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보다 환상적인 포 읽기

-끝까지 가본 인간 정신의 다채로움

   

                                                                                  

 

         이봉순(수유너머 문학세미나 회원)

 

 

  에드거 앨런 포(1809~1849)는 광기와 우울로 대변되는 그의 명성 때문에 잘 알려져 있는 아는작가임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천재적인 문학가로서의 위상과 진면목을 모르고 있는 작가가 아닐까 싶다. 검은 고양이애너벨 리로 회자되는 포를 모르는 사람은 흔치 않겠지만 그의 문학세계의 깊이와 다채로움을 조금이나마 제대로 엿본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수유너머104 문학세미나를 통해 그의 시선집을 비롯하여 단편전집 우울과 몽상을 세미나원들과 함께 읽기 전의 나도 마찬가지였다. 포에 대한 진지한 관심은 세미나 반장님이기도 한 송승환 시인이 작년 여름에 다른 삶은 있는가라는 이름으로 진행했던 문학강좌를 통해서였다. 일련의 강좌 중 그의 대표시 갈가마귀를 함께 읽으면서 음미하고 또 그의 시작법에 대한 글을 분석했던 시간을 통해 세미나원들 중심으로 포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보자는 의견이 모아졌다. 19~20세기 초 프랑스 극작가의 대표 작품들을 읽으면서 시작된 문학세미나의 한 정점이 보들레르가 내가 쓰고 싶었던 모든 것들이 여기에 있다고 한 포의 소설전집과 시선을 읽으면서 맞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는 미지-거기로 향하는 언어의 모험, 전위적 상상력의 언어, 외부와 바깥의 언어, 다른 삶의 가능성을 탐문해온 문학 작품을 매주 함께 읽고 토론합니다. “다른 삶들은 있는가라는 아르튀르 랭보의 문장을 오늘의 물음으로 되새기면서 지금-여기전체의 바깥으로 나아가는 삶과 언어의 모험을 실천하고자 합니다...”

 

  1년 전 521일 문학세미나를 시작하는 글을 새삼 읽어보며 지난 1년간 현대극의 효시가 된 희곡들, 포의 소설과 시, 페소아의 산문과 시,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를 거쳐 본격적인 초현실주의를 탐색하는 시즌을 시작하기까지 뒤돌아보면 포만큼 미지-거기로 향하는 언어, 전위적 상상력의 언어, 다른 삶의 가능성을 끝까지 누구보다도 다양한 형식과 실험을 통해 탐색한 작가가 있을까 싶다. 그리고 그의 글들이 영감과 천재로만 쓰여진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계산된 의도와 효과 그리고 이론을 바탕으로 치열한 노력 끝에 완성된 세계라는 점에 경탄하게 된다. 포는 짧은 미국문학의 전통에서 전무후무한 존재가 아니었나 싶다. 생전에 상당한 명성을 얻긴 했지만, 오히려 프랑스에서 먼저 인정받고(그의 기발한 상상력과 감성, 주도면밀하게 계산된 시어의 선택과 구성, 시작법은 프랑스 상징주의 시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사후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현대문학과 미술, 철학 곳곳에 영감을 주었다. 나도 포의 작품을 읽으면서 여러 지점에서 포의 그림자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과 작가를 다시 만나 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포의 단편소설 아른하임의 영토가 데려가는 상상의 지점은 초현실주의 미술작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아른하임의 영토가 자아내는 시적, 환상적 공간이 주는 암시와 서로 맞닿아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천일야화의 천두번째 이야기를 읽으면서 현대문학의 거장 보르헤스의 환상적인 글쓰기가 포에 빚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의 불명확함, 과학적 설명처럼 세밀한 각주를 사용하여 사실이 아닌 것을 믿도록 만들기, 책 속의 책, 이야기 속의 이야기를 체험하게 하는 소설적 기법이 이미 포의 단편에서 시도되었다. 그런가 하면 오스카 와일드의 유미주의 문학관과 상통하는 아름답지만 기이하고 몽상적인 것에 대한 포의 집착은 엘레노오라, 베레니스, 리지아등의 단편들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포가 오스카 와일드(1854~1900)보다 앞선 세대라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오스카 와일드가 포의 작품들을 읽고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예술을 위한 예술, 아름다움에 대한 경이의 태도 등이 앞선 세대 포에서 진지하게 구현되고 있었다.

  포가 짧은 생애동안 쓴 단편소설의 소재와 형식은 다양한데, 19세기 과학기술의 발전에 영향을 받은 열기구를 소재로 한 이야기 열기구 보고서, 열기구 종달새 호에 탑승하여 284841에서 포가 독특한 상상력으로 펼쳐 보이는 철학에 대한 지식과 이해, 우주와 미래문명, 과학적 지식을 다루는 글쓰기는 지구 혹은 지상이 아닌 다른 곳, 다른 삶에 대한 관심과 열망의 표현으로 읽혀졌다. 그리고 싱거 밥 귀하의 문학인생-고인이 된 한 편집자의 육필원고, X투성이의 글, 블랙우드식 기사 작법등에서는 포의 언어에 대한 위트 있는 감각과 허를 찌르는 풍자를 잘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현대 추리문학의 원형인 모르그 가의 살인, 도둑 맞은 편지, 군중 속의 남자, 황금 곤충등은 지금 읽어도 그 상상력의 치밀함과 세련된 구성에 감탄하게 된다. 특히, 도둑맞은 편지는 라캉, 들뢰즈 같은 현대 철학자들의 존재와 비존재, 의미와 무의미,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철학적 사유에서 인용되고 영감의 원천이 된 작품이기도 하다.

  포의 흑백 초상사진을 본다. 우수한 교육을 받아 영민했고 감수성이 예민했으며 학창시절에는 다방면에서 최고의 재능을 보여준 학생이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문학적 성취 속에서 정신착란과 알코올 중독으로 고통받았으며 요절한 어린 아내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을 문학적으로 보여주었지만 살아 생전 많은 염문을 뿌리기도 한 우울한 눈빛의 한 남자가 어떻게 그 짧은 생애동안 그토록 뛰어난 시와 소설을 썼는가 생각해본다. 그의 존재와 삶 자체가 그로테스크하고 아라베스크하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나에게 문학은 현실도피였다. 그것이 소극적, 퇴행적 태도일 수 있지만 현실의 일상에서는 가질 수 없는 아름답고 고양된 감정, 우울하지만 달콤하기도 한 다른 삶을 바라보게 하는 현실도피였는데, 포의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오랜만에 문학읽기가 주는 아름다운 현실도피 속에 충분히 즐거웠다. 기술을 이용하여 생생한 가상현실을 체험할 수 있고 애니메이션이 실사보다도 더 현실적인 장면장면 묘사로 우리의 눈길을 매료시키는 요즘에도 포의 문학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은 독서의 경험을 통해서 즉 글로서만 가볼 수 있는 환상과 이상의 세계, 미지의 세계이자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현실도피의 세계였다. 그곳에서 다른 삶을 꿈꿀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혹은 그럴 수 있기를.

 

  다양한 문학적 형식으로 글쓰시를 하면서 결국 포는 보이는 것 너머의 현실, 우리 인간 내면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 혹은 다르게 보기를 시도했다. 프랑스 상징주의자, 초현실주의자, 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영감의 원천이 된 포의 단편들과 그의 시작법 태도는 1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매력적이고 유효한 도전을 주는 것 같다. 언젠가 다시 한번 이 두꺼운 소설집의 첫 장을 펼칠 때 또 어떤 태도로 읽을지 또 읽히게 될지 궁금하다.

 

 

 

 

Posted by 수유너머104

입속의 검은 잎 시집 읽기

 

 

 

                                                                          나무(기형도 기획세미나 회원)

 

 

 

지금까지 우리는 4차례에 걸쳐 기형도의 미발표작 시들과 산문을 읽었다. 어찌보면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을 읽기 위한 준비 단계로 근육을 키워오는 시간이 아니었나 싶다. 지난 세미나에서는 1부의 시들 일부를 읽었다. 3시간 꼬박 열띤 논의를 걸쳐 살펴본 시들은 시집에 나열된 순서대로 보자면 이렇다. <어느 푸른 저녁>, <오후 4시의 희망>, <장미빛 인생>,<여행자>,<추억에 대한 경멸>,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물 속의 사막>, <정거장에서의 충고>,<진눈깨비>,<그날>. 그러나 우리는 어떤 우발을 기점으로 우리만의 리듬을 이끌어내며 세미나를 진행하기 때문에 실제 논의된 순서는 이와는 다르다.

튜터님이 회원들에게 어떤 작품을 인상적으로 읽었냐는 물음에 한 분이 <그날>이 인상적이었는데, 분위기가 독특하다고 운을 띄웠다. 여기에 촉발되어 우리의 논의는 종횡무진 롤러코스트를 타듯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제부터의 서술은 회원님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글쓴이 나름대로 소화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품 분석을 시도한 것으로써 다분히 주관적인 견해가 강하게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그날> ;인생의 비애 】

 

 

여기 “전날” “직장과 헤어”진 “백발”의 “은퇴한 노인”이 자신의 “넋”을 챙겨 기나긴 여행을 떠나려 한다. (“그의 트렁크가 가장 먼저 접수한 것은 김의 넋이다.”) 그의 지난 삶은 권태에 짓눌린 날들이었다.(“어떠한 권태도 더 이상 내 혀를 지배하면 안된다.”) 그의 마음 속 소지품의 내용물은 “비로소 나는 풀려나간다”는 자유에 대한 기대와 “마침내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는 삶의 중심으로서의 자아에 대한 벅찬 희망과 설렘이다. “내 생의 주도권은 이제 마음에서 육체로 넘어갔”으니 이제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것이다. 마침내 그는 짐을 다 꾸려 “텅텅 울리”(불길함의 전조)는 낭하(복도)를 지나 현관문 앞에 손잡이를 붙들고 빗방울이 떨어지는 거리를 무심하게 바라본다. 그렇다면 그의 최후의 발걸음은 안녕하신가? 세상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그는 “쇠뭉치 같은 트렁크”에 걸려 혹은 기력이 부친 나머지 나자빠지고 만다. 그때 “계집아이 같은 가늘은 울음 소리가 터”지고(<여행자>에서의 낡아빠진 구두에 쑤셔박힌 , 길쭉하고 가늘은 다리”가 오버랩되는 순간.) 빗방울이 백발 위로 떨어진다. 이 “빗방울”의 다른 이름은 또 다른 생에 대한 축복의 고무鼓舞가 아니라 눈물 또는 슬픔인 것이다. 이 시는 삶의 아이러니로서의 인생의 비애가 느껴진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몸과 영혼을 담보로 자본의 굴레에 속박되어 은퇴한 이후의 자유로운 삶을 꿈꾸고 있지 않은가. 카르페 디엠(Carpe diem)!

 

 


그 날

 

 

어둑어둑한 여름날 아침 낡은 창문 틈새로 빗방울이 들이친다. 어두운 방 한복판에서 金은 짐을 싸고 있다. 그의 트렁크가 가장 먼저 접수한 것은 김의 넋이다. 창문 밖에는 엿보는 자 없다. 마침내 전날 김은 직장과 헤어졌다. 잠시 동안 김은 무표정하게 침대를 바라본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침대는 말이 없다. 비로소 나는 풀려나간다, 김은 자신에게 속삭인다, 마침내 세상의 중심이 되었다.

나를 끌고 다녔던 몇 개의 길을 나는 영원히 추방한다. 내 생의 주도권은 이제 마음에서 육체로 넘어갔으니 지금부터 나는 길고도 오랜 여행을 떠날 것이다. 내가 지나치는 거리마다 낯선 기쁨과 전율은 가득 차리니 어떠한 권태도 더 이상 내 혀를 지배하면 안된다.

모든 의심을 짐을 꾸리면서 김은 거둔다. 어둑어둑한 여름날 아침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젖은 길은 침대처럼 고요하다. 마침내 낭하가 텅텅 울리면서 문이 열린다. 잠시 동안 김은 무표정하게 거리를 바라본다. 김은 천천히 손잡이를 놓는다. 마침내 희망과 걸음이 동시에 떨어진다. 그 순간, 쇠뭉치 같은 트렁크가 김을 쓰러뜨린다. 그곳에서 계집아이 같은 가늘은 울음 소리가 터진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빗방울은 은퇴한 노인의 백발 위로 들이친다.

 

 

기형도의 어떤 시편들은 마치 영화나 소설 속의 인상적인 장면을 따와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에 자신의 감정을 투사하여 극화시켜 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다. <그날>이 그렇거니와 <장미빛 인생>과 <추억에 대한 경멸> 또한 마찬가지다.

