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노동자와 용병들

- ‘매수된 룸펜취급을 받던 민족들의 1848 혁명

 

 

라치 치카라 ,  『 저편에서의 세계사 』 ,  치쿠마 쇼보 , 1993( 초판은 미래사 , 1978), 336 쪽 , 1200 엔 + 세금 ( 良知力 ,  『 向 う 岸 からの 世界史 』 ,  筑摩書房 , 1993 

http://www.chikumashobo.co.jp/product/9784480080998/

 

 

 

 

 가게모토 츠요시

 

 

 

 

 

1.저자 라치 치카라에 대해

 

 

라치 치카라는 1930년생이며 85년에 사망했다. 원래 헤겔좌파 연구에서 시작하고 본서와 쌍벽을 이루는 파란 도나우의 난치기(きドナウの乱痴気)(평범사, 1988, 문고판1993)는 여전히 신간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는 48년 빈 혁명에 대한 책이다. 특히 파란 도나우의 난치기는 암으로 돌아가기 몇 일 전까지 구술로 작업한 책이며 빈 시민과 빈에 유입한 이민들의 갈등을 보여준다. 이번에 소개하는 저편에서의 세계사는 빈의 헌책방을 돌아다니면서 모은 자료를 통해 쓴 논문들이 수록된 책이다. ‘저편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계사에 참여하지 못하다고 간주되던 동유럽의 민중들에 대한 내용이다. 이 책은 1978년에 간행되었다. 이 책이 간행된지 40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읽힌 이유는 이 책의 문제제기가 매우 당연한 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이드 오리엔탈리즘또한 78년의 책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대위법적 동시대성을 보여준다. ‘저편에서 보면 어떻게 세계는, 역사는 달라질 것인가.

 

라치 치키라는 그 외에도 헤겔좌파와 마르크스 엥겔스의 관계에 대해 논의한 마르크스와 비판자 군상, 헤겔좌파와 초기 마르크스, 공동 번역으로 헤겔좌파의 논자들의 논문 선집인 헤겔좌파논총, 자료 초기 독일 사회주의등이 있으며 당연히 일어판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의 번역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2. 이름을 남기지 않는 민족들의 1948 빈 혁명

 

 

저편에서의 세계사의 첫 문구를 인용해보자.

 

세계사는, 때로 나에게의 세계사일 수 있으나 그에게의 세계사가 아닐 경우도 있다. 이때 세계사는 그에게 허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사가 나에게의 세계사일 때, 나는 그 세계사를 담당함으로써, 혹은 담당하겠다고 자각함으로써 스스로의 현재적 존재가 보편적인 것이라고 느낀다. 왜냐하면 그 때의 나는 이미 나만이 아니라 나의 삶은 공동적인 것이기 때문에. 정신은 여러 고통을 겪어 인륜의 여러 규정을 통과하면서 극복하며, 이 현재로까지 도달했다. 따라서 우리가 세계사를 담당하겠다는 자각은 자연에 구속당한 협소한 에고이즘이 아니라 자유를 구하는 인류적 의지의 표현이며 인류 그것자체를 담당하는 민족의 영웅주의와 다름 아니다.”(18)

 

 

세계사에 관여하는 자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것은 세계사 없는 저편의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실제로 1848년 혁명의 주체인 이들은 저편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이었다. 48년 혁명은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으로서의 성격도 가지지만 그 속에서 싸우던 이주노동자들의 모습을 통해 48년 혁명의 성격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확인해야 한다. 4810월 빈 혁명이 오스트리아군에 포위되어 수 천 명이 희생되면서 패배했을 때 피를 흘린 자들은 비독일인들이었다. 빈 혁명은 의식되지 못한 프롤레타리아혁명’(149)이었다. 바리케이도 공방전에서 피를 흘린 것은 혁명 쪽에서는 프롤레타리아이며 반혁명 쪽에서는 크로아티아인이었다. 이주노동자들은 더러운 노동을 강요당한다. 그 중 가장 더러운 일은 빈 혁명 등을 군사적으로 제압하는 반혁명 용병이 된다는 것이다. 마치 한국에서 여러 운동에 대한 탄압에서 더러운 일을 하는 게 하청업자 용역인 것처럼 말이다.

 

혁명 쪽이든 반혁명 쪽이든 그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혁명 쪽의 그들의 이름이 드러나는 것은 신문에 남아 있는 사형판결문 속에서이다(272). 슬라브의 민중들, 10월 혁명 탄압의 용병으로 악명 높은 크로아티아의 빨강 망토 병사들은 확실히 반혁명의 용병들이었다. 그들은 매수된 룸펜프롤레타리아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이 용병이 되었다는 것은 적어도 그들이 자신들의 땅에서 안정적 재생산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없었다는 것이다(91). 이동하면서 도시 하층을 구성하는 프롤레타리아가 되는 것도 용병이 되는 것도 노동력밖에 팔 게 없다는 공통점을 가지며 그것이 민족적 문제인 것이다. 민족문제를 배제하고 48년 혁명을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혁명 후에 독일 혁명가들이 강하게 가지게 된 사고를 우리도 재생산하고 만다. 즉 슬라브인은 배신한다는 혐오를.

 

역사 없는 민중이 역사 무대에 나타난다. 역사 없는 민중이 바야흐로 역사에 적극적으로 관여할지로 모른다. 역사라기보다 역사의 가치가 붕괴한 것이다. 역사를 담당했던 -- 그리고 또한 역사의 가치를 자각적으로 구성한 선택된 민중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역사에 대한 모독과 반동이다. 난세인지 혁명인지, 1848년의 유럽이 그것이다.”(52)

 

 

“48년 혁명에서의 소수민족이나 천민의 입장을 배제하며, 혁명을 부르주아적 요소의 폭발로서밖에 파악하지 않는, 혹은 파악하지 못한 역사가의 감각에 대해 불만스럽다, 아니 오히려 화가 난다.”(276)

 

이러한 저자의 지적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혁명가를 겨냥하는 것일까? 모든 독일 혁명가이며 그들 중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포함된다.

 

 

3.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구도의 너머에서

 

48년 혁명 시기 헤겔좌파의 혁명가들의 발상은 실제적이라기보다 이론적이자 세계사적이었기 때문에 뒤떨어진독일을 세계사의 일부로 파악할 수 있었다. 한편 그들은 독일의 저편, 즉 슬라브인들에게는 역사가 없다고 생각했다.

 

엥겔스는 슬라브의 여러 민족에 대해, 방치해놓으면 토키한테 침략당하며 이슬람이 되어버릴 터이니 그렇게 될 바에야 독일인이나 마자르인(헝거리인)이 흡수 동화해주는 것으로 고마워해야 한다고 했다(53). 엥겔스는 48년의 오스트리아를 진보의 담당자(독일인, 폴란드인, 마자르인)와 몰락하는 사명을 가지는 슬라브인(체코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바키아인, 슬로베니아인, 루테니아인Ruthenian, 세르비아인, 왈라키아인Walachian)으로 나눠 논의한 바 있다(62). 엥겔스에게 러시아 증오는 독일인에게 처음으로 부여된 혁명적 정열로 긍정적인 것이었다(67). 왜냐하면 슬라브의 운동은 절대주의 권력과 반혁명적으로 유착할 수 있기 때문에 독일인은 이를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혐오해도 된다는 것이다. 엥겔스는 슬라브의 운동 속에서 유일하게 폴란드 독립투쟁만은 열렬히 지지했다. 그런데 이 또한 그들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통해 자기스스로를 해방하기 때문이었다(88). 그리고 이러한 엥겔스의 발언들이 게재된 신 라인 신문의 편집장은 마르크스였다(마르크스 카테고리 사전, 青木書店, 1998, ‘1848년 혁명항목, 366).

 

마르크스 또한 48년의 빈 혁명의 배신자로 크로아티아인을 지명했다. 크로아티아인=매수된 룸펜프롤레타리아트가 사고할 줄 아는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섰다는 구도이다(61). 그런데 마르크스는 빈의 바리케이드 내부에서 목숨을 잃은 수많은 슬라브민족의 민중을 놓쳤다. 슬라브인은 빈에 흘러온 이주노동자들이었으며, 빈 시민들한테 항상 멸시된 존재였다.

 

빈 혁명은 184810월에 수 천 명의 프롤레타리아가 살해되면서 끝나는데, 그 이전 시기 487-8월경에 마르크스는 빈을 방문했다. 마르크스는 빈 혁명이 단지 시민혁명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이기도 하다는 점을 감지했다. 마르크스가 일찍 독일적 빈곤이라고 했던 구도는 오스트리아에서는 더욱 해당되었다. 산업이 없기 때문에 산업예비군은 영원한 예비군이었다. 혁명 시기, 빈에는 설탕을 향하는 개미처럼 비독일인들이 유입했다. 그들이 빈 혁명의 프롤레타리아들을 구성했다. 베를린의 1848년과 마찬가지로 공공사업이 시작함에 따라 품팔이의 자리를 찾아 이주민들의 유입이 계속 늘어났다. 빈 시민들은 그들을 게으름뱅이취급을 했다. 시민들은 빈 외부에서 유입한 이들을 쫓겨내려고 했으며 유입한 자들은 빈 내부에서 빵집을 습격하는 등 소동을 일으켰다. 혁명 빈에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대립은 유혈사태까지 상승했다. 물론 프롤레타리아는 살해당하는 쪽이었다. 혁명 빈에서는 노동자에게도 선거권을 준 보통선거를 했음을 선전했지만 프롤레타리아를 분할하며 날품팔이와 공공사업노동자를 배제한 위에서의 선거였다.

 

맑스과 엥겔스의 한계를 지적하기는 쉽다. 그러나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그 구도를 모르는 사이에 재생산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제기를 하면서 마르크스=엥겔스적인 구도에서밖에 1848혁명을 볼 수 없는 이들에게 경고한다.

 

사회주의의 토대가 되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원래 도시공동체로서의 시민사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시민사회 외부에서 게다가 시민사회에 사는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서 그야말로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내고 시민사회의 외각에 살기 시작했다. 서구적 시민사회는 말할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을 가지고 얼음처럼 차갑게 등에 붙어오는 이 유령에 경악한 게 아니었는가.”(307)

 

“1848년 빈 혁명은 프롤레타리아의 피를 내포한 폭력적 민주주의혁명이다. 슬로건은 부르주아적이다. 그러나 그 글씨는 프롤레타리아의 피로 쓰여졌다. 따라서 빈 혁명의 역사는 하층민의 시체 위에 세워진 기념비라고 말해야 한다. 그리고 빈 혁명의 슬로건은 독일적이기도 하다. 그것은 독일인에 의한 독일혁명임을 욕구했다. 그러나 하층민은 혈통 같은 것에 인연이 없다. 사실 빈 혁명은 적도 아군도 비독일적인 슬라브의 피에 칠되었던 것이다. ‘서구적독일의 역사가(歷史家)가 보려고 하지 않는 사실에야 말로 우리 관점의 토대가 되어야 한다.”(148)

 

2019년 현재는 마르크스나 엥겔스의 말에 금언처럼 기댈 수 있는 시대가 당연히 아니다. 그런데 한때 그들의 민족차별적인 인식까지도 마치 진리인 것처럼 수용하면서 그들의 구도에 따라간 역사인식이 있었다. 이 책은 이름 없는 존재들의 흔적을 하나씩 모아 내어 그러한 인식에 대해 내재적으로 시도된 비판이다. 일본의 마르크스학의 여러 성과들을 읽어나가는 의미는 이렇듯 마르크스주의를 넘어선 작업들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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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사(史)와 역사의 균열




가게모토 츠요시






니시카와 유코 <고도의 점령 – 생활사에서 보는 교토 1945-1952> 평범사, 2017, 516쪽, 3800엔 + 세금.(원서 정보:西川祐子, 『古都の占領 生活史からみる京都 1945-1952』, 平凡社2017, http://www.heibonsha.co.jp/book/b298039.html)




1. 생활사 - 지도에 점을 찍고 선을 부각시키기


  2차 대전 패전 후 1945년-52년에 걸쳐 일본은 연합국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 책은 교토라는 일 지방 도시를 대상으로 이 시기를 재구성한 것이다. 이 책은 500쪽을 넘는 두께를 가지지만 읽어보면 매우 얇다고 느낄 정도의 어마어마한 자료들을 압축한 산물이다. 책을 열면 몇 장의 지도 자료가 삽입되어 있다. 이는 교토에서 점령군에 의한 교통사고 발생지역과 점령군이 압수한 주택을 점을 찍어서 점령군의 이동경로를 밝힌 것이다. 그것은 교토 남부에 있던 군사적 거점(일본군 16사단 터, 우지(宇治)의 비행장)에 연결되는 길이기도 했다. 신문기사나 행정자료를 확인할 때마나 지도상에 점을 찍어 그것이 모였을 때 지도는 새로운 의미를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 지도의 점들은 노상에서 몸을 파는 여성들의 주소와 그 여성들이 잡힌 장소와도 일치한다(255쪽). 


“자료 하나하나는 단순한 물건은 아니라 결국 사람인 것이다. 모여져서 목소리를 낸다.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앞에 모은 재료를 때마다 즉흥적으로, 그러나 시간을 충분히 가지면서 생각하면서 짜내고 작자도 실은 몰랐던 구도를 차차 부각시키는 수법을 크레이지 파치워크(crazy patchwork)라고 말한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책이 이미 크레이지한 실들의 얽힌 상태에 있음을 자각하면서 말이 되지 않는 극한에 있는, 공백이자 거꾸로 말하면 역사의 균열이 되는 블랙홀의 윤각을 어떻게든 해서 확인하고 싶다.”(219-20쪽) 


이러한 말이 책의 곳곳에 삽입된다. 그리고 점령군의 교통사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점령군의 교통사고에서 주민들이 피해를 입어도 배상을 청구할 근거가 없었다. 따라서 피해자는 일본정부에 신청을 하고 일본정부가 ‘위로금’을 내었다(68쪽). 당연히 이는 점령군에 의한 강간을 비롯한 성범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242쪽). 이러한 교통사고나 성범죄를 비롯한 점령군의 범죄들은 검열 때문에 신문에서는 보도되지 못했다. 저자는 행정문서에서 피해의 그림을 그려낸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방식의 작업, 즉 ‘생활사’를 통해 만들어진 책이다. 


“기억이냐 문헌이냐, 어느 한쪽이 선택문제가 아닐 것이다. 각각의 기억에서는 전체가 보이지 않는다. 반대로 문헌기록의 그물에서 빠져나오는 미세한 기억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간주되어 세부가 소거되어 큰 이야기, 즉 역사가 만들어 진다”(14)


고 지적한다. 우리는 현대사를 ‘큰 이야기’로서는 ‘일정 정도’알고 있는데 그 곳을 산 개인들이 살아남아온 이야기를 개개인의 차원에서 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작업에서는 신문이나 행정문서 등 일차 자료의 검토와 함께 인터뷰 조사나 당대 소설, 그리고 일본 패전 당시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저자 자신의 경험도 호출된다.  




2. 생활 속의 군사기지


  잘 알려진 것처럼 교토는 사철 등 오래된 목조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즉 미군의 폭격을 본격적으로 받지 않았다고 논의되어온 경향이 있는데, 교토는 군사적인 거점이기도 했기 때문에 군사시설은 폭격을 받았다(103쪽). “어떤 군대의 기지가 된다는 것은 또 다른 군대의 표적이 된다는 것이다.”(103쪽) 그 중 저자가 부각시키는 곳은 2014년에 사드 레이더 기지가 만들어진 교토 북부 지방에 있는 교가미사키(経ヶ岬)의 우카와(宇川) 마을이다. 이곳은 원래 일본군 감시소 기지였으며, 1948년에는 미군 레이더 기지가 된다. 58년에 자위대로 이관되어 그것이 2014년에 다시 미군에게 ‘제공’되었다. 이는 한국에서의 사드 문제와 연결되어 사드 문제가 보도될 때마다 동아시아 지도에서 ‘교토의 레이더 시설’이라고 소개되어온 장소이다. 이 책은 이러한 현재 진행형의 군사기지의 역사성을 보여준다. 점령군 때문에 받은 피해에 대해 보상을 신청하는 문서인 「진주군사고 위로금 지출 부담 행위서(進駐軍事故見舞金支出負担行為書)」에 우카와 마을이 나오는 것이다(122쪽). 우카와에서는 점령군에 의한 화재, 아이가 중상을 입었던 교통사고, 한국전쟁 당시 점령군이 바다를 출입금지로 했기 때문에 어업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 점령군이 마을의 농업용수를 써버렸다는 것이 기록되고 있다. 바로 이것은 군사 기지가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다. 마을 사람들이 직접 죽은 전쟁이 아니지만 생활의 재생산을 무시해서라도 어떤 하나의 목적을 관철하려는 군대의 논리가 계속되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주민을 대표하는 촌장은 점령군의 명백한 부당행위에 대해서도 점령기에는 ‘항의문’이 아니라 ‘탄원서’를 써야 했다.”(127쪽) 탄원서를 받은 일본 관청에서는 특히 ‘간접적 피해’에 대한 신청이 가능해진 53-4년에는 중앙과 지방 사이에서 신청을 채용할 여부를 둘러싼 많은 교섭이 있었다(128쪽). 탄원서로 남겨진 것만으로도 이렇게 있다는 것은 문서화되지 않았던 ‘작은 피해’들은 수면하에 더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저자가 그 당시 교토 시내를 산 사람들에게 한 인터뷰에 의하면 점령군이 모여 사는 지역에는 전기 공급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한다.(87쪽) 또한 교토 중심부의 기온(祇園) 지구에서는 점령군이 음주운전을 하면서 지프차로 돌계단을 올라갔다는 소문을 이야기하는 이들도 많았다(93쪽). 이러한 소문은 확실한 사실인지를 묻기 전에 그러한 소문이 개연성 있게 전파될 만큼 군사적인 것들이 생활 세계에 개입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3. 오감이 달라진 생활


  ‘생활사’연구의 시선은 가계부로 향한다. 그런데 어제와 오늘의 가격 차이가 두 배나 되는 세상에서 가계부를 쓰고 월말에 지출 결산을 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암거래를 기록하면 잡힐 수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당시 가계부는 찾지 못했다고 한다(188쪽). 그 조사 중 어떤 서민의 일기를 통해 경제상황을 부각시키려고 한다. 그 일기는 헌책방에서 나온 것인데 농업경제학자가 발견해 책으로 간행했기 때문에 세상에 남았다(189쪽). 저자 니시카와는 그 일기에 나오는 물건이나 음식물의 당대적 의미를 파고 들어가면서 일기를 재해석한다. 다른 회상기와 일치된 부분을 찾아내어 ‘기록’으로 채용해 간다. 시골에서 암거래를 하다가 기차로 교토로 들어올 때 교토역 직전에서 짐을 창문에서 버리고 검속을 피한다거나(198쪽), 훔쳐온 경찰의 제복을 입고 암거래 단속이라고 해서 쌀을 다시 훔치는 사람(199-200쪽), 도로가 지금에 비해 훨씬 나빴기 때문에 암시장에서는 신발이 잘 팔렸다(213-4쪽) 등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알려준다. “점령기 인터뷰를 할 때마다 당시의 옷보다 신발에 화제를 돌리면 이야기가 풍성해졌다”(214쪽)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첫 월급으로 구두를 샀다거나 한국 전쟁 반대의 삐라를 뿌리고 잡힌 사람이 신발이 좀 좋았으면 잘 도망갔을 텐데, 라고 아쉬워했다는 것이다(215쪽). 그리고 암시장은 한국음식이나 중국음식 등 일식보다 칼로리가 높은 음식이 영양실조 상태의 사람들에게 큰 매력이었고, 미군 물자(치즈가 비누인 줄 알았다고 하는 사람은 한 두 명은 아니었다) 등 ‘새로운 음식문화의 입구’였다고 지적한다(216쪽). 정신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오감이 달라지면서 계속 재생산되는 생활을 모색하는 모습들이 부각된다. 




