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뷰_문학.예술

[풍문으로 들은 시] 어찌할 바 모르겠으니 서둘러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 이순영, <학원가기 싫은 날>(2015)


어찌할 바 모르겠으니 서둘러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 이순영, <학원가기 싫은 날>(2015) -




이 종 현 / 수유너머N 회원





정말 풍문으로 들은 시가 한 편 있다. 시집의 표지는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사진으로 보았다. 시가 적혀 있는 쪽의 삽화도 어느 블로그에서 보았지만 화질이 좋지 않았다. 부산 교보문고에 한 권 남아 있길래 간신히 구할 수 있겠다 싶었지만 그마저도 배송 과정 중에 누군가에게 빼앗겼다. 원래 시는 손에 착 들어오는 사이즈의 시집을 조물락거리며 누워서 읽는다. 싫증나면 내던졌다가 한참이 지나 접어둔 곳부터 다시 읽는다그런데 이번에 풍문으로 들은 시는 그 시의 물리적 실재를 만져보지도 못하고 인터넷에 떠도는 글들을 통해 읽게 되었다. 스탈린주의가 한창이던 소련에서 시인이 숙청당해 시집이 모조리 금서 조치되면 가족과 친구들이 그의 시를 평생 외웠다가 후손들에게 귓속말로 전해 주기도 했다. 후손들은 소련 붕괴 이후에야 귀로 들은 시들을 출판할 수 있었다. 우리는 자유로운 인터넷 덕분에 시를 외우지 않아도 되어 행복하다. 발 빠른 문학의 수호자들이 손수 시집을 사진 찍고 시들을 타자로 적어주어서 행복하다. 다음은 이순영 시인의 <학원가기 싫은 날>의 전문이다.








풍문으로 돌아다닌 지 오래된 시라 한마디 얹는 것이 뒷북 같긴 하다. 그런데 얼마 전 어느 방송사에서 시인과 그의 엄마를 인터뷰했다. 시인은 마침 그날따라 학원을 죽도록 가기 싫었다고 한다. 그날은 학원을 여러 개 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딱 하나 갔어야 했다고 한다. 왕년에 학원 좀 다녀 보고 지긋지긋한 학습지들을 풀기 싫어 모조리 태워본 경험이 있는 선배로서 시인의 말에 공감이 간다. 그러나 고어물과 호러물을 즐겨보지 않으니 시인이 표현하고 있는 분노의 방식에는 공감이 가지 않는다. 학원에 가기 싫고 학습지를 풀기도 싫지만 엄마를 먹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화가 나도 맛 없는 것을 먹고 싶지는 않다. 화가 나면 돈까스와 탕수육을 먹을 것이다.


이 시는 여러모로 공감 받기 어렵다. 시의 전언을 오롯이 받아들이려면 우선 학원 가기 싫음을 경험해 보아야 하고, 하필 그런 날 엄마를 먹고 싶어야하며, 하필 많은 부위 중에서 눈깔을 좋아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맛 좋은 심장은 마지막에 먹을 줄 아는 자제력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식인종은 이 시를 보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아니 왜 가장 맛있는 허벅살을 남겨두는 거지? 왜 고기에게 고통을 주려고 하는 거지? 식인종은 학원을 다녀보지 않아서 시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시를 마주했을 때의 당혹감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우선 첫 번째 반응은 이렇게 잔혹한 시를 쓴 시인의 다른 시들은 정말 탁월하므로 시 한편에 연연할 것 없다는 것이다. 특히 <솔로강아지>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 강아지가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다 / 외로움이 납작하다에는 많은 찬사가 주어졌다. 훌륭하고 기발한 다른 시들도 많으니 <학원가기 싫은 날>은 하나의 일탈, 그러니까 시집의 유기적 구성에 삽입한 작은 파격이 되는 셈이다.


이와는 다르게 이 시의 내재적 비평을 시도한 입장들도 눈에 띈다.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때라는 화제를 제시하고 이렇게라는 말을 던져놓은 뒤 여백을 주어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2연에는 엄마라는 충격적인 고기덩어리가 등장하고 그녀(?)의 부위들이 열거된다. 작은 부위인 눈깔과 이빨부터 시작해서 좀 더 큰 머리채, 그리고 몸통의 중심인 심장으로 시상이 전개된다.  이것이 바로 점층법이다. 이 점층법에 하나의 반전이 있다면 눈깔을 파먹었는데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심장을 왜 마지막에 먹는지에 대한 이유를 2연에서는 감추었다가 3연에 가서 마지막 한 방을 날린다. “가장 고통스럽게”. 시의 교묘한 전개에 대해 혹자는 작위적이어서 좋은 시가 아니라는 평을 내놓기도 했다. 시는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이다.


두 반응들은 시집의 짜임새에 대한 시인의 고뇌, 모국어의 숨결과 떨림에 연관된 것이다. 한편, 사회적 비평들도 SNS에 심심치 않게 보인다. 사회적 비평은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이렇게 잔혹한 시는 결코 동시라고 할 수 없다는 보수적인 문학관에 아동이 왜 순수해야만 하냐순진무구한 아동이라는 관념이 생긴 근대적 연원을 제시한다. ‘아동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해체를 지향하는 입장은 아동이란 무릇 장식 없는 날것의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는 시학적 비평에도 비판을 가한다.


두 번째 사회적 비평은 언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우리 아이들이 이런 시를 쓴 것은 사회가 학원 때문에 병들었다는 증상이므로 잘 하자!’이다. 이런 입장은 사회의 반영물로서의 문학이라는 다소 고루한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시의 끔찍한 내용을 회초리 삼아 자신의 종아리를 때리며 일일우일신을 다짐한다.

