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의 향기로서의 사랑

 

 

 

 

 

담연(수유너머104 세미나 회원)

 

 

 

1 모를 뿐

 

장자의 덕이 무엇인지 말해보라면 나는 사랑이 떠오른다. 새벽 호숫가에서 아무도 모르게 은근히 피어오르는 물안개 같은 그런 사랑. 물론 사랑()이라는 단어는 인()과 더불어 유가가 선점해버린 어휘여서 장자는 덕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덕을 지닌 장자의 이상적 인간들(眞人)이 모두 자기 방식으로 사랑하며 살았다고 본다. 다만 표현이 매우 수동적이고 은밀하며 은유적이어서 사랑받는 이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를 뿐이다. ‘모를 뿐.’ 어쩌면 장자는 이것을 의도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알 듯 모를 듯한 이 사랑을 장자는 어떤 어휘로 표현했을까?

 

 

 

 

 

 

2 솔직한 마음 살이

 

다산 정약용은 「대학공의」에서 덕()이라는 글자를 + + 으로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덕이란 사람이 무언가를 할 때 미리 재거나 계산하는 일없이 툭 튀어나오는 솔직한() 마음()을 따른다()’는 의미다. 여기서 솔직한 마음이란 선한 도덕적 본성이 아니라 충동적 욕망에 가깝다. 이렇게 계산없이 솔직한 마음을 따라 살다보면 어느 순간 그 사람 내면에 어떤 힘이 생기는데 장자는 이것을 덕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말이 쉽지 솔직한 삶은 그리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남의 평가나 사회적 가치관을 따르기보다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산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진심도 알기 어려운 데 그대로 산다고? 그러다가는 남에게 문제아나 반항아, 돌아이로 간주되어 은따 당하기 쉽상이다.

 

 

 

 

3 고독, 덕을 위한 시간

 

하지만 장자는 은따 되기, 혹은 기꺼이 고독()해지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솔직한 진심을 따를 때 그 사람 고유의 충만한 생명력과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무리에서 벗어나 진심이 이끄는 길을 가는 것은 남의 인정 외부를 걷는 행위이기에 고독하다. 하지만 이 고독 속에서 덕은 깊어지고, 자기만의 세계는 영글어 실한 열매를 맺는다. 여기서 말은 잠들고 치열한 실행만이 지속된다. 엥거스 그레이엄은 이 고독한 수행 속에서 차츰차츰 형성된 인간 내면의 덕을 힘(Power)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강요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절로 자신을 따르게 만드는 일종의 카리스마, 감화력이다. 뭘 했길래 사람들은 그가 좋아 따르는 걸까? 문제는 그가 자기 의도대로 무엇을 하지 않았다(無爲)’는 것이다.

 

 

 

 

 

 

 

4 덕의 효과

 

뭘 딱히 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따르는 이 현상을 장자는 무위자화(無爲自化)’라고 말한다. 여기서 무위는 덕을 갖춘 진인이 자기 뜻대로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조종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상대가 누구든 무엇이든 생긴 그대로(自然) 살게 하고 스스로 변하게(自化) 둔다. 그러면 진인은 뭘 하는가? 그저 제 삶에 충실할 뿐이다. 장자는 덕충부편에서 덕을 내면에 기의 조화를 완성하는 수양(德者, 成和之修也)’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덕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만물이 떨어질 수 없다(德不形者, 物不能離也)’고 본다. 진인은 만물이 생긴 그대로 살게 두고 진심이 여는 길을, 기의 조화를 유지하며 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내버려두는 방식으로 자기 길을 가다보면 사람들이 절로 그를 따른다. 이것이 감화력이며, 자기 의도대로 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지 못하는 것이 없는(無爲而無不爲) 무위의 궁극 경지다. 참 묘하다.

 

 

 

 

 

 

5 빛을 품은 온기로

 

만물은 저마다의 색과 꼴로 다양한 향기를 전하며 이 세상에 잠시 피고 사라진다. 장자의 진인은 이러한 만물의 다양성을 자기 존재를 비우는 방식으로 아끼고 살려준다. 자기를 강요하기보다 상대를 살리는 방식으로 자신을 살리며 기의 조화를 유지한다. 만물이 그를 따르는 이유는 그가 이처럼 만물을 제 몸같이 아끼고 자유롭게 살도록 두기 때문이다. 이것을 장자는 보광(葆光)이라는 빛으 표현한다. 과시하듯 눈부신 빛은 감추고, 빛의 잔영인 온기를 나누며 만물과 더불어 겸손히 상생한다. 이것이 덕의 향기로 세상을 따뜻히 감싸는 장자 진인의 은근한 사랑이다.

