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5강. 두번째 부분


 

‘국가 Staat’와 ‘사회 Gesellschaft’


이 후의 보충 설명을 보면 좀 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국가가 (18세기처럼) ‘사회’를 대항자로서 인정하지 않았거나 혹은 적어도 (독일의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서 그랬듯이) ‘사회’의 상위에, 안정된 구별을 할 수 있는 권력으로서 존재한 경우에는 그랬던 것이다. 

[홍 : 국가가 (18세기 때처럼) “사회”를 전혀 하나의 상대방으로 승인하지 않았거나, 최소한 (독일에서 19세기 그리고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사회” 위에 안정되고 구별되는 권력으로 서 있었던 것이 그러한 경우다.]


독일어권의 정치・사회이론에서는 종종 ‘국가 Staat’와 ‘사회 Gesellschaft’가 대비됩니다. ‘국가’와 ‘사회’가 다른 것은 당연합니다. ― 제가 일하고 있는 가나자와 대학의 법학류(法学類) 학생은 종종 ‘국가’와 ‘사회’를 혼동하는 듯한 답안을 씁니다. ‘국가’는 법적 근거를 가진 통치기구인 반면, ‘사회’는 인간의 집합체 일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러 집단이 ‘사회’에 있는 것입니다만, [국가 vs 사회]라는 대립도식에서의 ‘사회’는 ‘시민사회 die bürgerliche Gesellschaft’를 염두에 놓고 생각하면 좋을 겁니다. 영어권의 논의에서는 ‘시민사회’는 자유로운 경제 활동에 종사하는 시민들이 독자적인 사회적 규범을 발달시키고 자치를 행하고 정부의 부당한 명령에 대항하게 된다는 이미지로 말해집니다. 독일어권에서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시민사회’론은 애덤 스미스(1723-90) 등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에 의해 전개됐다는 이미지가 있습니다만, ‘시민사회’를 최초로 철학적으로 정의한 것은 헤겔입니다. 스미스 등의 논의에서는 시장과 결부된 시민사회가 자립적인 시스템을 형성하는 것이 강조됩니다만, 유럽의 후진국으로 통일국가도 아직 없었던 독일의 철학자인 헤겔은 ‘시민사회’의 한계를 지적했습니다. 법철학(1817)에서 ‘인륜 Sittlichkeit’의 세 형태로서 ‘가족’, ‘시민사회’, ‘국가’를 들고 있습니다. 

헤겔에 따르면, ‘시민사회’는 ‘욕구의 체계 das System der Bedürfnisse’인 동시에, ‘전면적인 의존의 체계 das System allseitiger Abhängigkeit’입니다. ‘욕구의 체계’라는 것은 시민들이 자신의 욕구를 추구하면서 서로 교섭[협상]한다는 것입니다. ‘전면적 의존의 체계’란 각자가 교환이라는 형태로 서로의 ‘노동’에 의존한다는 것입니다. ‘시민사회’에는 사법(私法)의 체계나 서로 돕는 직업 단체 등이 있지만 토대가 각자의 사적 욕구이기에, 공공성이 충분치 않다. 사적 이해의 대립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다. 그러니까 시민사회는 더 이성적 인륜의 형태이며, 공법의 체계에 의해 통치되는 ‘국가’에 의해 지도・제어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헤겔적인 맥락에서 ‘국가’는 ‘사회’보다 상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국가와 사회가 서로 침투함에 따라, 국가적=정치적이라는 등치는 올바름을 상실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된다. 즉, 민주적으로 조직된 공동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듯이, 모든 지금까지의 국가적 문제가 사회적인 것이 되며, 거꾸로 모든 지금까지는 ‘단순히’ 사회적 문제가 국가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그 경우에는 지금까지는 ‘중립적인’ 영역 ― 종교, 문화, 교양, 경제 ― 이 비국가적, 비정치적이라는 의미에서 ‘중립’이기를 그만두게 된다. 중요한 영역들의 이러한 중성화, 비정치화에 대한 논쟁적인 대립 개념으로서, 어떤 영역에 대해서도 무관심하지 않고, 잠재적으로는 모든 영역을 장악하는, 국가와 사회의 동일시로서의 전체 국가가 등장한다. 

