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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_웹진강의

[칼 슈미트 입문 강의] 4강 세번째 부분

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仲正昌樹カール・シュミット入門講義作品社, 2013.






4강. 『정치신학』(3) ― 누가 법을 만드는가혹은 최후의 심판



‘유심론적 역사철학’과 ‘유물론적 역사철학’


여기에 유물론적 역사 철학과 대립하는 유심론적인 그것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심한 오해이다. 가장 극도로 유물론적 역사 철학에 대해서는 역시 가장 극도로 유심론적인 역사철학에 대해서는, 마찬가지로 극도로 유심론적인 그것을 확고하게 대립시킬 수 있다고 하는 막스 베버가 슈타믈러의 법철학 비판에서 논술한 바에 관해서는 복고 시대의 정치신학이 훌륭한 예증이 된다. 왜냐하면 반혁명적 저술가들은 정치적 변혁을 세계관의 변화에 의해 설명하고 프랑스 혁명의 기인을 계몽주의 철학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기에 유물론적 역사철학에 대항하는 유심론적 역사철학 같은 것이 도사리고 있다고 믿는 일은 어처구니없는 오해일 터이다. 베버는 슈타믈러의 법철학을 비판하면서 극단적인 유물론적 역사철학에 대해서는 마찬가지의 극단성을 갖는 유심론적 역사철학을 대립시킬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왕정복고 시기의 정치신학이 훌륭하게 예시하고 있는 바이다. 왜냐하면 반혁명 저술가들은 세계관의 변화로부터 정치적 변화를 설명했고, 프랑스혁명을 계몽주의 철학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62쪽).]


“유심론적 역사 철학 eine spiritualistische Geschichtsphilosophie”이란 ‘유물론’의 ‘물질’을 ‘혼 Spiritus’로 대체한 것처럼 ‘혼’적인 것을 중심으로 역사가 움직이고 있다는 시각입니다만, 슈미트는 자신은 그런 걸 믿고 있다고도, 주장하고 싶다는 것도 아님을 일단 확인하고 있지요. 그 위에서 베버를 인용하면서 “유심론적 역사 철학”과 “유물론적 역사 철학”은 이항대립 관계에 있으며, 한쪽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재파악하는 형태로, 다른 쪽의 입장을 주장하는 것이 항상 가능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루돌프 슈타믈러(Rudolf Stammler, 1856-1938)는 신칸트학파의 법철학의 창시자로, 유물사관을 비판하고 사회의 존재방식은 경제적 현실이 아니라 각자의 행위를 규제하는 법적 규범이라고 주장한 인물입니다. 베버는 논문 「루돌프 슈타믈러에게서의 유물사관의 『극복』」(1907)에서 슈타믈러의 논의의 일면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반혁명적 저술가들”이란 드 메스트르, 보날, 도노소 코르테스 등을 가리킵니다. 『정치적 낭만주의』에도 나왔듯이, 이들은 혁명의 귀결을 부정적으로 파악한 다음, 그 원인을 그리스도교의 일신교적 세계관으로부터 신 없는 계몽주의의 세계관의 전환에서 본 겁니다.

이와는 반대로 급진적 혁명가들이 사고에 있어서의 변화를 정치적 및 사회적 관계들의 변화에 귀속시킨 것은 명료한 반정립이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종교적, 철학적, 예술적, 문화적인 변화들이 정치적 및 사회적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라는 것은 19세기의 20년대에 이미 서구, 특히 프랑스에서 널리 퍼진 신조였다. 맑스주의적 역사 철학에 있어서는, 동시에 정치적·사회적 변화에 대해서도 기인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경제적인 것에서 찾아냄으로써 이 관련은 경제적인 것으로 철저화되고, 또한 체계적으로 엄격하게 파악된 것이다. 이 유물론적 설명은 이데올로기적 일관성을 개별적으로 관찰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급진적 혁명가들이 사유의 변화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관계의 변화에 귀속시킨 것은 이에 대한 명백한 반정립에 다름 아니었다. 이미 1820년대에 서구, 특히 프랑스에서는 종교적・예술적・문화적 변화가 정치 및 사회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되었음은 널리 알려진 교리였다. 맑스주의적 역사철학에서 이러한 관계는 경제적인 성격을 갖는 것으로 급진화되어 엄격하게 체계화되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변화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를 추구하여 경제적인 것에서 찾아냄으로써 이뤄진 결과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 이데올로기적 일관성을 그 자체로 독립시켜 취급하는 일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62쪽).]



이것은 맑스주의의 역사관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낯익은 도식이네요. 헤겔로 대표되는 유심론 혹은 관념론의 역사철학은 정신의 운동에 의해 역사가 발전한다고 생각하지만, 유물론계의 혁명가들은 정치나 사회 상황의 변화에 의해 사고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다. 헤겔의 시대에는 이미 정치와 사회 상황의 변화에 의해 종교, 철학, 예술, 문화 등 정신적 영역에서의 변화가 야기된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화됐다는 것이죠. 맑스주의는 그것을 더욱 «파고들어가» 정치와 사회의 변화는 하부구조인 ‘경제’에 의해 야기된다는 철저한 유물론의 역사관을 확립했습니다. 물론 그것을 또 다시 뒤집고, 아니 그런 경제의 변화는 주체인 인간의 정신에 의해 야기된다고 논할 수도 있기에, 최종 타결은 힘듭니다.

조르주 소렐의 아나코 생디칼리즘적 사회주의는 이리하여 맑스의 경제적 역사 파악과 베르그손의 생의 철학을 결합한 것이다.


[이리하여 소렐(Georges Sorel)의 아나코-생디칼리즘적 사회주의는 베르그손(Henri Bergson)의 생철학과 맑스(Karl Marx)의 경제적 역사이해를 결합시켰던 것이다(62쪽).]


제1강에서 말씀드렸지만, 조르주 소렐에게는 양극에 있는 듯 보이는 벤야민과 슈미트가 강하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소렐의 ‘아나코 생디칼리즘 anarcho-syndicalisme’의 <syndict>이란 ‘조합’이라는 의미의 프랑스어입니다. 소렐은 의회에서의 활동에 무게를 두게 된 당시의 프랑스 사회주의 정당이나 노동조합의 주류파를 비판하고 노동자 사이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총파업에 의해 부르주아지의 권력 기구를 해체하고 생산수단을 프롤레타리아트가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하부구조에 의해 역사의 발전이 규정된다고 하는 정통파 맑스주의의 사고방식과는 선을 긋고, 혁명의 원동력이 되는 것은 인민의 생활 속에 도사리고 있는 ‘신화’이라고 보는 사고방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혁명적인 ‘신화’라는 관점에서, 프랑스 혁명의 전설이나 그리스도교가 원래 갖고 있던 호전적인 정신 등도 평가합니다.
그는 동시대인이었던 베르그손(1859-1941)의 철학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베르그손은 창조적 진화를 일으키는 것으로서 ‘자유의지’나 ‘직관’에 주목합니다. 소렐 같은 인물도 있습니다만, 보통은 베르그손은 유물사관의 적으로 간주됩니다. 슈미트는 소렐의 역사관 속에서 맑스주의와 베르그손주의가 동거하고 있다는 것을 유물사관과 유심사관의 구조적인 유사성의 증거로 보고 있지요.