4. 한국전쟁과 교토


  점령기에 일어난 사건 중 가장 큰 것은 1950년부터의 한국전쟁이겠다. 미 육군병원이 되던 교토의 제일일본적십자병원만으로는 수용하지 못해 교토시립미술관이 임시적으로 육군병원이 되었다(278쪽). 두 시설 다 지금도 존재한다. 50년에 들어 교토는 더욱 군사적인 도시로 재편성되었다. 한국전쟁 반대의 삐리를 뿌리고 체포된 한 학생의 일기가 분석대상이 된다. 군사재판을 거쳐 형무소에서 노동을 하는 학생은 형무소에서 만든 물자가 미군물자인 것을 알자 혼자 파업을 선언한다(311쪽). 그 이전까지의 그는 스스로가 만든 제품을 입는 소비자 모습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담아 재봉틀을 밟았었다. 그의 파업은 성공했으며 군사물자의 작업에 종사하지 않으면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311쪽). 학생은 52년 일본의 ‘독립’을 계기로 석방되는데, 그는 석방은 평화 운동이 쟁취한 것이 아니라 패배의 결과였다고 받아들인다. 형무소에서 수많은 ‘범죄자’와 만난 학생은 그들이 범죄에 이르는 사회적 조건과 역사적 원인을 알게 되었으며 “그 최종적 해방은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313쪽)고 일기를 마무리했다. 다른 체포자의 경우, 일본의 경찰관이 영문의 체포연장을 가지고 와서 ‘너는 읽을 수 있지’라고 체포하러 온 상황을 보여주기도 하다(317-8쪽).


  그리고 점령기 교토를 묘사한 소설로 분석되는 것이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이다. 금각사는 교토시 서북지역에 있기 때문에 이 책의 분석 대상이 되어온 교토시 동남지역과는 정반대에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대적첩보부)가 있었으며 저자는 “공백이 많다고 보이는 지역은 점령 관련의 시설이 적고 사건도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접속이 있었다는 것이 보이지 않게 만들어진 지역일 수도 있다”(326쪽)라고 지적한다. 미시마 유키오는 불타기 전의 금각사보다 새로 세워진 빤작이는 금각사를 좋다고 한다. 소설 중에서 오래된 금각사와 임신한 상태에서 폭력당한 여성을 통해 패배한 일본이 ‘싱징’되었다고 논의한다(362-363쪽). 이러한 논의는 금각사와 점령군 시설의 위치관계 등 지리적인 근거에서 도출한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미시마 유키오가 “이 소설에 한정하면 작중 인물에게 교토에서 생활시키고 거리를 걷게 하기 위해 야외조사를”(353쪽)했다고 지적한다. 


  물론 이러한 교토에서의 한국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이별을 한 한국에서의 한국전쟁보다 미약한 것이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전쟁의 폭력 속에서 생활이 있었던 것처럼 병참기지였던 교토에서도 군인들과 주민들의 교섭은 한국과는 또 다른 형식으로 존재했다. 이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 널리 알려진 우토로 마을 또한 교토남부의 일본군 비행장 공사 때문에 재일조선인이 집주하게 된 지역이다. 점령군이 교토시내에서 이 비행장으로 가는 길이 사고다발구간이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또한 이 책과 관련시켜서 보다 넓게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일차자료의 바다로 내려가 다시 시공간의 선을 짜내는 작업의 성과로 제출된 이 책은 역사의 공백의 윤각을 드러내, 그것을 반전시켜 역사의 균열을 발견하며, 그 균열에서부터 다시 역사를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323쪽). 그것은 공백을 만들어 내어 기존의 이해구도에서의 가치를 일단 일반화시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생활이라는 재생산의 과정은 귀천을 떠나 모든 것을 삼키면서 진행되는 일이기에 이는 당연한 일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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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혁명의 패배의 깊이로

이케다 히로시, <독일 혁명 – 제국의 붕괴에서 히틀러의 등장까지>, 현대서관, 2018, 384쪽, 3000엔+세금.

원서정보: 池田浩士, 『ドイツ革命―帝国の崩壊からヒトラーの登場まで』, 現代書館, 2018

http://www.gendaishokan.co.jp/goods/ISBN978-4-7684-5846-4.htm




가게모토 츠요시






1. 2018년에 출판된 <독일혁명>


  올해 2019년, 3.1운동 100주년의 여러 기획들이 있을 것이라 쉽게 예상된다. 그리고 재작년인 2017년, 러시아 혁명 100주년 행사가 여러 곳에서 개최되었다. 그것들은 사후적으로 성공한 혁명이자 민중운동으로 재평가되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면 작년 2018년에 100주년을 맞은 독일혁명은 어떠했는가? 그리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왜일까? 실패한 혁명이었기 때문인가? 그런데 우리가 진정으로 어떠한 것을 우리 삶의 양식으로 배울 수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실패한 혁명에서가 아닐까? 2018년에 출판된 이 책은 입문서로 읽을 수 있게 역사적 기본 사실을 보여주는 서술형식을 취하면서 동시에 어떠한 패배였는지를 세세히 알려준다. 그 현장에 살았던 사람들이 보이지 못했던 것을 보여주며 나중에 도래한 자이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것들을 이 책은 보여준다. 그것은 역사를 알고 나서 과거의 잘못을 지탄하는 식의 관점이 아니라 어떻게 현재 실천 속에서 그 패배를 배울 수 있는가 하는 관점이다. 굳이 역사서술을 다시 꼼꼼하게 할 필요가 없어 보이기에 이 책이 특히 밀고나가는 부분(패배과정에서 비로소 보이게 되는 것들)을 중심으로 소개해보겠다.


  필자 이케다 히로시는 루카치 연구에서 시작해 나치스 문화에 대해 수많은 연구를 해왔다. 또한 일본의 아시아 침략에 대해서도 문화적 측면에서 논의를 해왔으며 단지 학술적인 장에 머물지 않고 천황제나 하층노동자 문제, 정치와 예술의 관계 등에 대해 수많은 책을 썼다. 그런데 이외로 한국어 번역이 없다. (그런데 참고로 말하면 그의 <저항자들 – 반나치스운동의 기록>이라는 책이 <불멸의 저항자>(명지출판사, 1990)라는 제목으로 서석연이라는 사람의 저서로서(번역서가 아니라!) 출판된 바 있다. 이케다 히로시의 후기까지 마치 서석연이 쓴 것처럼 꾸민 근년에 와서는 보기 드문 100% 해적판인데, 혹시 관심이 있으신 분이 계시면 읽어보세요. 아래 사진 참조)



서석연의 ‘저서’ <불명의 저항자>의 표지와 판권장. 



중요한 책으로는 <루카치와 이 시대>, <어둠의 문화사 – 몽타주 1920년대>, <사형의 쇼와사>, <문화의 얼굴을 한 천황제>, <해외‘진출’문학론>, <히노 아시헤이론>, <석탄의 문학사> 등이 다수 있다. 임펙트 출판회에서 <이케다 히로시 콜렉션>이 간행중이며 루카치, 에른스트 블로흐의 일본어 번역자이기도 하다. 




2. 어떤 문화적 저항

 

  1919년 5월2일, 바이에른 공화국이 타도되어 독일사회민주당(SPD)정권이 복귀하자 레트 마르트(Ret Marut)라는 작가가 ‘반역죄의 수모’라는 혐의로 수배되었다. 그리고 그는 결석재판에서 사형이 선거되었다. 그는 <벽돌을 굽는 사람>(Der Ziegelbrenner)이라는 잡지를 간행했었다. 그의 주장은 공산당과는 달리 철저하게 개인주의에 입각하려는 것이었다. 어떠한 조직에도 소속되지 않고 인간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이 되지 않겠다는 사상이다. 그는 그것을 근거로 한 저항자였다. 사형선고 후 어디선가 <벽돌을 굽는 사람>이 예약구독자에게 배송되었다. 거기에는 살해당한 랑다우어(Gustav Landauer)에 대한 추모, 그리고 다시 간행을 계속하겠다는 선언과 “국가, 정부, 나, 이 3 자 중에서 내가 가장 강하다. 너희들, 이를 잘 기억해둬라!”(237)라고 적혀 있었다. 그 후, 1926년, SPD의 기관지에 멕시코에 사는 토라벤(Traven)이라는 사람의 소설이 연재되기 시작했다. 마르트의 새로운 소설로 추정되는 <사자(死者)들의 배>(Das Totenschiff)였다. 나중에 나치스는 바이마르 시대의 베스트셀러 작가 토라벤의 저작을 분서했으며, 발매금지시켰다. 그의 소설 중에는 <백장미>(Der weiße Rose)가 있었다. 나중에 나치스에 대한 저항 때문에 사형당한 숄(Scholl) 형제는 그 이름을 스스로의 이름으로 따왔다. 토라벤의 소설들은 1971년이 돼서야 동독일의 연구자 렉나겔(Rolf Recknagel)에 의해 마르트의 작품이라 실증되었다.  




3. 봉기의 탄압과 군사력 속에서의 바이마르 헌법


  SPD는 1918년 1월에는 ‘의용군’ 부대를 만들었다. 거기에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베를린에 체류하던 1차 대전의 군인들이 참여했다. 실업상태였던 직업군인은 실업자가 되지 않았다. 그 때는 아직 베를린에서 공산당을 탄압하는 시가전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공산당의 이들에게는 “혁명을 전멸하기 위해 자신 앞에 서 있는 자들이 구제국의 군대가 아니라, 자유의지에 의해, 자발적으로, 반혁명군 병사를 지원했던 의용병이라는 용병이었음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180-1쪽) 그리고 의용병들의 활동장소는 단지 독일 국내에 머물지 않아 러시아혁명 간섭전쟁에 참여하기도 한 것이다(282). 의용병들은 만연하던 실업 상황 속에서 지원을 했다. 러시아의 지주들은 독일 지원병들을 환영했다. 지주들은 “소비에트 정권이 붕괴한 새벽에는 토지를 무료로 제공할 테니 여기에 입식해서 농업경영으로 생활하라고 약속하는 이도 있었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독일 본토의 의용병들에게 전달되었다”(284). “이제야 전쟁의 폭력에서 해방될 터인 젊은이들을, 게다가 자유의지의 이름 아래에 자발적으로 그러한 폭력장치의 말단으로 이용한 정치인들 – 즉 베른슈타인에게 예찬된 ‘사회민주당의 권위 있는 지도자들’ - 의 정략은 독일혁명의 모든 시기를 통해 가장 부끄러워야 할 사건 중의 하나”(286)이다. 의용군들 중에는 나중에 육군 및 해군에 들어간 이도 있었지만 많은 대원들은 무장집단에 적을 옮겼다. 그 중 최대의 것은 국민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당)의 군사 조직 ‘돌격대(Sturmabteilung=SA)’였다.


  1차 대전 중 여성들은 사회진출을 했다. 그러나 전장에서 복원한 남성들을 원래 직장으로 복귀시키기 위해 많은 여성이 대량으로 해고되었다. 여성노동자의 수도 전전 수준에 회귀한 것이다. 또한 레테(평의회)의 대의원이 된 여성이 매우 적었다.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은 여성의 레테참여를 주장했지만 그것이 깊이 검토될 일은 없었다(336). 

  SPD는 마지막 레테(평의회)공화국인 바이에른을 군사력으로 분쇄한 후, 그러한 탄압을 통해 “독일 역사상 가장 민주주의적이라 불리는 헌법을 가지는”(198) 바이마르 공화국을 탄생시켰다. 바이마르 헌법은 독일 역사상 처음으로 기본적 인권, 그리고 국가에 의한 인간의 등급 매기기인 훈장을 금지했다. 그러나 이들 인권개념들은 바이마르 헌법에서 처음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그 70년 전의 혁명에서 이미 소리를 지르던 것이었다. 1918년11월에 시작한 독일혁명은 드디어 현실적으로 군주제를 타파함으로 이 소리에 육체를 준 것이다.”(207) 그것은 1848년의 3월 혁명의 주체들이 군주제를 불가침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실현되지 않았던 헌법안의 1/3을 기본적 인권에 할애했다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208-9). 그런데 이는 반대로 말하면 “의심할 나위 없이 ‘11월 혁명’의 성과인 바이마르 헌법이 명문화한 민주주의적인 자유와 인권은 70년 전의 시민(부르주아)혁명의 이상일 수밖에 없었다”(212)는 것이다. “이들 두 헌법에는 그것을 탄생시킨 두 혁명이 깊이 새겨져 있다. 이 각인은 눈부신 성과를 이야기하는 것만이 아니다. 혁명의 좌절이나 불철저함, 혹은 비참함까지도 거기에는 각인되고 있는 것이다.”(212)


  SPD의 일부를 포함해 바이마르 헌법의 제정자들은, 바이에른 공화국을 탄압하기 위해 쓰던 사형을 ‘범죄억지력’으로 폐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1919년 8월14일에 공포 및 시행된 바이마르 헌법이 사형폐지를 실현시키지 못했다는 것은 나중에 히틀러가 이 헌법에서 최대의 예외적 조항인 ‘대통령 긴급명령’을 사용할 때 사형이 큰 위력을 발휘했다는 점에서도 그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 사형폐지는 3월 혁명의 헌법안에도 명기된 일이었는데 바이마르 헌법은 거기부터도 후퇴한 것이다(217).

  



4. 그 후 – 나치스까지


  독일패전 후 독일의 천문학적 배상을 명기한 베르사유 조약(1919년 6월)에 대한 반발이 혁명 이후 계속 이어졌다. 배상금은 국가예산 51배가 되는 거액이었다. 게다가 이를 42년 내로 지불해야 했었다. 힌덴부르크 장군은 독일은 뒤에서 빨갱이인 유태인들이 배신했기 때문에 패배했다고 말했다. 군인들이 1918년의 11월의 배신자들로 지목한 자들은 사회주의공화국이나 레테공화국을 지향한 스파르타크스단을 비롯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멸시킨 SPD의 간부나 활동가까지도 포함시켰다. 의용병들은 프랑스가 루르(Ruhr)지역을 점령하자 그것을 계기로 다시 전쟁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고 바이마르체제를 타도할 수 있겠다고 기대했다.(316) 


  한편 코민테른의 ‘일국일지부’ 원칙으로 인해 새롭게 생긴 통일독일공산당은 독일공산당과 사회민주당 좌파인 독일독립사회민주당이 합당해서 1920년 12월에 결성되었다. 1921년 2월, 독일 중부에서 일어난 파업은 이에 대한 치안당국의 탄압에 의해 패배했다. 이에 대해 통일독일공산당은 공산당의 지도를 받지 않았던 노동자들의 패배를 당연한 것으로 지적했다. 여기에는 레테(평의회) 시절에는 존재하던 아래로부터의 참여하는 관점은 없었다. “독일혁명은 근현대의 여러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정당이 민중에 의한 혁명에 적대하는 존재임을 실증했다.”(302) 혁명의 종연 이후, 마르크스주의 연구를 모색한 이들이 만든 것이 프랑크푸르트대학의 사회연구소였다.


  이 책 마지막의 글은 다음과 같다. “독일혁명 중에서 자유와 자치와 공생의 꿈을 현실로 할 기회를 잃고, 생각과 의지와 행동을 함께 모색하며 실천하는 장을 잃어버린 주권자는, 선거권을 행사한다는 의회민주주의의 주권만을 얻었다. 일상의 현실이 절망적인 것이 되면 될수록 결단력과 실행력을 보란 듯 보여주거나 그것으로 인기를 얻으려 하는 강한 정치인에 모든 것을 맡기며, 함께 생각하고 의지하며 행동한다는 것에서 자기 스스로 더욱더 멀어진 것이다.”(341)  


  혁명의 힘을 고정화하려는 ‘당’이라는 문제, 그리고 사후적으로 얻게 된 민주주의가 역사적으로 바라볼 때 어떻게 그 내실이 달라진 것인지, 여러 의미를 묻게 하는 책이다. 당연히 한국사에서의 비슷한 물음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그 시도는 여전히 군주제를 지키고 있으며 여전히 재생산하고 있는 일본에서 발행된 이 책에서 어떠한 아이디아를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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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일본이데올로기의 근원에서 부각된 -일본인들의 목소리들

 사카이 아키토야케아토의 전후 공간론세이큐샤, 2018, 354, 3400+세금.

(원서 정보 逆井聡人『<焼跡戦後空間論青弓社,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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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에 들어간 야케아토를 설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보자. 번역하기 난감한 말이기 때문에 일본어로 남겼다. 말 그대로 해석하면 타버리고 원래 있던 것이 없어진 장소정도로 말할 수 있다. ‘폐허이기도 하며 초토이기도 하다.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모든 것이 파괴된 공간이다. 저자 또한 이 용어가 제국이라는 과거 잔영이 만드는 비장감”(21)이 내포되어있다고 지적하며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흔히 이 단어는 전후 일본의 부흥의 근원으로 인식된다. 즉 일본폐전과 부흥, 그리고 경제발전이라는 단선적인 이야기들의 근원인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와는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들을 찾아낸다. 단선적인 이야기가 하나의 시간적 인식을 만드는 것에 대항하며, 위계를 매길 수 없는 존재들이 공존하는 공간을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2011311일의 지진 이후 다시금 일본에서 발화된 단어는 바로 부흥이다. 이 단어에는 다음과 같은 계보가 있다. 1923년의 관동대지진이나 45년의 일본 패전에서 무너진 도쿄에서 그 단어를 통해 일본인의 미담들이 만들어져왔다. 말할 것도 없이 그 공간에는 일본인이 아닌 존재들또한 확실히 존재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따라서 야케아토라는 울림은 전후 일본이데올로기를 그것의 근원으로부터 지탱해준다. 그런데 그 공간에는 과연 그런 헛된 이야기밖에 없는 것일까?


