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동 수상자의 걸음

마르셀 뒤샹과 이상

 

 

 

 

 

                                                                                          금은돌(수유너머 회원)

 

 

 

 

 

1. 정지,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일

 

 

 

마르셀 뒤샹의 존재 방식은 운동이다. 뒤샹이라는 텍스트는 걷고 달리고 생각한다. 사유의 운동이자 작동이다. 그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미술 운동을 주도하였다. 길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술이 저곳에 있다고 말할 때, 그는 기존의 프레임을 무너뜨린다. 수직적 방식으로 예술이 작동할 때, 그는 옆으로 문을 연다.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예술이 아닌가? 그의 뇌는 작동한다. 이분법을 가로지른다. 정지하고, 운동하며, 재배치한다. 이질적인 오브제를 결합하여, 사고를 확장하고, 그곳에서 생각하라고 (은근히) 명령한다. 뒤샹이 가지고 있는 질문은 21세기 지금-여기에도 작동 중인 화두이다.

 

기존 프레임에 갇힌 사유구조를 깨뜨리고 싶을 때, 예술가는 질문할 권리를 스스로에게 부여한다.

 

이 세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 어떻게 전복시킬까?

뒤샹은 계단에서 걷는다.

정지하고, 운동한다.

 

 

2.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크로노포토그래피(Chronophotography)

 

운동성에 반응한 작품이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1912)이다. 뒤샹은 이 작품에서 기존 관습에서 벗어난다. 추상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움직이는 육체의 형태를 완성한다. 여기서 육체는 기계적으로 작동한다. 이 작품은 프랑스 생리학자 에티엔-쥘 마레의 크로노포토그래피(Chronophotography)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 프레임 안에서 피사체의 연속 움직임을 촬영 할 수 있는 카메라가 발명된 것이다. 연속 사진(motion picture)이다. 뒤샹은 인물의 육체를 기계처럼 구조화시킨다. 그리고 연속 동작을 멈추며, 위치 이동을 한다. 상체의 움직임과 다리의 운동성을 극대화함으로써 피사체 내부에 작동하는 세부 기관의 기계적 원리에 주목한다. 그렇기에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는 누드화였지만, 여성도 아니고 남성도 아닌 것으로 바라보게 된다. 젠더 구분을 탈피하면서, 인간의 육체를 기하학적인 운동성으로 사유하게 된다. 인간에 대한 관음적 시선과 젠더적 구별 등, 누드라고 하는 프레임에 갇혔을 때 발생하는 사회적 통념이 흔들린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그곳을 스쳐지나가는 순간의 흔적이자 평면적인 얇은 파편이었을 뿐이다. 인간의 몸은 원통과 실과 철사로 이어진 기계장치일 뿐이다. 역동성은 선과 선의 겹침과 반복으로 나타나고, 결과적으로 인간은 사라진다. 계단을 내려가는 기계의 동작만 남는다. 중력이 이끄는 대로 이행하는 물리적인 역동성이 남는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는 움직이고 있는 순간을 주목하기 위해, 정지시킨다. 정지함으로써 뒤샹은 움직임의 추상적인 선을 돋보이게 한다. “나는 움직임의 정적인 이미지를 창출해 내고 싶었다. 움직임은 일종의 추상이며, 실제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이나 실제 계단인지 아는 것과는 상관없이 그림의 내부에서 진술된 추론이다.”[각주:1] 화가는 시간을 세부적으로 분할하고, 쪼개지는 시간 속에 정지된 화면을 반복적으로 배치한다. 사실은 계단을 내려오는 장면이 운동성 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정지의 장면들을 연속적으로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움직임을 만든 것은 결국 그림에 편입된 관찰자의 눈이다.”[각주:2] 그림에 나열된 선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개입에 의해 역동성이 완성된다.

 

관찰자가 등장하는 순간, 그 시선에 의해 정형화된 흐름이 없는 파동이 입자로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 “전통적인 양자역학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관측을 시도하는 순간, 즉 측정이 이루어지는 순간 확률파동이 순간적으로 급격하게 변하면서 모든 가능성이 하나의 값으로 직결된다. 이것을 확률파동의 붕괴(the probability wave collapse)’ 현상이라고 한다. 이 붕괴란 양자가 파동으로서 그 어느 곳에서도 우리의 시각장 안에 고착화되지 않은 채 잠재 에너지로서 흐르던 것이 어느 순간 관찰자의 시선에 의해 그 파동을 버리고 입자를[각주:3] 택한다. 그림의 움직임과 역동성을 완성하는 것은 관람자의 시선이 개입한 결과이다. 화가의 표현이 완성되는 것 역시 관람자의 개입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20세기 전반은 세계대전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이 시기에 미술은 과거와 단절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결정론적 사고에 굳어버린 19세기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1905년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한다. 양자역학과 불확정성의 원리가 발견된다. 크로노포토그래피(Chronophotography)는 인간과 동물의 운동성에 대한 실질적인 사유의 폭을 넓혀 놓았다. 20세기 초 과학의 발달은 정치 사회 문화 등에 영향력을 발휘한다. 리스본에서는 페르난두 페소아가 수많은 이명을 만들어내며 글을 쓰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마르크스와 레닌으로 이어지는 사회주의 혁명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미술계에서는 미래주의, 구축주의, 큐비즘,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가 혼재되어 나타나고 있었다. 기존의 결정론적인 사고방식을 뒤집고 자본주의적 질서를 전복하려는 시도가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쇤베르크와 에릭 사티의 음악이 연주되고 있었고, 피카소와 기욤 아폴리네르는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무의미 시가 낭송되고 있었고 이 세상을 전복하려는 예술가, 특히 문학과 예술가의 화가의 결합이 공교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3. 이상(李箱), 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사람

 

2019년 뒤샹 전시[각주:4]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를 직접 보고 온 이후, 번뜩, 떠오른 사람이 있다. 1930년대 모던 보이 이상(李箱)이다. 시인 이상을 알아보았던 김기림은 "파리 가서 3년간 공부하고 오자. 파리에 있는 슈르 리얼리스트들하고 싸워서 누가 이기나 내기하자"고 제안한다. 뒤샹 역시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운동과 더불어 활동했던 화가였던지라, 그 연장선상에서, 건축기사이자 화가이자 시인이자 소설가인 그를 떠올리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각주:5]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앞에서 시인 이상의 건축무한육면각체AU MAGASIN DE NOUVEAUTES작품을 오버랩해 본다. 이 작품의 한글 제목은 새로운 기계이다.

 

           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

        의사각형.

사각이난원운동의사각이난원운동의사각이난원.

비누가통과하는혈관의비눗내를투시하는사람.

지구를모형으로만들어진지구의를모형으로만들어진지구.

거세된양말.(그여인의이름워어즈였다)

빈혈면포.당신의얼굴빛깔도참새다리같습네다.

평행사변형대각선방향을추진하는막대한중량.

마르세이유의봄을해람한코티향수를맞이한동양의가을.

쾌청의하늘에붕유하는Z백호.회충양약이라고쓰여져있다.

옥상정원. 원후를흉내내고있는마드무아젤.

만곡된직선을직선으로질주하는낙체공식.

시계문자반에ⅩⅡ에내리워진두개의젖은황혼.

도아의내부의도아의내부의조롱의내부의카나리아의내부의감살문호의내부의인사.

식당의문간에방금도착한자웅과같은붕우가헤어진다.

검정잉크가엎질러진각설탕이삼륜차에실린다.

명함을짓밟는군용장화.가구를질구하는조화금련.

위에서내려오고밑에서올라가고위에서내려오고밑에서올라간사람은밑에서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밑에서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사람.

여자의하반은저남자의상반에흡사하다.(나는애처로운해후에애처로워하는나)

사각이난가걷기시작한다.(소름끼치는일이다)

라디에의근방에서승천하는꾿빠이.

바깥은비. 발광어류의군집이동.

― 「AU MAGASIN DE NOUVEAUTES전문(1932)

 

이 시를 뒤샹의 시선으로 음미해 보자. 당시 경성에 고급백화점이 들어섰다. 백화점은 낯선 이방인의 침입과 같았고, 근대문명의 배달 창고였으며, 소비를 부추기는 욕망의 장소였다. 1930년대의 낯선 문명을 재빨리 받아들이던, 문화의 최첨단 아이콘들은 백화점 옥상 정원에서 자유연애를 즐기며, 멋을 부렸다. 판탈롱 바지, 에나멜 구두, 마드모아젤, 중절모, 스타킹, 코티향수, 비누, 엘리베이터, 가배차(·커피) 등 새로운 것을 익히고 쓰고 향유하였다. 백화점 옥상정원(屋上庭園)에서 그들은 자본주의 감각과 속도를 즐겼다. 거리에는 전차와 자동차가 있었다. 하늘에는 붕유하는 Z백호가 떠 있다. 이상은 비 오는 날 헤드라이트를 킨 자동차를 보고, '발광어류(發光魚類)의 군집이동(群集移動)'이라고 표현한다. 이 모든 것들을 낯설게 바라본다. 자기 나름의 언어로, 새롭게 명명한다. 그리고 추상화했한.

 

 

이것은 사물과 사물의 열거와 배치의 방식이다. 기하학적으로 표현된 언어의 기술과 반복의 효과이다.[각주:6] 사각형 건물 안에 사물과 인간이 움직인다. 반복되고 반복되는 도시의 일상과 그곳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분주함은 기하학적인 도형의 반복을 통해 나타난다. “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의내부의사각형카메라를 줌인(zoom in)하거나 줌아웃(zoom out)하면서, 혹은 롱테이크(long take)로 백화점이라는 공간을 평행으로, 사선으로 길게 보여주는 관찰법으로 선택할만하다. 건물의 외부 윤곽인 사각형을 ‘over view’ 위치에서 보여주고, 그 건물 안으로 한 단계씩 진입해 보는 것이다. 그 안에 회전문이 작동한다. 회전문의 원과 사각형이 사각이난원운동을 하는 문의 작동이 반복하며, 추상화된다. 그 다음에 콜라주 방식으로,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들이 열거된다. 비누, 지구본, 스타킹, 코티향수, 의약품 광고, 하늘에 떠 있는 비행선, 상품 광고 등이 보인다.

뒤샹이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에서 정지한 순간을 교차하며, 반복적으로 겹쳐 그리는 방식으로 인간-기계의 운동성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처럼, 시인 이상 역시 반복과 겹쳐 그리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시적 주체 는 전면에 등장하지 않지만, 주체는 1층에서 옥상정원으로 이동한다. 계단이 있고, 하늘이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 가장 높은 건물에서 바라본 시대 풍경은 어떠했는가? “명함을짓밟는군용장화가 있다. 그것이 보인다. 일제 강점기 당시 숱한 이름이 짓밟혔다. 감시와 억압과 처벌을 당했던, 1930년대 강제와 폭력과 억압의 현실이 있었다. 군용장화 아래, 제국주의와 식민 정책이 진행되는 가운데, 인간-기계가 작동한다. 그 사이에 다시 인간-기계의 운동성이 극대화된다.

 

위에서내려오고밑에서올라가고위에서내려오고밑에서올라간사람은밑에서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밑에서올라가지아니한위에서내려오지아니한사람.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계단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사람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사람들은 상행이거나 하행이라는 운동을 하고 있지만, 그들을 크로노포토그래피(Chronophotography) 의 장면으로 분할하여 바라볼 필요가 있다. 계단 위에 있는 그들은 인간-기계이고, 움직임/정지 상태가 반복된다. 밑에서도 올라가지 아니한 사람이고, 위에서도 내려가지 아니한 사람이 된다.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 결과 값이 달라진다. 시인 이상은 카메라 위치를 고정하지 않는다.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문장이 달라진다. 시간을 세분화하고 분할함으로써, 계단에 서 있는 존재자는 성 정체성마저 뒤섞인다.

   

여자의하반은저남자의상반에흡사하다.

 

그것이 여성인가() 아닙니다. 그럼 남성인가? 아닙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난 하번도 그것이 여성인지 남성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왜 내가 그것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까? 내 그림은 대상이 아닌 추상에 관한 것입니다.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는 움직임의 추상화입니다.”[각주:7] 뒤샹의 말처럼, 인간-기계의 움직임을 극대화하여 연동시켰을 때, 젠더 구분이 사라지면서, 남성도 여성도 아닌 상태에 다다르게 된다. 일종의 자웅동체의 몸을 구성하는 것이다.

 

 

 

엘리베이터의 상하 운동을 수평 운동(걷기)으로 치환함으로써, 다른 지평을 열어버린다. “사각이난가걷기시작한다.(소름끼치는일이다)” 대상이 낯설게 환기된다. 작용 가운데 정지. 상식적인 운동이 진행되는 가운데, 방향 바꾸기. 이 지점에서 환상이 펼쳐진다.

