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M.C.에셔 (2)

- 스무 살, 미발표작을 중심으로

 

 

  금은돌 (시인, 화가)




 


 

6. M. C. 에셔의 변형

        

M. C.에셔[각주:1]의 그림을 떠올려 본다. 『거울 밖으로 나온 기형도』에서 M.C. 에셔의 그림으로 기형도 시의 시적 주체의 특이점, 흐르는 주체를 설명한 적이 있다.

 

아래 그림 제목은 Metamorphosis이다. 변형 혹은 변이이다. 그림의 출발은 활자이다. 제목 그대로 Metamorphosis이다. 활자는 사각형이 되고, 사각형은 도마뱀이 된다. 도마뱀은 육각형으로 변이되고, 벌집이 되고, 벌집에서 벌이 날아가고, 벌은 물고기가 되고, 물고기는 새가 되고, 새는 점차 사각형이 되고, 체스 판이 되고, 체스 판은 Metamorphosis 활자가 된다. 왼쪽으로 시작하건, 오른쪽에서 출발하여 그림을 보건, 시작과 끝은 같다. 변이 과정에 숱한 이미지들이 놓여있지만, 변주 대상에 리듬이 가해지면서, 이미지는 곡선처럼 흐른다. 정주하는 것 같지만, 운동한다. 노래하며 몸을 바꾼다. 주어의 자리를 타자에게 내어 주는 방식과 같다. 동시간대에 공존하는 생명이다.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다른 형태를 띠지만, 그들은 흐르며 호흡한다. 다른 인칭을 가졌을 뿐, 하나의 존재로 작동한다.

 

이 과정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도록, 그림을 두 부분으로 잘라 보았다. 그 사이에 그 다른 무엇이 들어와도 상관없다. M.C. 에셔는 바흐의 음악을 틀어놓고 작업을 했다고 한다.[각주:2] 그는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변주를 시킨다. 그 대표적인 동물이 도마뱀이다. 그리고 사각형과 육각형의 변주가 그 안에서 음악과 함께 흐른다. 하나의 형태가 형태를 바꾸어, 다른 모습을 가진 물체로 변화한다. 새는 물고기로 변하고, 물고기는 개구리로 변하고, 개구리는 새로 변화한다.

 

 

 Metamorphosis II 1940 Woodcut in black, green and brown, printed from 20 blocks on 3 combined sheets. 3895mm x 192mm.

 

이 변형의 과정은 다름 아닌되기의 과정이다. 활자 - 되기이고, 동물 - 되기이고, 사물 -되기이고 아무 것도 아닌 것 되기이다. 처음으로 - 되기이다. 변주를 거쳐, 상이한 주체, 다양한 주어의 자리에 선다는 것은 시인의 능력을 배가시킨다. 시인이라는 존재가 허름하고 나약하고 연약한 것 같지만, 실은 다양한 능력을 갖추었음이다. 물의 유동적인 상상력으로, 시인은 자유를 획득할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변주의 자유로움을 생성할 때, 시인에게 해방 공간이 열린다. 이것이 시인의 능력이다. 타자들과 공존하는, 블록을 만드는 힘이다.

 

 

 Metamorphosis II 1940 Woodcut in black, green and brown, printed from 20 blocks on 3 combined sheets. 3895mm x 192mm.

 

시인은 다양한 되기의 능력을 가진 존재자이다. ‘되기의 능력을 통해, 현재 자기 자신이 가진 장소를 벗어난다. 다른 곳으로 위치 이동하면서, 또 다른 존재의 목소리를 불러들인다. 이것이 시인이 그 시대에 해야 할 역할이다. 따라서 시인은 새로움을 향해 나간다.

 

M.C. 에셔의 그림은 활자에서 시작하여 활자로 돌아온다. 리듬과 변주가 있는 형태 변형을 마치고, 고요히, 자기 자리로 돌아온다. 이 모든 과정은 일정한 축적 위에서 이루어진다. 축적이 필요하다. 사각형의 축적, 새의 축적, 도마뱀의 축적 위에서, 형태를 조금씩 변화하면서, 다른 지점으로 가 닿는다. 위상적으로 다른, 처음의 위치이다. 이곳은 처음이 아니지만 처음이다. 다른 곳으로 성숙을 한 위치, 나선형의 어느 다른 지점이다.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지만, 차이를 가진, 어느 일정한 같은 자리이다. 한계를 극복한 처음이고,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처음이다. 질적으로 다른, 변형의 자리에 시인이 서 있다.

 

에셔의 그림은 이러한 사유 구조를 보여준다. 먼 여행을 떠났다가 귀국하는 과정을 말이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담담하게. 아름답게. 역동적으로 정지하듯이.

 

 

7. 다양한 껍질, ‘

 

 

空中으로 솟구친 길은

그늘을 끼고 돌아왔고

아무것 알지 못하는 그는

한줌 가슴을 버리고

떠났다.

 

車窓 안쪽에 비쳐오는

낯선 거리엔

大理石보다 차가운

幻影이 떠오른다

아무것 알려 하지 않는 그는

미련 없이 머리를 깎았다.

 

그는 나보다 앞선 歲月을 살았고

나와 同甲이었다.

 

감싸안은 두 발이

천장을 디디고 휘청거리는데

단단히 굳어버린 鋪道엔 바람이 일고

이 밤은 여느 때마냥 춥다

            -껍질전문(1978. 3)

 

 

이 시는 기형도 시인이 고등학교 3학년 시절, 18살에 쓴 시이다. 기형도는 한국 현대시에서 3인칭 를 가장 잘 활용한 시인이 아닐까, 한다. 기형도 시의 특이점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는 누구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는 시인의 껍질이다. 제목 그대로 유추해 보면 그러하다. 시인의 분신이자 나의 시적 분화(分化) 결과이다.

 

그는 떠난 자이다. 동시에 먼 여행을 하고 돌아온 자이다. 그의 여행은 험난했다. “공중으로 솟구친 길은 그늘진 어둠을 동반하고, 정처 없는, 목적을 상실한, 그는 뜨거운 가슴을 버렸다 

그는 결연한 결심을 하였는지, 머리를 깎았다. 시인의 눈에 그는 幻影일지 모른다. 그것이 환영일지 모르는 가능성은 다음 문장에서 나타난다.

 

감싸안은 두 발이

천장을 디디고 휘청거리는데

 

그는 어디에 서 있는가? 시적 주체인 나는 어디에 위치하는가?

 

 

                                Relativity 1953 Lithograph. 294mm x 282mm.

 

 

 

그는 시적 주체와 동갑이나 시간적으로 나보다 두터운 시간을 경험한 존재자이다. 같은 시간 선상에 살고 있지만, 다른 층위의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자이다. 동시간대를 살지만 다른 질감을 가진, 두터운 시간의 경험을 가진, 그런 존재자이다. 그와 나는 서로를 냉정하고 차갑게 대한다. 공기가 차갑다.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려하지 않는다. 앞선 세월을 살았지만, 그와 나는 연결되어 있다. 그가 정상인가? 내가 정상인가? 분명한 것은 시적 주체의 위치이다. 시적 주체가 두 발을 천장에 디디고 있다. 박쥐처럼.

 

천장에 자리한다.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이 문장의 정확한 주어가 누구인지, 분명치 않다. 그일 수도 있고, 나 일수도 있다. 사실, 나의 위치가 천장이라고 상정해 놓았을 때, 그가 오히려 땅 위에 존재할 수 있다. (기형도 시의 특이점 중의 하나는 발이다. 그는 발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무의식에서 발은 사라진 형태로 진술된다. 이 시에서도 발은 무엇엔가 감싸 안겨 있다. 왜 그럴까?)

 

시의 첫 행이 공중으로 솟구친 길인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M.C.에셔의 그림처럼, 그와 나의 위치가 역상이었던 것이다. 좌우의 역상이 아니라, 상하의 역상이었던 것이다. 그가 천장에 있건, 내가 천장에 있건, 중요하지 않다. 상대적이다. 어디서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가 냉정하다는 말은 다시 말해 내가 냉정하다는 뜻의 발화이다. 그가 떠났다는 구절은 내가 떠났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상대적인 위치에 따라, 바라보는 지점이 바뀔 뿐이다. “=이다. 이들은 같은 껍질을 공유한 존재자이다. 같은 진동과 진자의 파동을 공유하고 있는 존재이다. 침묵으로도 탯줄이 연결되어 있는, 텔레파시로 서로를 호명하는 존재자들이다. 그렇기에 기형도 시에서 3인칭 는 유령처럼, 홀연히, 호출된다. 빈번하게 그의 목소리가 솟아난다. 느닷없이 등장하고, 그를 알아챌 즈음, 사라진다.

 

 

8. 반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主語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전문 (1979.10)

 

 

 이 시는 기형도가 열아홉에 쓴 시이다. 생전 미발표작이지만, 『잎 속의 검은 입』에 수록되어 있다. 앞서 소개한 껍질이라는 시가 78년 작품이라는 감안하였을 때, 그 연장선상에서 해석할만한 하다.

시적 주체인 나는 主語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이다. 접붙이기가 가능한, 그러나 이미 많은 세월을 살아버린, 시간을 선취한, 흐르는 주체이다. 나무의 중심 뿌리를 지향하지 않는다. 리좀이다. 중간의 어느 지점에서 접붙이기를 시도해도 된다. 시적 주체는 내가 자신이 낯설어 보일 때,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할 때, 일차원적인, 크로노스적인 시간에서 벗어난다. 낯선 감각이 온몸에 돋아날 때, 단선적인 시간을 초월할 때, 미래의 시간이 접붙이기 된다. 다른 차원의 시간을 살았던 가 동갑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가능한 이유는 영혼이 눈을 뜨기 때문이다. “눈을 뜨면평범한 일상이 뒤틀어진다. 눈을 뜨는 순간, 사건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현상을 해석하는 위치가 달라질 수 있다. 전개가 뒤집어지는 변곡점이 달라질 수 있다. 눈을 뜨는 순간, 차원이 열리고, 눈을 뜨는 순간, 병이 병이 아니게 된다. 눈을 뜨면, 병은 함께 더불어 가야할 친구가 된다. 눈을 뜨는 순간, 시가 다가온다.

