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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_철학.사회

[장자로 보는 삶] 3. 인간 세상, 고통의 근원은 무엇인가?

장자로 보는 삶3

 

 

인간 세상, 고통의 근원은 무엇인가?

 

 

담연(수유너머104 장자세미나 튜터)

 

 

 

*고통의 근원 - 명예와 지식 추구

 

장자(BC367-286?)가 살았던 전국 중엽은 영토 확장을 위한 겸병(兼倂) 전쟁이 끊임없었다. 주나라 붕괴 후 진한 건국 전까지 50여개 국으로 분열된 시기에 각국 제후들은 천하의 패권을 쥐려는 야심을 품고 서로를 죽였고 뜻을 실현시켜줄 인재를 찾았다. 이 때문에 전국 시기는 피흘리는 겸병 전쟁과 제후에게 등용되기 위해 치세를 논하는 제자백가가 펼쳐졌다.

여기서 장자는 세상이 이처럼 혼란한 원인이 지나친 명예()와 지식() 추구 때문이라고 보았다. 장자에 따르면 명예란 서로 헐뜯는 것이며 지식이란 다툼의 도구다(名也者相軋也, 知也者爭之器也. 人間世).’ ‘이 두 가지는 인간을 불행으로 몰아넣는 흉기여서 끝까지 추구해서는 안된다(二者凶器, 非所以盡行也. 人間世).’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하는 패도(霸道)가 우세했던 시대에 포악한 위나라 군주를 계도하려는 안회의 시도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지식()으로 상대를 교화시키는 일이다. 등용되면 명예는 얻겠지만 잘못하면 포악한 군주 손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장자는 외적 지식과 명예 추구보다는 내면의 덕을 닦고 생명을 온전히 지키라고 말한다. 여기서 덕이란 조화로움을 완성하는 수양(德者成和之修也 德充符)이다. 또 생명을 지키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은 특정 신념에 경도된 마음(師心)을 비우기(), 부득이한 일에는 마음 편히 운명을 따르기(安之若命), 무용지용(無用之用)의 태도다.

 

 

 

*명예보다는 생명!

 

장자는 지식 추구로 명예를 쌓는 사가들이 특정한 시비 가치관에 사로잡혀 그것을 기준으로 남을 함부로 평가하며 계급적 구분과 사회적 차별을 일삼는다고 비판한다. 이들의 지식 추구와 명예 쌓기는 사회적 분쟁과 다툼의 원인이며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가 된다. 이들을 등용해 특정 시비관에 기초한 정사를 펴는 제후들은 전쟁을 일으켜서 백성들을 전쟁터로 내몰고 불구로 만들거나 죽게 한다. 이처럼 지자가 득세할수록 힘든 것은 무고한 백성들이다.

이 때문에 장자는 외적 지식과 명예 추구에 앞서 생명을 온전히 지키라고 말한다. 󰡔장자󰡕의 배경을 이루는 다양한 불구자들, 노동자, 가난, 질병, 죽음의 풍경은 장자가 끊임없는 살육 전쟁으로 인해 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했던 당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고 풀기위해 양생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자기 상실의 시대, 사라진 자존감

 

지식 정보 사회라고 일컬어지는 지금은 이런 고통이 없을까? 장자 당대 지식인들이 위정자에게 인정받기 위해 지식을 쌓고 명예를 추구했듯 우리 역시 부와 권력으로 대변되는 사회적 성공을 위해 끝없이 지식을 습득하고 스팩 쌓기에 열을 올린다. ‘사회적 성공이 곧 행복이라는 주입된 표준 가치를 맹목적으로 따르면서 무한 경쟁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위해 친구도, 휴일도 없이 스스로를 혹사시킨다. 그리고 고독하게 혼자 쉰다. 한병철은 이런 한국을 자기 착취가 일상화된 피로 사회라고 불렀다.

한국에서 인간의 사회적 가치란 학교에서는 성적과 학벌, 취업시장에서는 경제적 효용성과 생산성이라는 실적으로 평가된다. 돈 많이 버는 인간이 성공한 존재고 행복한 자라는 자본주의 사회의 허상을 무반성적으로 내면화하고 추종하다가 자기다움을 잃어간다. 우리는 상대적 박탈감을 조장하는 이 곳에서 성공을 위해 달리다 지쳐 쓰러져가는 경주마 처지지만 돌아가 쉴 곳이 없다.