 

시인 이상은 언어로, 시적 추상화 작업을 거치면서, 삶과 현실의 문제, 여성과 남성의 이분법의 문제, 결정론적인 사고방식 등을 전복한다. 이 지점이 소름끼친다. 백화점 건물 구조와 상품이 콜라주 방식으로 배치되며 독자의 시선이 따라 움직이는 동선 역시 가변적이다. 그 사각형 공간 속으로 드나드는 인간 역시 새로운 기계(시 제목처럼)였던 셈이다. 마지막 부분, 수직 운동을 수평운동으로 전화하는 지점. 이곳에서 일시 정지하며, “사각이난가 걷기 시작할 때, 지극히 소름끼친다. 이 지점에서 시인 이상의 이상한 우월함이 있다.

 

 

4. 콜라주, 다리와는 닮지 않은 바퀴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필연적인 인과법칙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던 시기, 앞으로의 미술사 100년을 좌지우지할 거대한 회오리의 ’, 자전거 바퀴가 움직이고 있었다. 의자 위에 자전거 바퀴로, 카오스를 포함한 코스모스의 세계로, 사고의 전환을 위한 자양분이 만들어 지고 있었다. 뒤샹은 작품 안에 우연의 문제를 받아들인다. 실험의 방식으로 사고하고, 텍스트를 다루는 방식으로 변화 발전한다. 뒤샹은 다른 차원의 운동을 꿈꾸었다. 평면적인 2차원에서 3차원, 4차원으로 도약하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움직여야 했다. 운동과 정지, 사물과 사물의 관계를 고려해야 했다.

 

 

콜라주, 관계, 운동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작품이 뒤샹의 <자전거 바퀴>(1913)이다. 이 작품은 바로 언급하기 전에, 뒤샹과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각주:8] 1912년 가을, 뮌헨에서 파리로 돌아온 뒤샹. 그는 뮌헨에서 돌아온 이후 줄곧, 자신의 작업을 바꾸겠다고 굳게 다짐한다. 그해 10월 말 아폴리네르 등 몇몇 친구와 함께 프랑스 동부 쥐라 지방으로 자동차 여행을 떠난다. 뒤샹은 친구들과 기계와 인간의 유사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각주:9]

 

뒤샹은 아폴리네르의 이 문장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일까. 뒤샹의 작품이 아폴리네르의 문장에 영향을 준 것일까. ‘초현실주의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게 된 문장이 있다. “인간은 발걸음을 모방하려 했을 때, 다리와는 닮지 않은 바퀴를 창안했다. 인간은 이렇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초현실주의를 실천한 것이다.” 기욤 아폴리네르의 전위 연극 티레시아스의 유방(1916) 서문이다. 초현실주의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했던 아폴리네르와 두터운 교류를 유지해 왔던 뒤샹을 생각하면, 서로가 각자의 작업에 영향을 끼쳤을 수 있겠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뒤샹의 <자전거 바퀴>는 기계적이고 기능적이고, 산업적이고 핵심만 남은 물건을 좋아하는 뒤샹의 취향, 화려한 장식에 대한 깊은 혐오, 가정 내 물건은 절대적으로 단순한 것을 추구하는 그의 애호와 맞아 떨어진 작품이었다.[각주:10]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격인, 첫 번째 작품이었다. 결과적으로 뒤샹은 미술을 포기함으로써 미술을 얻는다.[각주:11] 예술가와 예술가의 만남, 사물과 사물의 만남. 그리고 문장과 문장의 만남. 이 모든 것들은 관계에 의해 작동한 것이다. 오브제는 반란의 도구가 되고, 일상의 맥락을 뒤집는 착란의 도구, 사유의 도구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사물과 사물의 결합이 중요해지면서, 무의식적인 연동과 우연성이 끼어들면서, 비결정론적 사고를 전복시킬 시대적 운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5. 둘이면서 하나, 절름발이 운동

 

  내키는커서다리는길고왼다리아프고안해키는적어서다리짧고바른

다리가아프니내바른다리와안해왼다리와성한다리끼리한사람처럼걸

어가면아아이부부는부축할수없는절름발이가되어버린다무사한세상

이병원이고꼭치료를기다리는무병이끝끝내있다

                                               ―「지비전문(1935)

 

 

 

이상의 시에서 이질적인 사물과 사물의 콜라주를 시도하고 있는 작품으로, 지비를 꼽고 싶다. 아내와 의 결합하기 어려운 걸음이 하나로 배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의 키는 크고 왼쪽 다리가 아프다. 콜라주는 어울리지 않을 만한 조합을 가지고 있다. ‘아내의 키는 작고 오른쪽 다리가 아프다. 이 두 사람이 이상한 환자처럼, 걷는다. 이인삼각경기를 하듯이, 절룩이며, 걷는다. 아프다는 것은 정지했다는 것이다. 정지할 수만은 없기에, 타자에게 기댄다. 옆 사람에게 기댄다. 나는 아내에게 의지하고, 아내는 나에게 의지한다. 절름발이. 두 사람이 하나의 호흡으로 걷는, 기괴한 걸음걸이가 탄생한다. 절름발이가 되어, 두 사람이 한사람인 것처럼, 이상한 운동성을 가진 콜라주의 효과가 발생한다.

 

절름발이의 운동성. 이것이 식민주의 시대에 최신의 모던함을 쟁취하고자 했던 지식인의 병든 내면 운동일 것이다. 종이비석, 지비(紙碑)인 셈이다. 부부의 걸음은 종이 위에서 정지한다. 아내와 나의 괴이한 걸음 콜라주는, 두 사람의 이질성을 하나의 아픔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이들은 이 세상을 진단하는 주체로 거듭난다. 둘이면서 하나인 주체는 여자의하반은저남자의상반에흡사한 몸을 구성하며, 이 시대를 견디는 자가 된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새로운 주체는 불연속적으로 운동하고, 연속적으로 정지한다. 환자이면서 의사라는 자격으로, 종이(텍스트) 위에서 자신의 시대를 진단하는 주체로 변화한다. 이 새로운 주체는 무사한 세상이 곧 병이었음을 자각한다.

 

 

 

 

6. 이상 & 에로즈 셀라비

 

이상(李箱)의 본명은 은 김해경(金海卿)이다. 김해경의 필명은 하나가 아니다. 이상(李箱)으로 자신의 이름을 바꾼 것은 1928년 경성고등학교 졸업기념 사진첩에서 발견된다.

이상은 여러 이름을 갖고 싶어했다. 1932비구(比久)’라는 필명으로 조선에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을 발표하고, ‘보산(甫山)’이라는 필명으로 휴업과 사정을 발표한다. 1934하융(河戎)’이라는 필명으로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삽화를 연재한다.[각주:12] 페르난두 페소아처럼 수십 개의 이명을 만들어, 각각의 이름으로 다른 스타일의 시를 쓰고 산문을 쓰듯, 시인 이상은 이상이라는 필명 이외에 다른 이름들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김해경은 전근대적인 사회에서 그에게 주어진 이름이었다. 따라서 김해경이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의무와 책임이 부여받는다. 예술가로서 거듭나기 위해 김해경은 가부장적이고 전근대적인 프레임을 벗어던져야 했다. 이런 운동성의 연장선상에서 이상이라는 필명이 필요했다. 전근대적인 사유방식과 관습에서 탈주하고 새로운 주체의 탄생을 염원하는 이름을 스스로 호명한 것이다. 선을 넘은 것이다. 이상한 가역반응이상이 나타날지라도, 이상(李箱)은 상자() 속에(마치 뒤샹의 녹색 상자[각주:13]처럼) 낯선 이상(異相)과 기존의 사유방식을 뛰어넘는 이상(理想)과 기하학적인 이미지의 운동성을 보여주는 이상(異常)을 담는다. 시인 이상(李箱)은 그 모든 것들을 뛰어넘는 이상(以上)이 되어야 했다. 이 필명의 언어 놀이를 통해, 시인은 자기 자신을 지우며, 삼차각설계도, 건축무한육면각체, 조감도, 오감도 등의 작품을 내놓는다.

 

 

 

 

이 지점에서 특이한 사진이 보인다. 그는 단지 낯선 이명으로 자신의 이름을 호명함으로써, 존재자에서 존재가 탈출하고, 다시 존재자의 몸 안으로 귀환하는 운동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1928년 경성고등학교 졸업 앨범을 살펴보면, 김해경이 이상한 옷을 입고 있다. 김해경이 이상으로 자신의 이름을 변경하면서, 저고리에 치마를 입은 것이다. 수많은 이름을 갖는 것 역시, 원심력과 구심력의 운동성을 극대화 하는 방법인데, 그는 젠더적 이분법마저 지워내려고 한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이상이 살아있었다면, 뒤샹의 에로즈 셀라비처럼, 적극적인 캐릭터를 부여했을까?

 

 

1920년대 뒤샹에게는 에로즈 셀라비(Rrose Sếlavy)라는 존재자가 있었다.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만 레이(Man Ray)와의 협업을 통해 적극적으로 그 형체가 구성된다. 에로즈 셀라비는 뒤샹의 또 다른 분신으로 그의 작품 세계에 영향을 끼친다. 에로즈 셀라비는 책을 출판하고, 작품에 그녀의 사인을 한다. ‘에로즈 셀라비로부터 혹은 에로즈 셀라비에 의한작품 활동이 시작된다. 원래 텍스트적인 실험과 언어 놀이를 좋아했던 뒤샹은 에로즈 셀라비를 통해 적극적인 역할 놀이를 한다. 여인을 구성하고, 그 여인에게 맞는 캐릭터를 부여하는 실험을 한다. 페르난두 페소아가 베르나르두 소아레스, 알베르투 카에이루, 알바르 두 캄푸스 등 수많은 이명을 만들어 내어, 그 이명으로 출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뒤샹 역시 자신의 페르소나를 만들어, 작품 활동을 한다.

 

 

 

 

고정된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과정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적 의미를 갖는다. 기존의 정체성을 뛰어넘어, 위계적인 권력과 질서를 전복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남성이기도 하고 여성이기도 한, 수행적 과정에 놓여있는, 이상한 운동을 하는 육체를 만든다. 그 가운데 우연적인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지금-현재의 운동성을 수용한다. 수행과 과정으로서의, 새로운 주체는 언제나 새롭게 구성되며, 실험된다. 순간적인 운동과 정지 가운데, 시대적인 규정성에서 탈피하는 것이다. 미규정적인 상태로 미끄러지는 일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이상한 상태, 그렇기에, 아무 것도 아닌 상태이기에, 그 무엇이 될 수 있다.

정체성은 순간마다 새롭게 구성될 수 있다. 다른 지점으로 위치이동 할 수 있고, 낯선 입자이자 파동으로써, 해석될 수 있다. 미규정적인 상태로, 경계를 지우는 일. 이것이 중요하다. 정치, 젠더, 지역, 민족 등 다양한 분야로 행위하고 수행하는 열린 주체로서 미지의 영토 위에 존재 가능하다. 레디메이드를 통해,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를 지우려고 했던 것처럼, 뒤샹은 에로즈 셀라비라는 캐릭터를 등장시켜, 남성 중심의 사회 질서에 대한 웃음과 조롱을 던진다. 언어게임과 언어 놀이를 일삼았던, 셀라비는 작품에 사인을 하고, 향수병 라벨로 등장하면서, 미규정적으로 작동한다.

 

 

 

 

7. 옥상정원, 아무 것도 없다

 

일층우에있는이층우에있는삼층우에있는옥상정원에올라서남쪽을

보아도아무것도없고북쪽을보아도아무것도없고해서옥상정원밑에있

  는삼층밑에있는이층밑에있는일층으로내려간즉동쪽에서솟아오른태

 양이서쪽에떨어지고동쪽에서솟아올라서쪽에떨어지고동쪽에서솟아

 올라서쪽에떨어지고동쪽에서솟아올라하늘한복판에와있기때문에시

계를꺼내본즉서기는했으나시간은맞는것이지만시계는나보다도젊지

않으냐하는것보다는나는시계보다는늙지아니하였다고아무리해도믿

어지는것은필시그런것임에틀림없는고로나는시계를내동댕이쳐버리

고말았다.

                                        ―「운동전문(1931)

 

이 시는 시적 주체의 상승과 하강의 반복 운동이 나타난다.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힘겹게 계단을 오르내리는 시적 주체의 운동이 펼쳐진다. 옥상정원까지 올라간 시적 주체는 옥상정원에서 그 무엇을 찾지 못하였기에, 1층으로 허무하게 내려온다. 이 과정에서 시적 주체는 욕망하는 그 무엇을 가진 상태였다. 그 최고의 지점인 옥상정원에 가 보니, 아무것도 없다.

 

  시적 주체의 운동이 옥상정원이라는 곳을 올라가는 것은 의 상승 욕망이 작용했음이다. 하강운동은 실패하거나 절망하면서, 지상으로 복귀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지상으로 내려와서도 자연의 운동은 꿋꿋하게 지속된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는 태양의 운동이다. 사흘이 흐른다. 인간-기계가 (그것이 욕망의 추동일지라도) 한번 상승하고 하강하는 운동을 할 동안, 자연의 운동은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동쪽하늘과 서쪽 하늘을 오고간다. 지상에 두 발을 딛고, 생활을 지탱해야 하는 생활의 시간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나흘째 되는 날, 시적 주체는 하늘 한복판을 바라본다. 그곳에서 시적 주체가 하는 일은 태양과 시계를 동시에 콜라주 하는 것이다. 정오의 순간, 지상의 시간성을 인정하면서도 시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시계는나보다도젊지않으냐하는것보다는나는시계보다는늙지아니하였다고아무리해도믿어지는것이다.