 

 

 

 

 

 

 

Posted by 수유너머104

 

통로로 존재하는 몸

 

 

                                                          담연 (수유너머 104 장자세미나 튜터)

 

 

1. 생명

 

  생명은 지속적인 흐름과 변화라는 속성으로 표현된다. 장자적 의미에서 잘 산다, 양생(養生)한다는 것은 따라서 변화하는 자연 안에서 그 유동적 흐름에 발맞춰 인간이 막힘없이 잘 통하는 몸이 된다는 의미다. 장자의 양생은 어떤 외부적 변화 상황 속에서도 인간이 자기 생명의 중심이 되는 기의 조화를 내면에 유지하면서 막힘없이 세상사에 발맞추어 흘러갈 수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즉 흐르는 물, 흐르는 바람의 통로인 몸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2.  막힌 몸 지우기

 

  기의 조화로움을 안에 유지한 상태로 막힘없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러한 물음에 떠오르는 그림은 통로로만 존재하는 몸의 이미지다. 머리도, 다리도 없는 몸통으로만 존재하는 신체. 이것은 마치 들뢰즈의 기관없는 신체처럼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지만 아직 어떤 구체적인 형식이나 특정한 꼴로도 규정되지 않는 생생하고 충만한 에너지로만 존재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베이컨은 기관없는 신체 이미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괴기스럽고 기형적인 아래 그림은 눈, , , 피부 등 특정한 감각적 기관으로 엄밀히 분화된 인간 얼굴의 신체적 기능을 처참히 뭉개버린다. 분화된 감각 기관을 통해 수용된 자극들을 엄밀히 분석해 명석 판명한 사고를 전개하는 이성의 기능을 파기하는 것이다.

 

 

 

3. 지우는 것은 슬픈 일인가?

 

  오감으로 분화된 감각 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잡다한 질료들의 종합을 통해서 명석 판명하게 개념화된 분별 작용을 하는 인간의 이성적 기능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는 점에서 들뢰즈는 장자와 통한다. 그렇지만 나는 장자의 통로로서의 몸이 들뢰즈의 기관없는 신체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베이컨의 기괴스러운 작품과는 다르게 몸통이라는 완고한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고 본다.

 

 

 

  즉 기관없는 신체는 리좀의 형식을 지킨다. 이 때문에 인간-생명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몸통에 연결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무한한 인간-생명-자연으로 변화될 가능성을 열고 있다. 온전한 인간 신체가 위와 같은 꼴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모든 기능이 온전히 갖추어진 육체를 통해서만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은 지워진 혹은 특정한 기능이 사라진 몸을 보고 슬퍼할 것이다.

  마그리뜨는 사회생활을 하는 데 무리가 없는 오감 기능을 온전히 갖춘 몸의 꼴을 인정한다. 뇌와 손발이 잘 갖추어진 한 인간 신체가 갖는, 그것 자체로 자연의 미를 표현하는 몸을 인정한다. 그러나 마그리뜨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회 생활을 하는 평균적 인간 몸의 가능성을 넘어서, 새로운 존재 변형이 가능한 몸을 불러온다. 이것은 곧 몸통으로 존재하는 인간, 통로로만 존재하는 몸이다.

 

 

 

 

 

4. 통로로만 존재하는 몸

 

  마그리뜨는 두상을 지운다. 팔 다리를 지운다. 그리고 신체가 점유하는 공간의 형식을 무한의 형태로 확장하거나 축소, 절단, 재접속한다. 여기에 새로운 자연을 불러오고 새 생명을 탄생시킨다. 통로로만 존재하는 몸은 자연의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연결하는 기관이다. 그리고 크기를 어떻게 확장 및 축소하는가에 따라 혹은 무엇과 연결되는가에 따라 물고기가 될 수도 있고, 하늘의 달이, 내리는 비가 될 수도 있다. 여기서 인간은 하나의 새로운 창조적 자연으로 숨쉰다.

