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는 진리가 없다




조정현(수유너머104 세미나 회원)


컴퓨터가 덧셈을 하는 방법

컴퓨터가 덧셈을 하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고 실험을 생각해 보자. John Rogers Searl 중국인 실험과 비슷한 실험이다. 그림 1. 처럼 A,B 2개의 방이 있다. 방에는 입력을 받아 들이는 창과 출력을 내놓는 창이 있고, 입력창으로 덧셈 문제를 넣을 있다. 입력창으로 덧셈 문제를 넣으면, 안에서는 덧셈을 계산하여 결과를 출력창으로 보낸다. 그림은 3+5 입력창으로 넣었을 , 출력창으로 결과를 내놓은 결과이다.  





그림 1에서 A방과 B방은 동일한 문제 ‘3+5=’ 에 대해서, 동일한 출력물인 ‘3+5=8이라는 결과를 내놓았다. 입력과 출력만을 비교하면, A방과 B방은 동일한 동작을 한다고 보아도 된다. 각 방의 입력과 출력만을 비교하고, 방의 내부에서 수행되는 구체적인 계산 방법을 고려하지 않을 때, 우리는 A방과 B방을 black box로 간주하는 것이다.  A방과 B 방을 Black box로 보지 않고, 내부 구조가 보이는 투명한 White box로 보면,  A방과 B방은 동일한 동작을 하지 않는다고 볼 수 도 있다.  A방과 B방을 white box로 생각했을 때, 다른 동작을 하는 경우를 제시해 본다.


A방은 ‘3+5=’ 라는 문제가 입력창으로 들어오면, 이를 3+5 = (1+1+1)+(1+1+1+1+1) = (1+1+1+1+1+1+1+1) 로 바꾸어 계산하였다고 가정해 보자. A방의 방식대로 계산하면 (1+1+1+1+1+1+1+1) = 8 이므로, ‘3+5 = 8’이라는 결과가 나오며, A방은 이 결과를 출력창으로 내보낸 것이다. . A방이 수행하는 방식은 것은 덧셈을 세기(counting)로 고려하는 방식이다. A방은 덧셈문제가 입력창으로 들어오면, 이를 세기(counting)문제로 전환하고, 개수를 헤아려 덧셈의 답을 찾고, 찾은 답을 출력창으로 내보낸다.

이에 비해 B방은 덧셈표를 이용하여 덧셈을 계산한다고 가정해 보자. 1은 덧셈표를 보여준다. 덧셈표를 이용하여 덧셈을 수행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x+y’라는 수식이 있을 때, 수식에 있는 x는 덧셈표의 첫번째 행에서 찾고, 수식에 있는 y는 덧셈표의 첫번째 열에서 찾는다. 수식 ‘x+y’ 를 계산하는 방법은 덧셈표의 첫번째 행에서 찾은 x, 첫번째 열에서 찾은 y가 가리키는 좌표의 숫자를 찾는 과정이다. 1에서는 ‘3+5’를 계산하는 과정을 간단히 표시하였다. 진한 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3+5’ 덧셈문제를 찾는 과정이다. B방의 덧셈방법 즉, 덧셈표를 이용하는 방식에는 헤아리거나 세는 과정이 들어 있지 않다. 이 방법은 덧셈 문제를 표에서 값을 찾는 문제로 전환시켜 해결하는 방식이다. A방이 덧셈을 세기(counting) 과정을 통해 해결하였다면, B방은 덧셈을 찾기(searching)과정을 통해 해결하였다. A방과 B방은 덧셈의 풀이 과정은 다르지만, 덧셈이 결과는 동일하다. 참고로 표1. 덧셈표에서 c는 자리올림수 즉 carry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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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덧셈표를 이용한 덧셈과정



컴퓨터는 덧셈을 인간이 수행하는 덧셈방식을 이용해 수행하지 않는다. 컴퓨터가 수행하는 덧셈은 B방처럼 덧셈표를 이용하는 방법과 유사하다. B방처럼 수행하는 덧셈 방식은 인간이 머리속에서 헤아리는 방식이 아니라, 상징기호를 조작하는 방법이다. 이처럼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는 쉽게 말해 상징기호를 조작하는 기계이다.


컴퓨터는 덧셈을 할 때, 인간처럼 헤아리는 과정이 없으므로, 진정한 덧셈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야 할까?, 아니면 덧셈의 결과가 인간의 덧셈방법에서 나온 결과와 정확히 일치하므로 덧셈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할까? 컴퓨터가 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질문은 덧셈을 너머 더 넓은 범위로 확장할 수 있다. 컴퓨터는 바둑의 수를 구할 때, 인간과 다른 과정을 통해 찾아낸다. 이 때, 컴퓨터는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지 바둑 수를 찾아내므로 바둑을 둔다고 볼 수 있는가? 아니면, 인간과 다른 방식으로 동작하여 바둑 수를 찾아내므로, 진정으로 바둑을 둘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컴퓨터는 인간의 언어를 번역한다. 그러나, 인간이 언어를 번역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번역을 수행한다. 이 경우, 컴퓨터는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봐야 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한 번역과 컴퓨터가 한 번역은 번역결과가 정확히 일치하므로, 내부 과정은 무시하고 결과의 정확성만을 고려하여 컴퓨터는 인간의 언어를 이해한다고 보아야 하는가.


이런 부류의 질문은 과학으로 확장할 수 있다. 양자역학은 복소수를 이용하여 계산한다. 그리고 복소수를 이용한 계산결과는 현실과 잘 들어맞는다. 양자역학에서 복소수로 계산한 결과가 실세계와 잘 들어맞는다는 이유로 우리는 이 세계가 복소수로 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우리는 계산 결과가 세상과 잘 맞는다는 이유로, 세상은 계산 과정대로 이루어 졌다고 봐도 되는가? 우리는 덧셈표로 계산한 덧셈 결과가 잘 맞는다는 이유로, 인간의 머리에는 덧셈표와 같은 기호뭉치가 있고, 인간이 수행하는 덧셈은 이 기호뭉치를 조작하는 과정이라고 봐도 되는가? 일반상대성 이론이 실세계과 잘 맞는다고 해서, 일반상대성 이론을 계산하는 과정대로 세상이 구성되어 있다고 봐도 될까? 세상의 내부구조는 일반 상대성 이론을 표현하는 수식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는 결과가 잘맞는다는 이유로 이론이 가진 수학의 계산과정처럼 세상이 동작한다고 착각할 가능성은 없는가?


지금까지 앞에서 제시한 물음은, 세상은 인간이 수행하는 추상적 사고의 방법대로 동작하는 가를 묻는 것이다. 사람이 자랑하는 인간의 위대한 능력 중에 하나가 추상적 사고 능력이다. 많은 경우, 세상은 인간이 수행하는 추상적 사고와 동일한 방식으로 동작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회는 추상적 사고능력을 중요시 한다.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유지하려면 추상적 사고능력이 좋아야 한다. 추상적 사고능력이 좋은 사람들이 결국은 사회가 좋은 직장이라고 인정하는 곳에 취직하여 안정된 삶을 살게 된다. 그리고, 추상적 사고 능력은 결국, 상징기호를 머리 속에서, 잘 조작하여 이해하고 표현하는 능력이다. 상징기호 조작능력을 인간이 가진 위대한 능력으로 생각되었지만, 어느 순간 돌덩어리를 얇게 만들어 자극을 주었더니, 이 돌덩어리가 인간보다 상징기호를 훨씬 더 잘다루게 되었다. 우리가 자극을 준 얇게 만든 돌덩러리가 컴퓨터라는 기계다.




상징기호조작은 기계가 더 잘한다.


컴퓨터가 덧셈을 하는 방법은 인간처럼 수를 헤아리는 방식이 아니라, 상징기호를 조작하여 또 따른 상징기호를 찾는 과정이다. 컴퓨터란 결국 기호를 조작하는 기계일 뿐이며, 기호의 의미를 추구하는 기계가 아니다. 여기서 인간이 하는 활동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상징기호를 조작하는 기계처럼 살고 있지는 않는가? 상징기호조작에 머물러 있는 인간은 결국 돌덩어리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하기 쉽다.


산업사회가 되면서, 대부분의 인간이 하는 일은 상징기호를 조작하는 일이다. 수학, 물리학, 철학,경제학등 교육을 통해 전수되는 것들을 생각해 보자. 대부분 추상적인 개념을 다루고 이 개념을 표현하는 상징기호를 다룬다. 우리 일상생활을 관찰해 보자. 하루 대다수를 차지하는 작업들, 예를 들어, Internet을 하고, TV를 보고, 영화를 보고, 책을 보고, 휴대폰을 이용해 사람들과 접축하는 일들 중 많은 부분이 실제 세계와 접촉하기 보다 상징기호와 접촉하여 상징기호를 경험하는 일이다.


상징기호조작을 신속하고 능숙하게 진행하는 사람을 총명하다고 부른다. 아이큐 검사를 생각해 보자. 아이큐검사의 문제들은 보면 상징기호를 남보다 신속히, 정확히 조작할 수 있는 지 검사하는 것들이 주를 이룬다. 회사에 입사하기 위한 시험들, 자격증을 얻기 위한 시험들을  봐도, 상징기호를 이해하고, 상징기호로 상상하고, 상징기호로 표현하는 능력에 대해 평가하는 문제가 대다수이다.


알파고가 세계 최강의 바둑기사 이세돌을 이겼을 때, 우리들은 깨달았다. 이제 상징기호조작에 기반을 둔 추상적사고능력은 기계가 인간보다 더 낫다는 것을. 이런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하나? 추상적 사고능력을 가지고 기계와 경쟁하여야 하는가? 아니면 또 다른 삶의 방법은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한다.



4.022 명제는 만일 그것이 참이라면 사정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보는 책들 중, 특정 부류, 예를 들어 철학이나, 수학, 과학책들은 모두 명제의 나열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논고에서 주장한다. 명제는 참,거짓을 내재하지 않는다고. 명제는 단지 그것이 참일 경우에 사정이 어떠한지를 보여줄 뿐이라고. 그럼 참,거짓은 어디에 있는가?


2.223 그림이 참인지 거짓인지 인식하려면 우리는 그것을 현실과 비교해야 한다.
2.224
오로지 그림만으로는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인식할 수 없다.


논리철학논고는 주장한다. 참과 거짓은 현실과 비교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지, 그림(명제)만으로는 알 수 없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철학책에는 길이 없다. 철학책에는 진리가 없다. 진리를 알고 싶은가? 현실과 맞닥드리고, 현실에 젖어들고, 현실을 느껴라. 직접 밥을 하고, 직접 생활용품을 만들고, 직접 옷을 만들고, 직접 먹을거리를 길러라. 책은 옆에 놔두고 가끔 보기만 해라. 추상적 사고능력으로만 살려고 하지 마라. 그러는 순간, 세상은 당신을 컴퓨터라는 기계의 대용품으로 취급할 것이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이 우리를 위해 해준 말이다.


 

 

 

 


Posted by 수유너머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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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 마굴리스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리뷰



 로라(수유너머104 회원, 생명과학과 철학 세미나 반장)




들어가며

린 마굴리스의 저서 생명이란 무엇인가?” 3번에 나누어 읽었기 때문에 지난 주 세미나는 린을 읽는 마지막 세미나가 되었다. 이 책 이외에도 그녀의 책은 공생자 행성”, “마이크로 코스모스”, “섹스란 무엇인가 등이 있고 그녀가 타계한 이후 아들 도리언 세이건이 여러 과학자들의 추모 글을 엮은 린 마굴리스도 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에서는 생명에 관하여 전반적인 것을 다루고 있고, 특히 보이지 않는 미생물의 세계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명으로 여기지 않았던 지구 물질의 생명적 현상에 관한 놀라운 내용이 담겨져 있다. 뿐만 아니라 현재 학계에서도 논란이 되는 학설들이 꽤 있어서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그녀의 다른 책도 함께 읽었으면 했으나 앞으로 읽어가야 할 저자들의 책이 많아 이것으로 린 마굴리스를 지나쳐 가야했다. 많이 아쉬웠다.

 


브루노와 버틀러를 닮은 그녀, 린 마굴리스

린 마굴리스가 진화사의 코페르니쿠스 혁명을 이룩해내었다든지, “진화사를 다시 쓰게 했다라고 하는 동료 과학자들이 평가보다도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읽는 동안 내가 읽어 낸 것은 진실을 향한 그녀의 열정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처음으로 공생설을 접하는 순간 그것이 사실일 것이라는 직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 후 많은 실험을 통해 공생을 증명해 내었다. 생물학계의 주류라는 거대한 벽 앞, 미생물의 영역과 진화생물학의 영역을 둘 다 헤집고 다녀야하는 거센 파도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거침없이 돌진하는 무쇠와 같은 열정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완강하게 동료들과 논쟁하고 설득했던 그녀도 무척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많은 논쟁의 장에서 그녀는 전투에 임하는 전사처럼 거칠게, 때로는 상당히 방어적인 자세로 다른 학자들을 대했다는 그녀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을 동료들의 증언에서 느꼈기 때문이다. 여유로운 사람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이 책에서 이단으로 몰리고도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으며, 결국에는 종교재판에서 화형당한 조르다노 브루노 (1548~1600)를 과학 역사 비극의 사례로 들었고, 뉴턴의 과학과 다윈의 기계론적 진화라는 거대한 주류에 반기를 들었던 사뮤엘 버틀러(1835~1902)에 대하여도 자세히 기술하였다. 버틀러는 다윈이 진화과정을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묘사한 점에 질려하면서 다윈이 생물학에서 생명을 도려냈다고 빈정대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생명을 에 의해 움직이는 물체로 보는 다윈의 신뉴턴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각 있는 생명이 자신의 진화에 부분적인 책임을 지는 존재로 묘사했다. 그것은 마치 신다윈주의자들의 교리적 진화적 종합에 대한 그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듯 했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지구를 숨 쉬고 기억하고 여러 습관을 지니는 괴물로 여겼다. 지구가 살아있다고 믿은 케플러의 생각이 오늘날 우스꽝스러워 보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우리에게 과학이 점근적이라는 사실을, 다시 말해 궁극적인 지식이라는 최종 목적지에 결코 도달하는 법 없이 단지 근접해갈 뿐임을 일깨워 준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P17)

 

그녀의 공생 가설이 이렇게도 힘들게 주류에 편입[각주:1]되었지만, 다시 새로운 발견이 나타나면 그녀의 이론도 신화 속으로 사라질 수 있음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신 다윈주의자들과의 논()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 이후 인류는 혁명적인 진화론을 무기로 신의 질서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그 후 여러 분야의 연구를 통해 20세기 중반 (1930~1940년대) 진화적 종합[각주:2]이라는 다소 고전적인 진화론의 틀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로써 진화론은 또 하나의 교리적 학문의 성격을 띠게 된다.