 

24시간 속에서 시적 주체의 위치를 규정하고자 하지만, 그 어느 것도 규정될 수 없다. 다만 믿어지는것이다. 옥상정원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 무()였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위치를 규정할 수 없음을 재확인한다. 지상의 시간은 맞지만, 시계의 시간에, 시적 주체의 그 어느 것에도 자리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아니었다. 12이라는 숫자를 가진 시계의 규정 속에서 시적 주체를 바라볼 것인가, 24라는 하루의 숫자를 기준으로 시적 주체의 주치를 설정할 것인가. 이것은 관찰자의 개입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양자역학의 원리와 같다. 결국 주체의 입장과 위치, 시선에 따라 결과 값이 달라진다. 그리하여 시적 주체는 시계를내동댕이쳐버린다.

 

 

 

시인은 규정가능한 것과 완결된 규정 속에 예속되지 않는다. 시계를 버림으로써, 탈주하고자 한다. 옥상정원에 올라가는, 욕망의 최상위 것을 향해 지향하는 일은 지상에서 무화되어 버린다. 인간-기계의 영역조차, 규정적인 것을 넘어서, 미규정적인 수준까지 끌어올린다. 모든 운동성 안에서 시적 주체는 미규정적 가능성에 그 자신을 열어놓는다. ‘추상기계가 되는 것이다. , 아무 것도 없다. 아무 것도 아니다. 운동이라는 것은 욕망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다.

 

무의미하고, 텅 빈 상태. 지극한 무()의 회전 운동. 시인은 지극한 미규정성 속에서 단지 운동할 뿐이다. 운동과 정지의 관점에서 이 지구를, 이 우주를 사유하다보면, 모든 것은 운동의 충돌과 그로 인한 효과들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사물도 사물 나름의 법칙을 가지고 운동을 하고 있고, 자연도 자연의 흐름에 따라 피고 진다. 모든 것들이 운동하는 가운데 삶과 죽음의 경계선이 지워진다. 주체의 고정성 역시 무너진다. 무한 그 자체의 작동 원리를 존중하는 것이다. 우주가 그 자체의 힘으로 존재를 유지하려는 힘, 코나투스(conatus)가 존중된다. 코나투스에 대한 굳건한 믿음, 시인 이상은 그 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굳건하였다.

 

 

 

 

8. 거동 수상자, 자네는 할 수 있겠나

 

 

뒤샹은 이렇게 말한다. “회화는 이제 끝났어. 저 프로펠러보다 더 나은 것을 누가 만들 수 있겠어? 말해보게, 자네는 할 수 있겠나?”[각주:14]

 

그는 움직이는 사물들에서 강력한 오브제를 발견한다. 여기서 오브제는 초현실주의자들이 말하는 일상용품들이 평범한 부르주아의 일상적 관습적 맥락을 깨드리는 반란의 도구가 된다. 아폴리네르는 입체파 화가들에서 테크놀로지의 아름다움을 감지하는 화가의 감수성이 그의 예술 세계의 핵심적 특징이라고강조한다. “어쩌면 예술과 대중을 화해시키는 일은 미학적 고민에서 자유롭고 에너지에 관심을 갖는 마르셀 뒤샹 같은 예술가에게 달려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하면서 뒤샹을 칭찬한다. 아폴리네르는 현대의 스타일은 기계적 인공물의 세계, 특히 자동차나 오토바이나 비행기 같은 빠른 운송기계에 기반 해야 한다는 확고한 믿음[각주:15]을 드러낸다.

운송기계에 대한 감각은 오브제의 감각으로 이어진다. 사물은 곧 오브제가 되어 회화의 영역을 깨드린다. 굳이 붓을 들지 않아도 된다. 개성이 작품에 표현되지 않아도 된다. 주체 가 아니어도 우연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사물과 사물의 만남으로, 예술적 효과가 발생한다.[각주:16] 작가는 다만 발명하고 선택하면 될 일이다. 어떤 사물과 사물을, 거리가 먼 사물을 접붙일 것인가? 콜라주할 것인가? 이런 조화와 배치가 중요해진다. 이 과정에서 예술이라는 무게와 권위가 무너져 내린다. 뒤샹은 기하학과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오가면서, 원근법을 이용하고 때로는 원근법을 벗어나는 실험하고 재구성한다. 캔버스 대신 유리를 캔버스 삼아 작업하고 주체 역시 생각하는 사물로 객관화한다.

 

 

 

생각하는 사물, ‘는 곧 명명하는 자로 변화한다. 사인(sign)하는 자로 만든다. 뒤샹은 원본이 사라지게 함으로써, 다수의 복제본을 만들어, 예술 작품의 가격을 조정한다. 오브제의 일상적 반란을 도모한다. 서명하는 자는 자유자재로 판단하고 활자를 적는다. 이때 무엇을 예술로 볼 것인가? 라는 질문이 발생한다. 예술을 사건으로 만드는 자리에 뒤샹이 존재한다. 이것은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라고 질문의 확장이다. 장르를 어떻게 뛰어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1915년 뒤샹은 <자전거 바퀴>를 프랑스에 두고 뉴욕으로 떠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술가는 영혼으로 자신을 표현해야 하며, 예술 작품은 그 영혼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 이후 1917년 뉴욕 독립미술가협회에 <>이 출품된다. 뒤샹은 사건을 일으키고, 사람들의 습관적인 사고를 전복시키는 사건의 주인공이었다.

 

  벌판한복판에 꽃나무하나가있소 근처에는 꽃나무가하나도없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를 열심으로생각하는것처럼 열심으로꽃을피워가지고섰소. 꽃나무는제가생각하는꽃나무에게갈수없소 나는막달아났소 한꽃나무를위하여 그러는것처럼 나는참그런이상스러운흉내를내었소.

                                      ―「꽃나무전문 (1933)

 

 

  여기에 또 다른 거동이 수상한 자가 있었다. 이상은 옥상정원의 이상을 보기 위해 193610월 일본으로 떠났다. 뒤샹은 뉴욕으로 떠난 뒤, 미술사적으로 조명을 받는 거장이 된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당시 김해경은 거동 수상자로 지목되어 19372월 사상 혐의로 검거된다. 동경은 이상이 꿈꾸던 옥상정원이 아니었다. 서구세계를 모조한 도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안 이상은 서울로 귀국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한다.[각주:17] 그는 열심히 꽃을 피웠다. 참으로 이상한 방식으로, 달아나고 운동하던 꽃나무를 만나고자 하였다. 영매와 같은 꽃나무를 위해서, 그는 기성적 권위를 거부하고, 새로운 양식과 기법으로, 새로운 시, 거꾸로 가는 시, 전위로 가는 시, 이상한 시를 완성하였다. 이상은 자신을 믿으며[각주:18], 운동하였던 것이다. “한꽃나무를위하여참으로 이상한 운동을 진행하였던 것이다.

 

 

  * 굵은 글씨는 필자

 

 

금은돌 : 발로 공부하는 사람이다. 2008년 『애지』에 평론을, 2013년 『현대시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하다. 연구서 『거울 밖으로 나온 기형도』를 비롯하여 평론집 『한 칸의 시선』『그는 왜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까』가 있다. 2008년 교통사고 당시 살아있는 것은 바라보는 일이다라는 문장이 스치고 지나가다. 그 이후 눈동자를 그리기 시작하여, 다섯 번의 개인전(<눈에 대한 낭만적 독해>)과 네 번의 단체전을 갖다. 2017년 여름 리좀 국제예술인 레지던스 작가로 참여하여, 프랑스 화가 Sylvie Deparis을 주제로 전시를 열다. 1인 잡지 MOOK 발행인이다.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기형도의 비가 2)라는 믿음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현재 '수유너머 104'에서 공부하고 있다 

  • <그림이 있는 글>은 그림과 시, 예술 작품과 문학 작품을 연결하여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하는 공간입니다. 가끔은 제가 직접 그린 그림과 글을 올리기도 하고, 에세이류의 글을 올릴 계획입니다.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 『시와 사람』, <예술산책>, 2019년 여름호 발표 



 

  1. 김정현, 「뒤샹의 작품과 그의 일상에 나타난 우연의 문제」, 『현대미술사연구』, 2013, 114쪽. 뒤샹의 말 재인용. [본문으로]
  2. 김정현, 같은 글, 114쪽. [본문으로]
  3. 김정현, 같은 글, 115쪽. [본문으로]
  4. 마르셀 뒤샹展 2018.12.22(토) ~ 2019.04.07.(일) 장소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2전시실 [본문으로]
  5. 시인 이상은 경성고등공업학교에서 건축을 배우며 수학, 설계, 숫자, 선에 대한 기본 사유 방식을 익힌다. 조감도를 그리고 청사진을 찍고, 건축 설계를 하고, 계획하는 자의 시선으로 건축물을 투시하는 눈을 획득한다. 화가로서 그림을 그리며, 서구의 미술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이상은 보성고보 고희동 미술교사로부터 입체파와 미래파의 특성을, 선명학교 재학 중에 만난 화가 구본웅으로부터 역원근법과 큐비즘적 공간에 대한 해석 등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다. 이재복, 「李箱 시에 나타난 다다이즘적 특성에 관한 연구」, 『한국언어문화』 제18집, 305~306쪽. [본문으로]
  6. 이지연, 「이상(李箱)과 러시아 아방가르드」, 『한국현대문학회 학술발표회 자료집』, 2010, 87쪽. 연구자 이지연은 “이 때 ‘사각이 난 원’ 이라는 표현은 사각형을 빨리 돌렸을 때 만들어지는 원을 연상시키며 이것은 하름스가 「원에 관하여」에서 언급한 직선들의 무한한 꺾임을 통한 원의 형성과정과 유사하다. 즉, 사각의 원은 무한은 아니지만 무한에 다가가는 하름스의 cisfinitum의 논리를 반복하면서 이상의 텍스트 속 평 면 세계가 무한성을 얻게 되는 원칙을 설명해 준다. 즉, 「건축무한육면각체」의 첫 번째 시는 사각 형들의 무한한 중첩과 펼쳐짐을 통해 무한히 펼쳐지는 내부를 지니는 백화점이라는 공간의 풍경을 담는다.”고 말한다. [본문으로]
  7. 매슈 애프런 외, 『마르셀 뒤샹』, 현실문화연구, 2019, 35쪽. [본문으로]
  8. 뒤샹에게는 기욤 아폴리네르라는 시인이 있었다. 아폴리네르는 그의 뇌를 자극하는 도끼와 같았다. 뒤샹은 텍스트, 종이의 세계에 이끌린다. 책은 움직이는 지식 상자였고, 이동하는 전시관(녹색상자)이었고, 활자화 된 그림이었다. 뒤샹은 1912년 11월 고문서 학교의 사서 훈련 교육을 받는다. 1915년 뉴욕으로 떠나기 전에는 생트-주느비에브 도서관에서 자원봉사자로 근무를 한다. 도서관은 뒤샹에게 미술계에서 도망칠 수 있는 일종의 도피처였다. 하지만 사실 그것 이상이었다. 뒤샹의 작품과 글, 인터뷰 등을 통해 우리는 그가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며 고대 철학을 비롯해 원근법과 광학에 대한 르네상스 논문을 광범위하게 읽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뒤샹은 메모광이기도 했다. 노트에 자신의 예술 활동과 창작 아이디어를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리고 언어 실험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뒤샹은 그의 애인이었던 레이놀즈와 ‘책 프로젝트’를 하기도 한다. 알프레드 자리(Alfred Jarry)의 1921년판 『위비 왕』의 장정 작업을 한다. 그 이후에도 텍스트와 연계된 잡지 작업 등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아폴리네르를 위한 작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에나멜을 칠한 아폴리네르> 그림이다. 산업용 페인트를 홍보하는 기존의 양철 광고판에 브랜드 이름을 가리고 기욤 아폴리네르의 성과 동음이의어를 만들어 그에 대한 존경을 표하였다. ‘마르셀 뒤샹(으로부터)라고 서명해 (’마르셀 뒤샹에 의한‘이라고 하지 않고) 자신이 공예로서의 회화에서 멀어졌음을 강조했다. 매슈 애프런, 『마르셀 뒤샹』, 현실문화연구, 2019, 46~89쪽. [본문으로]
  9. 아폴리네르가 죽은 뒤 뒤샹은 초현실주의 운동을 주도했던 앙드레 브르통을 만나 뉴욕의 초현실주의 운동의 핵심 인물로 활동한다. 초현실주의 잡지 『VVV』를 만들기도 한다. 매슈 애프런 외, 『마르셀 뒤샹』, 현실문화연구, 2019, 45쪽. [본문으로]
  10. 매슈 애프런 외, 『마르셀 뒤샹』, 현실문화연구, 2019, 65쪽. [본문으로]
  11.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 위해, 미술을 업으로 삼지 않는다. “그림이 직업이 되는 순간 화가는 자신의 작품을 시장의 요구에 맞출 수밖에 없게 되므로 예술은 죽는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질문을 던지는 자가 되기 위해, 미술을 직업으로 삼지 않는다. 거리 두기를 시도한다. 미술과 존재. 예술과 생계. 이 모든 것들이 점점 멀어질수록 그는 잘 보이기 시작했다. 우물 안에서는 우물의 크기의 하늘이 보일 뿐이다. 뒤샹은 우물 밖으로 벗어났기에 다른 위치에서 거리를 두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눈치 보지 않을 수 있었다. 거리를 두는 일, 그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 앞에서, 예술이라는 직업에 얽매였을 때 발생하는 피곤과 눈치를 거부하기 위함이었다. [본문으로]
  12. 졸업앨범에 그는 “보고도 모르는 것을 폭로시켜라! 그것은 발명보다도 발견! 거기에도 노력은 필요하다”라는 이상의 친필이 담겨 있다. 권영민 엮음, 『이상 전집』, 뿔, 2011, 391~394쪽. [본문으로]
  13. 뒤샹은 예술가는 단독자이고, 노마드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행 속에서, 뒤샹의 <여행 가방 속 상자>는 그의 주요 작품들 이 복제의 형식으로 ‘여행용 가방’처럼 이동할 수 있도록 제작하였다. 필자는 21세기 녹색 상자는 곧 스마트폰, 노트북이라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14. 매슈 애프런 외, 『마르셀 뒤샹』, 현실문화연구, 2019, 43쪽. [본문으로]
  15. 매슈 애프런 외, 같은 책, 43쪽. [본문으로]
  16. 이런 의미에서 주체의 문제가 등장한다. 자기 고유의 정체성을 무너뜨리고 여성으로, 타자로 자신을 만듦으로써, 주체는 운동성을 갖는다. 로트레아몽 『말도로르의 노래』의 네 번째 노래에 보면, “네 번째 노래를 이제 시작하려는 자는 사람이거나 돌이거나 나무이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발화하는 자는 한 명이 아니다. 발화하는 주체는 세계와 자연 속에 잠재해 있는 어떤 보편적인 어떤 목소리를 받아 적는다. 사물은 더 이상 고정되어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무엇이 주체이고 무엇이 대상인지 그 경계가 모호해진다. [본문으로]
  17. 뒤샹과 이상을 하나의 선상에 놓고 단순 비교할 수 없다. 누가 누구에게 영향을 받아서, 일방적으로 예속되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상상을 멈추고 싶지는 않다. 일제강점기가 아니었다면, 이상은 어떻게 살았을까, 어떤 작품을 썼을까. 다만 꿈 꿔 볼 뿐이다. [본문으로]
  18. 뒤샹 역시 이런 말을 남긴다. “대개 사람들이 ‘나는 알아’라고 말할 때 그들은 사실 아는 게 아니라, 믿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자신이 진정한 개인임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활동의 형태가 예술이라고 믿습니다. 오직 예술에서만 인간은 동물적 상태를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술은 시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영역들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이기 때문입니다. 산다는 것은 믿는 것입니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믿습니다.”매슈 애프런 외, 「제임스 존슨 스위니와의 인터뷰」, 『마르셀 뒤샹』, 현실문화연구, 2019, 178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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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M.C.에셔 (2)