 

 

 

【<장미빛 인생>;“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장미빛 인생>은 누아르 필름의 한 장면을 연상케하는 측면(시 제목도 또한 그렇다)이 있는데, 전체적인 분위기는 다소 희극적이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은 “분명 우두머리를 꿈꾸었을” 어깨 세계의 만년 2인자 내지 똘마니 쯤 되는 듯한 반백의 덩치다. “그는 건강하고 탐욕스러운 두 손으로/ 우스꽝스럽게도 작은 컵을 움켜쥔다.“는 대목에서 시적 화자의 농기弄氣가 드러나고, 평생 보스 밑에서 눈치나 살피며 기죽어 지낸 그의 곤고한 삶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얼굴 위를 걸어다니는 저 표정”에서 엿보인다. 그가 결국 “두툼한 외투 속에서” 꺼내든 것은 건달들의 필수품인 송곳이나 주머니 칼(“그것으로”, “무엇인가”의 정체)로, 탁자를 파내며 새긴 구절은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라는 말이다. 이 행은 한 연을 이루고 있거니와 상당히 중의적으로 읽힌다. 무슨 거사를 도모하려는 듯한 사내의 신중한 몸가짐과(“건장한 덩치를 굽힌 채, 느릿느릿/ 그러나 허겁지겁, 스스로의 명령에 힘을 넣어가며”)는 달리 한갓 ‘낙서행위’였다는 측면에서 희극적인 요소를 더욱 강조한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말의 함량을 생각할 때 어떤 처절함을 뿌리치기는 힘들다. 허황된 꿈을 꾸는 어깨 세계의 똘마니를 통해 우리네 욕망의 허망함을 그렸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장미빛 인생’이라는 제목을 나는 그렇게 읽고 싶다. (참고로 에디트 피아프의 <장밋빛 인생 [La Vie En Rose]>은 사랑에 대한 찬가다.

 

 

 

장미빛 인생

 


문을 열고 사내가 들어온다

모자를 벗자 그의 남루한 외투처럼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카락이 드러난다.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넣고

그는 건강하고 탐욕스러운 두 손으로

우스꽝스럽게도 작은 컵을 움켜쥔다.

단 한번이라도 저 커다란 손으로 그는

그럴듯한 상대의 목덜미를 쥐어본 적이 있었을까

사내는 말이 없다, 그는 함부로 자신의 시선을 사용하지 않는 대신

한 곳을 향해 그 어떤 체험들을 착취하고 있다.

숱한 사건들의 매듭을 풀기 위해, 얼마나 가혹한 많은 방문객들을

저 시선은 노려보았을까, 여러 차례 거듭되는

의혹과 유혹을 맛본 자들의 그것처럼

그 어떤 육체의 무질서도 단호히 거부하는 어깨

어찌 보면 그 어떤 질투심에 스스로 감격하는 듯한 입술

분명 우두머리를 꿈꾸었을, 머리카락에 가리워진 귀

그러나 누가 감히 저 사내의 책임을 뒤집어쓰랴

사내는 여전히 말이 없다, 비로소 생각났다는 듯이

그는 두툼한 외투 속에서 무엇인가 끄집어낸다

고독의 완강한 저항을 뿌리치며, 어떤 대결도 각오하겠다는 듯이

사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얼굴 위를 걸어다니는 저 표정

삐걱이는 나무의자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밀어넣고

사내는 그것으로 탁자 위를 파내기 시작한다

건장한 덩치를 굽힌 채, 느릿느릿

그러나 허겁지겁, 스스로의 명령에 힘을 넣어가며

 

나는 인생을 증오한다

 

 

 

 

 

【<추억에 대한 경멸>; ‘추억은 노인에게나 어울린다’】

 

 

<추억에 대한 경멸>은 한 인간의 소외와 고독을 실감나게 포착하고 있다. 혼자 사는 듯한 사내는 손님과 유쾌한 하루를 보내고 겨울 어슴푸레한 저녁을 맞았다. 그러나 이는 자기기만이라는 사실이 곧 드러난다. “아아, 오늘은 유쾌한 하루였다, 자신의 나지막한 탄식에/ 사내는 걷잡을 수 없이 불쾌해진다”. 자신의 실토(“탄식”)로 보아 “유쾌”는 “불쾌”라는 감정을 더욱 부추겨줄 뿐이다. 이후는 사내의 소외의 공간과 몸부림치는 고독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불을 켜려고 방 안을 가로질러가야 하는데, 그는 “방이 너무 크다”고 중얼거린다. 실제 방은 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게으른 사내”이자 외로운 인간이기 때문이다.

 

“방이 너무 크다/ 왜냐하면, 하고 중얼거린다, 나에게도 추억거리는 많다.”

 

이 구절은 단어 배열이 통상적이지 않은데, 리듬을 고려한 것 같다.(원래의 구조는 ‘방이 너무 크다,고 중얼거린다. 왜냐하면, 나에게도 추억거리는 많다(많으니까)’가 되어야 한다.) 시인은 “왜냐하면, 하고”라는 도치 형태를 통해 교묘하게 리듬을 살려내고 있다. 그는 드디어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진첩을 꺼내 추억을 뒤적거린다. 그러나 문득 혼자 견뎌야 할 “책임질 밤과 대낮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여인숙”이란 단어가 그의 외로운 처지를 부추겨주고, “모자라도 뒤집어쓸까”라는 문장이 그의 권태를 교묘하게 함축하고 있다. 그는 마침내 “내가 차라리 늙은이였다면!”하고 탄식하며 “사진첩을 내동댕이친다.”

 

마지막 행에서 사내의 몸부림치는 고독(“독한 술”로 위안을 삼으려는)은 역동적(“헐떡이는”)으로 묘사된다. “손아귀에서 몸부림치는 작은 고양이,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독한 술을 쏟아붓는, 저 헐떡이는, 사내”. 아, 이렇게 써 놓고 다시 읽어보니 이 구절을 “모자라도 뒤집어쓸까”하고 변화를 갈구하는 사내의 엽기적인 행위로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그게 더 적절하다고나 할까. 날카로운 이빨의 주인공은 고양이이고 사내는 고양이의 야생성과 독립심에 질투가 뻗쳐 그놈의 입에 술을 들이붓고 있는 것이다, “헐떡이며”. 마침내 고독은 엽기적인 폭력으로 완성되었다고나 할까.

 

‘추억은 노인에게나 어울린다’고 나는 쓰고 싶다.(<입속의 검은 잎>에 나오는 “침묵은 하인에 어울린다”의 패러디.) 왜냐면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현재는 이미 지나 갔으니 젊은이에게는 항상 미래의 시간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 속의 젊은 사내가 미래에 대한 전망이 꽉 막힌 노인처럼 과거의 추억거리를 반추反芻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다. 그래서 ‘추억에 대한 경멸’이다.

 

 


추억에 대한 경멸

 

 

손님이 돌아멸가자 그는 마침내 혼자가 되었다.

어슴푸레한 겨울 저녁, 집 밖을 찬바람이 떠다닌다.

유리창의 얼음을 뜯어내다 말고, 사내는 주저앉는다.

아아, 오늘은 유쾌한 하루였다, 자신의 나지막한 탄식에

사내는 걷잡을 수 없이 불쾌해진다, 저 성가신 고양이

그는 불을 켜기 위해 방안을 가로질러야 한다.

나무토막 같은 팔을 쳐들면서 사내는, 방이 너무 크다

왜냐하면, 하고 중얼거린다, 나에게도 추억거리는 많다.

아무도 내가 살아온 내용에 간섭하면 안된다.

몇 장의 사진을 들여다보던 사내가 한숨을 쉰다.

이건 여인숙과 다를 바 없구나, 모자라도 뒤집어쓸까

어쩌다가 이봐, 책임질 밤과 대낮들이 아직 얼마인가

사내는 머리를 끄덕인다, 가스레인지는 차갑게 식어 있다.

그렇다, 이런 밤은 저 게으른 사내에게 너무 가혹하다.

내가 차라리 늙은이였다면! 그는 사진첩을 내동댕이친다.

추억은 이상하게 중단된다, 그의 커다란 슬리퍼가 벗겨진다.

손아귀에서 몸부림치는 작은 고양이,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독한 술을 쏟아붓는, 저 헐떡이는, 사내

 

 

 

【 <정거장에서의 충고>; 만물지역려(萬物之逆旅)】

 

 

이 시는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는 고개를 약간 갸우뚱하게 하는 구절로 시작한다. “희망을 노래하”는데 왜 “미안하지”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 시에서는 ‘집’과 ‘길’과 ‘구름’ 이미지가 유독 눈길을 끈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것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이 ‘집’은 어머니의 자궁이 아닐까. 우리는 이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는 운명이며, ‘길들’위에서의 날들을 영위해야 하고 ‘구름’과 같이 떠돌고 나서야 다시 또 다른 우주라는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동안 의심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희망을 노래하련다”의 내용은 저 종결부의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에서 유추해 볼 수 있겠다. “불안의 짐짝들”은 한 개인의 고통과 불안을 말할 수도 있으나 인간의 생로병사 자체가 불안의 목록들이 아닌가. 한마디로 삶의 이면들인 것이다.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는 말에서는 절망이나 체념이 아닌 배포와 달관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나는 쓴다”라는 말에는 방점을 크게 찍을 일이다. 인간의 필연적인 죽음을 응시하면서 화자는 자신의 실존을 시인으로써 표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라는 마지막 행은 조로早老의 엄살 내지 위세나 겉늙은이 포즈가 아니라 이 생의 이치를 깨달은 자의 역설적인 어법으로 읽고 싶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태어나면서 이미 늙은 것이랄 수도 있겠다. 자신의 꼬리를 문 우로보로스처럼 처음과 끝이 이미 내 몸 안에 있으니.

제목에서 보이는 ‘정거장’의 의미는 이백(李白)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의 첫 문장, ‘만물지역려萬物之逆旅’를 떠올리게 한다.

“무릇 천지란 만물이 머무는 여관이요(夫天地者 萬物之逆旅)

광음은 백세의 나그네와 같다光陰者 百代之過客”

말난 김에 덧붙이자면 <죽은 구름>이라는 시편에 등장하는 구름도 역려逆旅(정거장)의 이미지와 흡사한 뉘앙스를 풍긴다. 행려자가 도시의 빈집에서 객사한 내용을 다룬 이 시는 더러운 창문에 머물다가 “저 홀로 흩어진 구름은/ 처음부터 창문의 것이 아니었으니”라는 말로 끝나고 있다.

 

 

 

정거장에서의 충고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

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

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 군데군데 쓰러져 있던

개들은 황혼이면 처량한 눈을 껌벅일 것이다

물방울은 손등 위를 굴러다닌다, 나는 기우뚱

망각을 본다, 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

그것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

추억이 덜 깬 개들은 내 딱딱한 손을 깨물 것이다

구름은 나부낀다, 얼마나 느린 속도로 사람들이 죽어갔는지

얼마나 많은 나뭇잎들이 그 좁고 어두운 입구로 들이닥쳤는지

내 노트는 알지 못한다, 그 동안 의심 많은 길들은

끝없이 갈라졌으니 혀는 흉기처럼 단단한다

물방울이여,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들어선 안 된다

주저앉으면 그뿐, 어떤 구름이 비가 되는지 알게 되리

그렇다면 나는 저녁의 정거장을 마음속에 옮겨놓는다

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물속의 사막>;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1부의 시들을 읽으면서 글쓴이가 주목한 시편은 <물속의 사막>이었다. 이미지 연상이 뛰어난데다 화자 ‘나’의 회상을 통한 심회가 돋보이며 시적 기교가 출중하다는 점에서다. 오밤중, 화자는 도시의 빌딩에 혼자 남아(당직 근무?) 창을 통해 퍼붓는 비를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첫 행에 “밤 세시, 길 밖으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의 비는 장마비인데, 그는 문득 유리창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의 형상에서 옥수수잎이 사르르 흔들리는 모습을 연상한다.(“유리창, 푸른 옥수수잎 흘러내린다”.) 이로 인해 “무정한 옥수수나무······”하고 무심결에 중얼거리게 되고, 이는 “그해” 장마에 대한 촉매가 되어 연상 작용에 추진력을 얻게 된다. 흰 개는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채 그 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집에 대한 연상은 고향 ‘비닐집’으로 이어지고 흙탕마다 무성했던 잎들(아마도 옥수수 잎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 창문에 아버지의 얼굴이 환영처럼 떠오른다. 아버지는 유리창에 잠시 붙어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고 말한다. 이어 아버지는 “빗줄기와 몸을 바”꿔 “우수수ㅡ”지워지는데, 이는 ‘옥수수’의 발음에 따른 유사 발음 이미지다. 그러고 나서 화자는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하고 아버지의 전철을 밟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를 표명한다. ‘아버지의 환영’과 더불어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를 연출하는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에 “와이셔츠 흰 빛은 터진다”는 이미지는 밤 도시의 차디 찬 빌딩의 삭막함을 보여준다.(더불어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의 이미지 또한 삭막한 도시 이미지가 섬뜩하게 드러나고 있다.)

 

‘물속의 사막’이라는 제목의 의미(사막 속의 오아시스가 아니라 물속의 사막이다!)는 첫 행의 “길 밖으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는 말에서 장마통에 도시의 환한 빌딩 안에 갇힌 모습에서 우선적으로 제시되는데, 놀라운 점은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 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는 마지막 행의 겹의 구조를 띤 사막의 이미지다. ‘집’은 ‘눈’으로 ‘물들’은 ‘눈물’로 치환하여 읽을 수 있겠는데, 메마른 도시의 삶속에서 눈물조차 말라버린 화자의 회한을 엿볼 수가 있다. 이는 역시 자신의 삶 또한 사막에 다름 아니다라는 전언을 담고 있는 것이리라.

