지된 정부의 비민주적이며 퇴행적인 치안 통치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이 인권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실천이었음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시인들은 지난 정부의 비민주적이며 폭력적인 치안 통치 속에서 발생한 용산참사와 세월호 사건에 대하여 미학적이며 정치적인 실천을 감행한 바 있다. 용산참사와 세월호 사건은 동시대의 비극적인 삶을 드러낸 사건으로서 시민은 국가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가, 국가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을 한꺼번에 제기하였다. 시인들은 동시대의 사건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표명하면서도 경악과 비명, 분노와 슬픔 외의 시적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는 고통과 무력감을 겪었다. 2009‘6.9 작가 선언20149월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304 낭독회는 그 고통과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한 문학적 실천이었다. 2000년대 한국시의 전위적이며 미학적인 실험은 제도적으로 안정된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현실에 대한 미적 거리를 확보한 상태에서 진행되었는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