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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_번역작업

[가게모토 츠요시] 독일혁명의 패배의 깊이로

독일혁명의 패배의 깊이로

이케다 히로시, <독일 혁명 – 제국의 붕괴에서 히틀러의 등장까지>, 현대서관, 2018, 384쪽, 3000엔+세금.

원서정보: 池田浩士, 『ドイツ革命―帝国の崩壊からヒトラーの登場まで』, 現代書館, 2018

http://www.gendaishokan.co.jp/goods/ISBN978-4-7684-5846-4.htm




가게모토 츠요시






1. 2018년에 출판된 <독일혁명>


  올해 2019년, 3.1운동 100주년의 여러 기획들이 있을 것이라 쉽게 예상된다. 그리고 재작년인 2017년, 러시아 혁명 100주년 행사가 여러 곳에서 개최되었다. 그것들은 사후적으로 성공한 혁명이자 민중운동으로 재평가되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면 작년 2018년에 100주년을 맞은 독일혁명은 어떠했는가? 그리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 같다. 왜일까? 실패한 혁명이었기 때문인가? 그런데 우리가 진정으로 어떠한 것을 우리 삶의 양식으로 배울 수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실패한 혁명에서가 아닐까? 2018년에 출판된 이 책은 입문서로 읽을 수 있게 역사적 기본 사실을 보여주는 서술형식을 취하면서 동시에 어떠한 패배였는지를 세세히 알려준다. 그 현장에 살았던 사람들이 보이지 못했던 것을 보여주며 나중에 도래한 자이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것들을 이 책은 보여준다. 그것은 역사를 알고 나서 과거의 잘못을 지탄하는 식의 관점이 아니라 어떻게 현재 실천 속에서 그 패배를 배울 수 있는가 하는 관점이다. 굳이 역사서술을 다시 꼼꼼하게 할 필요가 없어 보이기에 이 책이 특히 밀고나가는 부분(패배과정에서 비로소 보이게 되는 것들)을 중심으로 소개해보겠다.


  필자 이케다 히로시는 루카치 연구에서 시작해 나치스 문화에 대해 수많은 연구를 해왔다. 또한 일본의 아시아 침략에 대해서도 문화적 측면에서 논의를 해왔으며 단지 학술적인 장에 머물지 않고 천황제나 하층노동자 문제, 정치와 예술의 관계 등에 대해 수많은 책을 썼다. 그런데 이외로 한국어 번역이 없다. (그런데 참고로 말하면 그의 <저항자들 – 반나치스운동의 기록>이라는 책이 <불멸의 저항자>(명지출판사, 1990)라는 제목으로 서석연이라는 사람의 저서로서(번역서가 아니라!) 출판된 바 있다. 이케다 히로시의 후기까지 마치 서석연이 쓴 것처럼 꾸민 근년에 와서는 보기 드문 100% 해적판인데, 혹시 관심이 있으신 분이 계시면 읽어보세요. 아래 사진 참조)



서석연의 ‘저서’ <불명의 저항자>의 표지와 판권장. 



중요한 책으로는 <루카치와 이 시대>, <어둠의 문화사 – 몽타주 1920년대>, <사형의 쇼와사>, <문화의 얼굴을 한 천황제>, <해외‘진출’문학론>, <히노 아시헤이론>, <석탄의 문학사> 등이 다수 있다. 임펙트 출판회에서 <이케다 히로시 콜렉션>이 간행중이며 루카치, 에른스트 블로흐의 일본어 번역자이기도 하다. 




2. 어떤 문화적 저항

 