[홍 : 이에 반해 국가적 = 정치적이라는 등식은 국가와 사회가 상호 침투함으로써, 민주적으로 조직화된 공동체에서는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처럼, 지금까지는 국가적 사안이었던 모든 것이 사회적이 되고, 반대로 지금까지는 “단지” 사회적인 사안들이 국가적인 것이 되는 정도만큼 그릇되고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제까지의 “중립적” 영역들—종교, 문화, 교양, 경제—은 비국가적이고 비정치적이라는 의미에서 “중립적”이기를 중단한다. 그러한 주요한 [사태]영역들의 중립화와 탈정치화에 반대하는 논쟁적인 반대개념으로서 어떤 [사태]영역에 대해서도 무관심하지 않고 잠재적으로 모든 영역들을 장악하는 총체국가가 나타나는데 총체국가란 곧 국가와 사회의 동일성이다.]


여기서는 슈미트의 독자적인 주장, 역사인식이 꽤 전면에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근대국가는 사적 영역에서의 사람들의 사적 활동, 종교, 문화, 교양, 경제에는 개입하지 않기로 되어 있습니다. ‘교양’의 원어는 <Bildung>으로, 인격을 ‘형성’하는 것, 넓은 의미에서의 ‘교육’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국가는 특정한 종교, 특정한 문화, 특정한 교양형태, 특정한 경제적 이해를 편들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립적 neutral’입니다. 자유주의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아니 오히려 국가가 중립적이지 않다면 사람들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국가’와 ‘사회’의 분리의 원칙입니다. 


반면 슈미트는 시대와 함께 국가와 사회가 상호 침투하는 경향이 점차 진행되고 있으며, 이 때문에 [국가적=정치적]으로 간주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것’을 그동안 거의 독점하고 있었던 ‘국가’가 ‘사회’와 서로 영향을 주고 서로 침투하는 관계에 있다고 한다면, ‘정치적인 것’을 이해하려면 ‘국가’만 아니라 ‘사회’에서의 힘관계도 시야에 넣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 그런 이치입니다.


『정치적인 개념』과 같은 해에 간행된 『합법성과 정당성』(1932)에서 근대국가의 기능적 유형들 ― 입법국가, 사법국가, 행정국가 등 ― 과 그 변용에 관해 자세하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다나카・하라다 콤비에 의한 번역은 역시 미라이샤에서 간행됐습니다. 헌법의 수호자에서도 이 문제가 논의되고 있습니다. 중립성을 지향한 근대국가, ‘중성국가 der neutrale Staat’가 쇠퇴한 후에 등장하는, ‘전체 국가 der totale Staat’에 관해서는 이보다 1년 전에 발표된 짧은 논문 「전체 국가로의 전환」(1931)이나 1년 후의 논문 「독일에서의 전체 국가의 새로운 발전」(1933) 등에서도 자세하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슈미트의 ‘중성국가’ 개념을 자주 언급합니다만, ‘중성국가’는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전체국가’란 맥락에서 알 수 있듯이, 종교, 문화, 교양, 경제 등 기존에는 사적 영역으로 여겨졌던 곳에 간섭하고 관리하려 하는 것과 더불어, 이런 영역들의 역학, 논리에 의해 국가의 기본 구조 자체가 변용하게 된 국가라는 것입니다. 슈미트는, ‘전체 국가’로의 전환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는지 아닌지 여기에서는 분명한 태도를 드러내지 않지만, 적어도 가치중립성을 표방하는 법실증주의적・자유주의적 국가 모델을 비판하는 것은 확실하며, 그 대항 모델로서 ‘전체 국가’를 상대적으로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슈미트가 ‘전체 국가’에 대해서 논하면, 아무래도 ‘전체주의 Totalitarismus’와의 관계를 연상해 버립니다만, 양자는 직접적으로는 관계하지 않습니다. 아렌트 등의 ‘전체주의’의 정의에 따르면, 단순한 독재 — 역사적 의미에서의 ‘독재’가 아니라 보통의 의미입니다 ― 나 전제 지배가 아니라, 인민을 이데올로기와 세계관에 의해 동일화하는 정치 체제입니다. 나치나 소련, 현재의 북한이 전형입니다. 슈미트가 말하는 ‘전체 국가’는 사상이 아니라 국가의 기능 얘기입니다. 물론 전체주의의 국가는 종교・사상・교육은 완전히 통제하려 하고, 경제도 정부의 관리 아래 두려는 것이 많기에, 전체 국가적으로 되기에, 결과적으로 거의 같은 것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만. 