 

 

 

물속의 사막

 

 

밤 세시, 길 밖으로 모두 흘러간다 나는 금지된다

장마비 빈 빌딩에 퍼붓는다

물 위를 읽을 수 없는 문장들이 지나가고

나는 더 이상 인기척을 내지 않는다

 

유리창, 푸른 옥수수잎 흘러내린다

무정한 옥수수나무······· 나는 천천히 발음해본다

석탄가루를 뒤집어쓴 흰 개는

그 해 장마통에 집을 버렸다

 

비닐집, 비에 잠겼던 흙탕마다

잎들은 각오한 듯 무성했지만

의심이 많은 자의 침묵은 아무것도 통과하지 못한다

밤 도시의 환한 빌딩은 차디차다

 

장마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 빛은 터진다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 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오후 4시의 희망>; ‘어리석은 시간’】

 

 

이 시는 글쓴이 나름으로 <잎 속의 검은 잎>과 더불어 문제작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이번 세미나는 기형도에 대한 다른 시각을 엿볼 수 있게 해준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자리를 빌어 회원님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통상 기형도의 시 세계를 ‘극단적인 비극적 세계관’이니 ‘도저한 부정성의 세계’로 치부들하고 있는 모양인데, 이 시를 통해 그러한 시각이 상당히 피상적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해본다.

 

 

“적어도 내게 있어 글을 쓰지 못하는 무기력이

육체에 대한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다.”

-<밤 눈>의 시작 메모

 

 


이 문제작은 우선 시적 화자, 다시 말해 인칭의 문제에서 기형도의 독특한 특성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는 시편이라 할 만하다. 이 시에는 ‘金’과 ‘나’와 ‘그’라는 등장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세 사람이 아니라 동일한 자아의 삼중 분열로 해석된다. ‘金’은 대상화된 또 다른 ‘나’의 자아이고, ‘그’ 또한 또 다른 자아이다. 이들 관계의 위상에 대한 정치한 분석은 차후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 이들이 동일인이라는 것만 지적하도록 하자.(이 부분에 대한 면밀한 분석은 금은돌 튜터님의『거울 밖으로 나온 기형도』라는 책에서 ‘흐르는 주체’ 개념을 참고하시길 바란다.) “김은 중얼거린다, 누군가 나를 망가뜨렸으면 좋겠네, 그는 중얼거린다.” “김은, 그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나는 블라인드를 튼튼히 내렸었다.” 각각 한 행으로 이루어진 이 시행들에 드러난 인칭의 배치를 통해 우리는 어렵지 않게 위의 지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첫 행에서 “金은 블라인드를 내린다”는 말이 나오는데, 여기 “나는 블라인드를 튼튼히 내렸었다”도 참고할 만하다.) 이러한 문제는 굳이 들뢰즈의 ‘되기’라는 용어를 빌리지 않고서라도 정신분열적인 요소라기보다는 ‘만인되기’라는 시적 장치로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이미 ‘만물되기’라는 시편도 읽은 적이 있지 않은가. <새벽이 오는 방법>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썩은 나무 등걸처럼 나는 쓰러진다. 바람이 살갗에 줄을 파고 지났다. 쿡쿡 가슴이 허물어지며 온몸에 푸른 노을이 떴다. 살이 갈라지더니 形體(형체)도 없이 부서진다.”

글쓴이는 이 시의 구조적인 측면에 대한 분석은 차치하고 주제적인 측면에서 그 의미를 천착해보자고 한다. 글쓴이는 처음에 어느 정도 선입견을 가지고 이 시의 의미를 부정적으로 해석했었다. 그러한 단서는 단적으로 “습관은 아교처럼 안전하다”라거나 “갑자기 그가 울음을 터뜨린다”,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결정적으로 “김은 얼굴이 이그러진다”는 부정적인 듯한 진술에 주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는 섣부른 판단이었다. “김은 약간 몸을 부스럭거린다”에서 의미심장한 긍정적인 기미가 엿보이고 “무너질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가”라는 역설적인 표현에서 생애 대한 애착이 느껴지고, 마침내 “또다시 어리석은 시간이 온다”에서 ‘어리석은 시간’을 <밤 눈>의 시작 메모를 참고해 볼 때 시쓰기를 통한 실존의 구체적인 확인의 시간으로 읽을 때 그의 “울음”과 “얼굴이 이그러지”는 희열의 순간을 묘사한 것이라 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여 ‘오후 4시의 희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의 푸른 노트에 쓰여 있던 알짜배기 ‘HOPE!' 참고로 기형도의 후배 기자의 표현을 빌리면, 시인은 하루의 근무를 마친 오후 4시에 신문사 빌딩에서 (이) 시를 썼다고 한다.

 

 

 

오후 4시의 희망

 

 

金은 블라인드를 내린다, 무엇인가

생각해야 한다, 나는 침묵이 두렵다

침묵은 그러나 얼마간 믿음직한 수표인가

내 나이를 지나간 사람들이 내게 그걸 가르쳤다.

김은 주저앉는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한번 꽂히면 어떤 건물도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김은 중얼거린다, 이곳에는 죽음도 살지 못한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것과 섞였다, 습관은 아교처럼 안전하다.

김은 비스듬히 몸을 기울여본다, 쏟아질 그 무엇이 남아있다는 듯이

그러나 물을 끝없이 갈아주어도 저 꽃은 죽고 말 것이다, 빵 껍데기처럼

김은 상체를 구부린다, 빵 부스러기처럼

내겐 얼마나 사건이 많았던가, 콘크리트처럼 나는 잘 참아왔다.

그러나 경험 따위는 자랑하지 말게 그가 텅텅 울린다, 여보게

놀라지 말게, 아까부터 줄곧 자네 뒤쪽에 앉아 있었네

김은 약간 몸을 부스럭거린다, 이봐, 우린 언제나

서류뭉치처럼 속에 나란히 붙어 있네, 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아주 얌전히 명함이나 타이프 용지처럼

햇빛 한 장이 들어온다, 김은 블라인드 쪽으로 다가간다.

그러나 가볍게 건드려도 모두 무너진다, 더 이상 무너지지 않으려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네

김은 그를 바라본다, 그는 김 쪽을 향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긴다, 무너질 것이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가

즐거운가, 과장을 즐긴다는 것은 얼마나 지루한가

김은 중얼거린다, 누군가 나를 망가뜨렸으면 좋겠네, 그는 중얼거린다.

나는 어디론가 나가게 될 것이다, 이 도시 어디서든

나는 당황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당황할 것이다.

그가 김을 바라본다, 김이 그를 바라본다.

한 번 꽃히면 김도, 어떤 생각도, 그도 이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한다.

김은, 그는 천천히 눈을 감는다, 나는 블라인드를 튼튼히 내렸었다.

또다시 어리석은 시간이 온다, 김은 갑자기 눈을 뜬다, 갑자기 그가 울음을 터뜨린다, 갑자기

모든 것이 엉망이다, 예정된 모든 무너짐은 얼마나 질서정연한가

김은 얼굴이 이그러진다

 

 

 

 

 

Posted by 수유너머104

 

 

악마와 리듬의 양상

Les Chants de Maldoror

 

                                                                                             (문학세미나 조원효)

 

 

1. 서문

 

한국 시의 리듬은 표준어(서울말)에 한정되어 있다. 최근의 문예지와 시집을 펼쳐보면 더욱 그렇다. 한글이 지닌 은유 - 환유 체계의 한계 때문일까. 부산 사투리나 대구 사투리로 시가 진행된다면 어떨까. 언어의 수사적 효과가 원활한 방식으로 독자에게 전달될까. 반대로말도로르의 노래와 같은 작품을 읽을 때 독자는 번역투의 불편함을 느끼는 동시에, 번역투가 갖는 억양(accent)에서 시적인 매력을 느끼기도 한다. 시대에 따라 독자에게 익숙한 리듬. 수사적 효과가 존재한다는 것은 당연한 명제다. 그러나 이수명 시인은 이러한 시대적 소통의 고리를 이겨내는 리듬의 체계가 미래에 당도할시적 주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시의 의미. 시의 인식 이전에 미지의 곳으로 언어를 끌고 가는 것. 대상과 충돌하는 파토스(Pathos), 인과의 불확실성(uncertainty), 그것은 모두 리듬 속에서 탄생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리듬에 사로잡혀 있다

 

 

 

 

2. 로트레아몽의 분열적 자아와 리듬

 

조난선은 구조를 요청하는 경포를 쏘아대지만 배는 천천히 가라앉는다 장엄하게. 그들은 하루 종일 펌프질을 하였다. 헛된 노력이다. 어둠이, 짙게, 움직일 수 없게, 다가와, 이 우아한 광경에 정점을 찍는다. 일단 물에 잠기면 더는 숨을 쉴 수 없으리라고 그들은 저마다 생각한다. 제 기억을 아무리 멀리 거슬러 보낸다 한들, 어떤 물고기도 제 조상으로 인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삼 초라도 제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가능한 한 가장 오랫동안 숨을 쉬지 말자고 스스로 격려한다. 그가 죽음에 던지려는 것은 바로 복수심의 아이러니 조난선은 구조를 요청하는 경포를 쏘아대지만 배는 천천히 가라앉는다 장엄하게. 배가 침몰하면서 (중략) 미쳐버린 어느 노파의 울음소리가 다른 소리를 젖히고 세를 떨쳤다. (말도로르의 노래- 두 번째 노래 108p)

 

조난선은 구조를 요청하는 경포를 쏘아대지만 배는 천천히 가라앉는다 - 라는 구절이 반복적으로 등장함으로써. 로트레아몽은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산문성이 짙은 대서사시 속에서 자신의 리듬을 형성한다. 이것은 하나의 대상을 반복적으로 쓰는, 서술어를 신경 쓰면서, 동사가 정적이지 않게끔, 철저히 움직이게끔, 형용사를 때려주는 행위의 산물이다. 우리는 그 문장의 질주감에 매료되어 거친 속도감에 흡수되어버린다. 그리고 이것은 죽음의흐름이나 살아있는 자들의움직임을 관찰한다. 죽음을 향해 내달리는 자의 시점으로 항구의 풍경. 강한 돌풍. 바다제비를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면 독자는 음악성을 부여받은 채로. 가장 사실적인 것에서 가장 환상적인 장면을 포착할 수 있다. 로트레아몽은 이렇게 수사법을 끝없이 전복시키는 수법으로 미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 부조리한 비유를 통해서 비교하는 것(물고기)과 비교되는 것(노파의 울음소리) 간의 의미론적. 논리적. 문법적. 문화적 거리를 유발함으로써 낯선 감각을 촉발한다. 그는 서술하고 있는 정황에 대해 반복하고. 비유하는 것들을 증가시켜서 지시하는 것을 해석하려는 시도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를 통해 전통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이나 서정시적 요소가 전복된다.

 

네 번째 노래를 시작하려는 자는 한 인간이거나 한 개의 돌이거나 한 그루 나무다

(네 번째 노래 161p)

 

내가 존재한다면, 나는 타자가 아니다

(다섯 번째 노래 213p)

 

이 문장들은 당시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던 서정시의 탈피를 선언하는 구절과 같다. 랭보가 나는 타자다, 라고 말함으로써 고통을 받아쓰는 자의 착란을 이야기하지만, 로트레아몽은 나는 한 인간이거나, 한 개의 돌이거나, 한 그루의 나무다, 나는 여러 개의 사물로 도래하는 자, 라고 말함으로써 여러 사물과의 동일성을 말한다. (페소아가 여러 개의 목소리를 설정하고, 각기 다른 위치에서 목소리를 발화했다면, 로트레아몽은 여러 개의 목소리를로 귀결시키는 동일자의 원리를 내세웠다) 1인칭에 머무는 게 아니라, 여러 개의 동일자를 통해 나로 수렴되는 과정. , 대상의 변화가 아닌, 시적 주어의 변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살다보면, 머리털에 이가 들끓는 인간이 고착된 눈으로 허공의 초록빛 막 위에 야수의 시선을 던지는 그런 시간이 있다. 어떤 유령의 야유 어린 고함소리가 제 앞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중략) 날개 돋친 낙지의 군단이, 멀리서 보면 까마귀 떼와 방불하게, 구름 위를 날며, 품행을 바꾸도록 경고하는 사명을 띠고 인간들의 도시를 향하여 꼿꼿한 노로 방향을 트는 동안, 눈이 침침한 조약돌은 두 중생이 쫒고 쫒기며 지나가는 것을 번개 불빛으로 보고는, 얼어붙은 눈꺼풀에서 남몰래 흐르는 동정심의 눈물을 닦으면서 외친다. (두 번째 노래 116~117p)

 

 

 

 

 

3. 보들레르의 영향과 악의 찬미

 

퇴폐의 시인이라 불리는, 샤를 보들레르(Charles-Pierre Baudelaire)가 로트레아몽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두 시인은 위악을 통해서, 신에 대한 반대를 말한다. 1850~80년도는 유신론이 몰락하는 시기였고 시인들은 단순한 악마주의로 빠지기 쉬웠다. (가령, 신을 모욕하고 조롱하는 것) 그러나 로트레아몽은 보편적인 독신주의를 벗어나기 위해다른 화자가 되어 인간을 넘어서는 지점을 보여준다. 또한 로트레아몽이 보들레르에게 영향 받은 것은, 악에 대한 찬미. 악을 통한 발작적인 아름다움이었다. , 내면의 금지된 욕망들을 바탕으로 악의 존재 이유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살인에 대한 욕망뿐 아니라 그 욕망의 가장 즉각적인 요구들에 충실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렇게 가한 악과 당한 악 사이의 애매성은 선과 악을 뚜렷이 가를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말도로르는 타인에게 냉소와 폭력을 가하더라도 그것을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으로 귀결시키고 있으며, 한없이 약한 인간 존재를 경멸하다가도 강한 자들에 대항하여 약한 자들의 편을 드는 연민의 모습을 보인다.