 

시적 주체는 아픔과 병을 단선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병을 오히려 미적 가치를 지닌 대상으로 승화한다. 늙어간다는 것은 단풍드는 일이다. 병을 짊어지고 사는 것은 몸에 대한 예민한 감각으로, 마음을 모시는 일이 된다. 지극히 몸을 돌보는 일이다. 미래의 시간을 선취하는 감각을 보였던 기형도에게, 스무 살이지만, 저 멀리서 시간을 내려다보는 듯한 시인에게, 이런 인식과 표현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이러한 인식 덕분에, 병은 아름다워진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기꺼이 미학적으로 물들어, 스스로 죽음을 맞이한다. 해방이 된다이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고, 아상(我相)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Liberation 1955 Lithograph. 199mm x 434mm. Order Prints

 

 

 

 

내가 거듭 변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거듭 변하기 위해 나는 지금의 나를 없애야 한다. 그것이 구원이다.[각주:3]

 

 

기형도에게 빈 주어의 자리는 구원으로 가는 한 방편이었을까? 타자에 이르는 길이었을까? 열아홉의 기형도가 스물 아홉의 기형도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스물 한 살의 기형도는 15,16살의 기형도에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을까? 왜 이리 조숙했을까? 왜 이리 출발점이 달랐을까? 스무 살의 기형도에게 묻고 싶다. 세 편의 시를 통해서, 에셔의 그림을 함께 보며, 그의 다양한 들을 불러내어, 중얼거려 보고 싶다. 당신의 시가 내 운명을 바꾸었다고. 내가 잠시 당신의 집에 머물다 흘러나왔다고. 발표 연대를 알 수 없는 미발표작 희망을 소환하여, 당신에게 낭독해 주고 싶다. 나 역시 그러했다고. 스무 살의 기형도에게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언제부턴가 너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언제부턴가 아무 때나 나는 눈물 흘리지 않는다

                           -희망(발표연대 알 수 없음)

 

 

               Day and Night 1938 Woodcut in black and grey, printed from 2 blocks. 677mm x 391mm.

 

 

 

 

 

 

 

 

 

 

 

 

 

금은돌 : 발로 공부하는 사람이다. 2008년 『애지』에 평론을, 2013년 『현대시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하다. 연구서 『거울 밖으로 나온 기형도』를 비롯하여 평론집 『한 칸의 시선』이 있다. 2008년 교통사고 당시 살아있는 것은 바라보는 일이다라는 문장이 스치고 지나가다. 그 이후 눈동자를 그리기 시작하여, 다섯 번의 개인전(<눈에 대한 낭만적 독해>)과 네 번의 단체전을 갖다. 2017년 여름 리좀 국제예술인 레지던스 작가로 참여하여, 프랑스 화가 Sylvie Deparis을 주제로 전시를 열다. 1인 잡지 MOOK 발행인이다.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기형도의 비가 2)라는 믿음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현재 '수유너머 104'에서 공부하고 있다 

  • 해당 글을 음성 파일로 만들어 올려 놓았습니다. 화면으로 글을 읽기 힘든 분들, 음성으로 들으셔도 좋습니다. 1인 잡지 무크 <돌>을 펴냈던 지난 작업을 이어, 1인 잡지를 이어 나갈 계획입니다. 

  • <그림이 있는 글>은 그림과 시, 예술 작품과 문학 작품을 연결하여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하는 공간입니다. 가끔은 제가 직접 그린 그림과 글을 올리기도 하고, 에세이류의 글을 올릴 계획입니다.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  2018년 가을호 『시와 사람』, <예술산책> 발표


 


  1. 모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1898~1972)는 네덜란드 판화가이다. 동물, 새, 물고기 들을 반복적으로 대칭 배열하면서 일정 단위로 반복되는 전체적인 패턴을 구성하였다. 이때 형상과 배경, 평면적인 패턴과 명확한 3차원적 후퇴감 사이의 모호함을 이용한 시각적 환영을 정교하게 사용했다. 1944년경부터 그의 작품은 시각적 비현실성을 보여주는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띠었다. 이러한 작품들에서는 3차원적 구성을 2차원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시각적 환영, 사실과 상징, 시각과 개념 사이의 관계 등을 다루면서 실제 경험상으로는 모순된 것에 합리적인 느낌을 부여했다. 책의 해설을 맡고 있는 얀 W. 베르뮐레는 에셔의 그림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에셔의 이미지는 현대를 사는 인간의 고립과 소외의 경험을 표현한다. (중략) 에셔의 작품은 이 세상이 보이는 것 그대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현실은 긍정되는 동시에 부정되고 있으며, 객관화되는 동시에 상대화되고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세계는 차가운 분위기와 팽팽하게 긴장된 생소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세계에 대해 거리를 두면서도 감정적으로는 몰입하게 된다. M. C. 에셔, 이유경 옮김, 『M.C. 에셔, 무한의 공간』, 다빈치, 2004, 162쪽. [본문으로]
  2. 에셔는 독일 음악가 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1750)의 작품에서도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흐의 음악은 내 작품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같다. 내가 시각적 이미지를 복제하는 것과 유사하게 바로크 시대 작곡가들 또한 소리의 복제를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내게 무척 인상적인 일이다." [본문으로]
  3. 기형도 전집 편찬위원회 엮음, 「무등에 가기 위하여」, 『기형도 전집 』, 문학과지성사, 2011, 302쪽. [본문으로]
Posted by 수유너머104

 

 

기형도M.C.에셔 (1)

- 스무 살, 미발표작을 중심으로

 

  금은돌 (시인, 화가)

 

 

 

 

 

1. 스무 살의 기형도

 

시인 기형도의 스무 살은 어떠했을까? 그는 어떤 청춘을 보내고 있었을까? 그의 스무 살이 궁금하다. 기형도는 등단 이후, 4~5년 간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다가 급작스러운 죽음(198937)을 맞이했다. 알려진 대로 기형도 시인은 중학교 3학년 때 손위 누이 기순도 씨의 죽음을 겪은 뒤, 시를 쓰기 시작했다. 사춘기 무렵이다. 여기서 가정법을 가동시켜보자. 그가 습작 기간 내내 시를 썼다는 가정이다. 1985년에 <동아일보> 등단까지 그는 10여년의 시간이 있었다. 무리한 설정으로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필자는 기형도 시인은 등단 이후의 시기보다, 습작기, 문청 시절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연세대학교에 입학 후, 연세문학회 활동을 하면서 본격적인 습작 시기를 갖는다. 방위병 시절 수리시 동인 활동을 할 때 발표했던 사강리나 연세대학교 윤동주 문학상 수상작인 식목제의 경우,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 실린 시와 별반 다르지 않다. 포도밭 묘지역시 1986년에 발표하였지만, 이 작품은 1982년에 거의 완성되었다. 기형도는 한 편의 시를 거의 외울 정도가 되어서야, 깔끔하게 정서된 문서로 보관하였다. 퇴고 과정에서도 펜으로 끊임없이 고쳐 썼다. 시를 완성했을 때에는 정확한 날짜를 기입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등단한 이후에도 문예지에 발표한 시를 복사하거나 정서한 상태로 보관하였다. 시집을 구성할 때도 직접 시의 배열도를 작성했다. 각 시편들에 일정한 점수를 매기며, 시집 배열 구성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각주:1]

 

 

등단제도를 제거하고 보았을 때 사실, 그는 이미 시인이었다. 등단 여부와 상관없이, 시인이었다. 시적인 몸을 만들고, 시를 노래하고, 시를 향유하며, 시로 숨쉬고, 시로 살고 죽었다. 주변 친구들에게 자신의 시를 읽어주기를 좋아했고, 자신의 시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도 엄격하고 냉정했다. 새로운 시선을 갖기 위해 제3의 길을 가기 위해 유행에 편승하지 않았다. 거리에서, 시를 품고 살았고, 시를 쓰지 못하면, 몸과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 어떤 다른 이름보다 시인이라 불리기를 원하였다. 파고다 극장에서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 그의 자리엔 시집 원고가 든 가방이 있었다. 그 가방 속엔 제3의 길이 있었다.

 

 

2. 3의 길을 선택하는 방식

 

지금의 나는 참여시(혹은 민중시), 순수시라는 작위적 이분법이 소재주의에 불과한 것이라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당대를 살아가는 詩人의 가치지향성에 위배되는 허약함이라 비난받을 수 있겠으나, 나는 모든 사물과 그것들이 빚어내는 구조 및 현상에 대한 끝없는 탐구를 통하여 예술적 美學과 현실적 가치체계(혹은 理想型으로서의 질서공간) 모두에 접근하고 싶다. 전자의 구체적 이미지와 후자의 상관주의(칼 만하임의 의미에서)가 서로 만나고 부딪히는 詩世界는 나에게 다양성을 제공해 주는 무수한 時流적 갈등을 강요할 것이다.[각주:2]

 

 

 

                 기형도문학관 시벽,  1985년 당시 기형도의 필체가 담긴 미발표 자료

 

 

기형도는 갈등하고 있었다. 고민하고 있었다. 참여시와 순수시라는 이분법에 그 자신이 길들여지지 않으려고 했다. 이분법을 가로지르는 방법을 모색하고 선택하려 했다. 바둑을 둘 때, 포석을 깔듯이, 자신의 집을 지으려고 했다. 참여시와 순수시 사이를 가로지르는 제3의 길을 찾고자 했다.