 

 

 

마그리뜨는 특정한 사회적 기능을 하는 인간 몸을 그 형식만 유지한 채 인간이라 규정할 수 있는 구체적 내용을 지워버린다. 지운 그 자리에 새 생명 존재로의 변형이 가능한 다른 관계를 연결함으로써 새로운 자연과 미지의 생명, 새 인간 존재의 가능성을 연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연의 흐름을 반영하는 통로로서의 인간 몸은 메마른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우주의 단비로 내릴 수도 있다.

 

 

 

  따라서 지우는 일은 슬픈 일이 아니며 구멍은 메꿔야 하는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기존의 몸통을, 특정한 방식으로 고착된 사유를 지우는 일. 특정한 형태로 쌓고 채우려는 기능에 구멍을 내고 그 텅 빈 공간을 유지하는 수련이 중요하다.

 

5. 마음을 비우면 슬픔도 사라진다

 

  우주의 흐름을 지속시키는 통로로서의 몸의 가능성을 연 마그리뜨 작품은 비움을 체현한 장자의 이상적 인간(眞人)을 은유적으로 반영한다. 장자도 기존의 고정된 생각, 특정한 내용으로 채워 경직된 인간 몸과 마음을 지속적으로 비우는 작업을 통해 우주적 차원에서 인간세를 유유히 노닐기 바라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마그리뜨는 장자의 벗이다. 특정 선/악, 시비, 호오, 신념으로 고착된 마음을 비우면 그것이 야기하는 마음의 슬픔도 사라진다. 그렇게 신기루처럼 사라진 슬픔의 끝에서 새로운 형태로 접속된 관계가 열어줄 미지의 모험과 충격, 환희의 세계는 우리를 기다리며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를 것이다. 저만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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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로 보는 삶3

 

 

인간 세상, 고통의 근원은 무엇인가?

 

 

담연(수유너머104 장자세미나 튜터)

 

 

 

*고통의 근원 - 명예와 지식 추구

 

장자(BC367-286?)가 살았던 전국 중엽은 영토 확장을 위한 겸병(兼倂) 전쟁이 끊임없었다. 주나라 붕괴 후 진한 건국 전까지 50여개 국으로 분열된 시기에 각국 제후들은 천하의 패권을 쥐려는 야심을 품고 서로를 죽였고 뜻을 실현시켜줄 인재를 찾았다. 이 때문에 전국 시기는 피흘리는 겸병 전쟁과 제후에게 등용되기 위해 치세를 논하는 제자백가가 펼쳐졌다.

여기서 장자는 세상이 이처럼 혼란한 원인이 지나친 명예()와 지식() 추구 때문이라고 보았다. 장자에 따르면 명예란 서로 헐뜯는 것이며 지식이란 다툼의 도구다(名也者相軋也, 知也者爭之器也. 人間世).’ ‘이 두 가지는 인간을 불행으로 몰아넣는 흉기여서 끝까지 추구해서는 안된다(二者凶器, 非所以盡行也. 人間世).’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하는 패도(霸道)가 우세했던 시대에 포악한 위나라 군주를 계도하려는 안회의 시도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지식()으로 상대를 교화시키는 일이다. 등용되면 명예는 얻겠지만 잘못하면 포악한 군주 손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장자는 외적 지식과 명예 추구보다는 내면의 덕을 닦고 생명을 온전히 지키라고 말한다. 여기서 덕이란 조화로움을 완성하는 수양(德者成和之修也 德充符)이다. 또 생명을 지키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은 특정 신념에 경도된 마음(師心)을 비우기(), 부득이한 일에는 마음 편히 운명을 따르기(安之若命), 무용지용(無用之用)의 태도다.

 

 

 

*명예보다는 생명!

 

장자는 지식 추구로 명예를 쌓는 사가들이 특정한 시비 가치관에 사로잡혀 그것을 기준으로 남을 함부로 평가하며 계급적 구분과 사회적 차별을 일삼는다고 비판한다. 이들의 지식 추구와 명예 쌓기는 사회적 분쟁과 다툼의 원인이며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가 된다. 이들을 등용해 특정 시비관에 기초한 정사를 펴는 제후들은 전쟁을 일으켜서 백성들을 전쟁터로 내몰고 불구로 만들거나 죽게 한다. 이처럼 지자가 득세할수록 힘든 것은 무고한 백성들이다.

