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仲正昌樹カール・シュミット入門講義作品社, 2013.




5. 세번째 강의 


‘적’ : ‘공적 offentlich’ 전투상태에 있는 상대방 


17頁부터 시작되는 3장의 서두를 보십시오. 


친구·적 개념은 은유나 상징이 아니라 구체적·존재론적인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즉, 경제적·도덕적 기타 관념들을 혼입시켜 약화시켜서는 안 되며, 하물며 사적인 개인주의적 의미에서, 심리적으로 개인적인 감정 내지 성향의 표현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홍 : 친구와 적의 개념은 은유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그 구체적이고 실존적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경제적이거나 도덕적인, 그리고 다른 표상들을 통해 최소한 사적인 정념과 편향의 표현으로서 심리적으로는 사적-개인주의적 의미에서 혼동되거나 희석되지 않아야 한다.]


아까 설명한 것의 확인입니다. ‘친구’라든가 ‘적’이라든가 일상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아무래도 은유나 상징으로 이해하게 쉽습니다. ‘적’이라는 것을, “마치 적인 것처럼” 고쳐 읽어버립니다. 이것은 오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의 존재를 결정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친구/적’이라는 기준이 있는 것이며, 그것을 이해관계라든가 심리학적 호불호의 비유, 과장 표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경제적인 ‘경쟁상태 Konkurrent’라든가, 도덕적 규범을 둘러싼 ‘논쟁 상대 Diskussionsgegner’도 아닙니다. 경제적 이해로 경쟁하고 있을 뿐이라면, 쌍방의 이익이 합치되는 상황이 생겨나면 해소될 테고, 논쟁이라면 한쪽이 생각을 바꾸면 대립이 해소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친구/적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적이란 경쟁상대라든가 상대 일반이 아니다. 또한 반감을 품는, 미워하고 있는 사적인 상대도 아니다. 적이란 다만 적어도, 때로는, 즉 현실적 가능성으로서, 항쟁하고 있는 인간의 총체 ― 다른 동류의 총체와 대립하고 있는 ― 인 것이다. 적에는 공적인 적밖에 없다. 

[홍 : 적은 따라서 일반적으로 경쟁자나 반대자가 아니다. 적은 또한 사적인 반대자로서 혐오의 감정을 갖고 증오할 대상도 아니다. 적은 적어도 어쩌면, 다시 말해서 실제 가능성에 따른 인간의 투쟁하는 총체이며 이 총체에 맞서 하나의 다른 그러한 총체가 대립한다. 적은 단지 공적인 적인데 …]


“항쟁하고 있다”의 원어는 <kämpfend>로, “싸움”을 의미하는 <kampf>를 동사화한 <kämpfen>의 현재분사형입니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마인 캄프󰡕의 <kampf>입니다. 상대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온힘을 다한 격투를 실제로 하고 있는 상대라는 것이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적’이란 ‘사적 privat’으로 대립하는 상대가 아니라, ‘공적 öffentlich’으로 전투상태에 있는 상대의 총체라는 것입니다. 공적인 싸움이기에, 개인적인 호불호와는 관계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이런 인간의 총체에, 특히 전 국민에 관계하는 것은 모두 공적(公的)이 되기 때문이다. 적이란 공적(公敵)인 것이지, 넓은 의미에서의 사적[私仇; 사적인 원수]이 아니다. 폴레미오스[戰敵]인 것이지 에크트로스[私仇]가 아니다. 독일어에는 다른 국어들과 마찬가지로, 사적인 ‘적’과 정치적인 ‘적’의 구별이 없기에, 많은 오해나 바꿔치기가 생길 가능성이 있다. 

[홍 : 그러한 인간의 총체, 특히 한 국민 전체와 관련되는 모든 것은 그것을 통해 공적인 것이 된다. 적은 호스티스(hostis)[공공의 적]이지 광의에서의 이니미쿠스(inimicus)[사적인 적]는 아니며 폴레미오스(πολέμιος)[공공의 적]이지 엑트로스(ἐχϑϱός)[사적인 적]는 아니다. 독일어는 다른 언어들과 마찬가지로 사적인 ‘적’과 정적(政敵)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서는 여러 가지의 오해와 기만이 가능하다.]