 

등단하기 전부터 이런 고민과 모색이 있었기에, 그는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필자는 그가 어떤 방식으로 출발하고자 했는지, 그 출발선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시적 태도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보는 일이다. 스무 살로 돌아가는 일이이다. 1979~1980년으로 돌아가 보는 일이다. 스무 살에 썼던, 등단 이전의 시라고 얕보지 말자. 당시 문예지에 발표하지 못한 미발표작이라고 비평의 대상에서 제외시키지 말자.

 

 

3. 시의 , 그리고 시인

 

기형도 시인은 꼼꼼하고, 섬세하고, 집착도 있고, 완벽주의적 성향도 있고, 자신의 글에 대한 자부심도 높은 편이었다. 신문기자 생활을 할 때, 데스크 결재 때문에 자신의 글이 고쳐지는 것을 그 무엇보다도 싫어했다.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이고 지상에 두 발을 디디고 있으면서도 환상적이었다. 신문사 재직 시절, 시를 쓰는 마음으로 기사를 작성하였다고 한다. 밤새 기사를 수정하고 다듬었다. 심지어, 데스크 편집장의 결재가 떨어진 기사조차 자신의 맘에 들지 않으면, 다시 수정하였다.(직장 내에서 한 번 결재 난 원고를 다시 수정하는 일은 드물다고 할 수 있다. 편집장의 결재가 떨어진 신문기사를 말단 기자가 수정하여 신문에 내는 일은 징계이다.) 그는 남의 말을 잘 듣는 것 같지만, 타자의 말에 흔들리는 편은 아니었다. 경청하지만, 무엇을 결정할 때, 신중했다. 조심스러웠다. 심사숙고 기간이 긴 편이었다. 한 편의 시를 퇴고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예민하고 또 신중했다. 한 편의 시는 이미지와 사유의 축적 결과이다. 자신의 길을 가야한다는 생각이 확고했기에, 조숙했다. 미래의 시간을 선취하여, 미리 시 속에서 늙어버렸다. 그의 이러한 기질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스무 살 때부터 나타난다. 19802월에 집필한 시 시인 1을 살펴보자.

 

 

              나의 主人 없는 바다에서 一萬 갈래

             물살로 흘렀다. 一千 갈래는 고기떼로 표류

하였다 그 중 너덧 마리는 그물에 걸리었다.

 

한 마리는 뭍에 오르자 곧 물새가 되어 날아갔다.

부리가 흰 물새는 한번도 울지 못하고 죽었다.

그는 하늘에 올라가 구름이 되었다. 물새의

九萬里 공중을 날다가 비가 되었다. 내릴 데

없는 물 같은 비가 되었다.

                                          -시인 1전문 (1980. 2)

 

 

 

이 시는 기형도 시인이 대학 2학년 시기에 쓴 시이다. 의미심장하게도 시인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시인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투절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가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인은 어떠한 존재일까?

 

 

                             기형도 시인이 사용하던 타자기

 

 

 

4. ‘~이다가 아니라 ‘~되다

 

시를 쓰는 일은 혼()의 영역에서 작동한다. 비가시적 영역의 존재자가 등장하는 것이다. 귀신의 영역이다. 실재하는 에너지이다. 에너지는 형태를 바꾼다. 시는 “~ ~이다가 아니라 “~~되다의 문장 구조를 가진다. 시인은 되다의 주어 격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그 주어 역시 불확정성의 대상일 뿐이다. 구체적인 유일무이한 존재자가 없다. “主人 없는 바다라는 구절이 그것을 뒷받침해 준다. 주인 없는 바다에서 一萬 갈래 물살로 흩어지는 것이 시혼의 출발 방식이다. 시인의 영혼은 一千 갈래 고기떼와 같다. 그 물고기는 뭍에 닿자마자, 물새가 되어 날아간다. 작품으로 완성되는 것은 한 마리의 물고기일 뿐이다. “부리가 흰 물새는 한번도 울지 못하고 죽는다.” 시인의 글쓰기는 비인칭적 죽음을 동반한다. 텍스트 위에서의 죽음이고, 글 쓰는 자의 죽음이다. 울음 한 번 크게 내뱉지 못한 자의 죽음이다. 시는 배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빈 텍스트 위에서 시인은 자신의 시론(詩論)을 만들어 간다.

 

물새가 된다. “그는 하늘에 올라가 구름이된다. “물새의 혼은 구만리를 떠돈 뒤, “가 되어, “물같은 비가 되어 흐른다. 주인 없는 바다에 도착했을 것이다. 이 과정을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순환의 과정이 담긴 “~되기라고. 액체의 유동적 상상력이다.

 

 

     나의 一萬 갈래 물살(주인 없는 바다) 一千 갈래 고기떼

    한 마리 물고기() 물새(하늘) 구름(물새의 ) (물 같은 비)

 

 

 

 

 

5. 흐르는 주체가 되어

 

기형도 시인의 시적 주체의 특성은 물의 물질적 특성을 흐르는 주체라 명명한 적이 있다. 물의 변화 과정처럼, 기형도 시의 시적 주체는 순환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 주어의 자리는 비어 있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주어의 자리에 그 무엇이 와도 된다는 뜻이다. 주어의 자리에 그 자신의 몸을 내어준다는 뜻이다. 그의 시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의 첫 구절로 유명한 정거장에서의 충고를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

모든 길들이 흘러나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시인의 몸은 빈집과 같다. 그러니, 그 어떠한 혼이 머물렀다가 떠나도 된다. 혼의 집이다. 몸에서 혼이 새어나가는 길, 몸에서 새어나가는 시. 액체 성질로 흐르는 길. 모든 것들이 정처 없이 빠져나간다. 흐르는 길 위에 서성이는 시적 주체 역시 흐르는성질을 지닌다. 그 물결 위에 어느 누가 와서 발을 적셔도 된다. 기형도 시의 공간은, 시의 육체는, 주어 자리는 비어있다.

 

비어있기에 “~되기가 가능하다. 그 자리에 주어 / / 가 인칭이 자유롭게, 도착할 수 있다. “이고 가 될 수 있다. 비어있는 장소에 어느 누가 와도 상관없다. 그의 유고작품이라 알려져 있는 빈집역시 이러한 맥락 위에 있다. 그의 시는, 아니 그의 시집은 전체는 하나의 구멍으로 연결되어 있다. 각 시편에서 발견되는 구멍이 하나의 구멍으로 이어진다. 비어있음 덕분에, 시집 전체적으로 건축적 구조를 갖는다. 시집 전체가 하나의 건축 구조물처럼 바람이 통한다. 배관 파이프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기형도 시집의 특이성을 찾기 위해서는 주어의 비어 있음뿐만 아니라, 공간의 비어있음을 살펴야 한다. 비어있음 덕분에, “주어의 자리에서 다양한 변주가 가능하다. 주어의 변주가 결과적으로 서술어의 운동성을 강화한다. 시 전체적인 움직임을, 활동적으로, 틈과 틈 사이를 벌려 놓는 작용을 한다. 슬픔과 결핍과 회한과 안타까움의 구멍을 열어놓는다. 감정과 사건과 바라봄의 시선이 시집 전체에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하나의 흐름으로 완성된다.

 

 

 

 

                                 기형도 시인이 연주하던 기타

 

 

 

5. 공존의 블록

 

모든 되기는 공존의 블록이다[각주:3]공존하기 위한 시적 장치이다. 변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공존하기 위한 것이다. “되기를 시행하는 것은 나의 자리에 타자를 모시기 위함이다. 불어, 함께, 따로, 같이 호흡하기 위함이다. 말로만 비어있음을 말하지 않고, 시적 실천을 하기 위한 것이다. 할 수 없는 가운데 할 수 있는 것을 찾기 위한, 생성과 변화를 위한 출구를 모색하는 길이다.

 

비가 2-붉은 달에서 보면,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성과 혼자라고 하는 개별성이 공존하는 문장이다. 개별적인 혼자는 모두 위대하다. “위대한이라는 부사어가 특별히 꾸미는 것은 혼자라는 개별성이다. 각기 위대한 개별자들이 모여, “우리를 형성한다. 그런 다음 기형도는 주문을 건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죽은 영혼이건, 낯선 타자의 목소리건, 이 시대의 암울함과 고단함을 버티고 견디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어떻게 살아있어야 할 것인가? 몸 안에 다양한 혼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것은 영매가 하는 일이다. 영매는 다른 존재의 목소리를 담아 두는 그릇이다. 영매의 몸은 감각적인 스위치로 작동한다. 타자가 몸 안에 들어서는 순간, ON. 나의 목소리에 압도되지 않고, 타자의 목소리가 시인의 몸 안에서, 시적 주체의 허름한 육체에서 새어나간다.

오후 4시의 희망을 비롯한 여타 시에서 나오는 낯선 목소리들의 실체는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고, 소리 1에서 보이는, 낯선 목소리가 새어나간다. 유령과 같은 신비로운 존재가 감지된다. 시적 주체는 자신의 자리를 내어줌으로써, 타자의 목소리를 듣는 자가 된다. 허공에 떠도는 존재들이 기꺼이 존재자의 몸에 담기도록, 기꺼이 투명해지는 것이다. 시적 주체의 비어있음은 주어 없음과 연결된다. 따라서 시인은 변화무쌍한 혼을 담는 존재자가 된다. 스무 살의 기형도는 이것을 어찌 알고 있었을까?

 

 

 

  금은돌 : 발로 공부하는 사람이다. 2008년 『애지』에 평론을, 2013년 『현대시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하다. 연구서 『거울 밖으로 나온 기형도』를 비롯하여 평론집 『한 칸의 시선』이 있다. 2008년 교통사고 당시 살아있는 것은 바라보는 일이다라는 문장이 스치고 지나가다. 그 이후 눈동자를 그리기 시작하여, 다섯 번의 개인전(<눈에 대한 낭만적 독해>)과 네 번의 단체전을 갖다. 2017년 여름 리좀 국제예술인 레지던스 작가로 참여하여, 프랑스 화가 Sylvie Deparis을 주제로 전시를 열다. 1인 잡지 MOOK 발행인이다.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기형도의 비가 2)라는 믿음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현재 '수유너머 104'에서 공부하고 있다 

  • 해당 글을 음성 파일로 만들어 올려 놓았습니다. 화면으로 글을 읽기 힘든 분들, 음성으로 들으셔도 좋습니다. 1인 잡지 무크 <돌>을 펴냈던 지난 작업을 이어, 1인 잡지를 이어 나갈 계획입니다. 