물질적 현상에 관한 유심론적 설명과 정신적 현상에 관한 유물론적 설명은 모두 인과적 연관을 추적하려는 것이다. 이것들은 처음에 두 영역을 대립시키고 이어서 한 쪽을 다른 한 쪽으로 환원함으로써 또 다시 이 대립을 무로 돌린다.


[눈앞의 물질적 현상에 대한 유심론적 설명과 정신적 현상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은 모두 인과관계를 설정하려는 시도이다. 양자는 모두 처음에 두 영역을 대립시키고 다음으로 한쪽을 다른 쪽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이 대립을 다시 무화시키는데 …(62쪽).]


이 대목은 말투가 추상적이어서 어려운 것 같은데요, 지금까지의 얘기의 요약이라는 것은 알 수 있네요. 인간에 관해서는 물질적 현상을 정신의 면에서 설명할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정신/물질을 분명하게 양분하고, 이것을 원인/인과 관계와 포개놓으면, 어느 쪽의 논의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이항대립 구조를 알게 되면, 이항대립이 무효화되는 것입니다. 현대사상에서 흔히 보이는 논의입니다만, 그것을 슈미트가 전개하고 있는 대목이 흥미롭네요.
60頁을 보시죠. 얼마 전 “법학적 개념의 사회학” 얘기가 나왔는데요, 이것의 바람직한 방향성에 대해 슈미트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보다 앞인 58頁과 59頁[62-64쪽]에서는 엥겔스처럼, 모든 이론을 하부구조로 환원하는 «사회학»은 논외라 하고, 베버의 법사회학처럼, 법조관계자의 직업적 이데올로기를 연구하는 것도, “법학적 개념의 사회학”이 아니라고 합니다.



세계관과 사회의 기본 구조


… 이것만이 주권 개념 같은 개념에 대해 단 하나의 과학적 성과에 대한 전망을 가진다. 이 사회학에는 법 생활의 가장 친밀한 실용적 이익을 지향하는 법률학적 개념성을 넘어서서, 궁극적인, 철저하게 체계적인 구조를 발견하고 또한 이 개념 구조를 특정한 시기의 사회구조에 의한 개념적 변용과 비교한다는 것이 포함된다. 여기서 말하는, 철저한 개념성이라는 이념적인 것이 사회적 현실의 반영인지 혹은 사회적 현실이 일정하게 사고양식, 따라서 또한 행동양식으로서 파악되는 것인지는 이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정신적인 것이면서도 실질적인 두 개의 동일물이 입증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령 17세기의 군주정이 데카르트 식의 신 개념에 ‘투영된’ 현실이라고 할 경우, 그것은 주권 개념의 사회학이 아니다. 군주정의 역사적-정치적 존립이 서유럽의 인간의 당시의 총체적 의식 상황에 대응했다는 것, 그리고 역사적-정치적 현실의 법률학적 형태화가 형이상학적 개념과 합치하는 구조를 갖고 하나의 개념을 발견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그 시기의 주권 개념의 사회학에 속하는 것이다. 이것에 의해 군주정은 당시 의식에 있어서 나중의 시기에 있어서의 민주정이 갖게 된 것과 똑같은 명증성을 획득한 것이다.


[… 오직 여기서 제시되는 개념사회학을 통해서만 주권과 같은 개념에 대한 학문적 성과를 낳을 수 있다. 이 사회학에는 다음과 같은 작업들이 포함된다. 즉 법 생활의 가장 친근한 실천적 이해관심에서 비롯된 법률적 개념성을 넘어서서 궁극적이고 근본적으로 체계적인 구조를 발견하고, 이 개념적인 구조를 특정 시대의 사회구조에서 이루어진 개념적 변용과 비교하는 작업 말이다. 여기서의 근본적 개념성이라는 유사 이념이 하나의 사회학적 현실을 반영하는지 아닌지, 혹은 사회적 현실이 특정한 사고방식과 나아가 행위양식으로 파악될 수 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문제 삼지 않겠다. 오히려 양자 사이의 정신적이면서도 실체적인 동일성이 입증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17세기의 군주제가 데카르트적 신 개념을 ‘투영’한 현실로서 드러나더라도 그것은 주권 개념에 대한 사회학이 아니다. 오히려 군주제의 역사적-정치적 존립이 당시 서유럽의 총체적 의식상태를 나타내는 것이었다는 사실과 역사적-정치적 현실의 법적 형태화가 당대의 형이상학적 개념구조와 동일한 구조를 갖는 하나의 개념 속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 주권 개념의 사회학에 속하는 작업이다. 이렇게 당대 의식에서 보자면 군주제는 자명한 것이었다. 후대의 민주제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64-65쪽).]


이 사회학은 법 생활에서의 실용적인 관심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법학 개념의 “궁극적인, 철저하게 체계적인 구조 die letzte, radikal systematische Struktur”를 발견하고, 그 시대의 ‘사회구조’와의 대응관계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사회구조에 의한 개념적 변용”이라고 번역된 부분의 원어는 <die begriffliche Verarbeitung der sozialen Struktur>입니다. <Verarbeitung>은 ‘가공’이라든가 ‘정보처리’라는 의미입니다.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라 개념이 재가공되고 새로운 형태를 취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의역(?) 생략하고, “사회구조에 의한 개념적 변용”으로 한 것이죠. 그런 관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어떤 사회구조라면 어떤 법학 개념이 형성되는지를 탐구하는 것을 개념의 사회학의 과제로 삼는 것이네요. 이때, 아까 나왔던 것 같은, 사회적 현실이 먼저냐 개념이 먼저냐라는 이항대립 문제는 그다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17세기의 군주정이 데카르트 식의 신의 개념에 ‘투영 spiegeln’된다는 얘기는 진위는 차치하고, 취지는 알기 쉽네요. 『정치적 낭만주의』에서도 보날과 드 메스트르가 역사적·정치적 현실과 그 사회를 지배하는 ‘신’관[념]을 대응시켜 생각했다는 얘기가 나왔죠. 슈미트는 그로부터 논의를 발전시켜, 그 사회의 ‘역사·정치적 현실’을 법학의 개념으로서 ‘형태화 Gestaltung’한 것이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형이상학적 개념과 대응한다고 말하는 것이네요. 이런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적 개념과 법학적 개념의 관계를 탐색하는 것이 “주권 개념의 사회학”의 주요 과제가 됩니다. 다시 말하면 ‘주권’ 개념을 핵심으로 하는 법학적 개념은 형이상학적 개념과 역사적·정치적 현실을 매개하는 것입니다.
이 대응 관계가 있기 때문에 신이 소멸한 아나키한 시대에 민주주의가 적합한 것처럼, 데카르트적인 신 관[념]의 시대에는 군주제가 적합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법률적 개념의 이러한 사회학의 전제가 되는 것은 그래서 철저한 개념성, 즉 형이상학이나 신학의 영역에까지 밀어붙이는 논리 일관성이다. 특정한 시대가 구축하는 형이상학적 세계상은 그 정치적 조직의 형식으로서 간단하게 이해되고 있는 것과 그 구조를 같게 한다. 이런 동일성의 확인이야말로 주권 개념의 사회학인 것이다. 이는 사실 에드워드 케어드가 오귀스트 콩트에 관한 저서에서 말하고 있듯이, 형이상학이야말로 한 시기의 가장 강렬하고 명료한 표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법학 개념에 대한 이런 사회학의 전제는 그래서 근본적인 개념성이다. 즉 형이상학이나 신학의 영역으로까지 널리 나아간 논리적 일관성인 것이다. 특정 시대가 만들어내는 형이상학적 세계상은 그 시대 정치조직의 형식과 똑같은 구조를 갖는다. 이런 동일성을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주권 개념의 사회학이다. 이는 사실 케어드가 자신의 책에서 콩트(Auguste Comte)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형이상학이 한 시대에 대한 가장 강력하고 명확한 표현임을 증명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65쪽).]