모든 과학 중에서 특히 생물학의 개념은 환원주의적일 수가 없고 비가역적이며 창발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과학 개념은 가설이지 교리가 아니기에 의문과 반증에 열려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과학 각 분야는 꽤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편이다. 신다윈주의자들이 형성한 이론에 따르면, 자연선택은 개체군 내의 유전자 돌연변이와 재조합을 통한 점진적인 변형이 진화를 이끈다는 것인데, 여기에는 끊임없는 생존 경쟁이 주가 되고 안정된 유전적 공생은 아주 드물게 출현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린이 주장했던 진화적 변혁의 핵심이 공생이라는 주장, 특히 감염을 통한 유전이나 수평적 유전적 공생은 배재하였다. 린이 넘어야 했던 또 하나의 산은 미생물학과 진화학의 두 분야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있으며 서로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생물을 연구하는 분자 생물학자들은 진화를, 진화를 연구하는 진화 생물학자들은 미생물에 대해 무지할 뿐 만 아니라 서로 알려고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SET( Serial Endosymbolis Theory) ‘연속 세포 내 공생 이론 

SET는 린 마굴리스의 핵심이론으로서 역사와 능력이 각기 다른 세포들이 융합한다는 이론, 하나 됨의 이론이다”. SET 이전에는 난자와 정자의 수정 같은 세포 융합성(cell-fusion sex)을 다룬 이론이 없었다. SET는 융합성을 가능하게 하는 이론이다. 그녀는 진화적 새로움이 대부분 공생의 직접적인 산물이었으며 생전에 그렇게 믿고 살았다.

연속 세포내 공생이론에서 연속이라는 말은 융합이 순서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가리킨다. 공생자들이 완전히 융합되어 새로운 존재를 만든다면 그 새 개체’, , 융합의 결과물들은 정의상 공생 발생을 통해 진화한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사실, 공생 발생이라는 개념은 한 세기 전에 등장했었지만 그 이론을 검증할 수 있는 도구들이 나온 것은 최근이라 최근에야 공생이론이 증명될 수 있었다.

 

세균에 대한 그녀의 사랑과 변명

공생이론도 수많은 오해와 논쟁을 통하여 이제는 교과서에 당당히 실리지만 진핵 생물을 탄생시킨 원핵생물계의 주인공을 차지하는 세균에 대한 편견은 또한 어떠한가? 세균에 대한 개념은 질병의 세균론으로 시작되어서 일반적으로 세균이 숙주에 해악을 끼치기만 하는 나쁜 존재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병의 치료와 의료기구에 쓰이는 무균, 멸균의 개념이 건강한 조직의 특성이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편향적인 세균 개념은 일반인 뿐 아니라 과학계에서도 이렇게 받아들여졌었기에 우리 인류의 기원이자 선조이면서 지금도 우리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균에 대한 오해를 아직도 많이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세균은 반쯤 생기다 만 생명이 아니라 완전한 생명이며 35억 년 이상 계속 번성해온 진화한 존재다. 세균은 지구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화학 물질 발명자이지 단순한 병원균이 아니다, 자신을 복제하는 생명은 물질적 특성이 보존되어있으므로 세균 세포는 먼 과거에 존재했던 지표면의 화학적 성질에 대한 열쇠를 간직하고 있다...멸종한 적이 없는 세균은 우리를 먹이고 입히고 집까지 제공하는 식물이 잡초가 아니듯이 병원균이 아니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P84~85)

 

그녀는 생명권의 지배자는 세균이며 생명은 세균이다라고 일축함으로써 우리의 무지를 단번에 깨버린다.

 

가이아

학계의 여러 영역을 넘나 들어야하는 린 마굴리스의 주장은 재야 학자 제임스 러브록과 함께 발전시킨 가이아 이론과도 연결된다. 그녀는 어떠한 기관의 도움도 연구비 지원도 전혀 받지 않은 채 생명이 지구의 대기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탐구하던 재야의 기상학자 제임스 러브록의 연구를 적극 지지하고 그와 많은 교류를 하였다. 그리고 저서 공생자 행성에서 자신의 중요 개념인 SET와 가이아 이론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밝히는 것을 주제로 삼았다.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가이아 이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해가 지구는 하나의 생물이라는 것인데 가이아 이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러브록은 생명이 어떤 행성에 있던지 간에 그 행성의 유체들을 이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기온과 대기 조절이 지구 규모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 이런 중요한 환경 조건들은 적극적으로 조절되어야하며 생명이 자신의 환경을 조절하다고 주장하였다. 살아있는 지구인 가이아는 하나의 생물이나 한 생물 집단을 훨씬 초월한다고 그녀는 설명한다. 어떠한 생물도 자신의 배설물을 먹지 아니하므로 한 생물의 폐기물은 다른 생물의 먹이가 되지만 가이아 계는 자신이 먹이와 남의 폐기물을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지구 규모의 물질들을 재순환시킨다고 한다. 그 결과가 바로 가이아이다. 많은 진화론자들은 가이아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린은 가이아 이론을 적극 지지하는 진화론자였다.

 

맺으면서

생명에 대해 따뜻하면서도 열정적으로, 때로는 냉정하게 써내려간 린 마굴리스의 서술 중에서 어떤 표현들은 과학적이라기보다는 문학에 가까웠다. 아마도 과학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각주:3] 생명을 생물학으로 되돌리려한 노력의 전략과 전술[각주:4]때문에 다소 혼란스러움이 느껴졌을 수도 있다. 그녀는 생명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서 생명은 생존이라는 목적성과 방향을 가진 존재라고 일관되게 답한다. 한편, 린은 진화 이론이 인간 사회과 관련된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데 필수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린 과학자였다. 그녀는 인간이 이룬 이 엄청난 기술 문명과 부의 근원이 태양 에너지로부터 기원하고 축적된 라고 잘라 말한다! 인간들은 독립적으로 영양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동물류이다. 식물들이 태양의 에너지를 광합성을 통해 축적한 것을 초식동물들이 먹고 식물과 초식동물들을 먹는 인간이 그 에너지로 뇌를 사용하고 도구를 이용하여 창출해 낸 이므로. 태양과 다른 생물들과 환경에 빚을 지고 사는 인간들이 오만함을 반성하고 겸손해져야하는 이유를 그녀로부터 과학적으로 명확히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열정적인 생명이야기 중에서, 생명의 특징은 팽창이며 인간이 기술적 공생을 기반으로 우주로 팽창하려는 욕구로 인해 우주 식민지 건설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펼치는 부분에서 불편한 마음이 일어났다.

 

지구의 계속적인 변신은 그곳에 사는 각양각색의 생물이 가져온 누적된 결과다. 인류는 생명 교향곡의 지휘자가 아니다. 우리가 있든 없든 생명은 계속될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혼란스러운 소동의 배경에서는 중세의 음유 시인이 먼 언덕을 오르면서 연주하는 것과 같은 새로운 목가가 흐르고 있다. 그 선율은 제2의 자연으로서 기술과 생명이 하나가 되어 지구의 다양한 종을 포함하는 번식체를 다른 행성이나 태양계 너머 항성으로 퍼뜨릴 것을 약속한다. 녹색 생태학의 관점에서 보면 첨단 기술과 지구 환경 변화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완벽하게 이치에 맞는 행동이다. 지금은 인류의 절정기이다. 바야흐로 지구는 씨앗을 뿌리려고 한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P327)

 

식민 지배를 했던 유럽의 국가들이나 미국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 같은 것은 하지 않는 것일까? 위 인용문에서처럼 퍼트리는 것이 꼭 인간의 종만이 아닐지라도 피식민지 국가를 경험한 국가의 국민으로써 나는 팽창하려는 욕구와 타국()의 공간에 대한 침략에 거부감이 있다. 그것이 과학적 호기심과 개척 정신이라고 지칭하면서 긍정적으로 본다고 해도 말이다. 우주 식민지 건설 후보지를 위한 화성 탐사도 그 연장선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처럼 먼저 달려가 깃발을 꽂으면 그 사람의 소유가 되었던 것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백인들이 인디안 원주민을 내쫒으며 만든 역사이다. 미지에 대한 호기심과 개척 정신이 제국으로 연결되었던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화성에 발을 딛고 깃발을 꽂아 영역을 확인하려드는 인간의 행동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만약 화성에 생명체가 살고 있다면 그 것은 제국적 침약의 역사를 되풀이 하는 것이다. 진행되고 있는 화성 탐사는 지구적 규모의 생명권을 우주적 규모의 생명권으로 확장하게 해줄 것이지만 린 마굴리스가 강조했듯이 이 모든 부를 소유할 수 있는 진정한 소유자는 태양뿐 이라는 것이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그녀가 생존해 있다면 이 부분은 토론해보고 싶다. 지구의 생명체가 지구 밖의 행성까지 팽창해도 진정 괜찮은 것인지..

단 한권으로 린 마굴리스를 다 이해 할 수 없기에 이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쉬웠지만 다른 진화 생물학자들을 읽어가면서 그 녀가 던진 메시지의 의미를 더 깊게 이해 할 수 있기를 바래본다. 다음 읽을 진화란 무엇인가의 저자 Erenst Myer가 진화의 개념을 체계적으로 잘 설명해줄 것을 기대하면서..

 

 

  1. 진핵생물의 기원에 대한 이러한 추측은 진핵생물이 부분적으로 진정세균과 고세균의 유전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나온 것이다 (Margulis etal, 2000). (P 109, 진화란 무엇인가, 에른스트 마이어) [본문으로]
  2. “진화적 종합”이란 다윈이 진화론을 내놓은 이후 생물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지속적인 변화에 실질적으로 관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80여년의 논쟁 끝에 도달한 합의이다. 그 합의는 “진화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어나는 개체군의 특성 변화이다.”라는 것인데 개체군이 진화의 단위라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3. 이 책은 저명한 물리학자 에르빈 슈뢰딩거가 물리학적으로 생명에 대해 질문한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물학적 답으로 저작한 책이다. [본문으로]
  4. 열역학 제 2법칙-진화와 엔트로피 법칙(열역학 제2법칙)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은 닫힌계에서만 유효한데 생물의 진화는 열린계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생물은 끊임없이 필요한 에너지를 태양으로부터 얻고 환경의 희생을 대가로 엔트로피를 감소시킬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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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Programming Language 소개

 

 

 

조정현(수유너머104 세미나 회원)

 

 

 

 

개인용 컴퓨터를 켜보자. 노트북을 켜봐도 된다. 화면이 밝아지면서, 컴퓨터는 로그인 정보를 입력하라고 요구한다. 키보드를 통해 자판을 두드려, 로그인 정보를 입력하면 모니터에는 바탕화면이 뜬다. 바탕화면은 상징기호의 모임이다. 바탕화면에는 휴지통 아이콘이 있다. 이 아이콘은 우리가 업무를 볼 때 옆에 있는 휴지통을 상징화 한 것이다. 바탕화면에는 문서(document) 아이콘이 있다. 우리가 일하면서 작성하는 서류를 대표한다. 바탕화면에는 폴더 아이콘이 있다. 서류나, 문서를 넣는 폴더를 나타내는 기호이다. 컴퓨터 바탕화면이 보여주는 상징은 확실하다. 우리 책상 위(Desk Top)에 나오는 사물을 아이콘으로, 즉 상징기호로 화면에 보여 주는 것이다. 개인용 컴퓨터는 우리에게 책상 위에서 하는 작업을, 아이콘이라는 상징기호를 조작하여 처리하도록 도와주는 도구이다.

 

영화에는 나오지만, 실제 세상에는 보기 힘든 컴퓨터를 상상을 해 보자.
개인용 컴퓨터를 켠다. 화면은 밝아진다. 다음과 같은 문자가 화면에 뜬다.
안녕! 세상아!!”

 

 

 


컴퓨터가 안녕! 세상아!!” 라고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자신이 존립하고 있음을 선언하는 컴퓨터를 만난 것이다. 당신은 이 컴퓨터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새로운 종()인 독립된 개체를 만났다는 느낌을 받지 않겠는가?. 누구인가 컴퓨터를 이렇게 만들었다면, 그는 컴퓨터에게 생명을 부여하려 한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 컴퓨터는 인간에게 봉사하는 존재가 아니라 독립된 개체이다.

 

우리가 개인용 컴퓨터을 이용할 때 보이는 바탕화면 역시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인간이 수행하는 작업을 보조하는 도구로써, 상품으로 만들어진 대상이다. 이에 반해, 우리가 위에서 상상해 봤던, “안녕!! 세상아라 이야기하며, 세상에 자신이 있음을 선언한 프로그램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프로그램이다. 누구를 위하여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그래서 상품으로 이용되기 위해 만들어진 프로그램과는 결이 다르다.

 

‘C Programming Language’는 데니스 리치와 브라이언 커닝햄이 쓴 프로그래밍 기술서적이다.이 책에 나오는 첫 번쨰 예제 프로그램이 화면에 “hello, world!”를 표시하는 프로그램이다. 세상에 안녕!! 세상아!!” 라고 외치는 바로 그 프로그램이다. 데니스 리치는 켄 톰슨이란 사람과 함께 C라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만든 사람이다.  

 

 

 

C언어를 만든 사람이 자신이 만든 프로그래밍 언어를 설명한 책이 ‘C Programming Language’ 란 책이다. 쉽게 말해 저자 직강이다. 나온지 50년 가까이 된 책이라, 이 책을 보면서 C프로그램밍을 공부하는 사람은 최근에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오는 첫 번째 예제는 프로그래머에게 가장 유명한 프로그램으로, 이 예제로 인해 이 책은 지금까지 이야기 되고 있다.

 

프로그래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보통 제일 처음 만드는 것이 “hello, world”를 화면에 출력하는 프로그램이다.  python이던, C++이던, Java 이던, 어떤 프로그래밍 언어를 배우던지, 대부분의 프로그래밍 책에서 첫 예제는 “hello world” 를 화면에 출력하는 프로그램을 든다. 모두 ‘C Programming Language’라는 책의 영향이다.

 

데니스 리치는 아마도 컴퓨터를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로만 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컴퓨터는 사고하는 기계였을 것이고, 사고한다는 점에서만 보면 인간과 다른 점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있어 컴퓨터가 “hello, world!!”라고 선언하도록 프로그램을 만들었을 것이다.

