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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_번역작업

[대화의 반려들] 해러웨이와 울프의 대담 - 사이보그의 시작1

[코너소개] 이글은 2016년에 출판된Manifestly Haraway에 실린 것으로 캐리 울프(Cary Wolf)가 다나해러웨이를 인터뷰한 것이다캐리 울프는 미네소타 출판의 포스트휴머니티(Posthumanities) 시리즈의 편집자이고, 최근에는 동물연구, 생명윤리, 그리고 포스트휴머니티의 입장에서 중요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다나 해러웨이는 이 시리즈물에서 『When Species Meet』을 썼다. 이 인터뷰는 2014년 5월 11~13사흘간 다나 해러웨이와 그의 파트너 러스틴 호그니스의 산타크루즈의 집에서 이루어졌다이 인터뷰에는 다나 해러웨이의 중요한 선언들인 사이보그 선언과 반려종 선언을 둘러싼 이야기들과 뒤에 2016년에 발표된 “Staying with the trouble”에 실린 몇 편의 선언들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해러웨이 문제의식전반을 알 수 있는 인터뷰다.


대화의 반려들

Donna Haraway, 『Manifestly Haraway』, Minesota University Press (2016)




번역: 최유미/수유너머104



<Manifestly Haraway>





1. 사이보그의 시작

 

Cary Wolfe: 

두 가지 선언의 최초의 정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당신이 하시고 싶은 어떤 방식으로든 말입니다. (지식적인 면, 제도적인 면, 정치적인 면에서)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그 작품들 뒤에서 구성과 동기부여만이 아니라 그것들(두 선언들)의 수용까지도 형성했는지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1983(사이보그선언이 발표된 해) 이후 많은 것이 변했지만, “반려종선언(Companion Species Manifesto)” 이후에도 역시 많은 것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제 생각에, 그렇게 하는 것이 두 가지 작품의 미래를 탐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 작품들이 사람들이 지금하고 있는 일에 관계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자 거기서 시작해 보시죠.


                         <사이보그선언 - 과학, 기술, 그리고 사회주의-페미니즘>


Donna Haraway:

 “사이보그선언(Cyborg Manifesto)”으로 시작합시다. (당시는 1980년대 초기였는데) 레이건 대통령 초기에 사회주의자-페미니스트, 맑시스트-페미니스트로서 그런 진형(陣形)들이 무엇을 의미했는지에 관한 이해는 상당히 폭넓은데 여러 가지 방식으로 견해를 같이 했던 몇몇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Socialist Review West Coast Collective로부터 요청을 받았습니다. 레이건-대처 시대로서 우리가 이후에 보게 되는 이 국면에서 무엇이 가능한지, 어디로 움직이는지, 지금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생각하는 글을 몇 페이지 써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1960년대는 완전히 끝났다는 것이고, 우리의 정치와 상상에 관한 커다란 희망은 심각한 트러블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자신의 운동 안에서, , 그리고 우리의 더 큰 역사적 순간 안에서 말이지요. 그것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생각했습니까? “Cyborg Manifesto”는 부분적으로는 그 초대에서 나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Socialist Review를 대표해서, 신좌파(new left)와 동유럽과 유로, 그리고 아메리카당의 포스트 신좌파들의 유고슬라비아 회의에 발표할 논문을 준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 회의에서 나는, 회의에서 참석하고 일하는 다른 사람들뿐만 아니라 매우 흥미로운 다른 맑시스트-페미니스트들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누가 복사를 하고 있는지 그리고 누가 발언을 하는지에 관한 이슈들 결코 사라지지 않는 구식의 페미니스트 이슈들 같은 그런 종류의 것들 - 에 관해 즉각적인 유대관계를 경험했습니다.

 

