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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_문학.예술

[그림이 있는 글] 기형도와 M.C.에셔 -스무살, 미발표작을 중심으로(2)

기형도M.C.에셔 (2)

- 스무 살, 미발표작을 중심으로

 

 

  금은돌 (시인, 화가)




 


 

6. M. C. 에셔의 변형

        

M. C.에셔[각주:1]의 그림을 떠올려 본다. 『거울 밖으로 나온 기형도』에서 M.C. 에셔의 그림으로 기형도 시의 시적 주체의 특이점, 흐르는 주체를 설명한 적이 있다.

 

아래 그림 제목은 Metamorphosis이다. 변형 혹은 변이이다. 그림의 출발은 활자이다. 제목 그대로 Metamorphosis이다. 활자는 사각형이 되고, 사각형은 도마뱀이 된다. 도마뱀은 육각형으로 변이되고, 벌집이 되고, 벌집에서 벌이 날아가고, 벌은 물고기가 되고, 물고기는 새가 되고, 새는 점차 사각형이 되고, 체스 판이 되고, 체스 판은 Metamorphosis 활자가 된다. 왼쪽으로 시작하건, 오른쪽에서 출발하여 그림을 보건, 시작과 끝은 같다. 변이 과정에 숱한 이미지들이 놓여있지만, 변주 대상에 리듬이 가해지면서, 이미지는 곡선처럼 흐른다. 정주하는 것 같지만, 운동한다. 노래하며 몸을 바꾼다. 주어의 자리를 타자에게 내어 주는 방식과 같다. 동시간대에 공존하는 생명이다.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며, 다른 형태를 띠지만, 그들은 흐르며 호흡한다. 다른 인칭을 가졌을 뿐, 하나의 존재로 작동한다.

 

이 과정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도록, 그림을 두 부분으로 잘라 보았다. 그 사이에 그 다른 무엇이 들어와도 상관없다. M.C. 에셔는 바흐의 음악을 틀어놓고 작업을 했다고 한다.[각주:2] 그는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변주를 시킨다. 그 대표적인 동물이 도마뱀이다. 그리고 사각형과 육각형의 변주가 그 안에서 음악과 함께 흐른다. 하나의 형태가 형태를 바꾸어, 다른 모습을 가진 물체로 변화한다. 새는 물고기로 변하고, 물고기는 개구리로 변하고, 개구리는 새로 변화한다.

 

 

 Metamorphosis II 1940 Woodcut in black, green and brown, printed from 20 blocks on 3 combined sheets. 3895mm x 192mm.

 

이 변형의 과정은 다름 아닌되기의 과정이다. 활자 - 되기이고, 동물 - 되기이고, 사물 -되기이고 아무 것도 아닌 것 되기이다. 처음으로 - 되기이다. 변주를 거쳐, 상이한 주체, 다양한 주어의 자리에 선다는 것은 시인의 능력을 배가시킨다. 시인이라는 존재가 허름하고 나약하고 연약한 것 같지만, 실은 다양한 능력을 갖추었음이다. 물의 유동적인 상상력으로, 시인은 자유를 획득할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변주의 자유로움을 생성할 때, 시인에게 해방 공간이 열린다. 이것이 시인의 능력이다. 타자들과 공존하는, 블록을 만드는 힘이다.

 

 

 Metamorphosis II 1940 Woodcut in black, green and brown, printed from 20 blocks on 3 combined sheets. 3895mm x 192mm.

 

시인은 다양한 되기의 능력을 가진 존재자이다. ‘되기의 능력을 통해, 현재 자기 자신이 가진 장소를 벗어난다. 다른 곳으로 위치 이동하면서, 또 다른 존재의 목소리를 불러들인다. 이것이 시인이 그 시대에 해야 할 역할이다. 따라서 시인은 새로움을 향해 나간다.