 

이 밖에도 더욱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한다. 이렇게 잔인한 시와 삽화를 보면 아동들이 정신적 충격을 받는다, 상업 출판이 윤리적인 책임이나 사회적 반향을 고려하지 않았다 등등. , 이 시는 역시 시인인 시인의 어머니가 대신 써준 것으로 아이를 영재로 내세워 한탕 해 보려는 것이다, 아니다! 어머니 시인이 시를 대필했다는 문헌학적 증거를 대어 보아라 등등.


이 시는 분명 당혹감을 준다. 당혹감은 무슨 일을 당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감정이다. 그런 당혹감에 단련되어 이 시를 결코 당혹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을 사람들도 있겠다. 그런데 적어도 앞에서 열거한 네 가지 반응들은 당혹감에서 비롯된 듯 하다. 이 시를 읽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재빨리 그 당혹감을 막을 도구들을 찾는다. 아니야, 시집에는 이 시 말고도 좋은 시들이 많으니 시인은 비난 받아서는 안 돼. 아니야, 시는 로 읽어야 하니 이 시의 내용이 아니라 표현방식이 비평되어야 해. 아니야, 아동도 발명된 개념이고 동시도 그러한 개념이니 어린이도 이런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에 야단부리지 말자. 아니야, 이런 시는 사회가 병들었다는 것이니 반성하자


이 네 개의 아니야가 부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무슨 일을 당하여 어찌할 바를 모름아닐까?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것의 부정은 어찌할 바를 안다는 것’, 즉 즉시 어떤 범주와 개념적 도구를 활용해 이 시가 일으킨 효과들을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재빨리 연장들을 챙겨 모름의 구멍을 막고 그 구멍이 잘 막혔는지, 아니면 다른 연장으로 막아야 하는 것인지 활발히 토론되다가 그 구멍은 어느새 잊혀지고 말았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를 읽고 거기서 생긴 당혹감의 진상을 알게되었으며 매끈하게 그 구멍을 메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 왜 시를 알아야하는 것일까? 그 시를 알아내서 소지하기 편한 형태로 갖고 싶기 때문일까? 시를 알아내 버려야겠다는 욕망은 시가 무엇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시를 읽었는데 도대체 그것이 불러일으킨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더럽고 잔인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렇게만 말하는 것은 시로부터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니 시에서 진한 기름을 뽑아 올릴 시추기계를 찾아보자.







시는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지 않으며 다만 무엇을 남겨놓는다. 시는 이렇게 말한다. “, 여기 내가 있다!” 그리고 시를 읽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래, 나는 너에게서 훌륭하거나 미숙한 표현들을 찾아 등급표를 붙이겠어!” “그래, 나는 너에게서 이데올로기가 작용한 흔적을 찾겠어!” “그래, 나는 너에게서 사회의 문제를 찾겠어!” “그래, 나는 너에게서 시집의 구성을 찾겠어!” 시가 남긴 것은 시에 대한 욕망들이다. 시가 남기며 허용한 것은 자신을 갖가지 방식으로 난도질하게 만든 당혹감이다. 시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을 남기고 떠난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을 그대로 남겨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어떻게 해서든 죽은 것은 살려야 하고, 비어 있는 것은 채워야 한다. 이순영 시인의 <학원 가기 싫은 날>이 남긴 것도 이러한 당혹감, 그리고 당혹감을 메우려는 시도들 아닐까? 가장 맛있는 말의 속살을 음미하고자 시를 씹었으나 아무런 맛이 없거나 토할 정도의 끔찍한 맛일 때, 그것이 왜 그러한 맛이 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분석, 또는 그 맛은 사실 일미라는 합리화 등등 말이다.


정치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는 <세계적 문화?>라는 글에서 근대 부르주아 예술을 벗어나는 새로운 예술의 특징 세 가지를 꼽는다. 첫째, 영원하지 않을 것, 둘째, 보편적이지 않을 것, 셋째, 명증하지 않을 것.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시대가 지나도 변치 않는 가치란 없다는 것이고,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즐길 수 없다는 것이고, 명증하지 않다는 것은 작품의 핵심이 아니라 주변적인 지식들이 총동원되어 작품의 흔적들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순영 시인의 시가 남기고 간 자리에는 시의 살코기를 먹겠다는 앎에 대한 욕망의 흔적들이 남았다. 요 몇 년 사이 이렇게 강렬한 흔적을 남긴 시가 있을까? 이렇게 많은 사람이 공감하기 어렵지만, 즉 보편적이지 않지만 유적지의 벽에 낙서를 하듯 모두들 달려들어 세세한 지식들을 얹었던 시가 있을까? 그리고 영원한 명작으로 남지 않고 그 지식들의 흔적만 남긴 채 홀연히 정보의 홍수 속에 가라 앉은 시가 있을까? 모두들 시의 유혹에 넘어가 달려든 바람에 이 시는 예기치 않게 영원성과 보편성, 그리고 명증성을 폐기하는 사례가 되었다. 


열살 소녀가 학원 가기 싫어서 쓴 잔혹한 시는 잘 쓴 시라고 말하기도,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올바른 시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다만 모두가 각자의 연장을 들고 달려들어 시가 만들어 놓은 구멍을 메우고는 홀연히 다시 떠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신기한 시다. 시를 쓰는 주체에게 기대되지 않는 시를 내놓고, 아니 허용되지 않는 시를 내놓고 이러저러한 당혹감을 남겨놓는 잘 쓰지 못한신기한 시들이 종종 세상에 나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