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뷰_철학.사회

에피쿠로스에게 배우는 쾌락의 기술 <쾌락>

에피쿠로스에게 배우는 쾌락의 기술

에피쿠로스, 『쾌락』(오유석 옮김, 문학과지성사)






                                                             이미라/수유너머N 회원





‘쾌락’과 ‘맑스’. 이 두 단어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다. ‘쾌락’하면? 즐거움, 욕망 등이 떠오른다. 심지어 ‘뽕 먹고 해롱대는 모습’도 상상된다. 반면 ‘맑스’하면? 고난과 투쟁, 금욕, 혁명 등, 쾌락이 주는 표상과는 전혀 반대의 것들이 떠올려진다. 그런데 이 두 단어가 만난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쾌락주의자 에피쿠로스와 유물론자 맑스가 만난다.


둘의 만남을 기획한 것은 맑스였다. 맑스는 어째서 투쟁하는 혁명가와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에피쿠로스를 친구로 맞이한 것일까? 내가 에피쿠로스의 『쾌락』을 읽게 맨 처음 이유는 이것이다. 맑스가 자신과 정반대로 보이는 쾌락주의자 에피쿠로스를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점』에 등장시켰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여서이다.



유물론자 맑스, 그는 에피쿠로스를 어떻게 만났을까


에피쿠로스는 이 책에서 쾌락을 말한다. 에피쿠로스가 인생의 목적이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그는 쾌락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가 추구한 ‘쾌락’의 의미, 이것이 에피쿠로스와 맑스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만남을 이해하게 해 주는 관건이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쾌락이 인생의 목적’이라고 말할 때의 ‘쾌락’은 “방탕한 자들의 쾌락이나 육체적 쾌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쾌락은 “몸의 고통이나 마음의 혼란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그가 말하는 쾌락은,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욕망하고 그 욕망을 충족해서 얻은 그런 상태가 아니다. ‘고통과 혼란으로부터의 자유’란 몸에 고통이 없고 마음에 불안이 없으면 거기서 만족하고 그 이상을 원하지 않음으로서 얻어지는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다. 가령 배고플 때 밥을 먹어 몸에 고통이 없으면, 더 이상의 먹을 것을 욕망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빵 한조각과 물 한 모금만 있으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도 말하면서 그 자신이 누구보다도 소박하고 검소하게 살았다.


‘고통이 없고 동요가 없는 상태’에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 언제 고통이 없고, 언제 마음의 동요가 없는지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육체적 쾌락의 한계점과 , 죽음에 대한 공포나 삶에 대한 욕망이 정신적 쾌락에 미치는 영향이나 한계 등을 정확히 이해할 때 “마음의 동요가 없음과 몸의 고통이 없”음의 상태에 도달 할 수 있다.


                                                             에피쿠로스가 말하는 쾌락은...



그 ‘한계점’을 어떻게 알까?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자연학이 그 한계점에 대한 지식을 줄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자연학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유물론이다. 유물론은 세계의 근본 실재를 의식이나 정신이 아니라 그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이라고 보는 견해다. 에피쿠로스는 유물론자로서 “존재하는 것들의 본성은 물질들과 공간”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에게 ‘물질’은 ‘원자’다. 원자란, 물질을 쪼갤 때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어떤 것을 말한다. 그의 원자론에 의하면, 인간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인간의 죽음도 원자로 분해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면 인간의 ‘생각’도 원자인가? 그렇다. ‘생각’이란 것도 원자의 운동이고, ‘생각’은 모든 운동 중에서 가장 빠른 운동이라고 보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인간을 정신적으로 동요하게 만드는 가장 큰 계기는 아마도 ‘죽음’일 것이다. 인간도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그에 따라 죽음도 원자로의 분해일 뿐이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죽음’에서 오는 동요를 겪지 않고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원자가 소멸되는 것 뿐이라고 말한다.






쾌락주의자 에피쿠로스는 유물론자였고 그래서 맑스는 그를 친구로서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나 역시 『쾌락』이란 책을 통해 에피쿠로스를 유물론적 인물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 인간이 느끼는 고통과 쾌락, 슬픔과 기쁨에 대한 유물론적인 새로운 시각을 얻었다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