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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_철학.사회

"있음"의 존재론-불교를 철학하다

"있음"의 존재론

이진경, 불교를 철학하다』, 휴, 2016

 

 

최유미/수유너머 N 회원

 

 

 

 

 

 

 

 

 

 

내가 불교와 처음 만난 건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이었다. 60세에 말기 암 선고를 받은 아버지는 붓을 들어 반야심경을 쓰면서 마음을 다스리셨고, 우리들에게는 성철스님의 유명한 공안 진공묘유(眞空妙有)”를 한 장씩 써 주셨다. 그 덕에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읽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헛되고도 헛되도다로 읽었기에 산 자를 위한 철학은 아니지 싶었다. 그렇지만 느닷없이 닥쳐온 죽음 앞에서도 아버지가 비교적 담담하셨던 건 순전히 불교 덕분이라 생각했기에 나는 불교에 어느 정도는 고마움과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공부해 보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윤회니 해탈이니 하는 개념들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전생에 지은 업에 따라 현생이 결정되고, 현생의 업에 따라 미래가 결정되다니.. 틀림없이 뭔가 야로가 있을 거란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이진경의 새 책, “불교를 철학하다는 나처럼 창밖에서 힐끗 안을 들여다보고 막연하게 불교에 대한 상을 그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기, 무상, 인과, 보시, 윤회 등의 25개의 불교 개념을 제대로 생각하게 해 주는 책이다. 무엇보다 불교를 허무주의로 읽은 나의 오독을 바로 잡아 주었다. 덕분에 아버지가 써주신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이 책의 미덕은 자칫 고원(高遠)해지기 쉬운 불교 개념들이 이진경과 만난 덕분에 과학, 현대철학, 문학, 예술이 침윤한 싱싱한 모습으로 다가오는데 있다. 책 표지 역시 ‘21세기 불교를 위한 하나의 초상이라는 부제답게 로봇신체를 한 부처가 연꽃 비행선을 타고 있는 그림이 실려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은 단지 21세기의 기술문명을 표상하는 것만은 아닌 듯싶다.

 

책 표지를 보고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의 성 라퓨타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언젠가 이진경이 이 영화에 꽂혀서 게시판에 장문의 글을 올렸던 기억이 있어서인 것 같다. 라퓨타는 대지를 벗어나 천공에 건설된 파라다이스다. 700년간이나 대지를 탈주해 있던 천공의 파라다이스 라퓨타는 다시 대지를 장악하려는 인간의 욕망에 사로잡히고, 주인공들은 자신들도 죽게 됨에도 불구하고 라퓨타에 멸망의 주문을 건다. 영화의 마지막은 그 라퓨타가 대지를 향해서 무너져 내리는 장면인데, 이때 인간의 욕망과 무관한 라퓨타의 동물, 식물, 로봇들은 천공을 향해 부상한다. 이미 라퓨타는 대지를 벗어나 있었지만, 그 탈영토화는 철저하지 않았다. 이들은 대지를 완전히 벗어나는 탈영토화를 감행하는 것이다. 책표지의 부처는 인간의 신체를 탈영토화하고, 대지로부터 자신의 뿌리를 뽑아버린 연꽃 비행선을 타고 다시 탈주를 감행한다.

 

이 책이 보여주는 불교의 초상은 이런 탈영토화를 존재론으로 밀어붙인 모습이다. 이진경이 불교를 통해 펼치는 존재론은 존재자를 탈영토화 한다. 존재자를 탈영토화한 존재. 이 책에서 존재, 있음 그 자체의 존재론이 중도(中道), (), (), 그리고 십이연기(十二緣起)의 개념들을 빌어서 펼쳐진다. 이진경은 전작인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에서 보다 있음그 자체에 더욱 밀착되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진경이 자신의 존재론을 선보이게 될 날이 머지않았음을 이 책으로부터 예감하게 된다.

 

그나저나 유물론자가 분명한 이진경이 윤회나 해탈 같은 개념을 어떻게 독해했을까? 아버지 49제를 주관하신 스님은 아버지가 중음신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부디 인간의 몸으로 환생하도록 기도한다고 했다. 나는 그때 속으로 인간으로 환생한들 그가 이전의 내 아버지와 어떤 같은 점이 있을까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불교는 무아(無我)”말하면서, 또 아()를 그대로 유지한 다음 생을 말하는 셈이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않은 것 아닌가? 윤회의 시간을 관통하는 그를 누구로 불러야 할까? 이진경은 보르헤스의 죽지 않는 사람들을 들어 윤회의 시간을 관통하는 것은 수많은 삶, 그 '모든 사람'이 될 수 있는 아무도 아닌 자만이 있을 뿐이다"(217)라고 .. 윤회는 “‘무아생명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적절한 어떤 힘의 영원한 흐름이다”(218)라는 파격적인 해석을 내어 놓는다. 윤회하는 것은 존재이지 존재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하나 이 책을 읽는 재미는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선승들의 선문답을 조금이나마 따라 갈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를 준다는 점이다. 나는 벽암록은 아예 펼쳐들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선불교의 기초적인 공안집이라는 무문관에서 한차례 좌절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화두를 끝까지 밀어붙이고는 말해보라! 말해보라!”고 윽박지르는 선승들의 다그침 통에 나도 덩달아 숨이 막힐 것 같아서 책을 덮고 말았었다. 이진경의 이 책은 그것을 다시 펼쳐보게 꼬드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