처음 문장에서 ‘공적’이라는 것은 ‘인민’ 전체에 관계한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강조가 붙어 있는 ‘공적(公敵)’은 원어로는 <hostis>, 라틴어입니다. 강조되어 있는 ‘사적[私仇]’는 <inimicus>. ‘폴레미오스(polemios)’와 ‘에크트로스(echthros)’는 그리스어입니다. 즉, 라틴어나 그리스어에는 공적인 의미에서의 ‘적’과 사적인 ‘원수[仇]’를 구별하기 위한 두 개의 말이 있지만, 독일어에는 <Feind>라는 말밖에 없기에 혼란이 생기기 쉬운 거죠. ‘영어’도 <enemy>라는 하나의 단어밖에 없기에, 구별할 수 없습니다. 일본어라면, ‘적’을 ‘원수’라고 읽으면, ‘적’이라고 읽을 때와 비교해서, 다소 사적인 뉘앙스가 나옵니다만, 다른 의미도 붙어 있기에 공/사의 구별에는 직선적으로는 연결되지 않네요. 

‘독재’를 둘러싼 논의도 그렇습니다만, 슈미트는 하이데거 정도는 아니지만, 어원학적으로 비트는[ひねりを加える] 논의를 좋아합니다. 


자주 인용되는 경구, “네 적을 사랑하라”(마태복음 5장 44절 ; 루가복음 6장 27절)는 [라틴어로는] “네 inimici[사적인 적]을 사랑하라”, [그리스어로는] “네 모든 에크트로스를 사랑하라”이며, [라틴어의] “네 hostes[공적인 적들]를 사랑하라”가 아니다. 즉, 정치적 적에 대해서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수천년 동안 기독교도와 회교도 사이의 투쟁에 있어서도, 그 어떤 기독교도든, 사라센인이나 투르크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유럽을 방어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것을 회교도에게 넘겨줘야 한다 따위라고는 생각한 적이 결코 없었을 것이다. 정치적 의미에서의 적이란, 개인적으로 미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며, 사적 영역에서 처음으로, ‘적’, 즉 자기의 반대자를 사랑한다는 것도 의미를 갖는 것이다. 앞의 성경의 구절은 예를 들어 선악이나 미추의 대립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니 이것보다 훨씬 이상으로, 정치적 대립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특히 그것은, 자국민의 적을 사랑하고 자국민을 거슬러서 적을 지지하라 따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홍 :  “너희의 적을 사랑하라[원수를 사랑하라]”(마태복음 5:44, 누가복음 6:27)는, 종종 인용되는 구절은 “너희의 이니미코스를 사랑하라(diligite inimicos vestros)”이며 ἀγαπᾷτε τού󰐠 ἐχϑϱοὺς ύμϖν이지 “너희의 호스티스를 사랑하라(diligite hostes vestros)”는 의미는 아니다. 즉 정치적인 적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또한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수천 년 간의 투쟁에서 단 한 사람의 기독교인도 사라센인이나 터키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유럽을 방어하는 대신에 유럽을 이슬람교인에게 넘겨줘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적을 인격적으로 증오할 필요는 없으며, 사적인 것의 영역에서야 겨우 ‘적’ 즉 자신의 반대자를 사랑한다는 것이 의미를 갖는다. 저 성경의 구절이 정치적 대립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을 가능성은 가령 그 구절이 선과 악, 혹은 미와 추의 대립을 지양하려는 가능성보다 훨씬 낮다. 그 구절은 무엇보다도 자국민의 적을 사랑하고 자신이 속한 국민에 맞서 적을 지지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성경을 인용하고 있기에, 설득력이 있다는 느낌이네요. 다만 기독교에 밝은 연구자들은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 보면, [echthros-inimicus]가 ‘사적(私敵)’의 의미만으로 사용된 적은 없다는 비판이 있기에, 에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겠죠. 이 점은 이번 강의의 서두에서 소개한 사노 마코토(佐野誠) 씨의 󰡔근대 계몽 비판과 나치즘의 병리(近代啓蒙批判とナチズムの病理)』의 3장에서 해설되어 있습니다.

여기서의 슈미트의 논의의 요점은, 예수는 ‘사적인 적[私仇]’을 사랑하라고 말한 것이지, ‘공적(公敵)’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기에,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공적’과 싸우는 것, 예를 들어 십자군을 파견하는 것은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옆에 있는 ‘사적인 적[私仇]’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인 것이지, 국가의 이익에 반하면서까지 공적을 사랑하고 싸우지 말라고 가르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국가가 모순을 느끼지 않고 전쟁을 할 수 있는 근거는 성서에 근거가 있다는 얘기입니다만, 역시 이렇게까지 말하면 과도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국가정치적 staatspolitsch’



정치적 대립은 가장 강도 높은, 가장 극단적인 대립이다. 그 어떤 구체적인 대립도, 그것이 극점으로서의 친구·적 결속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정치적인 것이 된다. 국가는 조직된 정치단위로서, 전체로서는, 그것 자체에 있어서, 친구·적을 구별하는데, 그 국가의 내부에서는 이것에 덧붙여, 제일의적으로 정치적 구별 외에, 더욱이 이 구별에 의해 지켜지고, ‘정치적’이라는 수많은 이차적인 개념이 생겨난다. 