이 때문에 장자는 외적 지식과 명예 추구에 앞서 생명을 온전히 지키라고 말한다. 󰡔장자󰡕의 배경을 이루는 다양한 불구자들, 노동자, 가난, 질병, 죽음의 풍경은 장자가 끊임없는 살육 전쟁으로 인해 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했던 당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고 풀기위해 양생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자기 상실의 시대, 사라진 자존감

 

지식 정보 사회라고 일컬어지는 지금은 이런 고통이 없을까? 장자 당대 지식인들이 위정자에게 인정받기 위해 지식을 쌓고 명예를 추구했듯 우리 역시 부와 권력으로 대변되는 사회적 성공을 위해 끝없이 지식을 습득하고 스팩 쌓기에 열을 올린다. ‘사회적 성공이 곧 행복이라는 주입된 표준 가치를 맹목적으로 따르면서 무한 경쟁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위해 친구도, 휴일도 없이 스스로를 혹사시킨다. 그리고 고독하게 혼자 쉰다. 한병철은 이런 한국을 자기 착취가 일상화된 피로 사회라고 불렀다.

한국에서 인간의 사회적 가치란 학교에서는 성적과 학벌, 취업시장에서는 경제적 효용성과 생산성이라는 실적으로 평가된다. 돈 많이 버는 인간이 성공한 존재고 행복한 자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허상을 무반성적으로 내면화하고 추종하다가 자기다움을 잃어간다. 우리는 상대적 박탈감을 조장하는 이 곳에서 성공을 위해 달리다 지쳐 쓰러져가는 경주마 처지지만 돌아가 쉴 곳이 없다.

 

 

 

 

*경쟁과 인간 소외

 

장자가 비판했던 외적 지식과 명예 추구는 현 사회에서 점수 따기와 취업이라는 형태로 변형되었고 유혈투쟁은 아니지만 지식 경쟁으로 이미 사회는 전쟁터 같다. 그리고 어느새 경쟁을 게임처럼 즐기는 경지가 되었다. 그리고 자본 증식의 도구로 쓰이기 위해 취업 경쟁의 전쟁터를 통과하면서 우리는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여기는 비인간적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경쟁에서 실수하고 탈락하면 누군가는 그 자리를 차지하는 영예를 얻기 때문이다. 경쟁의 장이 인간 불신과 소외를 야기하는 이유다.

 

 

*자살 조장 사회

  

무엇을 위해 우리는 이렇게 치달리는가? 지식 추구도, 사회적 성공도 결국은 행복하기 위한 일이다. 문제는 지식, 학벌, 성공과 명예 추구가 개인의 실질적 행복감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입시, 취업, 실적 경쟁의 전쟁터에서 우리가 잃어가는 것은 나다움, 우정, 사랑, 가족과 이웃들이 함께 하는 소소한 일상적 행복 같은 질적 가치다. 정작 소중한 삶의 의미는 여기 있다.

한국은 그동안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지켜왔다. 최근에야 리투아니아의 등장으로 2위가 되긴 했지만 13년간 1위를 놓친 적이 없다. 나는 20대를 보내면서 왕0, 0, 0, 0, 0 등 가까운 친구들을 자살로 먼저 보냈다. 개인적 불행이라 자조했을 뿐 사회적 문제라고 인지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음미한 결과 이들 자살의 핵심에는 자기 삶의 주도권을 잃어버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박사 졸업 후 학생들을 만나며 마주친 문제는 20년 전 내 고통이 되풀이되고 있는 현실이었다. 대입수능, 자퇴 또는 휴학, 재수능, 재 대학 입학의 내 20년 전 경험을 지금 대학생들도 3-40%는 되풀이 하고 있었다. 외부 강요로 원치 않는 과에 들어가 늦게서야 방황을 시작하는 것이다. 고교 아이들은 입시를 위한 주입식 교육 때문에 자기 성찰의 시간이 부족하다. 원하는 과를 선택하기보다는 명문대라는 타이틀이 앞선다. 본인의 의사라기보다는 암묵적 외압의 영향이 강하고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와 방황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다.