저자는 이러한 야케아토에 대칭되는 것으로 야매 시장을 제시한다. 야매 시장은 불법적인 것을 매매하는 곳이다. 그것이 생기기 위해서는 역으로 거래되는 물건에 대한 국가적 통제가 있어야 한다. 그 통제에서 벗어나는 물건들을 거래하는 자들은 종종 비-일본인들이었다. 야매 시장에서 야케아토를 바라봄으로써 일본인의 이야기로 귀결되는 시간적인 단선성은 상대화되며 그와 완전히 다른 이야기들의 공간이 열린다. 저자는 말한다. “야매 시장을 지나치게 상징화해서 기호로서의 가능성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그 상징화의 과정에 개입하는 국가 권력을 부각시키며, ‘전후 일본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공간상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하겠다. 이를 위해 감히 점령기 일본의 도시공간을 논의할 때 빈번히 참조되어온, 이른바 정전(正典)으로 간주되는 영화나 문학작품을 다루겠다. 그리고 이때까지의 비평에 빠져버렸던 야케아토의 논리, 혹은 국민적인 풍경의 궤도에서 벗어난 이야기 해석을 시도하겠다.”(30) 그리고 비-일본인이 존재하는 야매 시장에는 패전 전 대일본제국오족협화(五族協和)’와 같은 다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전후 일본단일민족이데올로기로 거듭나가려는 경계가 바로 있었다는 것이다. 야매 시장은 “‘일본의 외연으로서 기능한 공간”(136)인 셈이다.


책의 본론은 구체적인 텍스트 독해이다. 이시카와 준(石川淳)의 소설 「야케아토의 예스는 기존의 논의틀에서 일본인들의 이야기로 분석되어 왔다. 그런데 저자는 이를 이민족이 등장하고 있는 가능성으로서 소설을 재독해한다. 즉 기존의 논의들이 전제로 해온 일본인이라는 틀 자체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저자가 지적하는 것은 당시 도쿄 우에노(上野) 지역의 야매 시장에는 상당히 많은 조선출신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소설의 작가가 구체적으로 등장인물들의 민족을 제시하지 않고 있는 이상, 이 소설을 일본인들의 이야기로 독해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209). 야매시장을 야케아토에 포섭시키지 말고 그 공간을 열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또 저자는 공산당 계열의 작가인 미야모토 유리코(宮本百合子)반슈 평야의 조선인 표상을 해방된 민족으로만, 다시 말해 조선에 돌아가려는 존재들로만 표상해버렸다고 지적한다. 이 표상을 통해 “‘새로운 일본이라는 이야기에 회수되지 않는 일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배제되는 과정을 노정해버리는 사태”(253)를 지적한다. 즉 소설의 작가는 패전과 해방이라는 계기를 통해 조선인은 모두 고국에 돌아간다는 식으로밖에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이 서쪽으로, 즉 조선으로 향하는 조선인에 대해서는 의미부여를 할 수 있었으나 동쪽으로 향하는 조선인의 존재는 기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미부여를 하지 못했다. 바꾸어 말하면 귀향하지 않는, 일본에 머물 수밖에 없는 조선인들의 존재를 기입하기는 했으나 조선인은 해방의 기쁨을 품으면서 조선에 돌아간다는 관념이 강한 나머지 그들의 존재를 놓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야매 행위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다. 생활을 위해 탁주를 만드는 재일조선인 여성들의 모습을 그린 재일조선인 작가 김달수의 소설이 분석대상이 된다. 김달수 소설에서 탁주는 당연히 야매행동이지만 한때는 경찰을 회유하는 수단이 되기도 하다. 이는 바로 생활을 위한 여성들의 경제활동이다. 이는 야매시장을 부정적으로 표상할 때 동원되는 민족차별적 담론에 대한 생활 현장(즉 사상의 현장)으로부터의 반론이다. 또한 남성 주도의 민족운동과는 별개로 일본에 대한 대립구도를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조선인이라는 구도에서 부여된 차별적 이미지를 흔들 수 있는 민족내부의 차이(여성/남성)를 제시할 수 있게 된다. 바로 그곳에 투쟁이 존재하는 것이며, 탁주는 이를 매개한다.


이 책은 야케아토가 결코 일본인을 동일화시키는 이데올로기가 될 수 없음을 제시한다. 일본인의 부흥 이야기로 연결되는 야케아토라는 관념이 무너질 때 일본인(리버럴 세력도 포함해서)들이 기대는 전후 일본이라는 것이 사실은 매우 얄팍한 것이었음이 드러난다. 이 작업을 위해 도입된 것이 다른 존재들이 공존하고 있음이며, 그러기 위한 방법이 공간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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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돌아온 병사들의 트라우마 속에서의 생존

 (나카무라 에리, 「전쟁과 토라우마 – 불가시화된 일본군 병사의 전쟁신경증」, 요시카와 고분칸, 2018. 원저정보: 中村江里, 『戦争とトラウマ - 不可視化された日本兵の戦争神経症』, 吉川弘文館, 2018, 336쪽, 4600엔+세금 http://www.yoshikawa-k.co.jp/book/b325811.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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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은 구 일본군 병사들의 정신질환에 대해 역사학적으로 다가간 것이다. 진료기록의 독해와 의사들에 대한 인터뷰로 구성된 연구서이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병원에서 의사의 진찰을 받지 못했던 병사가 수적으로는 훨씬 많지만 저자는 남겨진 기록물에서 ‘전쟁신경증’의 모습의 재구성을 시도했다. 서장에서 저자가 말하듯 “왜 일본사회에서는 전후 50년 이상 전쟁 신경증은 ‘보이지 않는 문제’가 되었는가. 이 책의 목표는 그 역사적 배경을 찾는 데에 있다.”(2-3쪽) 이러한 과제는 이라크 등에서 활동하는 자위대원들의 문제에 어떻게 다가갈 수 있는지를 묻는 현재적 문제의식(6쪽)에서 촉발된 것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러한 과제에 역사적으로 다가간다. 그러기 위해 전쟁 당시의 엘리트 집단이자 나중에 일본 정신의학을 견인하는 고우노다이(国府台) 병원의 의사들의 논문이나 정신의료에 종사한 니가타 지역의 의사들의 기록물을 통해 전쟁과 정신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책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한국에 대한 논의는 전혀 나오지 않지만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을 겪은 한국에서도 읽어야 할/논의해야 할 내용을 제공하고 있다.

또 전쟁연구의 중심은 전장 혹은 후방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렇게 보면 이 책은 그간 본격적으로 연구대상이 되지 못했던 그 중간에 있는 ‘이동’이나 ‘병원’에 대한 연구이기도 하다(113쪽). 일본본토에 병자로 이송되는 일은 긍정적으로 파악하든 부정적으로 파악하든 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113쪽).

책은 당대 군의들의 정신의학 인식에 대한 고찰에서 시작한다. 고우노다이 육군병원은 육군의 정신병원이었으나 회고에 따르면 학술적 분위기가 있던 병원이었다. 연구 모임이 잇달아 개최되었다(55쪽). 거기에 동원된 군의들은 엘리트 중에 엘리트이기 때문에 통상 군대 속에 있는 위계관계를 넘어선 논의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병원의 분위기는 당연히 당시 일본의 일반적 분위기와 충돌된다. 특히 1931년의 만주사변 이후 일본에서는 ‘일본정신’이 강조되는 가운데 정신병 연구를 계속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일본정신’이란 ‘정신병이 될 리가 없는 일본군 병사’라는 말도 안 되는 전제를 깔고서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가운데 의사들은 실제로 발생하며, 게다가 시대가 감에 따라 증가하는 정신질환 병사들에 대해 대응했다.

 

 

2.

전장에서 다친 이들은 상이군인(傷痍軍人)이다. 그러나 전쟁신경증 환자들은 곧바로 ‘상이군인’으로 인정되지 못했다. 당시 ‘일본정신’을 호소는 이데올로기가 강했기 때문에 전쟁신경증으로 상이군인의 은급을 받기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 신체적인 문제가 없는 전쟁신경증 환자가 ‘상이군인’인지, 또한 은급을 받을 만하는 대상이지를 판단하는 행정적 서류의 작성 또한 의사들에게 부여된 책무였다. 은급도 다양한 종류가 있으며 어떠한 은급을 받을 것인지는 병사에게도 중요한 문제였다. 이때 전쟁신경증환자는 전쟁신경증을 ‘연기’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는 죽음을 최고의 가치로 인식하는 일본군병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인식을 가져왔다. 즉 살아남았다는 부채감에 더해 전쟁신경증환자와 그 외의 환자들 사이에 선을 긋는 인식을 만들었다. 즉 상이군인으로 군의 병원에 입원한 자들을 다치게 만든 국가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보다 약한 위치에 있는 전쟁신경증 환자들을 비판하게 만든 것이다. 즉 저들은 ‘연기’해서 일부로 입원하고 있다고 규정하면서. 그것은 신체적인 상이군인들과 전쟁신경증을 앓게 된 군인들 사이의 선긋기인 것과 동시에 그들과 동일시되는 일을 피하고 자기야말로 일본정신의 수행자라고 인식하는 효과를 가져온 것이기도 했다(97쪽 전후 논의를 평자가 나름의 재구성을 했다).

일본 본토의 육군병원은 한없이 ‘후방’에 가까웠으며 전장에서 돌아온 병사들에게는 다양한 감정을 가지게 만들었다. 본토에 있기 때문에 여성들의 위문활동도 있었다. 그런데 의사들은 이러한 상황이야말로 ‘히스테리를 조장하고 있다’(129쪽)고 보았다. 군 병원의 목표는 다시 전장에 갈 수 있도록 치료하는 일이기 때문에 병사들에게 후방을 경험하게 하는 것을 꺼린 것이다. 게다가 일본 본토에 있는 군 병원은 전장의 병원에서 치유되지 못했던 이들이 이송되는 장소이고 치료의 최종지점이기도 하다. 즉 군 병원은 전선에서 멀어질수록 그 사명에 계속 실패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더해 전장에 반복적으로 가는 것은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 파병된 미군병사에게 큰 부담을 주고 있듯, 당시 일본에서도 어느 정도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언제 다시 전장에 파병될지 모른다’는 의식은 정신적 부담을 계속 주었을 것이다(277쪽). 또 전쟁신경증환자들에게 전기요법 등을 사용하며 병원에 있고 싶지 않도록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219-220쪽). 이러한 의사의 시선은 “환자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치유되지 않기를 바랄 정도로 처참한 전장 및 병영에서의 폭력이 어떠한 토라우마를 그들에게 부여했는가라는 문제를 보이지 못하게 만들었다.”(220쪽)

의사도 이런 상태였다면 환자인 병사들은 더욱 정신병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현재와 같은 트라우마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는커녕 개념조차 아예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병사들 스스로가 자신의 갈등에 대해 설명할 ‘말’을 가지지 못했다(218쪽). 그런 관계도 있겠지만 환자들은 정신병환자로 취급되는 것을 거절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우노다이 육군병원의 환자들의 경우, 같은 병실을 쓰는 신체적인 상이군인이나 군의들에게 자신들 또한 명예로운 ‘백의의 용사’임을 주장했다(218-9쪽).

 

 

3.

병사들의 트라우마는 결코 일본패전과 함께 끝난 것이 아니다. 패전과 함께 사람들의 가치관은 어떤 부분은 달라지며 어떤 부분은 달라지지 않았다. 즉 정신병이라는 ‘창피’를 숨기기 위해 은급을 신청하지 않고 몰래 산 사람들도 있던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병사로서는 필요한 것이며 병사가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시민사회에 적응하는 것은 쉬울 리가 없다. 그 적응과정에서 폭력이 일어나지만 그 폭력의 대상은 가족, 그 중에서 특히 아내에 향했다. 남편은 전쟁신경증으로 치료되는 가능성이 있는 편이지만 폭력을 당한 아내가 치료되는 경우는 드물었다(282쪽).

이러한 가운데 일본이 패전한지 28년 만에 괌 섬에 숨어 있던 잔류 일본군병사가 귀환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때만 해도 미국이라면 정신과 의사가 나가야 하는 상황인데, 일본정부는 정신과 의사는 파견하지 않았다(270쪽). 이러한 인식 가운데 잘 이해받지 못하면서도 살아남은 자들의 하나의 모습으로 정신장애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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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자본주의는 이렇게 작동해왔다

히라이 쇼지, <무연성성 – 일본자본주의의 잔혹한 역사>, 후지와라서점, 1997(2010년에 신판이 나옴).

원제목:平井正治, 『無縁声声 日本資本主義残酷史』, 藤原書店, 1997(신판, 2010), 379쪽, 3000엔+세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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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의 책 정보 -> http://www.fujiwara-shoten.co.jp/shop/index.php?main_page=product_info&products_id=1153

 

이 책은 저자가 모아놓은 신문기사나 여러 현장을 다니면서 찍은 기념비 등의 사진, 그리고 필자 자신의 생활/투쟁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된 오사카 하층민들의 근현대사라고 할 수 있다. 아니 근현대사라기보다 선사시대의 지층 등의 ‘자연사’를 포함한 매우 오랜 시간의 두꺼운 역사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오사카라는 간척지는 지리적 조건 때문에 쌀을 만들 수 없었다는 논의를 하면서 오사카는 에도(도쿄)의 기름을 담당하는 에너지 도시였다는 것으로부터 역사서술은 시작한다. 시체를 태운 재로 비료를 만들며 기름의 원료가 되는 면화를 만들었다는 등 오사카 사람들의 생활을 일본 전체의 산업구조의 연결지어 논의한다. 따라서 이 책은 모든 생업이 전체적 구조 속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가 논의되어 있으며 아무리 보잘것없이 취급되는 생업이라도 재생산의 흐름 속에서 의미가 부여된다.

근대에 들어와 1905년의 오사카 박람회(이는 아이누, 오키나와, 조선, 대만의 산 인간을 전시한 ‘인류관 사건’으로 알려진 박람회이다)가 오사카의 도시구조를 바꾸어놓았다는 점은 이미 많이 논의된 바 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어떤 식으로 논의하고 있을까? 저자의 시선은 빈민촌의 추방과 공중변소의 탄생이라는 측면을 야쿠자라는 요소를 통해 논의한다. 당시 변소는 비료 원재료가 되기 때문에 돈이 되었는데 행정 쪽은 빈민촌 추방을 위해 야쿠자를 동원함과 동시에 그 야쿠자들에게 박람회에서의 변소 이권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박람회의 노동력에는 빈민촌 사람들을 쓰자는 것이다. 그러나 박람회가 끝나 일자리를 잃은 자들은 갈 곳이 없어 필리핀으로 간다,,, 는 식으로 어떠한 사건을 생활에서 국제 자본주의의 흐름으로까지 연결시켜 논의하는 스타일은 이 책의 매력적인 부분이다. 1970년에는 다시 오사카에서 박람회가 열렸다. 이때 또한 많은 노동자가 일용직으로 동원되어 죽었고, 또한 1995년의 고베의 대지진 때 또한 오사카의 일용직 노동자가 사는 가마가사키(釜ヶ崎)에서 고베 항으로 일하러 가는 노동자들이 죽었다. 고베에서는 이재민들이 학교 체육관 등을 파난소로 만들며 자치활동을 했으나 일용직 노동자들은 ‘당신 이 지역 사람 아니야’라고 배제하기도 했다(268쪽). 일본 자본주의는 값이 싸고 바로 버릴 수 있는 일용직노동자 층을 구성하는 빈민들을 항상 필요로 하면서 그들을 멸시해왔으며, 멸시당한 사람들의 위치에서부터 그들의 생활과 투쟁을 기록한다는 것이 이 책을 관통하는 흐름이다.

빈민들의 생업 중 하나가 폐품회수였다. 이는 자원부족이 심각해진 아시아 태평양전쟁 시에는 국가통제를 받게 되었다. 저자 자신이 어렸을 때 집에서 폐품회수에서 모은 물건을 다시 학용품으로 만드는 일을 했었기 때문에 이러한 폐품을 재생하는 과정에 대한 구체적 묘사가 이어진다. 저자가 착목하는 부분들을 통해 보이게 되는 것은 결코 인간사회라는 것이 생산과 소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소비의 결과 나온 물건들(쓰레기)을 해체해 다시 원료로 만드는 ‘해체’(필자는 이 용어를 쓰지 않지만)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다시 노동의 원재료가 되는 부분이다. 공중변소든 폐품회수이든 이 부분들이 없었으면 생산을 위한 원료가 생기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사회에서 가장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는 영역의 임금은 가장 적고 가장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이 속하는 생업이 된다. 저자는 그 영역을 ‘자가 영업이자 노동’(52쪽)이라고 주장한다. 이 책의 ‘노동’이라는 말은 결코 정규직 노동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또 근현대 오사카의 노동 중 핵심이 된 것이 항만노동이다. 그것은 군사물자를 다루는 노동이기도 했으며 한국전쟁에서도 오사카나 고베의 항만은 가동했다. 한국전쟁의 전장에서 실어온 미군병사의 썩은 시체를 일본의 항만에서 관에 옮기는 작업 또한 그들이 한 것이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고도경제 성장’시기 선박의 체류시간을 줄이기 위해 항만노동은 밤에 쉬지 않고 계속 일해야 했다. 이 때문에 업자는 노동자들에게 마약을 먹였다(148쪽). 그 약값이 임금에서 빠지기 때문에 몇 일간 쉬지 않고 밤새 일했는데 얼마 받을 수 없다는 사태가 빈번했다. 또한 항만노동에서는 냉동식품(새우, 고기, 생선)을 육지에 운반하는 일도 많았다. 이 경우 여름철에는 30도를 넘는 날씨 속에서 마이너스 25도나 되는 냉동 창고에 들어가 작업을 하게 되며, 노동자들은 건강해도 혈압을 조절 못하게 된다(201쪽). 항만이 기계화됨에 따라 이러한 항만노동은 줄어졌지만 이와 같은 노동력 배치의 구조는 지금도 여전히 원자력발전소에서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저자가 꼼꼼하게 수집 및 연구한 자료들에서 보이는 것은 수해의 피해자는 항상 임의적으로 빈민들이 선택되었다는 것이다. 저자 스스로 일용직 노동자로 제방공사에 간 경험들에서도 논의된 것인데, 항상 제방은 빈민들이 사는 쪽이 쉽게 잘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116쪽). 하천 공사는 수해에서 사람들을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수행되지만 항상 하천의 한 쪽에 ‘어떠한 사람’만이 지켜지며 다른 한편에 사는 사람들은 희생된다는 것이 명확하다는 것이다.