[홍 : 정치적 대립은 가장 강도 높은 극단의 대립이며 모든 구체적 대립성은 최극단의 지점인 친구-적의 결집에 가까이 접근할수록 더욱 정치적이 된다. 조직화된 정치통일체로서의 국가 내부에서 전체로서의 통일체는 스스로 친구-적의 결정을 내리며, 그밖에는 일차적인 정치적 결정들 옆에서, 그리고 내려진 결정의 보호를 받으면서 "정치적인 것"의 수많은 이차적 개념들이 결과적으로 생겨난다.]


앞에서는 다른 영역에서의 대립과 ‘정치적인 것’에서의 ‘친구/적’의 차이가 강조되었습니다만, 여기서는 오히려 다른 영역의 대립에서도, 강도가 높아지고 실존적 대립의 수준에까지 이르면 정치적인 ‘친구/적’에까지 이른다고 합니다. 원래라면 어떤 원인에서 생긴 대립인지는 관계가 없죠. 

‘국가’는 이런 의미에서의 ‘정치적인 것’으로서, 즉 ‘적’과 대치하는, ‘친구=아군’의 공동체로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 일본어의 ‘아군’은 영역하면 흔히 <friend>가 됩니다. ‘국가’와 그 외부와의 대립이 가장 기본이기에, 일단 ‘정치적=국가적’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만, ‘국가’ 내부에서도 이차적 의미의 ‘정치적인 것’이 생깁니다.


이 등가의 발로로서, 예를 들어 ‘국가정치적’ 태도를 당파 정치적 태도에 대치하는 것, 국가 자체의 종교정책, 학교정책, 지방자치 정책, 사회정책 등의 단어가 사용될 수 있다. 

[홍 : 우선[일차적으로], 1장에서 다룬 정치적인 것과 국가적인 것의 동일시 덕분에. 그 동일시는 예를 들어 ‘국가정책의’ 입장을 정당정치와 대비시킬 수 있게 하고 국가[자체]의 종교정책, 학교정책, 지역[지방]정책, 사회정책 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든다.]


조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만, 아까 이야기했듯이, ‘국가적=정치적’이라면, 국가가 행하는 ‘정치’가 본래의 정치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 내의 여러 당파들은 서로에 대해서, 마치 ‘친구/적’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런 이차적인 ‘정치’에 대해서 본래의 ‘정치’라는 것을 보여주는 형태로, ‘국가정치적 staatspolitisch’이라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책”이라고 되어 있는 곳은, 독일어로는 <-politik>입니다. 영어라면 <policy>로, <politics(정치)>와는 조금 다른 형태가 됩니다만, 독일어라면 ‘정치’도 ‘정책’도 <politik>입니다. 이것에 이유를 붙여 설명하면, ‘국가’가 어떤 영역에서 자신의 의지로 결정한 방침이 ‘정책’이라는 게 됩니다. 그것은 당연히 ‘당파정치적 parteipoitisch’인 주장과는 다릅니다.



‘정치적 결정 die politische Entscheidung’


21頁부터 23頁까지, 이런 ‘정치적’이라는 말의 파생적 의미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23頁의 끝부분에서는 국내의 당파적인 대립도 심화되어 ‘국가’가 ‘정치적인 것’을 독점할 수 없게 되면, 당파 대립이 본래의 의미에서 ‘정치적’인 ‘친구/적’ 대립이 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군요. 그것은 단순한 당파 대립이 아니라 ‘내란(내전) Bürgerkrieg=civil war’입니다. <Civil War>라고 대문자로 쓰면,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영국에서는 ‘청교도혁명’을 의미합니다만, 내란이 극한까지 이르고 국가가 존립의 벼랑 끝에 몰리게 되면, ‘친구/적’ 대립 양상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25頁을 보십시오.