 

프로그래머의 작업이 컴퓨터가 특정 동작을 수행하도록 명령어를 입력하는 것이라고 규정하면, 프로그래머는 주인이고, 컴퓨터는 하인이 된다. 그러나, 프로그래머는 컴퓨터를 인간과 같이 사고하는 개체로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고 규정하면, 프로그래머와 컴퓨터는 주인과 하인 관계가 아닌, 동등한 관계가 되고, 프로그래머는 어느새 컴퓨터와 물아일체(物我一體)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프로그래머가 곧 컴퓨터가 되는 과정, 주체인 나는 없어지고, 객체인 컴퓨터와 동일화 되는 과정을 경험한다. 이 단계에 이르면 프로그래머는 인간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컴퓨터의 동작원리로 생각하게 된다. 난 이 단계를 문리(文理)가 트인다라고 표현한다.

 

컴퓨터와 일체화 되는 단계는 형이상학적 주체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이 쉽다고는 할 수 없다. 어떤 사람에게는 상당히 지루한 과정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단계이다. 형이상학적 주체를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은 컴퓨터와 물아일체하는 프로그래머가 될 수 없다.

 

5.633 세계 속 어디에서 형이상학적 주체가 발견될 수 있는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에 나오는 말이다. 이 언명을 실생활에서 느끼고 싶다면, 이 책 ‘C Programming Language’을 읽으면서, 프로그래밍의 세계로 들어오길 권한다. 미리 이야기 하지만, 처음에는 무척 지루하다. 그러나, 문리가 트이고 다시 보면, 감동하게 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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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트겐1빠 2019.05.15 18: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다시 보기~

『코뮨이 돌아온다-우리 친구들에게』 서평

 

 

 

 

 

 

 

김기영(수유너머104 회원)

 

 

 

 

『코뮨이 돌아온다-우리 친구들에게』는 ‘평화’, ‘민주주의’,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 허위임을 단언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존재하는가? 애초에 평화도 민주주의도 사회도 없었던 이곳에 존재해 온 것, 우리를 연결해온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의 대답은 분명하고 어긋남이 없다. 그리고 강력하다.

 

저자 ‘보이지 않는 위원회’는 프랑스에 근거한, 코뮨의 세계적 연대를 촉구하는 강도 높은 지식인 집단이다. 이들은 많은 것들을 주장하고 선언한다. 모두가 아무도 하지 않았던 새로운 이야기 들이다.

 

이들은 평화가 허위라고 주장한다. 별일 없이 지나가는 듯 보이는 하루지만 어디선가는 테러로 수백 명이 희생당한다. 헤아려지지 않을 뿐 우리는 파국을 향해 전속력으로 추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우리에게 평화는 없었고 삶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면역계가 신체를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해 적들을 무찌르듯.

 

이들은 말한다. 평화의 가면을 벗기고 유혈사태를 중단하기 위해서 전쟁을 해야 한다고. 그러나 이들의 “전쟁”은 폭력과 살상이 아니다. 전쟁은 벗어나야 하는 것들과의 전면적인, 진심 어린 대결이자 “이질적인 역량들의 접촉을 주재하는 논리”이다.

 

 

 

이들은 민주주의가 허상이라고 선언한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보이지 않는 소수의 독재자들에게 조정당하고 지배되었다고. “자신을 주인으로 알지만 사실은 노예인 대중은 노예인 척 하지만 사실은 주인인 소수자들에 의해 통치당하고 있다.”(64) 인간이 통치당해야 할 만큼 어리석고 탐욕스러운 존재가 아니라면 통치는 부당하고 불필요한 압제임이 분명하다.

 

만일 이들의 말대로 민주주의가 허상이라면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던 수많은 “민주화운동”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1968년 프라하의 봄과 1980년 서울의 봄, 2011년 북아프리카와 중동을 휩쓸었던 아랍의 봄을 기억해보자. 부패와 독재에 저항하던 이 싸움들은 모두 전쟁이나 외세의 개입, 또 다른 독재로 이어졌다. 혁명이 진압되자 기업들은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프로젝트를 위해 몰려들었다.

 

 

모든 것은 반복될 뿐이었다. 분노는 희망으로 바뀌었다가 절망으로 변하고, 부조리는 계속되었다. 썩은 권력이 무너진 빈자리에는 무능한 정권, 꼭두각시 권력, 새로운 독재가 들어선다. 그래서 이들은 전면전을 주장한다. 거리에서 승리하는 것, 권력을 부수는 것만으로는 권력을 해체할 수 없다. “반드시 권력의 근거를 박탈해야”(72)한다.

 

이들은 사회가 없다고 말한다. 대신 여러 세계가, 우리가 경험하는 일련의 유대, 우정, 반감, 실질적인 멀고 가까움이 있을 뿐이다.(170) 사회는 역대 통치방식들에 의해 드리워진 그림자를 지칭할 뿐 아니라 언제나 통치에 봉사해 왔다(153),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처에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들은 ‘코뮨’이라고 답한다.

 

코뮨은 언제나 존재했던 맹세, 약속이었다. 코뮨이 추구해온 것은 조직이나 기관 같은 실체가 아니라 유대의 질과 세계에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코뮨을 선언하는 것은 매번 역사적 시간을 경첩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이고, 코뮨을 선언하는 것은 서로 유대관계를 맺는데 동의하는 것이다(176). 이들은 코뮨의 ‘다시 돌아옴’을 선언한다.

 

이들은 주장한다. 우리가 사회에 포위되어 민주주의라는 허상을 좇으며 독재자들에게 부당하게 통치당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필요한 것은 바로 “봉기”와 “전쟁”이라고. 그리고 통치를 해체하고자 한다면, 봉기를 준비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그렇다. 전면전을 위해 우리는 상황에 대한 이해를 공유해야 한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이해 공유를 위한 텍스트, 자료”라고 저자들은 말한다.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지금까지의 혁명과 유사한 혁명의 반복, 혁명의 가능성에 대한 것이 아니다. 도처에 감추어져 있는, 어떤 모습으로 발현될지 짐작하기 어려운 혁명의 잠재성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이들의 말대로 유대와 약속의 역량을 가진 존재라면 시대를 탈구시키며 도처에서 고개를 내미는 코뮨을 반가이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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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캇 펙의 거짓의 사람들서평




송재림(수유너머104 회원)





 

모건 스캇 펙(1936~2005)은 정신과 의사이자 영적 안내자이다. 그는 하버드대학과 베이스 웨스턴 리저브를 졸업한 후 육군 군의관으로 보낸 10여년의 경험을 토대로 개인과 조식에서의 인간 행동에 대한 통찰을 얻었다. 심리학과 영성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책이라는 평을 듣는 아직도 가야 할 길시리즈를 비롯하여 평화 만들기, 거짓의 사람들등을 저술했다.



거짓의 사람들을 치료 가능한 하나의 정신적 질병으로 보고 악 일반에 대해 과학적 지식 체계를 구성하고자 시도한 실험이다. 스캇 펙은 정신과 의사로서 접한 다양한 환자 사례들에서 악의 일반적 요소를 찾고, 악의 실체를 정신의학적으로 접근한다. 그는 개인적인 사례를 다루는 것에서 더 나아가 집단적인 사례를 통해 집단 악의 과정 및 예방법을 제시하였다.



처음 이 책을 읽으면 조금 당혹스럽다. “정신과 의사가 악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다니 이건 너무 종교적이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만큼 저자는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종교적으로 해석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하지만 악한 사람들에 대한 저자의 판단을 따라가다 보면 일상적 차원에서도 공감할 수 있는 의 심리학을 만날 수 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악에 대해 먼저 짚어보자. 스캇 펙이 만난 다양한 환자 중 그가 악하다고 판단한 사람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예의가 반듯한 사람이며 타인에 대한 매너가 몸에 밴 완벽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실제로 도덕적이고자 하지 않으며 가식과 위선의 수준에서만 도덕적인 사람들이다. 물론 그 어떤 사람도 도덕적으로 완전하지 못하다. 하지만 악한 사람들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의식하면서도 이를 인정하지 않고 문제의 원인을 타인에게 전가하거나 투사함으로써 죄책감을 거부한다. 이들의 나르시시즘은 자기 욕망을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시한다. 이 과정에서 악한 사람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들은 늘 희생양이 된다.



이러한 은 나르시시즘적 성격 장애의 한 종류로 분류될 수 있다. 그렇다면 악의 원인은 무엇일까? 유전적인 기질, 부모의 환경적 요인 등 다양하겠지만 에리히 프롬이 이야기한 악의 기원인 개인이 한 일련의 선택의 집합이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양심에 따라 어려운 길을 선택하느냐 자기 욕망에 따른 쉬운 길을 선택하느냐는 온전히 개인의 몫이다. 일련의 오랜, 반복되는 선택들이 악하게 발달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악이라는 질병이 개인의 선택에 기인하기에 예방과 치료법 또한 개인이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책임을 묻는 방향이 된다.



악은 개인의 수준에서만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집단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집단 악에 대한 설명이다.



집단 내 개인들의 역할이 전문화될수록 개인이 도덕적 책임을 집단의 다른 부분에 전가시키는 일은 가능해지며 쉬워진다. 이 과정에서 개인이 자신의 양심을 버리는 것은 물론 집단 전체의 양심도 너무 분해되고 희석되어서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될 수 있다. 이 문제에 있어서 한 가지 틀림없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즉 모든 개개인이 자신을 자기가 속한 집단의 행동에 직접 책임이 있는 자로 인식할 때까지는 어떤 집단이라도 불가피하게 잠재적인 무양심과 악의 상태에 빠져 있을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p.294”



악의 집단이 되지 않기 위해서 집단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집단이 다시 개인이 되는 것, 그럼으로써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에 책임지는 부지런한 개인이 되는 것이 악을 예방하는 방법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가 경험한 거짓의 사람들몇이 떠올랐다. 내게 그들은 앞으로의 행동이 예측불가능한 사람들이었다. 선택의 기준이 무엇인지 늘 궁금했던, 그래서 나를 혼란스럽게 했던 그들의 삶의 기준이 온전히 그 자신만을 위한 욕망이었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어 후련한 기분이었다. 동시에 갈등의 상황에서 너무나도 쉽게 방어 기제를 이용하여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나의 행동들을 반성하게 되었다. 살아가며 만나는 선택의 순간에서 편한 길을 두고 어려운 길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가 필요한 사람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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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리뷰 






송재림(수유너머104 회원)




1.김승섭,아픔이 길이 되려면




 

저자 김승섭은 의사이자 사회역학자이다. 천안교도소의 공중보건의 생활을 계기로 사회적 약자의 건강에 관심을 갖게 되어 인턴/레지던트 근무환경 연구’,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건강 연구’, ‘소방공무원의 인권상황 실태조사’, ‘한국 성인 동성애자/양성애자 건강 연구’, ‘단원고 학생 생존자 및 가족 대상 실태조사 연구를 진행하였다. 저술한 책으로는 아픔이 길이 되려면, 우리 몸이 세계라면이 있다.



이 책은 개별적인 신체에 발생하는 질병의 원인을 사회적인 요인에서 찾는 사회역학을 다룬다. 하버드대학교 낸시 크리거 교수는 1994년 출판한 논문(역학과 원인의 그물망: 거미를 본 사람이 있는가?)을 통해 개인이 살고 있는 공동체는 질병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를 묻는다. 노동자의 노동환경과 금연율의 관계, 공공의료보험과 AIDS의 관계, IMF와 결핵사망률의 관계를 통해 저자는 질병의 원인으로서의 공동체를 보여준다. 원인이 공동체에 있다는 것은 처방과 예방 또한 공동체의 능력에 달려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왜 공동체는 개인의 건강을 위해 고민해야 하는가? 그 답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다.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책임을 지니고 있습니다. 건강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기 위한 기본 요건이기 때문이지요. 건강은 인권을 지켜내기 위한, 정치·경제적인 기회를 보장받기 위한 조건입니다. 건강해야 공부할 수 있고 투표할 수 있고 일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 p.72”



사회역학은 정책 결정에서 어떤 방법을 통해 영향을 미칠까? 정책과정은 문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이것이 이슈가 되면 정책 아젠더를 형성하고 이에 맞는 정책 대안들 중에서 특정한 정책을 결정하고 이를 집행 및 평가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사회적 상황은 맥락적이기에 새로운 상황에 대한 정책을 수립하는데 있어 유의미한 자료를 수집할 시간이 충분히 확보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하지만 과거의 데이터에만 의지한 정책은 더 큰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저자는 새로운 정책을 수립할 때 이익을 얻는 기업이나 집단의 사전적 증명을 요구하는 사전주의 원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감정은 지극히 개인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타인의 고통을 나누고자, 스스로를 극복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다면 함께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2. 아론 벡,우리는 왜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아론 벡은 1921년에 태어나 현존하는 미국의 정신과 의사이다. 프로이트가 창시한 정신분석에서 벗어나 인지치료라는 새로운 치료법을 창시하였다. 인지치료는 내담자가 가진 행동 문제와 관련된 역기능적 사고를 찾아 이를 수정하여 행동 문제를 해결하는 치료법이다.



우리는 왜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는 아론 벡이 인지치료를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 차원에서도 동일하게 적용가능하다는 착안에서 서술한 책이다. 그는 정신과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공통적으로 발견한 사고현상인 왜곡된 인지부정적 신념으로 인한 심리적인 문제를 명료화하여 개인 및 집단, 국가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설명하고 인지적 요소를 활용하여 개인적,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음을 제시하였다.



책의 제목인 우리는 왜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에 대한 답을 저자는 원초적 사고때문이라고 한다. 원초적 사고란 원시시대에는 도움이 되었던 자기 중심적인 사고이다. 원초적 사고는 상대방의 의도를 왜곡하여 공격적인 행동을 통해 파국을 초래하는 이분법적이며 편집적인 사고이다. 인간이 취약한 부분에서 위협을 받을 때 원초적 사고가 활성화된다.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통해 자신의 취약성에 대한 두려움과 의심이 공격자에게로 초점이 전환되면서 스스로를 피해자로 왜곡하여 인식하는 것이다. 인지적 왜곡은 이후 공격자에 대한 과도한 일반화로 진화되면서 공격자에 대한 분노를 정당화시킨다.



아론 벡은 이를 집단의 차원에도 적용시킨다. 사람들은 쉬운 결정을 하기 위해 그리고 배척당하기 싫어서 집단의 의견을 따른다. 집단적 사고는 한 집단의 개인이 우리라는 범주를 만들고 이를 토대로 사고를 단순화(이분법적 사고)하여 인지적 왜곡을 일으키는 과정을 통해 활성화된다. 예를 들어, 나치는 게르만 민족이 우성학적으로 우수하다고 주장함으로써 게르만 민족과 그 외의 민족으로 범주를 설정하도록 하였다. 이로써 게르만인은 게르만 민족에게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으로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사고하고 게르만 민족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유대인들과 다른 인종을 인간 이하로 왜곡하여 인지하였다.