- 스무 살, 미발표작을 중심으로

 

 

  금은돌 (시인, 화가)




 


 

6. M. C. 에셔의 변형

        

M. C.에셔[각주:1]의 그림을 떠올려 본다. 『거울 밖으로 나온 기형도』에서 M.C. 에셔의 그림으로 기형도 시의 시적 주체의 특이점, 흐르는 주체를 설명한 적이 있다.

 

아래 그림 제목은 Metamorphosis이다. 변형 혹은 변이이다. 그림의 출발은 활자이다. 제목 그대로 Metamorphosis이다. 활자는 사각형이 되고, 사각형은 도마뱀이 된다. 도마뱀은 육각형으로 변이되고, 벌집이 되고, 벌집에서 벌이 날아가고, 벌은 물고기가 되고, 물고기는 새가 되고, 새는 점차 사각형이 되고, 체스 판이 되고, 체스 판은 Metamorphosis 활자가 된다. 왼쪽으로 시작하건, 오른쪽에서 출발하여 그림을 보건, 시작과 끝은 같다. 변이 과정에 숱한 이미지들이 놓여있지만, 변주 대상에 리듬이 가해지면서, 이미지는 곡선처럼 흐른다. 정주하는 것 같지만, 운동한다. 노래하며 몸을 바꾼다. 주어의 자리를 타자에게 내어 주는 방식과 같다. 동시간대에 공존하는 생명이다.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다른 형태를 띠지만, 그들은 흐르며 호흡한다. 다른 인칭을 가졌을 뿐, 하나의 존재로 작동한다.

 

이 과정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도록, 그림을 두 부분으로 잘라 보았다. 그 사이에 그 다른 무엇이 들어와도 상관없다. M.C. 에셔는 바흐의 음악을 틀어놓고 작업을 했다고 한다.[각주:2] 그는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변주를 시킨다. 그 대표적인 동물이 도마뱀이다. 그리고 사각형과 육각형의 변주가 그 안에서 음악과 함께 흐른다. 하나의 형태가 형태를 바꾸어, 다른 모습을 가진 물체로 변화한다. 새는 물고기로 변하고, 물고기는 개구리로 변하고, 개구리는 새로 변화한다.

 

 

 Metamorphosis II 1940 Woodcut in black, green and brown, printed from 20 blocks on 3 combined sheets. 3895mm x 192mm.

 

이 변형의 과정은 다름 아닌되기의 과정이다. 활자 - 되기이고, 동물 - 되기이고, 사물 -되기이고 아무 것도 아닌 것 되기이다. 처음으로 - 되기이다. 변주를 거쳐, 상이한 주체, 다양한 주어의 자리에 선다는 것은 시인의 능력을 배가시킨다. 시인이라는 존재가 허름하고 나약하고 연약한 것 같지만, 실은 다양한 능력을 갖추었음이다. 물의 유동적인 상상력으로, 시인은 자유를 획득할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변주의 자유로움을 생성할 때, 시인에게 해방 공간이 열린다. 이것이 시인의 능력이다. 타자들과 공존하는, 블록을 만드는 힘이다.

 

 

 Metamorphosis II 1940 Woodcut in black, green and brown, printed from 20 blocks on 3 combined sheets. 3895mm x 192mm.

 

시인은 다양한 되기의 능력을 가진 존재자이다. ‘되기의 능력을 통해, 현재 자기 자신이 가진 장소를 벗어난다. 다른 곳으로 위치 이동하면서, 또 다른 존재의 목소리를 불러들인다. 이것이 시인이 그 시대에 해야 할 역할이다. 따라서 시인은 새로움을 향해 나간다.

 

M.C. 에셔의 그림은 활자에서 시작하여 활자로 돌아온다. 리듬과 변주가 있는 형태 변형을 마치고, 고요히, 자기 자리로 돌아온다. 이 모든 과정은 일정한 축적 위에서 이루어진다. 축적이 필요하다. 사각형의 축적, 새의 축적, 도마뱀의 축적 위에서, 형태를 조금씩 변화하면서, 다른 지점으로 가 닿는다. 위상적으로 다른, 처음의 위치이다. 이곳은 처음이 아니지만 처음이다. 다른 곳으로 성숙을 한 위치, 나선형의 어느 다른 지점이다.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지만, 차이를 가진, 어느 일정한 같은 자리이다. 한계를 극복한 처음이고,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처음이다. 질적으로 다른, 변형의 자리에 시인이 서 있다.

 

에셔의 그림은 이러한 사유 구조를 보여준다. 먼 여행을 떠났다가 귀국하는 과정을 말이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담담하게. 아름답게. 역동적으로 정지하듯이.

 

 

7. 다양한 껍질, ‘

 

 

空中으로 솟구친 길은

그늘을 끼고 돌아왔고

아무것 알지 못하는 그는

한줌 가슴을 버리고

떠났다.

 

車窓 안쪽에 비쳐오는

낯선 거리엔

大理石보다 차가운

幻影이 떠오른다

아무것 알려 하지 않는 그는

미련 없이 머리를 깎았다.

 

그는 나보다 앞선 歲月을 살았고

나와 同甲이었다.

 

감싸안은 두 발이

천장을 디디고 휘청거리는데

단단히 굳어버린 鋪道엔 바람이 일고

이 밤은 여느 때마냥 춥다

            -껍질전문(1978. 3)

 

 

이 시는 기형도 시인이 고등학교 3학년 시절, 18살에 쓴 시이다. 기형도는 한국 현대시에서 3인칭 를 가장 잘 활용한 시인이 아닐까, 한다. 기형도 시의 특이점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는 누구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는 시인의 껍질이다. 제목 그대로 유추해 보면 그러하다. 시인의 분신이자 나의 시적 분화(分化) 결과이다.

 

그는 떠난 자이다. 동시에 먼 여행을 하고 돌아온 자이다. 그의 여행은 험난했다. “공중으로 솟구친 길은 그늘진 어둠을 동반하고, 정처 없는, 목적을 상실한, 그는 뜨거운 가슴을 버렸다 

그는 결연한 결심을 하였는지, 머리를 깎았다. 시인의 눈에 그는 幻影일지 모른다. 그것이 환영일지 모르는 가능성은 다음 문장에서 나타난다.

 

감싸안은 두 발이

천장을 디디고 휘청거리는데

 

그는 어디에 서 있는가? 시적 주체인 나는 어디에 위치하는가?

 

 

                                Relativity 1953 Lithograph. 294mm x 282mm.

 

 

 

그는 시적 주체와 동갑이나 시간적으로 나보다 두터운 시간을 경험한 존재자이다. 같은 시간 선상에 살고 있지만, 다른 층위의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자이다. 동시간대를 살지만 다른 질감을 가진, 두터운 시간의 경험을 가진, 그런 존재자이다. 그와 나는 서로를 냉정하고 차갑게 대한다. 공기가 차갑다.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려하지 않는다. 앞선 세월을 살았지만, 그와 나는 연결되어 있다. 그가 정상인가? 내가 정상인가? 분명한 것은 시적 주체의 위치이다. 시적 주체가 두 발을 천장에 디디고 있다. 박쥐처럼.

 

천장에 자리한다.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이 문장의 정확한 주어가 누구인지, 분명치 않다. 그일 수도 있고, 나 일수도 있다. 사실, 나의 위치가 천장이라고 상정해 놓았을 때, 그가 오히려 땅 위에 존재할 수 있다. (기형도 시의 특이점 중의 하나는 발이다. 그는 발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무의식에서 발은 사라진 형태로 진술된다. 이 시에서도 발은 무엇엔가 감싸 안겨 있다. 왜 그럴까?)

 

시의 첫 행이 공중으로 솟구친 길인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M.C.에셔의 그림처럼, 그와 나의 위치가 역상이었던 것이다. 좌우의 역상이 아니라, 상하의 역상이었던 것이다. 그가 천장에 있건, 내가 천장에 있건, 중요하지 않다. 상대적이다. 어디서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가 냉정하다는 말은 다시 말해 내가 냉정하다는 뜻의 발화이다. 그가 떠났다는 구절은 내가 떠났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상대적인 위치에 따라, 바라보는 지점이 바뀔 뿐이다. “=이다. 이들은 같은 껍질을 공유한 존재자이다. 같은 진동과 진자의 파동을 공유하고 있는 존재이다. 침묵으로도 탯줄이 연결되어 있는, 텔레파시로 서로를 호명하는 존재자들이다. 그렇기에 기형도 시에서 3인칭 는 유령처럼, 홀연히, 호출된다. 빈번하게 그의 목소리가 솟아난다. 느닷없이 등장하고, 그를 알아챌 즈음, 사라진다.

 

 

8. 반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主語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전문 (1979.10)

 

 

 이 시는 기형도가 열아홉에 쓴 시이다. 생전 미발표작이지만, 『잎 속의 검은 입』에 수록되어 있다. 앞서 소개한 껍질이라는 시가 78년 작품이라는 감안하였을 때, 그 연장선상에서 해석할만한 하다.

시적 주체인 나는 主語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이다. 접붙이기가 가능한, 그러나 이미 많은 세월을 살아버린, 시간을 선취한, 흐르는 주체이다. 나무의 중심 뿌리를 지향하지 않는다. 리좀이다. 중간의 어느 지점에서 접붙이기를 시도해도 된다. 시적 주체는 내가 자신이 낯설어 보일 때,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할 때, 일차원적인, 크로노스적인 시간에서 벗어난다. 낯선 감각이 온몸에 돋아날 때, 단선적인 시간을 초월할 때, 미래의 시간이 접붙이기 된다. 다른 차원의 시간을 살았던 가 동갑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가능한 이유는 영혼이 눈을 뜨기 때문이다. “눈을 뜨면평범한 일상이 뒤틀어진다. 눈을 뜨는 순간, 사건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현상을 해석하는 위치가 달라질 수 있다. 전개가 뒤집어지는 변곡점이 달라질 수 있다. 눈을 뜨는 순간, 차원이 열리고, 눈을 뜨는 순간, 병이 병이 아니게 된다. 눈을 뜨면, 병은 함께 더불어 가야할 친구가 된다. 눈을 뜨는 순간, 시가 다가온다.