이 책의 구조에 대해서도 한 마디 해야 할 것이다. 저자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기반이 되어 저자가 살아오면서 쓴 다양한 전단지나 모은 신문기사가 여러 곳에 삽입된다. 즉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책이기 때문에 말의 힘, 증언의 힘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이 코너에서 소개한 바 있는 <외침의 도시>나( http://nomadist.tistory.com/entry/아무도-번역-안해줄거잖아도시의-목소리-듣기<함바로>(http://www.nomadist.org/s104/BookReviewK/35581) 의 저자들의 문제의식의 바탕을 구성한 것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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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과 근면의 관계를 스스로 분배하는 노동을 위해 

와다나베 다쿠야 <함바로 – 삶과 일을 기록한다>, 라쿠호쿠 출판, 2017, 512쪽, 2600엔+세금

(원서 정보:渡辺拓也, 『飯場へ ─ 暮らしと仕事を記録する』, 洛北出版,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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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함바로

 

우리가 사는 생활기반을 만든 사람은 건설노동자들이다. 병원이나 회사 건물은 그 집단의 장이 만든 것은 결코 아니며, 대학 건물 또한 건립자나 총장이 만든 것은 아니다. 노가다를 하는 건설노동자가 없었다면 우리 생활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건설노동자라고 할 때 그 속에는 다양한 존재들이 있다. 전문적인 기술자도 있지만 일용직노동자나 외국인노동자도 있다. 전문직을 비롯해 노동자의 보조원 역할을 하는 사람까지 다양한 모습이 그 속에 있다.

일용직 노동자들은 ‘하루’마다 고용되어 노동할 경우도 있지만 며칠 동안 함바에 머물고 일터에 나가는 경우도 있다. 건설노동 현장에서는 일본어에서 온 말이 많은데 ‘함바’ 또한 그렇다. 건설이나 광산 등에서 노동자들이 일시적으로 머물면서 생활하는 곳이 함바이다. 이 책은 바로 함바를 대상으로 한 책이다. 저자에 의하면 “인력시장 속에 함바가 있는 게 아니라 함바 제도 아래에서 노동력 조달 수단의 하나로 인력시장이 활용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18쪽) 혹은 인력시장은 도시에 가시적으로 존재하지만 “함바는 어디에 얼마나 존재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따라서 인력시장 연구에서 함바의 중요성은 계속 지적되면서도 그 해명이 빨라질 수 없었다”(327쪽)는 것이다. 인력시장의 노동력이 공급되는 곳에 대한 분석인 셈이다. 건설현장은 날마다 필요로 하는 인원수나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항상 인력시장이나 구인광고를 필요로 한다. 정규직노동자를 확보하기보다는 그때 마다 필요한 만큼 모집할 수 있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인력시장과 구인광고를 통해 직접 함바에 들어간 연구자의 참여조사에 의해 쓰였다(23쪽).

(그리고 책의 모양이 매우 재미있다. 출판사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한번 사진으로 구경해보세요. http://www.rakuhoku-pub.jp/book/27262.html)



 

 

2. 함바 속에 말려들어가는 것

저자는 실제로 현장에 들어가 조사를 했다. 그것은 현장에 말려들어갈 일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학술방법과 거리를 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말려들어갔기 때문에 “노동현장에서 교섭되는 관계성”(328쪽)을 논의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현장에서의 관계성이 그것이다. “자기 외에 꾸지람당하고 있는 인간 혹은 자기보다 많이 꾸지람당하고 있는 인간이 있으면 자기만이 꾸지람당하고 있는 경우보다 활씬 일하기 쉬어진다.”(425쪽) 단지 고된 노동이라든가 하는 식의 평가가 아니라 그 현장에서 나누어지는 인간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며, 그것을 통해 함바를 연구한다는 것이다.

건설현장이 어느 정도 기계화되었다 하더라도 그곳엔 기계보다 융통성 있는 인간의 신체가 필요하다. 즉 단순작업을 하는 도움이들이 필요한 것이다. 그들은 “높은 수준의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혹은 항상 필요하다는 것도 아니지만, 필요할 때에는 꼭 필요한 존재”이다(66쪽). “도우미는 노동자들의 또 하나의 손, 또 하나의 눈, 또 하나의 다리”(110쪽)같은 것이다. 저자는 처음에는 각종 건설노동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었으나 그러한 아마추어라도 현장에서 필요한 노동력이 되는 이유에 대해 위처럼 설명한다. 그것은 마치 다음과 같은 ‘도구’에 대한 정의에서도 엿볼 수 있다. 즉 어떤 쓸모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어떠한 쓸모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도구인 것이다(82쪽). 현장에서는 작업을 편하게 만들기 위해 온갖 방법이 쓰이며 그때마다 도구는 만들어지는 셈이다.

함바에 들어가면 회사 쪽에서 배정된 일터에 나가게 된다. 그런데 그 일터에 확실히 나가기 위해(즉 배정받기 위해) 노동자는 “가불”을 한다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즉 가불을 신청하지 않을 경우 그 노동자는 아직 금전적 여유가 있다는 의미가 되어, 사무실에서 일을 분배해주지 않은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193쪽).

또한 함바에서의 인간관계는 과잉이라고 할 정도로 세세하게 신경을 쓴다고 한다(212쪽). 함바에서의 서열관계는 경험 연수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함바에 먼저 들어간 순으로 정해진다. 왜냐하면 그 함바에서 다니는 현장에는 그 현장에서만의 세세한 배려 사항들이 있기 때문이다(298쪽). 사용자 쪽에서 바라볼 때에도 기계를 다루는 기술을 가지는 자보다 현장마다 존재하는 구체적 상황을 아는 자가 유용하다(300쪽).

세세하게 인간관계를 만드는 이유는 서로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예방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나중에 어디에선가 만날 수 있는 “너그러운 동료 의식”의 산물이라고도 한다. 다시 만날 곳은 다른 현장일 수도 있고 인력시장일 수도 있다. 함바에서는 장기적으로 사는 사람들보다 중단기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세세하게 인간관계를 만들어나간다(306쪽). 흥미로운 것은 장기적으로 하나의 함바에 있는 사람은 어차피 금방 없어지는 단기 노동자와 잘 어울리려 하지 않다는 것이다. 중단기적으로 머물기 때문에 서로 배려하게 된다는 지적은 집단에 외부자가 들어오는 효과이기 때문에 흥미롭다. 그러한 세세한 인간관계 형성은 처음으로 현장에 오는 초보자들에게 대한 조언이나 도와줌에서도 보인다.(->초보자들에게 조언이나 도움을 주는 것에서도 보인다.) 저자는 이를 단순한 배려가 아니라 ‘유능함을 보여주려는 행위’로 풀이한다. 즉 고정된 정규직이 아닌 노동자들은 정규직처럼 확고한 지위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의 유능함을 발휘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지위는 유능함을 보여줄 지표가 되겠지만 지위가 없는 함바 노동자는 현장에서 유능함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이다(318-9쪽). 유능함의 발휘가 현장의 리듬과 잘 어울린다면 현장은 보다 일하기 쉬어지지만 그것이 잘 안되면 독단적 행동이 되어 버린다.

이러한 의미로 함바 노동자들은 근면함을 가진다. 따라서 사용자도 굳이 노동자들을 훈련시키는 시간을 마련할 필요가 없다. 바꾸어 말하면 노동자들은 항상 신경을 써서 사용자가 원하는 바를 미리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의 유능함의 발휘는 공식적인 대응밖에 할 수 없던 사용자보다 좋은 판단을 하는 조건이 될 경우가 있다. ‘유능함’의 발휘는 때로는 미리 부여된 사용자/노동자라는 상하관계를 역전시킬 효과를 만드는 것이다(354쪽).

그러나 초보자에 대한 조언이 지나치게 될 경우 현장의 분위기를 망가트리고 만다. 이 경우는 노동자 집단에 균열을 만드는 계기가 된다(321쪽). 또한 노동자가 지나지게 사용자의 규범을 내면화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구체적으로는 작업 속도가 늦은 자를 ‘게으름뱅이’로 규정하는 등이다. 그런데 이러한 규정은 노동자 스스로를 심리적으로 ‘근면함’에 얽매이게 만든다(366쪽). 왜냐하면 함바에서 다니는 노동현장에서의 ‘게으름’이란 노동자에게는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게으름’은 사용자가 노동력을 모집할 때마다 필연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노동자의 능력 차에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게으름’이란 노동자 개인의 근면/게으름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며, 구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노동자 개인에게 넘기기 위한 용어이기 때문이다(397쪽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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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어떤 인간관계 아래에서 노동할 것인가

이러한 구체적인 여러 분석을 통해 저자는 ‘노동’ 그것 자체에 대한 논의로 나아간다. 그리고 ‘게으름’이 일을 성립시키기 위해 불가결한 것이라고까지 논의한다. “간이적인 ‘근면함’은 사용자의 부정적 규정에서 벗어날 일이 됨과 동시에 실질적으로 게으름을 실천하는 일에 연결한다.”(396쪽) 저자는 현장의 게으름이란 근면함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근면함과 얽히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399쪽). 함바에서 다니는 노동현장이란 기본적으로 누군가의 요구에 의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현장에서 사용자의 지시가 없을 경우 노동자가 아무것도 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셈이다. 그러니까 노동자의 게으름이 비판될 때에는 거꾸로 노동자에게 할 일 없는 빈 시간을 주고 있는 사용자 쪽의 게으름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게으름을 예찬하는 등의 논의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현장에서의 근면함은 노동자 스스로의 실천에 속한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고된 노동이라면 그 고됨을 최소한의 무게로 억제하려는 노력이야말로 노동자들의 근면함이 가지는 의미이다. 노동이란 이 근면함과 게으름의 배분을 스스로 만드는 일이다. 즉 ‘바람직한 노동’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관계의 방식’을 통해 노동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399쪽).

특히 건설노동자들은 협동하면서 일한다. 노동자 집단은 집단의 생산성을 올리기 위해 서로 배려한다. 생산성을 높이는 일이란 공동성이 가지고 있는 잠재성을 실현시키는 것이다(450쪽). 현장에서의 공동성을 만드는 계기가 인력시장 지역의 관계성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력시장은 공동성을 함양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유가 없는 현장에서는 서로 돕는 것이 어렵고, 적응하지 못한 노동자는 곧바로 배제된다. 여유 없는 현장은 노동자들 서로가 가지고 있는 잠재적 신뢰관계를 붕괴시키고 만다. 공동성을 통한 학습은 높은 공동성이 유지되는 한 잘 되는 것이지만 기업들은 거꾸로 공동성이 가지는 잠재성 양성(인재육성)을 비용효과에 맞지 않다고 버리거나 외부위탁을 하게 된다. 노동현장에서 요구되는 생산성 향상은 이러한 공동성이 있어야 가능한데 기업들 스스로가 그것을 없애버리고 있는 것이다. 생산성이란 협동하는 자들의 관계성을 바탕으로 하는데 생산성 제일주의가 관계성을 삼켜버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455쪽). 저자는 공동체에서 잠재성을 발휘하는 관계를 만들며, 그것을 통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극복하는 것이야 말로 ‘자유’라고 주장한다(458-9쪽).

이렇게 볼 때 저자가 여러 함바 노동에서 얻게 된 경험들은 노동자들 서로가 도우면서 서로의 힘을 향상시키는 관계성이 만들어질 때 생산성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성이 만들어지면 노동은 단지 고됨만이 있는 자리가 아니게 된다. 이 의미에서 저자가 말하는 ‘자유’란 관계성 속에서 서로의 힘을 최대한 발휘할 때 즐길 수 있는 것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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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위안부’ 담론에 대한 내재적 비판의 시도

기노시타 나오코 <‘위안부’문제의 담론공간 - 일본인‘위안부’의 불가시화와 현전>, 벤세이출판, 2017.

(木下直子, 『「慰安婦」問題の言説空間 日本人「慰安婦」の不可視化と現前』, 勉成出版,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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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12월의 충격적인 한일 ‘위안부 합의’는 마치 지금까지의 정의 회복을 위한 다양한 운동을 묵살하듯, 한국과 일본의 외상이 ‘불가결적 해결’이 되었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한국에서도 다양한 논의가 일어나며 위안부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높아졌다. 그러한 와중에 나온 책이기는 하나, 연구서인 만큼 이 책이 바라보는 시야는 매우 넓으며, 넓은 관점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태를 다시 볼 수 있도록 해준다.

“본서에서는 1990년대 초두에 ‘종군위안부문제’의 담론공간이 확대해 가는 단계에서 일본인 ‘위안부’의 피해자성이 후경에 물러선 것을 ‘위안부’문제 구축의 특징으로 본다.”(4쪽) 이러한 지적에서 보이듯 이 책이 가지는 시각은 위안부문제 ‘담론’이자, 그것의 ‘담론 공간’이다. 시간적으로 하나의 기축을 만드는 선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담론공간을 착목한다는 것은 담론형성의 복잡성을 보여준다는 것이겠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제목에서 있듯 일본인 ‘위안부’를 둘러 싼 논의이다. 특히 책의 후반부는 힘이 있는 문체로 논의가 진행된다. 저자의 분석은 90년대에 위안부문제가 ‘문제화’되기 전부터 시작한다. 이 책은 70년대 일본의 우먼 리브(Woman Liberation)운동, <침략-차별과 투쟁하는 아시아 부인회의>등의 운동 속에서 삽입된 ‘위안부’에 관련된 논의, 그리고 일본인 ‘위안부’ 피해자로 알려지고 있는 시로타 스즈코의 수기 분석 등을 통해 ‘위안부’담론 중에서의 일본인 ‘위안부’ 담론이라는 주름을 파고들어간다. 리브운동에서 ‘위안부’라는 말이 수사적으로 쓰였다는 점이나 일본인 위안부 피해자의 존재는 이미 알려진 바 있지만 그것을 구체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제출되었다는 점 등,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지식’이야말로 담론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며, 그 담론에 파고들어가지 않는 이상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지식’이라는 단계를 넘어설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일본인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야 할 의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저자의 말에서 들어보자. 책의 결론부분에 있는 말이다.

 

“일본인 ‘위안부’를 ‘피해자’로 이야기함과 동시에 국가의 책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 전후 보상의 대상으로 일본인 ‘위안부’를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이 때 ‘국민’이 국가의 폭력을 당했다는 주장은 내셔널리즘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폭력성을 명확하게 하며 피해자의 아픔이 들리게 될 담론 상(上)의 장소를 창조한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실천이 되는 것이 아닐까.”(253쪽)

 

그러면 책 내용으로 들어가자. 1장 <‘종군위안부문제’의 구축>에서는 전후 일본에서 위안부 담론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개론적으로 논의된다. 거기에서는 일본 국회 의사록이나 센다 가코(千田夏光)의 르포 등이 분석 대상이 된다. 흥미로운 것은 김학순의 증언을 계기로 ‘위안부’문제가 ‘문제화’된 이후 시기의 일본 여려 신문에서의 독자투고를 분석한 부분이다. 당시는 전쟁 경험자가 많이 생존했었기 때문에 ‘문제’에 접한 전장 체험자들이 ‘위안부’들에 대한 회상을 투고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성의 성이 희생이 된다는 문제가 내셔널한 타자에 대한 가해가 아니면 보이지 않다는 상황이 ‘종군위안부문제’의 담론공간에서 생기고 있었다. 이는 ‘일본인’내부에서의 가해와 피해라는 관점에 입각해 일본인 ‘위안부’의 경험을 인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인 ‘위안부’가 최초의 피해자 집단이 된 ‘위안부’제도의 성립과정이 별로 의식되지 않는 채, 한반도 등에서 폭력적으로 여성이 연행된 이미지가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었다는 것이다. 식민지나 점령지의 여성을 연행하며 ‘위안부’를 강요한 문제로 ‘종군위안부문제’의 상이 형성되는 이유는, 냉전종연 후에 아시아 여러 외국인들이 일본의 과거를 따지는 내셔널한 집단으로 가시화되어 ‘일본’의 전후를 재심할 필요가 생기기 때문일 것이다. 내성적인 시점이나 분노, 아픔에 공감하는 정동이 ‘종군위안부문제’의 담론생성을 부추겼다.”(84쪽)

 

즉 ‘위안부’문제를 문제로 만든 운동에 접하기 전에는 일본사회는 ‘위안부’문제는 문제라기보다 개인적 불행에 속한 것이며, 국가범죄로서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제화는 ‘조선인’ 종군 ‘위안부’를 통해 가시화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정부는 ‘강제연행’이 있었는지를 문제 삼아 담론에 개입했다. 여기에서 구성된 ‘강제연행’이었는지에 대한 논의는 피해자의 국적에 의해 피해 정도를 분배하는 식의 효과를 만들었다(1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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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는 70년대 이후의 일본 여성해방운동에서의 ‘위안부’ 담론이 서술된다. 이 운동은 기본적으로 신좌익운동 속에서 나타난 것들이다. 신좌익 운동은 기존의 공산당에서 벗어난 것이지만 특이 일본에서는 68년을 전후하는 학생운동과, 그 이후에 생긴 여러 운동에 주목해야 한다. 거기에서는 ‘가해자로서의 일본인’이라는 운동 속의 주체화가 있었다. ‘일본인’이라는 것은 가해자로서의 입장에 서는 것이고(그 이전의 ‘일본인’이라는 호소는 거의 피해자로서의 그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운동에 관여할 주체적 의식이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신좌익운동 속에서도 여전히 중심에 있는 것은 남성들이었으며, 그 흐름에서 빠져나온 다양한 운동이 70년대 이후 잇달아 나타났다. 이 책에는 다양한 운동의 기관지나 삐라에서 언급된 ‘위안부’ 담론을 모아서 만든 표가 실려 있다. 그 중에서는 일본인 여성이라는 스스로의 입장을 성찰하기 위해 ‘위안부로 강요된 조선인 여성’이라는 수사가 빈출하게 된다. 거기에는 전후 일본인 남성들이 ‘기업전사’로서 한국에서는 기생투어를, 동남아시아에서는 매춘투어를 공공연히 하고 있는 모습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제시되어 있다. 혹은 역사적 시점에서 보아 일본인 여성이 ‘야스쿠니의 어머니, 군국의 어머니’라는 역할을 했다면 조선인이나 중국인 여성은 ‘황군의 위안부’를 강요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이는 일본인 여성들이 자신의 남편이나 아들의 정액으로 조선이나 중국의 여성들의 성기를 더럽혔다는 강력한 자기비판으로 연결된다. 물론 이러한 수사는 삐라 특유의 선동적인 문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러나 반성해야 할 일본인 여성, 그 반성된 자리에서 스스로의 해방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당위가 이러한 수사를 강화시켜 나갔다는 점은 말할 수 있겠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희생적 글쓰기이며, ‘범죄적’인 일본인병사와 동일한 ‘민족’, ‘국민’이면 ‘위안부’가 되는 일을 받아들어야 한다는 의미로 읽히기도 하는 글도 있다. 물론 리브가 추구한 여성으로서의 해방은 이러한 글들을 근거로 부정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반면 <침략=차별과 싸우는 아시아 부인회의>의 일련의 텍스트에서는 ‘본국 최하층의 여성도 ‘위안부’가 되었다고 인식’된 자료가 있다(152쪽). 또한 <아시아 여성들의 모임>은 기생관광반대나 재일외국인을 억압하는 입국관리법에 대한 반대 운동에 관여해온 여성들이 더욱 아시아에 대해 배우자고 만든 집단이다. 그들은 일본인 피해여성을 방문하는 등,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현재에 사는 피해자와 만나려고 했다. 이러한 운동은 ‘위안부’문제가 문제화되기 이전에 모색된 움직임이다. 이러한 운동들을 통해 보이는 것은 “문제의 핵심에 ‘침략’이 있다고 해서, 조선인 ‘위안부’피해자의 슬픔에 대면할 일을 중시하는 심성이 ‘위안부’문제 출현 전야에 이미 성장하고 있었다”(168쪽)는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김학순의 증언에 따른 ‘위안부’문제의 문제화가 급속히 부상한다. 위에 서술한 여러 운동에 관여한 바 없는 다수파 일본인에게 그 문제화의 과정은 ‘가해자’로 지목받게 될 경험이며, 이를 통해 ‘종군위안부문제’와 만나게 되는 것이었다. 91년 이후 일본에서 잇달아 열린 ‘증언집회’에서는 ‘일본인으로서의 부끄러움’을 느끼는 반응이 보인다. 거기에는 일본인이 전체가 가해자로서 이미지되는 사고회로가 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심리는 ‘일본인 위안부는 어느 정도 자신의 의지에 의해 갔기 때문에 문제 없다’는 주장과 맞물리는 것이었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내재적 비판을 시도한다.