11頁부터 13頁에 걸쳐 글자가 작아지고 있는 대목에서는 18세기의 절대주의 국가부터 19세기의 중성국가를 거쳐 20세기의 전체주의에 이르는 국가관의 변천이 주요 국가이론에 입각해 논의되고 있습니다. 헤겔, 플로렌츠 폰 슈타인(1815-90), 루돌프 그나이스트(1816-95), 기르케, 프로이스, 볼첸도르프, 루돌프 스멘트(1882-1975) 등의 독일의 국가이론의 대가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국가를 사회의 상위에 놓는 헤겔의 이론이 독일의 국가이론에 큰 영향을 줬다고 기술되어 있네요. 

슈타인은 독일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빈 대학의 교수를 지낸 국법학자・경제학자입니다. 프랑스의 초기 사회주의를 독일어권에 소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그는 ‘법치국가’에서 ‘사회국가 Sozialstaat’로의 기능 전환의 필요성을 주장했습니다. ― 지금의 독일어에서는 <Sozialstaat>라고 말합니다만, 슈타인 자신은 “사회적 국가 der gesellschaftliche oder sociale Staat”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메이지 초기에 헌법 조사를 위해 유럽을 방문한 이토 히로부미(1841-1909)가 가르침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나이스트는 베를린 대학에서 공법을 가르친 법학자로, 프로이센 의회나 제국의회의 의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국민자유당의 지도자의 한 명으로, 프로이센을 입헌국가로 하고, 사법을 정치로부터 독립시킬 필요성을 제창했습니다. 사회정책학회의 창설자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슈타인과 그나이스트, 이 두 사람은 국가와 사회의 질적 차이에 집착한 사상가로서 소개되어 있네요. 기르케, 프로이스, 볼첸도르프의 단체이론에 관해서는 󰡔정치신학󰡕 때 말씀드렸네요. 스멘트는 슈미트와 거의 동년배의 국가・교회법학자로, 국가를 규범적으로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과정을 통합하는 실체로서 사회학적으로 이해하는 ‘통합이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제2차 대전 후의 서독의 국법학에도 영향을 계속 줬습니다. 




‘판단 기준 Kriterien’ 


14頁부터의 2장을 보시죠.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 규정은 특히 정치적인 범주들을 찾아내고 확정함으로써 획득될 수 있다. 즉, 정치적인 것에는 그것에 특유한 표식 ― 인간의 사고나 행동의 다양한,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영역, 특히 도덕적, 미적, 경제적인 것에 대해 독자적인 방식으로 작용하는 ― 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치적인 것은 특유의 의미에서 정치적 행동이 모두 거기에 귀착할 수 있는, 그것에 고유한 궁극적인 구별 속에서 찾아져야만 한다. 

[홍 : 정치적인 것에 대한 개념규정은 특정하게 정치적인 범주들을 드러내고 확인함으로써만 획득될 수 있다. 정치적인 것은 바로 자신의 고유한 기준들을 지니는데 그 기준은 인간 사고와 행위의 다양하고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사안영역들, 특히 도덕적인 것, 미적인 것, 경제적인 것과 달리 고유한 방식으로 작용하게 된다. 따라서 정치적인 것은 반드시 그 고유의 최종적인 구분에 달려있는데, 특정한 의미에서의 모든 정치적인 행위는 이 구분에서 기인한다.]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 규정이 “특히 정치적 범주”를 발견하고 확정함으로써 분명히 드러난다는 것은 선문답처럼 보여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만, 우선 이 “특히 정치적 범주”의 의미를 확인해 봅시다. 원어는 <die spezifisch politischen Kategorien>입니다. “정치에 고유한 범주”라고 번역하는 편이 다소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도덕이라든가 예술이나 경제와 같은 다른 영역에서는 볼 수 없는, 정치에 특유한 ‘판단 기준 Kriterien’ ― ‘표식’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판단 기준’이 적절하죠 ―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는 거네요. 