  • <그림이 있는 글>은 그림과 시, 예술 작품과 문학 작품을 연결하여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하는 공간입니다. 가끔은 제가 직접 그린 그림과 글을 올리기도 하고, 에세이류의 글을 올릴 계획입니다.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  2018년 가을호 『시와 사람』, <예술산책> 발표

 

  1. 금은돌, 󰡔거울 밖으로 나온 기형도󰡕, 국학자료원, 2013, 182쪽. [본문으로]
  2. 같은 책, 186쪽. 이 원고는 󰡔기형도 전집󰡕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 육필 원고는 2012년 11월 28일 기형도 시인의 작은 누이 기애도 씨와 필자의 인터뷰 과정에서 󰡔거울 밖으로 나온 기형도󰡕 책에 소개, 발굴한 것이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이 책에 소개되기 전, 광명시 철산도서관 3층, 기형도 특별전을 통해 공개된 적이 있다. (기애도 누이와 기형도 기념사업회의 도움이 있었다.) 2017년 11월에 개관한 기형도문학관 입구 왼쪽 바깥에 위치한 시벽으로 온전히 재현되어 있다. 이 자료 원본은 기애도 누이가 소장하고 있다. 시벽 조성 사업은 기향도 누이가 주도적으로 진행하였다. [본문으로]
  3.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옮김, 󰡔천 개의 고원󰡕, 새물결, 2003, 553쪽. [본문으로]
Posted by 수유너머104

 



침묵 한 걸음 앞의 시 (2)

-자코메티와 김수영

 

 

 

                                                              금은돌 / 시인, 화가

 



 

 

3. 작품, ‘를 바라보는 일

 

 

누구든지 매혹되었을 때, 그는 그가 보는 것을 사실은 보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이것은 즉각적 인접성 속에서 그를 만지고, 비록 이것이 그와 절대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그를 사로잡고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매혹은 근본적으로 중성의 비인칭적 현전에, 미정의 그 누구에게, 얼굴 없는 거대한 어느 누구에게 관련되어 있다. 매혹은 시선이 맺고 있는 관계, 시선 없고 윤곽 없는 깊이와, 맹목적이기에 보게 되는 부재와 맺고 있는 그 자체로 중성의 비인칭 관계이다.[각주:1]

 

동생 디에고의 얼굴을 그리거나 조각으로 만들 때, 자코메티는 포즈를 취하는 순간부터 대상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고 고백한다.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그게 누구인지, 그 정체를 알 수 없다. 익숙한 것 앞에서, 망각의 강을 건넌 후에, 자코메티는 동생 디에고를 보고 있지 않았다.

 

를 바라보는 일은 단순하지 않다. ‘에게서 에게로 찾아가는 길이다. 아상(我想)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를 탈출하는 일이고, ‘에게 도착한 이후, 다다랐던 지점에서 탈영토화 하는 일이다. 이 과정은 중성적이고 비인칭적이다. 이 과정에서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의 낯선 가 눈앞에 등장한다. 대상에 도착하기 전에, 원래의 대상이 지워진다. ‘는 누구인가? “누군가가 있다. 내가 홀로 있는 곳에. 홀로 있다는 사실에. 그것은 나의 시간이 아닌, 너의 시간이 아닌, 공동의 시간이 아닌, 하지만 어느 누구의 시간이 죽어 버린 시간에 내가 속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어느 누구는 아무도 없을 때에 여전히 현전하는 자이다.(……) 어느 누구는 얼굴 없는 그, 사람들이 제각기 그 일부를 이루는 그 누구이다.”[각주:2]는 예술가와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어느 지점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비인칭적 존재이다. 타자의 시선과 공간이 제거된 상태에서 만나게 되는 존재자이다.

 

고독하다. “어느 누구도 아닌 자가 된 나, 타자가 된 타인을 발견하러 가는 과정에서 만난 누군가는 공간 속에 침묵을 드리운다. 그리하여 내가 존재하는 곳에서 나는 더 이상 나에게 말을 건넬 수 없고, 나에게 말을 건네는 자는 를 말하지 않고, 그리고 그는 그 자신이 아니다.”[각주:3] 누구인지 모르는 과정에서 길을 잃는 자가 되어, 작가는 알 수 없는 를 찾는다. 고독한 가운데 직면하게 되는 는 타자이자 나이다. 그러므로 매혹은 고독의 시선, 끊이지 않는 끝나지 않는 시선이다. 그 시선 속에서 맹목 또한 여전히 시각이다. 더 이상 본다는 것의 가능성이 아니라 보지 않는다는 것의 불가능, 그 자체를 보이게 하면서 끝나지 않는 시각 속에-언제나 언제나-지속되는 불가능으로서의 시각이다.”[각주:4] 자코메티는 나는 디에고의 얼굴에서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를 그리면서, 비인칭적 누군가를 만나고, 그 안에서 또 다른 를 만나게 된다.

 

문학 역시 에게서 로 가는 길 위에 있다. 카프카는 자신에 대한 관찰에서 견딜 수 없는 현실을 넘어 또 다른 세계, 자유의 세계로 이르는 드높은 관찰로 가는 해방의 통로[각주:5]를 발견한다고 말한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를 말하기를 거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를 제거하는 일이, ‘를 찾는 출발점이 될 게다. 카프카는 로 대체할 수 있을 때, 무척 기뻐했다고 한다. 그때라야 문학에 들어섰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작가는 아무 것도 아닌, 비어있는 공간에 자리하는 존재자가 된다. 아무 것도 아닌 상태에서, 나에게서 로 가는 고독한 과정에서, 아무 것도 아닌 자가 되어 다른 세계를 여는 사람인 게다.

 

그러므로 바라본다는 것은 세계를 여는 행위가 된다. 수동적인 태도로 눈꺼풀만 뜨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의지로 모험을 떠나는 일이다. 모험은 끝나지 않는 여정을 포함한다. 그 과정이 치열하고 엄숙해야, ‘다른 세계가 열린다. 다시 한 번 다른 차원으로의 도약이 가능하다. 다른 세계가 열리는 관찰은 이전에 시작했던 관찰이 아니다. 나선형의 다른 지점, 질적 축적이 쌓인, ‘드높은 관찰이다. 색다른 통로가 열린다. 바라봄 속의 또 다른 바라봄의 세계가 열리고, 그 열린 세계 속에 다시 관찰하며 새로운 공간이 펼쳐진다.

 

 

자코메티의 조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조각이 가진 생명체와 영원성 때문에, 그 조각들을 절대적으로 바라본다. 관람객은 그 시선에 이끌린다. 자코메티가 캐롤린에게 매혹 당하였던 것처럼, 시선 속의 시선으로, 우리는 홀림을 당한다. ‘환원된 것이 아니라 환원을 벗어나 환원할 수 없는 것으로서, 공간 속에서 조각들은 깊이가 아닌 깊이, 이미지라는 것의 깊이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공간의 주인이 된다. 우리가 조각들을 환원할 수 없는 것으로 바라보게 되는 이 지점은 우리를 무한에 위치하게 하는 지점, 여기가 그 어느 곳과도 일치하지 않는 지점이다.”[각주:6]

 

캐롤린를 바라보고 있는 알베르토 자코메티

 

 

 

자코메티는 일본 철학자 야나이하라(그의 아내 아네트와 사랑에 빠졌던 일본의 철학자이기도 하다)를 모델로 삼아, 작품을 만들었다. 자코메티는 당시 작업 과정을 이렇게 진술한다. “내가 당신의 얼굴을 그린다는 것은, 아무도 탐험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뜻이고 우리는 함께 그 모험 속을 들어가려는 참이오.”[각주:7] 바라봄의 세계에서, 미지를 찾아 헤매는 일은 몽롱한 환상의 세계로 빠지는 것과 같다. 그 지점에 다다를 때, 시선은, 스스로, 구멍을 찾는다. 어느 차원의 어느 지점에서 만날지 모르는 낯선 영토를 찾아간다. 그 영토를 만나기 위해, 촉수를 곧추세우고, 방황한다. 그 길은 끝이 없다. ‘에게서 에게로 가는 길. ‘에게 다가갔다가 에게 돌아오는 길. 이것은 침묵의 운동이다. 벗어나려는 원심력과 에게서 에게로 돌아오는 구심력을 가진다. 이 운동은 원반던지기처럼, 작품을 시작할 때마다 반복된다. 끊임없는 운동은 그 자체로 무한성을 가진다.[각주:8] 해결되지 않는 미스터리처럼 반복되고 무한 변주된다. 끝을 알 수 없는 지점으로 여행을 떠나는 일에 창작자와 대상이 동시에, 하나의 곡을 완성한다. 더불어 협주하며 시선을 주고받으며 투쟁한다. 치열하게 주고받던 시선은 그 자체로 영원성을 획득한다.

 

미로에서 건져 올린 작품은 뒤늦게 태어난다. 묘사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재현하는 게 아니듯이, 조각은 죽음의 공간에서 생의 차원으로 건져 올려진다. 구체적인 공기가 낱낱이 발현되고, 얼굴은 내밀한 감정과 사건을 품고 오롯이 부활한다. 자연스럽게 건져 올린 흉상은 주변의 공기를 집어삼킨다. 작품은 전시장의 허공을 끌어당기고, 흉상의 시선은 관람객의 눈빛을 훔친다. 어느 장소에 놓이건, 생명을 얻은, 영원함을 얻은 조각품은 그 자체로 존재의 존재자가 된다. 조각 작품은 그 자체로 절대적이다. 소멸하는 인간보다 영원하게 살아남아서, 지금, 여기 우리 앞에 있다.’ 마치 저 먼 미래에서 다가온 예언자처럼, 저 먼 과거에서 불려나온 이집트의 미라처럼, 해골만 남은 인도 수행자의 육신처럼, 저 스스로 존재한다.