 

시적 주체는 아픔과 병을 단선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병을 오히려 미적 가치를 지닌 대상으로 승화한다. 늙어간다는 것은 단풍드는 일이다. 병을 짊어지고 사는 것은 몸에 대한 예민한 감각으로, 마음을 모시는 일이 된다. 지극히 몸을 돌보는 일이다. 미래의 시간을 선취하는 감각을 보였던 기형도에게, 스무 살이지만, 저 멀리서 시간을 내려다보는 듯한 시인에게, 이런 인식과 표현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이러한 인식 덕분에, 병은 아름다워진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기꺼이 미학적으로 물들어, 스스로 죽음을 맞이한다. 해방이 된다이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고, 아상(我相)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Liberation 1955 Lithograph. 199mm x 434mm. Order Prints

 

 

 

 

내가 거듭 변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거듭 변하기 위해 나는 지금의 나를 없애야 한다. 그것이 구원이다.[각주:3]

 

 

기형도에게 빈 주어의 자리는 구원으로 가는 한 방편이었을까? 타자에 이르는 길이었을까? 열아홉의 기형도가 스물 아홉의 기형도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스물 한 살의 기형도는 15,16살의 기형도에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을까? 왜 이리 조숙했을까? 왜 이리 출발점이 달랐을까? 스무 살의 기형도에게 묻고 싶다. 세 편의 시를 통해서, 에셔의 그림을 함께 보며, 그의 다양한 들을 불러내어, 중얼거려 보고 싶다. 당신의 시가 내 운명을 바꾸었다고. 내가 잠시 당신의 집에 머물다 흘러나왔다고. 발표 연대를 알 수 없는 미발표작 희망을 소환하여, 당신에게 낭독해 주고 싶다. 나 역시 그러했다고. 스무 살의 기형도에게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언제부턴가 너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언제부턴가 아무 때나 나는 눈물 흘리지 않는다

                           -희망(발표연대 알 수 없음)

 

 

               Day and Night 1938 Woodcut in black and grey, printed from 2 blocks. 677mm x 391mm.

 

 

 

 

 

 

 

 

 

 

 

 

 

금은돌 : 발로 공부하는 사람이다. 2008년 『애지』에 평론을, 2013년 『현대시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하다. 연구서 『거울 밖으로 나온 기형도』를 비롯하여 평론집 『한 칸의 시선』이 있다. 2008년 교통사고 당시 살아있는 것은 바라보는 일이다라는 문장이 스치고 지나가다. 그 이후 눈동자를 그리기 시작하여, 다섯 번의 개인전(<눈에 대한 낭만적 독해>)과 네 번의 단체전을 갖다. 2017년 여름 리좀 국제예술인 레지던스 작가로 참여하여, 프랑스 화가 Sylvie Deparis을 주제로 전시를 열다. 1인 잡지 MOOK 발행인이다.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기형도의 비가 2)라는 믿음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현재 '수유너머 104'에서 공부하고 있다 

  • 해당 글을 음성 파일로 만들어 올려 놓았습니다. 화면으로 글을 읽기 힘든 분들, 음성으로 들으셔도 좋습니다. 1인 잡지 무크 <돌>을 펴냈던 지난 작업을 이어, 1인 잡지를 이어 나갈 계획입니다. 

  • <그림이 있는 글>은 그림과 시, 예술 작품과 문학 작품을 연결하여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하는 공간입니다. 가끔은 제가 직접 그린 그림과 글을 올리기도 하고, 에세이류의 글을 올릴 계획입니다.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  2018년 가을호 『시와 사람』, <예술산책> 발표


 


  1. 모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1898~1972)는 네덜란드 판화가이다. 동물, 새, 물고기 들을 반복적으로 대칭 배열하면서 일정 단위로 반복되는 전체적인 패턴을 구성하였다. 이때 형상과 배경, 평면적인 패턴과 명확한 3차원적 후퇴감 사이의 모호함을 이용한 시각적 환영을 정교하게 사용했다. 1944년경부터 그의 작품은 시각적 비현실성을 보여주는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띠었다. 이러한 작품들에서는 3차원적 구성을 2차원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시각적 환영, 사실과 상징, 시각과 개념 사이의 관계 등을 다루면서 실제 경험상으로는 모순된 것에 합리적인 느낌을 부여했다. 책의 해설을 맡고 있는 얀 W. 베르뮐레는 에셔의 그림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에셔의 이미지는 현대를 사는 인간의 고립과 소외의 경험을 표현한다. (중략) 에셔의 작품은 이 세상이 보이는 것 그대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현실은 긍정되는 동시에 부정되고 있으며, 객관화되는 동시에 상대화되고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세계는 차가운 분위기와 팽팽하게 긴장된 생소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세계에 대해 거리를 두면서도 감정적으로는 몰입하게 된다. M. C. 에셔, 이유경 옮김, 『M.C. 에셔, 무한의 공간』, 다빈치, 2004, 162쪽. [본문으로]
  2. 에셔는 독일 음악가 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1750)의 작품에서도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흐의 음악은 내 작품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같다. 내가 시각적 이미지를 복제하는 것과 유사하게 바로크 시대 작곡가들 또한 소리의 복제를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내게 무척 인상적인 일이다." [본문으로]
  3. 기형도 전집 편찬위원회 엮음, 「무등에 가기 위하여」, 『기형도 전집 』, 문학과지성사, 2011, 302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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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M.C.에셔 (1)

- 스무 살, 미발표작을 중심으로

 

  금은돌 (시인, 화가)

 

 

 

 

 

1. 스무 살의 기형도

 

시인 기형도의 스무 살은 어떠했을까? 그는 어떤 청춘을 보내고 있었을까? 그의 스무 살이 궁금하다. 기형도는 등단 이후, 4~5년 간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다가 급작스러운 죽음(198937)을 맞이했다. 알려진 대로 기형도 시인은 중학교 3학년 때 손위 누이 기순도 씨의 죽음을 겪은 뒤, 시를 쓰기 시작했다. 사춘기 무렵이다. 여기서 가정법을 가동시켜보자. 그가 습작 기간 내내 시를 썼다는 가정이다. 1985년에 <동아일보> 등단까지 그는 10여년의 시간이 있었다. 무리한 설정으로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필자는 기형도 시인은 등단 이후의 시기보다, 습작기, 문청 시절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세대학교에 입학 후, 연세문학회 활동을 하면서 본격적인 습작 시기를 갖는다. 방위병 시절 수리시 동인 활동을 할 때 발표했던 사강리나 연세대학교 윤동주 문학상 수상작인 식목제의 경우,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 실린 시와 별반 다르지 않다. 포도밭 묘지역시 1986년에 발표하였지만, 이 작품은 1982년에 거의 완성되었다. 기형도는 한 편의 시를 거의 외울 정도가 되어서야, 깔끔하게 정서된 문서로 보관하였다. 퇴고 과정에서도 펜으로 끊임없이 고쳐 썼다. 시를 완성했을 때에는 정확한 날짜를 기입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등단한 이후에도 문예지에 발표한 시를 복사하거나 정서한 상태로 보관하였다. 시집을 구성할 때도 직접 시의 배열도를 작성했다. 각 시편들에 일정한 점수를 매기며, 시집 배열 구성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각주:1]

 

 

등단제도를 제거하고 보았을 때 사실, 그는 이미 시인이었다. 등단 여부와 상관없이, 시인이었다. 시적인 몸을 만들고, 시를 노래하고, 시를 향유하며, 시로 숨쉬고, 시로 살고 죽었다. 주변 친구들에게 자신의 시를 읽어주기를 좋아했고, 자신의 시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도 엄격하고 냉정했다. 새로운 시선을 갖기 위해 제3의 길을 가기 위해 유행에 편승하지 않았다. 거리에서, 시를 품고 살았고, 시를 쓰지 못하면, 몸과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어떤 다른 이름보다 시인이라 불리기를 원하였다. 파고다 극장에서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 그의 자리엔 시집 원고가 든 가방이 있었다. 그 가방 속엔 제3의 길이 있었다.

 

 

2. 3의 길을 선택하는 방식

 

지금의 나는 참여시(혹은 민중시), 순수시라는 작위적 이분법이 소재주의에 불과한 것이라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당대를 살아가는 詩人의 가치지향성에 위배되는 허약함이라 비난받을 수 있겠으나, 나는 모든 사물과 그것들이 빚어내는 구조 및 현상에 대한 끝없는 탐구를 통하여 예술적 美學과 현실적 가치체계(혹은 理想型으로서의 질서공간) 모두에 접근하고 싶다. 전자의 구체적 이미지와 후자의 상관주의(칼 만하임의 의미에서)가 서로 만나고 부딪히는 詩世界는 나에게 다양성을 제공해 주는 무수한 時流적 갈등을 강요할 것이다.[각주:2]

 

 

 

                 기형도문학관 시벽,  1985년 당시 기형도의 필체가 담긴 미발표 자료

 

 

기형도는 갈등하고 있었다. 고민하고 있었다. 참여시와 순수시라는 이분법에 그 자신이 길들여지지 않으려고 했다. 이분법을 가로지르는 방법을 모색하고 선택하려 했다. 바둑을 둘 때, 포석을 깔듯이, 자신의 집을 지으려고 했다. 참여시와 순수시 사이를 가로지르는 제3의 길을 찾고자 했다.

 

등단하기 전부터 이런 고민과 모색이 있었기에, 그는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필자는 그가 어떤 방식으로 출발하고자 했는지, 그 출발선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시적 태도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보는 일이다. 스무 살로 돌아가는 일이이다. 1979~1980년으로 돌아가 보는 일이다. 스무 살에 썼던, 등단 이전의 시라고 얕보지 말자. 당시 문예지에 발표하지 못한 미발표작이라고 비평의 대상에서 제외시키지 말자.

 

 

3. 시의 , 그리고 시인

 

기형도 시인은 꼼꼼하고, 섬세하고, 집착도 있고, 완벽주의적 성향도 있고, 자신의 글에 대한 자부심도 높은 편이었다. 신문기자 생활을 할 때, 데스크 결재 때문에 자신의 글이 고쳐지는 것을 그 무엇보다도 싫어했다.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이고 지상에 두 발을 디디고 있으면서도 환상적이었다. 신문사 재직 시절, 시를 쓰는 마음으로 기사를 작성하였다고 한다. 밤새 기사를 수정하고 다듬었다. 심지어, 데스크 편집장의 결재가 떨어진 기사조차 자신의 맘에 들지 않으면, 다시 수정하였다.(직장 내에서 한 번 결재 난 원고를 다시 수정하는 일은 드물다고 할 수 있다. 편집장의 결재가 떨어진 신문기사를 말단 기자가 수정하여 신문에 내는 일은 징계이다.) 그는 남의 말을 잘 듣는 것 같지만, 타자의 말에 흔들리는 편은 아니었다. 경청하지만, 무엇을 결정할 때, 신중했다. 조심스러웠다. 심사숙고 기간이 긴 편이었다. 한 편의 시를 퇴고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예민하고 또 신중했다. 한 편의 시는 이미지와 사유의 축적 결과이다. 자신의 길을 가야한다는 생각이 확고했기에, 조숙했다. 미래의 시간을 선취하여, 미리 시 속에서 늙어버렸다. 그의 이러한 기질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스무 살 때부터 나타난다. 19802월에 집필한 시 시인 1을 살펴보자.

 

 

              나의 主人 없는 바다에서 一萬 갈래

             물살로 흘렀다. 一千 갈래는 고기떼로 표류

하였다 그 중 너덧 마리는 그물에 걸리었다.

 

한 마리는 뭍에 오르자 곧 물새가 되어 날아갔다.

부리가 흰 물새는 한번도 울지 못하고 죽었다.

그는 하늘에 올라가 구름이 되었다. 물새의

九萬里 공중을 날다가 비가 되었다. 내릴 데

없는 물 같은 비가 되었다.

                                          -시인 1전문 (1980. 2)

 

 

 

이 시는 기형도 시인이 대학 2학년 시기에 쓴 시이다. 의미심장하게도 시인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시인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투절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가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인은 어떠한 존재일까?

 

 

                             기형도 시인이 사용하던 타자기

 

 

 

4. ‘~이다가 아니라 ‘~되다

 

시를 쓰는 일은 혼()의 영역에서 작동한다. 비가시적 영역의 존재자가 등장하는 것이다. 귀신의 영역이다. 실재하는 에너지이다. 에너지는 형태를 바꾼다. 시는 “~ ~이다가 아니라 “~~되다의 문장 구조를 가진다. 시인은 되다의 주어 격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그 주어 역시 불확정성의 대상일 뿐이다. 구체적인 유일무이한 존재자가 없다. “主人 없는 바다라는 구절이 그것을 뒷받침해 준다. 주인 없는 바다에서 一萬 갈래 물살로 흩어지는 것이 시혼의 출발 방식이다. 시인의 영혼은 一千 갈래 고기떼와 같다. 그 물고기는 뭍에 닿자마자, 물새가 되어 날아간다. 작품으로 완성되는 것은 한 마리의 물고기일 뿐이다. “부리가 흰 물새는 한번도 울지 못하고 죽는다.” 시인의 글쓰기는 비인칭적 죽음을 동반한다. 텍스트 위에서의 죽음이고, 글 쓰는 자의 죽음이다. 울음 한 번 크게 내뱉지 못한 자의 죽음이다. 시는 배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빈 텍스트 위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론(詩論)을 만들어 간다.