 

 

*나는 누구인가? 정말로 원하는 건 무엇인가?

  

입시에서의 자기 부정, 20대 벗들의 자살, 원치 않는 과에서 지금도 방황하는 대학생들의 현실은 결국 학벌과 취업 위주의 미래를 강요하는 기성세대의 암묵적 강요 속에서 자신이 자기 삶을 주도할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청소년기는 자기 성찰에 기반해 내가 누구인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또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기 위해 힘을 쌓는 시기다. 지식이란 이런 힘을 기르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가해지는 삶에 대한 다른 이들의 폭력적 간섭과 충고는 아이들의 진심이 이끄는 길을 흐리게 한다. 그 힘에 못 이겨 자신이 원하는 것을 버리고 남의 말대로 움직일 때 인간은 꼭두각시 삶을 산다. 그리고 남 탓을 한다. 이런 자신을 방치한 채 나이가 들면 늦도록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공허한 마음으로 방황한다.

 

 

 

 

*나로 사는 연습, 그리고 실행

 

 

이것이 지금의 문제다. 자기 부정을 통해 타인의 인정을 얻는 길은 충분히 걸었고 이제 그만 걸어도 좋을 것이다. 장자의 말처럼 할 일은 진인(眞人)이 되는 것, 즉 나다운 길을 걷는 것이다. 남의 강요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길을 걷고, 그 걸음에 책임지면서 인생의 주인이 되는 경험을 해야 한다. 이러한 경험이 쌓여 나를 믿는 힘이 커질 때 자신감과 자존감은 차츰 회복된다. 남이 깔아둔 판에서 한자리 얻으려고 자신을 부정하고 왜곡하기보다는 부족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믿고 실현시켜갈 길을 찾는 것. 없다면 새롭게 길을 내는 것. 내가 꿈꾸는 대로 살아보려고 수고롭지만 몸을 던져 노력해 보는 것. 그 과정에서 겪는 시행착오를 기회로 삼는 것. 이런 실천적 고민과 꾸준한 노력이 수반될 때 자신의 고유한 경험이 담긴 글은 살고 싶은 미래를 현실로 불러내는 힘이 된다.

 

Posted by 수유너머104

2. 장자는 왜 논쟁하지 않고 이야기 하는가?

 

 

담 연(수유너머104 장자세미나 튜터)

 

 

 

 

 

확실성의 신, 젊은 비트겐슈타인

석사 20대 후반은 온통 비트겐슈타인 생각뿐이었다. 당시 지도교수님은 비트겐슈타인 영독본을 교재로 매주 토요일 아침 강독을 하셨다. 세미나는 학부 마지막 학기부터 박사과정을 그만 둘 때까지 6년 정도 이어졌다. 이 때문인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는 마치 성경처럼 정신을 지배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논고> 7)’는 그의 경구에 억눌려 나는 확실성 없는 인간사에 침묵하기로 했다. 말을 잃은 시간 속에서 30대가 된 어느 날 문득 너무도 어눌해져버린 내 말에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불변하는 세계, 진리의 언어

장자의 어법을 말하면서 왜 비트겐슈타인을 꺼내는가. 내 안에서 이들 사유는 닿아있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 세계와 언어는 고정된 것이고 일대일 대응관계를 이룬다고 본다. 여기서 그는 세계의 진실은 고정불변하는 것이며 언어는 이같은 진리를 거울처럼 반영한다고 말한다. 젊은 비트겐슈타인은 끊임없이 변하는 불완전한 이 세계에도 영원불변하는 진리가 있고 언어는 이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변해가는 사랑에 슬퍼하고 믿었던 친구를 잃어가며 나도 이 땅에 플라톤의 이데아처럼 영원히 변치않는 진리가 있기를 바랬다. 그 희망을 채워준 이가 비트겐슈타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를 그림처럼 반영한다고 본 명제의 진리값 분석을 통해서 참/거짓을 구별하고, ‘말할 수 있는 것말할 수 없는 것을 가른다. 그리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정확히 말하게 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침묵시켰다. 그에 따르면 수 천 년 간의 철학사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끊임없이 말해 온 오류의 역사. 그는 명제분석을 통해 언어와 세계가 일대일 대응관계를 이루지 못하는 학문 영역, 즉 윤리학, 미학, 신학 등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 온 오류들로 간주하고 학문의 장에서 추방해 버린다. 말할 수 없는 것을 침묵시킨 자리에는 과학적 명제들만 떠들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그는 이로써 자신의 철학적 임무가 끝났다고 믿고 대학을 떠난다.