 

지코메티의 시선은 무한에 위치하게 하게 하는 지점에 있고 그 어느 곳도 일치하지 않는 지점에 가닿는다. 그곳에서 숨 쉰다. 단순히 숨을 쉬는 게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진다. 예술가의 영혼이 담긴 숨을 저장하여, 그 숨을 동시에 뱉어낸다. 전시장에서 자코메티의 숨과 대상의 숨과 그 시간을 뛰어넘은 숨이, 관람객의 숨과 뒤섞인다.

 

작가는 에게로 향하는, 객관적 시선과 외부의 시선을 갖기 위해, 저 멀리 다른 차원의 운동을 하면서, 천천히 자신의 몸으로 돌아온다. ‘에게로 갔다가 자신의 홍채로 돌아온다. 환상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일. 그 과정에서 는 낯선 가 돌아올 영토를 마련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사라진다. 글쓰기에서도 나타나는 일이다. 글 쓰는 자는 끊임없이 사라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백지 위에서 죽는 자이기 때문이다. 빈 텍스트 위에서 죽지 않으면, 비인칭적 죽음을 겪어나가지 않으면, 낯선 시간을 경험할 수 없다. 낯선 얼굴을 만날 수 없다. 글을 쓰는 자는 나르시시즘적인 주체를 사라지게 하고, 끊임없이 미지의 공간을 여는 역할을 하는 자에 불과할지 모른다. 다가올 누군가에게 미지의 자리를 내어주는 사막 속의 낙타일지도.

 

 

 

4. 김수영, 말하긴 했지만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즈음에서 시인 김수영을 이야기해야겠다. 김수영은 앞선 연구자들이 밝혀왔듯이, ‘자코메티적 발견을 말해왔다. 시인 김수영의 후기 시세계 변모 과정에서 결정적인 열쇠를 쥐고 있다. 이 과정은 구체에서 추상으로, 다시 구체의 세계로 돌아오는 사유의 경로를 보인다. “연극……구상(具象)……이런 것을 미워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다시 추상을 도입시킨 작품을 실험했다. 그러면서 아직도 “drama를 포기할 단계를 못한 것 같으나 되도록 자연스럽게 되고 싶다고 말한다. 이 사유의 변곡점들은 자코메티가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구상으로 돌아오는 과정과 겹쳐진다.

 

원래 연극배우이기도 했던 김수영은 그의 초기 시세계에 연극성이 반영되어 있다. 그는 연극성에 매료되었다고 고백하면서 연극성의 요체를 풍자와 구상성으로 정리하여 설명한다. 김수영은 역시 스토리다. 하나의 스토리다.”하면서 쉬페르비엘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가 점잖은 주제를 취급하면서도” “속취(俗臭)와 아기(雅氣)”를 담고 있다는 점을 든다.[각주:9] 스토리성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화자는 무대 위에서 연극대사를 펼치는 배우가 된다. “를 공존시키고, 갈등이 드러나고, 이질적이 것이 함께 한다. 그러나 김수영은 시적 연극성의 또 다른 근간인 구상성은 한편으로는 시에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진술들이 나타나는 것을 차단하는 방편이 되지만 시적 대상에 대한 관심을 예각화함으로써 시인의 관심이 사회적인 것에까지 확장되는 데 일정한 방해가 되기도 한다.”[각주:10]고 판단한다.

 

온몸으로 온몸을 밀고나갔던 시인은 이상을 밀고나가야 했다. “즉 실천은 윤리적인 것 이상의, 작품의 image에까지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것이어야 했다. 이것이 현대의 순교이다. 익히 알려진 유명한 표현을 빌려오면 다음과 같다. “시인은 영원한 배반자다. 촌초(寸秒)의 배반자다.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한 그 자신을 배반하고……이렇게 무한히 배반하는 배반자, 배반을 배반하는 배반자…… 이렇게 무한히 배반하는 배반자다."[각주:11] 시인은 텍스트 위에서 배반하며 죽는 자이다. 시인은 배반하며 관찰한다. 시인은 지우며 바라본다. 시인은 잊으며, 새로 짓는다. 시인은 망각하며, 떠난다. 시인은 배반하며, 미지 속으로 그 자신을 던진다. 온몸을 던진다. 몸을 던지고 지우고 배반하며, 죽는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그 자신 자체가 image가 된다.

 

 

[각주:12]

 

 

눈이 온 눈이 온 뒤에도 또 내린다

 

생각하고 난 뒤에도 또 내린다

 

응아 하고 운 뒤에도 또 내릴까

 

한꺼번에 생각하고 또 내린다

 

한 줄 건너 두 줄 건너 또 내릴까

 

페허에 페허에 눈이 내릴까

 

There is no hope of expressing my

vision of reality. Besides, if I did,

it would be hideous something to

look away from

 

내 머리는 자코메티의 이 말을 다이아몬드같이 둘러싸고 있다 여기 hideous의 뜻은 몸서리나도록 싫다는 뜻이지만, 이것은 가령 보이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to look away from을 빼 버리고 생각해도 재미있다. 나를 비롯하여 범백의 사이비 시인들이 기뻐할 것이다. 나를 비롯하여 그들은 말할 것이다. 나는 말하긴 했지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으니까 나는 진짜야, 라고. 이에 대해 심판해 줄 자는 아무도 없다.[각주:13]

 

이 시를 자코메티적인 상황으로 읽어보자. ‘에게서 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도 같이 길을 잃어보자. 눈은 자코메티의 시선이자 바라봄이 될 수 있다. 시적 주체는 발화하지만, 전면에 보이지 않는다. 텍스트 위에 내리는 눈()은 눈()이 될 수 있다. 눈은 사라지는 주체, 소멸하는 화자가 될 수 있다. 눈은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려는, 망각의 강을 건너는 시적 주체이어도 된다. 눈은 그대에게 가 닿으려는 온몸이여도 좋다. 이 모든 것들이 내리고 또 내린다. 이 모든 것들이 생각 뒤에, 생각 속에, 생각 위에 내린다. ‘는 사라지고 소리가 남는다.’ 사라지며 흔적이 남는다. 사라지는 흔적 위에, 다른 형태가 태어난다. 새로 태어난 아이가 울음 울듯이 응아하고 내리고, 이 모든 것들이 앞뒤 가리지 않고 한꺼번에 내린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은 페허위에서 진행되는 사건이다. 페허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죽음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과 생을 동시적으로 사유하고, 동시적으로 끌어안고, 동시적으로 껴입은 상태에서 존재는 숨을 쉰다. 그렇기에 이 비인칭적 공간은 이미 페허이고, 눈이 내리고 내려도 페허가 될 수밖에 없다. 의문문으로 끝을 맺는다. “페허에 페허에 눈이 내릴까물을 수밖에 없다. 글 쓰는 자로서 자의식이 가득한 문장 위에, “한 줄 건너 두 줄 건너 또 내릴까라고 묻는다. “나는 말했지만 보이지 않을 것이기에, 어느 순간 미지의 어느 지점에 도착할지 모른다. 미지의 장소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올지 모른다. 그러므로 단지 물을 뿐이다. 주체의 자리를 미지의 영역으로 끝까지 몰아붙이기 위해, 질문한다. 가자. 더 가야 한다고. 무한 반복되는 운동 속에서 존재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가볍고 가벼운 발자국과 같은 눈이 내리는 사이, 그 어떤 다른 것이 되어 흩날려도 되는 사이, 침묵이 흐른다.

 

시는 하나의 수련이다. 수련은 정신이고, 정신의 순수함이며, 모든 것과 맞바꿀 수 있는 이 공허한 능력으로서의 의식이 실제적 능력이 되고, 그 조합의 무한성과 조직의 범위를 엄격한 한계 내에 가두는 순수한 지점[각주:14]이 된다. 모리스 블랑쇼가 말하듯이 시인은 공허한 능력의 소유자이다. 시인은 쓸모없는 것들에 목숨을 건다. 한 문장을 위하여 온 시간을 불태운다. 그것을 정신의 순수함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을 바꿔 말하면, 어떤 한계에 부딪히는 존재라는 뜻이다. 무너지는 것도 능력이다. 그리고 다시 걸으면 된다.

 

일어서는 일. 스스로 상처를 지워내는 일. 버리는 일. 그래서 터질 듯이 가득 채운 그림에서 자코메티는 숱한 선들을 지운다. 지워지고 제거되는 허공을 만들고,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비운다. 지우고 지우며, ()가 된다. 그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백지 위에 담으려고 한다. 몇 개의 선들이 가볍게 중첩되면서, 저절로 충만해진다. 결핍을 드러내면서 살아있다. (캐롤린의 그림처럼), 가장 사랑하는 대상에게 죽음을 중첩한다. 우연인 듯 필연인 듯, 각자의 존재 의미를, 현존에 있지 않는 다른 자리로, 슬쩍 위치이동 시킨다. 그 선은 탈물질화된 존재들이다. 자코메티의 선들이 사라지며, 리얼리티를 벗어난다. 지워질수록 영원성을 얻는다.