 

물새가 된다. “그는 하늘에 올라가 구름이된다. “물새의 혼은 구만리를 떠돈 뒤, “가 되어, “물같은 비가 되어 흐른다. 주인 없는 바다에 도착했을 것이다. 이 과정을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순환의 과정이 담긴 “~되기라고. 액체의 유동적 상상력이다.

 

 

     나의 一萬 갈래 물살(주인 없는 바다) 一千 갈래 고기떼

    한 마리 물고기() 물새(하늘) 구름(물새의 ) (물 같은 비)

 

 

 

 

 

5. 흐르는 주체가 되어

 

기형도 시인의 시적 주체의 특성은 물의 물질적 특성을 흐르는 주체라 명명한 적이 있다. 물의 변화 과정처럼, 기형도 시의 시적 주체는 순환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 주어의 자리는 비어 있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주어의 자리에 그 무엇이 와도 된다는 뜻이다. 주어의 자리에 그 자신의 몸을 내어준다는 뜻이다. 그의 시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의 첫 구절로 유명한 정거장에서의 충고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나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시인의 몸은 빈집과 같다. 그러니, 그 어떠한 혼이 머물렀다가 떠나도 된다. 혼의 집이다. 몸에서 혼이 새어나가는 길, 몸에서 새어나가는 시. 액체 성질로 흐르는 길. 모든 것들이 정처 없이 빠져나간다. 흐르는 길 위에 서성이는 시적 주체 역시 흐르는성질을 지닌다. 그 물결 위에 어느 누가 와서 발을 적셔도 된다. 기형도 시의 공간은, 시의 육체는, 주어 자리는 비어있다.

 

비어있기에 “~되기가 가능하다. 그 자리에 주어 / / 가 인칭이 자유롭게, 도착할 수 있다. “이고 가 될 수 있다. 비어있는 장소에 어느 누가 와도 상관없다. 그의 유고작품이라 알려져 있는 빈집역시 이러한 맥락 위에 있다. 그의 시는, 아니 그의 시집은 전체는 하나의 구멍으로 연결되어 있다. 각 시편에서 발견되는 구멍이 하나의 구멍으로 이어진다. 비어있음 덕분에, 시집 전체적으로 건축적 구조를 갖는다. 시집 전체가 하나의 건축 구조물처럼 바람이 통한다. 배관 파이프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기형도 시집의 특이성을 찾기 위해서는 주어의 비어 있음뿐만 아니라, 공간의 비어있음을 살펴야 한다. 비어있음 덕분에, “주어의 자리에서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 주어의 변주가 결과적으로 서술어의 운동성을 강화한다. 시 전체적인 움직임을, 활동적으로, 틈과 틈 사이를 벌려 놓는 작용을 한다. 슬픔과 결핍과 회한과 안타까움의 구멍을 열어놓는다. 감정과 사건과 바라봄의 시선이 시집 전체에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하나의 흐름으로 완성된다.

 

 

 

 

                                 기형도 시인이 연주하던 기타

 

 

 

5. 공존의 블록

 

모든 되기는 공존의 블록이다[각주:3]공존하기 위한 시적 장치이다. 변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공존하기 위한 것이다. “되기를 시행하는 것은 나의 자리에 타자를 모시기 위함이다. 불어, 함께, 따로, 같이 호흡하기 위함이다. 말로만 비어있음을 말하지 않고, 시적 실천을 하기 위한 것이다. 할 수 없는 가운데 할 수 있는 것을 찾기 위한, 생성과 변화를 위한 출구를 모색하는 길이다.

 

비가 2-붉은 달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성과 혼자라고 하는 개별성이 공존하는 문장이다. 개별적인 혼자는 모두 위대하다. “위대한이라는 부사어가 특별히 꾸미는 것은 혼자라는 개별성이다. 각기 위대한 개별자들이 모여, “우리를 형성한다. 그런 다음 기형도는 주문을 건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죽은 영혼이건, 낯선 타자의 목소리건, 이 시대의 암울함과 고단함을 버티고 견디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어떻게 살아있어야 할 것인가? 몸 안에 다양한 혼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것은 영매가 하는 일이다. 영매는 다른 존재의 목소리를 담아 두는 그릇이다. 영매의 몸은 감각적인 스위치로 작동한다. 타자가 몸 안에 들어서는 순간, ON. 나의 목소리에 압도되지 않고, 타자의 목소리가 시인의 몸 안에서, 시적 주체의 허름한 육체에서 새어나간다.

오후 4시의 희망을 비롯한 여타 시에서 나오는 낯선 목소리들의 실체는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고, 소리 1에서 보이는, 낯선 목소리가 새어나간다. 유령과 같은 신비로운 존재가 감지된다. 시적 주체는 자신의 자리를 내어줌으로써, 타자의 목소리를 듣는 자가 된다. 허공에 떠도는 존재들이 기꺼이 존재자의 몸에 담기도록, 기꺼이 투명해지는 것이다. 시적 주체의 비어있음은 주어 없음과 연결된다. 따라서 시인은 변화무쌍한 혼을 담는 존재자가 된다. 스무 살의 기형도는 이것을 어찌 알고 있었을까?

 

 

 

  금은돌 : 발로 공부하는 사람이다. 2008년 『애지』에 평론을, 2013년 『현대시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하다. 연구서 『거울 밖으로 나온 기형도』를 비롯하여 평론집 『한 칸의 시선』이 있다. 2008년 교통사고 당시 살아있는 것은 바라보는 일이다라는 문장이 스치고 지나가다. 그 이후 눈동자를 그리기 시작하여, 다섯 번의 개인전(<눈에 대한 낭만적 독해>)과 네 번의 단체전을 갖다. 2017년 여름 리좀 국제예술인 레지던스 작가로 참여하여, 프랑스 화가 Sylvie Deparis을 주제로 전시를 열다. 1인 잡지 MOOK 발행인이다.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기형도의 비가 2)라는 믿음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현재 '수유너머 104'에서 공부하고 있다 

  • 해당 글을 음성 파일로 만들어 올려 놓았습니다. 화면으로 글을 읽기 힘든 분들, 음성으로 들으셔도 좋습니다. 1인 잡지 무크 <돌>을 펴냈던 지난 작업을 이어, 1인 잡지를 이어 나갈 계획입니다. 

  • <그림이 있는 글>은 그림과 시, 예술 작품과 문학 작품을 연결하여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하는 공간입니다. 가끔은 제가 직접 그린 그림과 글을 올리기도 하고, 에세이류의 글을 올릴 계획입니다.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  2018년 가을호 『시와 사람』, <예술산책> 발표

 

  1. 금은돌, 󰡔거울 밖으로 나온 기형도󰡕, 국학자료원, 2013, 182쪽. [본문으로]
  2. 같은 책, 186쪽. 이 원고는 󰡔기형도 전집󰡕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 육필 원고는 2012년 11월 28일 기형도 시인의 작은 누이 기애도 씨와 필자의 인터뷰 과정에서 󰡔거울 밖으로 나온 기형도󰡕 책에 소개, 발굴한 것이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이 책에 소개되기 전, 광명시 철산도서관 3층, 기형도 특별전을 통해 공개된 적이 있다. (기애도 누이와 기형도 기념사업회의 도움이 있었다.) 2017년 11월에 개관한 기형도문학관 입구 왼쪽 바깥에 위치한 시벽으로 온전히 재현되어 있다. 이 자료 원본은 기애도 누이가 소장하고 있다. 시벽 조성 사업은 기향도 누이가 주도적으로 진행하였다. [본문으로]
  3.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옮김, 󰡔천 개의 고원󰡕, 새물결, 2003, 553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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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한 걸음 앞의 시 (2)

-자코메티와 김수영

 

 

 

                                                              금은돌 / 시인, 화가

 



 

 

3. 작품, ‘를 바라보는 일

 

 

누구든지 매혹되었을 때, 그는 그가 보는 것을 사실은 보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것은 즉각적 인접성 속에서 그를 만지고, 비록 이것이 그와 절대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그를 사로잡고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매혹은 근본적으로 중성의 비인칭적 현전에, 미정의 그 누구에게, 얼굴 없는 거대한 어느 누구에게 관련되어 있다. 매혹은 시선이 맺고 있는 관계, 시선 없고 윤곽 없는 깊이와, 맹목적이기에 보게 되는 부재와 맺고 있는 그 자체로 중성의 비인칭 관계이다.[각주:1]

 

동생 디에고의 얼굴을 그리거나 조각으로 만들 때, 자코메티는 포즈를 취하는 순간부터 대상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고 고백한다.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그게 누구인지, 그 정체를 알 수 없다. 익숙한 것 앞에서, 망각의 강을 건넌 후에, 자코메티는 동생 디에고를 보고 있지 않았다.

 

를 바라보는 일은 단순하지 않다. ‘에게서 에게로 찾아가는 길이다. 아상(我想)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를 탈출하는 일이고, ‘에게 도착한 이후, 다다랐던 지점에서 탈영토화 하는 일이다. 이 과정은 중성적이고 비인칭적이다. 이 과정에서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의 낯선 가 눈앞에 등장한다. 대상에 도착하기 전에, 원래의 대상이 지워진다. ‘는 누구인가? “누군가가 있다. 내가 홀로 있는 곳에. 홀로 있다는 사실에. 그것은 나의 시간이 아닌, 너의 시간이 아닌, 공동의 시간이 아닌, 하지만 어느 누구의 시간이 죽어 버린 시간에 내가 속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어느 누구는 아무도 없을 때에 여전히 현전하는 자이다.(……) 어느 누구는 얼굴 없는 그, 사람들이 제각기 그 일부를 이루는 그 누구이다.”[각주:2]는 예술가와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어느 지점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비인칭적 존재이다. 타자의 시선과 공간이 제거된 상태에서 만나게 되는 존재자이다.

 

고독하다. “어느 누구도 아닌 자가 된 나, 타자가 된 타인을 발견하러 가는 과정에서 만난 누군가는 공간 속에 침묵을 드리운다. 그리하여 내가 존재하는 곳에서 나는 더 이상 나에게 말을 건넬 수 없고, 나에게 말을 건네는 자는 를 말하지 않고, 그리고 그는 그 자신이 아니다.”[각주:3] 누구인지 모르는 과정에서 길을 잃는 자가 되어, 작가는 알 수 없는 를 찾는다. 고독한 가운데 직면하게 되는 는 타자이자 나이다. 그러므로 매혹은 고독의 시선, 끊이지 않는 끝나지 않는 시선이다. 그 시선 속에서 맹목 또한 여전히 시각이다. 더 이상 본다는 것의 가능성이 아니라 보지 않는다는 것의 불가능, 그 자체를 보이게 하면서 끝나지 않는 시각 속에-언제나 언제나-지속되는 불가능으로서의 시각이다.”[각주:4] 자코메티는 나는 디에고의 얼굴에서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를 그리면서, 비인칭적 누군가를 만나고, 그 안에서 또 다른 를 만나게 된다.

 

문학 역시 에게서 로 가는 길 위에 있다. 카프카는 자신에 대한 관찰에서 견딜 수 없는 현실을 넘어 또 다른 세계, 자유의 세계로 이르는 드높은 관찰로 가는 해방의 통로[각주:5]를 발견한다고 말한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를 말하기를 거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를 제거하는 일이, ‘를 찾는 출발점이 될 게다. 카프카는 로 대체할 수 있을 때,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그때라야 문학에 들어섰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작가는 아무 것도 아닌, 비어있는 공간에 자리하는 존재자가 된다. 아무 것도 아닌 상태에서, 나에게서 로 가는 고독한 과정에서,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어 다른 세계를 여는 사람인 게다.

 

그러므로 바라본다는 것은 세계를 여는 행위가 된다. 수동적인 태도로 눈꺼풀만 뜨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지로 모험을 떠나는 일이다. 모험은 끝나지 않는 여정을 포함한다. 그 과정이 치열하고 엄숙해야, ‘다른 세계가 열린다. 다시 한 번 다른 차원으로의 도약이 가능하다. 다른 세계가 열리는 관찰은 이전에 시작했던 관찰이 아니다. 나선형의 다른 지점, 질적 축적이 쌓인, ‘드높은 관찰이다. 색다른 통로가 열린다. 바라봄 속의 또 다른 바라봄의 세계가 열리고, 그 열린 세계 속에 다시 관찰하며 새로운 공간이 펼쳐진다.