 

칼도 사두었다. 이 단검은 예뻤는데. 그것은 내가 죽음의 도구에서까지도 우아하고 멋진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은 길고 날카로웠다. 목의 동맥 하나를 조심스럽게 찔러 상처 하나만 내면 충분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두 번째 노래66p)

 

내가 어린 시절에 잠에서 깨어나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들어보라 음경이 빨간 인간들아 내가 이제 막 깨어났는데도, 내 생각은 여전히 마비되어 있다. (두 번째 노래 102p)

 

오래전에 거미가 배를 여니, 거기서 두 소년이 푸른 옷을 입고, 저마다 손에 불타는 칼을 쥐고 튀어나와, 그때부터 잠의 성소를 지키려는 듯, 침대 양쪽 옆에 자리를 잡았다. (중략) 섬세한 상처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권리를 거머쥘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파도의 내장을 가르며 뛰어들었던 자초지종을 결코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으며. (중략) 너는 인류라고 하는 멧돼지새끼들을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노래 232~235p)

 

 

로트레아몽은 파리의 풍경들을 적극적으로 묘사하며, 모더니스트의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센강이 인간의 육체 하나를 끌고간다 (138p) / 자정이다. 바스티유에서 마들렌으로 가는 합승마차는 단 한 대도 보이지 않는다. 합승마차 하나가 갑자기 땅 밑에서 솟아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나타나지 않는가. 좌석에 죽은 물고기의 눈처럼 움직이지 않는 눈을 가진 사람들이 앉아있다. 합승마차는 마지막 역에 도착하는 것이 급해, 허공을 집어삼키며, 포장도로를 삐걱거리게 한다 (67p) 파리의 시내. 파리의 불빛과 밤거리를 말하며, 300쪽 가까이 되는 장시를 진행하면서도 끝까지 공간을 놓치지 않는다.

 

 

 

 

 

3. 불완전한 악마

 

로트레아몽은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출신으로,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프랑스 문단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출판사에 시집을 투고하면 매번 거절당하던 처량한 시인이었다. 그러나 불가능한 글쓰기에 대한 실험적 태도는 열렬했다. 세상의 온갖 것들을 현란하게 조롱하는 문법을 구사했고. 이미지의 상이 무너졌다가 다시 재건되는 과정을 반복하며. 끝내 폭발하는 대상들로 자신만의 시적 층위를 쌓았다. 속도감 있는 사유. 환상성이 현실의 일부를 흡수해버리는 현상. 환상의 절대성에 승복하게 되는.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를 통한 완전한 해방으로, 독자들을 안내하려고 부단히 애썼던 것이다.

 

그는 취했다! 무시무시하게 취했다! 밤새 피 세통을 삼킨 빈대처럼 취했다! 그는 두서없는 말로 메아리를 가득 채우는데, 나는 여기서 그 말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조심한다. 지고한 주정뱅이가 제 체면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나라도 인간들을 존중해야 한다. (중략) 지나가던 고슴도치가 그의 등에 바늘을 찌르고 말했다이게 네 몫이다”(중략) 안간힘을 쓰고 다시 일어서더니, 비틀거리는 몸으로 돌 하나를 찾아가, 폐병환자의 두 고환처럼 두 팔을 늘어뜨리고 주저앉아, 자기에게 속한 자연 전체에 불꽃이 없는 시선을 던졌다 (중략) 저 지나가는 걸인을 주목하라 (세 번째 노래 143~144p)

 

주정뱅이를 고통스럽게 하는 윤리가 나타나고, 그것의 목격자로서 말도로르가 등장한다. 술에 취해 죽어가는 걸인을 지켜보는 말도로르의 시선은 다소 복잡하다. 폐병환자의 고환이라는 극단적인 묘사를 통해, 죽음이 지니는 강압적 위용을 조롱하는 것 같기도 하고. 죽음의 단절을 거두어내려는 욕망을 내비치며 연민의 눈빛을 보내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과 존중이라는 단어를 내뱉음으로써 인간에게 분별없는 파괴란 무엇인가. 죽음의 본질이 무엇인가. 감정을 가진 존재.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란 무엇인가 질문하며나라도 인간들을 존중해야 한다라고 발화한다. 여기서라는 인간은 이 세계에 대한 극렬한 분노와 폭력적인 감정으로 들끓는 존재지만, 그럼에도 나라는 존재마저 걸인을 주목하지 않는다면, 누가 주목하겠는가. 처량하게 죽어가는, , 시체가 될 운명인 걸인의 마지막을 누가 함께하겠는가, 라고 연민하고 있다. 그리고 그 연민은 작가 본인에 대한 메타적인 태도로 읽힌다. , 말도로르가 걸인에게 보내는 연민의 눈빛은 자신의 작품을 알아봐주지 못하는 대중들의 무관심. 불가능한 글쓰기에 대한 집념. 그 실패적인 집념 속에서 자신이 세워놓은 가상의 윤리(절대 악)와 싸우는 로트레아몽의 험난한 여정이다.

 

 

 

 

 

4. 리듬, 센강 밑을 떠다니는

 

로트레아몽의 시적 리듬을 시체의 리듬이라 말하고 싶다.시체를 플라타너스 그늘에서 다시 자도록 놓아두었다”(138p)“센강이 인간의 육체 하나를 끌고간다 / 부풀어오른 시체는 물 위에 떠 있다가 어느 다리의 아치 아래로 사라지지만 (중략) 간간이 물에 잠기기도 한다”(114p) 로트레아몽의 문체가 죽음에 가까워지는 리듬이라면, 300쪽을 넘어 5001000쪽에 달하는 긴 장시를 쓸 수 있는 호흡을 지닌 시인이라면, 나는 어떤 호흡법으로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일까. 아니 그전에, 리듬이란 무엇일까.

리듬. 그리스어인 리트머스(rhythmos)에서 유래되어 운동, 시간, 공간과 관계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지만 확실한 정의는 시대나 민족에 따라 다르다. 플라톤이 말한운동의 질서나 에드가 윌리엄이 말한운동과 질서 사이의 관련성정도가 리듬에 관한 대표적인 논의일 것이다. 시의 음악성. 혹은 시의 특징을 설명할 때, 운율보다는리듬이라는 용어 사용이 늘어나고 있는 것도 현대시가 다양한 패턴으로 리듬을 발현시키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운율리듬은 매우 혼재된 상태로 사용되었다. 운율에 관한 정의는 시론에 따라 혹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르지만, 내가 생각하는 리듬론은 의미를 시의 영역 안에서 포섭하기 위한 방법론이며, 하나의 정형성을 벗어난 시의 구조 속에서 다양한 패턴을 허용하기 위한 것이다. 리듬은 정형화된 하나의 이론만으로 시 텍스트를 장악할 수도 없고, 모든 텍스트들이 아무런 틀도 없이 개별화, 주관화되는 것은 다소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시라는 구조 안에 몇 겹의 문장들. 몇 겹의 반복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보편성을 취득하는가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로트레아몽의 경우 직유와 은유 여러 가지 수사법을 가리지 않고, 표현의 광란을 일으키는 시인이었다. 가령, 마치 코끼리들이 죽기 전에 사막에서 그 긴 코를 절망적으로 들어올리고 / 무기력한 귀를 내려뜨리며, 마지막 시선을 하늘에 던지듯이 (첫 번째 노래 22p) 와 같은 적확한 비유도 잘 썼고. 두 마리 불도그가 서로 목을 물어뜯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길을 가다 멈춰 서면서도 / 장례 행렬이 지나갈 때는 멈추지 않는 것이 인간이며 (중략) 전날 밤에 뜨겁게 사랑하던 두 연인이 왜 말 한마디의 오해로, 증오의 복수심의 사랑과 후회의 가시를 세우고, 한 사람은 동방으로 / 한 사람은 서방으로 갈라서서 제각기 제 고독한 오기에 휩싸여 더는 다시 만나지 않는지 누가 이해할 것인가 (첫 번째 노래 30p) 같은 아이러니, 인간관계를 꿰뚫는 문장도 훌륭하게 써냈다.

 

 

 

 

 

5. 현대성이란 결론

 

한편 앙리 매쇼닉[각주:1]의 관점에 의하면 현대성의 유일한 의미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데, 까닭은 현대성은 기호를 벗어나기 때문이며, 기호의 능력 밖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대성 그 자체가 만들어낸 도식을 벗어나미끄러짐을 수행하는 주체이자미지의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늘 변화무쌍한의미의 추구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리듬(rythem)이라고 정의한다. 그의 시학에서 출발한 다양한 리듬론을 바탕으로 한국의 문학평론가들과 연구자들은 현대시의 정형적인 리듬을 분석했으나, 강세나 자음이 중심이 된 언어를 매개로 한 매쇼닉의 리듬론이 한국어의 특성에 맞지 않으며 그의시학가 아닌글쓰기를 전제로 하여시의 리듬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한국 현대시의 리듬론은 한국어로 되어 있다는 것, 이미지를 중요한 요소로 삼는다는 것, 시의 구조나 형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예컨대, 메쇼닉의 논지[각주:2]현대성이 특정한 시기에 순간적으로 막 도래하고 나면 한편으론 언어가 그 자리에 안주하면서 이내 내적 외적 법칙이 정해져 우리가 그 법칙들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을 알기도 이전에, 리듬은 또 다시 어디론가 향한다는 것이다. 이 때 도식이란 주로 기호의 형태, 기호가 만들어놓은 형태를 바탕으로 만들어져, 도식 또한 법적인 형태로 남게 된다고 메쇼닉은 말하고 있다. 이렇듯 우리가 리듬을 따라 미끄러지는 것. 그것이 지나친 현대성이 초래한, 어떤 사회적인 요소의 개입이라 볼 수 있고. 의미를 생산하지 않는 개념으로써 리듬을 대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태도라는 것인데, 그것은 우리가 모던하다고 부르는 문학 작품들, 가령, 보들레르를 포함한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이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리듬이란 것이 미끄러지는 동시에, 의미를 추구하는 어떤 것이라면, 현대의 시인들은 결국 그 미끄러짐을 수행하는 할 수밖에 자가 된다. 그리고 그것이 평생의 업이라면, 보들레르나 로트레아몽과 같이, 계속 앞으로 미끄러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이 의미를 갖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가치가 있고, 무용하고 쓸모없다는 것을 알기에, 더욱 고통스럽고 아름다운 길이라는 것을, 언젠가 깨닫지 않을까.

 

 

 

 

  1. 1985년 말라르메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유명한 시인이자 시학자. 세계적 번역이론가이자 번역가이기도 하며 1999년까지 파리8대학 교수를 지냈다. 그는‘번역’은‘리듬’이 옮기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본문으로]
  2. 조재룡, 「앙리 메쇼닉과 현대성」, [21세기 새로운 이론과 사상].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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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의 유동하는 시점과 페르난두 페소아

 

 

 

 

 

 

 

 

김민경(문학세미나 회원. 설치미술 작가)

 

 

 

 

 

 

감각을 온전히 느끼기 위해 다양한 존재 만들어낸다. 가령, 오늘 같이 봄바람이 이마를 스칠 때 단순히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느끼는 게 아니라 리카르두 레이스라면 어떻게 느꼈을까, 꼽추 소녀라면 창가에 앉아 이 바람을 어떻게 감각하고 표현했을까 생각해본다. 감각을 내가느낀다고 생각하지 않고, 지독히 세밀하고 예민하게 느끼기 위해 존재를 쪼개고 시점을 대입해 그 순간을 관찰한다. 페소아가 글쓰기이자 예술을 수행하는 방식이다.