그렇다면 원초적 사고로 인한 갈등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인지치료는 내담자의 상처받은 감정에 초점을 맞추고 원인을 객관화하면 인지적 왜곡을 예방하고자 한다. 이를 적용하면, 자기중심적 사고로부터 벗어나 객관적으로 상황은 인식하는 것이 갈등해결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적 차원에서 노력할 수 있는 것은 이타주의적 사고 훈련을 통해 자기중심성으로부터 벗어나 공감력이 높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결국, 원초적 사고가 작동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취약성을 공격받지 않는다는 느낌 즉, ‘돌봄을 받는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편견과 선입견, 이분법적 사고에 도전하고 대항하는 사회적인 장치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분노와 혐오가 일상이 되는 사회에서 스스로의 분노를 되돌아 보고자 하는 이, 타인의 분노를 이해하고자 하는 이에게 이 책을 권한다





3.제임스 길리건, 위험한 정치인



 

제임스 길리건은 미국 정신의학자이자 작가이다하버드대 법정신의학연구소 책임자로서 1977년부터 1992년까지 메사추세츠 교도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폭력 예방을 위한 사회심리학적 프로젝트를 실시해 교도소 안의 살인율과 자살률을 획기적으로 떨어뜨리는 성과를 거두었다이를 바탕으로 폭력적 행동의 원인과 동기에 대해 연구한 폭력』 시리즈를 저술했다.



위험한 정치인은 제임스 길리건이 1900년부터 2007년까지 미국의 자살률과 살인율 통계를 분석한 책이다자살과 살인은 개인적인 원인으로 일어난다는 통상적인 생각과 달리 근 100년 간 미국의 자살률과 살인율은 동시에 솟구쳤다가 동시에 급락하였다흥미로운 것은 자살률과 살인율의 변화 주기가 대통령의 권력 교체와 맞물렸다는 점이며더욱 흥미로운 점은 폭력 치사(자살과 살인발생률이 오직 공화당 정부 때만 전염병 수준으로 올라가고 오직 민주당 정 부 때만 전염병 수준 밑으로 내려간다는 것이다이 통계는 어떻게 해석이 가능할까?



저자는 우선 자살과 살인의 원인을 살펴본다저자는 폴 홀링거의 연구를 인용하여 자살률과 살인율은 상호 연관성이 있으며 실업률과도 상호 연관성이 있음을 확인한다그는 칭치 시에와 베러디스 푸의 연구를 인용하여 소득 불평등과 폭력 범죄 또한 긴밀한 연관성이 있음을 확인한다그렇다면 실업과 불평등은 대통령의 정당과 어떤 상관 관계가 있는 것일까?



공화당 정부에서 민주당 정부 때보다 실업률이 증가하고불평등이 심화되는 원인은 두 정당의 정책 차이에 있다공화당은 부유층의 소득 증가율을 높이는 정책을 추구하는 반면 민주당은 실업을 줄이고 성장을 끌어올리려는 목적의 정책을 추구한다이에 따라 공화당 정부에서는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고 치사 범죄율이 상승하는 것이다공화당과 민주당의 정책 차이는 수치심의 윤리와 죄의식의 윤리로도 설명가능하다수치심의 윤리는 불명예와 치욕이 가장 큰 악덕이고 수치의 반대곧 자부심과 명예가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도덕 체계이다죄의식의 윤리는 죄가 가장 큰 악덕이고 죄의 반대곧 순결이 가장 큰 미덕으로 통하는 도덕 체계다수치심의 윤리는 우월과 열등의 서열화를 옹호하며 위계화된 사회 체제를 미화한다죄의식의 윤리는 교만을 죄로 규정하여 누구도 우월감을 느끼지 못하도록 평등주의를 옹호한다이에 따라 수치심의 윤리에서는 자부심을 높이고 열등감을 낮추기 위해 사회·경제적으로 우월한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끼려하고죄의식의 윤리에서는 자부심을 낮추고 겸손하기 위해 사회·경제적으로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끼려 한다.(이것은 가난한 사람이 왜 공화당을 지지하는지도 설명해준다.) 수치의 윤리를 정당의 핵심 정서로 삼는 공화당은 사회를 위계적으로 불평등한 수치 문화로 만들어 가며죄의식의 윤리를 정당의 핵심 정서로 삼는 민주당은 지위의 차이를 줄여 수치로부터 사람을 지키는 평등주의적 사회를 만들어 간다.



이 책을 폭력을 줄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이에게 추천한다저자가 마지막으로 인용한 피르호의 발언을 그대로 옮기며 서평을 마무리한다.



의학의 진보는 궁극적으로 사람의 생명을 연장하겠지만 사회적 여건의 개선은 이러한 결과를 더 신속하게 더 성공적으로 성취할 수 있다의사는 본디 가난한 사람의 변호인이고 사회 문제는 넓게 보면 의사의 영역에 들어간다인간을 다루는 과학으로서 의학은 사회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단을 제시해야 할 책임이 있다의학통계학은 우리의 측정 기준이 될 것이다우리는 생명의 무게를 생명으로 달고 어디에 시신이 더 두텁게 쌓였는지를 볼 것이다의학은 사회과학이고 정치는 규모를 키운 의학일 뿐이다.”



이에 대한 답을 조효제 교수가 쓴 추천사에서 찾을 수 있다. “공화당이 추구하는 정책은 사람들을 강력한 수치심과 모욕감에 노출시키기 쉬운 정책이다열패감과 열등감을 조장하며 타인을 무시하고 경멸하도록 부추기고 불평등을 찬미하는 문화를 숭상한다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상실했을 때특히 해고를 당했을 때극도의 수치심과 모욕감을 경험한다이런 식으로 수치심과 모욕감이 팽배해 있는 사회에서는 폭력 치사(타살자살)가 발생할 확률이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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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잡지 『에피』 6권 리뷰 

 ‘필드 사이언스’와 ‘수능 리뷰’를 중심으로


 



고승환(수유너머104 회원)





1. 들어가며


 에피는 ‘과학기술비평’잡지다. 보통 시중에는 과학기술 그 자체의 설명이나 이슈에 대해 서술한 책들은 많지만 비평하는 책은 거의 없기 때문에 실험적인 잡지라고 할 수 있다. 비평한다는 것은 비판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누군가는 과학을 왜 성찰해야하는가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과학은 <관찰-가설-검증>의 단계를 마치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 또한 인간의 욕망, 정치, 사회, 경제 등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지금의 과학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에피는 지금까지 총 6권의 책을 통해 여러 가지 주제를 다뤘다. 흥미로운 주제가 많지만 가장 최근 6권에 해당하는 내용 중 <키워드|필드 사이언스>와 <2019년 수능 ‘과학’관련 리뷰>에 대한 생각을 써보고자 한다.




2. 키워드|필드 사이언스에 대하여


 학창시절부터 배웠던 과학교육이라고 한다면 늘 체계적으로 잘 정리된 이론과 실험들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정량적인 지식을 전달해야하는 교육시스템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으나, 수많은 이론을 만들고 실험을 했던 과학자들의 연구과정은 생략된 채 완벽히 정리된 결론과 설명만을 배우는 것이 재밌지 않았다. 연구자들의 열정과 고뇌가 담긴 날 것의 연구과정을 알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6권의 키워드인 필드 사이언스는 제목만으로 매우 흥미로운 주제였다. 각 편들에서 기억에 남는 내용을 위주로 정리해보겠다.



 ‘정양승의 시체농장 : 법의인류학자의 실험실’에서는 ‘시체농장’이라는 필자의 독특한 업무환경에 대한 설명과 그 필요성이 잘 전달되었다. 그의 말처럼 시체의 부패과정을 연구하기 위해 다양한 시체를 모아둔 야외실험장이 있다면 데이터를 기반으로 꽤 신뢰할만한 결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들지만, ‘나라면 과연 그 현장에서 일을 할 수 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을 때 자신있게 할 수 있다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더구나 이 곳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돌아다니며 부패과정을 사진으로 기록해야한다니……. 이 일을 담담하게 해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싶다. 필자가 한 여름 큰 비가 내린 후 시신 위로 넘어진 적 있다고 했을 때는 글을 읽는 것만으로 소름이 돋았다. 어마어마한 양적 데이터를 통해 시체들의 사망 시기를 추론하는 과정도 놀랍지만 그 곳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의 열정도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최재천의 생물학 연구의 현장’에서는 2가지 부분이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하나는 실험실에서 민벌레를 사육하는데 필요한 야생공간을 연구자가 직접 만들어 관찰하고 실험했다는 것이다. 현장성을 살려 야생 그대로를 재현한 모의공간을 만든다고 할 때 어떤 기준으로 어떤 방식을 사용하는지 알고 싶었다. 다른 하나는 학계에서 성과를 판단하는 기준과 연구비에 대한 비판이었다. 현 정부는 각각의 학문의 속성은 고려하지 않은 채 오직 논문의 개수로만 성과를 판단하여 경제적 지원을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대략적으로 생각해도 현장 연구자가 100편을 쓰면 실험실 연구자는 적어도 1,000편은 써야 비교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현재 우리나라의 연구비 투자규모인 20조가 연구자 입장에서는 부족한 현실이며, 그 20조마저도 도전이 두려워 이미 해외에서 기반이 닦인 안정적인 연구만 뒤쫓다보니 지는 게임만 한다는 것이다. 사업비 원금회수를 못하더라도 전체 사업비의 20%정도는 새로운 연구에 지원하자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독자로서 굉장히 공감되는 생각이고 이런 생각이 처음 들어본 것은 아닌데 왜 현실에 적용되지 못하는지 의문이다. 



 ‘이원영의 남극에서 펭귄 연구하기’에서는 연구자와 연구종의 ‘관계’에 대한 필자의 생각이 기존의 통념을 깨주었다. 보통 객관적인 연구를 위해 연구자는 연구대상에게 감정을 개입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제인구달 박사가 침팬지 각 개체에게 이름을 붙이며 교감했을 때 침팬지들이 경계를 풀었고 더 가까이에서 그들의 행동을 관찰할 수 있었다는 사례를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생각해보면 연구자가 감정의 동물인 사람인데, 어떻게 전혀 감정의 개입이 없을 수 있을까? 오히려 감정을 적절히 조절하여 이용할 때 보다 객관적이고 상세한 연구를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연구자의 관심에 따라 같은 연구대상이라 할지라도 질문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언급하며, 동물행동학자로서의 질문은 어떠한지 그리고 그 질문을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보여주는 부분을 통해 필자의 관심분야를 이해할 수 있었다. 



 ‘강호정의 Wet, Wet, Wet 습지로 가는 생태학자’에서 필자는 ‘도시’를 하나의 생태계로 분류해야한다고 주장하며 도시에서의 연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숲에서는 식물의 종류에 따라서 흙 속에 서식하는 미생물의 종류가 결정되곤 하지만, 도시에서는 지하철 노선에 따라서 다른 종류의 미생물이 발견되기도 한다. 또 강변에 밤마다 켜 있는 가로등 때문에 물 속의 물고기가 밤낮의 시간을 잊어버리고 시도 때도 없이 알을 낳기도 한다. 여름철 서울 도심의 시끄러운 매미소리도 밝은 불빛들과 연관이 있다.”(p.75) 도시의 체계를 기준으로 관찰되는 생태계라니! 도시의 긍정성과 부정성을 평가하기에 앞서 자세한 연구내용과 방법이 훗날 대중교양서적으로 기록되었으면 한다.



 ‘김웅서의 온 바다는 나의 실험실’에서는 염분, 수온, 수심을 자동으로 측정할 수 있는 CTD와 넓은 해역에서 표층 수온, 해안선 변화, 해수면의 고도 등을 알 수 있는 인공지능 그리고 잠수정 등 실험장비들이 궁금했다. 기술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연구성과들도 놀랍지만 기술자체에 더 관심이 갔다. 평소에는 주로 교양수준에서 뉴턴잡지, 위키백과, 유투브동영상을 활용해 기술의 원리를 익히고 작동모습을 보곤 하는데 해양관련 기술들도 찾아보고 싶었다.



 이 외에도 ‘박지형의 인류세의 산하유기’, ‘이융남의 나는 왜 고비사막으로 가는가?’편이 있었다. 각자 전문가로서 자기 영역의 자부심과 열정이 느껴지고 진지한 문제의식을 알 수 있었다. 많은 지면이 할애된다면 자세한 연구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겠지만, 이 작은 책 한 권으로도 필드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의 생각을 조금은 들여다 볼 수 있었다. 




3. 2019년 수능 ‘과학’리뷰에 대하여


 에피편집부는 수능 ‘과학’에 대한 전문가들의 리뷰에 앞서 ‘수학’리뷰 원고 청탁 실패기를 통해 그들의 문제의식을 전달했다.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다. “인공지능이 수학의 어떤 범위도 대체할 수 있는 상황이니 어려운 문제를 두고 씨름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있는데 과연 그런가?”, “수험생들이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그 교육적 효과는 무엇이며, 그것의 사회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먼저 첫 번째 문제의식에 대해 크게 공감한다. 책에서는 셈을 할 줄 알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과 셈을 못하면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의 차이를 언급했다. 아마도 이 차이는 능력의 차이를 말한 것일 거다. 계산기가 없는 상황에서 셈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수학만 이런 것이 아니다. 기계, 전기를 비롯한 각종 기술에서도 적용된다. 기계공학을 전공하면서 기술에 대한 호기심이 전보다 늘었지만, 그 이상으로 늘어난 것은 기술 앞에서의 무력감이었다. 일상생활에서 빈번히 사용하는 여러 기계장치들은 대부분 자동화되어 있다. 자동화는 여러 차례에 걸쳐 수동적으로 작동시킬 번거로움을 없앤 것이므로 이용하는 관점에서는 편리하고 좋기만 하다. 하지만 기술을 배우는 입장에서는 마냥 좋은 일이 아니다. 기계가 자동화되는 순간 학습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한 번의 클릭으로 기계내부에서는 전기적 신호에 따라 여러 메커니즘이 순차적으로 작동을 하고 순식간에 내가 원하는 결과를 내놓는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처음의 입력과 마지막의 출력뿐이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된다면 그 기계가 고장이 났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은 그저 교체밖에 없다. 교체를 하더라도 엔지니어 진단과 설명에 복종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적어도 각 부품들의 기능을 알고 작동원리를 파악하고 있다면 전문가의 설명에 그대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하게 되고 일명 ‘호갱’이 되지 않는다.