 

 

자코메티의 조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조각이 가진 생명체와 영원성 때문에, 그 조각들을 절대적으로 바라본다. 관람객은 그 시선에 이끌린다. 자코메티가 캐롤린에게 매혹 당하였던 것처럼, 시선 속의 시선으로, 우리는 홀림을 당한다. ‘환원된 것이 아니라 환원을 벗어나 환원할 수 없는 것으로서, 공간 속에서 조각들은 깊이가 아닌 깊이, 이미지라는 것의 깊이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공간의 주인이 된다. 우리가 조각들을 환원할 수 없는 것으로 바라보게 되는 이 지점은 우리를 무한에 위치하게 하는 지점, 여기가 그 어느 곳과도 일치하지 않는 지점이다.”[각주:6]

 

캐롤린를 바라보고 있는 알베르토 자코메티

 

 

 

자코메티는 일본 철학자 야나이하라(그의 아내 아네트와 사랑에 빠졌던 일본의 철학자이기도 하다)를 모델로 삼아, 작품을 만들었다. 자코메티는 당시 작업 과정을 이렇게 진술한다. “내가 당신의 얼굴을 그린다는 것은, 아무도 탐험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고 우리는 함께 그 모험 속을 들어가려는 참이오.”[각주:7] 바라봄의 세계에서, 미지를 찾아 헤매는 일은 몽롱한 환상의 세계로 빠지는 것과 같다. 그 지점에 다다를 때, 시선은, 스스로, 구멍을 찾는다. 어느 차원의 어느 지점에서 만날지 모르는 낯선 영토를 찾아간다. 그 영토를 만나기 위해, 촉수를 곧추세우고, 방황한다. 그 길은 끝이 없다. ‘에게서 에게로 가는 길. ‘에게 다가갔다가 에게 돌아오는 길. 이것은 침묵의 운동이다. 벗어나려는 원심력과 에게서 에게로 돌아오는 구심력을 가진다. 이 운동은 원반던지기처럼, 작품을 시작할 때마다 반복된다. 끊임없는 운동은 그 자체로 무한성을 가진다.[각주:8] 해결되지 않는 미스터리처럼 반복되고 무한 변주된다. 끝을 알 수 없는 지점으로 여행을 떠나는 일에 창작자와 대상이 동시에, 하나의 곡을 완성한다. 더불어 협주하며 시선을 주고받으며 투쟁한다. 치열하게 주고받던 시선은 그 자체로 영원성을 획득한다.

 

미로에서 건져 올린 작품은 뒤늦게 태어난다. 묘사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재현하는 게 아니듯이, 조각은 죽음의 공간에서 생의 차원으로 건져 올려진다. 구체적인 공기가 낱낱이 발현되고, 얼굴은 내밀한 감정과 사건을 품고 오롯이 부활한다. 자연스럽게 건져 올린 흉상은 주변의 공기를 집어삼킨다. 작품은 전시장의 허공을 끌어당기고, 흉상의 시선은 관람객의 눈빛을 훔친다. 어느 장소에 놓이건, 생명을 얻은, 영원함을 얻은 조각품은 그 자체로 존재의 존재자가 된다. 조각 작품은 그 자체로 절대적이다. 소멸하는 인간보다 영원하게 살아남아서, 지금, 여기 우리 앞에 있다.’ 마치 저 먼 미래에서 다가온 예언자처럼, 저 먼 과거에서 불려나온 이집트의 미라처럼, 해골만 남은 인도 수행자의 육신처럼, 저 스스로 존재한다.

 

지코메티의 시선은 무한에 위치하게 하게 하는 지점에 있고 그 어느 곳도 일치하지 않는 지점에 가닿는다. 그곳에서 숨 쉰다. 단순히 숨을 쉬는 게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진다. 예술가의 영혼이 담긴 숨을 저장하여, 그 숨을 동시에 뱉어낸다. 전시장에서 자코메티의 숨과 대상의 숨과 그 시간을 뛰어넘은 숨이, 관람객의 숨과 뒤섞인다.

 

작가는 에게로 향하는, 객관적 시선과 외부의 시선을 갖기 위해, 저 멀리 다른 차원의 운동을 하면서, 천천히 자신의 몸으로 돌아온다. ‘에게로 갔다가 자신의 홍채로 돌아온다. 환상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일. 그 과정에서 는 낯선 가 돌아올 영토를 마련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사라진다. 글쓰기에서도 나타나는 일이다. 글 쓰는 자는 끊임없이 사라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백지 위에서 죽는 자이기 때문이다. 빈 텍스트 위에서 죽지 않으면, 비인칭적 죽음을 겪어나가지 않으면, 낯선 시간을 경험할 수 없다. 낯선 얼굴을 만날 수 없다. 글을 쓰는 자는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를 사라지게 하고, 끊임없이 미지의 공간을 여는 역할을 하는 자에 불과할지 모른다. 다가올 누군가에게 미지의 자리를 내어주는 사막 속의 낙타일지도.

 

 

 

4. 김수영, 말하긴 했지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즈음에서 시인 김수영을 이야기해야겠다. 김수영은 앞선 연구자들이 밝혀왔듯이, ‘자코메티적 발견을 말해왔다. 시인 김수영의 후기 시세계 변모 과정에서 결정적인 열쇠를 쥐고 있다. 이 과정은 구체에서 추상으로, 다시 구체의 세계로 돌아오는 사유의 경로를 보인다. “연극……구상(具象)……이런 것을 미워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다시 추상을 도입시킨 작품을 실험했다. 그러면서 아직도 “drama를 포기할 단계를 못한 것 같으나 되도록 자연스럽게 되고 싶다고 말한다. 이 사유의 변곡점들은 자코메티가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구상으로 돌아오는 과정과 겹쳐진다.

 

원래 연극배우이기도 했던 김수영은 그의 초기 시세계에 연극성이 반영되어 있다. 그는 연극성에 매료되었다고 고백하면서 연극성의 요체를 풍자와 구상성으로 정리하여 설명한다. 김수영은 역시 스토리다. 하나의 스토리다.”하면서 쉬페르비엘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가 점잖은 주제를 취급하면서도” “속취(俗臭)와 아기(雅氣)”를 담고 있다는 점을 든다.[각주:9] 스토리성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화자는 무대 위에서 연극대사를 펼치는 배우가 된다. “를 공존시키고, 갈등이 드러나고, 이질적이 것이 함께 한다. 그러나 김수영은 시적 연극성의 또 다른 근간인 구상성은 한편으로는 시에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진술들이 나타나는 것을 차단하는 방편이 되지만 시적 대상에 대한 관심을 예각화함으로써 시인의 관심이 사회적인 것에까지 확장되는 데 일정한 방해가 되기도 한다.”[각주:10]고 판단한다.

 

온몸으로 온몸을 밀고나갔던 시인은 이상을 밀고나가야 했다. “즉 실천은 윤리적인 것 이상의, 작품의 image에까지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것이어야 했다. 이것이 현대의 순교이다. 익히 알려진 유명한 표현을 빌려오면 다음과 같다. “시인은 영원한 배반자다. 촌초(寸秒)의 배반자다.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이렇게 무한히 배반하는 배반자, 배반을 배반하는 배반자…… 이렇게 무한히 배반하는 배반자다."[각주:11] 시인은 텍스트 위에서 배반하며 죽는 자이다. 시인은 배반하며 관찰한다. 시인은 지우며 바라본다. 시인은 잊으며, 새로 짓는다. 시인은 망각하며, 떠난다. 시인은 배반하며, 미지 속으로 그 자신을 던진다. 온몸을 던진다. 몸을 던지고 지우고 배반하며, 죽는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그 자신 자체가 image가 된다.

 

 

[각주:12]

 

 

눈이 온 눈이 온 뒤에도 또 내린다

 

생각하고 난 뒤에도 또 내린다

 

응아 하고 운 뒤에도 또 내릴까

 

한꺼번에 생각하고 또 내린다

 

한 줄 건너 두 줄 건너 또 내릴까

 

페허에 페허에 눈이 내릴까

 

There is no hope of expressing my

vision of reality. Besides, if I did,

it would be hideous something to

look away from

 

내 머리는 자코메티의 이 말을 다이아몬드같이 둘러싸고 있다 여기 hideous의 뜻은 몸서리나도록 싫다는 뜻이지만, 이것은 가령 보이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to look away from을 빼 버리고 생각해도 재미있다. 나를 비롯하여 범백의 사이비 시인들이 기뻐할 것이다. 나를 비롯하여 그들은 말할 것이다. 나는 말하긴 했지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으니까 나는 진짜야, 라고. 이에 대해 심판해 줄 자는 아무도 없다.[각주:13]

 

이 시를 자코메티적인 상황으로 읽어보자. ‘에게서 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도 같이 길을 잃어보자. 눈은 자코메티의 시선이자 바라봄이 될 수 있다. 시적 주체는 발화하지만, 전면에 보이지 않는다. 텍스트 위에 내리는 눈()은 눈()이 될 수 있다. 눈은 사라지는 주체, 소멸하는 화자가 될 수 있다. 눈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망각의 강을 건너는 시적 주체이어도 된다. 눈은 그대에게 가 닿으려는 온몸이여도 좋다. 이 모든 것들이 내리고 또 내린다. 이 모든 것들이 생각 뒤에, 생각 속에, 생각 위에 내린다. ‘는 사라지고 소리가 남는다.’ 사라지며 흔적이 남는다. 사라지는 흔적 위에, 다른 형태가 태어난다. 새로 태어난 아이가 울음 울듯이 응아하고 내리고, 이 모든 것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한꺼번에 내린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은 페허위에서 진행되는 사건이다. 페허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죽음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과 생을 동시적으로 사유하고, 동시적으로 끌어안고, 동시적으로 껴입은 상태에서 존재는 숨을 쉰다. 그렇기에 이 비인칭적 공간은 이미 페허이고, 눈이 내리고 내려도 페허가 될 수밖에 없다. 의문문으로 끝을 맺는다. “페허에 페허에 눈이 내릴까물을 수밖에 없다. 글 쓰는 자로서 자의식이 가득한 문장 위에, “한 줄 건너 두 줄 건너 또 내릴까라고 묻는다. “나는 말했지만 보이지 않을 것이기에, 어느 순간 미지의 어느 지점에 도착할지 모른다. 미지의 장소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올지 모른다. 그러므로 단지 물을 뿐이다. 주체의 자리를 미지의 영역으로 끝까지 몰아붙이기 위해, 질문한다. 가자. 더 가야 한다고. 무한 반복되는 운동 속에서 존재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가볍고 가벼운 발자국과 같은 눈이 내리는 사이, 그 어떤 다른 것이 되어 흩날려도 되는 사이, 침묵이 흐른다.

 

시는 하나의 수련이다. 수련은 정신이고, 정신의 순수함이며, 모든 것과 맞바꿀 수 있는 이 공허한 능력으로서의 의식이 실제적 능력이 되고, 그 조합의 무한성과 조직의 범위를 엄격한 한계 내에 가두는 순수한 지점[각주:14]이 된다. 모리스 블랑쇼가 말하듯이 시인은 공허한 능력의 소유자이다. 시인은 쓸모없는 것들에 목숨을 건다. 한 문장을 위하여 온 시간을 불태운다. 그것을 정신의 순수함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을 바꿔 말하면, 어떤 한계에 부딪히는 존재라는 뜻이다. 무너지는 것도 능력이다. 그리고 다시 걸으면 된다.

 

일어서는 일. 스스로 상처를 지워내는 일. 버리는 일. 그래서 터질 듯이 가득 채운 그림에서 자코메티는 숱한 선들을 지운다. 지워지고 제거되는 허공을 만들고,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비운다. 지우고 지우며, ()가 된다. 그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백지 위에 담으려고 한다. 몇 개의 선들이 가볍게 중첩되면서, 저절로 충만해진다. 결핍을 드러내면서 살아있다. (캐롤린의 그림처럼), 가장 사랑하는 대상에게 죽음을 중첩한다. 우연인 듯 필연인 듯, 각자의 존재 의미를, 현존에 있지 않는 다른 자리로, 슬쩍 위치이동 시킨다. 그 선은 탈물질화된 존재들이다. 자코메티의 선들이 사라지며, 리얼리티를 벗어난다. 지워질수록 영원성을 얻는다.