 

페소아의 창작물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어떤 이명은 위대한 예술가로 칭하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소녀와 같은 작고 연약한 존재를 창조하는 부분이었다. 꼽추 소녀가 나는 온통 눈물이에요라고 표현한 문장을 잊을 수 없는데, 감정을 이입하지 않고 나올 수 없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페소아의 이런 존재 창조를 통한 이성적인 감정 대입에서 1인칭 시점의 초월이 발생한다. 응시하는 대상을 향한 소실점 뒤바꾸기가 일어난다. 페소아는 응시하는 대상을 여러 방향에서 바라보는데 그 다시점은 회화에서 흔히 사용하는 선형원근법을 전복한다. 놀랍게도, 선형원근법의 위상을 처참히 몰락시키고 있는 동시대의 유동하는 이미지와 맞닿는 지점이다.

 

히토 슈타이얼 (Hito Steyerl) ,< 스크린의 추방자들 >

 

2017, 영국 아트리뷰 의 파워 미술인 100(The Power 100)’ 1위를 차지한 예술가이자 이론가 히토 슈타이얼(Hito Steyerl)은 그의 저서 <스크린의 추방자들>에서 이렇게 말한다. “선형 원근법은 몰락했다.” 선형원근법이란 소실점이 한 개로 모이는 원근법으로 르네상스 시기 이후 회화의 기본 약속이자 법칙으로 작용한 투시법이다. 2차원 평면에 3차원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기하학적인 기초 위에서 과학적인 방법으로 시점을 체계화시킨 일종의 공식이다. “투시가 틀렸잖아.” 미술학원에서 정물화를 그릴 때, 가장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지적인데 원근법은 관찰자를 한 지점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상정하기 때문에 확고한 소실점이 생긴다. 때문에 선의 방향이 조금만 틀려도 어색하게 느껴져 틀린시점인지 아닌지 바로 드러난다.

 

선형 원근법은 수학적이고 평평하고 무한하며 등질적인 공간을 산출하고 이를 현실이라 가정한다. 아래는 히토 슈타이얼이 그의 저서에서 선형원근법의 몰락을 설명한 부분이다. 선형 원근법은 마치 이미지의 평면이 실제세계로 열린 창인 것 마냥, ‘외부에 대한 유사-자연적 조망의 환영을 창조한다. 선형 원근법으로 설정된 공간은 계산, 항해, 예측이 가능한 공간이다. 그것은 미래의 위험을 계산하여 예측하고 따라서 관리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계산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우리는 안정된 바닥 위에 서서 편평하고도 사실 상당히 인공적인 지평선 상의 소실점을 주시하고 있는 관찰자를 상정할 수밖에 없다. 몇 백 년간 과학적 토대 위에서 권위를 지켜온 선형 원근법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론에 기초하는 안정된 관찰자를 상정한다는 깊은 모순을 갖고 있다. 역동하는 동시대 이미지들은 이 예측 가능한-기하학적-시선을 가볍게 무너뜨린다.

 

동시대 실제 관찰자는 예측 불가능하다. 바닷가에 빨간 등대가 있고 그것을 바라본다고 가정해 보자. 현대 사회 관찰자는 이 붉은 등대를 넘실대는 배 위에서 바라볼 수도 있고, 흔들리는 케이블카 위에서 볼 수도 있으며, 달리는 차에서 목격했을 수도 있다. 더 나아가 달리는 기차에서 영상으로 찍은 등대를 프랑스에 있는 친구에게 전송하여 그 친구가 저녁을 먹을 때 식탁에서 다시 꺼내볼 수도 있다. 빨간 등대는 액정 속 픽셀로 등장했다가 사라지고 복제되는 등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나타난다.

 

동시대 이미지는 고정된 캔버스가 아닌, 이 화면에서 저 화면을 떠다닌다. 작은 픽셀로 쪼개지고 폴더나 휴지통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등 불안한 매체로 재현된다. 페소아가 만들어내는 존재들은 언어로 탄생하고 사라지기도 하며, 한 시점에 안착하지 않는 흔들리고 불안한 상태로 사물을 바라본다. 그의 상상된존재와 상상하는시점이 현시대 이미지 재현과 들어맞는 지점이다. 페소아는 다양한 이명을 만들어 고정되고 안정된 시점을 전복하고 넘실대며 흔들리는 관찰자를 창조했다. 시각 이미지를 바라보는 데에 원근법이 더 이상 권위를 내세우지 못하는 이 시대에, 페소아적 접근방법- 즉 새로운 시점과 존재를 창조해 거기에서부터 바라보기-가 한 탈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예측해 본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매체가 등장함에 따라 시공간이 뒤섞여 재현되는 이 때, 우리가 페소아를 들여다보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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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에 매혹되다

"나에게 힘을 주는 요가"

 

 

이봉순(수유너머 104*요가반 반장) 

그렇게 끙끙대며 아파할 거면 시간과 돈 들여서 요가는 왜 하니?”

 

1년 반 전쯤 내가 귀중한 1년간의 휴직 기간에 요가를 1주일에 거의 4번씩 하고 있을 때 주위 사람들이 또 나 스스로도 자주 했던 질문이다. 그럼에도 계속 지속했던 이유는 건강해져야겠다는 절박함, 요가를 통해서 내 몸이 조금씩 좋아질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요가 동작(아사나)에 이미 오래 전에 매혹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처음 요가를 시작한 것은 10여 년 전 왼쪽 팔에서 시작된 통증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자고 일어나니 목이 뻐근했는데 그때부터 왼쪽 팔이 저리고 급기야 밤이면 등 쪽이 아파서 잠을 못 이루게 되어 결국 병가를 내고 아침에는 정형외과, 오후에는 한의원을 다니면서 한없이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왜 아픈 걸까? 고민하며 그렇게 시간을 들이고 치료를 받는데도 쉽게 없어지지 않는 통증을 이해하기 위해 집 근처 도서관에서 온갖 민간요법과 건강 관련 서적을 읽게 되었고 그 끝에 요가를 시작하게 되었다.

 

요가 관련 책을 보면서 사진으로 접한 숙련자의 동작들은 나의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몸이 이렇게 구부러지고 접히고 팔로 뒤집어 설 수 있는 것일까? 발레리나의 유려한 춤동작보다도 나에게는 요가동작이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처음 요가를 했을 때 나는 요가에 매혹되었다. 호흡과 동작에 집중하는 고요한 그 시간이 끝나고 누워서 송장 아사나를 할 때 생각했다. ‘! 평생 요가나 하며 살았으면...’ 돌아보니 그때 다녔던 요가원도 지금 수유너머의 요가반에서 하는 하타 요가 스타일이었다(수유너머 요가반의 요가동작은 더 난이도가 높고 시간도 두 배^^). 인도의 요가철학과 동양의 전통사상을 함께 녹여내고자 했던 그 요가원의 원장이 쓴 저서들을 읽으면서 요가의 철학 그리고 수련 방법에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통증이 사라지고 나니 또 절박함이 사라지고 바쁜 일상을 보내느라 오랫동안 요가를 못하다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요가를 드디어 다시 시작하게 된 지 이제 2년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요가를 하면 크고 작은 통증이 함께 오기도 한다. 그 통증은 더 단단해지기 위해 거쳐야 하는 몸의 반응인 것 같다. 몸은 굉장히 정직하다. 개인마다 재능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듯이 요가동작에 숙련되는 속도도 차이가 나지만 결국 시간과 노력이 축적되면서 몸은 자신의 속도에 맞게 분명히 변하기 때문이다. 전혀 가능해보이지 않던 동작을 하게 된 날의 성취감은 마음의 힘을 길러준다. 불과 2년 전의 내 모습과 지금을 비교해보면 요가가 나에게 준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몸에 힘이 생기니 마음이 단단해지고 스트레스에 조금씩 강해졌다. 학교가 끝나면 집에 와서 침대에 누워 한참을 있다 일어나기도 하고 때로 그냥 잠들어버리는 때도 많았었는데 지금 수유너머에 나와서 세미나도 하고 또 요가도 꾸준히 할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 나는 요가로 인한 신체의 변화 때문이었다고 믿는다. 매번 반복되는 동작을 조금씩 완성해나가면서 느끼는 작은 기쁨과 그 쌓이고 쌓인 시간 뒤에 오는 내 신체의 변화가 나의 몸과 마음에 힘을 주었다. 불과 1년 전의 나는 요가를 하고 나면 어질어질하고 가쁜 숨을 내쉬며 이렇게 힘든 것을 계속 해야 하나 되묻곤 했고, 제법 무거운 수유너머 요가반 매트 4장을 한꺼번에 드는 것은 생각도 못할 상태였다^^.

 

처음 요가를 시작하면 고수들의 고난이 동작을 보면서 좌절하거나 의기소침해지기도 하는데 욕심을 내서 무리를 하는 것이 제일 금해야 할 일이다. 요가를 할 때 남들과 경쟁하지 말아야 하지만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 경쟁해서는 안 된다는 충고가 도움이 많이 되었다. 요가를 할 때 중요한 것은 오히려 호흡, 응시, 동작 순이라고 들었다. 자신의 호흡에 집중하고 각 동작마다 한 곳을 응시하면서 몸과 마음의 균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그렇게 천천히 한계를 높여서 시간을 들이다보면 어느새 안 되던 동작이 완성되고 거기에 맞춰 신체가 변화한다. 신체가 변화하면 생활의 습관과 감각이 변하고 나아가 마음과 인식이 변화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요가를 아무리 긴 시간동안 했다 해도 또 아무리 쉬워 보이는 동작이라도 요가를 할 때마다 한 동작 한 동작을 온 힘을 다해 하면 매순간 어렵고 또 새롭다. 하루하루 반복되지만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삶의 순간순간처럼 요가도 매번 같은 동작을 하지만 그때마다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나에게 요가 하는 것은 평생 만날 어렵지만 매력적인 친구를 가진 것이다. 요가가 아니라도 다른 좋은 친구들도 많지만 이렇게 좋은 친구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소개시켜주고 싶기도 하고 또 함께 만나고 싶다. 수유너머 요가반에서 친구들과 함께 하는 요가 그리고 끝난 뒤 보이차와 함께 하는 차담이 있어서 요가와 더 깊이 사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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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세미나 후기


나를 발견하는 거울

-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와 『페소아와 페소아들





이재현/수유너머104. 문학세미나 회원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책이라는 제목을 처음 맞닥뜨렸을 때 들었던 생각은 내 불안의 기원을 찾을 수 있을까, 싶었던 것과 동시에 “OO(여기엔 우울, 행복, 기쁨, 만족, 게으름 등이 해당한다.)/(적절한 조사 자리)/□□(여기엔 기원, 정복, 여정, 접속, 괜찮아 등이 해당한다.)”라는 제목을 가진 책 치고서 정말 멀쩡한 책이 있는가, 하는 의문도 함께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허나 시선을 조금 내려 배수아 작가가 이 책을 번역했고, 이후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에도 포함된 것을 확인한 뒤엔 기꺼이 서가에서 뽑아들 수 있었다.

그렇지만 불안의 책을 읽어나가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원래도 충분히 있는 내 불안을 더욱 증폭시키려는 듯이 두터운 산문집 속 수백 개의 산문들은 일련의 통일성과 흐름을 배반하면서 제각기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때로는 인류역사의 유구한 문제들에 대한 이성적 논증으로, 때로는 자연의 풍경이 불러일으키는 심상의 표현으로, 또 때로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존재들과의 일화로, 다시 때로는 꿈속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그리워하는 이들을 마주대하며 느끼는 소회로 이어지는 글들을 읽어나가다 보니 페소아가 펼쳐 보이는 소재와 감성의 다양성과 그 깊이에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단순히 한 화자의 내면의 넓이로서만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 앞에서 말한 것들을 뒤에서 다시 반박하는 순간까지 마주치게 되면 과연 이 책을 믿고 따라가도 되는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불안의 서.jpg

페르난두 페소아,불안의 서』(배수아 역, 봄날의책, 2014)

페루난두 페소아,『불안의 책』(오진영 역, 문학동네, 2015) 

 

난 존재하지 않는 패거리를 만들어냈어. 이 모든 걸 실제 세계의 틀들에 맞췄지. 서로 주고받는 영향들에 눈금을 매기고, 우정 관계들을 구체화시키고, 내 안에서, 다양한 관점들과 토론들을 경청했고, 이 모든 것으로 봐서는, 그들 모두를 창조한 사람 그러니까 나는, 가장 거기에 없던 사람이었어.”

 

페소아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직접 자신의 창작과 이명과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는데, 이만큼 페소아의 문학세계를 명약관화하게 드러내는 구절도 없을 것이다. 페소아는 독특하게도 수십 가지의 이명을 내세워 글을 썼다. 그런데 페소아의 이명은 본명을 가리기 위한 한두 가지 필명의 수준이 아니라 각자의 개성적인 자아를 가진 수십 명의 인물들의 목록이었다. 불안의 책또한 페소아 본명이 아닌 베르나르두 소아레스가 화자이며, 심지어 페소아와 페소아들알베르투 카에이루와의 인터뷰내 스승 카에이루를 기억하는 노트들에선 각각의 이명들이 함께 등장해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논쟁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책의 원제는 ‘Livro do desassossego’입니다. ‘desassossego’는 조용함과 평정의 반대말로 포르투갈에서는 흔히 쓰이지 않는 문어적 표현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책 자체가 불안한 것입니다. <불안의 책>은 애초에 완성될 수 없는 책이었습니다.”