 

시인 김수영의 시작노트에서 사실주의적 문체를 터득했을 때 비로소 비사실에로 해방된다.”[각주:15]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바라보고 바라보면서, 또 다른 드높은 관찰로 가는 해방의 출구를 연 셈이다. 그 시선에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멀어지며 바라보기 때문에, 관람객이 일부러 거리를 두고 열 발짝 뒤로 물러서지 않아도 된다. 영원성을 획득한 것 같으면서도, 가볍게 사라져버리는 눈송이처럼, 자코메티의 대상들은 탈물화된, 비인칭적 공간에 위치한다. 작품의 시선은 투명하다. 사라져버릴 것만 같지만, 뒤돌아서자마자 나타나는 환영처럼, 어디선가 출현한다. “웃음이 난다. 이 웃음의 느낌, 이것이 양심일 것이다. 나는 또 자코메티에게로 돌아와 버렸다.”[각주:16]

 

 

걷는 사람

 

 

 

5. 실패, 먼저 와 기다린다

 

 

 

나의 진정한 비밀은 나의 생명밖에는 없다. 그리고 내가 참말로 꾀하고 있는 것은 침묵이다. 이 침묵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을 치러도 좋다. 그대의 박해를 감수하는 것도 물론 이 때문이다.”[각주:17]

 

 

시인 김수영은 나는 번역에 지나치게 열중해 있다 내 시의 비밀은 내 번역을 보면 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고 보면, 시작노트 6에 시인 김수영은 비밀을 두 개나 고백한 셈이다. 하나는 번역의 문제, 또 다른 하나는 생명의 문제이다. 그리고 생명이라는 단어를 자코메티의 시선의 깨달음과 연결 지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은 사라져도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시선이라는 깨달음말이다. 김수영이 말한 생명이라 함은 영원하게 살아남을 수 있음을 말하는 게 아닐까, 한다. 자코메티가 이 깨달음 이후에, 자신의 그림에서 선을 지우듯이, 선을 지운 자리에 침묵을 드리우듯이, 영원한 공기가 흉상을 감싸고 돌 듯이, 영원성을 얻듯이, 김수영 또한 이 과정을 진행한다. 그의 비밀, 나의 진정한 비밀나의 생명영원을 얻고자 함이고, “참말로 꾀하고 있는 것은낡은 형식일지라도, 연극적인 방식이나 구상성을 탈피하더라도, 시 안에 침묵을 모시는 일이다. 김수영 역시 지우개를 든다. 단어를 지우고, 다소 분명했던 시적 주체의 자리를 지우고, 거리를 두며 멀어진다. 멀어지는 일. 망각의 강을 건너는 일. 그리고 돌아오는 일.

 

김수영 시인이 외국어와 한국어 사이의 경계에 서 있었던 점을 보면 더욱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번역은 한 언어와 다른 언어 사이에서 원심력과 구심력의 운동을 하는 작업이다. 모국어에서 멀어지며 외국어로 다가간다. 미지의 단어로 낯설어진 모국어의 세계로 돌아온다. 어떤 단어는 번역 불가능하여,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미지의 또 다른 단어를, 맥락에 따라, 다른 자리에 놓아야 할 경우가 발생한다. 이렇게 번역은 가능성의 불가능성을 경험하며, 사유의 자리에 타자의 단어들을 쌓는다. 언어로 언어를 배반하며, 이국의 감수성으로 자국의 감수성을 뒤집는다. 비슷한 범주의 단어를 두고 동질성을 찾으려고 하면할수록 멀어지는 경험을 하는, 이질적 덧칠 작업과 같다.[각주:18]

 

이 과정에서 언어의 운동을 체득한 김수영은, 천천히, 후기 시세계[각주:19]의 변화 지점으로 이동한다. ‘침묵의 운동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자코메티적 발견이라고 돌려 말해도 좋을 것이다. 사실 침묵의 발견일 것이다. 김수영이 일본어로 시작노트를 쓰는 일 역시, 자코메티처럼 시선의 멀어짐 연습이다. ‘로부터 출발하여 에게로 가는 일이다. 번역은 이 운동의 또 다른 실천이다. 언어의 타자성을 체험하는 온몸의 왕복 운동이다. 이 운동은 끊임없는 실패를 전제로 한다. 제거하고 정리하며, 침묵의 공간에 들어설 때, 시인은 무너진다.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을 하지 않은 작가는 예술가가 아니다. 현실적인 게 얼마나 빈약하고 허약한 울타리인지, 그것이 얼마나 착각과 교란을 담보하고 있는지, 눈으로 체험해야 한다. 찰떡같이 믿었던 지식이 무너지는 경험을 해 보는 일, 이미지가 사라지는 경험을 해 보는 일. 그 가운데 사물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바라보는 일. 이 과정을 체험하는 예술가는 선물을 받는다. 실패는 즐거운작업이 된다. 이질성과 동일성을 동시에 고려하면서도, 역설의 과정을 즐길 수 있을 만큼, 견딜 수 있는 작업이 된다.

 

작품을 읽고/보고 난 뒤에 감도는 침묵은 모험의 결과물이다. 침묵을 위해서라면, 희생을 감수해도 된다는 것은 창작자가 미지의 순환 속에서, 죽음과 두려움을 가로지르겠다는 것이다. 침묵은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중첩하고, 생과 사의 경계에서 녹슨 칼날을 느리게 움직이는 운동성이기 때문이다. 천근만근 무거운 칼을 휘두르며, 공기를 느리게 정지시키는 일. 침묵을 끌고 다니는 예술 앞에 걸음을 멈추게 하는 일, 호흡을 가다듬는 일이다. 그 가운데에 관람객을 두고, 우리가 끊임없이 성찰하게 하는 일. 독자의 상처를 건드리는 일. 이것이 성실한 시가 될 것이다.

 

자코메티와 김수영, 다른 길을 걸으며, 비슷한 지점에 도착한다. 동생 디에고를 만든 흉상이든, 아내 아네트를 만든 조각이든, 캐롤린이든, 자코메티는 결국 에게로 돌아온다. 몇 걸음 뒤로 물러서 보이는 거리감은 자코메티 자신이 알고 있는 대상과의 거리감일지도 모른다. 이 거리감이, 비어있는 공간을 만들고, 침묵을 드리우고, 대상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낯섦을 만든다. 스스로 비어있게 한다. 블랙홀처럼 주변의 모든 사물을 지워가는 동안, 침묵이 먼저 와 기다린다. 눈이 내리는 동안, 동일성이 끊어지는 눈이 내리고, 비연속적으로, 흩날리는 동안, 김수영은 고독을 앞당긴다. “침묵의 한 걸음 앞의 시가 되는 것이다. 미지의 공간으로 손님을 초대하는 일. 그것이 예술작품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자코메티와 김수영, 용기 있는 선택을 한 자들이다. 용기 있는 시선은 다른 방식으로 걷게 한다. 덜어내고, 버리며, 가볍게. 걷는다. 그 걸음 속에 절망을 담고, 시를 쓰며,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실패한다. 세상의 기준으로 사랑받고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희생을 치르더라도, 걷는다. 계속 걸어야 한다. 다음 작품을 위한 몸부림 정도의 절망일지라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 시인 김수영이 완전한 희생의 한걸음 앞의 희생[각주:20] 을 말하듯이, 완성된 작품을 위한 한 걸음 앞의 절망이 필요하다. 맘 놓고 실패하는 이들이 있기에, 지금 여기 우리가, 딸각 소리를 듣는다.

 

나에게 조각은 하나의 아름다운 물체가 아니라 내가 세상을 보는 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입니다. 인간이 생각을 하는 그 무엇이 나를 매료시키고 내 마음을 사로잡게 하는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내가 하는 이 일이 조금이나마 성공한다면, 내 조각 작품은, 내가 보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고 공감하며 소통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각주: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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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은돌 : 발로 공부하는 사람이다. 2008년 『애지』에 평론을, 2013년 『현대시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하다. 연구서 『거울 밖으로 나온 기형도』를 비롯하여 평론집 『한 칸의 시선』이 있다. 2008년 교통사고 당시 살아있는 것은 바라보는 일이다라는 문장이 스치고 지나가다. 그 이후 눈동자를 그리기 시작하여, 다섯 번의 개인전(<눈에 대한 낭만적 독해>)과 네 번의 단체전을 갖다. 2017년 여름 리좀 국제예술인 레지던스 작가로 참여하여, 프랑스 화가 Sylvie Deparis을 주제로 전시를 열다. 1인 잡지 MOOK 발행인이다.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기형도의 비가 2)라는 믿음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현재 '수유너머 104'에서 공부하고 있다.

 

https://youtu.be/jgWo5wqXFYc

 

 

    1. 유튜브로 해당 글을 음성 파일로 만들어 올려 놓았습니다. 화면으로 글을 읽기 힘든 분들, 음성으로 들으셔도 좋습니다. 1인 잡지 무크 <돌>을 펴냈던 지난 작업을 이어, 유튜브에서 1인 잡지를 이어 나갈 계획입니다. 

    2. <그림이 있는 글>은 그림과 시, 예술 작품과 문학 작품을 연결하여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하는 공간입니다. 가끔은 제가 직접 그린 그림과 글을 올리기도 하고, 에세이류의 글을 올릴 계획입니다.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3. 2018년 가을호 『시와 사람』, <예술산책> 발표

 




 