왜냐하면 적이라는 개념에는 투쟁이 현실에서 우발할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 여기서 투쟁이라는 말은, 적이라는 말과 완전히 똑같이, 그 본래의 존재양식의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투쟁이란 경합이 아니며, ‘순수정신적인’ 논의의 싸움이 아니며, 심지어 원래 인생 전체가 ‘싸움’이며, 각자가 모두 ‘전사’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항상 행하는 상징적인 ‘격투’도 아니다. 친구·적·투쟁이라는 관념들이 현실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이것들이 특히, 물리적 도살의 현실적 가능성과 관련되며, 그 관계를 계속 가짐으로써이다. 전쟁은 적대에서 생긴다. 적대란 타자의 존재 자체의 부정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적대의 가장 극단적인 실현에 불과하다. 전쟁은 아무것도 일상적·통상적인 것일 필요는 없으며, 또한 이상적인 것, 바람직한 것이라고 느껴질 필요도 없지만, 그러나 적이라는 개념이 의미를 계속 갖는 한, 전쟁이 현실적 가능성으로서 계속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홍 : 그래서 실제적인 범위에 있는 투쟁[전투]의 발생가능성이 적의 개념에 속한다. … 적이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여기서 투쟁이라는 말은 본성에 합치하는 근원의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투쟁은 경쟁도, 토론에서의 ‘순수하게 정신적인’ 투쟁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실로 인간의 삶 전체가 하나의 ‘투쟁’이며 모든 사람은 각자 ‘투사’이기 때문에 결국 모든 인간이 어쨌든 언제나 수행하는 상징적인 ‘투쟁’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친구, 적, 그리고 투쟁의 개념은 특별히 신체에 대한 살해의 실제적인 가능성과 관련되고 그 관계가 유지된다는 사실을 통해 그 실제적 의미를 보존한다. 전쟁은 적대의 결과인데, 이는 자신의 타자에 대한 존재적인[본성에 적합한] 부정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단지 적대의 가장 극단적으로 실현된 형태일 뿐이다. 전쟁은 어떤 일상적인 것도, 어떤 규범적인 것일 필요도 없으며 또한 어떤 이상적인 것이나 바람직한 어떤 것으로서 느껴질 필요도 없다. 물론 그러나 전쟁은 적의 개념이 그 의미를 갖는 한 상존하는 실제의 가능성으로 남는다.]


여기서 ‘친구/적’과 나란히, ‘투쟁’도 그 본래의 의미에서 취할 필요가 있다고 확인되고 있네요. 단순한 ‘경합 Konkurenz’, ‘논쟁 Diskussion’이라면, 당사자들의 삶의 극히 일부에만 관여하지만, ‘투쟁’에서는 존재 전체가 관련됩니다. 존재의 근원적 차원에까지 미칩니다. 더욱이 그것은 단순히 관념적인, 존재론적 대립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역시, ‘전쟁’인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다만 주의할 필요가 있는 것은, 슈미트는, ‘친구/적’의 근원적인 ‘투쟁’이 극단적인 형태로 현실화된 것이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 ‘전쟁’ 자체를 찬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작가로, 파시즘에 공명한 미래파 시인 마리오네티(1786-1944) 같으면, 최신 무기를 투입하는 현대적인 ‘전쟁’을 미학적으로 파악했습니다만, 슈미트는 그런 것은 말하지 않습니다. ‘친구’와 ‘적’의 ‘투쟁’이 ‘전쟁’에 이를 가능성을 항상 안고 있기에, ‘친구/적’ 관계를 본질로 하는 ‘정치’는 ‘전쟁’을 시야에 넣지 않을 수 없다는 게 슈미트의 주장입니다.


여기서 말한 정치적인 것의 정의는 호전적·군국주의적 또는 제국주의적이지도 않고, 또한 평화주의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심지어, 전쟁에서의 승리나 혁명의 성공을 ‘사회적 이상’으로 내걸려고 하는 시도도 아니다. 왜냐하면 전쟁이든 혁명이든, ‘사회적인 것’도 아니며 ‘이상적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군사적 전투 자체는, 그 자체로서 본다면, 대개 잘못 인용되는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문구처럼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 아니라, 전쟁으로서의, 독자적인 전략적·전술적 그 밖의 규칙이나 관점을 갖는 것이며, 다만 이런 규칙·관점들은 모두, 누가 적인가라는 정치적 결정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전쟁에서는 적들은 대개 공공연하게 적들로서, 보통은 심지어 ‘제복’이라는 표시만 하고서 대립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친구·적의 구별은 이제 싸우는 병사가 (개별적으로) 해결해야 할 정치 문제가 아니다.