 

M.C. 에셔의 그림은 활자에서 시작하여 활자로 돌아온다. 리듬과 변주가 있는 형태 변형을 마치고, 고요히, 자기 자리로 돌아온다. 이 모든 과정은 일정한 축적 위에서 이루어진다. 축적이 필요하다. 사각형의 축적, 새의 축적, 도마뱀의 축적 위에서, 형태를 조금씩 변화하면서, 다른 지점으로 가 닿는다. 위상적으로 다른, 처음의 위치이다. 이곳은 처음이 아니지만 처음이다. 다른 곳으로 성숙을 한 위치, 나선형의 어느 다른 지점이다.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지만, 차이를 가진, 어느 일정한 같은 자리이다. 한계를 극복한 처음이고,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처음이다. 질적으로 다른, 변형의 자리에 시인이 서 있다.

 

에셔의 그림은 이러한 사유 구조를 보여준다. 먼 여행을 떠났다가 귀국하는 과정을 말이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담담하게. 아름답게. 역동적으로 정지하듯이.

 

 

7. 다양한 껍질, ‘

 

 

空中으로 솟구친 길은

그늘을 끼고 돌아왔고

아무것 알지 못하는 그는

한줌 가슴을 버리고

떠났다.

 

車窓 안쪽에 비쳐오는

낯선 거리엔

大理石보다 차가운

幻影이 떠오른다

아무것 알려 하지 않는 그는

미련 없이 머리를 깎았다.

 

그는 나보다 앞선 歲月을 살았고

나와 同甲이었다.

 

감싸안은 두 발이

천장을 디디고 휘청거리는데

단단히 굳어버린 鋪道엔 바람이 일고

이 밤은 여느 때마냥 춥다

            -껍질전문(1978. 3)

 

 

이 시는 기형도 시인이 고등학교 3학년 시절, 18살에 쓴 시이다. 기형도는 한국 현대시에서 3인칭 를 가장 잘 활용한 시인이 아닐까, 한다. 기형도 시의 특이점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는 누구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는 시인의 껍질이다. 제목 그대로 유추해 보면 그러하다. 시인의 분신이자 나의 시적 분화(分化) 결과이다.

 

그는 떠난 자이다. 동시에 먼 여행을 하고 돌아온 자이다. 그의 여행은 험난했다. “공중으로 솟구친 길은 그늘진 어둠을 동반하고, 정처 없는, 목적을 상실한, 그는 뜨거운 가슴을 버렸다 

그는 결연한 결심을 하였는지, 머리를 깎았다. 시인의 눈에 그는 幻影일지 모른다. 그것이 환영일지 모르는 가능성은 다음 문장에서 나타난다.

 

감싸안은 두 발이

천장을 디디고 휘청거리는데

 

그는 어디에 서 있는가? 시적 주체인 나는 어디에 위치하는가?

 

 

                                Relativity 1953 Lithograph. 294mm x 282mm.

 

 

 

그는 시적 주체와 동갑이나 시간적으로 나보다 두터운 시간을 경험한 존재자이다. 같은 시간 선상에 살고 있지만, 다른 층위의 시간을 살아가는 존재자이다. 동시간대를 살지만 다른 질감을 가진, 두터운 시간의 경험을 가진, 그런 존재자이다. 그와 나는 서로를 냉정하고 차갑게 대한다. 공기가 차갑다. 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알려하지 않는다. 앞선 세월을 살았지만, 그와 나는 연결되어 있다. 그가 정상인가? 내가 정상인가? 분명한 것은 시적 주체의 위치이다. 시적 주체가 두 발을 천장에 디디고 있다. 박쥐처럼.

 

천장에 자리한다.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이 문장의 정확한 주어가 누구인지, 분명치 않다. 그일 수도 있고, 나 일수도 있다. 사실, 나의 위치가 천장이라고 상정해 놓았을 때, 그가 오히려 땅 위에 존재할 수 있다. (기형도 시의 특이점 중의 하나는 발이다. 그는 발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무의식에서 발은 사라진 형태로 진술된다. 이 시에서도 발은 무엇엔가 감싸 안겨 있다. 왜 그럴까?)