 두 번째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수능 ‘과학’에 대한 전문가들의 리뷰에서 중요한 답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사회에서 수험생들이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문가들은 ‘어려운 문제’를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과목의 본질적인 특성을 묻되 다양한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제한된 조건 속에서 과목의 본질적인 특성과는 관계없이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두 가지 종류의 문제는 수능에서 모두 출제되지만 보통 전자의 경우는 출제자입장에서 기피의 대상이 되고, 후자의 경우가 과목의 등급을 결정짓는 킬러문제가 되곤 한다. 왜 그럴까? 수능에서 ‘좋은 문제’는 오류가 나지 않으면서도 변별력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물리에서는 전형적인 상황이 아닌 다양한 상황을 전제로 문제를 내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교과과정을 제대로 이수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오류없이 오직 하나의 생각으로 귀결되게끔 만들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채택되는 것은 ‘질점이 마찰이 없는 빗면 위를 미끄러지는 상황’뿐이다.(p.97참고) 지금 교육현실에서 과목의 본질적인 특성을 무시한 채 복잡하기만한 문제가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는 수험생들의 점수에 따라 순위를 매기기 위해서이다. 이를 통한 교육적 효과라는 것은 형식적 공정성을 통한 개개인의 위계질서의 정당성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형식적 공정성은 공고히 될지 몰라도 전문가 혹은 비판적인 시민으로 성장하는데 걸림돌이 될 것이다.




4. 이번 호와 관련하여 앞으로 기대하는 점


 이번 호에서는 ‘필드’를 다뤘다면 언젠가 다음기획은 ‘실험실’에서의 연구도 집중 조명했으면 한다. 실제 연구의 대부분은 필드와 실험실을 병행하며 이루어지고 있고, 각각의 장소마다 장·단점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필드의 경우 실험실에 비해 실험자가 어떤 형태로든 개입하는 상황이 덜하다. 그런데 개입을 덜하기 때문에 그만큼 예상치 못한 변수가 수시로 발생하여 원하는 사실이나 사실들 간의 상관관계를 밝히기가 어렵다. 반면 실험실의 경우 실험자의 조작을 통해 원치 않는 변수를 통제하기가 필드에 비해 쉽다. 그러나 실험자의 조작이 개입될수록 객관성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에 조작은 엄밀한 기준과 제약이 있어야한다.



 실험하려는 종목이나 방향에 따라 실험실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그 실험실에서 사용하는 실험기구는 어떻게 만들어지며, 또 어떤 실험자들이 열정과 호기심을 갖고 어떤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어떤 실험을 설계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실험실에서의 연구가 필드보다 통상적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이미 잘 아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막상 자세히 생각해보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부분도 자세히 알 수 있다면 무척 재밌을 듯하다. 



 또한 이번 수능 리뷰를 통해 문제의 분석을 했다면 다음은 우리나라 교육철학과 방법에 대한 근본적인 논의가 한번 정리되었으면 한다. 대안을 중심으로 논의가 된다면 의미있는 글이 나올 것이라고 믿는다.



 무엇보다 가장 바라는 것은 에피가 10년이고 100년이고 지속적으로 출간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 나오는 모든 과학서적을 보진 못했지만 꽤 유명한 여러 책들을 보면서 느낀 것은 에피는 다른 잡지들과는 다른 차별성이 있다는 점이다. 자연과학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이런 잡지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일상의 큰 즐거움이다. 많은 사람들이 구독하기를 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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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화이트헤드 읽기 세미나]




영진(수유너머104 세미나회원)




애초에 호기롭게 달려들었던 세미나 였지만 평일 빡빡한 일정에 지레 겁을 먹고 하차할 뻔 했으나 종헌 반장님의 아량과 넝구쌤의 한결같은 환대와 유혹 속에 드디어 세미나에 첫 참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타인의 얼굴> 책 표지 속에 희미하게 웃고 있는 대빵 만한 레비나스 선생님의 미소를 차마 외면할 수가 없어 몰래 야금야금 읽으며 5장에서 6장을 읽어나가는 찰나에 이건 반드시 제대로 읽고 나누어야 돼! 하는 생각이 섬광처럼 번뜩 였더랬죠! 덕분에 이 명저의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게 될 수 있어서 매우 기쁜 마음입니다

 

간략하게 함께 공부했던 내용을 나누자면, 5장에서는 책임과 대속의 주체에 대하여, 그리고 6장 에서는 고통과 윤리에 대하여, 7장에서는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종합과 철학사에서의 의의를 정리하는 내용 이었어요! 

 

5장은 넝구샘 께서 발제를 맡아주셨어요! 책임과 대속적 주체에 관한 레비나스의 혁명적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장 이었는데요, 각 장의 핵심 내용을 마치 아이들을 가르치듯 쉽고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해주셔서 머릿속에 쏙쏙 내용이 들어와 제대로 복습이 되었습니다. 장의 말미에 샘이 만나신 작품들과 일상에서 경험했던 생각들을 덧붙여 주셔서 더욱 재미있었습니다.

 

6장은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하신 종헌샘이 발제문 으로나마 자리를 함께 해 주셨는데요, 전반부에서는 고통과 윤리에 대한 내용을 역시나 체계적이게 잘 설명해 주셔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후반부에는 이에 대한 종합과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주변 사건과 경험을 통해 구체적으로 전해주셨습니다. 글 속에 샘의 목소리가 생생히 전달되었어요. (종헌샘의 영혼의 동지 재중샘이 여러 번 심장 어택을 당하셨다는...)

 

7장은 쫑샘께서 발제를 맡아 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철학에 대한 공부가 짦은 지라 7장에서 레비나스 사상과 서양철학의 주류체계를 비교하고 언급하는 부분이 많아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고 정리가 잘 안되었었는데, 차이점의 핵심을 잘 정리해 주셔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여전히 어렵지만 발제문을 곁에 두고 복습하고 있습니다. 감사해요! :)

 

이어진 나누기 에서는, 각자의 경험 속에서 레비나스 철학을 만나게 된 일화가 기억에 남았습니다. 넝구샘은 다르덴 형제의 ‘자전거 탄 소년’ 속 시릴과 사만다의 이야기를 통해, 쫑샘은 암투병중인 친구와의 일화에서 겪었던 아픔을 통해, 재중샘은 톨스토이의 작품 속 성지순례 과정 중 두 노인의 상반된 행보를 통해, 모현샘은 동양 철학 중 묵가 사상과의 유사점을 통해, 그리고 종헌샘은 소수자 그룹에서 지내면서 깨닫게 된 사랑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저는 지하철에서 종종 도움을 간청하는 사람들을 외면해 왔던 기억이 떠올랐는데요. 헐벗고 굶주린 모습으로 나에게 간청하는 타자를 그저 내 생각으로 재단하며 피해왔었던 경험을 통해 타인을 대신해 고통을 받고 기꺼이 내어주는 행위가 나에게 얼마나 어려운 것들 이었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게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윤리학을 제 1철학으로 보려했던 레비나스 선생님의 의도가 성공적 인 것 같습니다.)

 

이어서 기억에 남는 담론은 마지막에 재중샘이 던져 주셨던 의문 속 오갔던 이야기들 이었습니다. 타인에 대한 책임과 대속의 의미에서, 타인의 일깨움에 의한 책임이 윤리적 불면과 나를 고귀한 영적 존재로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결국 내가 스스로 주체됨과 혼동하여 잘못 이해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것, 대속의 의미가 모호하게 이해된다는 의문을 던져 주셨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어요.

 

타자에 의해 책임적 존재로 지정받은 내가 타자를 위한 책임적 존재로 세워지는 모습은, 자리바꿔 세움 받음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넝구샘 께서 말씀해 주신 고난 받고 부활하는 예수의 모습(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며 좌절의 목소리를 내던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 받고 죽음에 이르고 부활하는 과정)을 책임과 대속의 과정으로 이해 할 수 있고 그 외 쫑샘이 말씀해주신 ‘미쓰백’ 작품 속 인물들과의 연대나 아가페적인 사랑, 레비나스가 말한 모성성 같은 것들로 이해한다면 좀 더 피부로 와 닿을 수 있겠지요?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을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오갔던 이야기들이 너무 풍부하고, 또 삶에서 겪은 진솔한 이야기를 이름조차 생소하고 어려웠던 철학자의 생각을 통해 거리낌 없이 서로 나눌 수 있었다는 것이 참 기적처럼 느껴지는 군요, 돌아오는 먼 길을 심심하지 않도록 열심히 단톡방 에서 수다를 떤 탓에 150개가 육박하는 채팅창의 대화가 여운을 더 해 준 하루였습니다.

 

벌써 첫 번째 책을 끝내고! 다음주부터는 드디어 레비나스 선생님의 본저에 돌입합니다!

<후설 현상학에서의 직관이론> 인데요! 서론과 1장은 솔님께서, 2장과 3장은 모현님께서 발제를 맡아 주시고 간단한 뒷풀이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다음시간에도 즐겁게 공부해보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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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위한 철학 수업>의 '삶과 자유', '만남과 자유' 후기




알라(수유너머104 세미나회원)





안녕하세요.

A조의 2주차 후기를 맡은 안라영입니다.

2주차는 책 '삶을 위한 철학 수업'의 '삶과 자유', '만남과 자유'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1. 삶과 자유

 영진님의 발제문을 읽는 것으로 세미나를 시작했습니다. 각 장의 핵심이 되는 내용을 꼼꼼하게 정리해주셨고, 인상적이었던 건 책에서 활용된 사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영화나 신화의 내용을 잘 모르는 게 많았는데, 발제문을 통해 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감사합니다!!)  또한 생각해볼 만한 질문을 곳곳에서 제시해주셔서, 이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습니다.

질문을 공유해보자면, 

1. 당신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은 어떤 것이었나요?    

2. 에이허브와 오디세우스 중 어떤 삶이 더 자유로운 삶이라 생각하나요?

      - 에이허브: 매혹 혹은 증오에 온 몸을 던지는 삶

      - 오디세우스: 매혹에서 벗어나 기존의 목적지로 가려는 방어기제

3. 내가 생각하는 나는 어떤 사람일까?

4. 힘든데도 애써 웃으려고 하는 것보다 원래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이 더 자유롭지 않을까요?

5. 나는 현재 어딘가에 갇혀 있을까?

6. 내가 시도해보고 싶은 새로운 것은? 나를 넘어서 꿈꿀 수 있는 시도는 어떤 것인가요?



 이 중에서 서로의 일생일대 '사건'을 나누었습니다. 기억에 남았던 건, 충한 튜터님께서 지금 2-30대 세대에 '사건'이라고 할만한 일은 보통 개인적인 일(ex. 물리선생님을 만난 일)인 경우가 많은데, 작가님처럼 '사회주의 붕괴', 즉 사회적 사건이 인생의 사건인 것이 오히려 부러울 때도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역사를 배울 때마다 격동의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에 오히려 감사했었던 적이 많아서 조금..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대통령 탄핵이 있고나서 탄핵심판권 수업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우리는 지금 너희들 자녀들이 역사책에서 배울만한 사건과 마주해있어!!" 라고 얘기했던 기억이 나면서 지금도 거대 담론을 인생의 사건으로 삼을 수 있는 기회는 남아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충한 튜터님께도 아직 기회가 있을거란 말이죠..!!)   

 그리고 에이허브와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꽤 오래 나누었습니다. 몸 바쳐 매혹당할 수 있는 것이 더 자유로운 삶일까, 매혹 속에서도 가야할 길을 가는 것이 더 자유로운 삶일까. 저는 에이허브의 삶에 대한 동경이 있었는데, 의견이 많이 갈렸어요. 그러다가 매혹당해야하는 순간과 가야할 길을 가는 순간을 조화시킬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자유가 아니겠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절충안이긴 했지만, 공감이 많이 됐습니다. 매혹당해야 하는 순간에 매혹당하기 위해 노력해봐야겠다 싶기도 했구요!

 



2. 만남과 자유

 만남과 자유의 발제문은 제가 작성했습니다. 함께 읽은 뒤 이야기 나눴던 내용은 사랑의 '수동성'과 '능동성'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내 범주 안으로 상대를 들여오는 사랑과 상대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에이허브와 오디세우스 얘기와 유사한 듯 하여 패스하겠습니다ㅎㅎ...

 



3. 자유와 행복

 자유롭다는 건 결과와 상관없이 그 순간에 행복을 느끼는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자유로울 때 행복하다는 의견에 대해 자유가 오히려 불행(?), 순화하자면 불편을 야기하는 순간도 있지 않냐고 질문 했습니다. 정해진 대로 살던 고등학생에서, 여러모로 자유를 얻는 대학생 또는 성인이 되면 불안해하는 순간처럼 말이죠. 주어지지 않았던 '자유'가 주어진 순간, 불편을 느꼈던 경험은 몇몇 분들께서도 있었다고 얘기하셨지만, 주어진 자유에 충분히 익숙해지고 누릴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되면 구속과 억압보다 자유가 행복을 주는 것 같다는데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인상깊었던 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학생들에게 시간과 제도가 마련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제가 고민해봐야할 거리가 하나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오랜만에 청인지 세미나에 참여했는데, 새로운 분들과 다양한 의견을 나눌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A조에는 개성 강한 분들이 많은 듯하여 앞으로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 기대되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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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세미나-세미나후기] 잡편 33.천하편





조정현(장자세미나 회원)





장자는 도(道)를 이야기 한다.
장자가 말하는 도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무엇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개별적이고 특수한 무엇을 가리키는가.
어떤 대상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인지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인지 구별하기 위해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살펴보는 것이 유용하다.

다음은 논어 선진편의 한 대목이다.

子路問 聞斯行諸. 子曰 有父兄在 如之何其聞斯行之.
자로가 여쭈었다. 들으면 곧 실천하리까? 선생님 말씀하시다. 부형이 살아 계신데 어찌 들은 대로 실천하겠느냐?
冉有問 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
염유가 여쭈었다. 들으면 곧 실천하리까? 선생님 말씀하시다. 들으면 곧 실천해야지!

"들으면 곧 실천해야 한다"는 명제가 있다.
공자에게 이 명제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명제가 아니다.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이 명제는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다. 선진편의 대목은 개별적이고 특수한 명제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럼, 도(道) 역시 일반적이고 보편적이기 보다 개별적인 것일까?
도가 일반적이라면, 너의 도와 나의 도가 동일할 것이다.
도가 개별적이라만 나의 도가 있고 너의 도가 있으며, 이 도는 서로 다를 것이다.