[홍 :  여기서 주어진 정치적인 것의 정의는 호전적이지도 군사적이지도 않으며 더구나 제국주의적이거나 평화주의적이지도 않다. 정치적인 것의 정의는 또한 전쟁의 승리나 혁명의 성공을 어떤 "사회적 이상"으로 격상시키려 하지도 않는데, 전쟁이나 혁명은 "사회적인" 어떤 것도 아니며 더구나 "이상적인"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군사적 투쟁 그 자체를 관찰했을 때에는 그것이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구절이 대체로 잘못 인용되는 것처럼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장"은 아니며 전쟁으로서 자신의 고유한 전략적이고 전술적이며 다른 규칙과 관점을 갖는데, 그러나 이들 모두는 적이 누구냐에 관한 정치적 결정이 이미 내려졌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전쟁에서 반대자는 대체로 공개적으로 대립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정상적으로는 더구나 "제복"에 의해 식별된다. 그리고 친구와 적의 구별은 따라서 더 이상 전투 중인 병사가 해결할 정치적 문제가 아니다.]



클라우제비츠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계속이다”라는 클라우제비츠(1780-1831)의 정식은 군사관계의 논의에서 자주 보네요. 보불전쟁 시대의 프로이센 군인으로, 초대 참모총장을 역임한 샤른호스트(1755-1813) 아래서 군정개혁방한을 작성하기도 했고 육군대학교 교장을 역임했습니다. 그의 사후 출판된 󰡔전쟁론󰡕(1833)은 전쟁론의 고전으로서 유명하죠. 폭력의 상호작용이 점점 높아지고, 섬멸에까지 이를 가능성 있는 ‘절대전쟁 absoluter Krieg’과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지리적 요인의 상호작용에 의해 억제되는 ‘현실의 전쟁 wirklicher Krieg’을 구별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현실의 전쟁’은 ‘정치’에 종속되어 있기에, “다른 수단을 통한” 그 계속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전술 Taktik’과 ‘전략 Strategie’의 구별도 그에게서 유래합니다. 『전쟁론』은 엥겔스, 맑스, 레닌(1870-1924)의 ‘전쟁’ 이해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절대전쟁’ 개념은 현대사상계의 텍스트에서도 종종 참조됩니다.



마리네티


말할 것도 없지만,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에 나오는 ‘정치’는 슈미트가 말하는 ‘친구/적’ 관계로서의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거래나 타협, 합의형성 등을 중심으로 하는, 보토의 의미에서의 ‘정치’입니다. ‘절대전쟁’이라면, ‘친구/적’ 관계의 양상을 보입니다만, ‘현실의 전쟁’을 제약하는 것으로서의 ‘정치’는 슈미트가 말하는 ‘친구/적’ 관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하도록 작용합니다.

슈미트더러 말하라 하면, ‘전쟁’은 통상적인 «정치»와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독자적인 규칙이나 관점을 갖추고 있는 셈인데. 그런 양상을 띠는 것은 미리 누가 ‘적’인지에 대한 ‘정치적 결정 die politische Entscheidung’이 이루어지지 때문입니다. 이에 발맞춰서, 제복을 입는 등, 비주얼화하는 것입니다. ‘친구/적’ 결정을 따라, ‘공적(公敵)’으로서 일정한 양식 아래서 대치한다면, 이미 각각의 병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와는 관계없이, 각각의 존재를 건 ‘전쟁’으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치신학󰡕의 주요 테마인 ‘결정=결단’과 ‘친구/적’이 겹치는 셈입니다. 

주 10에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대한 설명이 있네요. 조금 보죠. 


… 전쟁은, 그에게 있어서는, ‘정치의 단순한 도구’이다. 사실 그것 그대로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정치의 본질의 인식에 있어서의 전쟁의 의미는, 여기에서는 전부 다 설명되지 않았다. 이어서 잘 고찰하면, 클라우제비츠에게서 전쟁은 많은 도구 중 하나가 아니며, 친구·적 결속의 ‘마지막 카드’이다. 전쟁은 그 자신의 ‘문법’(즉 군사적·기술적 특수법칙)을 갖지만, 그 ‘두뇌’는 여전히 정치인 것이며, 전쟁 ‘독자적인 논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전쟁은 그 논리를, 친구·적이라는 개념으로부터만 획득할 수 있는 것이지, 이 모든 정치적인 것의 핵심을 밝히는 것이 141 페이지의 문장이다. ‘전쟁이 정치에 속할 경우에는 전쟁은 정치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정치가 대규모가 되고 강력해진다면 금세 전쟁도 그렇게 되는 셈이며, 이것이 심해져서 전쟁이 절대적 형태에 도달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 