‘철저한 개념성 radikale Begrgifflichkeit’의 논리적 일관성이 형이상학이나 신학의 영역에까지 밀어붙일 수 있다는 것이 무슨 일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만, 슈미트는 모든 사회에는 그 사회의 구조에 적합한 형이상학이나 신학이 있다는 전제에서 생각하는 것을 염두에 두면, 훨씬 쉽게 될 것입니다. 법학적 개념들은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여 형성되는 것이니 그 ‘근저’ ― <radikal>의 어원은 ‘뿌리’를 뜻하는 라틴어 <radix>입니다 —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것들 사이의 논리적 일관성을 탐구하면 형이상학이나 신학으로 통하는 층에 도달하게 된다는 셈입니다. 그것이 형이상학적 세계상이 그것들의 법학적 개념에 의해 구성되는 정치적 조직의 동일성입니다.
에드워드 케어드(Edward Caird, 1835-1908)는 글래스고 대학에서 가르쳤던 스코틀랜드의 신헤겔주의 철학자로, 『스코틀랜드 철학과 콩트의 종교』(1885)라는 저작이 있습니다. 오귀스트 콩트(1798-1857)는 프랑스 철학자로, ‘실증주의 poskivisme’의 기초 이론을 세운 사람입니다. 아마도 켈젠 등의 ‘법실증주의자’에 빗댄 의미도 담아서 콩트의 이름을 꺼냈습니다. 콩트에게는 사회와 과학의 진보에 대한 ‘3단계 법칙 la loi des trois états’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학적 단계 → 형이상학적 단계 → 과학적 단계. 신학적 단계라는 것은 신과 같은 초자연적 원리에 의해 사물을 이해하려는 단계라는 것이고, 형이상학적 단계는 그 연장선에서 예를 들면, 사회계약 같은 실재하지 않는 형이상학적 원리로 이해하려는 단계, 실증적 단계는 과학적·실증적으로 사물을 파악할 수 있게 된 단계입니다. 신학적 단계는 또한 페티시즘 국면(phase), 다신교 국면, 일신교 국면으로 나뉩니다. 케어드는 ‘형이상학적 단계’에 상당하는 계몽주의의 시대에 관해 말하는 것입니다.
콩트의 논의는 사회의 진보를 따라, 신학이나 형이상학이 쇠락하는 것을 필연시합니다만, 사회의 기본 구조가 신학이나 형이상학 같은 세계관에 대응하고 있다고 하는 견해를 하고 있는 점은, 가톨릭 보수주의자들이나 슈미트를 닮았습니다.

18세기 합리주의가, 아무런 조작도 없이 자명한 것으로 한, 국가적 법 생활의 이상은, ‘신에서 유래한 불변의 규정을 모방하는 것’이었다. 이 표현은 루소의 논설 『정치경제론』에 나오는데, 루소에 있어서 신학적 개념의 정치화는 특히 주권 개념에 대해서는 현저한 것이며, 그의 정치적 저작에 정말로 통달한 사람의 눈에 띄지 않을 없었다.


[‘신이 만든 불변의 계명을 본받는 일’(Imiter les décrets immuables de la Divinité)은 국가적 법생활의 이념이었다. 이는 18세기의 합리주의가 아무런 유보 없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루소는 이 언명을 「정치경제론」에서 사용한다. 특히 주권 개념에 대해서 그런데, 루소는 신학 개념을 너무나도 눈에 띄게 정치화했기 때문에 그의 정치적 저작에 정통한 사람이라면 알아채지 못할 리 없었다(65-66쪽).]


루소의 『정치경제론』(1755)은 원래 디드로(1713-84)와 달랑베르(1717-83)가 편집한 『백과전서』(1751-72)의 한 항목으로 쓰여진 논문으로, ‘일반의지’라는 말은 나옵니다만, 아직 개념으로서 그다지 선명하지는 않습니다. 신학적 개념의 정치화란 『사회계약론』에서 주권자인 ‘인민’의 ‘공동적 자아’의 의지로서의 ‘일반의지 volonté générale’가 원래 신학적 개념이었던 것을 가리키는 겁니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은 장세니슴(Jansenisme)의 철학자·신학자인 앙투안 아르노(Antoine Arnauld, 1612-94)나 파스칼입니다. 장세니슴이란 네덜란드의 신학자 코르넬리우스 얀센(C. Jansen, 1510-76)에서 시작된 가톨릭교회 내부의 운동으로, 아우구스티누스(354-430)의 은총론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아르노나 파스칼은 신의 은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맥락에서 신의 의지의 의미에서 ‘일반의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어원적 문제에 덧붙여, 루소는 순수한 의미에서 ‘일반의지’가 성립하려면 신들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기에, 그런 점에서도 신학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사회계약론과 ‘신들’의 관계에 관해서는 졸저 『지금이야말로 루소를 다시 읽자(今こそルソーを読み直す)』(NHK출판)에서 논했기에 관심이 있으면 보십시오.



신 없는 시대 : ‘민의 목소리는 신의 목소리’<vox popuH, vox Dei>

61頁 후반부터 63頁에 걸쳐서 17세기부터 프랑스 혁명기까지의 시대에서는 입법자인 군주가 창조주인 신과 비슷한 위치를 차지했다는 것이 데카르트나 홉스에 입각해 논의되고 있습니다. 혁명의 시대에는 ‘민중 Volk’이 국왕을 대체합니다만,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로 구성된 ‘민중’은 통일적인 결정 주체가 아니기에, 완전하게 ‘신=국왕’의 역할을 맡을 수 없습니다. 그런 탓에, 국가와 정치의 존재근거를 둘러싼, 근대의 ‘정치적 형이상학’에 있어서 점차 ‘신’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갑니다.

과연 아마 당분간은 계속해서 신의 표상의 효과가 인정된다. 미국에서 그것은 민중의 목소리는 신의 목소리라고 하는, 이성적-실용적인 신앙으로 바뀌고, 이 신앙이 1801년의 제퍼슨의 승리의 기초를 이룬다. 토크빌은 미국 민주주의의 서술에 있어서 또한 이렇게 말했다. 즉, 민주주의적 사상에 있어서 민중은 국가 생활 전체 위에 위치한다. 마치 세계에 군림하는 신처럼, 만물이 그로부터 비롯되며, 거기로 귀착되는 만물의 기인 및 귀결로서라고 말이다. 이것에 대해 오늘날에는 켈젠 같은 중요한 국가철학자가 상대적인, 비인격적인 과학성의 표현으로서, 민주주의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며, 이것은 사실 19세기의 정치신학 혹은 형이상학에 있어서 이루어진 발전에 대응하는 것이다.