 

 

 

 

*경쟁과 인간 소외

 

장자가 비판했던 외적 지식과 명예 추구는 현 사회에서 점수 따기와 취업이라는 형태로 변형되었고 유혈투쟁은 아니지만 지식 경쟁으로 이미 사회는 전쟁터 같다. 그리고 어느새 경쟁을 게임처럼 즐기는 경지가 되었다. 그리고 자본 증식의 도구로 쓰이기 위해 취업 경쟁의 전쟁터를 통과하면서 우리는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여기는 비인간적 상황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경쟁에서 실수하고 탈락하면 누군가는 그 자리를 차지하는 영예를 얻기 때문이다. 경쟁의 장이 인간 불신과 소외를 야기하는 이유다.

 

 

*자살 조장 사회

  

무엇을 위해 우리는 이렇게 치달리는가? 지식 추구도, 사회적 성공도 결국은 행복하기 위한 일이다. 문제는 지식, 학벌, 성공과 명예 추구가 개인의 실질적 행복감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입시, 취업, 실적 경쟁의 전쟁터에서 우리가 잃어가는 것은 나다움, 우정, 사랑, 가족과 이웃들이 함께 하는 소소한 일상적 행복 같은 질적 가치다. 정작 소중한 삶의 의미는 여기 있다.

한국은 그동안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지켜왔다. 최근에야 리투아니아의 등장으로 2위가 되긴 했지만 13년간 1위를 놓친 적이 없다. 나는 20대를 보내면서 왕0, 0, 0, 0, 0 등 가까운 친구들을 자살로 먼저 보냈다. 개인적 불행이라 자조했을 뿐 사회적 문제라고 인지하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음미한 결과 이들 자살의 핵심에는 자기 삶의 주도권을 잃어버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박사 졸업 후 학생들을 만나며 마주친 문제는 20년 전 내 고통이 되풀이되고 있는 현실이었다. 대입수능, 자퇴 또는 휴학, 재수능, 재 대학 입학의 내 20년 전 경험을 지금 대학생들도 3-40%는 되풀이 하고 있었다. 외부 강요로 원치 않는 과에 들어가 늦게서야 방황을 시작하는 것이다. 고교 아이들은 입시를 위한 주입식 교육 때문에 자기 성찰의 시간이 부족하다. 원하는 과를 선택하기보다는 명문대라는 타이틀이 앞선다. 본인의 의사라기보다는 암묵적 외압의 영향이 강하고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와 방황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다.

 

 

*나는 누구인가? 정말로 원하는 건 무엇인가?

  

입시에서의 자기 부정, 20대 벗들의 자살, 원치 않는 과에서 지금도 방황하는 대학생들의 현실은 결국 학벌과 취업 위주의 미래를 강요하는 기성세대의 암묵적 강요 속에서 자신이 자기 삶을 주도할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청소년기는 자기 성찰에 기반해 내가 누구인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또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기 위해 힘을 쌓는 시기다. 지식이란 이런 힘을 기르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가해지는 삶에 대한 다른 이들의 폭력적 간섭과 충고는 아이들의 진심이 이끄는 길을 흐리게 한다. 그 힘에 못 이겨 자신이 원하는 것을 버리고 남의 말대로 움직일 때 인간은 꼭두각시 삶을 산다. 그리고 남 탓을 한다. 이런 자신을 방치한 채 나이가 들면 늦도록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공허한 마음으로 방황한다.

 

 

 

 

*나로 사는 연습, 그리고 실행

 

 

이것이 지금의 문제다. 자기 부정을 통해 타인의 인정을 얻는 길은 충분히 걸었고 이제 그만 걸어도 좋을 것이다. 장자의 말처럼 할 일은 진인(眞人)이 되는 것, 즉 나다운 길을 걷는 것이다. 남의 강요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길을 걷고, 그 걸음에 책임지면서 인생의 주인이 되는 경험을 해야 한다. 이러한 경험이 쌓여 나를 믿는 힘이 커질 때 자신감과 자존감은 차츰 회복된다. 남이 깔아둔 판에서 한자리 얻으려고 자신을 부정하고 왜곡하기보다는 부족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믿고 실현시켜갈 길을 찾는 것. 없다면 새롭게 길을 내는 것. 내가 꿈꾸는 대로 살아보려고 수고롭지만 몸을 던져 노력해 보는 것. 그 과정에서 겪는 시행착오를 기회로 삼는 것. 이런 실천적 고민과 꾸준한 노력이 수반될 때 자신의 고유한 경험이 담긴 글은 살고 싶은 미래를 현실로 불러내는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