 

“‘일정 정도 본인의 의지로 벌려고 갔기’ 때문에 사죄나 보상이 필요 없다고 당사자도 아닌 입장에서 단언해버리는 일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당사자의 상황이나 심리에 대한 무관심에서부터 이러한 판단이 가능해지는 게 아닐까. 이는 성차별, 창부차별을 하는 남성특유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의 페미니즘 또한 한국에서의 고발을 받기 전까지 ‘위안부’ 피해자를 구제할 구체적 행동을 취해오지 않던 것이다.”(185-6쪽)

 

기생관광 반대운동이 한국 여성운동의 문제제기로 인해 일본에서도 가능해졌듯 ‘위안부’ 운동에 차원에서도 항의하는 한국의 운동, 이에 호응하는 일본의 운동이라는 구조가 있다. 그것은 ‘현재’의 문제로서의 ‘위안부’문제로까지 나아가기 힘들었던 일본의 운동을 관통하는 구조였다. 한국 운동의 ‘고발’에 응답하려는 일본의 ‘양심’적인 사람들이 만들어낸 일본시민으로 전후책임을 다하려는 담론은 매우 성실한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의 가해책임은 국민이 평등하게 지고 있다는 인식이 우세가 되어 가해자 국민인 일본인 ‘위안부’의 피해는 불문이 되기 쉬었다. 이러한 주변화와 부가시화가 일본인 ‘위안부’에 대한 담론의 시선이 미치지 못했던 원인이다. “사회문제화 이전에 클로즈업된 일이 있던 일본인 ‘위안부’의 피해는 아이러니하게도 사회문제의 배후에서 이야기되기 어려워진 것이다.”(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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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여성

 

3

제3부에서는 일본인 ‘위안부’들이 자신을 어떻게 표현했는가가 분석된다. 90년대 이후 일본 담론에서 ‘위안부’ 문제가 ‘조선인종군위안부’ 문제로 인식되어 가는 시기, 일본의 ‘위안부’ 운동 단체들에게 송부된 여러 증언이나 정보제공 중, 일본인 ‘위안부’로 국가 피해를 호소하고 싶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211쪽). 일본인 ‘위안부’가 침묵했었다고 논의될 경우도 있지만 담론화 되지는 못했으나 운동관계자와의 접촉은 있던 것이다.

3부 중에서 중요한 것은 일본인 ‘위안부’였다고 일찍 수기를 쓴 시로타 스즈코의 노트 등의 자료를 조사한 제5장이다. 213쪽에 제시된 시로타가 스스로 쓴 자료 일람표를 보면 90권에 이루는 막대한 노토를 남긴 것을 확인할 수 있다(시로타가 그린 그림도 수록되어 있다, 214쪽). 이 자료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인데, 이는 선행연구에서 아예 없던 것이다. 시로타의 특칭에 대해 필자는 ‘위안부’제도를 국가범죄로 보지 않았다는 점(225쪽), 가족과 관계를 가지는 일이 힘들었다는 점(229쪽)등을 지적한다. 시로타는 살아 있을 때에는 국가보상을 받아야 할 ‘피해자’로 간주되지 않았으며, 한 번도 국가범죄의 ‘피해자’로서 ‘주체화’(237쪽)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시로타를 피해자로 바라볼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234쪽).

일본의 양심적인 사람들이 호소한 일본인의 가해성이라는 논의는 스스로의 입장을 내셔널한 것에 매기려는 사고였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경직된 인식을 만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를 단순히 민족주의라고 넘어가지 않고, 그 입장에 머물면서 비판적 논의를 내재적으로 진전해 나간다. 다음과 같은 지적은 힘이 있다. “‘위안부’문제에 관계하려는 사람들이 당사자의 경험을 통해 내셔널티의 작용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내셔널한 수준을 통해 당사자의 경험을 이해했다는 것이다.”(243쪽) “일본인 ‘위안부’를 둘러싸고는 역설적이지만 ‘위안부’제도를 문제시하는 사람들의 성실함이나 양심 때문에 담론공간에서의 비가시화가 생겼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244쪽) 그런데 필자는 결코 단숨에 내셔널한 논의를 넘어서지는 않는다. 즉 필자는 버틀러의 행위수행성의 논의를 빌면서 구축적인 것은 항상 어긋남을 만든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먼 리브와 같은 운동이 ‘일본인의 가해성’을 통해 논의하려던 것은 스스로 침략체제에 가담해버리고 있는 자신에서 벗어나려는 투쟁의 모색이었다고 논의한다. 내셔널한 수사로 표현되는 자신의 입장에 대한 자각은 그 자리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임을 직시해야 한다. 다시 말해 자신의 입장은 인식되면서 동시에 ‘우리’의 공동성을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 속에서도 피해자가 있음을 가시화하며, 이를 통해 국가가 맨얼굴로 가지고 있는 폭력 장치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인 ‘위안부’는 피해자이다, 라는 논리는 국가 폭력을 중단하게 만들 가능성을 품고 있”(252쪽)는 셈이다. 피해자들은 일반화나 서열화할 수 없으며, 그 각자가 피해자인 것이다.

 

“침략자 쪽의 피해를 여실히 부각시키려는 시도가, 침략당한 쪽의 사람들의 피해를 재조명하고, 민족차별 인종차별과 함께 그녀들이 얼마나 가혹한 상황에 놓여졌는지를 명백히 하려는 행동이 되는 것. 일본인 ‘위안부’의 다수는 ‘위안부’제도의 배경이 된 공창제도라는 원초적 수탈 시스템의 피해자이며, 일본사회가 그녀들을 희생시키는 사회이었기 때문에 내셔널리즘을 통해 타자화되는 타민족 타국의 여성들에 대해 보다 가열하면서 폭력이 행사된 양상을 연속적으로 제시해 나갈 일. 이러한 과제를 우리는 짊어 있다.”(253쪽)

 

이어서 이 글의 처음에 인용한 결론 부분이 쓰인다. 이 책은 ‘담론 공간’의 공시적인 다양성을 보여주고, 일견 부정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언어의 다른 문맥을 제시해준다. 일본의 ‘양심’적인 사람들의 내셔널한 이야기는 얕은 연구자라면 ‘민족주의’라든가 ‘새로운 억압 장치’라든가 해서 일소해 버릴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이 제시한 여성해방운동에서의 맥락은 자신에 주어진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입장 인식’이라는 과제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러한 과제와 일본인 ‘위안부’ 피해자들이 만날 조건이 성립이 안 되었다 하더라도 거기에 포함되던 가능성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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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동과 학살의 남성성

-후지노 유코, <도시와 폭동의 민중사 – 도쿄 1905-1923>, 유지사, 2015

(원서 藤野裕子『都市と暴動の民衆史 東京・1905-1923年』、有志舎、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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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는 폭동이 계속 일어난 도시였다. 그런데 이 폭동에 깔린 것은 ‘남성성’이라고 할 수 있는 남성하층민들의 문화적 실천이었다. 이는 주류 문화에 대항하는 강력한 힘을 가진 반면, 1923년 관동 대지진 때의 조선인학살을 일으킨 힘이 되기도 했다. 이 사람들을 관통하는 것을 밝히고자 하는 목표가 이 책에는 깔려 있다. 기존 연구에서 1905년의 히비야 방화 사건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운동의 시작으로 규정된 바 있는데, 이 책은 단지 그러한 평가에 멈추지 않고 이 민중적 에너지가 가장 흉악한 방식으로 노출된 1923년의 학살 사건으로까지 포함해 논의해 나간다. 민중의 폭력 행사가 가지던 힘의 의미를 다양한 층위로 보여준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도입된 시각이 ‘남성성’이다.

1905년, 도쿄의 민중은 일본정부가 러일전쟁강화조약에서 너무 양보했다고 폭동을 일으켰다. 그런데 폭동으로 발전하기 전에는 ‘국민대회’가 있었다. 이 ‘국민대회’라는 ‘옥외집회’는 당시로는 새로운 전술이었다. 일본에서의 남성보통 선거권이 1925년(치안유지법과 같은 해)에 실시된 것을 상기하면, 이때의 ‘국민’은 선거권이 없던 이들을 포함한 것이었다. 그들은 선거의 외부에서 ‘집회’를 통해 정치적 주체로 동원된 것이다. 이들이 폭동으로 나아가는 데에는 ‘러시아 간접 찾기’라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 이는 러일전쟁 중에 형성된 사회적 분위기이지만 이 규정이 강화조약 체결에 나선 구체적 정치인들에게 향했다. 즉 강화조약 반대의 폭동에 깔려 있던 민중들의 심성은 ‘간접 찾기’의 그것과 겹쳤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가 있다고 해서 곧바로 방화 등 폭력행위로 연결되진 않는다. 그것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이유가 필요해진다. 필자는 그것을 폭동참가자의 대부분이 남성이었다는 점에서 찾는다. 게다가 어느 때의 폭동이든 20세 전후의 남성들이 검거자의 중심이었다. 그들은 아무것에도 얽히지 않은 순수하게 분자화한 군중이 아니라 “노동의 유대에 의해 부분적으로 연결된”(76쪽)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그 유대는 어떤 종류에 것이었는가. 필자는 그것을 지방출신의 젊은 남성들이 도시 생활에서 습득한 문화의 기반이 된 것이라고 말한다.

필자는 토목사업 등에 종사하는 육체노동자 네트워크에서 그것을 찾는다. 노동의 소개를 통해 뭉친 그들이 없이는 도쿄에서 토목사업을 할 수 없었으며, 그만큼 그들의 유대는 강했다. 그들은 자신들 내부에서 복지사업 같은 것도 하고, 경찰과 같은 제도도 가졌다. 소위 오야분/고분 관계가 그것이다. 폭동에도 그들(즉 네트워크로서의 그들)이 참가한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참가가 왜 ‘폭동’이 된 것인가? 필자는 그 네트워크 내부에 있는 남성노동자들의 ‘대항문화=유탕적(遊蕩的) 생활실천’에 대해 분석해 나간다.

필자가 논의하는 육체노동자들의 ‘남성스러움의 가치체계’는 술, 도박, 매춘, 폭력, 싸움, 문신 등이다. 일본근대는 그러한 문화를 없애려고 애썼지만 육체노동자들은 감히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대항하듯 유탕적 실천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들은 주로 독신노동자였으며, “단성(單性)적 생활구조”(173쪽)에서 생활했다. 그들의 생활의 장은 생산 영역도 재생산 영역도 모두 남성만으로 구성된 것이다. 자위를 사람이 보는 자리에서 공연하게 하고나 동성간의 성적 접속도 발달하고 있었다. 혹은 여성에 대한 강간도 자주 있었다. 여성의 존재를 배제하면서 동시에 독신 남성들만의 재생산을 하는 장이 형성되던 것이다. 그러나 이를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사회적인 상승이 매우 어려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한 가운데 찰나적인 생활실천이 범람한 것이다. 한 예를 들어보면 문신은 아픔에 대해 견딘 증거이기에 신체적인 강함을 보여준 표시가 되어 완력이 강한 것과 동등한 의미를 가졌다. 강함의 정도는 문신 면적으로 표현된다. 이렇듯 다양한 찰나적 실천이 전개되는데, 그것은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즉 하층을 살아가는 소외감과 열등감, 그에 인한 인정욕구가 강하기 때문에 이러한 실천들이 있다고 필자는 논의한다. 이는 생생한 활력이 넘치는 실천이었으나, 그들보다 아래에 있던 하층의 여성을 디딤돌로 삼음으로써 획득된 것이었다.

그들의 실천은 상층계급이나 순사들에 대한 반감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문화’적인 층위에 멈추지 않고, 문화 속에서 만들어진 폭동하는 신체를 드러내면서 발생한 것이 도시폭동이다. 찰나적인 남성스러움을 중요시하는 가치체계 속에서 만들어진 신체, 여기에서 도시폭동은 생겨나간 것이다.

한편 하층남성이 아닌 사람들 중 도시폭동에 참가한 사람들은 어떠한 자였을까? 하층 남성들과 유사한 남성성을 지닌 문화로 ‘고학생’의 문화가 있었다. 그들은 도시의 화려함을 동경했다는 점에서 하층남성들과 연결되었다. 이들에겐 소외를 위로해주는 것으로 남성성이 있었다고 필자는 말한다. 즉 육체노동자와 고학생은 각자 다른 소외감을 가졌으나 각기 다른 소외감과 인정욕구가 서로 영향을 주면서 도시폭동이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 관계는 지속되지 않았다. 이는 도시폭동을 만들어낸 남성노동자의 대항문화가 20년대 이후의 조직적 노동운동의 기반이 되지 않았다는 가능성을 말해준다. ‘도시폭동에서 노동운동으로’라는 도식은 종래 역사 연구에서 유지되어온 시각인데, 이는 재고되어야 할 과제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 역사상 최대 폭동인 쌀폭동을 ‘도시폭동’이라는 맥락에서 어떻게 논의할 수 있을까? 물론 쌀폭동은 일본 곳곳에서 일어난 것이기에 전체적으로 ‘도시’적인 것은 아니나 이 책은 도쿄를 중심으로 도시폭동의 성격을 지닌 부분에 한정해서 논의하고 있다. 도쿄에서는 택시회사, 제약공장, 음식점, 종이 가게, 세탁 집, 전차, 자동차, 유곽 등 쌀과 별로 관계 없는 곳도 습격되었다. 특히 유곽을 공격했다는 부분에서는 그때까지의 폭동에서 보인 남성성을 읽을 수 있다. 도쿄의 쌀폭동에서 방화로까지 나아간 지역은 요시와라 유곽뿐이었다. 그곳은 상층계급 남성들이 매춘하는 상징적인 고급 유곽이고, 자동차와 비슷한 의미를 가졌다.

이러한 움직임을 10년대 후반에서의 일본 노동운동은 어떻게 흡수했는가? 필자에 따르면 노동운동은 이러한 하층남성들을 노동자보다 아래에 있는 자들로 취급해 배제했다. 즉 일용직 등을 배제하면서 가족주의적 노동자 통합을 했다는 것이다(260쪽).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20년대 노동운동의 폭력행사에서 ‘남성스러움’을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가 있었는데, 30년대의 노동쟁의로까지 가면 그러한 야쿠자적인 말투는 없어진다고 한다(262쪽). 노동자 계급은 이 무렵 성립이 되는데, 이때 그어진 선은 노동자/자본가뿐만 아니라 정규노동자와 비정규노동자 사이에도 있었던 것이다. 25년의 남성보통선거 실시는 공간적인 정치를 질서화 시켜, 이후 도시폭동이 일어날 조건을 없앨 역할을 했지만, 이러한 공간 정치는 노동운동의 현장에서도 일어나던 것이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사회적인 것’이 상승해간 일본의 1920년대와 겹쳐 논의할 수도 있다. 이 의미로 단지 ‘질서화’라는 관점만으로 이 시대를 정리할 수 없다. 그런데 ‘폭동->사회’라는 구도로 이 시대를 파악해버리면, 단지 ‘생활난’의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밖에 보이지 못하게 된다.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소외감이나 인정욕구를 함께 논의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깔린 ‘남성성’을 놓칠 수 없다. ‘사회적인 것’ 혹은 ‘질서’로 봉합된 것처럼 보인 폭동의 힘은, 그러나 1923년 9월의 조선인 학살을 통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 책에서는 도쿄 미나미 아야세(현재의 아다치 구) 지역의 학살을 사례로 논의가 진행된다. 조선인의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해 유언비어가 만들어졌으며, 그 유언비어는 새로운 ‘공포’를 만들어갔다. 그곳에 사는 조선인을 무두 학살하려고 했는데, 놓친 조선인이 있다, 그 놓친 조선인이 다시 습격해올 수도 있다, 그러니까 전멸시켜야 한다, 는 식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민중 스스로가 조선인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 학살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조선인으로 오인될 의심이 있는 일본인은 일본인 내부의 권력관계에서 아래쪽에 있었다. 민족적 위계뿐만 아니라 일본인내부의 권력관계가 겹치고 있었다. 남성노동자의 가치체계는 남성에 지켜져야 할 누군가를 지켜야한다는 심성을 근거로 하면서 이때는 조선인을 죽인 것이다.

도시폭동 속에서의 배타적 발언은 항상 있었는데, 그것은 1923년 관동대지진 속에서도 여전히 유지되었다. 그 폭력은 권력에 향하기도 했으나 그들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여성, 조선인)에 향하기도 한 것이다. 필자는 그들보다 아래에 있던 사람들을 주체로 역사서술이 시도되어야 하며 그것을 앞으로의 과제로 삼겠다고 하면서 이 책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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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번역 안해줄거 잖아]



한국전쟁 시대의 '공작자'들의 문화=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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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바 치카노부 <시모마루코 문화집단과 그 시대 1950년대 서클 문화운동의 광망>(미스즈 쇼보, 2016, 411, 3800세금)



원제목:道場親信, 下丸子文化集団とその時代 1950年代サークル文化運動光芒, みすず書房, 2016.


 

1. 서클 운동 연구

 

일본에서의 서클 운동을 언급할 때, 50년대 말 다니가와 간에서 논의를 하는 사례를 들어본 적도 있다. 그러나 다니가와 간이 그것을 언급하기 시작하는 것은 서클 운동이 한 단계를 마무리한 시기의 일이다. 서클 운동이 처음에 활발해진 시대는 50년대 초반이다. 그런데 그것의 생생함을 일본현대사는 제대로 조명하지 못해왔다. 물론 당사자들이 남긴 책은 꾸준히 출판되어 왔으며, 부분적/단편적으로는 계속 접해왔다고 할 수 있다.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2007년에 잡지 <현대사상>에서 특집으로 기획된 '전후 민중 정신사'라는 책자였다. 이는 서클 운동을 새롭게 논의하는 시도였으며, 여러 필자들이 50년대 초반에 대한 논문이나 회고를 다수 실었다.


