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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_철학.사회

[장자로 보는 삶] 통로로 존재하는 몸

 

통로로 존재하는 몸

 

 

                                                          담연 (수유너머 104 장자세미나 튜터)

 

 

1. 생명

 

  생명은 지속적인 흐름과 변화라는 속성으로 표현된다. 장자적 의미에서 잘 산다, 양생(養生)한다는 것은 따라서 변화하는 자연 안에서 그 유동적 흐름에 발맞춰 인간이 막힘없이 잘 통하는 몸이 된다는 의미다. 장자의 양생은 어떤 외부적 변화 상황 속에서도 인간이 자기 생명의 중심이 되는 기의 조화를 내면에 유지하면서 막힘없이 세상사에 발맞추어 흘러갈 수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즉 흐르는 물, 흐르는 바람의 통로인 몸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2.  막힌 몸 지우기

 

  기의 조화로움을 안에 유지한 상태로 막힘없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러한 물음에 떠오르는 그림은 통로로만 존재하는 몸의 이미지다. 머리도, 다리도 없는 몸통으로만 존재하는 신체. 이것은 마치 들뢰즈의 기관없는 신체처럼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지만 아직 어떤 구체적인 형식이나 특정한 꼴로도 규정되지 않는 생생하고 충만한 에너지로만 존재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베이컨은 기관없는 신체 이미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괴기스럽고 기형적인 아래 그림은 눈, , , 피부 등 특정한 감각적 기관으로 엄밀히 분화된 인간 얼굴의 신체적 기능을 처참히 뭉개버린다. 분화된 감각 기관을 통해 수용된 자극들을 엄밀히 분석해 명석 판명한 사고를 전개하는 이성의 기능을 파기하는 것이다.

 

 

 

3. 지우는 것은 슬픈 일인가?

 

  오감으로 분화된 감각 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잡다한 질료들의 종합을 통해서 명석 판명하게 개념화된 분별 작용을 하는 인간의 이성적 기능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는 점에서 들뢰즈는 장자와 통한다. 그렇지만 나는 장자의 통로로서의 몸이 들뢰즈의 기관없는 신체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베이컨의 기괴스러운 작품과는 다르게 몸통이라는 완고한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고 본다.

 

 

 

  즉 기관없는 신체는 리좀의 형식을 지킨다. 이 때문에 인간-생명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몸통에 연결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무한한 인간-생명-자연으로 변화될 가능성을 열고 있다. 온전한 인간 신체가 위와 같은 꼴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모든 기능이 온전히 갖추어진 육체를 통해서만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은 지워진 혹은 특정한 기능이 사라진 몸을 보고 슬퍼할 것이다.

  마그리뜨는 사회생활을 하는 데 무리가 없는 오감 기능을 온전히 갖춘 몸의 꼴을 인정한다. 뇌와 손발이 잘 갖추어진 한 인간 신체가 갖는, 그것 자체로 자연의 미를 표현하는 몸을 인정한다. 그러나 마그리뜨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회 생활을 하는 평균적 인간 몸의 가능성을 넘어서, 새로운 존재 변형이 가능한 몸을 불러온다. 이것은 곧 몸통으로 존재하는 인간, 통로로만 존재하는 몸이다.

 

 

 

 

 

4. 통로로만 존재하는 몸

 

  마그리뜨는 두상을 지운다. 팔 다리를 지운다. 그리고 신체가 점유하는 공간의 형식을 무한의 형태로 확장하거나 축소, 절단, 재접속한다. 여기에 새로운 자연을 불러오고 새 생명을 탄생시킨다. 통로로만 존재하는 몸은 자연의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연결하는 기관이다. 그리고 크기를 어떻게 확장 및 축소하는가에 따라 혹은 무엇과 연결되는가에 따라 물고기가 될 수도 있고, 하늘의 달이, 내리는 비가 될 수도 있다. 여기서 인간은 하나의 새로운 창조적 자연으로 숨쉰다.

 

 

 

마그리뜨는 특정한 사회적 기능을 하는 인간 몸을 그 형식만 유지한 채 인간이라 규정할 수 있는 구체적 내용을 지워버린다. 지운 그 자리에 새 생명 존재로의 변형이 가능한 다른 관계를 연결함으로써 새로운 자연과 미지의 생명, 새 인간 존재의 가능성을 연다. 이러한 관점에서 자연의 흐름을 반영하는 통로로서의 인간 몸은 메마른 대지를 촉촉이 적시는 우주의 단비로 내릴 수도 있다.

 

 

 

  따라서 지우는 일은 슬픈 일이 아니며 구멍은 메꿔야 하는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끊임없이 기존의 몸통을, 특정한 방식으로 고착된 사유를 지우는 일. 특정한 형태로 쌓고 채우려는 기능에 구멍을 내고 그 텅 빈 공간을 유지하는 수련이 중요하다.

 

5. 마음을 비우면 슬픔도 사라진다

 

  우주의 흐름을 지속시키는 통로로서의 몸의 가능성을 연 마그리뜨 작품은 비움을 체현한 장자의 이상적 인간(眞人)을 은유적으로 반영한다. 장자도 기존의 고정된 생각, 특정한 내용으로 채워 경직된 인간 몸과 마음을 지속적으로 비우는 작업을 통해 우주적 차원에서 인간세를 유유히 노닐기 바라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마그리뜨는 장자의 벗이다. 특정 선/악, 시비, 호오, 신념으로 고착된 마음을 비우면 그것이 야기하는 마음의 슬픔도 사라진다. 그렇게 신기루처럼 사라진 슬픔의 끝에서 새로운 형태로 접속된 관계가 열어줄 미지의 모험과 충격, 환희의 세계는 우리를 기다리며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를 것이다. 저만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