[홍 : 전쟁은 그에게는 ‘정치의 단순한 [하나의] 도구’이다. 전쟁은 물론 또한 그렇지만 그러나 정치의 본질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의 그 의미는 여전히 전부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자세히 관찰했을 때 클라우제비츠에게서의 전쟁은 가령 수많은 도구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친구와 적의 결집에 있어서의 ‘최후의 방편(ultima ratio)’이다. 전쟁은 자신의 고유한 ‘문법’(즉 군사기술 상의 특수한 규칙성)을 갖지만 정치는 그것의 ‘두뇌’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며 그 자체로는 ‘고유한 논리’를 갖지는 않는다. 전쟁은 즉 단지 친구와 적의 개념으로부터 이[고유한 논리]를 획득할 수 있으며 다음의 문장은 정치적인 모든 것의 이 핵심을 드러낸다. ‘전쟁은 정치에 속하며, 그래서 전쟁은 정치의 성격을 받아들일 것이다. 정치가 거대하고 강해질수록 전쟁 또한 그렇게 되며 그것은 전쟁이 그 절대적인 상태에 이르는 높이까지 상승할 수 있다.’]


요점을 잡기 어려운 문장입니다만, 요체는 슈미트가 “전쟁이란 다른 수단을 통한 정치의 계속이다”라는 클라우제비츠의 정식을, «깊은» 의미로 해석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아까 얘기 했듯이, 클라우제비츠가 말하는 ‘정치’는, 보통 이해하면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정치’인데, 그 ‘정치’를 슈미트가 말하는 ‘정치적인 것’으로 치환하면, 정식을 슈미트 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친구/적’ 대립의 형태를 취하는 ‘정치적인 것’이 ‘전쟁’이라는 형태로 계속한다고 클라우제비츠가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슈미트 자신의 주장과 그렇게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다만 슈미트 편에서 보면, 그래도 애매함이 남습니다. 그에게 ‘전쟁’은 ‘정치적인 것’의 단순한 계속이나 도구가 아니라 ‘마지막 카드[비장의 무기] ultima ratio’입니다. 슈미트는 ‘전쟁’의 독자적인 ‘문법’, ‘논리’는 ‘친구/적’ 관계의 ‘카드’라는 것에서 유래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전쟁’과 ‘정치적인 것’의 상관관계에 대한 슈미트의 시각과, 『전쟁론』 속의 “전쟁이 정치에 속하는 경우에는 전쟁은 …”이라는 대목에서 표현되고 있는 클라우제비츠의 시각이 일치하고 있다. 적어도, 슈미트는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확실히, “정치적 대립”이 전쟁을 수반한 형태로 급상승함에 따라 ‘절대전쟁’에까지 이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이 책에서 슈미트가 주장하는 것에 상당히 가깝네요.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클라우제비츠





그렇다고 해서 친구·적의 구별이라는 표식은 특정한 한 국민이, 영원히 다른 특정한 한 국민의 친구 또는 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든가, 혹은 중립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며, 또는 정치적으로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는 것 등을 의미하는 게 결코 아니다. 다만 중립이라는 개념은 정치적인 개념이 바로 그렇듯이, 이것도 또한 친구·적 결속의 현실적 가능성이라는 궁극적인 전제 아래 성립되는 것이며, 오로지 지구가 중립적일 뿐이게 된다면 그때에는 따라서, 전쟁뿐만 아니라 중립 자체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은 원래 투쟁이라는 것의 현실적 가능성이 소멸할 경우, 투쟁 회피의 정책도 포함해, 그 어떤 정치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과 아주 똑같다. 


[홍 : 따라서 친구와 적에 대한 결정의 기준(Kriterium)은 또한 결코 어떤 한 국민이 다른 어떤 국민과 영원히 친구이거나 적이어야만 한다거나 어떤 중립성도 가능하지 않고, 혹은 그것이 정치적으로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직 중립성의 개념은 모든 다른 정치적 개념처럼 마찬가지로 친구와 적의 결집의 실제적 가능성의 이 궁극적인 전제 하에 있으며 지구상에서 오직 중립성만이 존재한다면 그 때문에 전쟁뿐만 아니라 중립성 자체도 사라지게 될 텐데, 이는 투쟁의 실제 가능성이 정말로 사라진다면 모든 정치, 그 중에서도 투쟁을 회피하는 정치가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전쟁을 둘러싼 현대의 철학적 논의에서도 종종 듣는 얘기네요. ‘중립 Neutralität’이라는 개념은 ‘친구/적’ 대립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국제관계에서의 ‘중립국’이란 전쟁이 있는 경우, 어느 쪽에도, 적어도 적극적으로는 편들지 않는다는 것이니까, 전쟁의 가능성이 없으면 무의미한 개념입니다. 전쟁의 가능성과 중립을 유지할 가능성은 논리적으로는 표리일체의 관계에 있다. 전 세계의 모든 나라나 지역이 항상적으로 전면 «중립»이 된다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어디에도 ‘친구’와 ‘적’의 관계가 없는, 따라서 ‘정치적’이라고 형언되는 사태가 소멸한 세계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친구/적’ 관계가 현실적으로 생길 가능성이 있는 한, ‘정치’라는 행위는 계속되는 것입니다.