[물론 어느 기간까지는 여전히 신이라는 표상의 영향이 남아 있었음은 인정될 수 있다. 미국에서 이 영향은 ‘인민의 목소리는 신의 목소리’라는 이성적이고 실용적인 믿음이 되었고, 1801년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이에 힘입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서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모든 것의 원인이자 목적이며 모든 것이 그로부터 비롯되어 그에게로 되돌아가는 신이 세계에 군림하는 것처럼, 민주주의적 사유에서는 인민이 모든 국가적 삶 위에 군림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와 반대로 켈젠처럼 중요한 국가철학자가 민주주의를 상대주의적이고 비인격적인 과학성의 표현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사실은 19세기의 정치신학과 정치적 형이상학이 관철시켜 온 발전에 대응하는 것이다(69쪽).]


“민의 목소리는 신의 목소리”란 중세부터 라틴어(<Vox populi, vox Dei>)의 형태[形]로 전승된 격언으로, 원래는 신의 의지가 ‘민중’의 소박한 의견표명을 통해 나타난다고 하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사용됐습니다만, 근대에 들어서부터 점차 인민의 의지는 신의 의지처럼 절대적이라는 비유적 의미로 쓰이게 됐습니다. 토마스 제퍼슨(1743-1826)은 미국의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제3대 대통령입니다. 1801년은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해입니다. 토크빌(1805-59)은 프랑스의 역사가·정치가로, 미국을 방문하고 미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민주주의와 자유의 정신을 높이 평가하고, 『미국의 민주주의』(1835, 40)라는 유명한 저작을 썼습니다. 토크빌의 민주주의론에는 아직 ‘민중’을 신에 빗대는 발상이 있었지만, 탈신학·형이상학화가 더욱 진행된 20세기에 생겨난 켈젠의 민주주의론에서는 인격적 결단 주체를 느끼게 하는 요소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전면적으로 불식되고 있다는 것이죠.



하르마게든의 싸움 : 독재 vs 민주주의, 아나키


65頁부터 66頁[69-70쪽]에 걸쳐, 19세기에는 ‘신’이나 그것에 상당하는 초월론적 심급을 소거하는 과정이 진행되고, 콩트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의 사회주의자 프루동(1809-65)이나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바쿠닌(1814-76)가 신에 대한 싸움에 헌신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제3장의 말미에 가까이 가는 67頁에 19세기의 국가론의 특징이 정리되고 있습니다.

19세기의 국가론적 전개는 두 개의 특징적인 요소를 나타낸다. 즉, 모든 유신론적·초월적 표상의 제거와 새로운 정통 개념의 형성이다. 전통적인 정통성 개념은 명백히 모든 명증성을 잃는다. … 즉, 군주정적인 정통성 개념을 대신해, 민주주의적인 그것이 등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결정주의 사상의 가장 위대한 대표자의 한 명이자 훌륭한 급진성을 나타내고, 모든 정치의 핵심이 형이상학적이라는 것을 의식했던 가톨릭계 국가철학자인 도노소 코르테스가 1848년의 혁명을 보고, 왕권주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하는 인식에 도달했던 것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의의를 지닌 사건인 것이다. 이제 왕이 존재하기 않기 때문에, 왕권주의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또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정통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이념사적으로 생각해 볼 때 19세기 국가론의 전개는 두 가지 특징적 요소를 보여 준다. 즉 한편에서는 모든 유신론적이고 초월적인 표상이 제거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정통성 개념이 형성되는 것이다. 전통적인 정통성 개념은 명백히 모든 명증성을 상실한다. … 즉 군주제적인 정통성 관념을 대신하여 민주주의적인 정통성 관념이 등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후안 도노소 코르테스가 1848년 혁명을 보고 왕정주의의 시대는 지나갔다는 인식에 다다른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의미를 가진 사건이었다. 그는 결단주의 사상의 가장 위대한 대표자 중 한 사람이가 격렬한 급진성을 내보이며 모든 정치의 핵심이 형이상학적인 것임을 의식했던 가톨릭 계열의 국가철학자였다. 더 이상 왕이 존재하지 않기에 왕정주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또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정통성도 존재하지 않는다(71-72쪽).]


코르테스는 항상 어떤 형태로든 ‘정통성 Legitimität’을 필요로 하는 ‘정치’의 본질이 형이상학적인 것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1848년의 2월혁명에서, 왕권을 지지했던, 기존의 의미에서의 ‘정통성’은 이제 소멸됐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프랑스에 시작된 2월혁명은 독일연방들, 헝가리나 체코 등 동유럽지역을 영유했던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폴란드, 덴마크 등 유럽 국가들로 확산됐습니다. 파리에서는 입헌 군주제를 대신해 공화제가 성립했으며, 오스트리아에서는 메테르니히 체제가 붕괴합니다. 『공산당 선언』이 런던에서 간행된 것도 이 해의 2월입니다.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민주주의자’라면, 새로운 ‘정통성’을 ‘민중’에 요구하는 것입니다만, 가톨릭계의 보수주의자인 코르테스는 당연히 그런 발성은 하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코르테스에게 남는 길은 단 하나, 즉 독재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는 홉스도 또한 결정주의적 사상을, 마찬가지로 — 다만 수학적 상대주의를 곁들여 — 추구함으로써 도달한 결론이었다. ‘진리가 아니라 권위가 법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 결과 코르테스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 즉 독재밖에 없었다. 수학적 상대주의가 섞여들어 있기는 하지만, 홉스의 학설이 결단주의적 사고를 밀고 나간 끝에 도달한 결론도 마찬가지였다. 즉 진리가 아니라 권위가 법률을 만든다는 것이다(72쪽).]


왕권의 정통성이 상실된 것이 어떻게 ‘독재’로 이어지는가, 얘기가 조금 튀는 듯한 느낌이 있습니다만, 다음과 같이 보충해서 생각하면 됩니다. 왕위가 역대의 왕에게서 왕으로 자연스럽게 계승되는 동안에는, 정통성의 문제는 표면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 왕의 권력의 근거가 의심되고, 왕권에 신의 이름으로 승인을 부여한 교회의 권위까지 의심받게 되면, ‘정통성’을 조달할 수 없게 됩니다. ‘민중’을 새로운 «정통성»의 원천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면, 왕이나 교회의 정통성의 근원에 위치하는 ‘신’의 권위를 직접 끄집어낼 수 없습니다. 기존의 정통성의 계보가 끊겨버리는 이상, “이것이야말로 신의 의지이다”고 정통적인 입장에서 주장할 수 있는 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마치 신 자신이 기적이라는 형태[形]로 세계에 직접 개입하듯이, 이것이야말로 ‘신의 의지이다’고 결정하고, 새로운 정통성, 그것에 기초한 질서를, 스스로 만들어내는 존재, 이른바 신을 대리하는 존재가 필요해집니다. 그것이 ‘독재자’입니다.
‘독재자’는 스스로의 ‘권위’로 법을 만드는 것입니다만, 정통성의 계보는 끊어져 있으며, 민중의 의지에 의거할 수 없다고 한다면, 스스로 신의 대리로서의 권위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나키즘과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슈미트는 코르테스의 이런 급진성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68頁의 끝부분에서는 코르테스가 중세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이나, 19세기의 수학적 자연과학주의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일단 단정하고 있습니다만, 그런 낡은 사람들이야말로 급진적인 발상을 할 수 있다고 슈미트는 시사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제4장 「반혁명의 국가철학에 관해서」는 부제로부터 알 수 있듯이, 드 메스트르, 보날, 코르테스의 세 명의 국가철학이 다시 정리되어 논의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공통되는 사고방식은, 혁명에 의해 정치에 있어서의 정통성이 상실되고 더 이상 전통적인 방식으로 정통성을 확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한 다음, 그래도 여전히 민주화에 수반되는 아나키 ― 그들은 민주화가 아나키를 초래하다고 생각합니다 ― 를 받아들일 수 없으며, 결단주의에 의해 새로운 정통성, 권위를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서두의 69頁에서 『정치적 낭만주의』의 논의를 반복하는 꼴로, 그들과 ‘정치적 낭만주의자’ 사이의 차이가 확인되고 있네요. 프리드리히 슐레겔과 아담 뮐러는 낭만주의적인 포에지[시학]의 현현으로서의 ‘무한의 대화’를 찬양합니다만, 드 메스트르 등은 부르주아적인 수다 떨기 = 민주주의를 전혀 신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73頁부터 75頁에 걸쳐, 코르테스의 독재론의 배경에는 그의 인간관이 있었다는 논의가 전개되고 있네요. 그는 원죄를 짊어지고 있기에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가톨릭적 사고방식을 상당히 과격화된 형태로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75頁을 보시죠.