이 ‘판단 기준’이 “궁극적 구별 letzte Unterscheidungen”로 바꿔 말해지고 있네요. 영역별로 그 영역에 특유한 사물의 구별, 판정의 방식이 있으며, 그 궁극적 형태가 있다는 것입니다. 조금 뒤에 예가 나오네요. ‘도덕적인 것’의 영역에서의 선/악, ‘미적인 것’의 영역에서의 미/추, ‘경제적인 것’의 영역에서의 이(利)/해(害) 등입니다. 현대사상 식으로 말하자면, 이분법 코드입니다. 루만의 체계론이라면, 사회의 각 영역마다 고유한 이분법 코드가 있으며 그것이 적용됨으로써 현상들에 의미가 부여됩니다. 법이라면 법/불법, 경제라면 수지타산이 맞다/맞지 않다는 느낌이죠.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영역에도 그런 이분법적 코드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정치적인’이라는 우리가 무심코 쓰고 있는 형용사의 의미를 정밀하게 분석하면서 본질적인 부분을 끌어내는 슈미트의 방식은 분석철학과도 비슷하게 보이기도 합니다만, 분석철학과는 달리 분석대상이 되는 개념과 사회적 현실의 실체적 대응관계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그는 말을 추상적으로 만지작거리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친구 / 적’의 구별의 본질 


15頁에 드디어 그의 주장의 핵심이 나옵니다. 


정치적 행동이나 동기의 기인으로 생각되는, 특수 정치적 구별이란 친구와 적이라는 구별이다. 이 구별은 표식이라는 의미에서의 개념 규정을 제공하는 것이며, 적나라하지 않는 정의 또는 내용을 나타내는 것으로서의 개념 규정이 아니다. 

[홍 : 특정하게 정치적인 구분이란 정치적 행동과 동기들의 원인이 되는데, 그것은 친구와 적의 구분이다. 그 구분은 총괄적[모든 내용을 남김없이 포함하는] 정의나 내용에 대한 서술로서가 아닌 기준이라는 의미에서의 개념규정을 제공한다.]


이것은 유명한 대목입니다. 상식적인 «정치» 이해라고 하면, ‘정치적인 것’의 본질은 타협이나 화해나 합의 형성이나 공통의 목적 실현과 같은 것으로 보이지만, 슈미트는 역발상을 하고, ‘친구’와 ‘적’을 분명히 나누는 것, 달리 말하면 대립 혹은 투쟁의 도식을 분명히 묘사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적인 것’의 본질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말하면 나치와의 관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위험한 학자처럼 느껴집니다. 이를 테면 ‘친구/적’은 원어로는, <Freund>와 <Feind>로, 둘 다 F로 시작되며, D로 끝나는 한 음절의 단어이기에, 엄밀하지는 않지만, 운율을 감안한 듯한 느낌이 됩니다. 


친구/적의 구별은 결합 또는 분리, 연합 또는 이반의 가장 강도 높은 경우를 나타낸다는 의미를 지니며, 상기 도덕적, 미적, 경제적 기타의 모든 구별이 동시에 적용돼야 하는 것 없이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존립할 수 있는 것이다.


[홍 : 적과 친구의 구분은 결속과 분리, 결합과 분해의 가장 강도 높은 정도를 보여준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동시에 모든 저 도덕적이거나 미적인, 경제적인, 혹은 다른 구분들로부터 도출되지 않으면서도 존재할 수 있다.]


여기서 ‘친구/적’의 구별이 본질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결합 Verbindeng / 분리 Trennung’, ‘연합 Assoziation / 이반 Dissoziation’의 가장 ‘강한’ 표현現わ이라는 것입니다. 도덕, 예술, 경제 등 다른 영역의 구별도, 어떠한 형태로, 어떤 속성을 공유하는 똑같은 종류의 대상을 하나로 묶고, 그것과 대립하는 속성을 가지는 대상을 하나로 묶어서 대치하는 것입니다만, 슈미트에 따르면 ‘정치적인 것’에서는 가장 강하게 ‘결합’과 ‘이반’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적절한지 여부와는 별개로, 확실히 말의 의미부여로부터, ‘친구’와 ‘적’이라고 하면, 전력으로 결합하거나 반발하거나 하는 느낌이 듭니다.


정치상의 적이 도덕적으로 악일 필요는 없고, 미적으로 추악일 필요는 없다. 경제상의 경쟁자로서 등장한다고는 할 수 없으며, 적과 거래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아마 있을 수 있다.

[홍 : 정치적인 적은 도덕적으로 악할 필요는 없으며, 그는 미적으로 추할 필요도 없다. 그는 경제적인 경쟁자로서 나타날 필요도 없으며 그와 거래를 하는 것이 어쩌면 더 유리해 보일 수 있다.]