  1. 모리스 블랑쇼, 이달승 옮김, 『문학의 공간』, 그린비, 2010년. 33~34쪽. [본문으로]
  2. 같은 책, 30쪽. [본문으로]
  3. 같은 책, 25쪽. [본문으로]
  4. 『도록』 179쪽. [본문으로]
  5. 같은 책, 93쪽. [본문으로]
  6. 같은 책, 56쪽. [본문으로]
  7. 『도록』 251쪽. [본문으로]
  8. 「내가 조각가인 이유, 앙드레 파리노드와의 대화」, 『도록』 403쪽. 앙드레 파리노드 : 예술가가 정상이 아닌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자코메티 : 어떤 면으로는, 사는 것 대신에, 자신의 시간을 머리 하나를 모방하기 위해 매일 밤 의자 위에서 같은 사람을 5년 동안 고정시켜 놓고, 계속해서 실패하며 머리를 모방하려고 하고, 또 계속해서 그것을 이어나가는 것은 비정상이죠. 정확히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행동이지 않나요? 이 일은 온전히 이것을 용인해 줄 특정한 사회 안에서 사는 것을 요구해요. 사회 전체에게 쓸모없는 행위에요. 이것은 온전히 개인의 만족이에요. 극도로 자기중심적이고 그래서 창피한 거예요, 모든 예술작품은 전적으로 무(無)를 위해 태어났어요. 소비된 시간들, 그 모든 천재, 그 모든 작업은 결국엔 모두 본질적으로 무(無)를 위한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현재에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때 경험하는 즉각적인 느낌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말이에요. 조각은 모험, 그 위대한 모험은 같은 얼굴에 낯선 무언가가 갑자기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이고, 그것은 세상의 모든 여행보다 위대해요. [본문으로]
  9. 『김수영전집2』, 「새로움의 모색-쉬페르비엘과 비어레크」, 민음사, 2018년 2월 3판 1쇄, 320~329쪽. 앞으로 김수영 산문 인용은 『전집2』로 표기한다. [본문으로]
  10. 조강석, 「김수영의 시의식 변모과정 연구-’시적 연극성‘과 ’자코메티적 전환을 중심으로」 한국시학연구, 제28호, 372쪽. [본문으로]
  11. 『전집2』, 「시인의 정신은 미지(未知)-나의 시의 정신과 방법」, 347쪽. [본문으로]
  12. 이 시를 썼을 때, 김수영은 세로쓰기 방식으로 시를 배열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본문으로]
  13. 『전집2』, 551쪽 [본문으로]
  14. 모리스 블랑쇼, 이달승 옮김, 『문학의 공간』, 그린비, 2010년, 114쪽. [본문으로]
  15. 『전집2』, 552쪽. [본문으로]
  16. 『전집2』, 552쪽. [본문으로]
  17. 『전집2』, 553쪽. [본문으로]
  18. 『전집2』, 「시작 노트 6」, 554쪽. “내가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이상이 일본적 서정을 일본어로 쓰고 조선적 서정을 조선어로 썼다는 것이다. 그는 그 반대로 해야 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함으로써 더욱 철저한 역설을 이행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라고 말한 부분 역시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본다. [본문으로]
  19. 「시작 노트 6」을 쓸 무렵, 김수영 시 작품 목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후기 시세계의 변화 지점을 알 수 있는 목록들이다. 「풀의 영상」, 「전화이야기」, 「꽃잎 1,2,3」, 「먼지」,「원효대사」,「풀」 등이다. “자코메티적 발견”이 후기 시 변모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연구한 연구 논문들이 속속 발표되고 있다. [본문으로]
  20. 『전집2』, 「시작 노트 6」, 554~555쪽. 김수영은 ‘자코메티적 발견’을 수행하고나서 만세를 부른다. 이런 문장을 슬 수 있는 그 용기과 결단이 5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놀랍다. “「눈」이 그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시는 <폐허에 눈이 내린다>의 여덟 글자로 충분하다. 그것이, 쓰고 있는 중에 자코메티적 변모를 이루어 6행으로 되었다. 만세! 만세! 나는 언어에 밀착했다. 언어와 나 사이에는 한 치의 틈서리도 없다. <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로 충분히 <페허에 눈이 내린다>의 숙망(宿望)을 달(達)했다. 낡은 형(型)의 시다. 그러나 낡은 것이라도 좋다. 혼용되어도 좋다는 용기를 얻었다. 완전한 희생. 아니 완전한 희생의 한걸음 앞의 희생. 독자여 우쭐거려서 미안하다. 그러나 내가 의외로 ‘낡은 것’만은 확실하다.‘ [본문으로]
  21. 『도록』, 395쪽. [본문으로]
Posted by 수유너머104

침묵 한 걸음 앞의 시 (1)

-자코메티와 김수영

 

 

 

                                                                                                                     금은돌 / 시인, 화가

 

1. 자코메티[각주:1], ‘시선이라는 깨달음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어느 강좌를 듣고 나오는 길에, 혜화역에 올라탔다. 마침 옆에는 그날 같이 수강했던 한 남성이 있었다. 그와 나는 강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지하철 인파 속에 문득, 응시했다. 눈빛 하나. 찰나. 남자. 반짝.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거두고 나는 다시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다. 뒤에서 누군가, 정수리를 가격했다. 시선 속 남자가 타원형을 그리며, 내 뒤로 다가왔고, 지하철 안의 사람들은 밀물처럼 빠져나갔다. 단지, 모르는 남자를 바라봤다는 이유만으로, 당했다. 묻지 마, 폭력을.

 

시선이 무섭다. 시선이 날카롭다. 시선은 칼을 가지고 있다. 시선만으로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

 

어느 날 나는 어떤 젊은 소녀를 그리고 있는 동안 뭔가가 갑자기 떠올랐다. 모든 것은 사라져도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시선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시선을 제외한 머리의 나머지 것은 죽은 자의 머리와 같은 해골에 불과하기 때문에, 결국 죽음과 살아있는 개인을 구별해 주는 것은 바로 시선이다.”[각주:2]

 

어떤 그린 그림 앞에서 한참동안 멈춰있었다.[각주:3] 작품 제목은 <빨간 드레스를 입은 캐롤린>이다.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전시에서였다. <걷는 사람>을 보고 싶었다.

 

나는 현대미술관의 아주 시원한 전시실에서 숨듯이 피신해 있었다. 무심히 지나가다가 어느 그림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아니, 차라리 어떤 눈빛 때문에 멈추었다는 게 맞겠다. 그건 화가와 마주하고 앉아 있는 어떤 젊은 여자의 눈빛이었다. 빨간 옷을 입은 여인은 두 손을 얌전히 다리 위에 모으고 있었다. 얼핏 봐서는 이 그림이 다른 그림과 특별히 달라 보이는 점은 없었다. 하지만 그 그림은 내게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깊은 두 눈이 뿜어내는 어떤 힘이 나를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 시선은 내게 최면을 걸었고 동공 안에 살면서 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은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시선이 나에게 건네는 말을 들었다. 세상은 그녀 안에서 뿜어져 나온 빛만이 존재했다. 그림 속 그녀와 나는 서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렇게 꽤 오랫동안 얼어붙은 듯이 그녀의 얼굴을 마주했다. 정신이 좀 들고 나서야 그림의 레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각주:4]

 

위의 글을 쓴 프랑크 모베르(프랑스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가 말하듯이, 나 역시, 숨어들었다. 여러 일행이 있었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무엇에 대한 도망일까? 무엇을 위한 도망일까? 어둠이 있었다. 자코메티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있었다. 도망치려고 하는데, 그녀의 시선에 사로잡히고 만다. 자코메티는 그녀를 보자마자 깨달음을 얻는다. 돈오돈수와 같은, 누군가 뒤에서 도끼로 내려치는 것 같은, 무엇인가를 발견한다. 생과 사를 가르는 기준이 시선이고, 영원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시선이라는 사실이다. “시선을 제외한 머리의 나머지 것은 죽은 자의 머리와 같은 해골에 불과하다.

 

시선은 눈동자의 힘줄이다. 시선은 눈동자라는 발전소에서 보내는 전류이다. 시선은 발전소에서 거둬들이는 시간이다. 눈을 떴을 때, 시선이 꽃을 빨아들인다. 눈을 감을 때, 시선은 꽃의 향기를 음미한다. 시선은 쏜다. 시선은 말을 건넨다. 시선은 무의식의 화법이다. 시선이 사라지면 죽는다. 시선을 거둔다는 것은 관심의 방향을 돌린다는 것이다. 사랑의 소멸이다. 시선을 거둔다는 것은 사랑이 끝났다는 뜻이다. 관심이 사라졌다는 것은 죽음이다. 바라보지 않음은 그녀가 존재하지 않음이다. 시선이라는 세계. 시선이 낳은 인간관계. 시선이라는 힘줄. 시선이라는 날카로움. 날카로움 가운데 절규. 정확성과 부정확성 가운데의 매혹, 그 사이 침묵. 시선은 길을 만든다. 시선은 흐르는 나와 너의 관계에 징검다리를 놓는다.

 

 

 

 

자코메티는 그녀에게서 시선의 힘을 발견하면서 동시에 죽음을 떠올린다. 자코메티가 매혹되었기 때문이다. 매혹은 시선이 손을 내밀어 사물을 만지는 것이다.[각주:5]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보는 것이 강렬한 접촉으로 당신을 만지는 것과 같다. 바라봄으로써 접촉한다. 섹시한 만남이자 살갗이 부딪히지 않는 매력적인 유혹이다. ‘거리를 두고 있기에 아름답고, 거리를 두고 있기에 절대적이고, 거리를 두고 있기에 애가 탄다. 바라보는 자는 여인에게 사로잡힌다. ‘사로잡힌다는 서술어에서 말하듯이, 이것은 능동태가 아니다. 실제로 다가가서 육체적으로 대상을 만지는 행위가 아니다. “시선이 부동의 움직임과 깊이 없는 배경으로 이끌려 들어가 흡수[각주:6]된다. 이럴 때, 이미지가 주어진다.

 

아마도 자코메티는 그녀에게 빨려 들어갔을 것이다. 그녀를 중심으로 배경은 사라지고, 그녀만, 그녀의 눈동자만 보인다. 그녀 이외의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공간이 사라지고, 오직 시선만 남는다. 오롯이 시선이 남은 자리에 도드라지는 죽음과 어둠의 기운이 자리한다. 자코메티는 사랑하는 대상을 그릴 때, 색을 지운다. 잿빛과 죽음을 남긴다.[각주:7]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은 우리한테서 의미 부여의 능력을 빼앗고, 그 자체의 감각적본성을 포기하고, 세계를 포기하고, 세계 이쪽으로 물러나 우리를 그곳으로 이끌며, 더 이상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으나 그럼에도 시간의 현재 공간 속의 현전과는 낯선 현전 가운데 긍정되고 있다. 그것이 어떠했는가를 본다는 것의 가능성으로부터의 분열은 시선 속에서마저 불가능으로 굳어진다.[각주:8]

 

바라보며 마비되는 일. 바라보며 꽂히는 일. 시선에 따라 몸을 움직이는 일. 시선에 따라 고개가 돌아가는 일. 영혼과 마음이 수동태가 되는 일. 이끌려가며, 고정되는 일. 매혹의 시선은 힘이 세다.