 

시의 첫 행이 공중으로 솟구친 길인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M.C.에셔의 그림처럼, 그와 나의 위치가 역상이었던 것이다. 좌우의 역상이 아니라, 상하의 역상이었던 것이다. 그가 천장에 있건, 내가 천장에 있건, 중요하지 않다. 상대적이다. 어디서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가 냉정하다는 말은 다시 말해 내가 냉정하다는 뜻의 발화이다. 그가 떠났다는 구절은 내가 떠났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상대적인 위치에 따라, 바라보는 지점이 바뀔 뿐이다. “=이다. 이들은 같은 껍질을 공유한 존재자이다. 같은 진동과 진자의 파동을 공유하고 있는 존재이다. 침묵으로도 탯줄이 연결되어 있는, 텔레파시로 서로를 호명하는 존재자들이다. 그렇기에 기형도 시에서 3인칭 는 유령처럼, 홀연히, 호출된다. 빈번하게 그의 목소리가 솟아난다. 느닷없이 등장하고, 그를 알아챌 즈음, 사라진다.

 

 

8. 반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내 얼굴이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한 이후, 나는 主語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가 되었다

 

가끔씩 숨이 턱턱 막히는 어둠에 체해

반토막 영혼을 뒤틀어 눈을 뜨면

잔인하게 죽어간 붉은 세월이 곱게 접혀 있는

단단한 몸통 위에,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전문 (1979.10)

 

 

 이 시는 기형도가 열아홉에 쓴 시이다. 생전 미발표작이지만, 『잎 속의 검은 입』에 수록되어 있다. 앞서 소개한 껍질이라는 시가 78년 작품이라는 감안하였을 때, 그 연장선상에서 해석할만한 하다.

시적 주체인 나는 主語를 잃고 헤매이는 가지 잘린 늙은 나무이다. 접붙이기가 가능한, 그러나 이미 많은 세월을 살아버린, 시간을 선취한, 흐르는 주체이다. 나무의 중심 뿌리를 지향하지 않는다. 리좀이다. 중간의 어느 지점에서 접붙이기를 시도해도 된다. 시적 주체는 내가 자신이 낯설어 보일 때, “한 폭 낯선 풍경화로 보이기 시작할 때, 일차원적인, 크로노스적인 시간에서 벗어난다. 낯선 감각이 온몸에 돋아날 때, 단선적인 시간을 초월할 때, 미래의 시간이 접붙이기 된다. 다른 차원의 시간을 살았던 가 동갑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가능한 이유는 영혼이 눈을 뜨기 때문이다. “눈을 뜨면평범한 일상이 뒤틀어진다. 눈을 뜨는 순간, 사건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다. 현상을 해석하는 위치가 달라질 수 있다. 전개가 뒤집어지는 변곡점이 달라질 수 있다. 눈을 뜨는 순간, 차원이 열리고, 눈을 뜨는 순간, 병이 병이 아니게 된다. 눈을 뜨면, 병은 함께 더불어 가야할 친구가 된다. 눈을 뜨는 순간, 시가 다가온다.

 

시적 주체는 아픔과 병을 단선적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병을 오히려 미적 가치를 지닌 대상으로 승화한다. 늙어간다는 것은 단풍드는 일이다. 병을 짊어지고 사는 것은 몸에 대한 예민한 감각으로, 마음을 모시는 일이 된다. 지극히 몸을 돌보는 일이다. 미래의 시간을 선취하는 감각을 보였던 기형도에게, 스무 살이지만, 저 멀리서 시간을 내려다보는 듯한 시인에게, 이런 인식과 표현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사람아, 사람아 단풍든다.” 이러한 인식 덕분에, 병은 아름다워진다. “아아, 노랗게 단풍든다.” 기꺼이 미학적으로 물들어, 스스로 죽음을 맞이한다. 해방이 된다이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고, 아상(我相)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Liberation 1955 Lithograph. 199mm x 434mm. Order Prints

 

 

 

 

내가 거듭 변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거듭 변하기 위해 나는 지금의 나를 없애야 한다. 그것이 구원이다.[각주:3]

 

 