무엇보다 그가 인간의 천성의 극악성과 저속성에 관해 말한 것은 지금까지 절대주의적 국가철학이 엄격한 지배의 근거 부여를 위해 끄집어내졌던 그 어떤 논의보다도 더욱 무섭다. … 그의 인간 멸시는 이제 멈출 줄 모른다. 인간의 맹목적인 오성, 그 박약한 의지, 그 육욕의 우스꽝스러운 약동은 코르테스의 눈에는 너무도 비참하게 비치거나, 이 생물의 저열함의 전모를 표현하려면 모든 인간의 언어의 그 어떤 어휘를 가지고도 모자라다. 만일 신이 인간으로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면 ― ‘내 발이 깔아뭉개고 있는 도마뱀도, 인간만큼 경멸의 대상이 아닌 것을.’ … 그의 역사철학에 따르면, 악의 승리는 자명하며 자연적이며, 다만 신의 기적만이 그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로부터 받은 인상을 대상화한 그의 비유는 공포와 경탄으로 넘쳐난다.


[지금까지 절대주의적 국가철학이 엄격한 지배를 근거 짓기 위해 원용한 그 어떤 논의도 인간 본성의 극악성과 저속성에 대한 코르테스의 비판보다 공포스러울 수 없다. … 그의 인간 멸시는 끝 간 데를 모른다. 인간의 맹목적 오성, 연약한 의지, 육체적 욕구의 천박한 분출 등은 코르테스가 보기에 매우 처참한 것이었고, 이 창조물이 얼마나 저열한지를 철저히 그려내기 위해서는 인간 언어의 모든 어휘로도 모자랐다. 신이 인간이 되지 않았더라면 ― ‘내가 짓밟는 도마뱀도 인간만큼은 멸시의 대상이 아니었을 텐데.’ … 그의 역사철학에서 악의 승리는 명백하고 자연적인 것으로, 단지 신의 기적만이 그것을 막는다. 인류사에 대한 그의 인상이 표현된 비유는 공포와 전율로 가득 차 있다(79-81쪽).]


“만약 신이 인간으로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라는 곳은, 신의 아들이자 신의 세 번째 페르소나의 하나인 예수가 인간이 됐다는 얘기입니다. 코르테스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악이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인간의 역사는 점점 나쁜 족으로 흘러간다는 것이네요. 점점 나빠지고 혁명이 일어나기에, ‘기적’에 상당하는 ‘독재’가 필요해지는 겁니다. 비열한 인간의 상당수는 신의 뜻을 알지 못하기에, 좋든 나쁘든 신의 의지를 실현하는 ‘독재’가 필요해지는 것입니다. 77頁에서 또 다시 흥미로운 것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전형적인 것은 오늘날 가톨릭과 무신론적 사회주의 사이에서 피어나고 있는 피 비린내 나는 결전이라는 또 하나의 비유이다.


[그러나 인류사에 대한 전형적인 비유는 오늘날 가톨릭과 무신론적 사회주의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피비린내 나는 결전에서 찾을 수 있다(81쪽).]


코르테스는 무신론자와의 싸움을 하르마게돈(Harmagedōn, ‘아마게돈’) 같은 이미지로 파악했던 거죠. 그 싸움에서 이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전형적인 이항대립 사고를 하고 있는 코르테스에게서 싸우지 않고 대화를 하려 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어처구니없는 것입니다[터무니없는 것입니다]. 그가 부르주아지를 ‘논의하는 계급 eine diskutierende Klasse = una clasa discutidora’라고 정의했다는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군요. 그에게서 부르주아지는 ‘결단’을 회피하고 더 이상 진척이 이뤄지지 않는 논의를 끝없이 계속하고 있습니다. 신과 군주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을 무력하게 머물게 하려 들며,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면서 선거권을 유산 계급에 한정하려는 부르주아지의 태도는 어중간하고, 속수무책인 것입니다.
82頁을 보십시오.

… 자유주의라는 것은 정치적 문제 하나하나를 모두 토론하고, 교섭재료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 진리도 토론으로 해소해버리자고 한다. 그 본질은 교섭이며, 결정적인 대결을, 피가 흐르는 결전을, 뭐랄까 의회의 토론으로 변용시키고, 영원한 토론에 의해 영원히 정체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냐는 기대를 품고 기다리는 불철저성인 것이다.
토론의 반대 극은 독재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극단적인 사례를 상정하고, 최후의 심판을 기대한다는 것이 코르테스 가튼 정신에서의 결정주의에는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코르테스는 한편으로 자유주의자를 경멸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무정부주의적 사회주의는 불구대천의 적으로서 있지만 이것을 존경하고 그것에 악마적인 위대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프루동을 코르테스는 마성(魔性)으로 간주한다. 정작 프루동은 이것을 일소에 부치고, 종교재판에 걸면서, 마치 화형의 장작더미 위에서 불에 태워진 기분이라면서, 어서 빨리 불을 붙여라!고 코르테스는 외치고 있다. (한 혁명가의 고백, 신판에서 추가)


[… 또한 자유주의는 모든 정치 문제를 일일이 토론하여 협상 자료로 삼는 것과 마찬가지로 형이상학적 진리까지도 토론으로 해소하려 한다. 그 본질은 다음과 같은 기대를 갖고 하는 협상이며 어정쩡함이다. 즉 결정적 대결, 피비린내 나는 결전을 의회의 토론으로 바꿀 수 있고 영원한 대화를 통해 영원히 유보상태에 머물 수 있다는 기대 말이다. 자유주의는 이런 기대를 하면서 수다를 늘어놓는 셈이다.
이런 토의의 대극점에는 독재가 있다. 코르테스의 정신에는 어떤 경우라도 극단적 사례를 상정하고 최후의 심판을 기다리는 결단주의적 태도가 깃들어 있다. 그래서 코르테스는 한편에서 자유주의자를 경멸했고, 다른 한편에서 무신론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사회주의를 불구대천의 적으로 삼음과 동시에 이를 존경하여 그것의 악마적 위대함을 인정했던 것이다. 코르테스는 프루동에게서 하나의 악마를 본다. 프루동은 이를 조소하면서 “지금 이단심문의 화형대 위에 내던져져 도노소가 ‘점화’라고 명령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86-87쪽).]