여기에서 슈미트는 ‘적’ 개념을 순수화하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적’이 ‘적’이라는 이유로서, 도덕적으로 악이라든가, 미적으로 추악이라든가, 경제적 이해가 대립하기 때문이라든가 등으로 생각합니다만, 슈미트더러 말하게 하면, 그것은 ‘적’이라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적’이라고 한다면, ‘적’과 그 대극에 있는 ‘친구’는 ‘정치적인 것’에 고유한 구별이 아니라, 다른 영역의 구별로부터 파생된 것, 혹은 다른 영역의 구별의 복합체라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순수한 의미의 ‘적’, 무조건의 ‘적’이 있다는 것이 ‘정치적인 것’이 존재하는 전제가 되는 것입니다.


적이란 타자・이질자에 다름 아니며, 그 본질은 특히 강한 의미에서, 존재적으로, 타자・이질자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따라서 극단적인 경우에는, 적과의 충돌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며, 이 충돌은 미리 정해진 일반적 규정에 의해서도, 또한 ‘관할 밖에’ 있으며, 따라서 ‘불편부당’한 제3자의 판정에 의해서도 결말이 나는 것은 아니다. 

[홍 : 그는 그야말로 타자이자 이방인이며 그의 본성 상 특히 강도 높은 의미에서 실존적으로 다른, 낯선 어떤 존재이기 때문에 극단적인 경우에 그와의 분쟁[갈등]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갈등은 사전에 규정된 일반적 규범 설정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이해관계가 없고" 따라서 "공정한" 제3자에 의해 결정될 수 없다.]


올바른 인식 및 이해의 가능성, 그리고 그것에 따라서 또한, 간섭하고 판정할 자격은 이 경우 존재적으로 관여하고 참여함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충돌이라는 극단적인 사례는, 당사자 자신이 상호 간에 매듭을 지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기 식의, 존재에 따른 생활양식을 지키기 위해, 그것에 저항하고 그것과 싸우는가 여부는, 당사자의 각각이 스스로 결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홍 : 올바른 인식과 이해의 가능성, 그리고 그와 함께 발언권과 판단권은 여기서는 오직 실존적으로 몫을 갖고 또한 그것을 취할 때에만 주어진다. 극단적인 분쟁의 가능성은 오직 당사자 자신에 의해서만 수습될 수 있다. 특히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분쟁의 경우에 이방인의 타자로서의 존재가 자신의 고유한 실존 방식에 대한 부정을 나타내는지, 그리고 그에 따라 자신에게 고유하고 본성에 적합한 삶의 방식을 보존하기 위해서 그를 격퇴하거나 퇴치해야 하는지 여부는 오직 그들 각자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단숨에 철학적인 얘기가 됐네요.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들=친구에게 있어서 ‘타자 der andere’ 혹은 ‘이질적인 자 der Fremde’, 즉 전혀 공통점이 없는 상대, 실존에 있어서 대립하고 있는 상대가 ‘적’인 것입니다. ‘존재적’의 원어는 <existenziell>로, ‘실존적’이라고 번역하는 편이 좋을 것 같기도 하지만, 슈미트는 별로 실존주의를 의식해서 이 말을 사용한 것은 아닌 것 같으니까,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좋을지 모릅니다. 요는 서로의 존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며, 함께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런 ‘완전히 이질적인’ 상대와 부딪치면, 공통의 규범과 척도가 없기에, 제3자에게 공평하게 중재해달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들이 결말을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타자로서의 존재방식이 자기 식의, 존재를 부정하는지 여부”라는 표현은 알기 어렵네요. 번역도 조금 부정확합니다. “타자로서의 존재방식”이라는 부분의 원어는 <das Anderssein des Fremden>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투입니다만, “이질적인 것의 상이한 존재(의 방식)”이라고 번역하는 편이 좋겠죠. ‘타자’의 이질적인 존재방식은 내버려두면 ‘우리들=친구’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니까, 체념하거나 그것에 저항해 싸우든가, 양자택일의 결단을 내리도록 재촉당한다는 것이 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인지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이유는 알 수 있네요. SF적인 것을 말하면, 예를 들어 반물질의 «존재»라든가, 일산화탄소 농도가 높은 «대기»가 없으면 호흡할 수 없는 외계인이라든가, 우리가 공존하는 것은 힘드네요. 굳이 현실의 인간에 적용하려 들면, 아무래도 유대인과 아리아인의 숙명의 … 등과 같은, 인종주의적 이미지가 떠오르게 됩니다. 슈미트가 그런 것을 염두에 뒀는지 아닌지는 모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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