기형도에게 빈 주어의 자리는 구원으로 가는 한 방편이었을까? 타자에 이르는 길이었을까? 열아홉의 기형도가 스물 아홉의 기형도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스물 한 살의 기형도는 15,16살의 기형도에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을까? 왜 이리 조숙했을까? 왜 이리 출발점이 달랐을까? 스무 살의 기형도에게 묻고 싶다. 세 편의 시를 통해서, 에셔의 그림을 함께 보며, 그의 다양한 들을 불러내어, 중얼거려 보고 싶다. 당신의 시가 내 운명을 바꾸었다고. 내가 잠시 당신의 집에 머물다 흘러나왔다고. 발표 연대를 알 수 없는 미발표작 희망을 소환하여, 당신에게 낭독해 주고 싶다. 나 역시 그러했다고. 스무 살의 기형도에게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언제부턴가 너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언제부턴가 아무 때나 나는 눈물 흘리지 않는다

                           -희망(발표연대 알 수 없음)

 

 

               Day and Night 1938 Woodcut in black and grey, printed from 2 blocks. 677mm x 391mm.

 

 

 

 

 

 

 

 

 

 

 

 

 

금은돌 : 발로 공부하는 사람이다. 2008년 『애지』에 평론을, 2013년 『현대시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하다. 연구서 『거울 밖으로 나온 기형도』를 비롯하여 평론집 『한 칸의 시선』이 있다. 2008년 교통사고 당시 살아있는 것은 바라보는 일이다라는 문장이 스치고 지나가다. 그 이후 눈동자를 그리기 시작하여, 다섯 번의 개인전(<눈에 대한 낭만적 독해>)과 네 번의 단체전을 갖다. 2017년 여름 리좀 국제예술인 레지던스 작가로 참여하여, 프랑스 화가 Sylvie Deparis을 주제로 전시를 열다. 1인 잡지 MOOK 발행인이다.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기형도의 비가 2)라는 믿음으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현재 '수유너머 104'에서 공부하고 있다 

  • 해당 글을 음성 파일로 만들어 올려 놓았습니다. 화면으로 글을 읽기 힘든 분들, 음성으로 들으셔도 좋습니다. 1인 잡지 무크 <돌>을 펴냈던 지난 작업을 이어, 1인 잡지를 이어 나갈 계획입니다. 

  • <그림이 있는 글>은 그림과 시, 예술 작품과 문학 작품을 연결하여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하는 공간입니다. 가끔은 제가 직접 그린 그림과 글을 올리기도 하고, 에세이류의 글을 올릴 계획입니다.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  2018년 가을호 『시와 사람』, <예술산책> 발표


 


  1. 모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1898~1972)는 네덜란드 판화가이다. 동물, 새, 물고기 들을 반복적으로 대칭 배열하면서 일정 단위로 반복되는 전체적인 패턴을 구성하였다. 이때 형상과 배경, 평면적인 패턴과 명확한 3차원적 후퇴감 사이의 모호함을 이용한 시각적 환영을 정교하게 사용했다. 1944년경부터 그의 작품은 시각적 비현실성을 보여주는 초현실주의적 색채를 띠었다. 이러한 작품들에서는 3차원적 구성을 2차원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시각적 환영, 사실과 상징, 시각과 개념 사이의 관계 등을 다루면서 실제 경험상으로는 모순된 것에 합리적인 느낌을 부여했다. 책의 해설을 맡고 있는 얀 W. 베르뮐레는 에셔의 그림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에셔의 이미지는 현대를 사는 인간의 고립과 소외의 경험을 표현한다. (중략) 에셔의 작품은 이 세상이 보이는 것 그대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현실은 긍정되는 동시에 부정되고 있으며, 객관화되는 동시에 상대화되고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세계는 차가운 분위기와 팽팽하게 긴장된 생소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세계에 대해 거리를 두면서도 감정적으로는 몰입하게 된다. M. C. 에셔, 이유경 옮김, 『M.C. 에셔, 무한의 공간』, 다빈치, 2004, 162쪽. [본문으로]
  2. 에셔는 독일 음악가 요한 세바스찬 바흐(1685~1750)의 작품에서도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흐의 음악은 내 작품에 대해 몇 마디 언급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 같다. 내가 시각적 이미지를 복제하는 것과 유사하게 바로크 시대 작곡가들 또한 소리의 복제를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내게 무척 인상적인 일이다." [본문으로]
  3. 기형도 전집 편찬위원회 엮음, 「무등에 가기 위하여」, 『기형도 전집 』, 문학과지성사, 2011, 302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