논어 이인편에 나오는 대목이다.
吾道,  一以貫之 (나의 도는 하나로 꿰뚫는다)

여기서 공자는 '도'에 나(吾)라는 수식어를 붙여 '나의 도'라 이야기 하였다. 
'나의 도'라고 이야기 했을 떄, 너와 내가 그리고 다른사람이 동일한 '도'를 공유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다른 이와 다른 나만의 개별적인 '도'가 있다는 말이다.  

공자는 자기가 가진 개별적인 '도'를 진리로 봤을까?
진리로 봤다면, 도는 당위의 문제를 즉 마땅히 그래야 함에 대한 이야기이다.
있는것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을 이야기 하고,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을 이야기 할 것이다.

논어 위령공편에 나오는 대목이다.
人能弘道 (사람이 도를 넓힌다.)

'도'가 진리라면 사람은 '도'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 '도'가 규범이 된다.
사람이 도를 넓힌다라고 말하였다면 '도'는 마땅히 지켜야할 규범이고, 진리가 아니다.
도는 꾸준히 넓히고 확장해야할 대상이다. 

공자가 가진 도에 대한 관점은 장자와 동일하다. 공자와 장자가 갈리는 부분은 '도'가 아니라 '명(名)' 이다.

천하편에서 장자는 '도'를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설정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한다.
'도'는 개별적인 데, '도'를 일반화하고 보편화하여 사람을 억압하는 예가 나온다. (노래를 부르지 말게 하는 묵가 등등)
그리고 '명'에 옭아매져 있는 사람을 비난한다.

道可道, 非常道
도덕경에 나오는 대목이다.
간략히 의역해 본다.
도가 도가 되려면, 상도(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도)가 아니어야 한다. 장자가 가닌 '도'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보편성은 없다.

장자에게 '도'는 개인마다 다르고, 상황마다 다른 개별적이고 특수한 대상이다.
그럼 개개인이 가진 '도' 사이에는 우열성이 있는가?
내가 추구하는 '도'가 다른 사람이 추구하는 '도'보다 우월할 수 있는가?
장자는 개별적인 '도' 사이에 우열성은 없다고 본다. 개별적인 '도'가 시대를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한다고 보지 않는다.

장자가 가진 관점을 야구선수로 비유해 본다.
빠른 직구에 유리한 스윙을 하는 선수 A가 있다.
변화구에 유리한 스윙을 하는 선수 B가 있다.

A선수가 추구하는 '도'는 강속구를 떄려 안타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B선수가 추구하는 '도'는 변화구를 때려 안타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A선수는 강속구에는 강하지만, 변화구에는 약하다.
B선수는 변화구에는 강하지만, 강속구에는 약하다.

C라는 선수가 나와서 새로운 '도'를 추구한다.
'난 강속구에도 강하고, 변화구에도 강한 스윙을 연습할 것이다.'
C 선수는 번트 전문 선수가 된다.

A선수, B선수, C선수는 야구 타격에 있어서 자기 다름대로의 도를 추구한다.
A선수와 B선수가 추구하는 '도'는 다르다. 그리고 어느 선수가 추구하는 '도'가 우수한지 판별하기 힘들다.
여기서, 진정한 야구선수는 어때야 하는 지 생각해 보자.

진정한 야구선수는 변화구가 왔을 떄, 변화구에 맞는 스윙을 하고, 강속구가 왔을 떄 강속구에 맞는 스윙을 하는 선수다.
경우에 따라 번트를 댈 경우에는 정확히 번트를 대는 선수이다.

진정한 야구선수는 '도'를 추구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도'를 바꾸어 버린다.
그래서 진정한 야구선수이고, 장자는 이를 진인이라 불렀다.  

자기만의 '도'가 있어야 하지만, '도'에 목숨걸지 말아라.. 장자가 하고 싶은 말이 이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Posted by 수유너머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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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세미나-세미나후기] 인간세편




조정현(장자 세미나회원)





인간세 편은 공자와 공자의 제자 안회사이에 대화로 시작한다.
안회가 위나라로 가려고 마음을 먹고, 스승에게 이야기를 하는 중 다음 이야기가 나온다.

回嘗聞之夫子曰 : 저는 일찍이 선생님께서, 이르기를
治國去之 : '잘 다스려지는 나라는 떠나고
亂國就之 : 어지러운 나라로 들어가라,

"잘 다스려지는 나라는 떠나고, 어지러운 나라로 들어가라. "
이 대목은 논어의 내용과 상충이 된다

논어 태백편에서 공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危邦不入 亂邦不居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말고 어지로운 나라에 머물지 마라.

장자 인간세에 나오는 공자의 이야기와 논어 태백편에 나오는 공자의 이야기는 서로 모순된다.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장자가 공자의 말을 잘 못 옮긴 것일까? 아니면 장자는 공자를 일부러 풍자한 것인가?
난 장자가 공자를 풍자한 것으로 본다. 다음 부분에서도 공자에 대한 풍자가 보인다.

논어 자로에 나오는 부분이다.
子路曰 衛君 待子而爲政 子將奚先.
자로가 말하기를 “위나라 임금(出公 輒)이 선생님을 기다려서 정사를 다스린다면 선생님께서는 무엇을 먼저 행하시겠습니까?”
子曰 必也正名乎。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명(名)을 바로잡을 것이다.”
子路曰 有是哉 子之迂也 奚其正
자로가 말하기를 “이러한 일도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세상 물정을 모르십니다. 어떻게 명을 바로잡겠습니까?”

공자는 명(名)을 바로잡겠다고 하고, 자로는 이를 비판한다. 공자는 세상을 모른다고 하면서...
공자는 이러한 자로에게 야(野) 하다고 말하고, 자신의 논리를 편다. 명은 정말로 중요하다라고...

논어에서 공자는 명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장자 인간세에서 공자는 명(名)에 집착함을 비난한다.  

德蕩乎名 : 덕은 명에서 녹아없어진다. 
名也者 : 명이란
相軋也 : 서로 해를 끼치는 것이다. 
공자는 뒤이어 명을 흉기로 까지 비유한다.

논어 자로편을 읽고 장자 인간세를 보면, 공자는 인간세에서 제자 안회에게 자기 부정을 한다.
논어에서는 명을 바로잡아야 한다 하면서, 인간세에서는 명은 흉기라고 말한다.
공자에 대한 풍자이다.

도(道)라는 관점에서 공자와 장자는 공통된 면이 있다. 일반성, 보편성 보다는 개별성, 특수성에 관심을 두었다는 점에서 도에 대한 관점은 비슷하다.
그러나, 명에 이르면 공자와 장자는 전혀 다른 관점을 보인다. 공자는 명에 집착하였고, 장자는 명에 집착함을 위험하다 말한다. 

장자가 가진 명에 대한 입장은 노자 도덕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名可名 非常名
常名에 대한 입장차이가 공자와 노자 사이에 뚜렷하다.

안동림번역에서 명을 명예로 번역하였다. 난 이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장자에 젖어들어 살면서 체득한 바로는 명은 추상 개념을 말한다. 이 해석이 학술적으로 맞는 지는 관심이 없다. 내 체험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로 생각한다. 언어로 생각한다는 것은 기존에 이미 익힌 추상 개념으로 사물을 분류하고, 추상 개념으로 사물을 의식한다는 것.
우리는 추상개념이 보편성이 있고, 그래서 추상개념 자체를 부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학교 교육은 추상 개념을 가르치는 과정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개념을 배우지, 직접 체험하지 않는다.

우리는 달다는 추상개념을 익히고, 이후에 꿀은 달다는 정보를 배운다. 반대일 수도 있다. 꿀은 달다라는 정보로 부터 달다라는 추상개념을 익힐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추상개념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꿀이 달다라는 정보만을 배울때,  실제로 꿀을 먹는 체험을 하지는 않는다.    
추상개념으로 아는 정보와 체험으로 깨닫는 지식은 많이 다르다. 우리는 이를 경험으로 안다.

실제 꿀을 먹으면, 꿀은 달지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체험한다.  단맛도 있지만 쓴맛(인삼이 들어있다면)도 있다. 
미끌거리고, 끈적거리는 오묘한 맛이 섞여 있는 게  꿀맛이다.
이런 관점에서 장자는 명에 집착함을 경계한다. 꿀에 달다라는 추상 개념을 자동적으로 연관시키는 행위를 경계한다.

추상개념을 경계하면,  의식한다라는 것, 생각한다는 것도 경계하게된다. 
만약, 추상개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어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언어가 없다면, 의식도 없어진다. 이 경지가 망아(忘我)의 경지이고 이 경지에 이른 사람이 진짜 사람(眞人)이다.

장자가 떠나고자 한 것은 현실세계가 아니라, 언어에 속박된 세계다.
장자는 개념에 묶여 사는 것을 떠나고자 했지, 현실을 떠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장자는 자신으로 살고, 세계를 있는 그대로 살려고 했다.
나에 대한 개념을 세우고(예를 들어, 나는 군자다. 나는 대인이다), 이런 추상개념(군자,대인)을 나다움으로 규정하고 규정에 얽어매어져 살지 말고, 그냥 나를 살자고 말한 것이다. 이렇게 살때 인간은 창의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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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음"의 존재론

이진경, 불교를 철학하다』, 휴, 2016

 

 

최유미/수유너머 N 회원

 

 

 

 

 

 

 

 

 

 

내가 불교와 처음 만난 건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이었다. 60세에 말기 암 선고를 받은 아버지는 붓을 들어 반야심경을 쓰면서 마음을 다스리셨고, 우리들에게는 성철스님의 유명한 공안 진공묘유(眞空妙有)”를 한 장씩 써 주셨다. 그 덕에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읽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헛되고도 헛되도다로 읽었기에 산 자를 위한 철학은 아니지 싶었다. 그렇지만 느닷없이 닥쳐온 죽음 앞에서도 아버지가 비교적 담담하셨던 건 순전히 불교 덕분이라 생각했기에 나는 불교에 어느 정도는 고마움과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공부해 보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윤회니 해탈이니 하는 개념들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전생에 지은 업에 따라 현생이 결정되고, 현생의 업에 따라 미래가 결정되다니.. 틀림없이 뭔가 야로가 있을 거란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이진경의 새 책, “불교를 철학하다는 나처럼 창밖에서 힐끗 안을 들여다보고 막연하게 불교에 대한 상을 그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기, 무상, 인과, 보시, 윤회 등의 25개의 불교 개념을 제대로 생각하게 해 주는 책이다. 무엇보다 불교를 허무주의로 읽은 나의 오독을 바로 잡아 주었다. 덕분에 아버지가 써주신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이 책의 미덕은 자칫 고원(高遠)해지기 쉬운 불교 개념들이 이진경과 만난 덕분에 과학, 현대철학, 문학, 예술이 침윤한 싱싱한 모습으로 다가오는데 있다. 책 표지 역시 ‘21세기 불교를 위한 하나의 초상이라는 부제답게 로봇신체를 한 부처가 연꽃 비행선을 타고 있는 그림이 실려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은 단지 21세기의 기술문명을 표상하는 것만은 아닌 듯싶다.

 

책 표지를 보고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의 성 라퓨타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언젠가 이진경이 이 영화에 꽂혀서 게시판에 장문의 글을 올렸던 기억이 있어서인 것 같다. 라퓨타는 대지를 벗어나 천공에 건설된 파라다이스다. 700년간이나 대지를 탈주해 있던 천공의 파라다이스 라퓨타는 다시 대지를 장악하려는 인간의 욕망에 사로잡히고, 주인공들은 자신들도 죽게 됨에도 불구하고 라퓨타에 멸망의 주문을 건다. 영화의 마지막은 그 라퓨타가 대지를 향해서 무너져 내리는 장면인데, 이때 인간의 욕망과 무관한 라퓨타의 동물, 식물, 로봇들은 천공을 향해 부상한다. 이미 라퓨타는 대지를 벗어나 있었지만, 그 탈영토화는 철저하지 않았다. 이들은 대지를 완전히 벗어나는 탈영토화를 감행하는 것이다. 책표지의 부처는 인간의 신체를 탈영토화하고, 대지로부터 자신의 뿌리를 뽑아버린 연꽃 비행선을 타고 다시 탈주를 감행한다.

 

이 책이 보여주는 불교의 초상은 이런 탈영토화를 존재론으로 밀어붙인 모습이다. 이진경이 불교를 통해 펼치는 존재론은 존재자를 탈영토화 한다. 존재자를 탈영토화한 존재. 이 책에서 존재, 있음 그 자체의 존재론이 중도(中道), (), (), 그리고 십이연기(十二緣起)의 개념들을 빌어서 펼쳐진다. 이진경은 전작인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에서 보다 있음그 자체에 더욱 밀착되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진경이 자신의 존재론을 선보이게 될 날이 머지않았음을 이 책으로부터 예감하게 된다.

 

그나저나 유물론자가 분명한 이진경이 윤회나 해탈 같은 개념을 어떻게 독해했을까? 아버지 49제를 주관하신 스님은 아버지가 중음신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부디 인간의 몸으로 환생하도록 기도한다고 했다. 나는 그때 속으로 인간으로 환생한들 그가 이전의 내 아버지와 어떤 같은 점이 있을까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불교는 무아(無我)”말하면서, 또 아()를 그대로 유지한 다음 생을 말하는 셈이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않은 것 아닌가? 윤회의 시간을 관통하는 그를 누구로 불러야 할까? 이진경은 보르헤스의 죽지 않는 사람들을 들어 윤회의 시간을 관통하는 것은 수많은 삶, 그 '모든 사람'이 될 수 있는 아무도 아닌 자만이 있을 뿐이다"(217)라고 .. 윤회는 “‘무아생명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적절한 어떤 힘의 영원한 흐름이다”(218)라는 파격적인 해석을 내어 놓는다. 윤회하는 것은 존재이지 존재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하나 이 책을 읽는 재미는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선승들의 선문답을 조금이나마 따라 갈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를 준다는 점이다. 나는 벽암록은 아예 펼쳐들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선불교의 기초적인 공안집이라는 무문관에서 한차례 좌절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화두를 끝까지 밀어붙이고는 말해보라! 말해보라!”고 윽박지르는 선승들의 다그침 통에 나도 덩달아 숨이 막힐 것 같아서 책을 덮고 말았었다. 이진경의 이 책은 그것을 다시 펼쳐보게 꼬드긴다.


Posted by 수유너머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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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시 한번 마르크스

- 이시카와 야스히로,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나름북스)





전 주 희 / 수유너머N 회원




이렇게까지 귀여워도 되나싶다. 그래도 맑스인데. 심지어 베이비 핑크의 맑스라니. 





책의 뒷면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멎었다. 아... 난생처음 보는 맑스의 뒤태라니! 