  

 

말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말할까?

나는 <논고>를 읽으면서 <도덕경>을 떠올렸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을 침묵시켰다. 그러나 이것들은 보여질 뿐이지만 더 중요한 삶의 의미를 드러낸다고 했다. 이런 것들은 정말 말할 수 없는 걸까? 삶의 소중한 의미를 드러낸다면 정작 말해야 하는 것은 이것들이 아닐까? 어떻게 이것을 말할 수 있는가? 답을 찾기 어려웠다. <논고>의 입장을 버린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잔소리, 중얼거림 등으로 생각을 끌적인다. 엄밀한 논리적 체계의 성을 완성했던 전기의 글은 사라지고 없었다.

 

세계는 변한다

그의 세계관은 불변에서 변화로 흘러갔다. 세계와 언어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고 언어도 그것을 쓰는 사람들의 쓸모에 맞게 새롭게 만들어지고 폐기된다. 그러니 고정된 진리를 찾겠다는 열망을 버리고 네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말하라. 이것이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다.

 

변하는 세계를 드러내는 언어가 있는가?

하지만 여전히 이해되지 않았다. 변화를 담는 언어가 어떻게 가능할까? 노자 <도덕경> 1장이 맴돌았다. ‘도를 말할 수 있으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을 말할 수 있으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무는 세계의 시작을 말하고 유는 만물을 통칭한다. 그러므로 항상 무로는 세계의 오묘한 영역을 보려하고 유로는 만물을 본다. 이 두 가지는 세상에 함께 나와 있지만 이름을 달리하는데, 함께 있다는 이것을 현묘하다고 한다. 현묘하고도 현묘하구나, 모든 오묘한 것들의 문이다(<도덕경> 1).’ 도대체 무슨 소린가?

박사과정을 그만두고 연구실을 오가며 오전마다 108배를 하고 <도덕경>을 외웠지만 뜻을 몰랐다. 새로 들어간 대학원에서 도가철학을 접하고서야 비트겐슈타인이 이해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희망이 만든 고정된 진리의 성을 스스로 깨고 나온 것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아상의 탈피다. 고정된 세계와 그것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고정된 언어가 있다는 그의 관점은 변하는 세계 안에서도 변치 않는 믿음의 확실한 지반이 있기를 바라는 확실성에의 열망이 만든 신기루였다. 이러한 열망은 불확실성의 세계를 살아야 하는 인간의 두려움 때문에 생긴다.

 

 

 

있는 그대로 보라

젊은 비트겐슈타인은 세계를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불변하는 진리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대로 꾸며냈다. 그 희망의 결과 탄생한 철학적 개념이 일대일 진리함수 이론이고 그림 이론이다. 하지만 후기에 그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본다. 불완전한 세계에 내던져진 인간의 불안이 고정 불변하는 진리를 만들었음을 깨닫고 세계의 진실은 변화임을 통찰한 것이다. 가치 판단에서 사실 판단으로의 전환이었다.

 

 

변화하는 세계의 원리, ()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노자와 통하는 지점이 여기다. 이들은 세계가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여기서 노자는 비트겐슈타인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세계가 어떻게 변하는가를 묻고 유무라는 대립적 측면이 상생하는 형태로 변한다는 것을 밝힌다. 그리고 이 원리를 도라고 부른다. 장자는 노자의 사유를 이어받아 음양 상반의 두 측면으로 구성된 일기(一氣)의 변화로 세계를 설명하고, 이 원리를 도라고 부른다.