약간 개인적인 이야기가 되는데, 당시 학부생이었던 나는 식민지 조선 출신이고, 계속 '조선'을 대상으로 소설을 썼던 고바야시 마사루(小林勝1927-1941)의 소설을 읽고 있었다. 나중에 이 작가로 학부 졸업논문을 쓰게 되는데, 고바야시의 소설의 배경에 대해 알기 위해 이것저것 먼지가 쌓인 책을 뒤지고 있던 시절이었다. 고바야시는 50년대 초반의 공산당 무장투쟁에 대한 소설을 썼기도 했는데, 이러한 운동은 일본공산당의 공식적 역사에서는 '극좌폭력노선'으로 일괄 부정되고 있다. 그러한 공산당의 공식 역사에서 지워진 배경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시 간행된 잡지를 봐야 했다. 그러한 가운데 접하게 된 것이 <인민문학>이라는 잡지이다. 지금으로는 연구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극좌폭력노선'의 문학잡지로 별로 평가되지 않았던 잡지이다. 그런데 <시모마루코 문화집단과 그의 시대>의 저자를 비롯한 몇 명의 꾸준한 연구로 인해 이제는 <인민문학>에 대한 편견은 없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째든 당시 도바 코지의 <운동체 아베 고보>(鳥羽耕司, 運動体 安倍公房, 一葉社, 2007)라는 아베 고보의 공산당 경험을 중심으로 한 연구서도 읽었으며(이건 매우 재미있는 책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나이 많은 일본문학 연구자에게 이 책에서 받은 충격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 연구자는 '우리 시대는 아베 고보의 공산당경험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지'라고 웃더라고), 50년대 초반의 정치의 복잡함은 공산당의 공식역사에서 지워진 만큼 흥밋거리가 되었다. 물론 아직 조선총련이 출범 이전이기도 하며, 재일조선인 활동가들이 공산당에 속해 있었으며, 더욱 무장투쟁이나 한국전쟁 반대운동 등, 다양한 층위에서 50년대를 바라보고 있던 무렵에 <현대사상>의 특집에 접하게 된 것이다. <현대사상>특집에서 읽은 것은 50년대 초 도쿄 남부 지역의 풍부한 서클 운동에 대한 사례들인데, 내가 그때까지 읽은 적이 없는 매우 구체적인 모습들이었다. 이는 많은 기록을 남기고 온 사람들이 있던 덕분에 가능한 연구였다(<시모마루코 문화집단과 그의 시대>에서는 어떻게 자료가 계승되었는지에 대한 논의도 있다).


''이라는 것을 중심으로 한 정치사 서술에서는 절대적으로 부각되지 않은 영역에 있는 것이 당과 일정정도 거리를 두면서 움직이던 서클운동들이다. 그것에서는 정치적인 문구도 쓰였기 때문에 문화주의자들에게는 '정치적'이라고 부정되어, 정치진영에서는 '문화적'이라 부정당해왔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서 새삼 느꼈던 것은 문화적/정치적이라는 부정의 언어가 아무것도 대상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함께, 정치적인 수사로 무엇이 표현되었는지를 육박하려는 내재적 이해의 시도이다. 자연발생성이나 목적의식성으로 정리함으로 지워져버린 영역에 있는 것이 바로 50년대 서클 운동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 와중에서 표현된 것들, "그것은 '정치''문학'이냐는 이자택일 중에서 설정된 논쟁 틀을 벗어나는 것이며, 제도적 '문학'을 다시 정의하도록 할 가능성을 내포한"(207)것이었다.

 

2. 한국전쟁 후방에서의 시 쓰기

 

일본어로 '전후'라고 할 때 1945년 이후를 일반적으로 말한다. 그런데 '전후'일본은 한국전쟁을 통해 '부흥'해갔을 만큼 일본은 한국전쟁의 일부분을 구성했다. 즉 미국의 전쟁기계 속에 있으면서 미군이 정한 법의 외부에서(비합법영역에서) 싸우는 것이 50년대 초의 '운동'이던 것이다(14). 그 비합법성은 바로 한국전쟁반대운동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쿄 남부 공장지대는 서클 운동이 활발한 곳이면서 동시에 조선특수로 은혜를 받고 있는 곳이다. 이 겹침은 이 책이 대상으로 하는 도쿄 남부지역의 당대 성격이다. 즉 최악의 방식으로 조선과 연결되면서 그와는 다른 관계성을 실현하려 하는 시도로서 운동이 있던 것이다. 이곳에서의 저항은 탄압을 받기 일쑤였다. 그러한 저항 가운데에서 다양한 요소가 겹치면서 시모마루코 문화집단은 생긴 것이다.


이 지역에 모이던 대소 공장들은 인접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도보로 오가면서 서클 운동을 만들었다. 이 서클은 기업체나 공장을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지역적 공간으로 운영되었다. 거기에서 시도된 것이 '()'였다. 시는 노동자들이 쓰기 쉬운 장르였으며, 시를 쓰는 것을 통해 노동자들의 시각자체를 바꾸어 나가는 작업이 시도되었다. 인용을 해보자. "시는 '집단창작'하기 쉽고, '나도 쓸 수 있었다'는 체험을 그다지 고생하지 않아도 손에 놓을 수 있는"(228)문학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시는 가장 문턱이 낮은 문학이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턱을 넘은 경험을 통해 문학표현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시가 사회운동과 직결된 시대였다. 이러한 시 쓰기를 노동자들에게 권유한 자가 바로 문화공작자들이었다(이 가운데 아베 고보도 있었다). 이는 제도적인 의미에서의 '문학'과는 다른 언어표현을 실현하려 한 것이었다. 서클에서 시도된 이러한 '쓰기'를 잡지<인민문학>은 적극적으로 흡수하려고 했다. 이러한 '쓴다'는 것이 정치운동에 영향을 미쳤을 것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문학/정치라는 기존의 코드를 계속 바꾸면서 표현을 창출해내는 존재가 바로 '공작자'이다. 철학자이자 아나키스트이던 츠루미 슌스케는 일본 쇼와 사상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서클 문제를 전향문제와 같은 층위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복잡하면서 수많은 표현자가 나오게 되는 이 서클의 시대야말로 일본에서 '주체'가 어떻게 가능할지를 극한으로 보여준 사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건드리는 존재가 '공작자'인 것이다.


그런데 50년대 후반, 서클 운동은 점점 침체되면서 도쿄 남부에서는 '문학'을 지향한 단체로 수렴해간다. 이는 문학적인 부분이나마 집단성을 유지하려는 시도로 평가된다(200). 서클이 문학 서클로 되어갔을 시절의 사례에서 흥미로운 것은 나가사키현의 오무라 수용소(조선인 '범죄자'를 수용하는 곳으로 여기에 수용된 조선인은 이승만 정권 하의 '한국'에 강제추방이 되기도 했다)'오무라 조선 문학회'와의 교류이다. 거기에서 잡지의 가리판을 대신해서 해주지 않을까라는 요청이 와서 도코 남부의 문학집단이 대신해주었으며, 교류가 시작한 것이다. 오무라 수용소에서 온 편지에는 "오무라 수용소 내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공민자치회 오무라 문학회"(159-160)라고 서명되어 있었다.


결국 도쿄 남부의 서클 운동은 59년에 해산되기에 이른다. 55년 체제의 성립은 일본공산당의 단일화도 포함하는데, 당일화되기 전에 <인민문학><신일본문학>에 흡수된다. 이 과정에서 '공작자'라는 개념 역시 진지한 검토 대상이 되지도 못한 채 청산되어버린다. 그 후 얼마 시간을 두고 50년대 말에 바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 규슈 지방의 <서클 마을>이던 것이다. 도쿄에서 좌절된 <공작자>라는 개념을 감히 가지고 나타난 것이 다니가와 간이었다.

 

3. 공작자, 에지마 히로시

 

이 책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며, 더군다나 필명이나 무서명의 기사에서는 '개인'이 보이지 않을 경우도 많다. 그런데 특별히 강조된 인물이 에지마 히로시(江島寛)이다.


본명은 호시노 히데키. 식민지 조선에서 1933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우편 관련의 일을 했기 때문에 조선 각지에서 자랐다. 경성중학 재학 중 일본 패전으로 일본으로 인양했다. 그는 활동가이면서 동시에 계속 조선을 대상으로 한 시나 소설을 썼다. 정치적 문제 때문에 고등학교를 방교처분당해 도쿄로 건너갔다. 야간고등학교에서 배우면서 서클 활동을 활발하게 벌었다. 노동자들과 연결되어 공작자로 '운동으로서의 문학'을 실천해 나간다. 즉 표현을 통해 대중의 의식을 변혁하며, 거기에서부터 현실을 새롭게 이해하는 코드를 창출하는 운동/표현활동을 벌었다(304).


한국전쟁 휴전 후 일본은 고도경제성장의 길로 나아가게 되어 '부흥'해 가는데, 부흥 속에서의 대중사회의 도래는 '공작'의 목표를 보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롭게 길을 열어야 했던 그였지만, 548, 21세로 죽고 만다. 장례식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에지마보다 5살 위인 고바야시 마사루도 방문했다(342).


그의 시는 도쿄 남부와 전쟁터인 조선을 연결하는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단지 군수공장이나 하네다 군용 비행장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과 연결된 이미지는 실체로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을 넘어가는 상상력이다(322). 전쟁과 미군으로 연결된 도쿄와 조선을 노동자의 연대로 또 다른 '연결'을 만들어냄으로써 그는 해방된 동아시아를 꿈꾼 것이다. 한국전쟁 휴전 후에는 서로의 관계가 보이지 않게 될 정도로 도쿄와 조선은 전쟁에서만 연결된 상태였다. 그것과는 다른 상상력을 마음에 가지면서 죽고 만 에지마의 사상을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이 책을 통해 '조선'과 대면하려 한 일본의 사상가를 더 한 명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죽음과 관련해서 저자인 미치바 치카노부 역시 이 세상을 떠나버렸다는 것을 추가해두어야 한다. 책 후기를 보면 2016년 초에 암이 발견되어 스스로의 작업을 다시 검토하면서 편집자의 도움을 받아 기존의 논문을 정리해 이 책을 출판되기에 이루었다고 한다. '후기'가 쓰여진 20169, 그는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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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목소리 듣기




 

가게모토 츠요시

 



 


하라구치 다케시 <외침의 도시>(라쿠호쿠 출판, 2016)

(원서명原口剛びの都市洛北出版, 2016, 410(사진 다수), 2400)



1. '가마가사키'라는 공간을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

 

책 제목은 '외침'이다. 이 책을 읽어보면 확실한 외침의 기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들리지는 않는다. 도시는 철저히 외치지 못하게 개조되었고, 과거 외침들은 마치 속삭임처럼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듣고야 비로소 외침은 외침으로서 들리기 시작한다.


이 책은 일본 최대의 인력시장인 오사카의 '가마가사키' 지역의 역사를 지리학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부각시킨 것이다. 일본의 '고도경제성장'을 지탱한 것이 일용직노동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이제 고령이 되어서 가마가사키는 현재 고령 남성들이 많은 동네가 되었다. 그러나 일용직 노동이 없어진 것이 아니며, 현재 노동자들은 휴대전화를 통해 연락을 받고 현장으로 간다. 이는 매일 새롭게 공급되는 후쿠시마 원전 수습 '작업원'들의 존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들 역시 예전의 일용직 노동자가 그랬듯이 '노동자'로 불리지 않았으며, '작업원'이라 불린다(201611월 단계 신문보도를 보면 최전선에서 외국인도 일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로 우리는 이제 물리적인 '인력시장'에 갈 필요가 없어진 시대에 있는 것이다. 현재 가마가가키는 비교적으로 싼 값의 숙소(원래 일용직 노동자가 살던 숙소)가 많기 때문에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드나들기도 한다. 행정적으로는 이미 '가마가사키'라는 용어는 쓰지 않게 되었는데, '가마가사키'라는 명칭은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행정적인 시선과는 다른 시선으로 이 지역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는 공문서와 주민들이 다른 지명을 쓴다는 것인데, 이는 통치자와 통치받는 자들의 비대칭적 관계를 보여준 사례일 것이다(113). 비교적으로 오사카 도시부에 가깝다는 점과 오사카시의 노숙자 배제의 움직임 때문에 젠트리피케이션의 대상이 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말한다면 일본 역사 속에서 최하층의 사람들이 살아온 지역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물론 그곳으로 온 조선인들도 많을 것이다). 이러한 지역이기에 몇 번이나 폭동이 일어났으며, 그 폭동을 통해 여러 권리를 획득하기도 해왔고, 동시에 폭동을 통한 인간관계 형성술을 만들어낸 지역이다.


필자인 하라구치 다케시는 이 가마가사키에서 현지조사를 하면서 2008년의 폭동에 조우하며, 그 현장에서 "과거에서의 목소리"(21)를 듣게 된다. "우리는 이미 가마가사키적 상황을 살고 있다. 그렇다면 가마가사키의 기억을 상실하는 것은 현재에 대한 시좌를 획득하기 위한 실마리를 놓쳐버리는 일이 된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가마가사키의 기억으로 다시 돌아가 그것을 재구성하는 일이 필요하다."(30) 이것이 필자의 문제의식이다. 필자가 지리학자로서 완성시킨 박사논문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이 책은 역사나 지리를 바라볼 시점으로 항상 '현재'와의 관련을 맺으려 한다. 그만큼 젠트리피케이션의 흐름이 과거와 현재의 단절을 넘어, 아예 과거의 기억을 없애는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단순한 평면적인 지리학이 아니라 (폭동에서의 투석이 바로 그것이었듯이) 아스팔트를 떼어벗기고, 흉각에 의지하면서 지하로 내려가는 역사기술과 함께 '지리'공간을 쓰겠다고 말한다. "공간을 '움직인다'"(32)라는 선언과 비슷한 말은, 젠트리피케이션을 당해 가는 현재 지리파악에 대한 비판의 근거지를 만들기 위한 최대한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가마가사키/오사카 항 이주노동자들의 흐름

 

필자는 우선 가마가사키로 들어가기 전에, 커다란 일용직 노동자의 인력시장이 오사카에 만들어져야 했던 이유인 오사카 항의 항만노동자에 대한 논의에서 시작한다. 필자는 가마가사키의 외부에 있는 오사카 항을 통해 "항만지역에서 가마가사키에 걸쳐 연결된 도시 하층노동의 지리가 부각된다. 이러한 관계성에서 가마가사키라는 공간은 이해되어야 한다"(73)고 말한다. 이 공간을 유동하는 노동자들은 '근본적 법외성(法外性)'(76)에 노출되어 있었다. 사실 일본에서는 미국 점령기 GHQ의 행정에서는 함바(飯場)제도 등을 없애는 '민주적'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방침이 내세워지기는 했는데, 한국전쟁 때문에 일본이 군사적 '특수(特需)''은혜'를 받아 다시 노동자 공급에 관련된 규제가 완화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본에서의 함바제도가 존속하도록 만들었다는 지적은 한국이라는 맥락을 읽어내려는 독자에게 흥미로운 부분일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 근대 함바제도를 지탱한 노동자들은 오키나와, 아이누, 조선 등 몸밖에 팔 수 있는 것이 없어진 유동노동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로 가마가사키의 노동자는 결코 '일본인'만이 아니며, 일본에서도 못사는 지역 출신의 사람이 많다. 이를 잘 보여준 다큐영화로 김임만 감독의 <가마가사키 권리 찾기>(2011)가 있다. 이 영화에서는 가마가사키의 재일조선인 노동자가 등장한다. 어쨌든 가마가사키는 이민노동자들이 모이는 장소였던 것이다. 즉 정착하는 '노동자'와는 아예 다른 성격을 가지는 유동적인 '노동자'(어떤 의미로 그들은 '노동자'로 불리지도 않았으며, '노동자'들에게 차별을 받기도 했다)이었던 것이다(이 책에서 일용직 노동자들의 세계에서는 조선어에서 나온 용어가 있다는 것이 몇 번 제시되는데, 한국의 '노가다''함바'가 일본어에서 온 것처럼 하층노동자들의 용어는 자본가들보다 국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가마가사키의 일용직 노동자들은 "국가와 자본의 모순을 온몸으로 짊어지는"(98) 존재인 것이다.


항만 노동자들은 1962327일에 파업을 수행했다. 이 때 파업은 전 태평양적으로 벌어진 것이었다. 오키나와(당시 일본이 아니었다), 미국, 케네다, 하와이, 호주, 인도네시아, 인도, 중국, 소련 등에서 동맹 파업이 수행되었으며, 일주일에 걸쳐 일본선적의 선박에 대한 일제의 작업을 중단되었다. 이는 일본에서의 항만노동법의 실현을 요구하는 것이었다(174-7). 그런데 이 때 오사카 항 파업의 중심이 된 노동자는 일용직 노동자가 아니라 정규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의 시선에는 동시기에 일어나던 가마가사키의 폭동은 보이지 않았다(185). 그런데 이 항만노동자들은 가마가사키의 일용직 노동자를 조직하려 나서며 다양한 투쟁을 벌인다. 거기에서 획득하는 것은, 일용직노동자들에게 부여될 여름과 겨울의 일시적 수당인 '소면 값''떡 값'이다. 이들 노조활동가들은 계획된 의식적 운동을 지향했으나, 경찰의 눈에는 운동과 폭동을 구별할 수 없었다. 물론 정규직 노동을 바탕으로 하며, 의회투쟁 같은 것도 하던 항만노동자들의 운동은 정확히 운동이며, 폭동은 아니었으나, 그들의 방법은 폭동에서도 사용이 되었다. 이러한 연결이 만들어진 전제로 가마가사키와 오사카 항을 왔다갔다하던 일용직노동자의 존재가 있었다. 그리고 60년대 말부터의 항구 컨테이너화는 그들의 일터를 잃게 만들었으며, 일용직노동자들은 건설현장으로 들어가게 된다.


80년대부터의 오사카 항 재개발은 이러한 일용직 노동자들의 기억을 망각해 가는 과정이었으며, 기억은 정리된다(그 상징 가운데 하나가 오사카항 부근에 있는 '가이유칸海遊館'이라는 수족관이다). 그렇지 않은 시각을 확보해 나가야 한다.