 

시인 김수영의 시작노트에서 사실주의적 문체를 터득했을 때 비로소 비사실에로 해방된다.”[각주:15]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바라보고 바라보면서, 또 다른 드높은 관찰로 가는 해방의 출구를 연 셈이다. 그 시선에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멀어지며 바라보기 때문에, 관람객이 일부러 거리를 두고 열 발짝 뒤로 물러서지 않아도 된다. 영원성을 획득한 것 같으면서도, 가볍게 사라져버리는 눈송이처럼, 자코메티의 대상들은 탈물화된, 비인칭적 공간에 위치한다. 작품의 시선은 투명하다. 사라져버릴 것만 같지만, 뒤돌아서자마자 나타나는 환영처럼, 어디선가 출현한다. “웃음이 난다. 이 웃음의 느낌, 이것이 양심일 것이다. 나는 또 자코메티에게로 돌아와 버렸다.”[각주:16]

 

 

걷는 사람

 

 

 

5. 실패, 먼저 와 기다린다

 

 

 

나의 진정한 비밀은 나의 생명밖에는 없다. 그리고 내가 참말로 꾀하고 있는 것은 침묵이다. 이 침묵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을 치러도 좋다. 그대의 박해를 감수하는 것도 물론 이 때문이다.”[각주:17]

 

 

시인 김수영은 나는 번역에 지나치게 열중해 있다 내 시의 비밀은 내 번역을 보면 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고 보면, 시작노트 6에 시인 김수영은 비밀을 두 개나 고백한 셈이다. 하나는 번역의 문제, 또 다른 하나는 생명의 문제이다. 그리고 생명이라는 단어를 자코메티의 시선의 깨달음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은 사라져도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시선이라는 깨달음말이다. 김수영이 말한 생명이라 함은 영원하게 살아남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게 아닐까, 한다. 자코메티가 이 깨달음 이후에, 자신의 그림에서 선을 지우듯이, 선을 지운 자리에 침묵을 드리우듯이, 영원한 공기가 흉상을 감싸고 돌 듯이, 영원성을 얻듯이, 김수영 또한 이 과정을 진행한다. 그의 비밀, 나의 진정한 비밀나의 생명영원을 얻고자 함이고, “참말로 꾀하고 있는 것은낡은 형식일지라도, 연극적인 방식이나 구상성을 탈피하더라도, 시 안에 침묵을 모시는 일이다. 김수영 역시 지우개를 든다. 단어를 지우고, 다소 분명했던 시적 주체의 자리를 지우고, 거리를 두며 멀어진다. 멀어지는 일. 망각의 강을 건너는 일. 그리고 돌아오는 일.

 

김수영 시인이 외국어와 한국어 사이의 경계에 서 있었던 점을 보면 더욱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번역은 한 언어와 다른 언어 사이에서 원심력과 구심력의 운동을 하는 작업이다. 모국어에서 멀어지며 외국어로 다가간다. 미지의 단어로 낯설어진 모국어의 세계로 돌아온다. 어떤 단어는 번역 불가능하여,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미지의 또 다른 단어를, 맥락에 따라, 다른 자리에 놓아야 할 경우가 발생한다. 이렇게 번역은 가능성의 불가능성을 경험하며, 사유의 자리에 타자의 단어들을 쌓는다. 언어로 언어를 배반하며, 이국의 감수성으로 자국의 감수성을 뒤집는다. 비슷한 범주의 단어를 두고 동질성을 찾으려고 하면할수록 멀어지는 경험을 하는, 이질적 덧칠 작업과 같다.[각주:18]

 

이 과정에서 언어의 운동을 체득한 김수영은, 천천히, 후기 시세계[각주:19]의 변화 지점으로 이동한다. ‘침묵의 운동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자코메티적 발견이라고 돌려 말해도 좋을 것이다. 사실 침묵의 발견일 것이다. 김수영이 일본어로 시작노트를 쓰는 일 역시, 자코메티처럼 시선의 멀어짐 연습이다. ‘로부터 출발하여 에게로 가는 일이다. 번역은 이 운동의 또 다른 실천이다. 언어의 타자성을 체험하는 온몸의 왕복 운동이다. 이 운동은 끊임없는 실패를 전제로 한다. 제거하고 정리하며, 침묵의 공간에 들어설 때, 시인은 무너진다.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지 않은 작가는 예술가가 아니다. 현실적인 게 얼마나 빈약하고 허약한 울타리인지, 그것이 얼마나 착각과 교란을 담보하고 있는지, 눈으로 체험해야 한다. 찰떡같이 믿었던 지식이 무너지는 경험을 해 보는 일, 이미지가 사라지는 경험을 해 보는 일. 그 가운데 사물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바라보는 일. 이 과정을 체험하는 예술가는 선물을 받는다. 실패는 즐거운작업이 된다. 이질성과 동일성을 동시에 고려하면서도, 역설의 과정을 즐길 수 있을 만큼, 견딜 수 있는 작업이 된다.

 

작품을 읽고/보고 난 뒤에 감도는 침묵은 모험의 결과물이다. 침묵을 위해서라면, 희생을 감수해도 된다는 것은 창작자가 미지의 순환 속에서, 죽음과 두려움을 가로지르겠다는 것이다. 침묵은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중첩하고, 생과 사의 경계에서 녹슨 칼날을 느리게 움직이는 운동성이기 때문이다. 천근만근 무거운 칼을 휘두르며, 공기를 느리게 정지시키는 일. 침묵을 끌고 다니는 예술 앞에 걸음을 멈추게 하는 일, 호흡을 가다듬는 일이다. 그 가운데에 관람객을 두고, 우리가 끊임없이 성찰하게 하는 일. 독자의 상처를 건드리는 일. 이것이 성실한 시가 될 것이다.

 

자코메티와 김수영, 다른 길을 걸으며, 비슷한 지점에 도착한다. 동생 디에고를 만든 흉상이든, 아내 아네트를 만든 조각이든, 캐롤린이든, 자코메티는 결국 에게로 돌아온다. 몇 걸음 뒤로 물러서 보이는 거리감은 자코메티 자신이 알고 있는 대상과의 거리감일지도 모른다. 이 거리감이, 비어있는 공간을 만들고, 침묵을 드리우고, 대상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낯섦을 만든다. 스스로 비어있게 한다. 블랙홀처럼 주변의 모든 사물을 지워가는 동안, 침묵이 먼저 와 기다린다. 눈이 내리는 동안, 동일성이 끊어지는 눈이 내리고, 비연속적으로, 흩날리는 동안, 김수영은 고독을 앞당긴다. “침묵의 한 걸음 앞의 시가 되는 것이다. 미지의 공간으로 손님을 초대하는 일. 그것이 예술작품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자코메티와 김수영, 용기 있는 선택을 한 자들이다. 용기 있는 시선은 다른 방식으로 걷게 한다. 덜어내고, 버리며, 가볍게. 걷는다. 그 걸음 속에 절망을 담고, 시를 쓰며,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실패한다. 세상의 기준으로 사랑받고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희생을 치르더라도, 걷는다. 계속 걸어야 한다. 다음 작품을 위한 몸부림 정도의 절망일지라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시인 김수영이 완전한 희생의 한걸음 앞의 희생[각주:20] 을 말하듯이, 완성된 작품을 위한 한 걸음 앞의 절망이 필요하다. 맘 놓고 실패하는 이들이 있기에, 지금 여기 우리가, 딸각 소리를 듣는다.

 

나에게 조각은 하나의 아름다운 물체가 아니라 내가 세상을 보는 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입니다. 인간이 생각을 하는 그 무엇이 나를 매료시키고 내 마음을 사로잡게 하는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내가 하는 이 일이 조금이나마 성공한다면, 내 조각 작품은, 내가 보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고 공감하며 소통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각주: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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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돌 : 발로 공부하는 사람이다. 2008년 『애지』에 평론을, 2013년 『현대시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하다. 연구서 『거울 밖으로 나온 기형도』를 비롯하여 평론집 『한 칸의 시선』이 있다. 2008년 교통사고 당시 살아있는 것은 바라보는 일이다라는 문장이 스치고 지나가다. 그 이후 눈동자를 그리기 시작하여, 다섯 번의 개인전(<눈에 대한 낭만적 독해>)과 네 번의 단체전을 갖다. 2017년 여름 리좀 국제예술인 레지던스 작가로 참여하여, 프랑스 화가 Sylvie Deparis을 주제로 전시를 열다. 1인 잡지 MOOK 발행인이다.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기형도의 비가 2)라는 믿음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현재 '수유너머 104'에서 공부하고 있다.

 

https://youtu.be/jgWo5wqXFYc

 

 

    1. 유튜브로 해당 글을 음성 파일로 만들어 올려 놓았습니다. 화면으로 글을 읽기 힘든 분들, 음성으로 들으셔도 좋습니다. 1인 잡지 무크 <돌>을 펴냈던 지난 작업을 이어, 유튜브에서 1인 잡지를 이어 나갈 계획입니다. 

    2. <그림이 있는 글>은 그림과 시, 예술 작품과 문학 작품을 연결하여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하는 공간입니다. 가끔은 제가 직접 그린 그림과 글을 올리기도 하고, 에세이류의 글을 올릴 계획입니다.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3. 2018년 가을호 『시와 사람』, <예술산책> 발표

 




 

  1. 모리스 블랑쇼, 이달승 옮김, 『문학의 공간』, 그린비, 2010년. 33~34쪽. [본문으로]
  2. 같은 책, 30쪽. [본문으로]
  3. 같은 책, 25쪽. [본문으로]
  4. 『도록』 179쪽. [본문으로]
  5. 같은 책, 93쪽. [본문으로]
  6. 같은 책, 56쪽. [본문으로]
  7. 『도록』 251쪽. [본문으로]
  8. 「내가 조각가인 이유, 앙드레 파리노드와의 대화」, 『도록』 403쪽. 앙드레 파리노드 : 예술가가 정상이 아닌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자코메티 : 어떤 면으로는, 사는 것 대신에, 자신의 시간을 머리 하나를 모방하기 위해 매일 밤 의자 위에서 같은 사람을 5년 동안 고정시켜 놓고, 계속해서 실패하며 머리를 모방하려고 하고, 또 계속해서 그것을 이어나가는 것은 비정상이죠. 정확히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행동이지 않나요? 이 일은 온전히 이것을 용인해 줄 특정한 사회 안에서 사는 것을 요구해요. 사회 전체에게 쓸모없는 행위에요. 이것은 온전히 개인의 만족이에요. 극도로 자기중심적이고 그래서 창피한 거예요, 모든 예술작품은 전적으로 무(無)를 위해 태어났어요. 소비된 시간들, 그 모든 천재, 그 모든 작업은 결국엔 모두 본질적으로 무(無)를 위한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현재에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때 경험하는 즉각적인 느낌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에요. 조각은 모험, 그 위대한 모험은 같은 얼굴에 낯선 무언가가 갑자기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이고, 그것은 세상의 모든 여행보다 위대해요. [본문으로]
  9. 『김수영전집2』, 「새로움의 모색-쉬페르비엘과 비어레크」, 민음사, 2018년 2월 3판 1쇄, 320~329쪽. 앞으로 김수영 산문 인용은 『전집2』로 표기한다. [본문으로]
  10. 조강석, 「김수영의 시의식 변모과정 연구-’시적 연극성‘과 ’자코메티적 전환을 중심으로」 한국시학연구, 제28호, 372쪽. [본문으로]
  11. 『전집2』, 「시인의 정신은 미지(未知)-나의 시의 정신과 방법」, 347쪽. [본문으로]
  12. 이 시를 썼을 때, 김수영은 세로쓰기 방식으로 시를 배열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본문으로]
  13. 『전집2』, 551쪽 [본문으로]
  14. 모리스 블랑쇼, 이달승 옮김, 『문학의 공간』, 그린비, 2010년, 114쪽. [본문으로]
  15. 『전집2』, 552쪽. [본문으로]
  16. 『전집2』, 552쪽. [본문으로]
  17. 『전집2』, 553쪽. [본문으로]
  18. 『전집2』, 「시작 노트 6」, 554쪽. “내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이상이 일본적 서정을 일본어로 쓰고 조선적 서정을 조선어로 썼다는 것이다. 그는 그 반대로 해야 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함으로써 더욱 철저한 역설을 이행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라고 말한 부분 역시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본다. [본문으로]
  19. 「시작 노트 6」을 쓸 무렵, 김수영 시 작품 목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후기 시세계의 변화 지점을 알 수 있는 목록들이다. 「풀의 영상」, 「전화이야기」, 「꽃잎 1,2,3」, 「먼지」,「원효대사」,「풀」 등이다. “자코메티적 발견”이 후기 시 변모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연구한 연구 논문들이 속속 발표되고 있다. [본문으로]
  20. 『전집2』, 「시작 노트 6」, 554~555쪽. 김수영은 ‘자코메티적 발견’을 수행하고나서 만세를 부른다. 이런 문장을 슬 수 있는 그 용기과 결단이 5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놀랍다. “「눈」이 그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시는 <폐허에 눈이 내린다>의 여덟 글자로 충분하다. 그것이, 쓰고 있는 중에 자코메티적 변모를 이루어 6행으로 되었다. 만세! 만세! 나는 언어에 밀착했다. 언어와 나 사이에는 한 치의 틈서리도 없다. <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로 충분히 <페허에 눈이 내린다>의 숙망(宿望)을 달(達)했다. 낡은 형(型)의 시다. 그러나 낡은 것이라도 좋다. 혼용되어도 좋다는 용기를 얻었다. 완전한 희생. 아니 완전한 희생의 한걸음 앞의 희생. 독자여 우쭐거려서 미안하다. 그러나 내가 의외로 ‘낡은 것’만은 확실하다.‘ [본문으로]
  21. 『도록』, 395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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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한 걸음 앞의 시 (1)

-자코메티와 김수영

 

 

 

                                                                                                                     금은돌 / 시인, 화가

 

1. 자코메티[각주:1], ‘시선이라는 깨달음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어느 강좌를 듣고 나오는 길에, 혜화역에 올라탔다. 마침 옆에는 그날 같이 수강했던 한 남성이 있었다. 그와 나는 강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지하철 인파 속에 문득, 응시했다. 눈빛 하나. 찰나.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