‘최후의 심판’이란 말할 것도 없이 역사의 최후에 모든 사람이 부활하고 신에 의한 심판을 받는다는 그리스도교 교리의 ‘최후의 심판’입니다만, 여기서는 싸움의 결말을 낸다고 하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한다고 생각합니다. 최종 결전을 원하고, 그것을 향해 ‘결단’하는 것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코르테스에게 쓸데없이 수다를 떠는 자유주의자 = 부르주아지보다도 정면에서 싸움을 도전하는 프루동처럼 무신론자·무정부주의자를 ‘적’(=악마)으로서 인정한 것이죠.
한 혁명가의 고백(1849, 51)란 프루동이 1848년의 혁명 당시에 자신의 행동심이나 심정을 회상한 것입니다. 사크힌샤(作品社)로부터 혁명가의 고백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나왔습니다. ‘회상’이나 ‘기억’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만, 일부러 ‘고백 confession’이라는 말을 제목으로 사용한 시점에서, 그리스도교를 의식하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고백’이라는 제목의 책으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 Confessiones』(1764)가 유명하죠. 아우구스티누스-루소-프루동으로 나란히 두면, 의미심장한 느낌이 듭니다.
「신판에서의 추가」란 51년에 나온 3판의 12장 “7월 31일, 사회주의의 새로운 표현”의 어떤 대목에서 프루동 자신이 붙인 주석입니다. 2월 혁명 직후의 정치적 과정에서 노동자에 의한 봉기가 일어나고, 사회주의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고, 그 지도자인 프루동이 여러 사람들의 비난의 표적이 됐다고 기술되어 있는 대목입니다. 그 대목에서 프루동은 원래 사탄에 시달리고, 구약성서의 의인 욥과 같은 심경이 됐다는 취지가 적혀 있습니다. 욥의 신앙이 진정한 것이라는 점을 밝히기 위해, 신이 사탄더러 욥에게 고난을 주는 것을 허용한다는 얘기입니다.
원래 그리스도교 신앙의 시련의 패러디 같은 기술을 하고 있는 대목이었습니다만, 코르테스가 가톨릭시즘, 자유주의, 사회주의에 관한 시론에서 자신을 악마(démon)에 홀린 자, 거의 악마 자체로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에 대해 도발적인 코멘트를 덧붙인 것입니다. 해당 대목을 인용한 후, 아래에서처럼 코멘트하고 있습니다. 사크힌샤(作品社)의 번역(228-29頁)에서 인용해보죠.

우리 독자는 내 책을 읽어도 지옥의 냄새를 맡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안심하는 게 좋다. 도노소 코르테스 씨가 나에 대해 말했던 것은 한 마디 한 마디, 예루살렘의 ‘예수회파’들이 거의 1900년 전에 예수에 관해 말했던 것 ― ‘그의 몸에는 악마가 있다’이다. 유대인 이후에는 이교도들이 똑같은 논의를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을 학대하기 위해 이용하고, 교회는 이단자와 마녀를 화형에 처하기 위해 사용했다. 도노소 코르테스 씨는 보아하니 다른 종교에 관해서도 그의 나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으며, 게으르지 않게 이런 본보기를 익혔다. 그가 그인 한, 그는 노란 지옥 옷으로 나를 덮고, 다음의 화형에서 사형 집행인에게 외칠 것이다, ‘불을 붙여라!’라고.

그는 젊었을 때 성경 인쇄공 일을 하는 동안, 상당히 광범위한 성경 지식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인용하고, 신학을 내세우고, 자신을 공격하는 코르테스의 태도를 풍자했던 거죠. 프루동은 프루동으로, 신학적인 이항대립 도식을 의식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84頁에서는 신학에 대한 투지라는 점에서는 프루동보다는 바쿠닌이 철저하며, 지배욕이나 소유욕에서 기인하는 일체의 권력이나 권위, 가부장제 등을 해체하고, ‘자연’으로 회귀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는 얘기가 나오네요. 그리고 코르테스는 철저한 무신론이 질서를 해체하고 ‘육체 Leib’성 그 자체를 부활시키려고 하는 데 이르렀음을 간파했다고도 기술되어 있네요. 그리스도교는 ‘육체’의 유혹을 억누르고 신의 ‘혼’을 좇아 ‘정신’적으로 사는 것을 중시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하면 ‘자연’이나 ‘육체’의 찬양에 이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합니다.


반신학적 독재론

이 논문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부분을 읽어보죠. 86頁부터 87頁에 걸친 대목을 보십시오.

도노소는 최후의 싸움의 때가 왔음을 확신했던 것이다. 과격한 악에 직면해서는 독재 이외에는 없다. 그리고 계승이라는 정통성의 이상은 이런 때에 있어서는 공허한 자기 정당화가 된다. 이리하여 공허와 무질서라는 반대쪽은 절대적인 명확성을 나타내고 서로 대립하며, 앞서 말한 명료한 반정립을 형성했던 것이다. 그 어떤 통치도 필연적으로 절대적이라고 드 메스트르가 말한 것에 대해, 무정부주의자도 그것과 한 구절 한 글자도 틀리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며, 후자는 그저 선량한 인간과 부패한 통치라는 스스로의 공준을 채용하여 실제적으로는 정반대의 결론, 즉 그 어떤 통치도 독재라고 하는 바로 그 때문에, 그 어떤 통치도 타도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다. …물론 이 과격한 반정립은 무정부주의자에 대해서, 결정에 반대를 분명히 한 자기 결정을 하도록 강요하는 것이며, 19세기 최대의 무정부주의자 바쿠닌에 있어서는, 그가 이론에서는 반-신학의 신학자가, 실행 면에서는 반-독재의 독재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기묘한 역설을 산출하고 있는 것이다.


[도노소는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음을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즉 근본적 악에는 독재만이 요청될 뿐, 왕조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생각은 이 경우 고집스러운 공염불임을 도노소는 알았던 셈이다. 여기서 권위와 무정부주의는 더할 나위 없이 뚜렷하게 상호대립하게 되며, 위에서 말한 뚜렷한 반정립이 성립한다. 드 메스트르가 모든 통치가 필연적으로 절대적이라고 말할 때, 무정부주의자도 똑같은 말을 할 것이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자는 인간은 선하고 통치는 썩었다는 스스로의 공리에 힘입어 다음과 같은 정반대의 실제적 결론을 내놓는다. 그것은 모든 통치란 독재이기에 모든 통치는 타도되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 물론 이 과격한 반대명제가 그 자체로 결단에 반대하도록 결정하라고 무정부주의자에게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무정부주의자인 바쿠닌은 다음과 같은 기묘한 역설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그가 이론적으로는 반신학적 신학자이며, 실천적으로는 반독재적 독재자일 수밖에 없었다는 역설이다(89-90쪽).]