 

3. '사회문제'와 도시개조 폭동의 이면

 

가마가사키는 계속 '사회문제'였다. 그런데 그것이 '사회문제'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폭동이 있어야 했다. 필자인 하라구치는 폭동은 '사회문제'를 부상시켰지만 동시에 '사회문제에 대한 처치'로는 봉합될 수 없는 별개의 힘을 가졌으며, 그것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가마가사키=슬럼이라는 이미지 자체가 담론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이미지를 통해 그 지역을 한꺼번에 해결해주는 방법으로 '사회문제''사회병리'라는 개념이 동원되었다. 즉 이들 개념이 보여주듯이 오사카시는 가마가사키 문제를 '외과수술'(142)과 같은 식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놀랍게도 1966년에는 이 지역을 담당하는 '니시나리 경찰서'(활동가가 만든 폭동 기록영화 등을 보면 니시나리 경찰서는 '국영 조폭 니시나리 경찰서'라는 매우 적합한 나레이션이 나온다)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었다(147). 이렇게 가마가사키는 사회문제가 있는 지역으로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권력은 이 지역에서 자율적으로 무엇인가가 만들어지는 것에 경계하며 봉쇄하려고 한 것이다(148). 이 과정에서 가마가사키에서 살던 가족형태의 거주자들이 주변부로 이사하게 되어, 지역에 아이가 없어지고 단신노동자들의 지역이 되었다(일본 만화/애니메이션의 걸작 <자린코 치에じゃりんこチエ>는 가마가사키에 아이들이 있던 무렵이 잘 그려져 있다. 유튜브에서도 몇 개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생긴 것이 직업 소개소인 '아이린 종합센터'이다. '아이린'은 한자로 쓰면 愛隣(사랑의 이웃)이다. 행정이 가마가사키에 부여한 이름은 매우 끔찍한 것이며, 가마가사키를 어떻게 개조하려 바라보는지 잘 보이는 이름이다. 때는 마침 오사카 만국박람회로 인한 건설 붐이었다. 국가도 일용직노동자의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면 그만큼 강제적인 공간개조를 해야 할 정도로 이 지역에서 벌어진 투쟁은 격렬한 것이었다. 이를 필자는 앙리 루페블의 <도시로의 권리>에서 나오는 <도시적인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무리()가 무리를 불러올 중심성'이었다(165).

 

4. 유동적 하층노동자들의 폭동

 

인력시장의 일용직 노동자들의 폭동은 무질서적이면서도 일정한 리듬을 갖춘, 만 단위의 신체의 집단적 유동이었다(208). 폭동은 이 리듬을 만들어낸다. 가마가사키의 폭동은 1961년에 1, 62년에 2, 66년에 4, 67년에 1, 70년에 1, 71년에 3, 72년에 7, 73년에 2, 90년에 1, 92년에 1, 2008년에 1번 일어났다(221). 최초의 폭동은 차별 대응을 하는 경찰에 대한 항의 행동이 실마리가 되어 시작했다. 왜 그러한 집단적인 연결이 가능했냐면, 가마가사키의 노동자들에게는 '에고이즘''공생'의 마음이 공존했기 때문이다. 이는 대립되는 개념이지만, 모든 권력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에고이즘이며, 자신과 관련된 타인과의 강렬한 공생이라는 의미이다. 일용직노동자들은 서로 과거 이야기를 하지 않다는 것도, 관계성 만들기의 규범인 것이다(226-7). 그런데 그들은 가마가사키라는 '지리'를 공유하고 있었다. 동네 전체가 부엌이자 사랑방이자 사교하는 우물가 같은 것이었다. 이것이 에고이스트이면서 집단적인 노동자가   있는 폭동의 심성인 것이다(228).


이 점에 관해서 항만노동자의 노조는 폭동을 억지하는 역할로 스스로의 의미를 부여하며, 의회투쟁을 통해(노조에서 의원을 선출하고 있었다) 행정에게 문제를 알리고 행정을 통해 폭동의 원인을 해결하려고 했다. 이러한 노조의 시선은 여러 권리를 획득하게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의의를 가지지만 이와 다른 흐름을 직시해야 한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노조와 <폭력 수배사 추방 가마가사키 공투회의(가마 공투)>의 노선대립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대립의 원인은 월등투쟁에 대한 입장 차이였다. 노조는 그것은 행정에게 시켜야 할 것이라 소극적이었는데, 가마 공투는 그렇지 않았다. 가마 공투는 '노조는 폭동의 주체가 될 수 없으며, 반란을 권력으로까지 올릴 수 없다'고 비판을 한 것이다. 이때 가마 공투는 '노무자'라는 용어를 다시 획득한다. '노동자'라는 용어는 노조 때문에 더럽혔다고 말하면서 차별용어인 '노무자'를 다시 발견하는 것이다. 가마 공투 활동가들도 참여한 <노무자 도세(労務者渡世)>라는 잡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노동자라는 말과 노무자라는 말을 따로 쓰는 세상일반의 차별감정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 차별받는 자의 반항, 반란의 자유는 확보한다, 라는 것이다."<노무자 도세>, 1975. (242쪽에서 재인용)

 

여기에서 그들이 잡아낸 '노무자'라는 말은 '피식민적 상황'이 함의되어 있었다. 그리고 노동자일반과 노무자의 적대성을 명확히 한 것이었다. 이로써 그들은 노무자라는 용어를 적극적으로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도쿄나 오사카의 인력시장을 자유롭게 드나든 활동가였으며, 그리고 오키나와 미군 기지 앞에서 자신의 몸을 불태워 분신자살한 후나모토 슈지(船本洲治)가 노무자를 "유동적 하층 노동자"라고 규정했다. 이 용어는 인력시장을 단순이 하나의 지역으로써 이해하는 것을 거절했다. 다양한 여러 인력시장과 연결된 노무자들의 흐름(폭동의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중심이 된 폭동은 파괴가 아니라 다채로운 실천을 가능케 할 정치적 공간을 만든 창조적인 것이였다. 우익에 의해 살해된 인력시장 활동가이자 영화감독이었던 야마오카 교이치(山岡強一)의 다큐영화<야마 당하면 복수하라>(1985)는 일본 곳곳의 장면이 나온다. 그 중 하나인 규슈의 탄광은 일본의 에너지 정책 전환 때문에 이동하는 노동자를 많이 산출했다. 그러한 노동자들은 도시의 공장으로 정착하지 않았으며, 인력시장에 모였다. 인력시장에 모인 노동자들은 '유동적 하층 노동자'이었다.


그들은 행정의 눈에는 노동자성을 상실한 자들이며, 시민사회의 '병리'로 보일 것이지만 그들의 '일탈'은 자율적인 '일탈'인 것이다(370). 그 흐름을 2000년대 이후의 노숙자배제 반대운동으로 연결시킨 것으로 이 책은 마무리된다.

 

 

 

부기. 이 글을 쓰는 중에 이 책에 대한 서평이 <아사히 신문>에 실렸다. '누구도 번역해주지 않을 책'을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 글의 대상이 천하의 부르주아 신문<아사히 신문>에 실리다니, 약간 이 연재 글의 성질을 애매하게 만든 것이기도 하고 아뿔싸,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사히 신문>의 서평자는 이 책의 현대성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아마 책을 진지하게 보지 않는 채 쓴 것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이렇게 소개할 의미는 나름 있을 것이다. 매우 현대적 의미를 읽을 수 있는 책이라 실제로 번역될 가능성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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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어긋나는 ''의 사상의 투쟁


후쿠다 가츠히코 <산리즈카 암흙> 읽는다


 


(원서 서지 정보 :福田克彦三里塚アンドソイル』 平原社, 2001, 622, 4850)

 




가게모토 츠요시/수유너머N 세미나 회원





 

산리즈카 투쟁, 그리고 농업

 

도쿄 지방의 공항으로 알려진 나리타공항은 많은 분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커다란 공항이 건설되기까지 현지 농민들의 치열한 투쟁이 있었다는 것도 일본의 운동사를 조금이라도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몇 년 전에는 오제 아키라의 기념비적인 만화 <우리 마을 이야기>가 한국어로 번역 소개 되는 획기적인 일이 있었다. 이 만화를 보면 그것이 어떤 투쟁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만화에서도 투쟁에 나선 농민들의 '보수'성은 그려졌다. 농민들이 일본 패전 후 중국 동북지방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소위 '전후 개척자'였다는 점에 대해서도 만화에서 그려졌으며, 그러한 것이 가능했던 이유가 나리타공항이 있던 곳이 원래 천황가의 토지였다는 것, 그리고 농민들이 천황에 친화적이었다는 것 등도 이미 <우리 마을 이야기>에서 그려진 바 있다.


사실 <우리 마을 이야기>는 일본 학생운동 가운데에서 ''을 지향하지 않는 집단에서 필독서이다. 물론 거기에는 일본공산당을 비롯한 각 당파에 대한 비판이 담겨져 있으며, 따라서 ''을 지향하는 운동에서는 거의 읽힌 바 없는 만화이기도 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 마을 이야기>의 독자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자리는 나리타공항 반대 투쟁의 다양한 운동 속에서도 매우 특이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만화는 일반잡지에 실린 것이며,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 만화가 아니다.


나리타공항 반대 투쟁은 공항의 당시 지명을 가지고 와서 '산리즈카 투쟁'이라고 불린다. 거기에서의 다양한 운동의 움직임, 인간생명의 희생, 운동하는 사람들의 싸움 등에 대해서는 많은 책이 발행되어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우자와 히로후미 같은 사람도 이 운동과 행정 사이의 갈등 해결에 간여했으며, <나리타란 무엇인가>(이와나미 서점)라는 책을 썼다. 혹은 최근 잇따라 DVD화되어 있는 오가와 신스케 감독의 다큐 영화 가운데 하나인 <산리즈카의 여름>DVD로 발행되어 비교적 쉽게 관련 영상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다큐 영화는 촬영중의 카메라맨이 중간에서 체포당하는 등(그래서 화면이 흔들린다), 상당히 생생한 작품이다. 이러한 것들을 보면 어느 정도 산리즈카 투쟁에 대해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책 <산리즈카 암흙>은 산리즈카에서 과연 어떠한 농업이 시도되었는지, 산리즈카의 ''이라는 관점에서 투쟁에 접근하고자 하는 사상서이자 역사서이다. 심각한 부딪침 이후 많은 사람들이 현장을 떠났으나 현지에 남아 농업을 시도한 사람도 있었다. 원래 있던 농민들과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지, 거기에서 어떠한 '농업'을 체득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다시 발현시켰는지, 그러한 물음을 통해 일본이라는 것을 근본으로부터 다시 생각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저자인 후쿠다 가츠히코는 책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43년 생이며 1998년에 죽었다. 이 책에 실린 저자연보는 '낙서 연보'라고 되어 있으며, 그를 아는 주변 사람들의 말로 구성되어 있다. 후쿠다는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후 취직을 했다가 바로 그만두고 다큐 영화 집단인 오가와 신스케 프로덕션에 들어갔다. 그는 산리즈카의 다큐 영화 촬영에 계속 참여했다. 한때는 산리즈카를 떠났지만 기본적으로 산리즈카에서 살았다. 70년대 이후의 산리즈카의 운동에 계속 관여한 것이다. 90년대 들어 산리즈카에 대한 글쓰기를 시작했으며, 결국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야 했다. 남겨진 것이 이 책이다.


그리고 하나 추가해서 말해야 하는 것은 이 나리타공항이 있는 지역, 즉 산리즈카 투쟁 이후에 새로운 농업을 열어나간 사람들의 농사 현장을 20113.12의 원전 폭발은 오염지역으로 만들었다(자연재해가 아니라 동경전력이 만든 재해라는 것을 명시하기 위해 감히 지진과 쓰나미의 '3.11'이 아니라 원전이 폭발한 날인 '3.12'라는 용어를 쓰겠다). 이렇게 사상과 농업을 열어나간 사람들의 길고 긴 생활과 타 지역과의 연대운동을 원전은 순간적인 폭발로 파괴했다. 3.12 이후 사정에 대해서는 잘 조사하지 못해서 자세히 쓰기 어렵다(듣고 알게 된 정보는 있는데 그것을 여기에 밝히기는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중심으로 소개하며, 3.12 이후 사정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을 것이다.

 


福田克彦『三里塚アンドソイル』 平原社, 2001, 622쪽.


2. 보수성에 대하여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책을 시작한다. "산리즈카 투쟁은 일본 마지막의 백성 봉기였다. 게다가 화산회토(火山灰土)의 백성 봉기였다. 지금 시작하려는 여행은 (중략) 누구나 기술이나 진보에 의문을 던지지 않았던 시대에서 오로지 생활의 보수를 내걸은 산리즈카 투쟁의 의미를 찿는 여행이다. 말하자면 '보수 심층으로의 여행"(14)이다. "산리즈카를 응원한 사람들은 싫어하겠지만 감히 말하자면 산리즈카는 일관해서 보수의 사상이라고 해도 좋다. 다소 변명하자면 보수 반동이 아니라 보수 본류이다."(436)


이 책의 저자 후쿠다는 일본이 세계 최초로 굶주림을 극복한 나라라고 말한다(21). 그런데 그 대가는 '고도경제성장'이었다. '성장' 속에서 계획된 것이 신 도쿄 국제공항(현 나리타공항) 건설이었다. 일본정부는 현지 농민들에게 '대체지'를 보장한다고 했는데, 이 토지에 관한 생각은 오로지 면적으로서의 토지이며, 농민들이 감각하고 있는 ''은 아니었다. 따라서 투쟁 초기에 농민들이 호소한 것은 "농지 사수", "마을을 지키라"라는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호소였다. 이 슬로건에 '군사공항반대', '미일안보조약 반대'를 추가한 것은 외부에서 온 사회당이나 공산당, 그리고 신좌파의 각 당들이었다. 외부 정치 세력과 일본국가는 '진보'라는 점에서는 공통되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농민들이 호소한 것은 진보적인 정치조직이나 당이 내세운 것도 아니며, 일본행정이 내세운 것도 아닌 '보수'인 것이다(25).


그런데 농민들은 어떻게 이 토지에 오게 되었는가. 이곳이 원래 천황가의 토지였다는 것은 만화 <우리 마을 이야기>에서도 그려진 바 있다. 이 땅이 1945년의 일본 패전과 식량위기로 인해 농지로 개방되었다. 공식적으로 허락되기 전부터 농민들은 그곳에 들어갔다. 물론 그 때 일본은 미국 점령하에 있었다. 그 가운데 새로 들어온 사람들 중에는 '전후 개척'이라고 해서 중국동북부 등 일본 밖에서 패전으로 인해 돌아온 농민들이 다수 있었다. 특히 산리즈카 투쟁에서 잘 알려지게 된 촌락들은 새롭게 들어온 그러한 농민들의 촌락이었다. 물론 원래 있던 농민들과 전후개척으로 들어온 농민들의 싸움도 있었다. 그런데 산리즈카 투쟁은 그러한  가지 성격을 가지는 마을을 함께 싸우게 만들었다. 농민들의 마음 깊은 곳에 천황가의 토지였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투쟁 초기인 68418, '노인 행동대'118명으로 천황에게 청원하러 가기도 했다(47). 농민들의 싸움의 논리는 '우리는 천황을 대신해서 지금 정치인들과 싸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농민들은 중국의 모택동을 영웅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이는 확실한 모순으로 들리지만 그 농민들의 마음으로 보면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산리즈카는 본래 천황제 농본주의의 풍부한 토양이었다'는 것은 이 투쟁에 대해서 단순한 이해를 할 수 없게 만든다. 즉 공항은 천황의 목장을 대체할 수 있는가 하는 과제를 농민들은 일본국가에 대해 던진 것이다.(52)


"<>이라는 말을 발견하여 그것에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투쟁의 키워드로까지 결정시킨 것은 산리즈카가 처음일 것이다."(157) 그러면 산리즈카의 흙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이 책 제목 자체가 '암흙'이다. 이 흙의 문제는 이 책이 투쟁을 바라볼 방법이다. 이 지역이 화산회로 만들어진 지역이기 때문에 옛날부터 농업용지가 아니라 천황가의 목장이었다. 이 땅이 좋은 흙으로 개조된 것은 농민들의 끊임없는 토양개량 덕분이었다. 이 토양개량 과정에서 화학비료도 많이 쓰였다. 바꾸어 말하면 개척자들의 분투한 것은 이 좋지 않은 화산회와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산리즈카가 좋은 농지가 될 수 있던 것은 끊임없이 인간들이 고투를 계속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화학비료의 대량공급이 가능해진 일본 전후 경제 성장이었다. 개척농민의 생활은 산리즈카의 풍경에 남아 있다. 바람을 막는 방풍림, 이는 개척농가가 외부 사람을 막아내는 거절처럼 기능한다(62). 이러한 의미로 전후 개척은 '마을'공동체가 되기 전에 파괴된 것이다. 농민들의 집이 파괴된 후 전신주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진 마을은 "마치 개척의 최초로 돌아간 것 같"은 풍경이 되었다(146).


저자는 개척자들의 '인간불신'을 읽어내었는데, 그 정신이 좋지 않은 토지를 좋은 토지로 만든 정신이었다고 말한다. 그것을 잘 보여준 말이 농민들이 말하는 "흙이 도망간다"는 말이다(67). 항상 풀을 뽑고 흙을 붙잡아야 한다. 그런데 공항 계획은 바로 이러한 개척 지역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농민들의 개척은 과정에 있으며 끝나지 않았는데, 그것을 국가는 빼앗으려 했다. 그들에게 채소란 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밭에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자연을 사랑하는 등의 종류가 아니라 자연을 개조하는 것이 그들의 의식이다.


공항 계획 이후 반대파이던 농민들이 조건파로 '전향'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나타난다. 이때 가상적으로 '자족'이나 '마을'의식이 만들어진다. 이는 바뀌어 가는 농민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농민들의 분열상황을 일상생활에서 떠맡아야 했던 것은 여성들이었다(100). 그러면서도 농민들이 인간관계를 만들어나가는 방법은 '사상'이나 '믿음'에 두지 않다는 것은 외부자로서의 저자에게 놀라운 부분이다


"서로 100%가 아니라 서로 결락한 부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서로 결락하기 때문에, 서로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관계를 계속하자는 마음이 남는 것이다"(116). 이 말은 공동성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라는 우리가 항상 가지는 과제와 연결된다. 이러한 마을의 사상을 어떻게 육박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러한 사상은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투쟁 과정에서 다시 옛 마을 전통에서 호출된 것이었다. 이러한 마을의 논리에서 움직이던 청년행동대는 국가에 대항하는 것을 상식으로 인식했다.


동시에 투쟁은 여성의 생활을 바꾸었다. 아무 권리가 허용되지 못했던 여성들에게 발언권이 부여되었다. 전투경찰(기동대)과 싸우는 과정은 젊은 남성과 싸운다는 의미를 가졌다. 어떤 의미에서 '외설'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말들이 그들에게서 많이 나온 것이다. 이는 동시대 페미니즘 운동과 아무 연결점이 없으면서도 관련된 것이었다.


산리즈카 투쟁에 많은 좌파 활동가들이 관여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산리즈카 투쟁이 농민운동의 색채를 강하게 띠게 되는 것은 좌파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이후의 일이었다(135). 이런 표현도 이와 관련된다. "농민은 농사 짖기에 돌아가면 흙이라는 불합리한 것과 격투하기 때문에, 합리적인 해석을 아무리 많이 해도 납득하지 않는다. 농민의 세계는 민주주의와 먼 세계인 것이다."(177.) 왜냐하면 농업이란 "식물을 관리하는 기술"(227)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세대론적 논의도 할 수 있다. 청년들은 공해가 보도되기 시작한 이후 미나마타 병을 일으킨 '질서'회사의 농약이 집에 있는 것을 발견하며 고민하는데, 부모 세대는 화학비료에 대한 신화를 가지고 있다. 부모 세대에게 그것은 '노동에서의 해방'을 의미했다. 이렇듯 화학비료는 실감을 수반한 신화인 것이다. 이 역시 그들의 투쟁의 논리가 어디에 있었는지 보여준 사례이다.