 

불안의 책은 제목과는 달리 불안의 감정들만 수록되어 있지는 않다. 그 안에는 현대인의 신앙과 종교(특히 기독교와 이교), 비관주의와 신비주의, 예술과 부조리, 도시와 시골, 우정과 사랑, 행동과 관조, 권태와 슬픔 등 한 인간이 자신의 전 생애에서 만들어내고 느낄 수 있는, 아니 어쩌면 하나의 자아만으로는 결코 가닿을 수 없는, 가능한 모든 감상과 의식의 총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불안의 책인가?


일본 웹에서 불안의 책을 검색하면 不穏”, 즉 불온의 서로 번역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네이버 포르투갈어사전에서도 ‘desassossego’불안, 걱정, 근심과 함께 ‘(사회적) 불온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하니 산문집 안에서 현실과 꿈을 막론하고 온 세계로 뻗어나가며 위태롭게 흔들리는 불온한 감정들을 이해할 수 있을 듯싶다. 안온한(듯 보이는) 세계와 불화하는 개인 내면의 불온한 감정들은 불온하지 않은 방식으로 나타날 수는 없을 것이다. 불안의 책은 분명 소아레스라는 1인 화자의 진술이지만 페소아의 모든 이명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데, 이는 동시대와 다른 감수성을 지닌 개인이 단독자로서 홀로 서 있기 어려운 현실의 맥락을 감안할 때 일관성의 부족이 아니라 필연적인 다양성의 촉발로 이해될 것이다.


백년 전 포르투갈의 어떤 시인이 다양한 화자들을 내세워 서술한 불온한 감정들은 지금의 나에게 어떠한 의미로 다가왔는가.


페소아는 내가 말하지 못한 나를 발견하게 하는 거울이다. 불안의 책에서 페소아는 거울을 발명한 자는 인간의 영혼에게 독약을 준 것이다.(466)”라고 했다. 페소아에 따르면 인간이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그 자신에게 그보다 더 끔찍할 수 없는 일이며, 거울 이전에는 수치스럽게 허리를 굽혀야만 겨우 가능했던 일이다. 여기에서 페소아가 말하는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는 행동은 나에겐 내 내면의 깊은 곳을 바라보는 행위로 다가왔다. 인간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외면하고픈 못난 본능과 추악한 욕구, 역겨운 호승심과 비루한 자아의 덩어리를 확인하는 일이다. 그런 혐오스런 혼합물을 직면하는 것은 달갑지 않으나 바로 내 것이기에 자꾸만 확인하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페소아는 내가 미처, 또는 애써 언어화하지 못했던 나를 언어화해 보여주었고, 때때로 그것은 영혼의 내벽을 긁어대는 언어로 된 사포이기도 했으나, 하릴없이 주변으로 헛도는 내 고개를 나 자신을 직시하도록 붙들어 주었다.


동시에 페소아는 내가 그토록 찾아다녔던 동지들과 마주치게 하는 도라도레스 거리이기도 했다. 비록 현실의 거리에서 페소아는 그와 함께 동행할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지만, 그러한 현실에 굴하지 않고 그는 자신 안에 있는 이명들과 함께 글을 쓰며 꿈꾸었다. 페소아와 같이 나도 나와 다른, 그러면서 동시에 같은 사람들과 함께 읽었기에 두 달이 넘는 긴 시간동안 천천히 페소아를 따라갈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페이스메이커였을 뿐만 아니라 맥루한이 미디어는 인간의 감각을 확장한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들은 각자가 미디어로서 서로의 옆에 있었다. 각자가 홀로 살아왔기 때문에 알 수 없었던 분야의 지식들, 삶의 결과 감정들을 우리는 페소아를 가교로 하여 나눌 수 있었다.


페소아들.jpg

페르난두 페소아,『페소아와 페소아들』(김한민 역, 워크룸프레스, 2014)


불안의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들어오는 단장의 번호를 적다보면 어느샌가 숫자세기 놀이가 돼서 이게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했는데 책장을 표기하기 위해 붙여둔 스티커들로 두꺼워진 다른 사람들의 책들을 보며 모두 같은 심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다만 그중에서도 꼭 몇 개만 꼽자면 역시 자신 주변의 가깝고 작은 친구들에 대한 동지애를 드러낼 때였다. 반 정도 남긴 포도주로 손님의 좋지 않은 컨디션을 알아차리고 인사말을 건넨 종업원의 동지애(24), 고향으로 떠나는 사무실 사환 아이를 보며 사무실 사환 아이가 떠났다.”라고 감정을 자제하려 하나 비통하게 되뇌고 마는 그의 모습(279)은 타자에게 냉정하려고 애쓰지만 결코 감추지 못하는 페소아의 인간을 향한 따뜻한 동지애를 드러낸다. 인간의 경지가 아닌 것들을 이야기하다 그에 가닿을 수 없는 스스로를 인지하며 생기는 인간적인 간극(특히 오마르 하이얌, 446~448)도 페소아라는 이름을 기억에 오래 남겼다.


우리는 페소아에 이어서 프랑스 초현실주의 문학을 읽어가기로 했다. 언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글에게서 진정한 행복을 찾는 이들의 글을 읽는 것은 나에게도 가장 큰 행복이다. 매번 마주치는 행운에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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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나스&화이트헤드 읽기 세미나]




영진(수유너머104 세미나회원)




애초에 호기롭게 달려들었던 세미나 였지만 평일 빡빡한 일정에 지레 겁을 먹고 하차할 뻔 했으나 종헌 반장님의 아량과 넝구쌤의 한결같은 환대와 유혹 속에 드디어 세미나에 첫 참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앞서 <타인의 얼굴> 책 표지 속에 희미하게 웃고 있는 대빵 만한 레비나스 선생님의 미소를 차마 외면할 수가 없어 몰래 야금야금 읽으며 5장에서 6장을 읽어나가는 찰나에 이건 반드시 제대로 읽고 나누어야 돼! 하는 생각이 섬광처럼 번뜩 였더랬죠! 덕분에 이 명저의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게 될 수 있어서 매우 기쁜 마음입니다

 

간략하게 함께 공부했던 내용을 나누자면, 5장에서는 책임과 대속의 주체에 대하여, 그리고 6장 에서는 고통과 윤리에 대하여, 7장에서는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종합과 철학사에서의 의의를 정리하는 내용 이었어요! 

 

5장은 넝구샘 께서 발제를 맡아주셨어요! 책임과 대속적 주체에 관한 레비나스의 혁명적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장 이었는데요, 각 장의 핵심 내용을 마치 아이들을 가르치듯 쉽고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해주셔서 머릿속에 쏙쏙 내용이 들어와 제대로 복습이 되었습니다. 장의 말미에 샘이 만나신 작품들과 일상에서 경험했던 생각들을 덧붙여 주셔서 더욱 재미있었습니다.

 

6장은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하신 종헌샘이 발제문 으로나마 자리를 함께 해 주셨는데요, 전반부에서는 고통과 윤리에 대한 내용을 역시나 체계적이게 잘 설명해 주셔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후반부에는 이에 대한 종합과 레비나스 철학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주변 사건과 경험을 통해 구체적으로 전해주셨습니다. 글 속에 샘의 목소리가 생생히 전달되었어요. (종헌샘의 영혼의 동지 재중샘이 여러 번 심장 어택을 당하셨다는...)

 

7장은 쫑샘께서 발제를 맡아 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철학에 대한 공부가 짦은 지라 7장에서 레비나스 사상과 서양철학의 주류체계를 비교하고 언급하는 부분이 많아 어렵게 느껴지기도 하고 정리가 잘 안되었었는데, 차이점의 핵심을 잘 정리해 주셔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여전히 어렵지만 발제문을 곁에 두고 복습하고 있습니다. 감사해요! :)

 

이어진 나누기 에서는, 각자의 경험 속에서 레비나스 철학을 만나게 된 일화가 기억에 남았습니다. 넝구샘은 다르덴 형제의 ‘자전거 탄 소년’ 속 시릴과 사만다의 이야기를 통해, 쫑샘은 암투병중인 친구와의 일화에서 겪었던 아픔을 통해, 재중샘은 톨스토이의 작품 속 성지순례 과정 중 두 노인의 상반된 행보를 통해, 모현샘은 동양 철학 중 묵가 사상과의 유사점을 통해, 그리고 종헌샘은 소수자 그룹에서 지내면서 깨닫게 된 사랑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어요. 저는 지하철에서 종종 도움을 간청하는 사람들을 외면해 왔던 기억이 떠올랐는데요. 헐벗고 굶주린 모습으로 나에게 간청하는 타자를 그저 내 생각으로 재단하며 피해왔었던 경험을 통해 타인을 대신해 고통을 받고 기꺼이 내어주는 행위가 나에게 얼마나 어려운 것들 이었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게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윤리학을 제 1철학으로 보려했던 레비나스 선생님의 의도가 성공적 인 것 같습니다.)

 

이어서 기억에 남는 담론은 마지막에 재중샘이 던져 주셨던 의문 속 오갔던 이야기들 이었습니다. 타인에 대한 책임과 대속의 의미에서, 타인의 일깨움에 의한 책임이 윤리적 불면과 나를 고귀한 영적 존재로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결국 내가 스스로 주체됨과 혼동하여 잘못 이해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것, 대속의 의미가 모호하게 이해된다는 의문을 던져 주셨는데요,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어요.

 

타자에 의해 책임적 존재로 지정받은 내가 타자를 위한 책임적 존재로 세워지는 모습은, 자리바꿔 세움 받음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넝구샘 께서 말씀해 주신 고난 받고 부활하는 예수의 모습(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며 좌절의 목소리를 내던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 받고 죽음에 이르고 부활하는 과정)을 책임과 대속의 과정으로 이해 할 수 있고 그 외 쫑샘이 말씀해주신 ‘미쓰백’ 작품 속 인물들과의 연대나 아가페적인 사랑, 레비나스가 말한 모성성 같은 것들로 이해한다면 좀 더 피부로 와 닿을 수 있겠지요?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을 나누었음에도 불구하고 오갔던 이야기들이 너무 풍부하고, 또 삶에서 겪은 진솔한 이야기를 이름조차 생소하고 어려웠던 철학자의 생각을 통해 거리낌 없이 서로 나눌 수 있었다는 것이 참 기적처럼 느껴지는 군요, 돌아오는 먼 길을 심심하지 않도록 열심히 단톡방 에서 수다를 떤 탓에 150개가 육박하는 채팅창의 대화가 여운을 더 해 준 하루였습니다.

 

벌써 첫 번째 책을 끝내고! 다음주부터는 드디어 레비나스 선생님의 본저에 돌입합니다!

<후설 현상학에서의 직관이론> 인데요! 서론과 1장은 솔님께서, 2장과 3장은 모현님께서 발제를 맡아 주시고 간단한 뒷풀이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다음시간에도 즐겁게 공부해보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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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수유너머104

<삶을 위한 철학 수업>의 '삶과 자유', '만남과 자유' 후기




알라(수유너머104 세미나회원)





안녕하세요.

A조의 2주차 후기를 맡은 안라영입니다.

2주차는 책 '삶을 위한 철학 수업'의 '삶과 자유', '만남과 자유'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1. 삶과 자유

 영진님의 발제문을 읽는 것으로 세미나를 시작했습니다. 각 장의 핵심이 되는 내용을 꼼꼼하게 정리해주셨고, 인상적이었던 건 책에서 활용된 사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영화나 신화의 내용을 잘 모르는 게 많았는데, 발제문을 통해 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감사합니다!!)  또한 생각해볼 만한 질문을 곳곳에서 제시해주셔서, 이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계속 나누었습니다.

질문을 공유해보자면, 

1. 당신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은 어떤 것이었나요?    

2. 에이허브와 오디세우스 중 어떤 삶이 더 자유로운 삶이라 생각하나요?

      - 에이허브: 매혹 혹은 증오에 온 몸을 던지는 삶

      - 오디세우스: 매혹에서 벗어나 기존의 목적지로 가려는 방어기제

3. 내가 생각하는 나는 어떤 사람일까?

4. 힘든데도 애써 웃으려고 하는 것보다 원래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이 더 자유롭지 않을까요?

5. 나는 현재 어딘가에 갇혀 있을까?

6. 내가 시도해보고 싶은 새로운 것은? 나를 넘어서 꿈꿀 수 있는 시도는 어떤 것인가요?



 이 중에서 서로의 일생일대 '사건'을 나누었습니다. 기억에 남았던 건, 충한 튜터님께서 지금 2-30대 세대에 '사건'이라고 할만한 일은 보통 개인적인 일(ex. 물리선생님을 만난 일)인 경우가 많은데, 작가님처럼 '사회주의 붕괴', 즉 사회적 사건이 인생의 사건인 것이 오히려 부러울 때도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저는 역사를 배울 때마다 격동의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에 오히려 감사했었던 적이 많아서 조금..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 대통령 탄핵이 있고나서 탄핵심판권 수업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우리는 지금 너희들 자녀들이 역사책에서 배울만한 사건과 마주해있어!!" 라고 얘기했던 기억이 나면서 지금도 거대 담론을 인생의 사건으로 삼을 수 있는 기회는 남아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충한 튜터님께도 아직 기회가 있을거란 말이죠..!!)   