이 선언은 이런 다양하고 직접적인 정황으로부터 나왔지만, 더 나아가서는, 스푸트니크(Sputnik; 1957년에 처음으로 발사한 소련의 인공 위성)에 의해 교육받은 머리로 성장하게 된 2차 대전의 어린이라는 점으로부터 나온 바가 매우 큽니다 - 다시 말해서, 미국이 소련과 우주 경쟁을 했던 사실, 그것이 낳은 결과로는 국방교육법(National Defense Education Act)과 과학교과서의 개정, 생물과학전반과 심지어 사회과학분야까지 교과서 개정들이 있었습니다.(내 친구 Susan Harding은 같은 사회적 국면으로부터 나왔던 중등학교 교과과정 개편, , MACOS(Man a Course of Study)에 관해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1980년대 초에 나는 산타 크루즈(Santa Cruz)로 옮겼는데, 그전에는 존스홉킨스(Johns Hopkins)에서 그리고 그 이전에는 하와이대학(University of Hawaii)에서 가르쳤습니다. 홉킨스의 응용물리학실험실과 하와이에 있는 태평양 전략 사령부 덕분에 나는 엘리트 연구 기구 속에 그리고 실제 공간들 속에 구현되고 내장되어 있는 그대로 군사 산업 복합체들을 보았습니다. (Johns Hopkins에서 가르친 일이 나를 어떻게 형성시켰는지에 관해서는 할 말이 많은데, 예를 들면, 위생학교실과 공중보건의 역사에 관해 배운 것이 있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이들 복잡한 자본주의, 군사주의, 제국주의 기타 등등의 진형들의 내장되어 있는 제도화한 그리고 정치적인 기구들에 의해 형성되었습니다. 볼티모어(Baltimore)는 또한, 낸시 핫속(Nancy Hartsock)과 더불어 볼티모어 실험고등학교(Baltimore Experimental High School) 뿐만 아니라 활동적인 맑시스트-페미니스트 집단을 경험한 곳이고, 내가 사랑하고 후에 남편이 된 러스틴 호그니스(Rusten Hogness)가 가르쳤던 곳이고, 마지 피어시(Marge Piercy)의 아나키스트-페미니즘을 읽고 받아들이게 된 곳입니다. 나에게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나는 과학의 역사를 가르치고 배우고 있었고, 그것은 나에게 매우 중요한 것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하와이지요. 예일 대학의 생물학 대학원생으로 하와이에 도착했습니다. 당시에 나는 생물학이 문화와 실천이고, 문화와 정치이고, 물질적 자연문화(material natureculture) 라는 점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물질적 자연문화는, 그러니까, 이건 내가 나중에 만든 말들이지만 이미 깊이 연관된 접근방식들이었죠. 그리고 그때, 게이 남자 제이 밀러(Jaye Miller)와 결혼 했는데, 그의 전 생애 동안 그는 내 마음의 친구로 남았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결혼은 나쁜 생각이었습니다 우리가 뭘 했겠습니까? 나는 우리가 정말 순진한 형태의 근친상간에 종사하고 있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나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웃음). 우리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예일에서 와서, 그러니까, 호놀룰루에, 뉴헤븐그린(New Haven Green, New Haven 중심부의 퓨리탄들이 개발한 사유私有 공원, 예일대학이 옆에 있음)처럼 보이는 곳에 상륙했고, 이곳이 처음부터 다시 예일-뉴헤븐그린(Yale-New Haven Green), 프로테스탄트들, 조합 교회주의자들, 선교사들, 사탕수수 가문들, 미국 프로테스탄트 헤게모니의 상업적이고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기구들의 후손임을 아실 겁니다. 우리는 거기 있었습니다: 하와이 주권 운동의 부활을 포함해서, 플렌테이션들, 식민주의들, 인종적 진형들, 베트남 전쟁 중의 태평양 전략 사령부, 섹슈얼과 친척과 젠더 실험, 활기찬 사회 운동들 그 모든 것, 그리고 물질적으로 그 땅에 구현되어 있는 그 모든 것.

 

사이보그선언, 이 크고 작은, 은밀하고 거대한 문제들로부터, 이 세계에서 현재의 내 모습으로, 내가 형성되었다는 이해가 모여진 것입니다. 그 문제들은 너무나 커서 이해할 수 없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우정과 정치와 연애 사건과 2차 대전 후 미국 패권, 기타 등등의 은밀한 조직(tissue)들 속에 살고 있죠. 특히 정보로 포화된 문화, 정보 과학으로 포화된 문화와 정치 속에서, C3I (Command Control Communication Intelligence) 속에서 권력이 취한 형식으로 살았습니다. C3I는 베트남 전쟁에서 맥나마라(McNamara)계획의 중심이었습니다 이건 전쟁에 대한 특별한 사이버네틱 합리화인데, 많은 부분이 하와이에서부터 수행되었습니다. 그 때는 하와이 원주민들의 주권 운동들, 페미니즘 및 생식과 성적인 자유를 위한 투쟁. 하와이든 아니든 땅과 노동 투쟁 운동들의 바로 그 시기였고, 하와이에서 철수하는 플렌테이션 농업의 뒤를 호텔 산업이 이었고 관광 산업이 팽창했던 시기입니다. 나는 이 모든 것들로부터 한 개인으로 형성되었습니다.

 

                                    <린 랜돌프의 회화작품: 사이보그>


그리고 나는 언제나 생물학, 크리터들, 앎의 방식들과 깊이 사랑에 빠졌고 계속 그렇게 지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시스템으로서 하나의 정보 시스템, 노동의 분할에 의해 나누어진 하나의 시스템 우리 자신을 알기 위해, 나로 하여금 어떻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포함한 이 세계를 아는 방식이 앎을 위한 특정한 기구들 속에서 역사적으로 상황에 놓여 있는지에 관해 더욱더 의식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의 열기관으로 압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의 전화교환국으로 압니다. . . .이것들은 결코 단순한 비유가 아닙니다 우리는 정말 이러한 지식 실천들 속에서 역사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것들은 만들어질 수 있지만, 날조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사이보그 선언는 이 세계 속에서 존재하고 있음과 이 세계 속에서 책임 있음을 이해하는 이러한 수렴적인, 나아가서는 내파적인 방식들을 인정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나는 어떤 특정 역사적 순간에, 한 사람의 페미니스트로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생물학자로서, 선생으로서, 친구로서 기타 등등으로서 쓰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