 

 

놀이하는 인간, 도구로서의 언어

그렇다면 변하는 세계를 언어는 어떻게 드러내는가?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이 언어 놀이(language game)를 한다고 말한다. 쓸모에 맞게 언어를 만들고 또 버리는 놀이 말이다. 노자는 변해가는 세계를 드러낼 고정된 명제()는 없다고 보고 은유를 통한 시적 언어로 <도덕경>을 쓴다. 장자도 은유적 이야기(寓言)로 세계 변화를 노래한다. 개념화된 명제()와 지식()은 시비를 따지며 논쟁하는 다툼의 도구(名也者相軋也. 知也者爭之器也)지만 이야기는 세계를 다양한 은유로 노래한다. 이야기는 시비를 논하지 않기에 다툼이 없다. 다만 다양한 삶의 의미를 다양한 은유들로 노래할 뿐이다. 이것이 후기 비트겐슈타인과 장자가 공유하는 세계에 대한 통찰이고 언어관이다. 영원히 고정된 옮음이나 그름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을 반영하는 고정된 언어도 없다. 세계는 계속 변하고 언어는 그 변화를 다양한 은유들로 노래하는 인간의 놀이 도구일 뿐이다.

 

 

Posted by 수유너머104


살아있는 철학이란 무엇인가?

 



담 연(수유너머104 장자세미나 튜터)

 




껍데기는 실질을 반영하지 못한다名也, 實之賓也

나는 취직 잘되는 과에 가야 한다는 어른과 고교 교사의 강요로 적성에 맞지 않는 과를 다니다 대학을 자퇴했다. 방황 끝에 23살이 돼서야 수능을 다시 보고 철학과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10년은 서양철학을, 그 뒤 10년은 동양철학을 공부하며 박사를 마쳤다. 지금 사회적 시선은 나를 장자철학 박사라는 틀 안에 두고 이것이 내 정체성이길 바란다. 하지만 나는 날 괴롭히는 문제를 풀기위해 공부했고 이를 계기로 만난 이들과 살아왔다. 고민이 바뀌면 공부 영역이 변했고 만나는 사람들도 달라졌다. 이 때문에 특정분야 학위라는 고정된 틀은 내 정체성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한다. 그건 2년 전에 벗어버린 죽은 허물, 껍데기다. 지금도 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움

요즘은 적잖이 멍하다. 지금의 나는 누구일까? 20년 간 물고 늘어졌던 문제는 박사논문을 쓰면서 풀었다. 처음 철학을 공부한 이유는 삶이 고통스러웠고 죽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왜 이런 것인지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교육학, 철학, 사회학을 공부했다. 그러다 우연히 장자를 만났고 그를 통해 내가 변했고 어느덧 20년간 고민하던 문제가 풀렸다. 지금은 지향해야 할 목적이 사라져서 평온하고 행복하지만 왠지 공허하다. 이제는 뭘 해야할까? 유명해지는 것? 돈 많이 버는 것?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필요한 영웅이 되서 바쁘게 돌아다니며 쓰이는 것? 지나치면 병이 될 뿐 큰 관심사는 아니다. 그럼 이제 뭘 해야할까?

 

부조리와 절망

사실 나는 서양철학을 공부하면서 30대 초반에 박사를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학기에 박사과정을 그만뒀다. 이유는 날 가르치는 몇 학자들 때문이었다. 약자의 인권, 타자의 권리를 옹호하라고 외치는 학자들이 멋진 이론으로 잘 꾸민 글을 쓰고 강의하며 돈을 벌면서 정작 일상에서는 가까운 약자의 인권을 유린하고 차별을 일삼았다. 앞서 문제를 제기했던 사람은 연구비를 받는 조건으로 포섭되었고, 거부하면 조용히 제거됬다. 묵인하고 따르면 생계가 해결됐기에 여러 명이 문제를 보고도 외면했다. 말과 행동이 다른 학자는 어린 젊은이들을 절망시킨다. 같은 사람이 되기 싫어서 그만뒀다.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결단해서 그만뒀다기보다는 수업을 들으러 가는 날, 숨 쉬기가 어려워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죽을 것 같았다. 살기 위해 그 곳을 떠났다. 내 영혼을 지키고 싶었고 나는 다르게 살고 싶었다. 이후 몇 달 간 전국을 떠돌았다. 문제를 직시하기보다는 해결방법을 몰라 그 현실을 도피했다.