‘인류의 최종 궁극 전쟁 der endgültig letzte Krieg der Menschheit’


30頁에 들어가면, 『정치신학』의 메인 테마였던 ‘예외상태’와 ‘투쟁’의 관계가 논의되고 있습니다. 


이 사태가 단지 예외적으로 생긴다는 것은 그 규정적 성격을 지우는 게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확증하는 것이다. 전쟁이, 오늘날에도 이미 예전만큼 많이, 또 일상적이지 않더라도, 전쟁은 수적 빈도나 일상성이라는 점에서 감소한 것과 같은 정도로, 아니 아마도 그것을 훌쩍 뛰어넘어, 압도적·전체적인 무게를 늘리고 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쟁이라는 사태는 ‘위급사태’이다. 이 경우에도 기타의 경우에도, 예외적 사태야말로 특히 결정적인 사태의 핵심을 분명히 하는 의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현실의 투쟁에서야말로 친구·적이라는 정치적 결속의 궁극적 귀결이 노정되기 때문이다. 이 궁극적인 가능성으로부터 인간생활은 특출나게 정치적인 긴장을 획득하는 것이다.

[홍 : 이와 같은 상황이 단지 예외적으로만 일어난다는 사실은 그런 상황의 규정적 성격을 지양하지 않고 규정적 성격을 뒷받침한다. 전쟁이 오늘날 예전과 같이 더 이상 그렇게 자주 일상적으로 일어나지 않더라도, 전쟁은 숫자상으로는 빈도와 일상성을 줄어든 만큼의, 혹은 유사한 정도에서 압도적인 총체적 압박을 증가시켰다. 또한 오늘날 여전히 전쟁의 경우는 "극단적 경우[위급상황]"에 해당한다. 여기서 바로 예외적 상황이란 특히 결정적이면서 또한 사물의 핵심을 드러내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비로소 친구와 적의 정치적 결집의 극단적 결과가 실제 투쟁에서 명백해진다. 이와 같은 극단적 가능성이라는 측면으로부터 인간 삶은 그것의 특정한 정치적 긴장을 획득한다.]


이 사태라는 것은 문맥에서 보면 ‘전쟁’을 가리킵니다. “그 규정적 성격 sein bestimmender Charakter”이란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규정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잠시 뒤에, “예외적 사태야말로 특히 결정적인 사태의 핵심을 분명히 하는 의의를 가진다”라는 문장이, 이를 바꿔 말한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결정적인 entscheidend”이라는 현재분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보통 생각하면, ‘친구/적’ 관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실제로 ‘전쟁’으로 통하는 것이 ‘예외적 ausnahmeweise’이라고 한다면, ‘전쟁’이 ‘친구/적’=‘정치적인 것’의 본질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거죠. ‘전쟁’은 ‘정치적인 것’의 ‘궁극적 귀결 die äußerste Konsequenz’이기에,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것은 않지만, ‘궁극적 귀결’이기 때문에, 그 본질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äußerst>란 원래 ‘바깥’이란 뜻의 형용사 <äußer>의 최상급으로, “극도의”라든가 “극한적인”이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것은 ‘예외상태’의 ‘결정’을 통해서, ‘주권’의 본질이 노출된다는 󰡔정치신학』의 논리와 평행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네요. 일상적인 ‘정치’에는 그 정도의 긴장감은 없기에, ‘친구/적’ 관계를 별로 의식하지 않고, “정치는 타협이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궁극적 귀결’로서의 ‘전쟁’의 가능성을 의식했을 때, ‘정치적인 것’의 ‘본질’이 보입니다. 

32頁에, 국제정치와 관련된 얘기가 나오는데, 봐두죠. 


