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시집

                                               

  김혜순, 『리들의 음화陰畫』(문학과 지성사, 1990) 




                                              이혜진/ 수유너머 104 회원





기념일




                                김혜순



그는 계단을 올라왔다

급히 자동차를 타고

마악 들국화 뿌리 밑에서 일어나

학교로 들어서던 참이었다 

학생들은 책가방을 풀고

숙제를 꺼냈다

한 학생이

기념일 숙제에 그의

이름을 썼다

선생님은 숙제의 답이 틀렸다고

일일이 지적했다

막대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가 계단을 다

올라와 문 손잡이를 잡은 순간

학생들은 흰 고무지우개로

틀린 답을 지웠다

틀린 답은 쉬 잊혀지게 마련

 

그의 얼굴이 교실문 뒤에서

지우개 가루처럼

흩어졌다






   김혜순의 세 번째 시집, <우리들의 >를 펼치면서 그가 쓴 시가 어디로 갔을지 궁금했다. 두번째 시집을 내면서 그는 과거는 현재 인생의 전단계가 아닌 떠나면서 다시 돌아와 자신을 감싸는 둥근 시간대라고 말했다. 이처럼 이십대의 김혜순은 맴돌다 넘어지고 구멍이 나고 파고들어 몸 속에 주렁주렁 매달린 말로 시를 썼다. 하지만 그로부터 오 년 뒤, 그는 시인을 자신의 아픔을 몸 속에 넣어놓고, 모시고 얼르고 놀아주고 축제를 벌여주며 때맞춰 제사지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랬다. 세 번째 시집에서 시인 김혜순은 사인 불명으로 죽은 귀신들을 위해 떠들석하게 굿판을 벌이고 있었다. 구경꾼들이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게 뒹글고 흔들고 낄낄대다 끓어올라 깨져서 폭발한 통제 바깥의 말로 시를 썼다. 쉴틈없이 몰아치는 그말에 이끌려 마지막 장에 도착할 즈음 탈진한 그가 보였다. 시원한 막걸리라도 한잔 대접하고 싶었다.

 

   반면에, 소개하는 시, 기념일은 앞서 말한 시끌벅적한 축제나 굿판과는 거리가 멀다. 거침없이 돌진하는 그의 시 흐름과도 다른, 마치 구경꾼도 변사도 없이 혼자 돌아가는 무성 영화를 보는 것과 같다. 어쩌면 시인은 그의 소란이 막대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 것 보다 못할 거란 걸 짐작하지 않았을까, 절망하지 않으려 그렇게 꽝꽝거리고 흘러넘쳐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기념일은 그 안타까움으로 읽고, 또 읽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얼굴이 지우개 가루처럼 흩어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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