극우와 극좌가 점차 닮아간다는 얘기는 자주 듣습니다만, 슈미트는 여기서 독재를 둘러싼 이항대립의 구도가 생기는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드 메스트르와 코르테스는 인간은 죄인이고, 점점 타락하기 때문에 정통성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절대적 통치의 필요성, 필연성을 주장한다. 반면 프루동과 바쿠닌 같은 무정부주의자는 인간은 본래 선하지만, 독재적 통치 형태가 인간을 망가뜨리고 있다는 전제에서, 모든 통치에 반대합니다. — 오른쪽이 성악설적이고 왼쪽이 성선설적이라는 것은 지금도 자주 있는 구도입니다. 단, 왼쪽은 통치가 나쁘다고 말해도, 내버려 뒀다면, 나쁜 독재 통치가 제멋대로 날뛸 뿐이기에, 그것에 대항하려 한다면, 그것을 타도하기 위한 강력한 독재를 수립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상대방이 강렬한 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에, 자신들은 그것에 대항하는 반신학적 인간 중심의 세계관에서 사상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해서, 무신론자가 반신학의 «신학자»가, 반독재의 독재자가 된다. 그것에 대응하여 신학·독재 진영은 더욱 극단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런 정립(테제) 대 반정립(안티테제)라는 도식의 변증법적인 무대장치에 의해 점점 신학-독재적인 구조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분명히 적대하는 좌익은 고마운 것입니다. 슈미트는 그런 맥락에서 맑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도, 어떤 의미 평가합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반신학적 독재론이 대두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신학의 증명이기조차 하는 것입니다. 이 논의가 다음번에 읽는 『정치적인 개념』에서의 ‘친구/적’의 대립도식으로 발전되는 것입니다.

 

 


 


 

 

질의응답 


 

Q : ‘법’ 개념의 근본적 의미에 객관적 대상의 기술이라는 요소와 규범적 요소의 이중성이 숨어 있느냐에 대한 질문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고 말하면, 칼 햄펠(Carl Gustav Hempel, 1905-97)이라는 논리실증주의계의 철학자가 케플러(1571-1630)의 행성운동법칙을 비유하여 내서, “자연법칙이란 예를 들어 행성에 이렇게 움직여야 한다고 지시하고 법칙이 행성을 움직이게 하는 게 아니라 행성이 그렇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기술한 것이 법칙이다. 하지만 우리는 왜 법칙이 행성을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가”라고 말했습니다. 그 행성을 움직이는 ‘법칙’으로부터 규범적인 요소가 나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연과학은 신을 퇴출시키는 과정입니다만, 과학이 자연 법칙으로서 상정하는 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신의 결정 혹은 명령을 독파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연법칙과 규범법칙을 동일시한다고 슈미트는 켈젠을 비판하는 것입니다만, 자연법칙 그 자체 속에서도 이중성, 뭔가를 기술하고 있는 데 불과한 것이라는 수준과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명령하는 뉘앙스를 포함한 규범적 요소의 이중성이 있는 게 아닌가. 그 언저리에 관심이 있습니다. 제 이해가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만, 맑스가 역사법칙을 자연법칙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도 그것이 자연법칙이라면, 내버려두면 혁명은 성취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뭔가 규범적인 요소를 가져오지 못하면 운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런 것에 약간 모순을 느낍니다. 법의 경우도, 그런 이중성을 근본적으로는 지니고 있으면서 거기에 무자각적인 채로 사람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있지 않을까요.


A : 법실증주의의 원조로 여겨지는 홉스는 법의 본질을 주권자의 명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벤담의 영향을 받은 오스틴도 주권자 명령설을 취했습니다. 이로부터 슈미트는, ‘명령’하는 인격적 주체의 결정을 중시하는 ‘결정주의’ 이론을 끄집어냈습니다. 반면 켈젠은 ‘규범’으로서의 ‘법’을 자연과학의 ‘법칙’과 똑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인격적 요소를 배제하려 한 거예요. 켈젠이 일견 이성적으로 보이지만, 법률을 해석하려 든다면 아무래도 입법자가 어떻게 생각했는가, 인격적인 것을 상정하면서 타당한 입법 취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구석이 있습니다. 수학처럼 처음에 몇 개의 공리를 정하면, 어떤 정리가 도출될 수 있는지가 정해진다는 것이 되는 게 아닙니다. 자연과학의 법칙도 근저에서는 인격적인 것을 상정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현대의 자연과학처럼 복잡한 체계가 되어 가면, 인격적인 것의 소재를 특정하기 어렵습니다. 법학은 법을 창조한 입법자나 법을 해석하여 적용하는 재판관의 인격이 더 직접적으로 전면에 나옵니다. 슈미트가 맑스주의를 어떤 의미에서 [높이] 평가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라는 형태로, ‘결정’하는 주체를 문제 삼았기 때문입니다. 슈미트는 켈젠이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한 ‘규범’의 그늘에 숨어 있는 인격자의 명령이라는 요소를 끄집어내려 했다고 말할 수 있죠.


Q : 55頁에 “자연법칙과 규범법칙을 동일화하는 형이상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형이상학은 오로지 자연과학적 사고에서 비롯되며, 모든 ‘자의’의 폐기에 기초하여, 인간 정신의 영역으로부터 그 어떤 예외도 배제하려 한다[자연법칙과 규범법칙을 동일시하는 형이상학이 가로놓여 있으니 말이다. 이 형이상학은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으로부터 비롯되어 모든 ‘자의’를 폐기함으로써 인간 정신의 영역으로부터 모든 예외를 배제하고자 한다(60쪽)]”는 표현이 있네요. 내가 보기에, 오히려 이런 자연과학적 사고를 부정하는 쪽이 형이상학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말투라면, 형이상학의 자의성을 긍정하는 듯이 보입니다만, 이건 어떨까요. 자연과학에는 자연법칙과 규범법칙을 동일화한다는 사고방식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A : 슈미트는 별로 자연과학 자체의 본질을 논하는 게 아니며, ‘자연과학적 사고’라고 말합니다.


Q : 그곳이 특색인 거죠.


A : 켈젠 같은 법실증주의가 본 ‘자연과학적 사고’입니다.


Q : 자연과학에서는 새로운 이론이 나오고, 그 대전제가 바뀌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과 같은 절대적인 것을 상정하는 형이상학이라면 신의 의지가 절대가 되기에, 변할 수가 없죠.


A : ‘형이상학’의 의미가 다릅니다. 슈미트가 말하는 형이상학이란 현대 사상 등에서 형이상학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언어에 의해 소통할 때 암묵적으로 상정하고 있는, 혹은 상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투어입니다. 세계의 이해 방식에 대한 최저한의 공통 이해가 없으면 이야기가 통하지 않습니다. 사회가 있는 한 반드시 형이상학은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의 형이상학에 신이 나온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자연과학도, 이야기를 통하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공통 전제는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신을 핵으로 한 형이상학적 세계관이라도 ‘신’의 이미지는 시대와 지역마다 다릅니다. ‘신’의 이미지가 바뀌면 ‘형이상학’도 바뀝니다. 그것이 ‘정치’의 기본구조에 반영되면, 정치신학이 생겨납니다.


Q : 슈미트가 말하는 ‘신’, 가톨릭적인 신의 이미지를 공유하지 않은 나라나 지역에서는 어떻게 되나요?


A : 슈미트는 서구의 그리스도교 국가 이외의 나라는 염두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원래 그는 ‘세계’가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느냐라는 차원의 문제를 논하고 있는 게 아니라, 법과 정치의 기초가 되는 ‘세계관’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문제 삼고 있는 것입니다. 법이나 정치가 다르면 ‘세계관’, 그 기초에 있는 형이상학이 다른 것은 당연합니다.