(저 엉덩이 어쩔거냐. 김보통 작가는 책임져라.)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은 수없이 쏟아지는 맑스 입문서 중에서도 극강의 귀여움으로 독자들을 몸서리치게 만든다. 평생 저런 맑스를 본 적이 없다. 정말 이렇게까지 유혹해야해? 라고 묻고 싶을 정도다. 그런데 저자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거 같다.  

저자는 ‘부드러운 마르크스 입문서’를 내걸었다. 맑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맑스가 뭐에요?’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마르크스의 생애와 사상을 소개했다. 그렇구나. 세상에는 맑스를 아는 사람과 맑스를 모르는 사람 혹은 맑스를 좋아하는 사람과 맑스에 적대적인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사이 어딘가에 ‘맑스가 뭐냐?’라고 묻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나는 한 번도 그렇게 물은 적이 없다. 난 처음부터 맑스가 싫었다. 지겨우리만치 푸르던 대학교정의 잔디밭이 권태로워 미치기 일보직전일 때, 잔디밭 대신 맑스가 싫었다. 대체 언제부터 싫었을까? 고등학생 때 종로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철거민들하고 학생들을 쫓아 영화관 골목까지 쫓아온 백골단들의 살기보다 학생들과 철거민들의 그 눈빛이 더 싫었을 때부터였나? 아니면 중학생 때 나와 자주 어울려 장구와 꽹과리를 치고 놀았던 선생님들이 죄다 전교조 선생님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였나? 한달, 두달이 넘게 단식을 하고도 교단에서 머리끄댕이를 잡힌채 기어이 쫓겨나 미처 챙기지도 못해 그들의 책장에 그대로 박혀있었던 ‘그 책’ 때문이었을까?

하여간 학교다니는 내내 맑스가 싫었다. 그리고 선배들은 집요하리만치 내게 맑스를 읽게 했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딱히 ‘처음’이랄게 없는 맑스와의 지리한 만남들이 있었던 것이다. 대체 나는 왜 그랬을까?



이십대 내내 맑스가 싫을수록 까뮈가 부러웠다. 알베르 까뮈는 자신을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 한권의 책에 대하여, 세계적인 작가가 된 후에 서문을 남겼다. 그의 영원한 스승인 장 그르니에의 <섬>에 대해, 까뮈는 강렬하게 체험한 자신의 '처음'에 대해 고백했다. 





한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얻는 위대한 계시란 매우 드문 것이어서 기껏해야 한 두 번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계시는 행운처럼 삶의 모습을 바꾸어 놓는다. 살려는 열정, 알려는 열정에 북받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와 비슷한 계시를 제공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열어본 후 겨우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 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알베르 까뮈, 장 그르니에의 <섬>에 부쳐.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는 까뮈가 부러워 미치겠다. 나는 왜 온 우주에 심사가 뒤틀려 이십대를 보냈던가. 또 회한에 사무쳐 사십대에 이런 글을 쓰고 있나. 

대신에 나는 맑스를 나와 함께 읽었던 사람들의 푸르던 눈빛들을 기억할 따름이다. 어느 철도 노동자는 <자본>을 읽고서 맑스를 ‘고마운 사람’이라고 했다. 훌륭한 사람도 아니고 고마운 사람이라니. 나는 맑스보다도 그 철도노동자를 보기 위해 <자본>을 읽는 자리에 꼬박꼬박 나갔다. 그러니까 살려는 열정, 알려는 열정에 북받쳐 <자본>의 한 귀퉁이를 씹어먹을 듯이 노려보던 그가 좋았고, 부러웠던 것이다. 

베이비 핑크로 무장한 맑스 앞에서 옛날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건 순전히 저자의 한국어 서문 때문이다. 내년에 60세가 되는 노학자는 부드러운 맑스를 소개하기 전에 ‘일본에서의 마르크스 수용 역사’를 이야기한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본을 뒤흔든 시절, 저자는 맑스를 ‘평화운동’과 함께 만났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시작된 이후 40년간 축적된 새로운 맑스를 다시 읽기 위하여 저자는 자신이 청년시절 읽었던 맑스가 아니라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 맑스를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듯 하다. ‘평화롭고 민주적인 일본’을 위해 저자는 심지어 ‘부드러운 맑스’로 유혹하며 함께 동지가 되자고 말 건넨다. 이 책의 미덕은 심오한 통찰이나 깊이있는 분석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맑스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과 맑스를 놓고 말이 오갈 수 있는 여백이 만들어진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을 ‘마르크스는 태어나서 처음’이라는 이십대 제자들과 맑스의 <자본> 1장을 읽고 나눈 대화를 싣는다. 대략 이런 식의 대화다.  



후쿠다(제자1).       ‘환원’은 무슨 의미인가요?


하토오카(제자2).   캐시백 같은 거죠?


아시카와(저자)    그렇죠. 고객 감사 세일 비슷한^^. 사전에는 ‘사물을 이전의 형태나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라고 했어요. 그렇게 보면 여기서의 환원이란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사물의 형태’로 되돌리는 걸 의미하겠죠. 

    • 본문, 194쪽. 




아.. 캐시백이라니.. 한참을 웃고나니, 이제야 알 것 같다. 내가 왜 맑스가 싫었는지. 

맑스를 참으로 많이 알고 있었던 선배가 너무 멋져서 고백한 밤. 

“선배, 좋아해요.”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깊은 상념에 빠지더니, 나에게 그랬다. 

“세상에 사랑은 두 종류가 있지. PT적 사랑과 BG적 사랑. 넌 너의 BG적 사랑을 부끄러워 해야해.”

그놈이 그랬다. 대충 느낌으로 차인 것 같았지만 PT가 ‘프롤레타리아’의 약어고, BG가 부르주아를 뜻하는지 나중에 가서 알고 나서, 맑스가 진절머리가 났다. 이번에도 선배대신 맑스가 미웠다. 

그 시절 그 선배에게 ‘환원’을 캐시백이라고 대답했다면, 난 아마 ‘자본주의의 하수인’정도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인 아시카와 선생은 ‘붉은 맑스’를 젊은 후배들에게 전달해주는 대신, 젊은 세대들이 만나는 맑스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도록 부드러운 여백을 만들어준다. 어쩌면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 ‘여백’이었을 것 같다. 나는 맑스를 읽어야만 하는 99가지의 이유에 질렸던 것이다. 나에게는 맑스가 나에게 말 건네주는 그 처음의 공간. ‘맑스가 머에요?’라고 묻게 만드는 시간. 그 ‘처음’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인가보다. 아직도 지리하게 맑스를 읽는 나는 항상 다른 사람들의 ‘처음’을 흠모하며 질투하며 그들과 함께 읽는다. 

오늘 처음으로 이 <자본>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하며, 다시 한번, 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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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현상학을 한다는 것?

-이광석 외, [현대 기술 미디어 철학의 갈래들], 그린비, 2016.



김충한/수유너머N 회원 









[현대 기술 미디어 철학의 갈래들]은 그동안 산만하게 분산되어있던 기술, 미디어에 관한 철학자들의 담론을 보기 좋게 정리하고 소개하는 책이다. 다루고 있는 이는 질베르 시몽동, 발터 벤야민, 빌렘 플루서, 마셜 매클루언,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브뤼노 라투르, 도나 해러웨이, 주디 와이즈먼, 앤드루 핀버그 이다. 이중 상대적으로 생소한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를 다룬 "5장: 시간, 기억, 기술 : 베르나르 스티글레르의 기술철학(이재현)"을 살펴보자.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베르나르 스티글레르(1952~)


 스티글레르는 이력이 흥미롭다. 1952년생인 그는 학생운동의 일환으로 은행을 털다가(?) 5년간 옥살이를 했다. 복역 기간에 그는 철학 책을 탐독하며 데리다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출옥 후 데리다의 제자가 되어 1992년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현재는 퐁피두센터 산하의 연구혁신센터의 소장을 맡고 있고 동시에 시골마을에 철학학교를 세워 비판적 사고 능력, 리터러시 교육도 병행하고 있다. 주저로는 [기술과 시간] 3부작이 있고 이외에도 30권의 저서가 있다. 아직 국내에 번역된 책은 없다.




에피메테우스의 실수


  그가 전유하는 철학자는 크게 칸트, 후설, 하이데거, 시몽동, 데리다다. 분야로 말하자면 현상학이 되겠다. [기술과 시간] 3부작중 1권의 부제는 ‘에피메테우스의 실수’인데 에피메테우스는 프로메테우스의 쌍둥이 동생이다.


                                     [기술과 시간 1], 부제가 '에피메테우스의 실수'이다.




 ‘먼저pro 생각하는자 metheus’란 의미의 프로메테우스와 달리 ‘나중에epi  생각하는 자’인 에피메테우스는 인간에게 줄 능력을 따로 남겨놓지 않고 모두 동물들에게 주고 만다. 이 실수로 짐승들의 위협에 처한 인간에게 형인 프로메테우스는 헤파이스토스 대장간에서 기술과 이를 만들 수 있는 불을 인간에게 가져다준다. 

 이 신화를 통해서 스티글레르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결핍된 존재이고 그래서 이를 메우기 위해 보철이 필요한 존재라고 해석한다. 데리다 식으로는 결핍의 ‘대리보충‘을 위해 기술이 필요하다. 이 기술을 통해 인간은 생물학적 진화가 아닌 다른 계통의 진화를 겪는다. 즉 진잔트로피언에서 네안트로피언에 이르기까지는 대뇌가 발달하는 생물학적 진화를 따르다가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의 대뇌상의 변화는 없고, 대신 기술 계통으로의 진화가 발생한다. 인간은 외재하는 인공적 기억에 의거해 진화를 이어 왔다. 이것을 ’후천계통발생‘이라고 일컫는다. 



                         -생물학적 진화가 안정기에 도달하면, 기술 계통의 진화가 시작된다-




[ 이제 우리는 인간의 대뇌 피질 진화의 종료가 삶의 일반 역사의 관점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해야 하며, 따라서 최초의 뗀돌조각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기술의 역사이자 인간의 역사에서 근간이 되는 ‘생명 이외의 다른 수단에 의한 삶의 진하 추구’, 이 표현은 ‘후천계통발생’이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우리를 이끈다] [기술과 시간 1권], 본문에서 재인용




외재적 기억의 3가지 종류.


그는 기억이 크게 3가지 외재적 지원을 받는다고 한다. DNA, 신체, 기술이다.  DNA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던 유전적 기억이라면 신체는 살아가면서 획득하게 되는 경험과 관련한 기억이다. 기술은 기억을 외화 시켜 영속화할 수 있게 해준다. 이 기술을 통해 인간은 기억을 DNA 말고도 후대로 전할 수 있게 됨으로써 후천계통발생적으로 진화해왔다. 그래서 스티글레르에게 기술은 인간에게 원초적인 그 무엇이다.



시간성


책 이름이 [기술과 시간]인 만큼 기술성을 시간성과 관련되는데, 그는 하이데거의 개념을 전유한다.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세계-내-존재로서 지평을 갖게 되며, ‘이미 그곳’이 주어진 존재다. ‘이미 그곳‘이란 선재하는 것으로, 세대를 거쳐 전승되는 유산이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과거가 나의 과거가 된다. 스티글레르에게 이 과거란 바로 '외화된 기억들'로 바뀐다. 예를 들어 ’책‘ 같은.. 


                                



또한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로, 죽음을 향해 미리 달려가 봄을 통해 자신의 실존론적 가능성을 깨닫는다. 이것이 스티글레르에게는 기억의 문제로 바뀐다. “죽는다는 것은 곧 모든 기억이 없어진다는 것을 뜻하므로” 죽음에 미리 달라가 본 인간은 자신의 기억을 외화하기 시작한다.(가령 책을 쓴다.) 

            -죽기 전 얼른 얼른 씁시다. -



정리해보면 ’이미 그곳‘에 있는 선재는 외화를 통해 물려받은 것이며, 이 외화는 제3기억(기술)을 통해 실현된다.(가령 펜, 종이, 타자기, 그리고 요즘은 컴퓨터). 한 마디로 스티글레르에게 현존재는 기억을 물려받고 기억을 기술을 통해 남기는 존재인 셈이다. 그에게 있어 기술은 모두 기억기술(mnemotechincs)이다. 




기억의 산업화: 개체화의 상실


 기술은 의식에는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가? 그는 후설의 개념을 빌려온다. 음악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음을 하나하나 분절해서 듣지 않고 선율로서, 곡의 진행으로서 듣는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제1파지(primary retention)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곡이 어떤 곡인지 기억해낸다. 이것이 제2파지(secondary retention), 기억, 후설의 ‘시간의식‘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점이 간과되고 있다고 스티글레르는 지적한다.


-"후설의 제1파지와 제2파지 사이에 중요한 점이 간과되고 있단 말이오.."-



 기억의 3가지 형태 즉 DNA, 신체, 기술 중 3번째 기억인 기술이 제1파지와 제2파지를 접합시킨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축음기라는 기술이 멜로디를 반복적으로 재생했기 때문에 제2파지 즉 기억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지금 현재 내가 지각하고 있는 것, 내가 회상하는 것, 그리고 외화된 기억, 이 세 가지의 접합을 통해 이루어진다. p.169






-스티글레르의 제1,2,3파지가 어떤 관계인지 설명하는 도식-



 문제는 3번째 기억인 기술이 산업화되면서 발생한다. 내가 지각하고 있는 것, 내가 회상하는 것, 외화된 기억의 상호변환적 관계로서 의식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외화된 기억이 나머지 둘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기억의 초-산업화’는 넘치는 속도로 인간 의식에 자극을 가하며 오히려 인간 정신을 빈곤하게 만든다. 오직 현재의 말초적 자극 속에서 인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감각을 상실하고 동시에 공간감도 잃게 된다. 그는 ‘시공간적 오리엔테이션 상실’이라고 지칭한다.  왜 그가 시골에 철학학교를 세워 비판적 사고 능력의 훈련, 리터러시 교육이라는, 다분히 계몽주의적 운동에 힘쓰는지 이해되는 대목이다.


스티글레르의 입장에 동의하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전통적 철학의 개념을 기술성의 맥락에서 변용시키고, 이를 통해 현대 사회에 대한 관점을 만들어 가는 작업이 흥미롭다. 스티글레르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 소개되는 대다수 학자들이 작업이 그러하다. 기존의 철학 개념을 숙지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이를 통해 지금의 기술, 매체를 사유하고자 하는 이 그리고 기술, 매체 철학 전반에 대한 개략적인 상을 그리고자 하는 이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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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omadia 2016.11.10 10:3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잘 읽었어요~ 그런데, 칸트, 후설, 하이데거, 시몽동, 데리다를 모두 '현상학'으로 분류하나요? 이건 너무 퉁치는거 아닌감?^^;;

  2. choonghan 2016.11.14 22:31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물론 시몽동, 데리다를 현상학으로 분류할 순 없죠. 허나 스티글레르가 그들의 개념 몇몇은 차용하더라도 중심 개념은 현상학에 기대고 있고 주로 기술이 인간의 의식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 분야로 말하자면 현상학이 되겠다" 는 말이 너무 퉁치는 표현은 아닐 것 같아요^^;

우주, 어디까지 가봤니?

