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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_철학.사회

라캉을 이야기할 자격에 대해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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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톡 까놓고 이야기해 봅시다. 제가 여기서 라캉에 대해 말해도 될까요? 저 같은 사람도 ‘자격’이 있을까요? 아시다시피 라캉의 주저인 『에크리』는 여전히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난해한 도식과 말로 뒤덮인 그 책은 벌써 꽤 오랫동안 ‘근간’이라는 말에 묶인 상태이지요. 저는 『에크리』를 전혀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외국어에 완전히 까막눈인데다 사전을 뒤집으며 책을 읽을 만큼 바지런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나마 각종 라캉 개론서를 통해 『에크리』의 악명을 곁눈으로 겨우 확인한 정도라고 할까요. 불어의 기초는커녕 영문 독해력도 갖추지 못한 제가 언감생심 라캉을 넘보는 건 우스운 일일 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제 라캉 독해는 ‘문자 그대로의 라캉’에 도달하기는커녕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더듬는 이야기가 되기 십상이겠지요. 솔직히 말해서 저는 아직도 라캉을 잘 모릅니다. 정신분석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심리학에 조예가 있는 것도 아니니 그 방면에 내세울 것도 없네요. 라캉의 유일무이한 번역서인 『세미나11』을 탐독하고 있다지만 정말 딱 거기서 벽에 막히는 정도입니다. 애매한 말로 단언하는 라캉의 발화는 인정사정 보지 않으니까요. 제 『세미나11』을 펼쳐보면 그리 두껍지 않은 책에 노랗고 빨갛게 줄 쳐지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만큼 모르는 것 투성이란 말이겠지요. 저는 (라캉의 녹음된 음성을 들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라캉의 걸걸한 목소리에 의지해서 겨우겨우 라캉의 흔적을 쫓고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의지하기엔 그마저도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지만 말이죠. 억독도 이런 억독이 없을지 모릅니다. 누군가는 당신이 말하는 라캉의 권위가 고작 그것에 의거한 것이냐고, 그건 결국 라캉에 대한 맹신이 아니냐고 따져 물을 수 있겠지요. 틀린 말이 아닐 겁니다. 저는 정말 ‘고작 그것’에 의거해서 라캉에 대해 말하려는 참이니까요. 멀리서 부르는 라캉의 선의를 믿지 않고는 저의 무능력한 라캉 논의는 한걸음도 전진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러니 라캉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일반적인 조건으로 따진다면 아무래도 저는 실격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겠네요.

  그런데 다른 누군가는 오히려 논의에 있어 자격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자신이 이해한 바를 이야기해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주변에 충분히 많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자신이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와 마주쳤을 때, 사람들은 스스로를 옹호하며 그런 논리를 펼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므로 저의 무지에도 불구하고 저 역시 라캉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격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옹호하실 분이 계실 겁니다. 어쨌든 저는 라캉과 관련된 몇몇 개론서를 읽었고 정신분석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었다는 이유를 거기에 덧붙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일반적인 인정을 통해 제가 말했던 ‘자격’의 문제가 충족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런 식의 인정은 자격의 문제를 잠시 보류하는 것일 뿐일 겁니다. ‘보류’가 자격에 관한한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운전면허를 갱신하듯 자격 문제에 있어 근본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자격은 언제나 타자에 의해 부여(인정)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임시적이며 항상 타자를 향해 되물어져야 하는 것이지요. 자격은 개인이 무언가를 갖추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 갖추어짐의 위치에서 탄생하는 ‘주체’의 문제인 것입니다. 자격과 관련해서 통용되는 조건들이 무의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격의 주체는 개인이 갖춰야할 조건을 기준으로 결정되기에 앞서 항상 타자의 지점, 즉 타자의 욕망과 관련된 지점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격은 누군가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라는 통속적인 격언은 그런 의미에서 자격이 타자의 욕망과 관련해 ‘스스로를’ 증명하는 것이라 읽어질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결국 라캉을 읽고 라캉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자격이란 뭘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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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이미 라캉의 선의를 믿으면서 논의를 진전시켜보리라 공언한 바 있습니다. 자칫 우스꽝스러워 보일 수 있는, 실제로 종교적으로 보이는 이 선언은 사실 자격의 문제에 관한한 아주 중요한 지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자격의 문제가 (타자의) 욕망의 문제로 이어지는 이상 라캉에 관한 자격은 라캉의 욕망을 가로지를 필요가 있지요. 분석가의 자격을 결정하는 교육 분석이 그러하듯이, 라캉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라캉의 욕망과 대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라캉은 과연 무엇을 욕망할까요? (이 질문에 도달한 사람은 이미 라캉의 욕망에 직면한 셈이겠지만) 그것은 바로 분석(가)의 욕망이며 정신분석을 계시한 프로이트의 욕망입니다. 라캉은 라캉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만)은 프로이트주의자임을 공언한 바 있지요. 그는 프로이트의 선의를 믿고 정신분석을 계시한 프로이트의 자격을 긍정함으로서 프로이트로의 회귀를 성공적으로 이행해냈습니다. 프로이트의 욕망 앞에서 라캉은 프로이트의 토대가 됨으로써 프로이트를 논할 수 있는 자신의 자격에 대한 검증한 셈입니다. 이는 영구적인 자격이 아닐 겁니다. 욕망 앞에서 무엇을 욕망하는가를 묻는 한에서 생겨나는 임시적인 자격입니다. 그야말로 ‘자격의 주체’가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하지요. 앞서도 언급되었지만 임시적이라는 사실이 부정적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격 문제에 있어 본질적인 것이었지요. 정신분석에 관한 박사 학위가 프로이트를 논하는 라캉의 자격은 확증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언뜻 충분해 보이는 자격은 국제정신분석협회가 (라캉의 진술대로라면) 라캉을 ‘파문’함으로써 무효인 것으로 밝혀졌지요. 라캉의 자격은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세미나를 통해) 행위로서 반복하였을 때에만 확인됩니다.