Q : 자연과학도, 말씀하신 의미에서 ‘형이상학적 전제’를 두고 있습니다. 패러다임과 불리고 있죠. 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어느 지역이나 문화에 상대적인 것은 아니지요. 문화마다 신관(神觀)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해도, 자연과학적 사고를 비판하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A : 가장 중요한 데도 오해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슈미트는 별로 ‘자연과학’ 자체가 이러쿵저러쿵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독일과 프랑스의 거물의 철학자 가운데 자연과학에 대한 편견을 품고 있어서 자연과학의 종교성을 폭로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만, 슈미트는 그런 얘기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저도 그런 차원의 이야기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습니다. 철학자 공통의 편견이 있다는 전제에서 이런 식의 논의에 일일이 흠을 잡으려 하면, 논의의 요점을 놓쳐버립니다.


Q : 자연과학주의와 인격에 근거한 결정을 대비하셨는데, 제가 보기에는 모순되지 않습니다.


A : 자연과학의 최초의 성립까지도 생각한다면, 확실히 모순되지 않습니다. 결정하지 않으면 공리를 고착시키고 논리를 전개할 수 없으니까요. 다만 보통의 과학의 시도, 예를 들어 실험이라면 누가 해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전제로 하죠. 처음에 실험 방식을 정할 때는 누군가의 결정이라는 요소가 작동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후에는 인격적 결정이라는 요인을 배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법적 결정처럼 ‘누가~’라는 것이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Q : 질서에 내재하는 법칙성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고, 정치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상태에서 법치주의로 오케이(OK)인 거네요. 법치주의의 경우는 누가 결정하고 있는지 별로 생각하지 않고 나아간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예외상황’이 생기고 신의 기적에 상당하는 ‘결단’이 필요해진다는 것일까요?


A : 그렇습니다. 사실, 법관이 판결을 내릴 때도 “이 사례에는 ○○라는 법규범을 적용한다”는 ‘결정’이 이뤄지며,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여러 사회적 규칙을 해석할 때도 ‘결정’하고 있는 데도 결정에 있어서 별로 마찰이 생기지 않으니까 그다지 의식되지 않습니다.


Q : 법의 존재 자체에 대해 ‘결단’이 이루어질 뿐 아니라 법을 적용하거나 적용시키기도 하는 세세한 장면에서도 ‘결단’이 이뤄진다는 말인가요?


A : 그렇습니다. 작은(mini) 예외상황은 항상 생기고 있습니다. 자세히 관찰하면 결단을 필요로 하는 예외상황은 여러 장면에서 재현되고 있다. 다만, 법을 규정하고 있는 근원적인 ‘결단’의 순간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다.


Q : 사회적 위기상태가 되어, ‘정상=규범성’을 새롭게 규정하는 ‘결단’이 필요해진다는 말씀이시죠?


A : 그래요, 평소에는 겉으로 나오지 않는 ‘주권’이 전면에 나와서 법의 근원을 지금 다시 한 번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신이 직접 그 힘을 보여주고, 사람들을 올바른, 본래의 법으로 이끌듯이.


Q : 요술을 보여주고 있다는 인상이 있습니다. ‘형식’ 얘기는 바로 그렇네요. <Form>의 의미를 분석해 보여주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쪽을 끌어 올린다. 그리고 법학과 신학의 공통성을 지적하고 신의 ‘기적’까지도 갖고 온다. 법학은 과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A : 분명히 요술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속임수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말의 의미를 파고들어 사람들이 그때까지 애매하게 이해하고 있던 것을 밝히려는 것이니까. 하이데거나 데리다도 이런 요술을 자주 사용합니다. 슈미트는 법학을 실증주의적 의미에서의 ‘과학’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Q : 법실증주의자는 실증주의적이지도, 자연과학적이지도 않는다고 이해해도 될까요?


A :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슈미트더러 말하게 할 것도 없이, ‘법’이란 실제로 운용되는 데 있어서 항상 ‘결정’을 수반합니다. 권위가 있는 사람의 결정에 의해 객관적으로 타당하게 된다는 측면이 있다. 실증주의가 인간의 주관에 의해 전혀 좌우되지 않는 증거에 의해 보편적 법칙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것이라면, 법에 대한 연구가 실증주의적으로 될 수가 없다. 무리하게 자연과학 수준의 실증성을 법학에 들여오려 한 것이 켈젠의 시도였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전후 주로 영미권에서 계속 발전했던 ‘법실증주의’에서는 ‘실증성’이 강조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법실증주의’의 유효성을 둘러싼 현대적 논의에서는 ‘법’을 가치관 없이 기술할 수 있는지 여부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습니다.


Q : 진정한 실증주의적 과학자라면 자신들이 의거하고 있는 근원적인 가설을 반증하는 사례가 발견되면 가설을 바꿉니다.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것에 비해서 법실증주의자나 사회과학 영역에서의 과학주의의 사람들은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추상적인 법칙의 존재에 집착하는 것 같은데요.


A : 다분히 루만(1927-98)의 시스템 이론 등을 끊임없이 인용하는 듯한 유형의 이론사회학계의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에는 과학적인 뒷받침이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것은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라든가 “그것은 ○○ 십년 전에 이미 반증된 이론입니다. 그것을 아직도 계속 말하는 것은 꽤 뒤쳐져 있다는 증거 …”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 말이군요(웃음). 당연히 사회과학에서도 법학에서도 반증된 가설은 버리고 새로운 가설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 사회과학에서는 무엇을 가지고 반증이라는 것인지 애매합니다. 지금 말한 의미에서 ‘실증주의’ 같은 구상을 취한 사람은 당연히 어떤 보편적 법칙을 가정합니다만, 그 법칙이 너무나 추상적이고 현실에 어떻게 적용하면 좋을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법이 자기 완결적인 시스템을 형성하다거나 A와 B사이에서 협력 게임이 성립되어 있다거나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데이터의 해석에 따라 뭐든 말할 수 있습니다. 뭐든 말할 수 있는 추상적 이론을 다루는 탓에, 묘하게 우겨대는 사람이 있다. 저널리즘적으로 튀어 보이는 사람들 중에 이런 유형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튀어 보이는 탓에 사회과학에 사이비 실증주의가 만연해 있다고 생각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만, 그런 것은 극소수입니다. 연예인이 아니니까, 대외적으로 튀어 보이는 사람을 대표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웃음). TV에 나와,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가벼운 놀이로 논평하는 정신의학자나 뇌과학자를 그 세계의 대표로 취급한다면, 그 업계의 사람은 불쾌합니다(웃음). 그리고 그렇게 유명인이 아니더라도 엘리트 의식이 강한 사람이 실증주의적 느낌의 얘기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그것도 극히 일부입니다. 싫어하는 학자를 만나면 그 분야의 사람이 모두 그런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만, 그곳은 바로 «객관적»인 증거에 의거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웃음).
     옆길로 샜다는 느낌입니다만, 켈젠과 슈미트의 논의는 그런 낮은 수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논쟁하던 시대는 사회과학이나 법학에서의 ‘실증성’이나 ‘객관성’이란 무엇인가, 정말로 논쟁된 시대입니다. 켈젠과 슈미트의 논의에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독단적인 상투어로만 생각될 수밖에 없는 것이 많이 포함되어 있지만 확신의 맞부딪침을 제대로 통과하지 않으면, 학문은 발전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