-박영은, [러시아 문화와 우주철학], 민속원 아르케부스 , 2015




김충한/수유너머N 회원 





1. 러시아 문화와 우주철학?

[러시아 문화와 우주철학]? 도서관에서 책을 구경하는데 신기한 제목이 눈에 띄었다. 호기심이 발동했고, 그 결과 이렇게 서평을 쓰게 됐다. [러시아 문화와 우주 철학] 대체 무슨 얘기일까?

 

 


러시아 문화는 말 그대로 러시아 문화일 테니, 우주 철학에 대해서 알아보자. 여기에서 말하는 우주 철학은 우주론과 같은 뜻으로 쓰이며 천문학, 혹은 천체물리학에서 다루는 우주의 범위를 넘어선다. 다시 말해서 자연과학으로서의 우주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포함한 자연 전체를 전일적 관점에서 서술하려 했던, 이론 체계를 지칭한다. 예를 들어, 우주는 기로 이루어져 있다. 혹은 세계는 음양의 조화로 이루어져있다 식의 서술을 떠올리면 된다.

 

사실 웬만한 문화권 마다 이런 우주관이 하나씩 있지 않은가. 가까운 중국의 고대 우주관도 제대로 모르는 마당에 러시아산 우주론을 알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답은 시기에 있다. 여기서 다뤄지는 우주론은 19c후반에서 20c초반에 구성된 이론들이다. 이 시기는 이미 뉴턴 역학과 다윈의 진화론, 기본적인 천문학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던 시기다. 따라서 이런 시대에 우주론을 구성한다는 것은 당연히 고대의 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자연과학적 성과를 담아내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그래서인지 내가 이 책에서 받은 느낌은 고대의 신비로움에 근대 과학의 차가움이 섞여있는 독특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들이었는지 알아보자.

 



2. 니콜라이 표도로프: 자연을 개조하라! 진화를 넘어 재생으로

 

책은 크게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책의 제목에 가장 잘 부합하는 핵심적인 장은 2(‘자연 철학적 우주론을 대변했던 과학자들의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나머지 3,4장은 러시아의 종교철학, 신지학에서 다룬 우주론들이라 조금 거리가 있고 5,6장은 저자가 현대 문화담론, 양자물리학(봄 역학)과 러시아 우주론을 연결시킨 것이기 때문에 논의는 2장으로 국한시킨다.


2장에서 소개하는 사상가는 크게 3명이다. 니콜라이 표도로프, 콘스탄찐 찌올콥스키, 블라디미르 베르나드스키. 먼저 니콜라이 표도로프는 19c 중반에 주로 활동했던 사람으로 도서관, 박물관, 외무성 기록보관소에서 근무하며 거의 독학으로, 모든 분야의 학문을 공부했던 사람이다.


-니콜라이 표도로프, 사진찍기를 싫어해서 이렇게 스케치로밖에 안 남아있다능..-



 ‘모스크바의 소크라테스라고도 불리며 자연과학부터 인문학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던 이 만물박사는 후대의 러시아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러시아 지성계의 대부라 불린다. 여기서 영향을 받은 대표적 인물들로는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이들이 있다.


사후 출판된 [공동 일의 철학]에서 표도로프는 실증주의를 비판한다. 실증주의는 이론과 실천을 분리시키고 인간을 그저 자연을 인식하는 존재에 머물게 한다. 중요한 것은 자연에 대해 실제적 행위를 하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세계의 진행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 밖에 없었고, 이제 인간은 이 의식을 통해 자연 진화를 조종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이론적 관조적 이성과 대비되는 실천적 이성이다. 표도로프는 재생이라는 특이한 개념으로 이를 다루는데 재생은 진화와 비교해서 이해하면 쉽다. 진화가 인간에게 있어 본능적/수동적 과정이라면, 재생은 인간의 의지적인 변혁이다. 그것은 자연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자연 속에 인간의 의지와 이성을 주입하는 것이다. 


구체적 사례를 들어보자. 1891년 러시아에서 혹독한 가뭄이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미국에서는 폭발물을 이용해 인공강우를 만드는 실험에 성공했다고 한다. 이 사건에 표도로프는 감명을 받는다. 이런 실천이야 말로 바로 온 인류가 함께 수행해야할 공동의 일이라고 그는 불렀다. 또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석탄공들의 처지를 보고서는, 앞으로 인류는 태양과 대기의 흐름에서 에너지를 직접 추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막심 고리키는 이런 표도로프의 주장을 접하고선 표도로프의 자연관이 세계의 모든 에너지를 노동 대중의 이익을 위해 예속시킨다며 반겼다고 한다. 이 모든 것들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형제애를 발휘하여 모든 민족이 노력을 결집해야 한다.


표도로프가 '재생'이란 개념으로 전개한 사상은 그저 재생 에너지를 쓰자는 소박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태양계와 행성의 움직임까지 인간이 제어할 수 있게 되리라 예견(?)한다. 지금의 과학기술로도 엄두내지 못하는 이런 고에너지를 인간이 다룰 것이라 담대하게 말하는 이 사상가는, 인류는 진화하여 천사와 유사한 존재가 되고, 그 존재는 우주의 물질을 자신에게 필요한 것으로 변환시킬 수 있게 되리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인류는 우주 어느 곳에서도 살 수 있게 된다! [각주:1],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도 이제는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기술은 언젠가 부활을 실증할 수 있을 것이다.(좀비?)


자연 속에 의지와 이성을 도입하여 인간 부활의 역사를 지향하는 것. 아버지와 선조들을 과거에 묻어두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들에게 물려받은 생명으로 아버지를 다시 부활시키는 것. 이것들을 그저 문학적 은유가 아닌 과학적 실증의 차원에서 주장하는 것이 표도로프의 독특한 지점이다.

 



3.콘스탄찐 찌올콥스키(1857~1935): “별은 뒀다 무엇에 쓰지요?”


 

표도로프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찌올콥스키는 10세 때 성홍열로 청각장애인이 되고 이후 여러 도서관을 전전하며 독학을 했던 사람이다. 홀로 물리학과 천문학을 공부한 이 사람은 1895년 우주 비행에 관한 최초의 논문을 발표하고, 1903년에는 액체 산소를 우주 여행용 로켓의 연료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까지 기술했다. 그리고 언젠가 물리학은 공간을 단축하고 시간을 제로에 도달하게 될 방법을 찾을 것이며, 그리하여 인류의 미래는 우주에 있을 거라 예언했다. 또한 전 우주가 모두 하나의 원자들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죽음은 결국 연속적인 무한성 속에 융합되는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찌올콥스키의 사상은 당시 문학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는데 특히 예브게니 엡투센코(1932~)는 실제 자기 소설에 찌올콥스키란 인물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소설 [딸기밭]에서 엡투센코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인물 찌올콥스키를 등장시켜 그의 사상을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잠시 인용해보면,


찌올콥스키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만약 사람들이 오늘날 적대적인 싸움에 쓰는 돈을 서로를 위하는 싸움에 쓴다면 질병뿐만 아니라 죽음 자체도 정복할 수 있을 겁니다. 죽음은 또한 질병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바이러스를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먼 조상을 부활시킬 방법을 배우게 될지 모릅니다. 어떻습니까. 소크라테스와 아침을 먹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과 점심식사를 하고, 푸쉬킨과 저녁밥을 먹고 싶지 않습니까?”

.... 세미라도프는 찌올콥스키에게 물었다.

대체 세상 사람들을 전부 어떻게 처치할 생각입니까? 지구는 비좁아지는데..비좁은 공간에서 지구를 구할 수 있는 건 죽음뿐이지요.”

별은 뒀다 무엇에 쓰지요?”


 

유리 가가린(1934~1968)



별은 뒀다 무엇에 쓰는가? 바로 인간이 살 공간으로 쓰인다. 우주식민지를 개척하는 것을 미래의 상으로 제시했던 찌올콥스키의 사상은 이후 러시아 우주항공공학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의 로켓 개발을 주도했던 공학자 세르게이 코롤료프(1907~1966)는 찌올콥스키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세르게이 코룔로프(1906~1966), 소련의 수석 로켓 기술자로 스푸트니크 계획과 보스토크 계획을 담당했었다.-




4. 블라지미르 베르나드스키(1863~1945): 생명권에서 정신권으로

베르나드스키는 모스크바 대학 교수이자 지질학, 생물학 분야를 연구했던 학자이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다른 학문도 섭렵하여 후배 문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으로 미하일 프리슈빈(1878~1954), 안드레이 플라포노프(1899~1951)가 있다.



-블라지미르 베르나드스키(1863~1945)-



베르나드스키는 지질학적 개념을 이용해 인류 역사를 진화론적 도식으로 설명한다. 지구의 가장 안쪽부터 시작한다. 지핵, 암석권, 수권, 대기권 그리고 마지막에 생물들이 살고 있는 생명권이 존재한다. 이는 지구 안쪽을 출발점으로 한 공간적 서술이지만, 동시에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지에 대한 시간적 서술이기도 하다. 생명권에는 특별한 존재가 등장하는데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의식을 통해 새로운 지질학적 변화를 일으킨다. 이 변화로 정신권이라는 또 다른 단계가 탄생한다. 인간들의 문화 에너지혹은 생화학적 문화에너지정신권이라는 층을 형성한다. 이 정신권의 개념은 1921년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있었던 앙리 베르그송 세미나를 통해서 서유럽에도 소개되었다.


생물권과 정신권을 이어주는 교량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기술권이다. 과학/기술할 때 기술말이다. 베르나드스키에 영향을 받은 안드레이 플라포노프는 자신의 소설에 기술권의 개념을 차용한다


-안드레이 플라포노프(1899~1951), 개인적으로는 플라포노프가 가장 흥미로웠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많은 경우 물질의 변용을 자유 자재로 구사하는 천재 기술자로 묘사된다. 플라포노프에게 기계는 인간이 세계를 변형시키는 도구임과 동시에 인간의 감정처럼 교감할 수 있는 대상이기도 하다. 소설 [프로]에서는 여주인공 프로샤의 남편을 기술자로 설정하는데, 이 남자는 전압의 크기를 자신의 욕망처럼 느끼고, 기계 내부 에너지의 흐름 속에서 기계의 고통과 저항을 감지하는 인물이다. [광폭한 광휘의 세상에서]에서 화자는 열차를 바라보며 과거 푸슈킨의 시에서 느꼈던 감동과 환희를 느끼곤 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기관사 말쩨프는 방전으로 인해 실명을 했음에도, 기관차의 감촉을 느낀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행복을 느낀다. 물론 그렇다고 플라포노프가 마냥 기술을 예찬하는 것만은 아니다. 기술이  원래 목적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될 때 디스토피아가 펼쳐진다는 것도 동시에 견지한다.

 



5. 근대적인 너무나 근대적인

물론 앞에서 소개한 사상가들의 주장이 모두 지금의 과학에 수용될 수 있다는 건 아닐 게다. 가령 현 인류가 보다 더 진화하여 나중에는 우주의 물질을 자유로이 변형할 수 있는 천사와 같은 상태에 도달하리라는 표도로프의 생각을 진지하게 검토할 과학자는 내가 알기론 없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인문학적 개념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이런 점에서 이들 사상가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연과학의 성과를 빌어 그것으로부터 세계상을 제시하는 이들의 작업이 오늘날 유행하는 통합, 통섭, 융합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러시아 우주론자들은 이른바 통섭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각주:2]. 트랜스휴머니즘이란 개념이 서유럽에서는 20c중반 산발적으로 제기되어오다 20c후반이 돼서야 인정된 것보다 훨씬 이전에, 러시아에서는 19c 중반에 시작되어 발전되어 왔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트랜스휴머니즘의 원조들로부터 많은 인문학적 개념들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각주:3]


이 두 가지 주장에 대해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일단 첫째로, 저자가 기대고 있는 윌슨, 최재천의 통섭이란 개념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다. ’통섭이란 개념이 다양한 학문들을 오직 과학이라는 하나의 원리로의 환원이라는, 인문학자들의 비판이 지금은 꽤 제기됐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저자의 고민은 찾아보기 힘들다. '러시아 우주론자들은 통섭의 원조다, 그래서 주목해야 한다' 식의 단순한 주장을 넘어서, 통섭 개념은 무엇인지, 그것과 러시아 우주철학자들의 논의가 정말 일치하는지, 다르다면 어떤 면에서 다른지 섬세한 분석이 있었으면 했다.


두 번째도 비슷한데 트랜스휴머니즘 자체의 문제다. 러시아 사상가들이 트랜스휴머니즘의 원조라고 하더라도, 트랜스휴머니즘의 전제들이 내가 보기엔 17,18세기의 계몽주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가령 콩도르세(1743~1794)에게[각주:4] 진보란 인간 지성의 무한한 자기 완성능력에 다름 아니었고 이 역시도 역사를 단계별로 구분한다. 당연히 역사는 발전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데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미분화된 것에서 좀 더 분화된 것으로 진보한다. 그리고 사회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이질적이고 분화된 것들을 하나의 단일한 전체로, 유기적으로 통합해나간다. 또한 계몽주의자들에게 공유되는 전제는 과학, 기술에 대한 무한한 신뢰, 그것을 통해 자연이나 세계를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다. 이는 위에서 등장한 러시아 우주철학자들에게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부분이다.


   선형적인 시간 개념, 인간 중심적인 전제, 부분을 통합하고 동질화하는 방식으로 확장(‘우주는 하나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되는 전체론적 관점. 이 모두가 계몽주의자들에게, 백과사전학파에게 이미 제시된 것들이다. 러시아 우주철학자들에게 독특한 점이 있다면, 이들은 이것을 적당한 수준에서 멈추지 않고 전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전개한다는 점이다. 이들의 주장에서 기이한 느낌을 받는다면 근대를 넘어선 지점 때문이라기 보다는 어쩌면 너무나근대적인 느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1. 박영은, [러시아 문화와 우주 철학] , p.42 [본문으로]
  2. 박영은(2015), p.269 [본문으로]
  3. 박영은(2015), p.244 [본문으로]
  4. 이진경,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5장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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