  1919년 5월2일, 바이에른 공화국이 타도되어 독일사회민주당(SPD)정권이 복귀하자 레트 마르트(Ret Marut)라는 작가가 ‘반역죄의 수모’라는 혐의로 수배되었다. 그리고 그는 결석재판에서 사형이 선거되었다. 그는 <벽돌을 굽는 사람>(Der Ziegelbrenner)이라는 잡지를 간행했었다. 그의 주장은 공산당과는 달리 철저하게 개인주의에 입각하려는 것이었다. 어떠한 조직에도 소속되지 않고 인간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이 되지 않겠다는 사상이다. 그는 그것을 근거로 한 저항자였다. 사형선고 후 어디선가 <벽돌을 굽는 사람>이 예약구독자에게 배송되었다. 거기에는 살해당한 랑다우어(Gustav Landauer)에 대한 추모, 그리고 다시 간행을 계속하겠다는 선언과 “국가, 정부, 나, 이 3 자 중에서 내가 가장 강하다. 너희들, 이를 잘 기억해둬라!”(237)라고 적혀 있었다. 그 후, 1926년, SPD의 기관지에 멕시코에 사는 토라벤(Traven)이라는 사람의 소설이 연재되기 시작했다. 마르트의 새로운 소설로 추정되는 <사자(死者)들의 배>(Das Totenschiff)였다. 나중에 나치스는 바이마르 시대의 베스트셀러 작가 토라벤의 저작을 분서했으며, 발매금지시켰다. 그의 소설 중에는 <백장미>(Der weiße Rose)가 있었다. 나중에 나치스에 대한 저항 때문에 사형당한 숄(Scholl) 형제는 그 이름을 스스로의 이름으로 따왔다. 토라벤의 소설들은 1971년이 돼서야 동독일의 연구자 렉나겔(Rolf Recknagel)에 의해 마르트의 작품이라 실증되었다.  




3. 봉기의 탄압과 군사력 속에서의 바이마르 헌법


  SPD는 1918년 1월에는 ‘의용군’ 부대를 만들었다. 거기에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베를린에 체류하던 1차 대전의 군인들이 참여했다. 실업상태였던 직업군인은 실업자가 되지 않았다. 그 때는 아직 베를린에서 공산당을 탄압하는 시가전이 벌어지는 중이었다. 공산당의 이들에게는 “혁명을 전멸하기 위해 자신 앞에 서 있는 자들이 구제국의 군대가 아니라, 자유의지에 의해, 자발적으로, 반혁명군 병사를 지원했던 의용병이라는 용병이었음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180-1쪽) 그리고 의용병들의 활동장소는 단지 독일 국내에 머물지 않아 러시아혁명 간섭전쟁에 참여하기도 한 것이다(282). 의용병들은 만연하던 실업 상황 속에서 지원을 했다. 러시아의 지주들은 독일 지원병들을 환영했다. 지주들은 “소비에트 정권이 붕괴한 새벽에는 토지를 무료로 제공할 테니 여기에 입식해서 농업경영으로 생활하라고 약속하는 이도 있었다. 이 소문은 순식간에 독일 본토의 의용병들에게 전달되었다”(284). “이제야 전쟁의 폭력에서 해방될 터인 젊은이들을, 게다가 자유의지의 이름 아래에 자발적으로 그러한 폭력장치의 말단으로 이용한 정치인들 – 즉 베른슈타인에게 예찬된 ‘사회민주당의 권위 있는 지도자들’ - 의 정략은 독일혁명의 모든 시기를 통해 가장 부끄러워야 할 사건 중의 하나”(286)이다. 의용군들 중에는 나중에 육군 및 해군에 들어간 이도 있었지만 많은 대원들은 무장집단에 적을 옮겼다. 그 중 최대의 것은 국민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당)의 군사 조직 ‘돌격대(Sturmabteilung=SA)’였다.


  1차 대전 중 여성들은 사회진출을 했다. 그러나 전장에서 복원한 남성들을 원래 직장으로 복귀시키기 위해 많은 여성이 대량으로 해고되었다. 여성노동자의 수도 전전 수준에 회귀한 것이다. 또한 레테(평의회)의 대의원이 된 여성이 매우 적었다.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은 여성의 레테참여를 주장했지만 그것이 깊이 검토될 일은 없었다(336). 

  SPD는 마지막 레테(평의회)공화국인 바이에른을 군사력으로 분쇄한 후, 그러한 탄압을 통해 “독일 역사상 가장 민주주의적이라 불리는 헌법을 가지는”(198) 바이마르 공화국을 탄생시켰다. 바이마르 헌법은 독일 역사상 처음으로 기본적 인권, 그리고 국가에 의한 인간의 등급 매기기인 훈장을 금지했다. 그러나 이들 인권개념들은 바이마르 헌법에서 처음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라 “그 70년 전의 혁명에서 이미 소리를 지르던 것이었다. 1918년11월에 시작한 독일혁명은 드디어 현실적으로 군주제를 타파함으로 이 소리에 육체를 준 것이다.”(207) 그것은 1848년의 3월 혁명의 주체들이 군주제를 불가침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실현되지 않았던 헌법안의 1/3을 기본적 인권에 할애했다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208-9). 그런데 이는 반대로 말하면 “의심할 나위 없이 ‘11월 혁명’의 성과인 바이마르 헌법이 명문화한 민주주의적인 자유와 인권은 70년 전의 시민(부르주아)혁명의 이상일 수밖에 없었다”(212)는 것이다. “이들 두 헌법에는 그것을 탄생시킨 두 혁명이 깊이 새겨져 있다. 이 각인은 눈부신 성과를 이야기하는 것만이 아니다. 혁명의 좌절이나 불철저함, 혹은 비참함까지도 거기에는 각인되고 있는 것이다.”(212)