 그리고 에이허브와 오디세우스의 이야기를 꽤 오래 나누었습니다. 몸 바쳐 매혹당할 수 있는 것이 더 자유로운 삶일까, 매혹 속에서도 가야할 길을 가는 것이 더 자유로운 삶일까. 저는 에이허브의 삶에 대한 동경이 있었는데, 의견이 많이 갈렸어요. 그러다가 매혹당해야하는 순간과 가야할 길을 가는 순간을 조화시킬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자유가 아니겠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절충안이긴 했지만, 공감이 많이 됐습니다. 매혹당해야 하는 순간에 매혹당하기 위해 노력해봐야겠다 싶기도 했구요!

 



2. 만남과 자유

 만남과 자유의 발제문은 제가 작성했습니다. 함께 읽은 뒤 이야기 나눴던 내용은 사랑의 '수동성'과 '능동성'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내 범주 안으로 상대를 들여오는 사랑과 상대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에이허브와 오디세우스 얘기와 유사한 듯 하여 패스하겠습니다ㅎㅎ...

 



3. 자유와 행복

 자유롭다는 건 결과와 상관없이 그 순간에 행복을 느끼는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자유로울 때 행복하다는 의견에 대해 자유가 오히려 불행(?), 순화하자면 불편을 야기하는 순간도 있지 않냐고 질문 했습니다. 정해진 대로 살던 고등학생에서, 여러모로 자유를 얻는 대학생 또는 성인이 되면 불안해하는 순간처럼 말이죠. 주어지지 않았던 '자유'가 주어진 순간, 불편을 느꼈던 경험은 몇몇 분들께서도 있었다고 얘기하셨지만, 주어진 자유에 충분히 익숙해지고 누릴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되면 구속과 억압보다 자유가 행복을 주는 것 같다는데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인상깊었던 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학생들에게 시간과 제도가 마련되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제가 고민해봐야할 거리가 하나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았습니다!

 오랜만에 청인지 세미나에 참여했는데, 새로운 분들과 다양한 의견을 나눌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A조에는 개성 강한 분들이 많은 듯하여 앞으로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 기대되네요ㅎㅎ


청년인문지능게시판 ->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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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세미나_기록과 현장]문학세미나를 소개합니다.





 송승환/시인. 문학평론가





안녕하세요?

 

수유너머104 문학세미나를 소개합니다.

수유너머104 문학세미나는 지난 2018528() 첫 세미나를 시작했습니다.

문학세미나는 [2018 수유너머104 여름강좌] ‘다른 삶들은 있는가-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마주침에서 촉발되어 첫 세미나의 책으로 선정된 작가는 에드가 앨런 포였습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문학세미나에서 읽은 책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에드가 앨런 포, 단편전집 우울과 몽상, 하늘연못

2. 에드가 앨런 포, 포 시선, 지식을만드는지식

3. 알프레드 쟈리, 위비 왕, 연극과인간

4. 앙토넹 아르토, 잔혹연극론, 현대미학사

5. 앙토넹 아르토, 첸치 일가, 연극과인간

6. 앙토넹 아르토, 사회가 자살시킨 사람, 반 고흐,

7. 기욤 아폴리네르티레시아스의 유방』, 연극과인간

8. 로제 비트락, 빅토르 혹은 권좌의 아이들

9.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연극, 연극과인간

11.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유령소나타, 지식을만드는지식

11. 러시아 여성시인 시선집 레퀴엠, 고려대출판부

12. 마야코프스키, 마야코프스키 선집, 열린책들

13. 폴 클로델, 마리아에게 고함, 연극과인간

14. 로베르트 무질, 특성없는 남자 1, 2, 북인더갭

15. 로베르트 무질, 생전유고/어리석음에 대하여, 워크룸프레스

16. 알렉상드르 블로끄, 블로끄 선집, 지식을만드는지식

17. 페르난두 페소아, 시는 홀로 내가 있는 방식, 민음사

18. 페르난두 페소아, 초컬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 민음사

19. 페르난두 페소아,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문학과지성사

 

현재 읽고 있는 책은

1.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배수아 옮김, 봄날의책

2. 러시아시선 삶은 시작도 끝도 없다, 창비

2. 마야코프스키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 책세상

 

앞으로 읽을 예정인 책은

1. 페르난두 페소아, 산문선-페소아와 페소아들, 워크룸프레스

 

수유너머104_문학세미나는 매주 월요일 저녁 730분에 시작합니다. 많은 양을 빠르게 읽기 보다는 적은 양을 천천히 읽고 다양한 의견을 서로 나누는 세미나입니다.

http://www.nomadist.org/s104/SeminarBB1/105678

언제든지 새로운 분들의 참여를 기다리며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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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세미나-세미나후기] 잡편 33.천하편





조정현(장자세미나 회원)





장자는 도(道)를 이야기 한다.
장자가 말하는 도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무엇을 가리키는가 아니면 개별적이고 특수한 무엇을 가리키는가.
어떤 대상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인지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인지 구별하기 위해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을 살펴보는 것이 유용하다.

다음은 논어 선진편의 한 대목이다.

子路問 聞斯行諸. 子曰 有父兄在 如之何其聞斯行之.
자로가 여쭈었다. 들으면 곧 실천하리까? 선생님 말씀하시다. 부형이 살아 계신데 어찌 들은 대로 실천하겠느냐?
冉有問 聞斯行諸. 子曰 聞斯行之.
염유가 여쭈었다. 들으면 곧 실천하리까? 선생님 말씀하시다. 들으면 곧 실천해야지!

"들으면 곧 실천해야 한다"는 명제가 있다.
공자에게 이 명제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명제가 아니다.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이 명제는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다. 선진편의 대목은 개별적이고 특수한 명제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럼, 도(道) 역시 일반적이고 보편적이기 보다 개별적인 것일까?
도가 일반적이라면, 너의 도와 나의 도가 동일할 것이다.
도가 개별적이라만 나의 도가 있고 너의 도가 있으며, 이 도는 서로 다를 것이다.

논어 이인편에 나오는 대목이다.
吾道,  一以貫之 (나의 도는 하나로 꿰뚫는다)

여기서 공자는 '도'에 나(吾)라는 수식어를 붙여 '나의 도'라 이야기 하였다. 
'나의 도'라고 이야기 했을 떄, 너와 내가 그리고 다른사람이 동일한 '도'를 공유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는 다른 이와 다른 나만의 개별적인 '도'가 있다는 말이다.  

공자는 자기가 가진 개별적인 '도'를 진리로 봤을까?
진리로 봤다면, 도는 당위의 문제를 즉 마땅히 그래야 함에 대한 이야기이다.
있는것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을 이야기 하고,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을 이야기 할 것이다.

논어 위령공편에 나오는 대목이다.
人能弘道 (사람이 도를 넓힌다.)

'도'가 진리라면 사람은 '도'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 '도'가 규범이 된다.
사람이 도를 넓힌다라고 말하였다면 '도'는 마땅히 지켜야할 규범이고, 진리가 아니다.
도는 꾸준히 넓히고 확장해야할 대상이다. 

공자가 가진 도에 대한 관점은 장자와 동일하다. 공자와 장자가 갈리는 부분은 '도'가 아니라 '명(名)' 이다.

천하편에서 장자는 '도'를 일반적이고, 보편적으로 설정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한다.
'도'는 개별적인 데, '도'를 일반화하고 보편화하여 사람을 억압하는 예가 나온다. (노래를 부르지 말게 하는 묵가 등등)
그리고 '명'에 옭아매져 있는 사람을 비난한다.

道可道, 非常道
도덕경에 나오는 대목이다.
간략히 의역해 본다.
도가 도가 되려면, 상도(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도)가 아니어야 한다. 장자가 가닌 '도'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보편성은 없다.

장자에게 '도'는 개인마다 다르고, 상황마다 다른 개별적이고 특수한 대상이다.
그럼 개개인이 가진 '도' 사이에는 우열성이 있는가?
내가 추구하는 '도'가 다른 사람이 추구하는 '도'보다 우월할 수 있는가?
장자는 개별적인 '도' 사이에 우열성은 없다고 본다. 개별적인 '도'가 시대를 초월하고 공간을 초월한다고 보지 않는다.

장자가 가진 관점을 야구선수로 비유해 본다.
빠른 직구에 유리한 스윙을 하는 선수 A가 있다.
변화구에 유리한 스윙을 하는 선수 B가 있다.

A선수가 추구하는 '도'는 강속구를 떄려 안타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B선수가 추구하는 '도'는 변화구를 때려 안타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

A선수는 강속구에는 강하지만, 변화구에는 약하다.
B선수는 변화구에는 강하지만, 강속구에는 약하다.

C라는 선수가 나와서 새로운 '도'를 추구한다.
'난 강속구에도 강하고, 변화구에도 강한 스윙을 연습할 것이다.'
C 선수는 번트 전문 선수가 된다.

A선수, B선수, C선수는 야구 타격에 있어서 자기 다름대로의 도를 추구한다.
A선수와 B선수가 추구하는 '도'는 다르다. 그리고 어느 선수가 추구하는 '도'가 우수한지 판별하기 힘들다.
여기서, 진정한 야구선수는 어때야 하는 지 생각해 보자.

진정한 야구선수는 변화구가 왔을 떄, 변화구에 맞는 스윙을 하고, 강속구가 왔을 떄 강속구에 맞는 스윙을 하는 선수다.
경우에 따라 번트를 댈 경우에는 정확히 번트를 대는 선수이다.

진정한 야구선수는 '도'를 추구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도'를 바꾸어 버린다.
그래서 진정한 야구선수이고, 장자는 이를 진인이라 불렀다.  

자기만의 '도'가 있어야 하지만, '도'에 목숨걸지 말아라.. 장자가 하고 싶은 말이 이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Posted by 수유너머104

[장자세미나-세미나후기] 인간세편




조정현(장자 세미나회원)





인간세 편은 공자와 공자의 제자 안회사이에 대화로 시작한다.
안회가 위나라로 가려고 마음을 먹고, 스승에게 이야기를 하는 중 다음 이야기가 나온다.

回嘗聞之夫子曰 : 저는 일찍이 선생님께서, 이르기를
治國去之 : '잘 다스려지는 나라는 떠나고
亂國就之 : 어지러운 나라로 들어가라,

"잘 다스려지는 나라는 떠나고, 어지러운 나라로 들어가라. "
이 대목은 논어의 내용과 상충이 된다

논어 태백편에서 공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危邦不入 亂邦不居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말고 어지로운 나라에 머물지 마라.

장자 인간세에 나오는 공자의 이야기와 논어 태백편에 나오는 공자의 이야기는 서로 모순된다.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장자가 공자의 말을 잘 못 옮긴 것일까? 아니면 장자는 공자를 일부러 풍자한 것인가?
난 장자가 공자를 풍자한 것으로 본다. 다음 부분에서도 공자에 대한 풍자가 보인다.

논어 자로에 나오는 부분이다.
子路曰 衛君 待子而爲政 子將奚先.
자로가 말하기를 “위나라 임금(出公 輒)이 선생님을 기다려서 정사를 다스린다면 선생님께서는 무엇을 먼저 행하시겠습니까?”
子曰 必也正名乎。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반드시 명(名)을 바로잡을 것이다.”
子路曰 有是哉 子之迂也 奚其正
자로가 말하기를 “이러한 일도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세상 물정을 모르십니다. 어떻게 명을 바로잡겠습니까?”

공자는 명(名)을 바로잡겠다고 하고, 자로는 이를 비판한다. 공자는 세상을 모른다고 하면서...
공자는 이러한 자로에게 야(野) 하다고 말하고, 자신의 논리를 편다. 명은 정말로 중요하다라고...

논어에서 공자는 명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장자 인간세에서 공자는 명(名)에 집착함을 비난한다.  

德蕩乎名 : 덕은 명에서 녹아없어진다. 
名也者 : 명이란
相軋也 : 서로 해를 끼치는 것이다. 
공자는 뒤이어 명을 흉기로 까지 비유한다.

논어 자로편을 읽고 장자 인간세를 보면, 공자는 인간세에서 제자 안회에게 자기 부정을 한다.
논어에서는 명을 바로잡아야 한다 하면서, 인간세에서는 명은 흉기라고 말한다.
공자에 대한 풍자이다.

도(道)라는 관점에서 공자와 장자는 공통된 면이 있다. 일반성, 보편성 보다는 개별성, 특수성에 관심을 두었다는 점에서 도에 대한 관점은 비슷하다.
그러나, 명에 이르면 공자와 장자는 전혀 다른 관점을 보인다. 공자는 명에 집착하였고, 장자는 명에 집착함을 위험하다 말한다. 

장자가 가진 명에 대한 입장은 노자 도덕경에서 확인할 수 있다.
名可名 非常名
常名에 대한 입장차이가 공자와 노자 사이에 뚜렷하다.