세미나는 정신분석의 실천 자체의 일부를 이루며, 그 실천 내부에 있으면서 그 실천을 이루는 한 요소, 즉 정신분석가 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세미나11』, 13쪽


  라캉의 세미나가 라캉이 기존에 하던 것을 재개하는 것일 뿐이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완전히 새로운 단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하나의 실천으로서 자신의 자격을 되물었기 때문입니다. 반복되는 세미나는 프로이트의 욕망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난처한 토대를 드러냅니다. 라캉은 말합니다. 진리는 프로이트가 가진 무언가다. 계시자로서 프로이트는 확실성의 토대가 되는 불가능한 원인에 다름 아닙니다. (프로이트가 분석에서 매번 발견하는 무의식의 원장면이 바로 그 불가능한 원인이지요.) 라캉은 바로 그 지점에 자신의 자격을 놓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합니다.

  

진리란 곧 진리를 뒤쫓는 무엇입니다. 또한 진리는 바로 악타이온을 뒤쫓던 개들처럼 여러분이 제 뒤를 쫓아 달려가는 곳이지요. 아르테미스 여신의 은신처를 찾게 되면 저는 아마도 사슴으로 변할 테고 여러분은 저를 잡아먹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에겐 아직도 시간이 좀 더 남아 있습니다.

위의 책 , 2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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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젠 결론을 지을 시간이네요. 죄송하게도 쓸데없이 길기만한 자격에 관한 논의였습니다. 변명일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그저 라캉의 행위를 반복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것이 저의 자격을 긍정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불가능한 길이기 때문이지요. 라캉의 욕망에 제가 주체로서 응답하는 이상, 저는 저의 끝없는 무지에도 불구하고 저는 라캉에 대해 말할 자격을 갖춘 주체로서 발견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제가 아니겠지요. 무의식이 거기에 있으므로 거기에 가야한다는 프로이트의 선언을 따라 누군가는 파편과 같은 저의 자격을 발견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라캉의 선의를 믿고 논의를 진전시키기엔 라캉의 목소리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로렐라이의 노랫소리를 닮았습니다.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이지요. 파도와 바위 앞에 자살적으로 맞서는 행위, 그래서 논의의 진전은 아무래도 다음을 기약해야할 것 같습니다. 분석이란 무엇인지, 선의란 무엇인지, 뭐든 만나야 할 것이라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겠지요. 억압된 것이 회귀하듯이 말입니다. 이상 열혈 라캉주의자 박모군이었습니다.



글 / 박모군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라캉 강독 세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