  SPD의 일부를 포함해 바이마르 헌법의 제정자들은, 바이에른 공화국을 탄압하기 위해 쓰던 사형을 ‘범죄억지력’으로 폐지하려고 하지 않았다. 1919년 8월14일에 공포 및 시행된 바이마르 헌법이 사형폐지를 실현시키지 못했다는 것은 나중에 히틀러가 이 헌법에서 최대의 예외적 조항인 ‘대통령 긴급명령’을 사용할 때 사형이 큰 위력을 발휘했다는 점에서도 그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 사형폐지는 3월 혁명의 헌법안에도 명기된 일이었는데 바이마르 헌법은 거기부터도 후퇴한 것이다(217).

  



4. 그 후 – 나치스까지


  독일패전 후 독일의 천문학적 배상을 명기한 베르사유 조약(1919년 6월)에 대한 반발이 혁명 이후 계속 이어졌다. 배상금은 국가예산 51배가 되는 거액이었다. 게다가 이를 42년 내로 지불해야 했었다. 힌덴부르크 장군은 독일은 뒤에서 빨갱이인 유태인들이 배신했기 때문에 패배했다고 말했다. 군인들이 1918년의 11월의 배신자들로 지목한 자들은 사회주의공화국이나 레테공화국을 지향한 스파르타크스단을 비롯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멸시킨 SPD의 간부나 활동가까지도 포함시켰다. 의용병들은 프랑스가 루르(Ruhr)지역을 점령하자 그것을 계기로 다시 전쟁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고 바이마르체제를 타도할 수 있겠다고 기대했다.(316) 


  한편 코민테른의 ‘일국일지부’ 원칙으로 인해 새롭게 생긴 통일독일공산당은 독일공산당과 사회민주당 좌파인 독일독립사회민주당이 합당해서 1920년 12월에 결성되었다. 1921년 2월, 독일 중부에서 일어난 파업은 이에 대한 치안당국의 탄압에 의해 패배했다. 이에 대해 통일독일공산당은 공산당의 지도를 받지 않았던 노동자들의 패배를 당연한 것으로 지적했다. 여기에는 레테(평의회) 시절에는 존재하던 아래로부터의 참여하는 관점은 없었다. “독일혁명은 근현대의 여러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정당이 민중에 의한 혁명에 적대하는 존재임을 실증했다.”(302) 혁명의 종연 이후, 마르크스주의 연구를 모색한 이들이 만든 것이 프랑크푸르트대학의 사회연구소였다.


  이 책 마지막의 글은 다음과 같다. “독일혁명 중에서 자유와 자치와 공생의 꿈을 현실로 할 기회를 잃고, 생각과 의지와 행동을 함께 모색하며 실천하는 장을 잃어버린 주권자는, 선거권을 행사한다는 의회민주주의의 주권만을 얻었다. 일상의 현실이 절망적인 것이 되면 될수록 결단력과 실행력을 보란 듯 보여주거나 그것으로 인기를 얻으려 하는 강한 정치인에 모든 것을 맡기며, 함께 생각하고 의지하며 행동한다는 것에서 자기 스스로 더욱더 멀어진 것이다.”(341)  


  혁명의 힘을 고정화하려는 ‘당’이라는 문제, 그리고 사후적으로 얻게 된 민주주의가 역사적으로 바라볼 때 어떻게 그 내실이 달라진 것인지, 여러 의미를 묻게 하는 책이다. 당연히 한국사에서의 비슷한 물음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그 시도는 여전히 군주제를 지키고 있으며 여전히 재생산하고 있는 일본에서 발행된 이 책에서 어떠한 아이디아를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