 

 

 

2. 망각, 숨겨져 있는 선물

 

그동안 자코메티가 작업하며 단련해 온 과정을 살펴보자. 자코메티는 낯선 사람을 대상으로 작업하기 보다는, 지인을 모델로 삼아왔다. 아내나, 친구, 동생 등이다. 익숙한 대상이다. 자코메티의 동생 디에고는 자코메티가 13살 때부터 자코메티가 죽을 때까지 자코메티의 그림이나 조각 작품을 위해서 기꺼이 모델이 되어주었다. 특히 동생 디에고는 너무나 익숙한 대상이자 작업의 조력자이자 친구였다.

 

동생은 나를 위해 수만 번도 넘게 포즈를 취해 주었다. 디에고가 포즈를 취하는 순간부터 난 그게 누구의 얼굴인지 알아볼 수가 없다. 내가 막연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두상을 만들고 나면, 사람들은 늘 , 디에고로군하고 말한다. 정작 나는 전혀 모르겠는데 말이다.[각주:9]

 

익숙한 대상을 바라보는 일은 얼핏, 쉬운 일로 보인다. 뻔히 아는 눈빛, 익숙한 얼굴선, 안 보고도 그릴 수 있는 콧등, 흘러내리는 머리카락. 혹은 몇 번의 터치로 도드라지는 입술 선까지. 동생 디에고를 그리는 일은 자코메티에게 식은 죽 먹기이다. 그러나 자코메티는 익숙한 대상을 관습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자코메티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모델을 우리가 아는 대로가 아닌 우리가 보는 그대로 그려야 한다. 단순히 보이는 그대로 표현한다는 것이 바로 가장 어려운 것이다. 오로지 우리가 상대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모두 잊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모델의 본질적인 유사성에 도달할 수 있다.” [각주:10]보는 대로 그리기 위해서, 잊어야 한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 멀어져야 한다. 일반적이지 않은 발상이다. 보기 위해서는 지식과 관습과 익숙한 것들을 지우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망각. 이것은 미술대학에서 배운 데생 기법, 지식과 훈련으로 단련된 시각, 관습과 기억으로 그리려는 습관을 벗어버리기 위해 필요한 단어이다. 보는 대로, 그리기 위해, 대상이 누구인지, 지우는 일이 우선이다. 망각은 숨겨져 있는 선물이다. 보는 대로 그리기 위해서, 선물이 아닌 것처럼 선물을 받아들이는 일. 숨겨진 보물을 찾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망각은 원래부터 거기에 이미 언제나있었던 존재이다. 망각의 강으로 가는 길은 지름길을 일부러 회피하고, 우회하는 길을 선택하는 일이다. 더듬더듬, 어둠 가득한 숲에서 스스로 빛을 비추어 길을 만드는 일이다. 망각은 기존 관계를 지우며, 관계를 재설정한다. 대상에 새로운 방식으로 스며들기 위해 길을 잃어보는 것이다. 관계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 낯선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 이상하게 바라보기 위해, 비밀의 문을 연다. “망각은 망각되는 것과의 관계속에서 비밀의 힘과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관계[각주:11] 속에서 새롭고 낯선 사건을 찾아낸다.

 

 

 

 

사랑에 빠진 자코메티는 루브르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을 캐롤린과 함께 간다. 아일랜드 태생 화가 베이컨에게 그녀를 소개한다. 자코메티의 부인 아네트가 있었고 동생 디에고가 있었지만 자코메티는 (심리적으로), 주변상황을 제거한다. 그러나 작업을 할 때는 달랐다. 캐롤린을 향해 뒤늦게 기이한 사랑을 불태우지만, 창작을 할 때는 멀고, 길게, 바라본다. 더 멀어지려는 듯, 비밀로 멀어지려고 하는 듯, 숨어서, 캐롤린의 연애를 훔쳐보며 질투한다. 직접 다가가지만, 한편으로 소유하려들지 않는다. 직접적이지만 직접적이지 않게, 바라본다. 다가가지 않고, 훔쳐보며, 간절해진다. 애타게 바라보며, 그녀를 놓아준다. 그리고 붙잡는다. 돈으로, 시선으로. 집중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그는 현실적인 조건들을 넘어선다. 상식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시선의 사랑을 하는 것이다. 시선을 중심에 놓은 사랑. 시선이 하는 사랑. 시선 이외의 것을 제거하는 사랑. 바라보기 위해 살아있는 사랑. 절망하는 사랑이다. 그들의 사랑이 어떤 방식이었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지만, 자코메티는 시선의 깨달음을 위해 집착하고 매달린다. 깊이, 더 어둡게, 지우며, 가깝고도 먼 길을 선택한다. 죽음을 떠올리며, 매일 다가간다.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어렴풋이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타자의 시선을 제거하고, 타자의 평가를 제거하고, 타자의 선입견을 제거하고, 온전히 나로서, 나 역시 새로운 나로서, 매일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주체로서, 망각의 강에 떠 있는 배 위에, 낯선 가 올라탄다.

 

우리의 삶을 에워싼 그 많은 부질없는 것들을 걷어 내버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자 자신을 진실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선물 받은 겁니다. 남의 시선에서 벗어난 시간인 거죠. 그것은 또한 우리 집 앞에 무심히 있던 나무들이 다시 보이고,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는 기적이 일어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난 매일매일 죽고 다시 매일매일 다시 태어나는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조각들도 나처럼 매일매일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 덕에 그들은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축복을 가진 생명체이기도 하지요.”[각주:12]

 

타자의 시선을 제거하는 일은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다. 그것이 주변에 모든 사물들이 매일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환상을 선물 받는다. 시선은 환상과 더불어, 존재한다. 환상 덕분에, 예술가뿐만 아니라, 예술가의 창작품까지 새롭게 태어난다. 작품은 영원을 간직한 생명체가 된다.

 

 

 

    1. 유튜브로 해당 글을 음성 파일로 만들어 올려 놓았습니다. 화면으로 글을 읽기 힘든 분들, 음성으로 들으셔도 좋습니다. 1인 잡지 무크 <돌>을 펴냈던 지난 작업을 이어, 유튜브에서 1인 잡지를 이어 나갈 계획입니다. 

    2. <그림이 있는 글>은 그림과 시, 예술 작품과 문학 작품을 연결하여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하는 공간입니다. 가끔은 제가 직접 그린 그림과 글을 올리기도 하고, 에세이류의 글을 올리기도 할 예정입니다.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3. https://youtu.be/v-g6CajJw0U 

    4. 다음 회에 "침묵 한 걸음 앞의 시-자코메티와 김수영(2)" 계속

    5. 2018년 가을호 『시와 사람』, <예술산책> 발표

 

 https://youtu.be/v-g6CajJw0U

금은돌 : 발로 공부하는 사람이다. 2008년 『애지』에 평론을, 2013년 『현대시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하다. 연구서 『거울 밖으로 나온 기형도』를 비롯하여 평론집 『한 칸의 시선』이 있다. 2008년 교통사고 당시 살아있는 것은 바라보는 일이다라는 문장이 스치고 지나가다. 그 이후 눈동자를 그리기 시작하여, 다섯 번의 개인전(<눈에 대한 낭만적 독해>)과 네 번의 단체전을 갖다. 2017년 여름 리좀 국제예술인 레지던스 작가로 참여하여, 프랑스 화가 Sylvie Deparis을 주제로 전시를 열다. 1인 잡지 MOOK 발행인이다.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기형도의 비가 2)라는 믿음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현재 '수유너머 104'에서 공부하고 있다.

 

 

 

  1.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년 10월 10일~ 1966년 1월 11일). 스위스의 조각가 겸 화가. 자코메티는 초기에는 초현실주의 미술 운동을 했으나, 후기에는 실존주의 예술가로 인정받았다. [본문으로]
  2. 알베르토 자코메티 도록 『ALBERTO GIACOMETTI』, 코바나 콘텐츠, 2017년 297쪽. 자코메티 도록에서 인용한 글은 『도록』으로 표기한다. [본문으로]
  3. 이 글을 쓰기 위해 알베르토 자코메티 전시회(예술의 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 2017. 12. 21~2018. 4. 15)에 다녀왔다. 전시장 안에 읽어야 할 텍스트가 많아, 작품을 보기 어려웠다. 사전에 자코메티 전시에 대한 정보를 알고 갔음에도, 활자를 읽느라 작품을 스치듯이 바라보게 되었다. 활자를 읽지 않고, 작품을 우선 보기로 한다. 그렇게 전시장을 돌다가 문득, 멈춘다. [본문으로]
  4. 프랑크 모베르, <자코메티가 사랑한 마지막 모델>, 재인용. 『도록』, 301쪽, [본문으로]
  5. 모리스 블랑쇼, 이달승 옮김, 『문학의 공간』, 그린비, 2010, 31쪽. [본문으로]
  6. 같은 책, 31쪽. [본문으로]
  7. 20여 년 전, 혜화역에서 내가 봤던 남자는 나에게서 어떤 시선을 보았던 것일까. 지금도 그 눈빛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는 왜 단 한 번의 시선 때문에, 나를 가격했던 것일까? 일방적인 여성혐오였던 것일까? 지금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지속적으로 묻게 된다. 그 시선 때문에 나는 죽을 수도 있었다. [본문으로]
  8. 같은 책, 32쪽. [본문으로]
  9. 『도록』 151쪽. [본문으로]
  10. 『도록』, 161쪽. [본문으로]
  11. 모리스 블랑쇼, 박준상 옮김, 『기다림 망각』, 그린비, 2009, 76쪽. [본문으로]
  12. 『도록』 343쪽. [본문으로]
Posted by 수유너머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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