 


먼저 인간이 되라, 그러면 제대로 안다有眞人而後有眞知

방황 끝에 우연히 수유너머 연구실을 알게 됬고 몇 년간 이것 저것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박사를 마치고 싶어서 새로 들어간 대학원에서 동양철학 수업을 듣던 중 참된 인간이 된 후에야 진정한 깨달음이 가능하다(有眞人而後有眞知)’는 장자 말을 들었다. 충격을 받았다. 말과 글로 사기를 치는 몇 인간들에게 받은 상처로 내가 하고 싶은 철학 공부마저 포기했는데 문제를 풀 방법이 장자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대로 사는 훈련을 하는 공부가 가능할 것 같아서 전공을 동양철학으로 바꿨다. 동양철학을 공부하면 내 진심을 왜곡없이 살아내는 실천적 힘이 생길 것 같았다. 이후 10년은 동양철학 공부에 매진했다.

 

왜 믿는 대로 살지 않는가?

개인적인 경험이기에 일반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느낀 제도권 내 서양철학 연구자들의 문제 중 하나는 이론을 연구하는 학자가 자기 믿음이 반영된 이론을 살아내려는 노력에 별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연구비를 타기 위한 목적, 혹은 교수를 목표로 실적을 올리기 위한 논문 쓰기, 책 쓰기에 기를 쓰는 학자들은 정교한 이론의 칼을 갈고 다듬어 실적 채우고 연구비를 타는 데는 능숙해진다. 하지만 자신이 옳다고 믿고 주장한 그 말들의 양만큼 스스로가 믿음을 실천하며 사는가의 문제는 쉽게 간과한다. 자기 주장이 실제 행동과 태도에 부합하는가의 문제는 연구비를 타거나 교수가 되기 위한 평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자의 인권이나 약자의 권리를 옹호하라고 강의하고 글을 쓰는 학자가 실제 삶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러면서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 먹고살기 위한 일이라고 변명한다. 직업 철학자의 한계다. 모든 학자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양심적인 삶을 사는 내가 존경하는 철학 연구자도 많다. 하지만 일부 이런 학자들이 서로의 잘못을 눈감아주며 사회 지도층을 점유하면서 한국 사회의 불신은 깊어졌다고 생각한다. 밑에서 이런 행위를 보고 배운 젊은이들은 문제가 있어도 침묵하면서 생계의 안정을 보장받는다. 한국 사회의 비윤리성이 확산된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돈과 명성을 위해 진심과 양심을 버리는 행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다. 이런 판에는 배운 이론을 앵무새처럼 전하는 직업 이론가가 있을지는 몰라도 살아있는 철학적 활동을 하는 철학자는 없다.

 


살아있는 철학적 활동, 철학적 삶

그렇다면 살아있는 철학적 활동이란 무엇일까? 다양한 철학자들을 공부하면서 내가 느낀 것은 철학적 활동이란 자신이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자신이 속한 사회 문제를 자기 고민으로 느끼는 인간이 그것을 해결하려고 애쓴 노력의 흔적이라는 점이다. 철학 이론이란 그렇게 나온 실천적 노력의 결과다. 이 때문에 문제 해결의 노력이라는 측면에서 철학은 기본적으로 윤리적 행동이며 자기 시대를 고민한 결과라는 측면에서 철학자는 시대의 자식이다.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든 그 안에 내가 풀고 싶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다면 그는 철학적 삶을 산다. 직업을 생계 해결 뿐 아니라 문제를 푸는 수양의 도구로 삼고, 실천적 노력을 기울여 나온 결과를 자기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자는 이미 철학자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철학자다. 우리가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는 이유는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고 비판은 하면서도 자신이 그 문제를 풀려고 직접 뛰어들어 노력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필요한 철학자

필요한 것은 살아있는 철학적 활동을 하는 철학자다. 소위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 이론을 십수년간 공부해서 수입해 전하는 앵무새 지식 전달자가 아니다. 그 외국 이론은 그 나라 문제 해결의 결과지 우리 실정에 맞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반도라는 삶의 장에서 나만의 고유한 노력으로 현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자, 그 노력의 결과인 이론으로 더 나은 삶의 방향을 제시해 보는 자, 지금 우리에게는 이런 철학자의 탄생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앞으로 장자와 함께 이 문제를 고민하면서 실행의 궤적을 글로 정리해 보겠다.

Posted by 수유너머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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