 

 

3. 민주주의가 아닌 세계

 

청년행동대는 나리타 용수문제에서 절대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이는 어중간함이었는데, 이 어중간함이 있었기에 ''의 사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240). 이 어중간함은 '지원'하러 온 학생운동 조직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어떤 논의를 할 때에도 중요한 실마리를 줄 것이다. 절대적 반대를 말하는 절대적 당사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지원/당사자 관계를 절대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사자 의식이 주인공의식으로 올라갔을 때, '절대치'가 생긴다(237). 절대의 등장, 어떤 의미에서의 신의 등장, "우리는 주인공인데 왜 우리 말을 안들어."(237) 이러한 권위주의 탄생(260)의 지적을 외부자가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저자는 사후적이지만 그것을 썼다. 어떤 사안에 대한 반대를 결정하면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어지는데, 그런데 고민과 고투 가운데에서 사상은 생기며, 그것이 훨씬 사상적이라는 것도 저자의 주장이다(280). 그 사안을 어떠한 농업적인 전망을 가질 것이었는지, 그 점에서부터 논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적 논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적 논의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지원으로 온 학생 운동단체였다. 그들은 산리즈카에서 대립하는 그룹이 지원하는 농민의 밭을 밤에 공격했다. 옥수수를 다 무너트린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아무리 대립적인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농민이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립관계에 가슴을 아파하는 농민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대립관계를 이유로 당당하게 상대방을 공격하는 자가 있는 것이다. 후자들은 대립하면서도 함께 농협 여행을 즐기는 농민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지원자들이 알 수 없었던 것이 '마을'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마을은 반() 권력이 될 수도 있고 권력을 환영할 수도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전경들과 싸울 수 있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전경들에게 차를 따라준다. 이것을 선악이나 정의감으로 비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마을은 항상 마을의 존속만을 의도하며, 그것을 위해 무장하는 것도 무릅쓴 현재에 와서는 거의 보기 드문 집단인 것이다. 마을이 파괴될 때, 마을은 불가사의한 힘을 발휘한다. 투쟁이 시작하고 나서 마을은 '싸우는 공동체'로 변혁된 것이 아니다. 신좌파의 여러 당파는 그러한 이론을 전개했지만 그러한 사고방식은 진보파의 기대를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지 아니라 투쟁이 시작하고 나서 마을은 확실히 래디컬(근원적)으로 소급한 것이다. 오히려 보수 근원과 같은 곳에 회귀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거기에는 자유나 평등을 향한 특이하며 새로운 감각이 싹트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유동적이었으며, 정착하려 하지 않는 뜨거움에 넘치고 있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산리즈카의 미지의 매력에 끌렸을 것이다."(284-5)

 

이러한 지적은 중요하며, 청년행동대와 지원 학생단체의 차이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경찰 대응에서도 그랬었다. 체포당한 다음, 지원학생들은 완전 묵비를 관철한 경우가 많았는데, 청년행동대들은 경찰의 질문에 거의 모든 것을 이야기해 버렸다. 혁명을 지향할 활동가들에게 청년행동대는 '나약함'으로 보였던 것이다. 경찰한테 활동가가 묵비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며, 방법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는 내부적이며 전위조직적인 비밀을 가지는 운동을 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지금도 유용한 논의일 것이다. 비밀을 가지는 운동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완고한 조직체를 가져야 한다. ''이 그것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산리즈카 투쟁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그 의미는 강했을 것이다. 그런데 산리즈카 투쟁에서 농민들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어떨까? 이는 결코 '농민운동'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저자는 산리즈카의 반대 농민들의 각 파를 명료하게 표현했다. 이는 도식주의에 빠진 이해를 만들기 쉽기 때문에 구체적인 이름을 여기에서 쓰지 않도록 하겠지만 다음과 같은 것이다.

 

개척의 정신, 일신교, 일원론, 전후 헌법/민주주주의 파.

오래된 마을의 정신, 다원론 다신론, 헌법보다 마을의 룰, 비민주주의의 파(265).

 

저자는 후자에서 '농의 논리'가 나온다고 지적한다. 전자에 해당하는 개척자들에게는 자신의 토지를 담보해주는 것은 이웃 사람보다 국가였다. 국가와 집의 중간항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을이 아직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바로 개척농민들의 의식은 근대적 토지소유인 것이다. 그들은 '농민'이 아니라 '백성'이며, 그들이 가지는 것은 '토지'가 아니라 ''인 것이다(299). 산리즈카 투쟁의 흐름의 핵심을 '토지에서 흙으로'에서 찾은 저자의 시선이다. 토지는 교환가능하며, 계산 가능하다. 그런데 흙은 교환할 수 없으며, 계산이나 예측도 할 수 없다. 저자는 더욱 밀고나가 '민주주의파''채소인간'의 대립이라고까지 표현하기에 이른다(408).


80년대 산리즈카 투쟁에서 국가와 농민이 직접 이야기를 할 자리를 갖게 된 이후, 정부쪽 관료들 중 전공투 경험자가 많아졌다는 점 때문에 농민들과의 논의가 쉬워졌다는 지적도 있는데, 이러한 '민주주의'적인 방법만으로는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민주주의적 해법에 관해서는 산리즈카에 지원을 와서 현지 청년들과 결혼해서 거기에 정착한 여성활동가들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옛 농촌의 사람들과 여성해방운동을 겪은 여성들은 민주주의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지 않았다. 민주주의와 '농의 논리'라는 이중구조가 있던 것인데, 많은 사람들은 산리즈카 투쟁을 '민주주의'라는 말로 봉합해버린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투쟁은 종결할 수 있다. 싸우는 논리는 민주주의에서는 국가와의 대화에서 승화된다. 그런데 '채소인간'들은 그렇지 않는 것이다(435).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공시적인 문제밖에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439). 이에 반에 ''의 사상은 통시적이다. 산리즈카가 도달하려던 것은 '전후 민주주의'적이지 않은 자아였다.

 

4. 유기 농업으로

 

백성들이 향한 것이 투쟁과 생산의 양립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화학비료보다 값싼 유기비료 만들기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백성으로 살면서 투쟁한다는 것이다. 산리즈카에서 유기농업을 시작한 계기는 환경사상보다도 이러한 면에서였다. 그리고 산리즈카가 만든 농업시스템 중에 산지 직송 시스템이 있는데, 이것도 체포당한 농민의 지원이라는 측면에서 시작한 것이다. 산리즈카의 흙의 사상을 심화시킨 '흙만들기''투쟁만들기'와 함께 가는 것이었다. 투쟁하는 자끼리의 공동성을 모색하는 것이었다(315).


거기에서 등장한 것이 '원 팩 운동'이다. 산리즈카 채소를 일본 각지에 보내는 시스템이 구축된 것이다. 소비자는 박스 안에 들어갈 채소를 선택할 수 없다. 무조건 산리즈카에서 나온 채소를 매 달 한 박스씩 받아(분량은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을 먹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 박스의 채소로 도시 구매자의 생활은 일부분 산리즈카에 지배되는 것이다. 게다가 번거롭지만 맛난 것을 먹는다는 형식으로 산리즈카에서 나온 채소를 먹는 것은 하나의 운동이 된 것이다.


필자(이 글을 쓰는 사람) 역시 친구가 구매하고 있던 산리즈카 채소를 매달 먹었다. 한 달 한 번씩 배달되는 채소는 무엇이 들어 있을지 모른다. 배달될 날에 친구들끼리 모여서 요리하고 먹고(술도 먹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 이야기를 한다. 같이 설거지를 하고 다시 논의하고(...) 하는 식으로 '산리즈카 채소 모임'이라는 것을 한 달에 한 번씩 가졌다. 몇몇으로 나누어서 먹으면 한 사람 당 비용도 적게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명이 모여서 한 꺼번에 먹기 때문에 채소가 상하기 전에 다 먹을 수 있다. 필자는 간사이 지방에서 자랐기 때문에 생활 속에서 나리타 공항이나 산리즈카에 대한 지식은 거의 접하지 못했는데, 이러한 모임을 통해 차차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박스에 들어간 채소는 먹어본 적 없는 것도 많았고, 한마디로 맛있었다. 그런데 3.12 사건 이후 그 채소 구매를 그만둔 사람도 많이 생겼다. 3.12 이후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했다시피 여기에서 논의하지 않겠다.


어쨌든지 '유기농업'으로 가는 길은 이러한 것이었다. 그런데 저자가 지적하는 것은 '유기농업'은 결코 새롭게 발견된 것이 아니라 메이지 시대 농업으로 '회귀'하는 것이며, 당시 노인들의 눈에서 보면 '복고'였던 것이다(343). 농약을 쓰는 근대농법이 넘어서버린 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사고였다. 그리고 산리즈카에서 농업의 중심이 밭이었다는 점에서 보아도 일본적인 ''농업과는 별개의 마을 별개의 농적(農的)인 세계가 만들어질 가능성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는 결코 '민주주의'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즉 보수 본류의 투쟁에서 나온 것이었다.

 

5. 나가며

 

매우 난삽한 글이 된 듯하다. 오랜만에 이 책을 보면서 다양한 생각이 났다. 그런데 괜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쓰기보다 이 책이 보여준 사상과 역사, 그리고 투쟁의 방법들을 쓴 것은 우리 삶을 보다 즐겁게 만들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Posted by awh

<이웃집에 탈주병이 있던 시대>

となりに脱走兵がいた - ジャテックある市民運動記録를 통해 보는 어떤 반전 운동

 

가게모토 츠요

 





[아무도 번역 안 해줄 거잖아!]_연재를 시작하며.-한국에서 소개되지 못할 것 같은 일본의 운동에 관한 책들을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수많은 일본 책들이 번역된다. 이것은 좋은 일이다. 일본에서는 한국 책이 별로 번역되지 않는다. 한국에 관련된 역사책이나 사회학 책은 번역되지만 한국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철학책 등은 아예 번역되지 못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비해서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는 상당히 많은 일본 책이 소개되어왔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일본어 책을 보지 않아도 충분히 일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현대사상이나 애니메이션, 문학 등은 일본어를 몰라도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되지 못할 것 같은 매우 중요한 일본 책들이 있다. 그것은 아마 시장논리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역설적인 말인데 그런 책이야 말로 중요하다. 잘 팔리지 않은 책은 발행부수가 적은 만큼 독자에 대한 필자의 책임이 커진다. 잘 팔리는 글쓴이는 누군지 모르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글을 쓰지만 단 한 명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연애 편지와 비교하면 어느 쪽이 글쓴이의 힘이 보다 많이 담겨져 있을까? 거칠게 말하면 발행부수가 적을수록 그 책은 연애편지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필자의 책임감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잘 팔리지 않는 책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핵심을 잡을 수 있다. 일본에서도 잘 팔리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소개되지 않는,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책들을 소개해 보고 싶다는 것이 내 마음이다. 잘 팔리는 책이 가질 수 없는 운명적 만남을 통해서.

 

1. <이웃집에 탈주병이 있던 시대>

이번 글에서 소개하고 싶은 책은 다음과 같다.

 

세키야 시게루, 사카모토 요시에 편, <이웃집의 탈주병이 있던 시대 쟈텍, 어떤 시민운동의 기록>, 사상의 과학사, 1998. (644) (となりに脱走兵がいた時代 - ジャテックある市民運動記録) 

 

 

이 책은 쟈텍(JATEC)이라는 운동의 기록이다. 쟈택이란 Japan Technical Committee의 약칭이다. 무엇을 했던 운동인가? 바로 베트남 전쟁에서 탈주한 미군 병사를 보호하며 제3국에 탈주시킨 운동이다. 쟈텍에 의해 제3국으로 탈출한 어떤 병사의 수기는 일본을 떠나는 순간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결정된 출발의 날, 나는 공항의 모든 곳을 어떤 문제도 없이 통과했습니다. 불안을 안고 출발 게이트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드디어 내 비행기 넘버가 불렸습니다. 밖으로 나와 비행기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기내에 들어가기 전에 계단을 올라가 멈추었습니다. 뒤돌아보아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무사히 기내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려고 온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어쩐지 거기 있는 사람 모두가 나의 안전한 여행을 빌며 손을 흔들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리에 앉아 마지막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를 위한 미리 알려진 지시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기장을 불러달라고 말하며, 정치 망명을 요구하며, 기내에서 나가기를 거부한다는 것. 비행기 내는 기술적으로는 프랑스 영토로 인정되어 기장에게는 마음만 있으면 망명을 허락할 권장이 있다고 합니다. 엔진이 파워를 내며, 비행기는 이륙의 장소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하며 지상에서 올라가면서 나의 마음도 비행기와 같이 뛰어 올라갔습니다. 새로운 인생을 위해, 새로운 출발을 위해, 떠난 것입니다."(370)

 

미군은 베트남 전쟁 때 일본의 기지에서 휴가를 보냈는데, 병사들은 다양한 이유로 전쟁터에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으나 비정치적 이유도 있었다. 자텍은 어떤 이유든 탈주의 의사가 있는 병사를 보호했다. 물론 부대복귀를 시켜서 부대 내부에서 반전운동을 하는 것을 권장할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탈주와 망명의 의사를 표시하면 실제로 탈주를 시키도록 노력한 것이다. 그런데 병사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매우 문제를 일으킨 병사들도 있었다. 이 운동은 전쟁터에서 베트남인을 직접 죽이고 온 병사들을 바로 자기 집에서 비밀로 보호하면서 같이 지내던 일반 사람의 존재 없이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러한 기록집이기 때문에 탈주한 병사에 배신당하고 화를 낸 기억이나, 돈 문제로 탈주 병사로 싸운 이야기 등도 나온다. 어쨌든 어제까지 전장에서 사람을 죽이거나 해온 병사들과 함께 지낸다는 실천을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이 실제로 했다는 일은 놀라운 것이다. "탈주병들은 일본 가정의 냉장고의 내부를 알게 된 최초의 외국인"(492)인 셈이다.

 

이 책이 98년에 나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쟈텍의 운동에 관여한 사람들은 긴 시간이 흘러서야 자기 운동 경험을 공공연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98년의 시점에도 아직 밝힐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논의를 하면서 추후 봉인을 풀기로 한다고 한다.(495).


2. 법의 문제

 

베트남 전쟁 시기 일본에는 일본군 병사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그들의 상식에서 보면 탈주는 매우 큰 죄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미·일 안보조약에 인한 미군의 지위협정에서 미군 병사는 입국에 관해서 일본법의 적응 대상 외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이 탈주 운동을 지원하는 것 자체는 불법이 아니었다. 그리고 탈주병사들에게 전쟁에 되도록 참여하지 않기 위한 권리를 알리는 상담활동도 쟈텍이 수행한 중요한 운동 중 하나였다. 쟈텍이 병사들에게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를 알림으로, 그들이 제대를 신고하거나 부대 내부에서의 합법적 대항운동을 하는 것을 권장하기도 했다. 활동가들이 미군 내의 법을 배우면서 일본군의 군율과 매우 다른 부분이 많아서 놀랐다고 한다.

 

그런데 법과 관련해서 말하면 일본정부는 절대로 그들의 망명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병사들은 일본의 평화헌법을 알고 있었으며, 일본에서 살겠다는 의사를 제시한 경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백인, 흑인 병사와 함께 한국계 미국인 역시 탈주했다는 것은 지적해두어야 한다. 어떤 이는 한국전쟁 고아로 양자를 가서 미국에서 잘았다. 그는 전쟁에 나가며 일본에서 탈주했다. 그는 일본공산당, 조선총련, 쿠바대사관을 거쳐 쟈텍에 접속했다. 그는 무사히 유럽으로 출국했다. 탈주병 가운데에서는 한국군 병사도 있었다. 그는 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건너갔는데, 그가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오다 마코토(小田実)라는 작가이자 당시 쟈텍의 활동에 관여하던 사람이 76년에 김일성을 만났을 때 김일성은 그 인물을 모른다고 했으며, 나중에 그런 사실은 없다는 답이 왔다고 한다.

 

어쨌든 이 운동은 소련이나 중국과 같은 나라의 대사관도 관여하기는 했는데, 결국 그런 국가들은 쟈텍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쟈텍은 정말 시민운동으로 이루어진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간첩과 조직의 문제

 

이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간첩에 대한 대응 방식이다.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일이지만 미군은 쟈텍에 대해서 대응했다. 쟈텍은 제1차와 제2차로 나누어진다. 그 이유는 간첩 때문에 한 번 조직을 청산했기 때문이다. 쟈텍은 간첩을 그대로 받아 들었다. 쟈텍은 간첩 찾기를 하는 일이 스스로의 운동을 부수는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간첩 찾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간첩이 들어오면 그냥 조직자체를 무너져 버리자는 쟈텍의 생각은 비밀조직으로서의 전위주의와 아예 정반대에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에 도달할 수 있던 까닭은 운동 내부에서의 간첩 찾기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힘든 역사적 운동 경험에서 배운 운동으로 쟈텍의 간첩 대응법이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파괴될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 운동, 이 조직론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시사를 줄 것이다. 당시 제1차 자텍에서 운동하던 구리하라 유키오(栗原幸夫)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글의 맺음말로 이 인용문을 대신하겠다.

 

"스파이 존슨에 대해서는 그 때부터 30년이 지난 지금도 자주 생각납니다. 다른 곳에서 말한 적이 있는데, 저는 그가 스파이였다는 것을 확신했었습니다. 그것을 츠르미 슌스케(鶴見俊輔)씨에게 말했을 때, 츠르미씨는 찌그러진 얼굴로 "동료 사이에서 그런 의심이 생기는 것은 운동이 무너질 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때의 그의 찌그러진 얼굴을 이 30년 동안 자주 생각나면서 왜 그랬을까? 하고 계속 생각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략) 최근 저는 겨우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츠르미씨는 옳았다는 것입니다. 1차 자텍은 스파이 존슨 때문에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령 우리가 스파이의 침입에 대해서 방어태세를 취하고 모든 탈주병과 협력자에 대해서 의혹의 눈을 가졌으면 탈주병 원조 운동은 붕괴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리고 지금 이렇게 운동 경험자가 가볍게 그 무렵의 기억을 이야기한다는 상황도 없었을 것입니다. 파괴될 것을 무서워 할 필요는 없다, 그것보다 비밀이 없는 열린 운동을 소중하게 싶다는 것이 지금 나의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조직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우리를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특별한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일종의 전위주의입니다(예전의 저에게는 다분히 그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렇지 아니라 누구든지 교체할 수 있는 운동이야말로 필요합니다. 실제로 쟈텍은 그러한 운동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103)


Posted by aw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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