안동림번역에서 명을 명예로 번역하였다. 난 이 번역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장자에 젖어들어 살면서 체득한 바로는 명은 추상 개념을 말한다. 이 해석이 학술적으로 맞는 지는 관심이 없다. 내 체험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로 생각한다. 언어로 생각한다는 것은 기존에 이미 익힌 추상 개념으로 사물을 분류하고, 추상 개념으로 사물을 의식한다는 것.
우리는 추상개념이 보편성이 있고, 그래서 추상개념 자체를 부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학교 교육은 추상 개념을 가르치는 과정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개념을 배우지, 직접 체험하지 않는다.

우리는 달다는 추상개념을 익히고, 이후에 꿀은 달다는 정보를 배운다. 반대일 수도 있다. 꿀은 달다라는 정보로 부터 달다라는 추상개념을 익힐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추상개념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꿀이 달다라는 정보만을 배울때,  실제로 꿀을 먹는 체험을 하지는 않는다.    
추상개념으로 아는 정보와 체험으로 깨닫는 지식은 많이 다르다. 우리는 이를 경험으로 안다.

실제 꿀을 먹으면, 꿀은 달지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체험한다.  단맛도 있지만 쓴맛(인삼이 들어있다면)도 있다. 
미끌거리고, 끈적거리는 오묘한 맛이 섞여 있는 게  꿀맛이다.
이런 관점에서 장자는 명에 집착함을 경계한다. 꿀에 달다라는 추상 개념을 자동적으로 연관시키는 행위를 경계한다.

추상개념을 경계하면,  의식한다라는 것, 생각한다는 것도 경계하게된다. 
만약, 추상개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어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언어가 없다면, 의식도 없어진다. 이 경지가 망아(忘我)의 경지이고 이 경지에 이른 사람이 진짜 사람(眞人)이다.

장자가 떠나고자 한 것은 현실세계가 아니라, 언어에 속박된 세계다.
장자는 개념에 묶여 사는 것을 떠나고자 했지, 현실을 떠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장자는 자신으로 살고, 세계를 있는 그대로 살려고 했다.
나에 대한 개념을 세우고(예를 들어, 나는 군자다. 나는 대인이다), 이런 추상개념(군자,대인)을 나다움으로 규정하고 규정에 얽어매어져 살지 말고, 그냥 나를 살자고 말한 것이다. 이렇게 살때 인간은 창의적이 된다.

Posted by 수유너머104

 <일본어세미나> 일본노래,일본드라마로 살아있는 일본어를 배우자




엄선희(수유너머104 세미나회원)




어김없이 또 새해가 밝았습니다. 부디 여러분들의 새로운 한 해가 소원하는만큼 희망차기를 빌어봅니다. 늘 묵은 해를 떠나보내기 한 두달 전이 되어서야 문득 올해 내가 도대체 뭔가 하긴했나 하는 초조함이 밀려오곤 했었습니다. 2018년도 별반 다르진 않았지만 그래도 일본어 세미나 하나만은 즐겁게 열심히 했다는 것을 위안삼을 수 있었습니다. (다른 회원님들은 일본어 외에도 여러 강좌까지 열심히 참가하셨지만요.)  


다들 쉴새없이 생겨나는 다른 일들로 인해 아무리 예습 복습의 의지가 강해도 실천하기가 힘들다고 한목소리로 말합니다. 우리 세미나 동료들도 그렇구요.  하지만 예복습 부족에도 불구하고 반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저를 비롯한 동료들의 실력이 느리지만 향상되고 있다는 걸 수업 중에 늘 기쁘게 확인하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다행스런 결과가 나왔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선 젊은 피 충한샘 (반장)의 부드러우면서도 수업에 집중케 하는 능력과 첨단 IT 기술(?) 제공.. 그리고  세미나 동료들의 적극적인 공부방법 제안과 제시. 이 두 가지 요인에 더해,  다양한 자료들을 화상을 통해 살아 있는 수업으로 활기차고 재미있게 했던 게 유효했던 듯 합니다




일반 어학원은 같은 레벨 회원들로 반을 만들어 수업을 진행하고, 대개는 가르치는 선생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수유너머의 세미나는 다양한 실력차의 동료들이 개개인 모두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수업 방식으로 늘 세미나시간이 즐겁고 활기찹니다.  (단, 강독 수업은 난이도상  일본어 강의샘에게 많이 의존합니다.)


 따라서 초보인 분들도 두려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레벨이 어느정도 되는 분들도 낮은 레벨 동료를 끌어올려 주면서 동시에  스스로는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 설 수 있는 기회가 될  수유너머의 일본어 세미나로 초대합니다.


언어 공부는 재미없으면 집중도 안되고 중도에 포기하기 쉽습니다. 이 점에 역점을 두고 이번 봄학기 세미나는 지난 반 년 동안 시도해 본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어느 정도는 성과가 검증이 된 프로그램으로 준비했습니다.


수유너머의 일본어 세미나 과목을 설명하자면..


1. 강독..

일본어 책과 잡지 강독시간은 난이도가 꽤 있어서 실력자 윤봉샘께서 친절하게 강의해 주십니다. 다양한 분야에 걸쳐 일본의 소리를 심도있게 공부합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아래의 잡지.


주간 아사히 시사잡지 'AERA'



2-1.일본어 노래.. 

노래 가사를 공부하고 따라 부르다 보면 단어와 문장이 절로 외워집니다.  쉬운 노래라고 가사마저 우습게 보면 안되더라구요.  노래 한 곡에 담긴 단어만 외워도 어휘력 급등!





2-2.일본드라마 구간반복

재밌는 내용의 드라마를 반복하여 들어 숙지할 단어를 공부하고, 대화내용을  반복하여 읽고 연습합니다.  글로 배우는 회화가 아닌 살아있는 대화로.. 그것도 반복해서 입과 귀에 굳혀주기!



3-1.일본어한자

일본어는 한자공부가 기본이죠.  일본어를 공부하다가 덤으로 한자상식도 저절로 늘게되니 나중에 중국어 할때도 도움이 되겠죠^^  


3-2. 일본어 독해

체계적인 독해능력 향상을 위해 "일본어뱅크 일본어독해" 책을 교재로 채택했습니다.  새로운 단어를 공부하고 돌아가며  본문을 읽고 해석합니다.  


강독 이외의 과목은 배운 단어와 문장을 반복해서 외웁니다.  새로운 진도를 나가기 전에 전 주에 익혔던 것들을 다시 한 번 외우고 진행합니다.  서두르진 않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갑니다, 수유너머의 일본어 세미나!  가다보면 저 높은 곳에 어느덧 가있겠죠!


우리와 함께 걸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천천히 그러나 쉬지않고 게다가 즐겁게~~  




Posted by 수유너머104

[니체세미나] 정오에는 니체를 읽으세요



 류 재 숙 / 니체세미나 튜터




오전12시 한낮의 정오에는 니체를 읽으세요 

태양이 우리의 머리 위를 비추는 오전12시 정오. 니체는 인간의 그림자가 가장 짧아지는 순간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그림자는 인간이 만들어낸 오류인 신의 존재를 말하는데, 이때 신은 새로운 종교일 수도 있고, 국가권력, 자본, 화폐, 이념, 심지어 과학의 형상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초월적인 어떤 것을 위해 우리의 삶을 희생하게 하는 것은 모두 신의 다른 이름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위버멘쉬의 시간, 정오에는 니체를 읽으세요.

 

우리 삶의 정오에는 니체를 읽으세요 

새벽부터 하루를 출발한 사람도, 늦은 아침을 시작한 사람도, 이제 우리 삶은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고 있어요. 태양은 우리가 떠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만듭니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분기점에 서있는 누구라도, 그렇습니다. 삶의 정오에 서 있습니다. "내 삶은 이미 정해져버린 게 아닐까? 이번 생에는 틀렸어!" 니체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이 무슨 문제인가. 얼마나 많은 것이 아직도 가능한가!” 삶이 날카로워지는 정오에는 니체를 읽으세요.

 

별과 함께 춤추는 정오에는 니체를 읽으세요 

우리의 삶을 무겁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를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리는 중력의 신, 난쟁이는 어디에 있나? 서울 명문대를 목표로 초등학교부터 공부하는 아이들, 대기업공무원을 목표로 청춘을 희생하는 청년세대, 평균적 삶을 목표로 자기를 포기하고 사는 사람들. 니체는 말합니다. “춤추는 별 하나를 잉태하려면, 사람은 자기 안에 카오스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삶이 무거운 누구라도 별과 함께 춤추고 싶다면, 우리 삶을 혼돈 속에 빠뜨리는 니체를 읽으세요.

 

[니체전집읽기] 세미나에서 앞으로 읽을 책들

[니체전집읽기] 세미나는 니체가 생전에 출판한 책들을 읽는 세미나입니다.

니체를 읽는 것에 집중하기보다, 니체를 우리의 삶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_읽음서광》 1881. 즐거운 학문1882.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 선악의 저편1886. 도덕의 계보,

안티 그리스도,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찬가1888.

Posted by 수유너머104

'의미의 논리' 읽기







쁠라또(수유너머104 회원)





 G. Deleuze, The Logic of Sense, trans. Mark. Lester, Columbia University Press







본 세미나는 우리나라에서 아직도, 또는 여전히 가장 hot한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저작을 강독하는 공부 모임입니다.


들뢰즈는 아시다시피 수십 권에 달하는 많은 저작을 남긴 철학자인데,본 세미나는 그 중에서 박사학위논문으로 제출한 솔로 시절의 대표작인 <차이와 반복>과 필생의 친우인 펠릭스 가타리와 함께 쓴 다른 듀엣 시절의 대표작인 <안티 오이디푸스> 사이에 위치한, 그리하여 그의 두 대표작과 두 시기를 이어줄 교량 역할을 할 수 있는 또 다른 대표작인 <의미의 논리(Logique du sens)>를 읽고 있습니다.


교재는 영역본인 <The Logic of Sense>이며, 진도는 강독 형식의 세미나인 만큼 한 주에 2~3쪽 가량 나가고 있습니다. 들뢰즈는 가장 hot한 프랑스 철학자이지만 또한 가장 난해한 프랑스 철학자이기도 하기에, 이렇게 천천히 읽어가는 것이 오히려 그의 사상의 정수에 접근하는 빠른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어려운 도전이지만 또 분명히 땀 흘린 만큼 보상을 주는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 읽기>에 여러분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관심 있으신 분은 아래의 내용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명칭 : <'의미의 논리' 읽기>

- 목표 : 질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를 꼼꼼히 읽고 이해하기

- 교재 : G. Deleuze, The Logic of Sense, trans. Mark. Lester, Columbia University Press

          (인터넷서점에서 쉽게 구하실 수 있습니다.)

- 방식 : 영어 문장을 독해하고 내용을 분석하고 토론하는 강독 형식

- 일시 : 매주 토요일 오후 3시 30분 ~ 6시 00분 (2시간 30분)

- 장소 : 수유너머 104 2층 소강의실

- 문의 : 010-7799-0181 (김민우) 또는 plateaux1000@hanmail.net

Posted by 수유너머104

[청년인문지능] 소개




 박 소 라(수유너머104 회원)





[청년인문지능]은 인문학을 처음 공부하는 데 좋은 가이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세미나입니다. 특히 20,30대 청년들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함께 고민해보고자 합니다. 현실의 문제로부터 탈출하여 힐링을 찾는 인문학이 아니라, 우리 앞의 문제들을 고민하면서 그것들을 대면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새로운 사유의 장으로 나아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 세미나에는 튜터들이 있습니다. 튜터들은 지식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아니라, 더 건강한 토론이 진행되도록 먼저 고민해보는 사람들입니다.

 

세미나는 약 12주를 한 시즌으로 하여 진행됩니다. 세미나원들이 스스로 책을 읽어와 요약을 하고 질문을 던지며 토론하는 방식입니다. 매 시즌마다 마지막 시간에는 12주 동안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각자 에세이를 작성하여 발표하고 토론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여러 개념과 지식들을 스스로 익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삶을 새롭게 구성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18년에는 두 번의 시즌이 진행되었습니다.

시즌1의 주제는 인간을 이해하는 9가지 키워드였고, 시즌2의 주제는 우리가 정말로 세계를 알 수 있을까?” 였습니다. 두 번의 시즌에서는 중요한 개념들을 중심으로 철학자들의 생각을 공부하고 비교해보며 토론했습니다.


시즌1 : http://www.nomadist.org/s104/index.php?mid=intellect&page=4&document_srl=49367

시즌2 : http://www.nomadist.org/s104/index.php?mid=intellect&page=2&document_srl=75411

 

2019년에는 세 번의 시즌이 기획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시즌은 12주 정도 진행될 예정입니다.

시즌1(1~3)

시즌2(5~7)

시즌3(9~11)

철학

문학, 역사

과학, 수학

 

* 세미나 시간 : 매주 토요일 오후 3

* 시즌 1 기간 : 15~ 323(12)

* 시즌 1 교재 : ‘삶을 위한 철학 수업’, ‘철학과 굴뚝청소부

 


 


Posted by 수유너머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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