무엇이든, 정치적인 것의 이 귀결을 피할 수 없다. 오히려 전쟁에 대한 평화주의적 반대가 강력해지며, 그 때문에 평화주의자들이 비평화주의자를 상대로, 전쟁에,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을 내걸 수 있을 정도가 될 수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을 친구·적에게 결속시키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기 때문에, 현실에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것에 의해 증명될 것이다.

[홍 : 그 어떤 것도 정치적인 것의 이와 같은 결과를 피할 수 없다. 전쟁에 대한 평화주의자의 적대가 너무나 강해져서 그것이 비-평화주의자에 적대적인 평화주의자들을 전쟁으로 몰아간다고 할 때, "전쟁에 대한 전쟁"에서 적대는 진정으로 정치적인 힘을 갖게 된다는 것, 왜냐하면 그 적대는 인류를 친구와 적으로 결집시킬 정도로 충분히 강하기 때문인데, 그것[전쟁에 대한 전쟁]을 가지고 이러한 사실이 입증되었을 것이다.]


말투는 다소 어렵지만, 현대사상의 이항대립 비판의 문맥에서 자주 듣는 얘기네요. ‘반전·평화’ 운동이 거세지면, 점차 ‘전쟁’에서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만, ‘반전·평화’ 운동의 사람들 사이에서 «전쟁 세력»에 대한 증오가 거세지면, 점차 ‘친구/적’과 같은 양상을 띠게 됩니다. 지금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지만, 예전이라면 평화운동을 하는 좌파가 국가권력이나 우익에 대한 증오를 끌어 모아, 폭력투쟁을 벌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을 건 투쟁으로까지 발전한다. 미국의 낙태 논쟁에서 ‘생명의 존엄’의 관점에서 낙태에 반대하는 생명옹호(pro-life)파의 과격분자가 프로-초이스(pro-choice, 낙태권옹호)파에 대해 테러를 벌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평화나 생명을 위협하는 세력에 대한 반대 행동이 스스로 평화나 생명을 위협한다는 역설입니다. 여담입니다만, “대립을 부추기는 듯한 소리만 하고 있는 나카마사 같은 놈은 언론인의 자격이 없다. 그런 패거리를 용서해서는 안 된다” 등이라고 중얼거리는 무리는 대화세력이라고나 할까?(웃음)

국제관계라면, 평화를 위협하는 세력을 억제하려는 세력에 의해서,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불량국가 rogue state”에 대한 미국의 «경찰» 행동이 그것에 해당되는지도 모릅니다. 예전에 그런 논의가 활발했습니다. 그런, “전쟁에 반대하는 전쟁”을 벌이는 미국에 반발하는 국가나 집단이 구체적 행동에 나서면, 또한 대립이 급격해지게 되는 셈입니다.

슈미트는 베르사유 체제와 국제연맹의 평화 전략을 염두에 두고, 이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1차 대전의 승전국인 영국, 미국, 프랑스는 전쟁세력인 독일을 철저히 억압하고, 약소국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것은 전쟁세력에 대한 적의나 다름없다. 반면 독일인들도 적의를 품는다. 그것이 전쟁으로 연결될지도 모른다. 실제로 다음번에 읽을 예정인 후반부에서는 그런 리얼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슈미트 편에서 보면, «전쟁세력»에 대항하고, ‘친구’로 결속하고 있는 영국·미국·프랑스 등의 태도야말로 국제정치에 있어서의 ‘친구/적’ 관계의 예증인 셈입니다. 


현재에서는, 이것이 특히 유망한 전쟁 시인(是認)의 방법인 것처럼 보인다. 전쟁은 그 경우, 그럴 때마다, “인류의 최종 궁극 전쟁”이라는 형태로 전개된다. 

[홍 : 그것은 전쟁에 대한 정당화의 특히 희망에 가득 찬[가능성이 높은] 방식인 것처럼 보인다. 그 전쟁은 그래서 그때마다 "인류의 궁극적인 최후의 전쟁"이라는 형태로 발발할 것이다.]


이것은 아이러니하군요. 부전(不戰) 조약이 있기에, 노골적으로 ‘전쟁’을 벌일 수는 없다. 그러나 “전쟁을 없애기 위한 전쟁”,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고 말하면, 훌륭한 대의명분이 된다. “인류의 최종 궁극 전쟁 der endgültig letzte Krieg der Menschheit”이라는 것은 멋진 말투네요. 예전의 애니메이션이나 영웅 드라마에서는 이런 대사가 자주 사용되었죠. 지금은 오히려 악역의 대사가 되어 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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